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태평양전쟁: 펠렐리우-오키나와 전투 참전기 (유진 슬레지 지음, 이경식 옮김)

얼마전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간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부 구매했습니다. 몇년전 HBO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 퍼시픽을 아주 감명깊게 봐서 유진 슬레지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도 있던 차에 그의 회고록이 한국어로 나왔다니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책은 미해병대의 말단 보병의 시각으로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말단 사병의 시각에서 본 회고록은 제법 많고 국내에도 이미『잊혀진 병사』를 비롯해 몇권이 번역되어 소개됐습니다.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그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 약력에도 잘 나와있듯 그는 전쟁 초 교육 수준이 높다는 이유에서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되기도 했고 전후에는 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또한 전장에서도 기록을 꾸준히 남기고 비교적 일찍 회고록 저술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했던 덕분에 내용이 매우 풍부하고 구체적입니다. 유명한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는 저자가 거의 대부분 오래된 기억에 의존해 집필을 했기 때문에 부정확한 내용이 많아 나중에 진실성 여부까지 논란이 될 정도였습니다. 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내용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줍니다. 또한 그의 지적 수준이 높기 때문에 사건의 흐름도 시간순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회고록들이 혼란스러운 서술을 보여주는 점을 생각하면 유진 슬레지의 회고록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전쟁 중에 남긴 기록과 그의 명료한 지적 능력은 그가 전투에서 겪은 여러 사실들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말단 보병의 일상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태평양 전쟁의 지상전을 미시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여러 인물들을 직설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펠렐리우 전투 당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잔혹행위를 저지르는 동료 해병대원들의 행동에 경악하면서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전리품을 얻기 위해 일본군 시체에서 금이빨을 뽑으려 들었던 순간을 회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이야기 합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고참 병사가 어느 순간 PTSD에 시달리며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대한 묘사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큰 틀에서 국가에 헌신한 동료 해병대원들의 명예를 기리고자 하지만 단순한 무용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전쟁의 추악한 면, 특히 동료 해병대원들에 의한 행위들을 이야기 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영어판을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에 대해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문장이 좋고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몇몇 용어가 어색하게 번역된 느낌이 드는데 영어판을 확인해 보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 어렵습니다. 책의 내용도 훌륭하고 번역도 잘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Taking Nazi Technology - Douglas M. O'reagan 저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력은 전후 수십년에 걸쳐 신비화 되면서 대중문화의 단골소재가 되었습니다. 최근까지도 B급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나치의 비밀병기라는 클리셰는 지겹기까지 할 정도죠. 그렇다면 그 실체는 어떠했을까요? 더글러스 오레이건(Douglas M. O'reagan)의 Taking Nazi Technology: Allied Exploitation of German Science after the Second World War(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9)는 제2차세계대전 말기와 직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독일의 과학기술력을 활용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이것이 냉전에 끼친 영향을 다루는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미국에서는 전반적으로 독일 과학기술력을 자국 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합동참모본부 예하에 있는 합동정보위원회(JIC, Joint Intelligence Committee), 주독일미군정 그리고 미국상부부 등이 독일의 과학기술, 산업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V2 미사일과 제트기로 대표되는 항공 기술은  독일이 우위에 있어 미국이 습득해야 할 기술로 평가되었습니다. 미국 군부는 항공분야의 기술자와 설비를 철저하게 쓸어갔습니다. 예를들어 미국 육군항공대는 독일 항공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풍동시험시설이 미국 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이를 통째로 반출했습니다. 군부 뿐만 아니라 보잉과 같은 미국 회사들도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이외에도 마그네틱 테이프 같이 전후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산업기술도 독일에서 만들어져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대표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계에 대한 조사결과 독일의 과학기술 수준은 전쟁 이전에 미국 정부와 산업계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항공 기술과 같은 일부 분야를 제외한 분야는 미국이 우월하거나, 독일의 기술 발전이 미국에 불필요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자의 경우 석탄에 기반한 독일의 중화학 공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독일은 석탄을 활용한 기술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미국의 화학공업은 석유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기술은 유용하지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석탄을 활용한 인조 고무 생산은 독일 화학 공업의 대표적인 성과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후 이를 조사한 뒤 독일의 인조 고무 생산 기술은 미국 보다 뒤떨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독일이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은 항공우주기술에서 조차 대량생산에 필요한 금속가공 등의 몇몇 공정은 미국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미국에 비해 산업력과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던 영국과 프랑스는 사정이 조금 달랐습니다. 이미 전쟁 이전 부터 산업 경쟁력 저하로 고심하던 영국은 독일의 기술을 활용해 산업 경쟁력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독일의 군사기술 중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과학계와 산업계의 평시 이익에 활용할 수 있는"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945년 10월에 보도된 한 언론기사는 독일에서 획득한 과학기술 정보의 가치가 1억 파운드에 달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영국에서도 독일의 과학 기술 수준이 전쟁 이전에 기대하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에 비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 프랑스 또한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 자국에게 가치가 없는 독일의 기술이라도 전후 잠재적인 경쟁국이 습득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지적합니다. 영국은 미국과 비교적 밀접한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나 소련에 비하면 제약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소련은 영국과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최대한 포섭하려 했으나 미국과 영국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전후 배상 차원에서 독일의 산업시설을 철저히 약탈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프랑스가 포섭할 수 있었던 독일 과학기술자는 숫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주로 미국에 포섭된 주류 과학기술자들과 지적 네트워크가 단절되었습니다. 이때문에 프랑스 정부와 군에서는 지적 네트워크에서 고립된 독일 기술진과 연구시설들을 프랑스로 이전하는 것이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그 대안으로 독일의 연구소등에 프랑스 유학생을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는 동시에 감시역을 맏기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국력의 한계가 있었던 프랑스는 '승전국' 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과학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어 미국이나 소련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저자 오레이건은 프랑스가 독일의 과학기술을 약탈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독일과 협력하는 노선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

소련은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과학기술자들을 포섭하여 기술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독일로 돌아갔을 때 다시 군사분야의 연구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지적으로 도태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의 과학기술과 산업을 약탈하는데 있어 프랑스와 동일한 정책을 폈으나 훨씬 효율적이고 큰 규모로 수행했습니다. 저자는 소련 정부가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과 노하우를 흡수하는 동시에 이들이 더 이상의 연구를 진행할 수 없도록 방해함으로서 뒤쳐지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저자는 독일 과학기술자들의 지식이 소련의 기술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은 인정하지만 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경계합니다.

다음으로는 전후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기술의 부흥에 끼친 역할입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더 이상 침략정책을 취하지 않는 평화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문에 제2차대전 직후에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와 달리 독일 과학계를 세계에서 고립시키는 정책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등의 서방 연합국은 독일 과학계를 서방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했습니다. 연합국이 독일의 과학 및 산업 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패전국인 독일 과학자들은 승전국의 대학 및 연구소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화학 산업계는 미국과의 교류를 통해 뒤쳐져 있었던 석유 기반 화학 분야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소련을 자국이 주도하는 국제적인 과학 네트워크에서 축출합니다. 미국은 경제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과학기술과 산업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재편했습니다. 

이 연구는 대중적으로 과대 평가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 과학 기술의 한계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일의 과학기술을 평가하고 활용하기 위해 연합국이 조직한 기구가 국제적인 과학기술 교류를 촉진하는 동시에 미국의 기술 통제 수단이 되는 측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유용한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커피 칸타타

롬멜은 1944년 1월 16일 또다시 일선 시찰에 나섰다. 가장 먼저 방문한 부대는 노르망디의 제711보병사단이었다. 사단장 요제프 라이헤르트(Josef Reichert)는 해변 및 연안 지대에 장애물을 설치하는데 있어 롬멜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었고 이미 사단 구역에 방어 시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단 포병은 적군이 해변에 상륙한 이후 포격을 가하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롬멜은 대신 적이 상륙하기 전에 타격할 수 있도록 포병 배치를 변경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이틀은 페캉(Fecamp), 볼벡(Bolbec), 생 발레리(St. Valery), 디에프(Dieppe) 일대에 배치된 제17공군야전사단을 시찰했다. 이 사단 지역에서는 방어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다. 방어 전투를 내륙에서 전개한다는 가정에 따라 일부 벙커를 폐쇄하고 방치해 놓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지휘관이 벙커를 아예 폭파해 버리고 주저항선을 내륙 안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놓았다.

디에프의 장교 식당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롬멜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진짜 커피 한 잔이 나온 것 이었다.(독일에서는 진짜 커피를 대신해 대용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대용 커피는 대개 귀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롬멜은 방어 계획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느라 커피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루게(Friedrich Ruge)* 제독은 마이제(Wilhelm Meise)** 장군이 차갑게 식어가는 롬멜의 커피를 힐끗 힐끗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루게 제독은 롬멜이 보지 않을때 롬멜의 커피 중 절반을 마이제의 커피잔에 따라 주었다. 롬멜은 설명을 마친 뒤 커피를 마시려다가 커피 절반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랐다.

Mitcham, Samuel W., Desert Fox: The Storied Military Career of Erwin Rommel (Regnery History. Kindle Edition., 2019), Kindle Locations 3661-3672.

*B집단군 해군 참모
**B집단군 공병참모장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제2차대전 말기 재만 조선인들의 일본군대 체험담

강용권이 조선족들의 증언을 엮어낸 구술자료집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을 읽다보니 제2차대전 말기 일본 관동군에 징집된 사람들의 회고담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2차대전 중반 부터 관동군에서 전투력이 있는 사단들이 태평양이나 일본 본토 등으로 차출되다 보니 1944년 이후 급히 편성된 관동군 사단들은 전투력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에 입대했던 조선족들의 증언에도 이런 실정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비매품이라 구하기가 좀 까다로운 편이지만 간혹 헌책방에 매물이 나오기는 합니다. 흥미로운 증언이 많아서 이 시기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 합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경험담 몇개를 발췌해 봅니다.


1944년 봄부터 적령 청년들을 신체검사 시킨 후 1, 2, 3기생으로 나누어 지방 훈련을 시켰다. 그중에서 1기생을 위주로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씩 정식 훈련을 받게 하였는데 나는 1945년 3월에 막석에 가서 6월에 돌아왔다. 그토록 바라지 않던 '빨간 딱지'가 나에게도 날아왔다. 1945년 8월 6일에 나는 왕청현 대흥구역에서 일본군에 나가는 열차를 탔다. 2천여명의 팔팔한 생명은 일제가 내민 제2차 세계대전의 밑천으로 충당되어 생사를 가늠 못할 운명을 지닌 채 도문, 장춘, 할빈을 거쳐 해랄까지 갔다. 그 속에는 50명 가량의 조선족 처녀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어떤 불운의 그물이 덮씌우겠는지? 
기차가 치치할을 지나 찰란툰에까지 갔을 때는 벌써 전쟁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동쪽으로 밀려오는 피난민들이 끝이 없었다. 일본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양떼를 몰고 오는 몽고족이나 아이들을 외바퀴 짐 위에 싣고 오는 한족들, 오로지 동쪽으로 동쪽으로 밀려 나왔다. 다만 우리를 태운 열차만이 대가리를 서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찰란툰역에서 떠날 줄 모른다. 폭격에 철길이 파손되어 수리하는 중이란다. 반나절이나 멈춰 섰던 열차가 떠나기 바쁘게 소련 비행기가 따라오며 폭격을 들이댔다. 그럴 때 마다 기차는 멈춰 섰고 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내려 철길 옆 풀밭에 숨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려 대피하기를 서너 번 하고서야 해랄까지 가게 되었는데 해랄역은 몽땅 내려앉았다. 해랄역과 3, 4리 떨어진 곳에 와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해랄 시가의 곳곳에 지금도 불길이 치솟았고 큰 건물로는 성한 것이 업었다. 폭격은 계속되었고 밤에도 조명탄을 걸어놓고 일본 군사들의 이동을 저지하였다. 
신병들은 각기 부대에 편입되었다. 나는 산포병 118부대에 귀속되었다. 명색은 포병부대인데 산포 한 문도 없었으며 우리에게 발급한 무기란 날창(총검) 하나에 수류탄 두개 뿐이었다. 
우리가 해랄에 도착했을 때는 전 부대가 해랄 시가의 병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는 때였다. 일본군이 병영을 떠나기 바쁘게 병영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동차도 휘발유를 치고 불을 붙였다. 소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훼손 정책의 발로이다. 모든 건물마다 불기둥이 솟았고 군수품 창고에서 탄알이 튀었다. 이는 마치 일제의 수치스런 패망을 예고하는 조잡한 울부짖음 같았다. 
일본군이 마지막 부대가 산에 채 오르기 전에 소련군 탱크 부대가 끝이 보이지 않게 밀려들었다. 그들은 산에 대고 난사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들어왔다. 해랄시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일본군은 해랄 주변 산에 파놓은 산굴과 숱한 군수품을 내버린 채 철퇴를 시작했다. 
산 아래 공로에는 소련군 탱크가 질주하고산 위에서는 일본군이 길도 없는 산림속을 뚫고 힘겹게 철퇴했다. 얼핏 보기에는 같은 방향으로 전진하는 같은 부대 같지만 실은 2차 대전의 적대국인 소련과 일본의 군대들이다. 소련 탱크 부대는 산 위의 일본군을 보면서도 '너희들은 내 입안의 사탕알이다'하는 격으로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일본군은 기실 반포위 상태에 처했고 밤에 낮을 이어 철퇴하여도 소련 탱크 부대 속도의 몇 분의 일도 안 되었다. 휴식도 없이 일주일이나 연속으로 급행군한 일본군은 대흥안령에 까지 와서 철퇴를 멈추었다. 병졸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1945년 8월 6일에 입대한 김태진의 경험담, 강용권 엮음, 『강제 징병자와 종군위안부의 증언』, 해와 달, 2000,  92~93쪽.

전쟁말기 일본군에 동원된 부실한 병역 자원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1944년부터 징병등기를 하고 지방훈련을 시작하였다. 나는 연령이 초과되어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알아본즉 중국의 민적에 원래의 나이보다 두 살 적게 적혀 있어 그만 1기생으로 그물에 걸렸다. 소학교 선생들은 지방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1944년 9월에 서란현 막석훈련소에 가서 3달간 훈련한 후 1945년 3월에 정식으로 출정의 길에 올랐다. 천교령에서 기차를 타고 목단강, 할빈, 치치할, 백성자, 우란호트를 지나 알산에 도착하여 관동군 318부대에 편입되었다. 우리의 주둔지에서 중소국경이 5km 밖에 안되니 실로 최전선 이었다. 내가 속한 8중대에는 조선 청년이 6명 밖에 없었다. 나와 남청룡은 외따로 떨어진 급수소(給水所)의 일을 보았으므로 독립성이 많았다. 진종일 기계실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심심하기만 했다. 배가 고픈 곳이 문제였다. 이곳엔 인가가 없었으므로 강냉이나 감자 같은 것을 구할 수 없기에 산열매나 풀뿌리 같은 것으로 먹이를 보충해야 했다. 
(중략) 
일제는 멸망의 벼랑 위에서 바둥거리며 최후 일전을 본토 보위전에서 벌여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속해 있던 318부대에서 지원병 360명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앓고 있는 청룡이와 갈라지게 되었다.
360명 본토지원병 중에 조선 청년이 24명이었다. 지원병들을 완전 무장하고 기차로 우란호트, 백성, 장춘, 심양을 거쳐 본계에 와서 내렸다. 지원병의 집결지가 본계인 것 같았다. 우리 먼저 도착한 일본군도있었고 우리 후에 속속 모여들기도 하여 병력이 방대한 '일본 본토 지원연대'를 구성하였다. 할빈특구 기관장이 연대장을 맡았다고들 전했다. 
그런데 이 지원연대의 병사들을 보기만 해도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알찬 병사들이라고는 318부대에서 파견한 360명이고 그 외는 모두 재향군인들 속에서 긁어모았기 때문에 머리가 시허연 50넘은 영감들, 코물 건사를 잘 못하는 병자들, 심지어 눈먹쟁이와 절름발이도 있었다. 줄지어 걸을 때면 지원병이라 하기 보다 큰 전투를 겪고 난 포로병 같았다. 
1945년 3월 10일에 입대한 황기섭의 경험담, 강용원 엮음, 위의 책 108~109쪽.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넷플릭스의 자체제작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넷플릭스가 자체 제작한 다큐멘터리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을 조금 봤습니다. 최근에 복원된 컬러 영상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일단 눈에 띕니다. 시즌 1로 공개된 10편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전격전
2. 영국 본토 항공전
3. 진주만
4. 미드웨이 해전
5.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6. 디데이
7. 벌지 전투
8. 드레스덴 폭격
9. 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10. 히로시마

미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답게 미국을 중심으로 10대 사건을 선정한게 눈에 띕니다. 독소전쟁을 다루는 부분은 5화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하나 뿐이더군요. 아직 시즌1만 공개되었으니 시즌2가 나온다면 독소전쟁을 다루는 내용이 더 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문가 섭외는 잘 된 편 입니다. 스탈린그라드 포위전 편에서는 저명한 군사사가 데이비드 글랜츠 선생이 나옵니다. 이 외에도 미국의 저명한 독일군사사가 조프리 와로(Geoffrey Wawro), 한국에는 『나치의 병사들』로 잘 알려진 독일 역사가 죈케 나이첼(Sönke Neitzel) 같이 인지도 있는 전문가들을 다수 섭외했습니다.

내용 자체는 좋은 편이지만 평이합니다. 대중성을 고려한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합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당시 촬영된 영상들을 컬러로 복원해서 보여주는 점이 장점입니다.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독일육군 제505중전차대대사가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505중전차대대는 포탑에 그려넣은 돌격하는 기사 마크로 유명한 부대죠.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한 부대이기도 합니다. 부대의 활약에 비해 이 부대를 직접적으로 다룬 문헌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이 부대가 제2차대전 말기 동부전선에서 완전히 괴멸되었고 생존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영향을 끼쳤을 것 입니다. 미군과 영국군에 항복한 중전차대대의 경우 부대사가 비교적 일찍 간행되었죠. 매우 형편없는 전과를 거둔 제508중전차대대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부대를 연구한 부대사가 간행된다고 하네요. 판처렉스에서 제공하는 샘플 사진을 보니 상당히 기대감이 커지는군요. 약간 우려되는 점은 저자가 독립연구자로 보인다는 점 입니다. 물론 독립연구자라도 Leaping Horseman Book의 제이슨 마크 처럼 훌륭한 연구를 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만 간혹 극우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죠. 살짝 우려가 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기대가 됩니다. 2020년 1월 출간된다고 하니 잊지 말고 사야겠습니다.

https://www.panzerwrecks.com/product/charging-knights-on-the-eastern-front-the-combat-history-of-schwere-panzer-abteilung-505/

2019년 9월 25일 수요일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에 노획되었던 한국군 문서류

간만에 포스팅 하나 합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군사사 글 하나 쓰기가 어렵군요.^^

현재 한국전쟁 이전 창군기의 문헌 자료는 매우 부족한 편 입니다. 전쟁 초기 서울이 함락되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가지고 있던 문헌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북한군에 노획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창군기를 연구할 때는 미국 문헌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합니다. 창군기에 활동한 인물들의 회고록도 유용하지만 회고록의 특성상 엄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죠.

그런데 북한군이 노획한 문서들이 미군에 의해 다시 노획된 사례가 간혹 발견됩니다. 예를들면 1949년 6월 24일 제3보병사단에서 작성한 현황보고서가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개전 초반 북한군에 노획되었다가 미군이 다시 노획해서 미국으로 가져갔습니다. 북한 문서들에 섞여 있다 보니 한국 정부에 반환되지 않고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 이관되어 RG242 문서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도서관 등 국내 기관들에 의해 수집되어 온라인으로 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부처간 교류가 잘 되지 않는 것인지 여러 기관이 중복적으로 수집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이용할 때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수집한 것을 보는게 낫습니다. 상대적으로 최근에 수집을 해서 컬러로 깔끔하게 스캔이 되어 있습니다.

한동안 행방을 알수 없었던 정부 수립 초기 문서들을 노획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입니다.


출처: RG242 Entry NM44 299-C Box142









2019년 7월 28일 일요일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지역 항공전 연구

얼마전 듀푸이 연구소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을 다루는 단행본을 준비 중 이라고 포스팅을 했습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 지상전을 다룬 연구서에서 항공작전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해 서술했으니 향후 출간될 항공전에 대한 연구도 기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2019년에 나온 축약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 243-290쪽의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 보죠.

크리스토퍼 로렌스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소련 공군은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항공전에서 압도적인 열세였다."


1.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전개한 독소 양군의 공군력

남부집단군의 공세를 지원한 공군부대는 그 유명한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단이었습니다. 제8항공군단은 공세 직전 1,093~1,112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습니다. 로렌스는 전투서열 상 1,093대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전투기 145대, 지상공격기 407대, 폭격기 309대, 정찰기 69대, 야간공격기 60대, 수송기 13대, 헝가리 공군기 90대 입니다. 

이에 맞서는 소련 공군은 제2항공군이 전투기 572대, 지상공격기 306대, 폭격기 117대, 야간폭격기 57대, 정찰기 21대를 보유했고, 제17항공군이 전투기 198대, 지상공격기 360대, 폭격기 76대, 야간폭격기 75대, 정찰기 41대를 보유했습니다. 총 1,823대로 독일공군 보다 다소 우세한 전력을 보유했습니다. 특히 전투기 전력은 770대로 독일공군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중 85대의 Fw190이 공중전이 가능한 기종이긴 하지만 이걸 합해도 소련공군 전투기 전력의 압도적 우위입니다.


2. 양측의 항공기 손실

그러나 소련공군은 양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 상공에서 열세를 보였습니다. 독일공군은 1943년 7월 4일 부터 18일까지 111대의 항공기를 잃은 반면 소련 공군은 같은 기간 동안 658대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소티 대비 항공기 손실율로 따지면 독일 공군은 소티대비 0.72%의 손실율을 보인 반면 소련 공군은 소티 대비 5.3%의 손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로렌스는 소련공군의 높은 손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르겠군요.

"소련 공군의 높은 손실을 보면 이들의 용맹함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p.281)

소련 공군은 자신들이 교환비 면에서 유리했다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즉 658대의 항공기를 손실하는 동안 독일 공군기 928대를 격추했다고 판단한 겁니다. 소련 공군은 1943년 7월 5일 부터 7월 18일까지 341대의 Me109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투입된 Me109는 198대였고 총손실은 37대였으니 소련 공군의 격추 산정이 극도로 신뢰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Christopher A. Lawrence, The Battle of Prokhorovka (Stackpole Books, 2019), 285.


반면 독일 공군은 비교적 정확하게 전과를 산정했습니다.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기 658대를 격추했다고 평가했는데 소련공군의 실제 손실이 658대였으니 굉장히 정확한 추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 공군의 평가가 가장 부정확 했던 것은 1943년 7월 5일 입니다. 이날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기 260대를 격추했다고 평가했는데 실제 소련군의 손실은 187대였습니다. 이날은 대규모 공중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집계가 부정확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7월 6일 부터는 매우 정확하게 추산을 하고 있으며 때로는 실제 격추한 소련 공군기 보다 더 적은 숫자를 격추했다고 엄격하게 산정하는 양상이 보입니다.

Christopher A. Lawrence, The Battle of Prokhorovka (Stackpole Books, 2019), 285.


이런 부정확함은 정예 조종사들의 격추기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예를들어 1943년 7월 5일 제8근위전투기사단과 제205전투기사단의 에이스 조종사 7명은 총 25대의 독일 공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이날 독일공군 총손실 19기 보다 훨씬 많습니다. 로렌스는 소련 에이스들의 격추기록 중 55%는 사실이 아니거나 기종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반면 독일 공군 에이스들의 격추 기록은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에리히 하르트만은 쿠르스크 전투 당시 25대를 격추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중 22대가 확인됩니다.


3. 총 소티 및 폭탄 투하량

총소티 및 폭탄 투하량으로 비교해도 소련 공군의 열세가 두드러집니다. 독일 공군은 1943년 7월 4일 부터 18일까지 총 15,338 소티를 기록한 반면 숫적으로 우세한 소련공군은 12,426소티로 열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근접항공지원 소티의 격차가 큰데,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부대와 폭격기 부대는 같은 기간 총 11,641소티를 출격한 반면 소련공군의 지상공격기부대와 폭격기 부대는 4,295소티를 출격하는데 그쳤습니다. 독일공군의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는 716대, 소련군의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는 859대로 격차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숫적 우위에 있는 소련공군의 소티가 독일군의 40% 수준인 것은 놀랍습니다. 작전 초반 독일공군 전투기부대가 제공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공격기 및 폭격기부대가 제대로 작전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전투 손실도 컸으니 더더욱 그러했겠지요.
이것은 지상작전 지원에 소모한 폭탄의 양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일측의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약 10,000톤에서 12,000톤의 폭탄을 투하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련 제2항공군과 제17항공군은 1,748톤의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소련공군이 공중전은 물론 지상지원 임무에 있어서도 효율성이 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프로호롭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연구 -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

JOURNAL OF INTELLIGENCE HISTORY 18-2호에 실린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의 Ben Wheatley의 논문 "A visual examination of the battle of Prokhorovka"를 읽었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공군의 항공사진을 바탕으로 프로호롭카 전투의 전술적 양상을 분석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항공사진과 현대의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잡지의 판형 때문에 항공사진이 매우 작게 실려 있어서 알아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필자의 해설이 없으면 항공사진에 실린 전차 잔해의 차종은 커녕 전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예를들어 LAH 사단의 4호전차 잔해와 기동중인 티거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보여주는데 논문에 실린 사진 만으로는 차종은 커녕 어디에 전차가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사진 자료는 큰 판형으로 편집을 해야 알아보기가 쉽죠.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인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프로호롭카 전투와 무장친위대의 작전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보셔야 할 글 입니다.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프로호롭카 전투 직후 만슈타인의 제안 대로 제24기갑군단을 추가로 투입해 공세작전을 지속했다면 소련군의 예비 전력을 섬멸하는 작전적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신 제24기갑군단을 차출한 지역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소련군의 주력에게 더 큰 작전적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19년 7월 3일 수요일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나옵니다

통계 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 연구소의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 연구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제목은 Aces at Kursk 라는군요.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서 전개된 항공전에 대한 통계 기반 연구입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항공전의 양상을 잘 정리한 바 있는데, 이 연구를 위해 94쪽 분량의 새로운 내용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또한 항공전 통계자료만 77쪽에 달한다고 하는군요.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독소전쟁 항공전의 양상을 이해하는데도 필수적인 중요한 저작이 될 것 같습니다. 로렌스의 전작인 Kursk: The Battle of Prokhorovka와 이 책의 축약판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에도 항공전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만 부차적으로 다뤄진 면이 있지요. 집필은 거의 마쳤다고 하니 조만간 책으로 접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2019년 7월 2일 화요일

주몽의 후예(?)

간만에 짤막한 포스팅 하나 합니다. 늘 그렇지만 긴 포스팅을 할 만한 시간이 도통 나질 않습니다.

옛날 책을 한권 읽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와서 올려봅니다. 아래의 증언은 김점곤 소장이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회의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증언 자료라서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꽤 재미있더군요. 여포가 방천화극 끄트머리에 화살을 맞춰서 유비와 원술을 중재했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일화입니다.(.....)

"나는 52년부터 9사단장을 역임했다. 그때 미국 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산이 문제된다는 명분을 앞세웠으므로, 나는 포탄 사용을 제한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시의 미국 신문은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 즉, 당시에 미국의 언론들은 미국의 어떤 육군 장군이 잘못 알고 포탄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즉, 포탄을 제한해가며 전쟁을 치른 것이 일개의 육군 장군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에 우리는 포탄을 쏘지 않고 4.5mm(4.2인치의 오기로 추정) 박격포 이하로만 싸워서 고지를 탈환했던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오늘 나오신 정장군께서 증인이 되실 수 있을 것이다. 정장군께서는 그 당시에 부군단장으로 계셨으므로 나중에 포탄을 너무 많이 썼다는 이유로 당시에 포병사령관이 감찰조사를 받은 사실을 알고 계실 것이다. 
나도 물론 그때 증인으로 입회한 적이 있다. 아믛든 감찰조사에서 5만 몇천 달러인가 15만 몇천 달러를 우리가 초과사용했다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포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일종의 내기를 걸었다. 내가 권총으로 매를 떨어트리면 우리를 인정할 수 있겠냐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행히 나는 첫발에 매를 명중시켰다. 그리고 난 뒤에 보고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 전혀 문책이 없었다."

라종일 편, 『증언으로 본 한국전쟁』, 예진, 1991, 211~212쪽.

2019년 4월 20일 토요일

길찾기 출판사의 신간, 『무장친위대 전사록』


길찾기 출판사에서 흥미로운 책이 한 권 나옵니다. 재미있게도 한국인 저자의 연구서로군요. 1943년 하리코프-쿠르스크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의 작전을 분석한 저작입니다. 저자 소개문의 약력을 보니 허진이라는 분은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하셨군요.




인터넷 서점에 샘플이 뜬걸 보니 독일측 1차사료를 활용한 점이 눈에 띄입니다. 실물을 직접 읽어봐야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책의 분량도 700쪽이 넘는 상당한 분량인 것으로 봐서는 정리가 잘 된 저작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다만 목차를 보니 좀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는데, 1장의 '전격전 교리의 원칙과 수정'은 왜 이런 제목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겠죠.




2019년 4월 4일 목요일

평행 우주의 붉은군대



"타국에서 전투 수행 간에는 지휘관은 지역주민과 우호적 관계가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호적 관계 형성으로 지역 주민이 적을 지원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소련군이 독일의 영토로 진입할 때 독일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소련군이 선량한 독일주민을 잔혹하게 죽였다는 흑색선전을 유포하였다. 그러나 이 흑색선전은 소련군 부대의 대민 지원 활동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식료품과 연료, 기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없어 고통 받는 독일 주민들에게 소련군은 물질적 원조를 실시했다.
A. F. 슈렘첸코, 유형봉 옮김, 『어떻게 부대를 지휘할 것인가 : 러시아군 부대지휘의 철학과 사상』 합동군사대학교, 2018, 178~179쪽.


가끔 러시아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와 다른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2019년 3월 16일 토요일

대조국전쟁사 서술에 관한 흥미로운 학위논문

2016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나온 Yan Mann의 박사학위 논문 Writing the Great Patriotic War's Official History During Khrushchev's Thaw를 읽었습니다. 현재까지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논쟁의 시발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주장은 소련 체제의 프로파간다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 기억이 소련 국민 개개인의 전쟁 체험에 스며들고 심지어는 개인의 기억과 문헌 기록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단계까지 나갔다는 겁니다. 소련 체제의 특성상 공산당이 정보 유통 수단을 장악하고 집단 기억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정권이 대조국 전쟁의 신화화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저자는 오늘날 푸틴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변 역사학의 준동이 소련 시절, 특히 브레즈네프 집권기의 흐름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이 논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은 스탈린 정권기 대조국 전쟁사의 기본적인 맥락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저자는 스탈린 시기에 주로 프로파간다를 통해 형성된 집단 기억이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제2장은 스탈린 사후에서 흐루쇼프 집권 초기까지의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다룹니다.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은 뒤 스탈린을 공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조국전쟁사 서술을 필요로 했다는게 골자입니다. 제3장 부터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3장과 제4장은 흐루쇼프 정권이 대조국전쟁의 공식 역사서의 1권과 2권을 편찬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3장은 소련 공산당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식대조국전쟁사 집필을 결정하고 저작의 골격을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대조국전쟁을 3기로 구분하는 시대구분이 바로 흐루쇼프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4장은 대조국전쟁사의 초기 집필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전쟁 초기의 패배에 대한 공식 해석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쟁 초기의 주요 군사작전에 대한 서술, 전쟁 시기 프로파간다를 통해 날조된 영웅담들이 공식 역사의 일부로 포함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제5장은 소련 정부의 공식 대조국전쟁사의 첫 번째 권이 집필된 직후 소련 사회의 반응을 다룹니다. 정치적, 군사이론적, 군사작전에 관한 비평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6장은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그리고 소련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와 대조국전쟁사 편찬이 완결되기 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적으로 반복된 소련 정권의 프로파간다가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친 점을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제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키예프 전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어 소련군의 인명손실을 서술할때 상대적으로 정확한 독일측의 주장을 비난하고 소련군의 피해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개전 초반 소련군의 장비 대다수가 성능적으로 구식이었다는 서술에 참전자들 상당수가 불쾌감을 드러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참전자들은 소련군의 무기가 성능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서술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을 했는데 이런 경향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이 밖에도 이 논문에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정치인과 군인들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군사작전과 소련 군사학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 등 대조국전쟁사 집필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요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2019년 2월 17일 일요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최근 일 때문에 뵙게 된 선생님께 한국전쟁 시기 이야기를 들었는데 꽤 흥미로운 일화가 있더군요. 전쟁 당시 화성군 송산면 지역에서 자위대장으로 있었던 박상봉이라는 사람은 지역 우익 인사들을 여러명 학살했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뒤집혀서 도망가던 중 퇴로가 일찍 끊겨서 월북을 못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은 머리를 굴려서 국군에 자원입대 하는 방식으로 검거를 피했다고 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진짜 그랬던 셈이죠.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경찰에 검거되어 죄값을 치르게 됐다고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기록이 남아있을까 찾아봤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 검색을 해보니 정말 확인이 되네요.




2019년 2월 9일 토요일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에 실린 논문 몇 편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2-1호를 훑어보았습니다. 이번호는 흥미로운 제2차대전 논문이 3편이나 실려있어 매우 즐겁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데이비드 서튼(David Sutton)의 "1941 and the National-Patriotic Revival in Russia"입니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푸틴 치하에서 강화되고 있는 국수주의적 환경이 제2차세계대전사, 특히 1941년 전역에 대한 서술에 끼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필자는 고르바초프-옐친 이래 기세가 꺾여 있던 러시아의 우익-국수주의적 역사관이 푸틴 치하에서 부활했으며 본질적으로는 소련 시기의 역사관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국수주의적 논자들은 고르바초프-옐친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난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배격하고 영웅적인 과거사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저작은 2011년에 간행된 12권짜리 '대조국전쟁사'입니다. 대조국전쟁사의 간행 책임자였던 졸로타레프는 '수정주의적' 역사가들은 러시아의 국제적인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그는 '판필로프 사단의 28용사' 등 소련 시절의 날조된 프로파간다에 대한 공격을 되려 '수정주의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도 거부한다는 점 입니다. 서튼의 글은 이렇게 퇴행적인 푸틴 집권기의 역사서술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꽤 재미있는 글이라 번역을 해보고 싶군요.

다음으로는 니콜라이 로스토프, 이고르 예레민, 세르게이 쿠즈네초프의 공동연구인 "The Particularities of Military Mobilization Campaigns in Siberia in the Summers of 1914 and 1941"가 있습니다. 이 논문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초반 시베리아 지역의 전쟁 동원에 관한 글 입니다. 1941년의 경우 공산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해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인력 및 마필 동원과 달리 차량 및 트랙터 등의 장비 동원에 문제가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쿠르스크 전투를 주로 연구하는 발레리 자물린의 "Soviet Troop Losses in the Battle of Prokhorovka, 10~16 July 1943"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프로호로브카 전투에서 소련군이 입은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정리한 글 입니다.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그의 기존 연구와 비교했을때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논문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글도 있습니다. 리브 파르네모(Liv Karin Parnemo)의 "Russia's Naval Development - Grand Ambitions and Tactical Pragmatism"는 최근 러시아의 해군력 건설은 러시아의 경제적 역량을 고려해 연근해 작전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직까지는 소련 시절에 건설한 대형 함정과 잠수함 전력으로 제한적인 원양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나 신규 함정 건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역량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2019년 1월 13일 일요일

이탈리아 사나이들이 ★고☆자★ 되는 이야기


주말 내내 미세먼지로 고통을 받으니 쓸데없이 잡생각만 많아 지는군요. 이탈리아 사나이들이 아두와 전투에서 고자되는 이야기를 트위터에서 꺼낸 김에 그 이야기가 실린 책의 일부를 번역해 봅니다.

**********

아두와에 어둠이 깔리면서 에티오피아군은 추격을 멈췄다. 덕분에 도망가던 이탈리아군의 일부는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어둠과 함께 풍경의 색이 바뀌면서 또다른 공포가 시작되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비에 젖어 눅눅한 전장 곳곳에 불을 질렀다. 수증기와 연기, 불꽃, 화염이 들판을 덮으면서 다시 주변이 환해졌다. 그리고 풀밭 사이에서 마치 유령 같은 형상들이 연기와 함께 일어나 화염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사지를 질질 끌면서 움직였다. 이런 으스스한 형상들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광경은 마치 저주받았거나 구원받지 못한 망자들이 땅속에서 일어선 듯 했다. 이들은 부상을 당했거나 죽은 척 하며 누워있던 이탈리아 병사들이었다. 화염을 피해 일어난 병사들은 포로들을 상대로 한 마지막 수확의 희생물이 되었다.1)
아두와의 전장 곳곳에 벌거벗겨진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전사자들의 시체를 벗기는 일은 명예롭지는 않아도 그 기원은 오래된 관습이었다. 이동하는 군대는 많은 자산을 함께 가지고 다녔다. 전사자의 시체를 뒤져 현금이나 다른 귀중품을 얻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2) 전사자들에게서 벗겨낸 옷가지는 재활용하거나 다른 물품과 교환, 판매할 수 있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국가의 군대, 특히 에티오피아 군과 같이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적의 시체를 터는게 병사들의 유일한 수입원이기도 했다. 이게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적군의 시체 자체도 용맹을 입증할 상징이었다. 알베르토 보츠트(Alberto Woctt) 대위는 다보르미다(Dabormida) 장군이 지휘한 여단 예하 제3아프리카보병대대 소속이었다. 그는 밤이 되자 아두와의 하늘에 뜬 밝은 달이 퇴각하면서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를 비추었다고 회고했다. “사방에 훼손된 시체가 널려있었다. 밝은 달 빛 때문에 시체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창백했다.”3) 문제는 전투중에 아무 곳에나 입은 상처가 아닌 경우였다. 전사자나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환을 잘라낸 것이었다.
부사관이었던 지오반니 테도네(Giovanni Tedone)는 같은 부대 소속의 어떤 병사가 겪은 고통을 목격했다. 테도네는 그 병사의 이름을 몰랐지만 죽어가던 그 병사가 그와 같은 베르사글리에리 부대 소속이라는 점은 알았다. 군복을 보고 알았던 건 아니다. 그 병사는 옷이 모조리 벗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테도네의 이름을 알고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테도네는 그 병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다. 그는 가슴, 다리, , 그리고 머리를 기병도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부상병은 최소한 체면 치레를 하려고 사타구니를 손으로 가렸다. 거세를 당해 입은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테도네는 그 병사에게 고환만 잘렸고 음경은 무사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거세당한 병사의 상처 부위에 작은 조각이 하나 붙어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피에 젖지 않은 지방 덩어리로 추정된다.4) 이런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던 병사들도 거세로 인한 출혈 때문에 죽게 됐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테도네는 이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거세를 해도 출혈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테도네는 가축 사육 기술을 예로 들어 거세에 대해 설명했다. “측면으로 두 번 칼집을 낸 다음 아래에서부터 위로 자르면 된다. 이정도면 충분하다.”
테도네는 포로가 되어 에티오피아군의 진영으로 끌려가 거세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도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그의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테도네를 완전히 벌거벗겼는데, 그가 머리에 쓴 베르사글리에리 부대의 검은 깃털이 달린 헬멧은 예외였다. 테도네는 모욕감을 느꼈다. 머리 부분만 빼고 털이 뽑힌 수탉의 꼴 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 옆에서는 에티오피아군 병사 두 명이 피투성이 자켓을 포함한 테도네의 물건을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테도네는 같은 부대의 병사들인 티발디(Tibaldi)와 스포르티글리오네(Sportiglione)가 벌거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쇠약해진 상태로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누워있는걸 발견했다. 두 사람은 테도네를 보더니 자신들도 같은 꼴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에티오피아놈들이 우리도 거세하려고 한다!”5)
아두와 전투가 벌어지기 겨우 몇 달 전 에티오피아에 배치된 루이지 고즈(Luigi Goj)는 오로모 기병대에 항복해 포로가 됐다. 그는 에티오피아군 진영으로 가던 중 흑인과 백인들의 시체 무더기 속에서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물 좀 주세요.” 고즈는 물을 달라고 한 사람이 이탈리아 군인이었고 심각한 상처를 입고 끔찍하게도 거세까지 당한것을 보았다.6)

유럽인들이 에티오피아와 처음 접촉한 이래로 전사자와 부상자의 고환을 자르는 행동은 악명을 떨쳤다. 거세는 노예 무역과 함께 아비시니아인의 야만성을 보여주면서 유럽인이 문명화의 사명을 띄고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 하는 사례로 이용됐다.
유럽인들은 에티어피아와 접촉하면서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 적군의 고환을 자르는 관습을 철폐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놓았다. 1855년 테우드로스(Tewodros)가 즉위하자 영국 영사 월터 플로덴(Walter Plowden)은 에티오피아의 새 국왕이 이 두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본국에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드리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 테우드로스는 카사이 공(Dejajmatch Kasai)을 무찌르고 오오베아이 공(Dejajmatch Oobeay)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을 무찌르고, 살라마 주교(Aboona Salama)와 에티오피아의 모든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화려한 대관식을 열고 에티오피아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플로덴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화려한 문체로 이렇게 주장했다. 테우드로스는 노예 무역 폐지와 전사한 적의 시체를 야만적으로 훼손하는 두가지 관습을 폐지한다는 두가지의 위업을 이룩했습니다.”7) 플로덴의 생각은 아주 낙관적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달리 말하면, 유럽인들은 테우드로스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건 파악했지만 그의 권한에 한계가 있다는걸 몰랐다. 칙령을 내리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칙령을 실제로 이행하는건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테우드로스는 물론 요하네스, 그리고 메넬리크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노예무역과 거세 관습은 지속됐다.
거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8)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거세하는 관습은 전시에만 행해진 것도 아니었다. 에티오피아의 형법을 보면 구금하거나 징역에 처하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보상, 또는 상징적인 보상을 해야 했다. 예를들어 가족 중에 한 명이 살해를 당한 경우에는 살인자에 사형을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족들이 구금을 요구할 경우에는 암바스(Ambas)라고 부르는 높은 언덕에 구름을 했다. 암바스는 경사가 급하고 등반이 매우 어려워 감금 장소로는 완벽한 지형이었다. 이곳에 가려면 매우 위험한 좁은 길을 따라 오르거나 정상에서 밑으로 떨어트린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다. 어거스투스 와일드(Augustus Wylde)의 기록에 따르면 간수직은 거세된 남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간수를 하려면 거세를 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평생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9)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다른 논리가 있었다. 남성성을 인정받으려면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 했다. 에티오피아 남성들이 강한 전사이자 적을 잘 죽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관습이 머리카락을 땋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에티오피아인에 우호적이었던 언론인 어거스투스 와일드는 아두와 전투가 끝난 뒤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아살라피 하일루(Asalafie Hailou)를 만난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하일루는 에티오피아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하일루의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땋은 뒤 머리 뒤쪽으로 넘겨 한 가닥으로 묶여있었다. 그의 동포들을 죽인 아비시니아인들의 머리 모양과도 같았다.”10)
거세를 하는 행위도 승리의 상징의 일종이었다. 가장 기본적으로 전사자의 고환을 자르는 것은 전리품을 얻는 동시에 용맹을 증명하는 행위였다.11) 단순히 머리카락을 땋은 것 만으로는 그의 용기를 증명할 수 없었다. 적의 신체 일부가 있으면 증거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적군의 고환을 자르는 것은 적의 귀를 자르거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일, 또는 손가락을 자르는 것과 같다. 적의 시체에서 일부분을 잘라내는 행동은 적의 신체를 완전히 정복했음을 생생하게 입증해 주는 증거가 된다. 적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고환을 자르는 것은 귀나 손가락을 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환은 남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다.12) 그러므로 고환을 자르는 것은 단순히 전리품 이상의 보다 직접적인 행위였다. 고환을 자르는 행동은 죽은 적의 신체를 완전히 굴복시켰음을 상징했다. 또한 패배한 적군이 용맹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패배하면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전사로서의 자질도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거세는 전투에서 남성성을 입증하지 못한 자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13)
거세하는 것은 미래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단순히 발기를 하고 사정만을 하는데는 음낭과 고환이 핵심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다. 거세를 하면 성인 남성을 불임으로 만들 수 있다. 거세당한 적은 살아남는다 해도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다. 즉 적을 거세하는 행동은 거세당한 적군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인 셈이다.


주석
1) Chris Prouty, Empress Taytu and Menelik II: Ethiopia, 1883~1910(London: Ravens, 1986), 158.
2) 프랑스군은 1798~1801년 사이의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한 맘루크들의 시체에서 약탈을 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맘루크들이 금화를 비롯한 귀중품을 옷 속에 지니고 다닌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aul Strathern, Napoleon in Egypt(New York: Bantam, 2007), 305를 참고하라.
3) Gian Carlo Stella, Battaglia di Adua, 1 marzo 1896:  memorie vive ed inedite di un ufficiale superstite(Parma: E. Albertelli, 1991), 91.
4) Giovanni Tedone, Angerà: I ricordi di un prigioniero di Menelik(Milan: Giordano, 1964), 28.
5) Tedone, Angerà, 25. 테도네는 이탈리아인 포로가 고환을 담아놓은 담요를 나르는 걸 거부했다가 처형당한 일도 목격했다. Angerà, 27.
6) Luigi Goj, Adua e prigionia fra I galla(Millan: Scuola Tip, Salesianan, 1901), 28. 프란체스코 프리스니아(Francesco Frisinia)Memorie di un prigioniero d’Africa(Reggio Calabria: P. Lombardi, 1899), 29에서 비슷한 광경을 이야기 했다.
7) Consul Plowden to the Earl of Clarendon, Massawa, 3 March 1855. In Parliamentary Papers, Correspondence Respecting Abyssinia, 1846~1868(London: Harrison and Sons, 1868), 146. Sven Rubenson, King of Kings: Tewodros of Ethiopia(Addis Ababa: Haile Selassie I University, 1966), esp.55도 참고하라.
8) 서아프리카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관한 해석 중 하나로는 Florence Bernault, “Body, Power and Sacrifice in Equatorial Africa,” Journal of African History 47(2006): 207~239를 참고하라.
9) Augustus Blandy Wylde, Modern Abyssinia(London: Methuen, 1901), 310.
10) Augustus Blandy Wylde, “An Unofficial Mission to Abyssinia,” Manchester Guardian, 24 May 1897, 5.
11) 유럽인들도 전사한 적의 머리를 자르는 것 처럼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비슷했다. Edgar V. Winans, “The Head of the King: Museums and the Path to Resistance,”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36(1994): 221~241 그리고 David Thomas, Skull Wars: Kennewick Man, Archaeology and the Battle for Native American Identity(New York: Basic Books, 2000)을 참고하라.
12) “Lorsqu’on demande au Abyssiniens pourquoi ils coupent ce member plutôt qu’un autre, ils répondent sans hésiter que c’est là seilement ce qui caractérise ;’homme.” Edmond Combes and Maurice Tamisier, Voyage en Abyssinie, dans le pays des Galla, de Choa et d’Ifat: précédé d’une excursion dans l’Arabie-heureus, et accompagné d’une carte de ces diverses contrés(Paris: L. Desessart, 1838), 1:221~222를 참고하라.
13) 니콜라 다마토(Nicola d’Amato)는 이 행위를 이렇게 해석했다. Da Adua ad Addis-Abeba ricordi d’un prigioniero(Salerno: A. Volpe, 1898), 6.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pp.221~224.

2019년 1월 6일 일요일

꽌시(關係)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에서 학도병으로 복무한 중문학자 김학주 교수의 회고록을 읽다보니 흥미로운 일화가 몇개 보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재미있었던게 황포군관학교 동기를 전쟁 포로로 만난 국군 장교의 이야기 입니다. 이런 우연이 현실에서 일어나는건 꽤 재미있지요.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우리를 특공대라고 호칭을 바꾼 목적을 알고 보니 우리를 일선으로부터 후방으로 보내어 후방에 낙오되어 있는 중공군들을 잡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며칠 동안 국군이 너무 빨리 반격을 하며 진군하는 바람에 우리 후방 산속에 중공군 낙오병들이 무척 많이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역병은 후방으로 빼어 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후방으로 보내어 그 낙오병들을 잡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그날부터 후방으로 가서 무척 많은 중공군 낙오병을 잡아왔다. 우리 특공대는 후방으로 나가면서 서너 명씩 조를 짜 가지고 패잔병들이 숨어있다고 알려준 지역으로 가서 포로를 잡아오는 작전에 임하였다. 후방으로 나간 우리 친구들이 첫 날 하루에 중공군을 모두 합쳐 60여명이나 잡아왔다. 중공군 낙오병들은 자신들이 후방에 낙오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우리 대원들을 보기만 하면 모두 대항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스스로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숨어있던 곳으로 부터 걸어 나왔다고 하였다. 그들을 잡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워오는 것이라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라 하였다. 
(중략) 
잡아온 많은 포로들을 한 곳에 모아놓자 그들은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그때 우리의 지휘관인 문창덕 중위가 그들 앞에 나서서 유창한 중국말로 일장 연설을 하자 포로들은 모두 안심한 듯 조용해졌다. 문 중위는 평안북도 신의주 출신으로 해방 전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자기 형과 함께 형제가 중국으로 도망쳐 우리 임시정부에 의탁하게 되었다 한다. 마침 우리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께서 항일의 중추가 될 광복군을 제대로 조직하고자 하여 광복군의 지휘관인 장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중국국민당 정부에 청탁하여 장제스 총통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에 20여명의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학시켰다고 한다. 그때 문 중위는 자기 형과 함께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고,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에서 장교로 복무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국군에 복무하게 된 것이라 한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중공군 포로들을 무마하는 문 중위의 모습이 무척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이로부터 우리 대원들은 매일 포로 잡아오기에 동원되었다. 6월 3일에는 나도 포로 잡기에 나가서 포로들을 잡아왔다. (중략) 오후 적당한 시기가 되어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각자 잡은 포로들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왔다. 도착하여 내가 문 중위에게 장교 같은 포로를 한 명 잡아왔다고 보고하자 문 중위는 직접 나서서 그 중공군 장교를 쳐다보더니 "너 아무개 아니냐?"고 하면서 서로 알아보고 반기는 것 이었다. 그 중공군 장교는 문 중위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라는 것이었다. 문 중위는 즉시 내가 갖고 온 그의 권총은 자신이 간수하면서 나보고 그 중국 장교를 개별적으로 일정 기간 잘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문 중위는 가능하면 그를 데리고 있다가 포로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기회가 생기면 후방으로 빼주고 싶으니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부터 문 중위의 부탁을 따라 그 중국 장교를 데리고 부대원들과 약간 떨어진 조용한 곳을 골라 작은 개인천막을 쳐놓고 둘이 지내면서 개별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낮에는 적당한 곳으로 나와 몸을 숨기고 중공군 장교와 함께 매일 전방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 구겨잉나 하며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일선에 나가서도 직접 적을 상대로 싸우지는 않고 나처럼 전쟁 구경을 제대로 가까이에서 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다만 중국 친구가 지독히 몸 냄새를 피우면서도 세수조차 잘 하려 들지 않고 계속 음식이 제대로 그에게 맞지 않는 듯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여 함께 지내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골짜기 맑은 시냇물로 데리고 가서 몸을 좀 씻도록 해 보았지만 몸을 제대로 씻으려 들지 않았고 또 씻을 줄도 모르는 사람만 같았다. 그와 지내면서 다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중략) 
문 중위는 여러날을 기다려 보아도 결국 달리 어찌하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국군 보다는 미군이 포로를 보다 잘 대우한다고 하면서 그를 바로 옆에 있는 미군들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였다. 먼저 문 중위는 나를 미군들에게 보내어 그가 갖고 있던 리볼버 권총을 미군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권총을 들고 미군들에게로 가서 이것은 중공군 장교가 갖고 있던 무기이니 전쟁 참여 기념품으로 사라고 권하였다. 여러 미군들이 서로 자기가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미군들에게 경매 방식으로 흥정하여 적지 않은 미국돈을 받고 팔았다. 100불을 넘게 받아 문 중위에게 전달해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뒤에 다시 미군들에게로 나를 보내어 먼저 팔아넘긴 권총의 주인인 중공군 장교를 포로로 맡아달라고 교섭을 하도록 하였다. 나는 다시 미군들에게로 가서 중공군 장교 포로를 넘겨주는 일을 교섭한 뒤에 그들과 합의한 대로 중공군 장교를 데리고 가서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역시 미군들로 부터 포로를 넘겨주는 대가로 미불로 받았는데 얼마나 받았었는지 정확한 액수는 기억에 없다. 다만 이때도 적지 않은 액수의 미불을 받아 문 중위에게 전해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무렵의 6월의 2일, 3일을 전후하여 우리 부대가 머물렀던 곳은 자운리라는 동리이다. 
김학주, 『나와 625사변, 그리고 반년간의 군번없는 종군』, 明文堂 2017, 88~95쪽.

2019년 1월 2일 수요일

[번역글] 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새해 벽두부터(….) 불법날림번역(…) 나갑니다.

이 글은 2014년 출간된 논문집 Die Waffen-SS: Neue Forschungen에 실린 독일 군사사가 로만 퇴펠의 글 Waffen SS und Wehrmacht in der Schlacht bei Kursk: Ein Vergleich im operativen Einsatz를 번역한 것 입니다. 로만 퇴펠은 최근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단행본을 출간하는 등 제2차대전 작전사 연구를 하는 연구자입니다. 이 글은 1943년 하계 전역 당시 무장친위대와 육군 부대의 작전 수행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내용입니다. 이 글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무장친위대와 육군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친위대 장교단에 대한 폄하가 있었고 이게 전후에도 육군 장교들의 회고록을 통해 확대된 면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 입니다.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선전 기구에 의해 실제 이상으로 과대 평가된 면이 있지만 최소한 1943년 전역에서 무장친위대의 기계화 부대가 달성한 전과는 군사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무장친위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학술적으로 증명해 주는게 아니냐는 느낌도 받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물론 이 논문집 자체는 무장친위대의 정치적인 면, 특히 전쟁범죄 문제도 다루고 있으니 불필요한 오해(?)는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 논문집에는 노르망디 전역의 작전 수행을 비교 분석한 글도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번역해 보고 싶습니다.

**********

쿠르스크 전투의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작전 수행 비교

로만 퇴펠

서     론

194345일 히틀러는 올해의 첫번째 공세로서 치타델레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령을 내렸다.1)치타델레는 러시아의 도시인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한 돌출부에 대한 양익공세를 감행해 소련군을 섬멸하는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돌출부에서 하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치타델레작전이 성공하면 독일 국방군은 전선을 크게 단축하고 남는 병력을 다른 전선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 지도층은 국방군이 다수의 소련군 전쟁포로와 민간인 노동력을 확보하길 희망했다. 포로를 독일로 보내 노동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2)
히틀러는 처음에 치타델레작전을 19435월 초에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공세 개시일이 계속 변경되면서 독일군 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다가올 하계 전역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194375치타델레공세가 시작되었고, 이후 2개월에 걸쳐 오룔, 쿠르스크, 하리코프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 오늘날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불린다.3) 실제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전투 중에서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 규모에 비견할 만한 대상을 찾기 힘들다. 전투가 시작되고 첫 2주동안 양측을 합쳐 2백만 명의 병력과 5천대의 항공기, 8천대의 전차 및 자주포, 그리고 거의 39천문에 달하는 야포가 투입됐다.4)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작전 수행을 비교하는데 쿠르스크 전투의 제1단계인 독일의 하계공세 치타델레작전이 좋은 사례가 된다. 공세에 투입된 대부분의 부대는 공세 첫 주에 담당구역에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쿠르스크 전투의 후반부에 독일군이 방어와 역습을 하는 입장이 됐을때는 상황이 다르다. 공세에 투입됐던 부대들의 소속이 바뀌고 다른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부대들의 작전 행동을 비교하기가 훨씬 어렵다.
이 미시연구의 목표는 세가지 문제에 답을 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된 무장친위대가 육군 사단들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냐는 문제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군사적인 가치를 입증했느냐이다. 세 번째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육군 사단들 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느냐이다. 이를 통해 무장친위대 부대의 작전사 연구와 무장친위대의 군사적 효율성을 평가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I. SS사단은 육군 부대 보다 무장상태가 더 좋았는가?

쿠르스크 공세에 투입된 독일군은 총 33개사단으로 이중 보병사단이 17, 기갑척탄병사단이 5, 기갑사단이 11개였다.5) 또한 육군직할대(Heerestruppen)’인 전차대대, 대전차대대, 돌격포대대들도 여럿 투입됐다.6) 9군사령부(Armeeoberkommando 9)의 지휘를 받는 제9군은 돌출부 북쪽에 배치되어 오룔 지구에서 쿠르스크 방면으로 공격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었다. 9군은 총 18개 사단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했으며 이중에는 무장친위대 사단이 없었다. 9군의 공세는 19437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간 진행됐다. 712일 붉은군대는 오룔 방면으로 반격을 개시했다.(쿠투초프 작전) 이 때문에 북익에서 공세를 개시한 제9군은 공세를 중단해야 했다.
돌출부 남쪽인 벨고로드 지구에서는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Armeeabteilung Kempf)이 공격에 투입됐다. 켐프 분견군은 부대의 지휘관인 베르너 켐프(Werner Kempf) 기갑대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부대의 사령부는 나중에 제8군 사령부가 됐다.7) 켐프 분견군은 7개 사단을 치타델레작전에 투입했다. 켐프 분견군의 임무는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4기갑군의 동쪽에서 공세를 시작해 제4기갑군의 측면을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엄호하는 것이었다.
4기갑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공세에 투입된 부대 중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4기갑군은 쿠르스크 남쪽에 종심깊게 구축된 소련군의 방어선을 최대한 신속히 돌파해 북쪽으로 진격한 뒤 모델 상급대장의 제9군과 접촉해 쿠르스크 돌출부에 배치된 소련군을 포위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4기갑군의 지휘부는 제4기갑군사령부(Panzerarmee-Oberkommando 4)였으며 켐프분견군 보다 전투력이 강했다. ‘치타델레작전에서 제4기갑군에 배속된 사단은 10개 사단이었다. 이중 9개 사단이 쿠르스크 방면으로의 공세를 담당했다. 이 중에는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히틀러(LAH)’,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사단 등이 있었다. 3개의 SS 기갑척탄병사단은 제2SS기갑군단 예하였다.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육군의 기갑척탄병사단과 비교했을 때 편제상 모든 면에서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8) 심지어 육군의 기갑사단과 비교했을때도 편제상 더 많은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다. 위에서 언급한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급양기준병력(Verpflegungsstärke)2만명에 달했고 대부분의 육군기갑사단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육군기갑사단은 3개의 차량화보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5개를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3개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2개였다. 반면 육군의 기갑사단은 경곡사포 대대가 1개에 불과했다.9) 육군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GD)’만이 무장친위대 부대와 비슷한 수준의 특권을 가졌다. 이 사단은 무장친위대 LAH사단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차량화보병대대 전력을 보유했다. LAH를 제외한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됐으나 GD사단의 차량화보병대대는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10) 부대의 전투력을 평가하는데 있어 또다른 결정적인 요인 중에는 전차 보유량도 있다.(도표1)

1.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및 기갑척탄병사단들의 전차 및 자주포 보유량. 1943630일 기준.11)
사단
신형전차12)
신형전차 중 티거 숫자
구형전차
돌격포
대전차자주포
자주곡사포
총계
GD
81
15
54
35
28
34
232
다스 라이히
73
14
73
34
13
30
223
토텐코프
59
15
80
35
14
30
218
LAH
96
13
26
35
29
30
216
2기갑사단
65

51

34
30
180
4기갑사단
79

22

26
30
157
9기갑사단
56

53

28
18
155
11기갑사단
25

89

14
18
146
7기갑사단
37

75

14
12
138
6기갑사단
32

85

12
6
135
20기갑사단
40

42

28
6
116
3기갑사단
22

78
2
14

116
12기갑사단
36

50

16
6
108
19기갑사단
38

49

14

101
18기갑사단
29

46

16
6
97
10기갑척탄병사단




39

39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과 GD사단은 육군의 기갑사단들이 그저 꿈이나 꿔야 할 수준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4개 사단은 신형 자주곡사포로 완편된 1개 포병대대를 갖추고 있었다.13) 뿐만 아니라 이 4개 사단은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티거 전차를 완편 상태로 14대나 보유했다.14) 무장친위대의 3개사단과 GD사단이 1개 대대의 돌격포를 보유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돌격포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장비였다. 당시의 보고서를 보면 돌격포의 강력한전투력을 엄청나게 호평하고 있다.15) 뿐만 아니라 GD사단은 1943년 여름에 티거 전차를 완전한 1개 대대편성으로 45대나 보유하게 되었다.16) 그리고 무장친위대 사단들 보다도 먼저 최신형 전차인 판터를 장비하게 되었다.17) GD사단은 육군 내에서 매우 이례적인 부대였다. 이 부대는 육군의 LAH’로 불렸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GD사단을 지원했고 이례적일 정도로 다른 육군 사단에 비해 우대를 받았다.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도 이와 비슷해서 LAH 사단이 최우선적으로 지원을 받았다. GD사단은 쿠르스크 공세를 앞두고 신형 전차를 대량으로 보급받았다.18)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무장친위대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이 평균 이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추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가 육군에 비해 더 좋은 보급을 받았다고 성급한 일반화를 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부대인 무장친위대의 비킹기갑척탄병사단은 위에서 말한 3개 친위대 사단에 비해 전력이 빈약했다. 1943년 여름 시점에서 봤을 때 비킹 사단의 기갑 전력은 당시 평균적인 육군 기갑척탄병사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9437월 초 이 사단은 46대의 전차와 6대의 돌격포,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는데, 전차는 대부분 구형 전차였다. 비킹 사단과 함께 도네츠강 만곡부에 투입된 육군의 제16기갑척탄병사단은 53대의 전차와 14대의 대전차자주포를 보유했다.19)
무장친위대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은 1943년 여름 기준으로 다른 부대에 비해 장비를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쿠르스크 공세에서 중점(Schwerpunkt)을 구성했다.20)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육군 사단 중에서 이들 3개 사단 만큼 좋은 지원을 받은 부대는 GD사단 말고 없었다. 다른 보병사단에 비해 좋은 장비를 갖추었던 보병사단인 제78돌격사단(Sturmdivision)1943년 하계 전역 기간에 겪은 경험은 좋은 사례이다. 19438월 중순에 작성된 한 보고서를 인용해 본다.

78돌격사단은 현재 상태는 좋지 못하다. 최소한 자주대전차포를 장비한 사단의 대전차대대를 편제에서 제외할 필요가 있다. 이 사단의 편제에는 돌격포대대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단은 너무 많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장비들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하고 있다. 유사시 중장비를 회수하지 못하거나 승무원이 부족할 수도 있다.”21)


II.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사단들은 평균이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가?

2SS기갑군단 예하의 3개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중점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같은 전투에 투입된 육군 사단들과 비교했을때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입은 피해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으며 또한 평균이상으로 높은 수준이었느냐는 것이다. 국방군측 인사들이 종종 주장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전과는 불필요하게 많은 손실을 치루면서 얻은 대가라는 비판은 타당한가?22) 기존의 연구는 이 문제를 언급하면서 하인리히 힘러가 어림짐작으로 무장친위대의 손실이 컸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사실을 지적했다.23) 힘러는 이런 주장을 통해 친위대야 말로 강인하고 이념무장이 잘 된 전사들이라는 평판을 얻으려 했다. 이런 방식의 마케팅전략(Vermarktungsstrategie)’은 양날의 칼이었다. 일반인들은 이런 선전을 통해 무장친위대가 쓸데없이 많은 인명피해를 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청년들이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걸 꺼렸다.24) 군사전문가들은 무장친위대가 많은 인명손실을 입기 때문에 전투부대로서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혀야 좋은 부대라고 평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육군 제18기갑사단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 많은 손실을 입는 것은 전투력이 높은 것과 상관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치타델레작전 기간 중 제18기갑사단이 입은 손실만을 구체적으로 집계한 통계는 없다. 하지만 이 부대가 1943년 하계전역에서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때 입은 피해를 보충할 수 없어서 사단이 해체되고 (포병사단으로) 재편되고 말았다.25) 18기갑사단이 치타델레작전에서 실패한 이유는 이 사단이 작전에 투입된 기갑사단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약했으며 공세가 시작됐을 당시 사단 병력을 필요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던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원인은 전술상의 실수에 있었고, 이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은데 있다.26) 18기갑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퇴역군인들이 집필한 제18기갑사단사를 보면 이 부대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작전상으로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27)
무장친위대 사단의 경우는 이런 비판을 할 수 없다. ‘치타델레작전이 절정에 달한 1943712,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는 제2SS기갑군단을 방문해 3개의 무장친위대사단에 대해 전투에서 거둔 탁월한 전과와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28) 다음날에는 제4기갑군 사령관 호트 상급대장도 휘하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그동안의 전투에서 보여준 행동과 단호함, 그리고 타의 모범이 될 용맹함에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는 특별명령을 내렸다.29) 이런 찬사는 단지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특별명령에 집어넣은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쿠르스크 공세 작전이 끝난 뒤 제2SS기갑군단장 파울 하우서(Paul Hausser) SS대장이 호트 상급대장의 추천으로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30) 4기갑군에 배속됐던 3명의 군단장급 지휘관 중에서는 하우서만이 유일하게 치타델레작전이 종결된 뒤 이 훈장을 받았다. 48기갑군단장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Otto von Knobelsdorff) 대장은 호트로부터 표창을 받는데 그쳤다.31) 52군단장 오이겐 오트(Eugen Ott) 대장은 아무런 포상도 못 받았다.
그렇다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치타델레작전에서 이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렀을까? 평균 이상의 큰 손실을 입었을까?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단의 손실을 단순 비교만 하는 것은 타당한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9군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경우는 이미 1943711일에 쿠르스크 공세작전이 끝났지만 켐프분견군과 제4기갑군 예하 부대들은 1943717일까지 공세작전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총손실만 비교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총병력도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비교를 하려면 인명손실이 작전 개시당시의 총병력과 비교했을 때 차지하는 비중을 계산해봐야 한다.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사단들의 전투 시작당시 병력대비 인명손실 비중은 표2와 같다.

2.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 투입된 독일군 사단의 병력손실이 작전개시당시 총병력에서 차지하는 비중, 1943 7 4~718.32)
사단
작전개시당시 병력
사망
부상
행방불명
총계
비율(%)
332보병사단(4기갑군)
15,959
398
2,340
129
2,867
18.0
106보병사단(켐프분견군)
19,848
533
2,470
63
3,066
15.4
168보병사단(켐프분견군)
15,880
383
1,946
66
2,395
15.1
320보병사단(켐프분견군)
20,030
469
2,159
378
3,006
15.0
167보병사단(4기갑군, 켐프분견군)
14,347
389
1,551
48
1,988
13.9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14,906
260
1,710
91
2,061
13.8
SS LAH(4기갑군)
23,160
514
2,541
81
3,136
13.5
SS 토텐코프(4기갑군)
19,795
503
2,103
38
2,644
13.4
GD(4기갑군)
21,524
442
2,247
82
2,771
12.9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20,303
483
1,931
23
2,437
12.0
11기갑사단(4기갑군)
15,894
234
1,449
39
1,722
10.8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15,705
232
1,238
33
1,503
9.6
3기갑사단(4기갑군)
13,968
204
989
21
1,214
8.7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20,229
257
1,390
23
1,670
8.3
255보병사단(4기갑군)
14,107
124
671
13
808
5.7

이 표를 보면 보병사단들이 가장 높은 인명손실 비중을 기록한 것을 알 수 있다. 보병사단들은 제외하고 기갑부대들만 가지고 비교를 하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손실이 높은 편에 들어간다. 그러나 무장친위대 3개사단은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의 공격부대 중에서 중점을 형성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무장친위대의 손실은 특별히 높은 편이 아니다.33)치타델레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의 기갑차량 손실을 비교하면 이점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3의 통계는 1943714일까지 완전손실로 처리되어 육군본부에 보고된 티거, 3호전차, 4호전차, 그리고 돌격포의 숫자이다.

3. ‘치타델레작전에 참가한 기갑사단과 기갑척탄병사단의 기갑차량 손실 통계, 194375~14.34)
사단
작전개시당시 보유대수
714일까지의 완전손실
비율(%)
19기갑사단(켐프분견군)
80
23
28.8
6기갑사단(켐프분견군)
98
17
17.3
18기갑사단(9)
67
11
16.4
2기갑사단(9)
102
14
13.7
GD(4기갑군)
158
19
12.0
7기갑사단(켐프분견군)
93
10
10.8
3기갑사단(4기갑군)
90
9
10.0
SS LAH(4기갑군)
144
12
8.3
SS 토텐코프(4기갑군)
165
12
7.3
4기갑사단(9)
95
6
6.3
11기갑사단(4기갑군)
101
5
5.0
20기갑사단(9)
66
3
4.5
SS 다스라이히(4기갑군)
143
3
2.1
9기갑사단(9)
102
2
2.0

이 표를 보면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기갑차량 손실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35) 이 부대들은 공세가 시작될 당시 매우 많은 전차를 보유했기 때문에 손실 비중은 그렇게 까지 중요한 요인은 아니다. 전차 보유량이 많은 부대는 전차를 조금 보유한 부대 보다 적의 저항을 신속히 극복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 3개 무장친위대 사단은 적 기갑부대와의 교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하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전차 손실이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III.엘리트부대?’ 1943년 여름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한 군사적 평가

쿠르스크 전투는 치타델레작전의 중단으로 끝나지 않았다. 소련측에서는 1943823일 붉은군대가 하리코프를 재탈환한 바로 그날 쿠르스크 전투가 종결됐다고 본다.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군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1943년 여름 동부전선의 남부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치타델레작전 이후의 전투에는 LAH 사단이 참가하지 않았다. 이 사단은 1943725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이탈리아로 파견됐다.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사령관 한스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LAH 사단을 이탈리아에 투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파시즘에 기반한 최정예 부대가 이탈리아에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소.36)
반면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 사단은 동부전선에 남아서 남부집단군의 중점, 그리고 위급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37월 말 이 두사단은 도네츠만곡부 미우스강에 소련군이 구축한 교두보를 분쇄하기 위한 역습에 투입됐다. 쿠르스크 전투의 마지막 단계가 시작된 8월 초에는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과 함께 다시 하리코프 지구에 투입되어 제3기갑군단 예하에 들어갔다. 3기갑군단 참모장 에른스트 메르크(Ernst Merk) 대령은 1943813일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3개 무장친위대 사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좋은 인력과 장비에 걸맞게 잘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 지휘부는 부대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장친위대 사단을 엄격히 지휘해야 하며, 상급부대가 지속적으로 감독할 필요가 있다.”37) 메르크 대령이 이런 평가를 내린 시점은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이 제3기갑군단에 배속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기 때문에 이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 나온 육군 장군들의 회고록에서도 무장친위대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38)
사실 무장친위대는 항상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다.39)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무장친위대가 단기간에 팽창한데 있다. 1943년 상반기에만 무장친위대 6개 사단을 신규 편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40) 그 결과 기존에 있던 부대들이 약화되었다. 우대를 받고 있었던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사단 조차 1943년 여름에는 장교와 부사관이 현저한 수준으로 부족했다. 가장 심한 손실을 입은 부대는 LAH였다. 이 사단은 치타델레작전이 시작되기 전 특별한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19437월 초에는 장교 277명과 부사관 1,179명이 부족한 상태였다.41) 이렇게 된 이유는 LAH의 자매부대인 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를 창설하기 위해 간부를 차출한데 있었다. 새로 편성되는 사단들은 단순히 병력을 보충하는 정도가 아니라 LAH사단을 보충대 처럼 이용했다. LAH사단은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와 부사관을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편성할 기간요원으로 내줘야 했다.42) 다스라이히 사단과 토텐코프 사단도 마찬가지로 병력 부족을 겪었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장교 286명과 부사관 734명이 부족했고 토텐코프 사단은 장교 259명과 부사관 967명이 부족했다.43)
치타델레작전에 참여한 다른 육군 기갑사단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44) 육군 기갑사단 중 장교가 가장 부족했던 부대는 제2기갑사단이었는데 그 숫자는 21명에 불과했다.45) 부사관이 가장 부족한 부대는 제12기갑사단이었다. 그 숫자는 388명이었다.46) 대부분의 육군 기갑사단은 간부 부족이 심각하지 않았다. 한 사단은 아예 해당사항이 없었다. 6기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이 편제대로 있었다.47)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이렇게 심각한 장교와 부사관 부족에 시달린 결과 전장에서의 전투 수행 능력, 그리고 부족한 지휘력으로 인한 불필요한 희생이 얼마나 발생했느냐는 것이다.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은 보통 지휘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 부대가 잘못된 판단으로 불필요한 피해를 입은 사례도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사례 중 가장 심한 것은 19437월 말 미우스강의 소련군 교두보에 대한 역습 과정에서 발생했다. ‘치타델레작전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무장친위대가 중점에 투입됐다. 그러나 역습 첫날은 많은 인명손실과 함께 실패로 돌아갔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을 배속받은 제6군 사령부는 유연한 전술을 펼칠 것을 강조했다. 6군사령부는 다음날 공격을 할 때는 같은 지점을 거듭해서 공격하지 말도록 했다. 하지만 무장친위대는 다음날에도 같은 방면으로 공격했다. 공격은 또다시 실패했고 특히 토텐코프 사단의 인명손실이 컸다. 6군사령부는 친위대 사단들에게 명령을 내려 3일차 공격은 중점을 변경하고 공략이 어려운 고지를 우회하도록 했다. 3일차의 공격은 성공을 거두어 소련군의 교두보를 분쇄할 수 있었다.48)
하지만 1943년 여름 전역에서는 무장친위대만 이렇게 형편없는 지휘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을 치른게 아니었다. 유사한 사례는 육군에서도 나타나며 실제로 각급 제대에 걸쳐 유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GD사단의 작전참모 올트비히 폰 나츠머(Oldwig von Natzmer) 대령은 19438월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기갑사단장 중에는 그 직위에 맞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49) 지휘관들의 잘못된 지휘 문제는 연대급 지휘관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치타델레작전 당시 GD전차연대와 제39전차연대를 지휘한 히아진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Hyazinth Graf Strachwitz) 대령이 그러하다. 그는 2개 전차연대를 손실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투입했다. 상관이었던 제10전차여단장은 이러한 지휘방식을 완전히 미쳤고 저능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50) 중대급 지휘관들도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치타델레작전 중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 투입되었던 제505중전차대대장은 육군본부에서 시찰을 나온 한 참모장교에게 이렇게 불만을 제기했다. “과거에는 후방 보직에 있거나 본부중대장 정도나 하던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 전차중대장에 임명되면서 대대의 공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러대의 티거를 잃게 됐다.”51) 이건 유일한 사례가 아니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에 투입되었던 제10전차여단이 작성한 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여단 예하 부대들은 최신형 전차인 티거와 판터를 장비하는 등 훌륭하게 편성되어 있지만 중대급 지휘관들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교들이다.’ 이 보고서에서 예외로 취급한 부대는 무장친위대 다스라이히 사단의 판터 대대 뿐이었다.52)
무장친위대 부대가 많은 손실을 입은 책임이 육군 지휘관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194384일 독일군이 도네츠강의 소련군 교두보를 공격한 전투가 대표적이다. 40기갑군단장 지크프리트 헨리치(Sigfrid Henrici) 기갑대장은 군단에 배속된 무장친위대 비킹 사단의 사단장이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단을 가망없는 공격에 투입했다. 독일군은 공격에 실패하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53)
육군 부대가 잘못된 지휘로 많은 손실을 입은 사례는 더 있다. 육군에서는 자주 무장친위 간부들의 지휘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는데, 이러한 비난은 무장친위대가 독일군 내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 및 여러 특권과 결합해서 국방군 측의 불신을 불러오고 긴장을 초래했다.54) 오토 뵐러(Otto Wöhler) 대장은 켐프분견군의 지휘권을 인계받기 5일 전인 1943820일에 다스라이히 사단장 발터 크뤼거(Walter Krüger) SS중장을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크뤼거가 무분별하다거나 그의 지휘 방식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이 발생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뵐러는 크뤼거가 무장친위대 같은 최정예부대를 지휘하기에는 활력이 없고 둔하다.”고 생각했다.55) 하지만 뵐러의 제안은 허사로 돌아갔다. 크뤼거는 다스라이히 사단을 계속 지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1일 뒤에는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56) 다스라이히 사단은 하리코프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1943827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급되었다.57)
뵐러의 휘하에 배속된 다른 무장친위대 사단들도 쿠르스크 전투의 최종 단계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8월 중순 토텐코프 사단이 하리코프 지구에서 수행한 역습은 대성공을 거두어 제3기갑군단장 헤르만 브라이트(Hermann Breith) 대장은 국방군 공식보도에 토텐코프 사단을 언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58) 뵐러도 며칠 안되는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활약을 칭찬했다. 그는 817일 토텐코프 사단을 치하했으며 3일 뒤에는 비킹 사단을 칭찬했다.59) 비킹 사단에 대해서는 194311월 초에 작성된 흥미로운 문건이 하나 있다. 이 자료는 이른바 무장친위대 간부진의 형편없는 지휘능력이라는 문제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기갑군단에서 작성한 각 사단의 내적 전투력에 대한 평가(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라는 제목의 문건은 비킹 사단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비킹 사단은 치열한 방어전을 수행했으며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공세작전에서도 역량을 입증했다. 이 사단의 예하부대들은 26개월간 동부전선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강인한 부대들이다. 이 사단의 전과는 많은 희생을 치르며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장교와 부사관들을 지속적으로 작전에 투입하고 있다. 이 사단의 지휘부는 정력적이고 창의적이며 잘 훈련되어 있다. 하지만 인접부대 및 상급부대와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60)

장교와 부사관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훌륭하게 지휘할 수 있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1943년 여름의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 사단들은 물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적인 면에서도 우수했다. 그래서 무장친위대의 기갑부대들은 꾸준히 중요한 전장에 투입됐다. 미국의 역사가 조지 스타인(George Stein)1960년대에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무장친위대의 역사서를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는 위태롭다고 생각되는 지역에는 무장친위대 기갑부대를 투입했다.”61) 스타인은 이러한 예로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호엔슈타우펜, 프룬즈베르크, 히틀러유겐트 사단을 들었다. 이 사단들은 1943년 말 무장친위대 기갑척탄병사단에서 무장친위대 기갑사단으로 개칭됐다.62) 스타인은 이들 사단을 엘리트 사단이라고 불렀다.63) 그렇다면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엘리트부대라고 할 수 있었는가?
군사 엘리트라는 개념은 최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무장친위대와의 관련성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64) 그리고 실제로 무장친위대는 38개 사단에 달했기 때문에 부대간의 수준 차이가 컸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장친위대 전체를 군사 엘리트로 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대를 엘리트부대로 불러야 할 것인지, 그리고 엘리트라는 용어를 분석적인 개념으로 군사적 효율성 연구에 적용하는게 완전히 부적절한지에 관해서도 논의를 해야 한다.65) 물론엘리트부대(Elitetruppen)’라는 용어는 역사적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서는 19416월의 그리스군이나 19449월 아른헴에 강하한 영국 공수부대와 같이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한 적군 부대에 대해 엘리트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66) 히틀러는 19433월에 2개의 독일군 공수사단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이 부대들을 엘리트부대라고 불렀다.67) 그리고 군사사 연구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거나 사기가 왕성한 부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부대나 좋은 장비를 갖춘 부대들을 엘리트로 불러왔다. 군사적 엘리트라는 개념을 전통적인 작전사 연구의 개념으로 본다면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엘리트부대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련군도 그렇게 생각했다. 1943년 여름에 작성된 소련군 문헌들을 보면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비킹, 그리고 GD사단을 엘리트사단(Отборные дивизии)’으로 구분하고 있다.68)  


 

한 전투에 참가한 부대들의 군사적 효율성을 비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전술적 상황, 지형, 기상 상태, 항공지원 뿐만 아니라 아군 부대의 전력과 사기, 적군 부대의 전투력 같은 요인들의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3년 동부전선 하계 전역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것을 가지고 무장친위대 지휘부의 지휘능력이 부족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사단들의 군사적 능력이 증명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LAH, 다스라이히, 토텐코프 등 3개의 무장친위대 사단의 장비 보유 현황은 평균 이상으로 우수했으며 이 때문에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특별 대우에는 반대급부가 있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항상 중점이나 위기가 발생한 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무장친위대 참전자들의 자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필자는 1942년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동부전선에서 싸운 토텐코프 사단 소속의 한 참전자를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는 토텐코프 사단의 병사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로 생각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엘리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동을 했을 뿐 입니다.”69) 1943년 여름 동부전선에서 전개된 전투들을 살펴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Operationsbefehl Nr.6. Ernst Klink, Das Gesetz des Handelns. Die Operation Zitadelle 1943, Stuttgart 1966, S.292-294에서 재인용.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92쪽에 있다.
2) Operationsbefehl Nr.6, Anlage 2. 위의 S. 296-298을 참고하라.
3) Karl-Heinz Frieser, Die Schlacht im Kursker Bogen, in: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DRZW), Bd.8: Die Ostfront 1943/44, Der Krieg im Osten und an den Nebenfronten, München 2007, S.81-208, 여기서 인용한 부분은 200쪽을 참고하라.
4) 같은책 100. 프리저의 글은 전차의 숫자를 다소 적게 산정하고 있다. Roman Töppel, Kursk-Mzthen und Wirklichkeit einer Schlacht, in: Vierteljahrshefte für Zeitgeschichte 57(2009), S. 349-384, 특히 358-361쪽을 참고하라.
5) 다행히도 치타델레 작전에 참전한 3개 야전군의 해당기간의 전투일지와 그 부록은 잘 보전되어 있다. Führungsabteilungen(Ia) im Bundesarchiv-Militärarchiv(BA-MA), RH 20-8/83(Armeeabteilung Kempf), RH 20-9/134(9.Armee), RH21-4/104(4.Panzerarmee) 등이다.
6) 육군직할대(Heerestruppen)는 사단 예하에 편제되지 않은 부대들을 뜻한다. 이 부대들은 상급사령부에서 중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예하 부대에 일시적으로 배속시켜주는 것이다.
7)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켐프분견군 사령부는 19438월 중순 제8군 사령부로 개칭되었다.(Stabsbefehl, AOK8, Ia, 16.8.1943, BA-MA, RH 20-8/95, Anlage 700, unpag.을 참고하라.) 좀 더 단순히 서술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19437월의 전투를 서술할 때에도 제8군 사령부로 통일한다.
8) 문제에 대한 분석은 Bernhard R.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Bevölkerungsverteilung und personelle Rüstung in der zweiten Kriegshäfte(1942-1944), in: DRZW, Bd 5/2: Kriegsverwaltung, Wirtschaft und personelle Ressourcen 1942-1944/45, Stuttgart 1999, S.960을 참고하라.
9)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London 2000, S.45를 참고하라.
10) ebd., S.44를 참고하라.
11)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59;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65; Zetterling u. Frankson, Kursk, S.46 통계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는 운용 가능한 차량 외에도 정비 중에 있거나 독일 본토에서 이동중이던 차량도 포함시켰다. 치타델레 작전에 일시적으로 참가한 부대의 경우는 제외했다.
12) 신형전차에는 4호전차 장포신형, 5호전차 판터, 6호전차 티거, 노획한 T-34를 포함시켰다. 1호전차, 2호전차, 3호전차, 4호전차 단포신형, 35(t), 38(t), 그리고 이 차량의 차대에 기반한 지휘전차는 구형 전차로 구분했다.
13) 여기에는 후멜과 베스페가 해당된다. 그리고 표1의 자주포항목에는 여기에 더해 자주중보병포 그릴레도 포함시켰다. 이 세 종류의 기갑차량에 관해서는 Peter Chamberlain u. Hilarz L. Dozle, Encyclopedia of German Tanks of World War Two, 2. Aufl., London 1993, S.39 f., 47 u. 108f를 참고하라.
14) 쿠르스크 공세작전에 투입된 티거는 총 147대였다. 1에는 이중 90대가 제외되어 있다. 90대는 제503, 505중전차대대 소속이었다. 티거 전차의 개발 및 실전 운용에 대해 가장 상세하고 잘 연구되어 있는 서적으로는 Thomas L. Jentz u. Hilarz L. Doyle, Germany’s Tiger Tanks, 3 Bde., Atglen(Pennsylvania), 1997-2000가 있다.
15)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87 그리고 Bericht über die Ostfrontreise des Kommandeurs der Sturmgechütz-Ersatz- undAusbildungsabteilung 200 vom 30.8. bis 22.9.1943, Abschrift, BA-MA, RH 10/58,Bl.385를 참고하라. 돌격포의 개발 과정과 기술적 특성에 관해서는 Walter J. Spielberger, Sturmgechütze. Entwicklung und Fertigung der sPak, 3.Aufl, Stuttgart 1997을 참고하라.
16) Helmut Spaeter, Die Geschichte des Panzerkorps Großdeutschland, Bd.2, Duisburg-Ruhrort 1958, S.146 u. Wolfgang Schneider, Tigers in Combat, Bd. 2, Winnipeg(Manitoba) 1998, S.49 참고하라.
17) Thomas L. Jentz, Der Panther. Entwicklung, Ausführungen, Abarten, seltene Varianten, charakteristische Merkmale, Kampfwert, Wölferscheim 1997, S.137을 참고하라.
18) LAH 사단과 GD 사단의 특별 대우에 관해서는 Jean-Luc Leleu, La Waffen-SS. Soldats politiques en guerre, Paris 2007, S.356 그리고 Sönke Neitzel u. Harald Welzer, Soldaten, Protokolle vom Kämpfen, Töten und Sterben, Frankfurt-M. 2011, S.367.등을 참고하라. 육군의 LAH라는 표현은 요제프 괴벨스가 194341일에 쓴 것이다. Elke Fröhlich(Hg.), Die Tagebücher von Joseph Goebbels, Teil II, Diktate 1941-1945, Bd.8, April-Junu 1943, München u. A. 1993, S.26을 참고하라.
19) Panzer-Lage, 21.7.1943, BA-MA, RH 10/61, Bl.125(Stand: 10,7,1943); Sturmgeschütz-Lage, 21.7.1943, BA-MA, RH 10/62, Bl.88(Stand: 10.7.1943); Pak(Sf)-Lage, 13.7.1943, BA-MA, RH 10/63, Bl.62(Stand: 30.6.1943). 이 수치는 운용 가능한 차량 뿐만 아니라 정비중에 있는 차량과 본토에서 이동중인 차량도 포함한 것이다. 두 사단은 19434월 재정비에 들어가 1943717일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20) 이점은 켐프 분견군 참모장이 194341일 제출한 Entwurf für Operationsvorschlag K에서부터 나타난다. BA-MA, RH 20-8/81, Anlage 8, unpag. 4기갑군의 치타델레 작전 최종안은 Klink, Gesetz, S.308-311을 참고하라.
21) Reisebericht des Majors i.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 91. 78돌격사단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 28대로 편성된 대전차대대 1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돌격포 31대로 편성된 제189돌격포대대도 배속받고 있었다. 이 사단에 관해서는 Ludwig Merker, Das Buch der 78. Sturmdivision, Tübingen 1965를 참고하라.
22) 에리히 만슈타인은 그의 회고록에서 무장친위대를 이렇게 묘사했다. “무장친위대는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이 달성한 전과는 희생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Erich von Manstein, Verlorene Siege, Erinnerungen 1939-1944, 13.Aufl., Bonn 1993, S.188; 그리고 Neitzel u. Welzer, Soldaten, S.368 f.를 참고하라.
23)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Die Waffen-SS 1933-1945. Leitbild, Struktur und Funktion einer nationalsozialistischen Elite, 6. Aufl., Paderborn 1999, S. 282 f.; Leleu, Waffen-SS, S. 37을 참고하라.
24) ebd., S. 239 f.를 참고하라.
25) 18기갑사단이 1943년 하계전역에서 입은 피해에 관해서는 Reisebericht des Majors i. G. Von Busse zur Heeresgruppe Mitte, 17.8.1943, BA-MA, RH 10/54, Bl.93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951을 참고하라.
26) 18. Panzerdivision, Ia, Kriegstagebuch(KTB) Zitadelle, 28.6.1943ß12.7.1943, Russland, BA-MA, RH 27-18/139, Bl. 10-12 u. 17-23을 참고하라.
27) Wolfgang Paul, Geschichte der 18. Panzerdivision 1940-1943. Mit Geschichte der 18. Artillerie-Division 1943-1944, Reutlingen 1989, S.255 f.를 참고하라.
28) Silvester Stadler(Hg.), Die Offensive gegen Kursk 1943. II. SS-Panzerkorps als Stoßkeil im Großkampf, Osnabrück 1980, S.104 그리고 108을 참고하라. 여기에는 KTB Nr.6, Generalkommando II.SS-Panzerkorps, Ia, mit Anlagen, für Zeitraum 1.7.1943-2.8.1943.의 일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이 자료의 원본은 BA-MARS 2-2/17(Textband) RS 2-2/18(Anlagen)로 소장되어 있다.
29) Der Oberbefehlshaber der 4.Panzerarmee, Tagesbefehl, 18.7.1943, BA-MA, RH 21-4/111, Bl.115; 그리고 Stadler, Offensive, S. 155 f.를 참고하라.
30) Antrag auf Verleihung des Eichenlaubs zum Ritterkreuz für Paul Hausser, National Arc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College Park, Maryland, A3343, SSO 071A(Personalakte Hausser). 바이로이트의 파이트 셰르처(Veit Scherzer)씨가 이 문서의 사본을 제공해 준데 감사드린다.
31) Schreiben Hoth an Knobelsdorff, 21.7.1943, BA-MA, RH 21-4/111, Bl.174. 크노벨스도르프가  곡엽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19431112일이었다. Veit Scherzer, Die Ritterkreuzträger. Die Inhaber des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 1939 von Heer, Luftwaffe, Kriegsmarine, Waffen-SS, Volkssturm sowie mit Deutschland verbündeter Streitkräfte nach den Unterlagen des Bundesarchivs, 2. Aufl., Ranis-Jena 2007, S.453.
32) 57보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 기간 중 주로 방어적인 엄호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98보병사단은 공세 작전이 시작되고 며칠 뒤에야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표에서 제외했다. 이 표에 포함한 부대들은 쿠르스크 공세 작전 기간 중 지속적으로 투입되었던 사단들이다. 남부집단군 예하의 사단 일부는 이미 치타델레 작전 개시에 앞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기 위해 194374일 보병을 투입해 소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여기에는 74일에 발생한 인명 피해도 포함했다.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 prepared by Office of the Chief of Staff, US Army Concepts Analysis Agency, Bethesda(Maryland) 1998, Appendix F, 문서는 다음 주소에서 찾을 수 있다. http://dialspace.dial.pipex.com/town/avenue/vy75/data.htm(마지막 검색일 201163). 이 연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onhand strength‘라는 용어는 다소 혼동을 줄 수 있다. 이 용어의 개념(onhand effective personnel present for duty)에 대응하는 독일어 용어는 Tagesstärke이다. 그러나 1차사료와 대조해서 분석한 결과 이 보고서에 사용된 경우는 Iststärke에 해당된다. 독일어에서 병력 현황을 나타내는 용어에 관해서는 Niklas Zetterling u. Anders Frankson, Analyzing World War II Eastern Front Battles, in: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1(1998), S> 176 f. 그리고 Kroener, Menschenbewirtschaftung, S. 839를 참고하라.
* 역자주: Kursk Operation Simulation and Validation Exercise-Phase II(KOSAVE II)PDF판은 https://apps.dtic.mil/dtic/tr/fulltext/u2/a360311.pdf 에서 다운로드 가능.
33) 2차대전 전 기간을 다루는 연구들도 유사한 결론을 내놓고 있다. Wegner, Soldaten, S. 282; Rüdiger Overmans,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München 1999, S: 295 f.; Leleu, Waffen-SS, S. 725.
34) 12기갑사단은 치타델레 작전에 적은 전력만을 투입했기 때문에 이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Panzer-lage, 11.7.1943, BA-MA, RH 10/60, Bl. 57ß59(Stand: 30.6.1943); Sturmgeschütz-Lage, 11.7.1943, BA-MA, RH 10/62, Bl.92(Stand: 30.6.1943); Ausfälle H.Gr.Süd, Stand 14.7.1943, BA-MA, RH 10/64, Bl.67; Ausfälle H.Gr.Mitte, Stand 14.7.1943(Berichtigt), BA-MA, RH 10/65, Bl.12.
35) 치타델레 작전에 종결될 때 까지 이런 추세는 변하지 않았다. 2SS기갑군단은 1943723일 총 손실이 전차 31대와 돌격포 5대라고 보고했다. Stadler, Offensive, S.165를 참고하라.
36) Helmut Heiber(Hg.), Hitlers Lagebesprechungen. Die Protokollfragmente seiner militärischen Konferenzen 1942-1945, Stuttgart 1962, S.373.
37) Reisebericht des Majors i.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2.
38) Sönke Neitzel, Des Forschens noch wert? Anmerkungen zur Operationgeschichte der Waffen-SS, in: Militärgeschichtliche Zeitschrift 61(2002), S.403-429를 참고하라. 여기에 인용한 부분은 408쪽이다.
39) Leleu, Waffen-SS, S.287 f.를 참고하라.
40) Kurt Mehner, Die Waffen-SS und Polizei 1939-1945, Führung und Truppen, Norderstedt 1995, S. 145 f.을 참고하라.
41) Zustandsberichte der SS Panzergrenadierdivision Leibstandarte SS Adolf Hilter, Meldung vom 1.7.1943, BaßMA, RH 10/312, Bl.2.를 참고하라.
42) Rudolf Lehmann, Die Leibstandarte, Bd. 3, Osnabrück 1982, S. 218-220, 그리고 Hubert Meyer, Kriegsgeschichte der 12.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Bd. 1, 3. Aufl., Coburg 1996, S. 11-16.를 참고하라.
43) Zustandsberichte der SS-Panzergrenadierdivisionen Das Reich u. Totenkopf, Meldungen vom 1.7.1943, BA-MA, RH 10/313, Bl.1 u. RH 10/314, Bl. 1.을 참고하라.
44) 안타깝게도 GD사단의 194371일 보고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BA-MA, RH 10/209)
45) Zustandsberichte der 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1, Bl. 2.를 참고하라.
46) Zustandsberichte der 12.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50, Bl. 1.을 참고하라.
47) Zustandsberichte der 6. Panzerdivision, Meldung vom 1.7.1943, BA-MA, RH 10/145, Bl. 1.을 참고하라.
48) KTB AOK 6, Ia, Bd.5, 17.7.1943-17.8.1943, BA-MA, RH 20-6/303, Bl. 123-149.를 참고하라.
49) Reisebericht des Majors i. G. Ferber zur Heeresgruppe Süd, 17.8.1943, BA-MA, RH 10/54, Bl.113.
50) Bericht von Oberst Karl Decker, Kommandeur der Panzerbrigade 10, vom 17.7.1943, Abschrift, BA-MA, RH 10/54, Bl. 58.를 참고하라.
51) Bericht von Oberstleutnant i. G. Graf von Kielmansegg über einen Flug zur 9.Armee am 11.7.1943, BA-MA, RH 10/54, Bl. 61에서 발췌.
52) Panzer-Brigade 10, Gliederung und Offz.- Stellenbesetzung der Panther- und Tiger-Einheiten, 31.8.1943, BA-MA, RH 10/56, Bl. 135.를 참고하라.
53) Ewald Klapdor, Mit dem Panzerregiment 5 Wiking im Osten, Siek 1981, S.160 f.(여기서는 HenriciHeinrici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KTB XXXX. Panzerkorps, Ia, Bd. 3, 1.8.1943-15.8.1943, BA-MA, RH 24-40/54, Eintrag vom 4.8.1943 그리고 Tagesmeldung an das PzAOK 1 vom 4.8.1943, unpag.를 참고하라. 다음날 비킹 사단장 헤르베르트 길레(Herbert Gille) SS소장은 비킹 사단은 필요한 준비와 지형 정찰을 하지 않으면 계획된 공격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위의 일지 194385일 참조.
54) 무장친위대의 특수한 위치를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는 제4기갑군의 1943713일 일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4기갑군 참모장은] 남부집단군 참모장과 상의하면서 무장친위대의 병력 현황과 보충은 완전히 별도의 체계로 이루어지고 있어 제4기갑군이 이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BA-MA, RH 21-4/104, Bl. 157).
55) AOK 8, Fernschreiben vom 20.8.1943, 19.3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28, unpag. 이 시사점이 많은 문서에 관해 알려준 베른의 카타리나 슈트라웁(Katharina Straub)에게 감사한다. 당시 다스라이히 사단 병기참모(1. Ordonnanzoffizier)의 회고록은 뵐러가 크뤼거와 갈등을 빚게 된 계기가 8군의 다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우리 사단 예하 부대를 계속해서 전용하는 것에 대해크뤼거가 뵐러에게 강력히 항의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뵐러는 크뤼거가 항의하자 남부집단군 전체가 전례없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이상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에 기반한 지휘 방식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지휘관이 반대하더라도 전투력이 양호한 부대에 방어 작전의 부담을 지우는 비정상적인 조치를 계속 취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Rolf Diercks, Lebenserinnerungen- überschattet vom Irrweg im Dritten Reich. Autobiographische Schliderungen von den Anfängen der Weimar Republik bis zum Beginn des 21. Jahrhunderts, München/Straubing 2009[Ms]., S.413). 이 회고록의 내용은 크뤼거가 1943820일과 822일 힘러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크뤼거는 힘러에게 다스라이히 사단이 분산 운용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BA-MA, M841, Akte 4, unpag.을 참고하라.
56) Scherzer, Ritterkreuzträger, S. 479.를 참고하라.
57) Die Wehrmachtberichte 1939-1945, 3 Bde., Köln 1989를 참고하라. 여기 인용한 부분은 Bd. 2, S. 549.
58)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0.40 Uhr, an Heeresgruppe Süd, Abschrift, BA-MA, RH 20-8/95, Anlage 702, unpag.를 참고하라. 토텐코프 사단은 1943818일 독일국방군 공식보도에 언명되었다. Die Wehrmachtberichte, Bd.2, S.542.를 참고하라.
59) AOK8, Fernschreiben vom 17.8.1943, 19.35 Uhr, u. 20.8.1943, 22.00 Uhr, an III. Panzerkorps, Abschriften, BA-MA, RH 20-8/95, Anlagen 707 u. 729, unpag.
60) Generalkommando III. Panzerkorps, Beurteilung des inneren Kampfwertes der Divisionen, 2.11.1943, BA-MA, RH 20-8/89, Anlage 113, unpag. 이 문서는 19431020일부터 1125일까지 제3기갑군단 군단장 대행을 맡은 하인츠 치글러(Heinz Ziegler) 중장이 서명을 했다.
61) George H. Stein, Geschichte der Waffen-SS, Düsseldorf/Wiesbaden 1999(1967), S.186.
62) Mehner, Waffen-SS, S.166-219를 참고하라.
63) Stein, Geschichte, S. 186 u. 260 f.
64) 특히 Jens Westermeier, Die Junkerschulgeneration- eine militärische Elite des Führers? Ergebnisse einer Untersuchung der Absolventen der SS-Führerschulen, in: Arbeitskreis Militärgeschichte e.V., Newsletter 35(2010), S. 8-13.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65) 옌스 베스테마이어와 얀 에릭 슐테는 201156일부터 7일까지 열린 독일 제2차세계대전사 편찬위원회와 뷔르츠부르크 대학 역사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무장친위대의 역사를 다루는 콜로키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H-SOZ-U-KULT(http://hsozkult.geschichte.hu-berlin.de/tagungsberichte/id=3790)에 올라온 페터 리프(Peter Lieb)의 글과 필자가 Militärgeschichtlichen Zeitschrift 70(2011), S.99-104.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라.
66) Die Wehrmachtberichte, Bd.1, S. 565 u. Bd. 3, S. 262.를 참고하라.
67) Heiber, Lagebesprechungen, S. 192.를 참고하라.
68) Iz otcëta o boevych dejstvijach 5-j Gvardejskoj Tankovoj armii za period s 7 ijula po 24 ijulia 1943 goda(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 S. 3; Otcët o boevych dejstvijach 29 tankovogo korpusa za period s. 7.7. po 24.7.43 g.(194377일 부터 724일까지 제29전차군단의 전투보고) 포돌스크 소재 러시아연방 국방부 중앙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한 사본으로 포츠담의 독일연방군사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5근위전차군의 전투보고서는 GD 사단도 SS 사단으로 잘못 구분하고 있다.
69) 6SS기갑척탄병연대 테오도르 아이케에서 하사로 복무했던 하인츠 베허(Heinz Becher)2010919일에 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