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군사사가 니클라스 세테를링(Niklas Zetterling)의 Normandy 1944: German Military Organization, Combat Power and Organizational Effectiveness의 개정판을 읽었습니다. 큰 틀은 2000년도에 페도로비츠 출판사에서 냈던 초판과 같습니다. 전면개정판이라고 해서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편 입니다. 하지만 좋은 저작이고 노르망디 전역을 공부하는데 필수적인 자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테를링은 2019년에 낸 이 개정판에서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근래의 연구들을 반박하려 합니다. 특히 독일군이 생산한 1차사료의 신뢰성을 비판하는 연구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세테를링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연구는 독일 연구자 뤼디거 오버만스(Rüdiger Overmans)가 추산한 제2차세계대전기 독일군의 인명피해입니다. 세테를링은 오버만스가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에 대한 자료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군의 인명손실을 크게 과장했다고 비판합니다. 오버만스의 연구에서는 특히 1944~1945년 동부전선에서 발생한 독일군의 인명손실이 기존의 통설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테를링은 이게 자료를 잘못 이해한데서 온 오류라고 봅니다. 그는 독일군의 사상자 보고 체계는 전반적으로 정확한 편이고 독일군의 인명손실은 공식기록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이 연합군 보다 높지 않다고 주장하는 미국측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봅니다. 특히 그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피터 맨수어(Peter Mansoor)입니다. 세테를링은 미군이 생산한 자료만 일방적으로 인용하는 맨수어와 같은 연구자의 글은 신뢰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저도 이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맨수어는 The GI Offensive in Europe에서 미군의 전투효율성이 전쟁 말기로 갈수록 크게 향상되어 독일군을 능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이 지적한 것 처럼 맨수어는 독일측 사료를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교차검증이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않은 겁니다. 미국에서 나오는 저작 중에는 이런 문제점을 가진 것이 꽤 많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D-Day 같은 저작이 대표적이죠.
피터 맨수어가 자신의 주 논지를 뒷받침 하기 위해 인용한 존 슬로언 브라운(John Sloan Brown)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존 슬로언 브라운은 통계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듀푸이는 통계기반 연구를 통해 독일군이 미군과 영국군에 비해 높은 전투효율성을 발휘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 듀푸이의 연구를 비판하는 연구자들이 존재하지요. 세테를링은 독자적으로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검증하고 이것이 신뢰성이 높음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그는 듀푸이의 연구 방법론을 신뢰하는 입장이고 브라운의 듀푸이 비판은 오독과 자료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했다고 낮게 평가합니다.
오머 바르토브(Omer Bartov)의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바르토브는 동부전선의 전투가 서부전선 보다 더 격렬했으며 이때문에 인명피해도 더 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테를링은 인명손실의 총계가 아니라 사단 단위 평균 손실로 평가하면 동부전선과 노르망디 전역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노르망디 전역에서 발생한 사단당 인명손실이 동부전선을 상회하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구판에 비해 수정된 부분이 많지는 않지만 노르망디에 투입된 독일군 부대의 전투력과 손실을 파악하는데 필수적인 저작입니다. 그리고 독일 자료를 독해하는 방식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2020년 3월 16일 월요일
2019년 7월 3일 수요일
쿠르스크 전투 항공전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가 나옵니다
통계 기반 작전연구로 유명한 듀푸이 연구소의 소장 크리스토퍼 로렌스가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새 연구를 내놓는다고 합니다. 제목은 Aces at Kursk 라는군요. 쿠르스크 돌출부 남부에서 전개된 항공전에 대한 통계 기반 연구입니다. 로렌스는 이미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항공전의 양상을 잘 정리한 바 있는데, 이 연구를 위해 94쪽 분량의 새로운 내용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또한 항공전 통계자료만 77쪽에 달한다고 하는군요. 쿠르스크 전투는 물론 독소전쟁 항공전의 양상을 이해하는데도 필수적인 중요한 저작이 될 것 같습니다. 로렌스의 전작인 Kursk: The Battle of Prokhorovka와 이 책의 축약판인 The Battle of Prokhorovka: The Tank Battle at Kursk, the Largest Clash of Armor in History에도 항공전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만 부차적으로 다뤄진 면이 있지요. 집필은 거의 마쳤다고 하니 조만간 책으로 접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2009년 8월 1일 토요일
약간의 추가 설명
지난번의 글, 몇 가지 궁금한 점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우마왕님이 지적하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댓글의 특성상 짤막한 답변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것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지요. 짧은 답글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인 완결성은 갖춰야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루어 졌으니 제가 최초의 질문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만 약간의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분들이 있으면 곤란할 테니 말입니다.
처음에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우마왕님이 기본적인 논지인 전차포 문제에 이외에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추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번 이야기를 오가게 한 ‘우마왕님의 과연 서방 전차포가 소비에트 전차포를 넘어선 적이 있기는 했나?’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굵게 표시한 부분들은 우마왕님이 근거로 제시하시는 기술적 문제로는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것 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마왕님께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실제 통계상으로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가 서방의 105mm 탑재 전차를 능가한다는 것과 1960-70년대에 서방측이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와 자신들의 105mm 탑재전차를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우마왕님은 기본적으로 실제 성능을 바탕으로 당시의 서방도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대해 열세를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이끌어 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실제로 서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사례인) 1974년에 미육군의 Dupuy 장군이 M60과 T-62를 fair match로 평가한 사례를 들어 서방이 과연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떡실신’을 당할 정도로 열세를 느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우마왕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번 글에서도 역시 장비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셨습니다.(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원문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인용한 Dupuy 장군의 T-62에 대한 평가는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교전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 입니다. Dupuy 장군은 T-62를 상대로 M60을 운용한 이스라엘의 평가를 기초로 두 전차를 fair match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당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윗 글에서 나타나듯 Dupuy 장군은 M60과 T-62의 전차 자체의 성능은 실전에서 큰 격차를 보일 정도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전차 자체의 성능에서도 주포의 위력이 아니라 사격통제체계 때문에 M60이 T-62에 대해 원거리 교전능력의 우위를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우마왕님이 포탄의 성능 개선을 주된 근거로 해서 미국측의 판단을 평가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upuy 장군은 우마왕님이 추정하신 요인 중에서 사격통제장치는 언급하고 있지만 주된 논지의 근거인 포탄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마왕님이 중점을 두신 것 처럼 1973년 영국이 개발한 L52A3등 포탄 문제가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마왕님이 사용하신 방법, 즉 현재 알고 있는 무기의 통계적 성능만으로 당시의 의도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질문을 드렸던 것 입니다.
두 번째로, 역시 제가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이 실제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 질문을 드린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굵게 강조한 부분에 대해 우마왕님은 다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우마왕님께서는 저의 질문에 대해서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까지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 하셨지만 첫 번째 인용문에서 강조한 것 처럼 먼저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서방의 방어 전술에 대한 설명’으로 논지를 확대 하신 것은 우마왕님입니다. 우마왕님께서 먼저 추론에 의거해 서방의 방어전술에 대한 언급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경우에도 실제로 미국 등 서방이 어떤 구상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다면 이런 추정은 논리적으로 무리일 것이고 논지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의 근거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 드린 것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마왕님 께서도 ‘무기의 성능에 바탕을 둔 추정’ 외에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으며 논의가 확대되는 문제가 있다고 답변 하셨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먼저 약간의 질문을 드린 이유는 실제 병기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도를 추정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인 만큼 ‘과거에 가능했던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과는 괴리를 보일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마왕님께서 현재 설명하기 어려운 60-70년대 당시 서방측의 판단까지 논지를 확대하지 않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실제 무기의 성능 문제로 이야기를 한정했다면 논리적으로 훨씬 좋은 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미 공통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었으니 처음에 제가 질문을 드렸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만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우마왕님께서 논리적인 문제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흥미로운 정보들을 소개하신 덕분에 매우 유익한 토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마왕님이 지적하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댓글의 특성상 짤막한 답변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 것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경우가 많지요. 짧은 답글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인 완결성은 갖춰야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오는 것은 좀 곤란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루어 졌으니 제가 최초의 질문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만 약간의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분들이 있으면 곤란할 테니 말입니다.
처음에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우마왕님이 기본적인 논지인 전차포 문제에 이외에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추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번 이야기를 오가게 한 ‘우마왕님의 과연 서방 전차포가 소비에트 전차포를 넘어선 적이 있기는 했나?’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해당 포스팅의 배경이 된 1960-61년에는 서방에서 자신들이 우위를 가졌다고 착각할 수 있었지만 소비에트는 다음해에 115mm 활강포와 BM-3/6 APFSDS탄을 장착한 T62를 등장시켜 잠시나마 우위를 가졌다는 서방의 착각을 떡실신시킵니다.
(1970년대 이색렬의 IMI가 105mm APFSDS탄 M111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독일을 시작으로 서방 각국이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에 나섰다는 사실이야말로 당시 서방 각국이 소비에트 전차포에 대한 열세임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서독도 레오1에 만족하지 못하고 MBT/KPz70 계획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굵게 표시한 부분들은 우마왕님이 근거로 제시하시는 기술적 문제로는 설명을 하기가 어려운 것 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마왕님께 ‘미국이나 서방이 T-62에 열세를 느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실제 통계상으로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가 서방의 105mm 탑재 전차를 능가한다는 것과 1960-70년대에 서방측이 소련의 115mm 탑재 전차와 자신들의 105mm 탑재전차를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우마왕님은 기본적으로 실제 성능을 바탕으로 당시의 서방도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대해 열세를 느꼈을 것이라는 가정을 이끌어 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실제로 서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사례인) 1974년에 미육군의 Dupuy 장군이 M60과 T-62를 fair match로 평가한 사례를 들어 서방이 과연 소련의 115mm 전차포에 ‘떡실신’을 당할 정도로 열세를 느꼈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런데 우마왕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다음번 글에서도 역시 장비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셨습니다.(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원문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2-A. 1974년에 Dupuy 장군이 T62에 대해 M60과 fair match라는 평가의 근거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전- 이후 상황을 돌이켜보면 대략 3가지 정도의 고려가 가능한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1973년 영국에서 105mm L7 전차포를 위한 새로운 APDS-T 포탄인 L52A3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L28과 관통력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1500미터를 넘기면 명중을 장담하기 힘들던 L28과 달리 L52A3은 제대로 2km 거리의 목표를 맞출 수 있었던 듯 합니다. 아울러 T62 초기 생산형에선 조준체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탄착 조절이 쉽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으로 봅니다.
(중략)
2-C. 다시 말해 Dupuy 장군이 T62와 M60이 fair match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HEAT 교전 능력은 비슷한데 떨어지는 AP 능력도 신형탄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었고, T62의 화기관제 능력이 M60 보단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인용한 Dupuy 장군의 T-62에 대한 평가는 욤 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교전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 입니다. Dupuy 장군은 T-62를 상대로 M60을 운용한 이스라엘의 평가를 기초로 두 전차를 fair match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당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Although the Israelis prefer the Centurion and M-60 tanks to Soviet armor, these differences do not account for the difference in performance on the battlefield. For example, in one action Israeli forces equipped with Soviet tanks, although out numbered at least two to one, reportedly killed 56 Arab tanks without losing one. Israeli tank crews opened fire at ranges out to 4,000 meters and obtained kills at that range. They closed with the enemy and obtained kills at under 200 meters. Their tank crews are generally stabilized and in an extreme case had been together for 14 years. Although there was some scrambling caused by erratic mobilization, the quality of the crews made the main difference. Apparently, the T-62 tank and the M-60 tank are a fair match. Therefore, during the next 10 years battlefield outcome will depend upon the quality of the troops rather than the quality of the tanks.
(중략)
The Israelis rank the M-60 tank above the T-62 in performance but they find three problems with it which they intend to correct in their own tank. The first is that the ammunition storage in the turret of the M-60 causes a much higher percentage of catastrophic losses. More often than not the entire turret was entirely blown off the tank with a turret hit. Secondly, they found the hydraulic fluid to be inflammable causing crew injuries and tank losses by fire. Thirdly, they did not like the mounting or the functioning of the 50 cal machine gun in the cupola.
Dupuy to Abrams(1974. 1. 14), Richard M. Swain(198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p.71-72********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our weapons and the weapons manufactured by the Soviet Union are in many respects very similar. For example, in the middle of this particular chart, and here again we're talking about the probability of hit over range, you can see that the Russians' T62 tank, their new best tank, and our M60A1 tank have similar characteristics. Their tank is a little bit better in close, because it has a higher muzzle velocity. Our tank is just a little bit better at the extended ranges because we have better fire control and range estimating equipment. Our new tank, the M60A3, will have even better effectiveness at the extended ranges.
Implications of the Middle East War on U.S. Army Tactics, Doctrine and Systems, Richard M. Swain(198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82
윗 글에서 나타나듯 Dupuy 장군은 M60과 T-62의 전차 자체의 성능은 실전에서 큰 격차를 보일 정도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전차 자체의 성능에서도 주포의 위력이 아니라 사격통제체계 때문에 M60이 T-62에 대해 원거리 교전능력의 우위를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으로 볼 때 우마왕님이 포탄의 성능 개선을 주된 근거로 해서 미국측의 판단을 평가한 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Dupuy 장군은 우마왕님이 추정하신 요인 중에서 사격통제장치는 언급하고 있지만 주된 논지의 근거인 포탄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마왕님이 중점을 두신 것 처럼 1973년 영국이 개발한 L52A3등 포탄 문제가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마왕님이 사용하신 방법, 즉 현재 알고 있는 무기의 통계적 성능만으로 당시의 의도를 추정하려는 시도는 논리적으로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질문을 드렸던 것 입니다.
두 번째로, 역시 제가 미국을 포함한 서방측이 실제로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 질문을 드린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만일 저 댓글들의 주장대로 레오2 이전의 서방 전차가 전차전에서 우위를 보일 수 있었다면 대 WTO 방어전술은 아마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차의 전투력에 분명한 우위를 갖지 못했기에 1980년대까지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지상군을 막기 위해 공격 헬리콥터와 전술핵을 조합한 방어대책이 거론되었던 게고 80년대 중후반, 아니 사실상 9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 각국, 특히 미국이 T72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던 이유가 단순히 프로파간다 때문이었을까는 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요.
그리고 굵게 강조한 부분에 대해 우마왕님은 다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우마왕의 의견이 어디까지나 당시 가용하던 전차포탄들의 데이터와 당대에 개발된, 혹은 개발중이던 전차의 ROC등을 비교해서 내린 정황증거에 기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애초의 논제는 서방 전차포는 항상 소비에트보다 우위에 있었는가의 여부, 최소한 당대에 있어선 사실이 아니다."였지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짓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사실 '미국과 서방이 실제로 어떤 판단을 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시점에서의 획득여부가 꽤나 의문스러우니 말입니다.
우마왕님께서는 저의 질문에 대해서 NATO의 대 WTO 서유럽 침공 방어계획까지 이야기를 확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 하셨지만 첫 번째 인용문에서 강조한 것 처럼 먼저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서방의 방어 전술에 대한 설명’으로 논지를 확대 하신 것은 우마왕님입니다. 우마왕님께서 먼저 추론에 의거해 서방의 방어전술에 대한 언급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이 경우에도 실제로 미국 등 서방이 어떤 구상을 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다면 이런 추정은 논리적으로 무리일 것이고 논지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글의 근거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 드린 것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마왕님 께서도 ‘무기의 성능에 바탕을 둔 추정’ 외에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으며 논의가 확대되는 문제가 있다고 답변 하셨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먼저 약간의 질문을 드린 이유는 실제 병기들의 성능을 바탕으로 과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도를 추정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인 만큼 ‘과거에 가능했던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판단’과는 괴리를 보일 위험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마왕님께서 현재 설명하기 어려운 60-70년대 당시 서방측의 판단까지 논지를 확대하지 않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실제 무기의 성능 문제로 이야기를 한정했다면 논리적으로 훨씬 좋은 설명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미 공통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가 되었으니 처음에 제가 질문을 드렸던 이유에 대해서도 이만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우마왕님께서 논리적인 문제에 대한 피드백과 함께 흥미로운 정보들을 소개하신 덕분에 매우 유익한 토론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육군은 배가 고프다!!!
아랫 글에서 듀푸이 장군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나서…
카터 행정부는 엉망이 된 경제 때문에 국방비 감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터는 국방부가 ‘뻥을 쳐서’ 예산을 뜯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하자 마자 당장 국방비를 70억 달러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1) 카터의 국방비 삭감계획에 각 군은 바짝 긴장했고 특히나 육군은 카터가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을 통해 육군의 예산을 삭감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카터가 주한미군 전투부대를 철수하라는 행정명령 13호에 서명하는 등 육군을 열받게 하고 있던 1977년 5월, 듀푸이 장군은 미육군전력사령부(FORSCOM)와 미육군교육사령부(TRADOC)의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줄요약 : 육군은 공군새퀴들 처럼 돈 처먹는 하마도 아닌데 절라 억울해염.
1) Dale R. Herspring(2005),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 Military Relation from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p.244
잡담 하나. 원래 M60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자료를 읽다보니 이게 더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잡담 둘. 듀푸이 장군이 상원에 XM-1 개발 비용을 늘려보려고 보낸 편지도 있는데 그것도 좀 재미있습니다.
잡담 셋. 레이건 시절에는 국방예산이 크게 증액되는데 그것도 마냥 좋은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더군요.
카터 행정부는 엉망이 된 경제 때문에 국방비 감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카터는 국방부가 ‘뻥을 쳐서’ 예산을 뜯어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하자 마자 당장 국방비를 70억 달러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1) 카터의 국방비 삭감계획에 각 군은 바짝 긴장했고 특히나 육군은 카터가 해외 주둔 미군의 감축을 통해 육군의 예산을 삭감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카터가 주한미군 전투부대를 철수하라는 행정명령 13호에 서명하는 등 육군을 열받게 하고 있던 1977년 5월, 듀푸이 장군은 미육군전력사령부(FORSCOM)와 미육군교육사령부(TRADOC)의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먼저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육군전력사령부와 유럽주둔미군은 모두 내가 ‘집중성’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희생양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집중성’ 때문에 우리는 비용의 상승과 동시에 에너지의 고갈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중략)
두 번째로 닥치고 있는 것이 비용(문제)입니다.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가 종종 이용하는 랭글리(Langley) 공군기지에는 72대의 F-15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즉 1개 비행단 입니다. F-15 한 대는 1800만 달러나 합니다. 한 대당 1백만 달러인 XM-1 18대를 살 수 있는 돈 입니다. (XM-1) 18대에 72를 곱하면 우리 육군이 유럽에 배치한 전차를 비용으로 환산한 것의 80%가 됩니다. 또한 기계화보병전투차량은 M113 장갑차 보다 여덟 배 비쌉니다. 기계화보병전투차량은 마더 만큼 비싸지 않으며 영국군의 보병수송장갑차 만큼 비싸지 않지만 M113 보다는 여덟 배가 비쌉니다. 이것은 보병의 편성과 훈련, 전투에 혁명을 가져올 것 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그것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비용 문제는 우리를 육군에서 이상한 위치에 처하게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육군의 예산으로 모든 부대를 이렇게 값이 비싼 무기로 현대화 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으시다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무기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획득할 것인지에 대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 입니다.
I want to make two points. One is that all of you in FORSCOM and in USAREUR are about to be the victims of what I would call convergence. Now, by that I mean we are faced with a problem similar to running out of energy with the price going up at the same time.
…
The second thing coming at you is cost. Here is a rather interesting example. Parked over at Langley Air Force Base, from which we depart from time to time, are 72 F-15 fighter aircraft. That's a wing. Each F-15 costs 18 million dollars - that is equivalent to 18 XM-1 tanks, at a million dollars a copy. If you multiply 72 times 18 you have the value of 80% of all the tanks the Army has in Europe. Also the MICV is 8 times more expensive than the M113 Armored Personnel Carrier. It is not as expensive as the Marder, nor is it as expensive as the new British infantry carrier, but it does cost 8 times more than the M113. It is going to revolutionize infantry organization, training and fighting. If you don't believe that, you haven't seen it.
Cost is putting us into a very peculiar position in the United States Army. It is not at all clear to me that the Army's budget is going to permit us to modernize the whole force with such increasingly expensive equipment.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if you asked me my candid opinion, I would say it will not, so we have to make some very tough decisions about where you are going to put that new equipment and how fast you are going to buy it.
Speech of General William Dupuy(1977. 5. 24), Richard M. Swain(1995), Selected Papers of General William E. Dupuy, pp.228-229
한줄요약 : 육군은 공군새퀴들 처럼 돈 처먹는 하마도 아닌데 절라 억울해염.
1) Dale R. Herspring(2005),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 Military Relation from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p.244
잡담 하나. 원래 M60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자료를 읽다보니 이게 더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잡담 둘. 듀푸이 장군이 상원에 XM-1 개발 비용을 늘려보려고 보낸 편지도 있는데 그것도 좀 재미있습니다.
잡담 셋. 레이건 시절에는 국방예산이 크게 증액되는데 그것도 마냥 좋은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더군요.
2009년 6월 19일 금요일
만만한게 제주도...
서산돼지님이 '닉슨 前부통령의 '1박 2일' : 푸대접과 오뉴월 서리 복수'라는 글을 쓰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특히 흥미있었던 부분은 박정희가 미국측에 제주도를 미군 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부분입니다. 재미있게도 이승만도 미국측에 제주도를 해군기지로 제공할 것을 제안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미육군부 차관 드레이퍼(William H. Draper. Jr)는 주한미군철수와 남한 단독선거 문제로 1948년 3월 서울을 방문합니다. 이때 드레이퍼는 향후 수립될 단독정부의 수반으로 유력했던 이승만을 만나 회견을 가집니다. 이 두 사람의 회견은 1948년 3월 28일 조선호텔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회견에는 훗날 군사사가로 유명해지는 듀푸이(Trevor N. Dupuy) 중령이 육군부차관 보좌관으로 동석하고 있었습니다. 듀푸이 중령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이박사는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두는 것을 고려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미국정부가 제주도에 영구 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매우 반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드레이퍼 차관보는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Dr. Rhee said that he had heard it suggested that the United States might wish to have a Naval Base on Cheju Island. He Said that he felt confident that when a Korean Government is established, that the Koreans would be very willing to have the United States establish a permanent base there. (Mr. Draper made no comment).
Conference between Under Secretary Draper and Mr. Syngman Rhee, on 28 March 1948(1948. 4. 10), RG 319 Army Staff Plans & Operations Division Decimal File 1946-48 091.Korea Box 20 (Folder #3-1)
물론 미국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둘 생각은 커녕 하루라도 빨리 주한미군을 모조리 철수시킬 계획 뿐이었습니다. 이승만은 노련한 정치가 답게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싶다는 뜻을 돌려서 밝힌 것이죠. 물론 인용문에 나와 있듯 드레이퍼는 이승만의 떡밥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만만하게 제주도라는 느낌입니다. 말 그대로 수난의 섬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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