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1차대전 이전 프랑스군의 포병

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

1950년대에 무장친위대 출신 퇴역군인들은 상호원조회(HIAG, Hilfsgemeinschaft auf Gegenseitigkeit)로 불리는  참전군인단체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HIAG의 각종 대외활동은 외부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은 전쟁기간중 나치당의 무장조직인 무장친위대에 소속되었다는 점 때문에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고 이때문에 전직 무장친위대원들은 공개적으로 무장친위대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HIAG에 가입한 회원은 2만명을 기록한 뒤 1960년에 이르면 기존의 회원조차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문에 하우서(Paul Hausser)길레(Herbert Otto Gille)와 같은 무장친위대의 유명인사들은 무장친위대가 나치의 전쟁범죄와 '거리가 먼' 조직이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예를들어 길레는 1953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의 집회에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무장친위대에게 전쟁범죄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고 성토했습니다. 또한 HIAG의 기관지 중 하나인 Der Freiwillige는 1957년 6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무장친위대를 친위대보안국(SD, Sicherheitsdienst), ..... 그리고 강제수용소 경비원들과 동일한 부류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최근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무장친위대는) 이러한 조직들과 비슷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해군, 공군 또는 육군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무장친위대는) 다른 병종과 같은 군사조직이었으며 전투에 임할때나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상대할 때에 있어서나 군사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Large, David Clay. 'Reckoning without the Past: The HIAG of the Waffen-SS and the Politics of Rehabilitation in the Bonn Republic, 1950-1961',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Vol.59 No.1(Mar., 1987) pp.84~85 

기이하게도 전직 친위대가 또 다른 전직 친위대에게 전쟁범죄 책임을 떠넘기는 양상이 된 것 이었습니다. 물론 무장친위대는 전쟁범죄로 부터 자유롭지도 않았고 점령지의 민간인들에 대해 항상 규율을 엄격히 준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1990년대에 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때 까지 전쟁범죄 문제를 두고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이 형성되었는데 육해공군등 국방군은 친위대 조직(무장친위대+일반친위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무장친위대는 일반친위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였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군요.

육해공군 : 우리는 친위대와는 달리 깨끗한 군인이랍니다.

무장친위대 : 우리는 일반친위대와는 달리 깨끗한 군인이랍니다.

일반친위대 : 이런 위선자 새퀴들!!!


다행히도 1990년대 이후로는 나치 시기의 범죄연구가 국방군의 전쟁범죄로 까지 확산되어 더 이상은 이런 기이한 도덕적 먹이사슬이 존재할수 없게 되었지요.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대영제국의 '확실한' 몰락

구글리더를 확인하던 중 황당한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Just five bullets for each soldier

이 기사에 따르면 토니 블레어 내각 당시 대중여론을 의식해서 이라크전쟁 참전을 비밀리에 준비하는 바람에 보급 등 전투지원 준비가 부실하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일부 부대는 병사당 다섯발의 실탄만 지급한 상태로 전투에 나가야 했고 일부 부대는 방탄조끼 등 개인 방호장비도 부족한 상태에 처해있었다는 것 입니다. 여기에 군용 무전기는 열에 약해 쉽게 고장나는 형편없는 물건이 많았다고 하는군요;;;;

이 외에도 기사를 읽다 보면 영국군의 비참한 실상이 잘 나타납니다.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차는군요.

100년전의 영국 장군들은 이런날이 오리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김일영 교수 사망

어제 밤에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김일영 교수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암 투병 중이시긴 했으나 마지막으로 뵈었던 2주전 까지도 상태가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그 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학자의 중요한 덕목인 성실함을 갖춘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반대쪽에 계신 분이었지만 배울 점이 많은 좋은 분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입니다.

김일영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야당의 올바른 자세???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소개해봅니다. 1965년 초 한일회담 타결이 가시화 된 시점의 이야기 입니다.

야당지도자들은 한일회담에 대하여 두가지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는 한일회담은 어차피 타결되어야 하는 것인데 국민의 반일감정에 비추어 타결한 정부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적당히 반대한다는 명분과 기록만 남겨두고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타결하게 하자는 것인데 지금 몇몇 재야정치인은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둘째는 이번의 한일교섭은 한국측에 매우 불리한 것이어서 극한투쟁을 해서라도 반대해야 한다, 그 반대투쟁에 국민의 반일감정이 가세하면 현정권을 아주 무력하게 거세하거나 또는 더 나아가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으로 민정당 주류에서 작년에 그와같은 전략을 따랐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일교섭이 대단원을 향해 쾌속으로 달리는 이때 야당측이 어떤 전략을 택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현실이 지나치게 앞질러 가고 있으니 둘째의 전략을 택할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첫째의 전략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南載熙*, 「剩餘價値만 남기는 政治」, 靑脈 第7號(1965. 4), 15쪽

*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오늘날의 야당 또한 민감한 일이 발생한다면 위의 두가지 중 한가지 테크를 타겠지요. 이래서 야당 노릇 하는게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한 무장친위대 대원의 전쟁범죄

구글리더에 쌓여있는 아직 읽지 않은 글들을 정리하던 중 2차대전 당시 자행된 어떤 전쟁범죄에 대한 소식을 하나 접하게 됐습니다.

Former Nazi SS member charged with killing Jewish labourers - Guardian

이 기사에 따르면 올해 90세의 전 무장친위대 대원 아돌프 슈톰스(Adolf Storms)이 전쟁 종결직전인 1945년 3월에 수십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5 SS 기갑사단 비킹(Wiking) 소속이었던 아돌프 슈톰스는 57명의 유태인들을 오스트리아의 도이치 쉬첸(Deutsch Schützen)에서 사살했으며 다른 한명은 도이치 쉬첸에서 하르트베르크(Hartberg)로 이송하던 도중 걸을 수 없게 되자 사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슈톰스는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이름을 바꾸고 살아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조용한 말년을 보내는 것은 실패한 것 같군요.

당사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슈톰스의 과거는 조용히 떨쳐버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것 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17일 화요일

득템



어떤 도서관에서 오늘 하루동안 중복되는 서적들을 정리한다기에 냉큼 가서 얻어왔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좋은 책들이라 기분이 아주 좋군요.

1990년, 붕괴 직전 소련군의 일화

우울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죠.

1990년 6월 '병사의 어머니들' 이라는 운동단체가 과거 4~5년간 15,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이후 부터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가 다른 출처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인민대표회의의 우즈베키스탄 대표 한 명은 "최근" 타쉬켄트 한 지역에서면 190명의 신병이 사망했으며 이미 1989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신병 430명이 사망했다는 폭로를 했다.

이 대표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병사들을 노린 살인범죄가 자행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으며 국방부 대변인은 (1990년) 11월에 발표하기를 1989년 (1월 부터 ) 9월까지 사망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병사는 167명이며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 출신은 123명, 우크라이나 출신은 25명, 카자흐스탄 출신은 15명, 벨라루스 출신은 13명, 그루지야 출신은 7명, 아제르바이잔 출신은 7명, 그리고 이 밖의 다른 공화국 출신 병사 일부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이러한 증거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들만 차별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사망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다른 민족(공화국)들이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처음에 제기한 의심을 더 확신하게 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병사의 사망에 대한 통계자료가 일관성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으나 발표된 통계를 보면 사망자의 숫자는 1990년 이후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조프 원수는 12월에 있었던 한 비공개 회의에서 1990년 한 해에만 500명의 징집병이 자살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69명의 장교와 32명의 부사관이 살해당했다는 발언을 했다. 이 회의에서 중앙정치국장 니콜라이 쉴랴가 대령은 1990년 (1월부터) 11월까지 2,000명의 병사가 사망했다고 말했다.(이렇게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이 수치에 타지키스탄과 카프카즈의 전투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추즉된다.)

Odom, William E. The Collapse of the Soviet Military, Yale University Press, 1998, p.293

붕괴될 무렵의 소련군대나 옐친 시절의 러시아군대 이야기를 읽어보면 한국군의 병영생활이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따라잡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옐친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군대내의 가혹행위를 촬영한 영상이 유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요. 이 무렵의 소련군 이야기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적당한데 반복해서 이야기 하다보면 살짝 오싹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1973년, 붕괴 직전 캄보디아 정부군의 일화

저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부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붕괴와 공산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당시의 반공교육을 위한 책자들은 캄보디아의 학살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비극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정체모를 공포감과 함께 상상력을 자극했지요.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뒤 군사사 서적을 조금씩 읽어가면서 어린시절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조금은 진지하게 접근하게 됐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도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당시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건들입니다. 뭐랄까요,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 여전히 머릿속 한 구석에 짜릿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일을 하다가 딴청을 피우던 중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책을 한권 집어들고 예전에 표시해둔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 부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캄보디아 정부가 계속해서 패배하자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던 부대도 전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군사원조관계자들은 캄보디아 정부군의 7사단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1973년) 4월 초 이 사단의 예하 부대는 타케오(Takeo)성의 성도 부근에서 매복공격을 받자 공황상태에 빠져 105mm 유탄포 8문 중 5문과 트럭 40대 분의 포탄을 적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집단적인 기강해이"로 인한 사고는 더 늘어났는데 이러한 사고의 원인은 주로 정부가 병사들에게 제때 월급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5월 중순, 수백명의 병사들이 프놈펜(Phnom Penh) 북서쪽의 방어진지를 이탈해 봉급 지불을 요구하면서 수도의 중심지로 행진했다. 이 병사들은 총사령부를 향해 대로를 따라 가면서 허공에 소총을 난사해 행인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이 병사들은 봉급을 전혀 지불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3일 동안 급식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크게 놀란 참모장교들은 즉시 병사들에게 올림픽 경기장에서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정심이 많은 대령 한명이 자신의 돈으로 몇 자루의 빵을 사서 지프에 싣고 올림픽 경기장으로 왔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프에서 빵 자루를 내리자 마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빵을 집어들고는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캄보디아군 중위 한 명이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다고요?"

새 정부란 미국의 요구에 의해 얼마전에 조직된 '최고 정치 위원회'를 뜻하는 것 이었다.

"나는 그들이 지금 당장 여길 와 봤으면 합니다."

캄보디아군 장교단은 더할나위 없이 무능했으며 여기에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 크메르 정부가 미국 정부와의 공식적인 합의에 따라 "병사들의 급여에 사용할 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전용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방지하는것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발표한 지 2년이 지난 뒤에 대략 4만명에서 8만명의 '유령'이 군대의 급여 명부에 올라와 있었다. 이런 유령 병사들은 한달에 최고 2백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돈은 부패한 장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미국 국방부의 한 장군은 1973년 5월 상원의 비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서투른 변명을 해야 했다.

"캄보디아 정부군 사령부는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첫 단계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님께서 주장하신 것과 같은 부패행위, 급여 명부에 없는 사람을 집어 넣는 행위, 전투에서의 무능력함 같은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Issacs, Arnold R. Without Honor : Defeat in Vietnam and Cambodi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3, pp.218~219

이왕 군사사에 관심을 가질 바에는 좀 멋진(???) 이야기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이런 암울하고 한심한 이야기가 더 솔깃하더군요. 이 책에 표시해 놓은 다른 부분들도 이와 비슷한 한심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도 이런 혼란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 흥미롭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짜증

이런 이야기에 실명을 거론하면 큰일나겠죠. 진짜로 맞을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지난 몇년간 인터뷰를 몇 번 하다보니 일종의 편견이 생깁니다. 무슨 편견이냐면 알맹이도 없는 양반들이 쓸데없는 말은 더럽게 많으면서 까탈스럽다는 것 이죠. 오늘도 비슷한 경우를 겪었는지라 아주 화가 납니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절에는 그저 어중간한 지위에 있었을 뿐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만나야 하는데 왜이리 까탈스러운지 모르겠군요. 그시절이라면 잔챙이에 불과했던 인물이 다른 거물들(장관급) 보다 사람 신경을 더 긁습니다.

뭐. 먹고 살려면 이런 짜증나는 양반들 비위도 잘 맞춰줘야 겠지요. 별수있겠습니까.

박정희 때리기에 대한 잡생각

잡담을 조금 하고 싶군요.

저는 진보진영의 박정희 때리기가 당분간은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현재 진보진영이 쏟아넣는 노력만큼 성과를 거두는게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물론 장기적으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겠지요.) 박정희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미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은 상태이며 박정희에 대한 어지간한 공격은 그런 '믿음'에 상처를 주기에는 약합니다. 박정희의 좌익경력이야 이미 그가 처음 대통령으로 나왔을 때 윤보선이 한 번 써먹어 봤지만 별로 재미도 보지 못했으며 만주국 군대에 복무했다는 점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만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박정희를 때리는데 힘을 쏟는 것은 그야말로 낭비로 보일 뿐 입니다.

재미있게도 어제 읽은 김헌태의 『분노한 대중의 사회』(후마니타스, 2009)에도 제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해당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국민 모두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노력한 시절에 대한 대중의 향수는 박정희가 거론될 때마다 되살아나는 대중의 기억에서 중심에 있다. 물론 반대로 박정희의 업적에 대한 비판도 무겁다. '친일논란', '군사 쿠데타 과정', '일본 제국주의식 국민 동원 모델에 대한 논란', '대일 굴욕 외교', '정적 제거와 인권 탄압', '산업화 과정에서의 영남 중심 경제개발과 화남에 대한 차별'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상에서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이런 결과에 대해 대중들이 그의 부정적 실체를 보지 못해서라고 말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미 '박정희'에 대해 그들이 알아야 할 만큼의 진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런 평가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김헌태, 『분노한 대중의 사회 : 대중여론으로 읽는 한국정치』, 후마니타스, 2009, 274쪽

김헌태의 지적은 저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진보쪽에서는 박정희의 지지자들의 무지함을 비웃을 수 있겠지만 박정희 지지자들은 그들 나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저와 같이 민주당을 찍는 사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정치적 영향력도 꽤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보쪽에서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중을 향해 '계몽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박정희에 대해 심각하게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일으키지는 못 했으며 그저 진보진영에 한정된 찻잔속의 태풍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무지몽매한 박정희 교도'들을 깨우쳐 주겠다는 희생정신(?)은 나름 숭고해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성과가 신통치 않다면 방법을 조금 바꿔볼 필요도 있을 것 입니다. 실제 박정희가 냉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박정희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박정희는 좀 긍정적인 모습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고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인데 여기에 대해 지적인 우월감을 들고 가볍게 달려든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지요.

2009년 11월 10일 화요일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오늘은 오전에 예정된 일이 일찍 끝나서 오후시간이 비게 됐습니다. 비는 시간을 이용하여 한겨레 신문사가 주최한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라는 학술 토론회에 다녀왔습니다.

주최측의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이 토론회는 '진보진영'이 어떻게 하면 박정희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가 주된 화두였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를 통틀어 박정희 신화를 잠재우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고 오히려 그 신화 덕분에 이명박 같은 3류 짝퉁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재앙까지 겪고 있으니 '진보진영'이 박정희의 유산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토론회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토론회 자체를 급히 준비한 것인지 발표자들, 특히 정치분야 발표자들이 발표 당일까지도 발표문을 완성하지 못해 발표장에서 별도로 출력해 제공했다는 점 입니다. 특히 1부의 마지막 발표를 맡은 박명림 교수의 경우는 발표문이 부족하게 복사되어 발표문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책자로 배부된 발표문도 오탈자가 더러 있었는데 역시나 토론회를 급히 준비하느라 책자를 교정할 시간도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경제분야의 발표는 그런 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정치분야의 발표는 신통치 않은 글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주최측(한국경제정책연구회, 한겨레신문사)이나 후원측(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의 성격상 박정희 정권기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이런 점은 사회자들의 발언에서 잘 드러났는데 특히 함세웅 신부의 발언은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흑백논리로 점철되어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 입장임에도 듣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저는 박정희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박정희=절대악'이라는 공식은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반한나라당의 입장에서 박정희와 그 유산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박정희를 극복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는 반한나라당 진영을 결속시키는데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회색지대에 있는 다수의 대중을 끌어들이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말이지요. 현재와 같은 방식의 박정희에 대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서 영향력을 넓혀갈 경우 꽤 괜찮은 성과를 거두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큰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박근혜가 꼽히고 있는 만큼 반한나라당 진영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이런식의 단순한 공격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60~70년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는 만큼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바뀔 것이고 그를 둘러싼 신화도 상당부분 불식될 것 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박정희가 남긴 유산, 특히 박근혜에게 계승된 정치적 자산이 단시일내에 쉽게 허물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한나라당 진영은 박정희 때리기를 부차적인 일로 미뤄두고 중간지대를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것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박정희 문제가 4대강 사업과 같이 현실의 시급한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은 별로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물론, 박정희 문제가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밥이라는점은 분명합니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

漁夫님이 지난 4일에 쓰셨던 '20세기 최악의 기록들; 독재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漁 夫이 언급하셨듯 집단의 규모가 크지 않은 부족단위 사회에서는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으며 특히 남성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단락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으니 Keely의 이야기를 한 번 소개해 보지요.

Keely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을 통계화 할 경우 미국이나 유럽 등의 '문명화된' 사회보다 '비문명화된' 사회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에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구 손실은 전체 인구의 2.5%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야노마뫼(Yanomamo)족의 경우 20%를 거뜬히 넘어가며 히바로(Jivaro)족의 경우는 30%를 넘어간다고 합니다. 게다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성인남성의 경우는 수치가 더 높아지는데 야노마뫼족은 전쟁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전체 남성의 40% 가량이 사망하며 히바로족은 그 비율이 거의 6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외에 Keely가 인용한 인류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보면 비교대상으로 선정한 '문명화된' 사회와 '비문명화된' 사회의 통계에서 대부분의 '비문명화된'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를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에서 압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Keely는 비록 부족단계의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은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에 비해 사망자의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지만 전쟁이 발생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이밖에 복수 등의 동기에서 개인 단위의 습격이나 살인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전쟁에 동원되는 남성의 비율도 극단적으로 높으며 교전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기준으로는) 잔혹한' 대우 등 사망률을 높이는 요인이 많습니다. 여기에 사망자의 숫자가 적지만 그만큼 사회의 규모도 작아서 한번 피해를 입으면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뉴기니아의 한 작은 부족은 결혼한 성인남성이 총22명이었는데 4개월 반의 전투를 겪은 뒤 결혼한 성인남성의 '27%'에 해당하는 여섯명의 남성이 전사하고 여덟명의 남성은 부족에서 이탈해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결혼한 성인 남성 22명 중 14명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 부족은 엄청난 타격을 받은 셈이지요.

몇몇 사례들을 보면 우리의 사회에서는 말로 해결될 것도 창과 활이 동원되고 있으니 사망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현대의 문명사회가 살인 기술에 있어 훨씬 효율적이지만 폭력을 사회적 제도로 억제하고 있는 까닭에 전체 사망률에서는 비문명화된 사회보다 낮은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문명사회의 경우 한번 폭력을 사용하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 되긴 합니다만;;;;;

2차대전 중 루마니아의 Volksdeutsche

2차대전 당시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베그너(Bernd Wegner)의 연구에 나타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몇몇 사단들은 병력의 상당수를 이러한 독일계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지요. 독일계 외국인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에도 상당수가 복무했지만 역시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친위대였습니다. 히믈러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이런 독일계 외국인을 친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대략 1,500명의 주데텐(Sudeten) 독일인이 일반친위대(Allgemeine SS)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1) 2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은 동유럽의 점령지와 동맹국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독일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계 독일인이었으며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한 인원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연구는 2차대전 기간 중 친위대 조직에 소속된 루마니아계 독일인의 숫자는 63,000명에서 65,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

물론 1943년 이전까지는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 이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개별적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사례는 있었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Andreas Friedrich)라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SS-VT에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모병운동이 시작됩니다. 안드레아스 슈미트(Andreas Schmidt)가 이끄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나치당 조직(NSDAP der Deutschen Volksgruppe in Rumanien)은 1940년 말 부터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입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모병을 담당한 것은 루마니아 독일인 나치당의 하부 조직인 루마니아 독일 청소년연맹(Deutsche Jugendbund in Rumanien, 이하 DJR로 약칭)이었습니다.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무장친위대에 대규모로 입대한 것은 1941년 4월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에 600명이 입대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3) 이때 모병된 루마니아계 독일인들은 총 4개 중대로 구성된 야전훈련병대대(Feldrekruten-Bataillon)로 편성되어 빈(Wien) 근교의 병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당시 막 SS소령(SS-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한 하인츠 하르멜(Heinz Harmel) 이었습니다.4)

그러나 1941년 초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의 비밀모병은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독일군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국가적 동원태세를 취하면서 루마니아 시민인 독일계도 동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총력전 하에서 외국군대에 자국 국민을 빼앗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이었으며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묵인하던 친위대의 비밀모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독일 정부 또한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1월 13일 친위대 모병국(SS-Ergänzungsamt)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무장친위대 입대를 금지시킵니다.5)

그러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2년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사단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독일계 주민의 부족으로 편성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에 친위대 측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모병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때 대상이 된 것은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인 Banat 지방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장인 아르투어 플렙스(Artur Phleps)는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루마니아인 보충병을 사단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루마니아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6) 여기에 1942년 초 동부전선의 니콜라예프에서는 무장친위대가 루마니아군 부대에서 탈영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150여명을 보충병으로 모집해 루마니아 정부가 송환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7) 결국은 루마니아 정부가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한 루마니아군 탈영병들의 송환 요구를 중단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측의 횡포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 루마니아 정부의 불만은 결국 1943년 부터 루마니아가 독일군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탈영 공작을 하도록 만듭니다.8)

어쨌든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꿈꾸던 히믈러에게 남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의 존재는 탐스러운 꿀단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의 압력에 따라 17세 이상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독일 국방군 또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더라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9) 이것은 히믈러가 1941년 말 이래로 구상하고 있던 독일계 외국인의 대규모 모병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믈러는 1943년 초 독일계 헝가리인 5만명, 독일계 루마니아인 2~3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독일계 헝가리인은 2만명이 모집된 데 비해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5만명이 모집됩니다.10) 이렇게 대규모로 모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당시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되는 무장친위대 부대의 강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위대 제3기갑군단과 그 예하의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과 네더란트(Nederland) 여단이었습니다. 이 군단의 1944년 3월 경의 병력현황을 살펴보면 총 병력의 44.5%가 독일계 외국인이며 특히 사병의 경우는 독일계 외국인의 비중이 53.1%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외국인의 대부분은 1943년에 대규모로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이었습니다.11)

※ 친위대 제3기갑군단의 출신지별 병력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친위대 제3기갑군단 다음으로 1943년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배치된 부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킨 프린츠 오이겐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에 배치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가장 많았을 때는 7,609명에 달했다고 하니 사실상 사단의 주력이었던 셈 입니다.12) 이 사단의 독일계 루마니아인 신병에 대한 처우는 신통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다 사단내의 본토 독일인들은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을 왈라키아인(Walach,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이라는 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 처럼)이라고 부르면서 깔보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사단의 신병훈련은 첫 10일간은 오전 6시에 기상해 기상하자 마자 바로 1km 구보를 한 뒤 30분간 세면과 오전식사를 마치고 바로 7시 부터 12시까지 훈련, 그리고 1시간 동안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뒤 다시 1시 부터 5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병사들은 입대 초기의 훈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는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루마니아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도중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도 비극은 비극이지요.

1943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당수는 1943년에 신규편성되거나 개편된 부대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약 17,000명 정도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무장친위대의 제9, 10기갑사단과 제16, 17기갑척탄병 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13) 이들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핵심적인 부대들에 배치된 까닭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 기간 중 무장친위대에 배속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약 8,000명에서 9,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4)



1) Daugherty III., Leo J, 'The Volksdeutsche and Hitler's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8 No.2(June 1995), p.300
2) Milata., Paul, Zwischen Hitler, Stalin und Antonescu : Rumäniendeutsche in der Waffen-SS, Böhlau Verlag, 2007, s.297
3) Milata., s.112
4) Weidinger., Otto, Division Das Reich Bd.II, Munin Verlag, 1983(3.Auflage), s.350
5) Milata., s.113
6) Milata., ss.116~117
7) Milata., s.128
8) Daugherty III., p.306
9) Daugherty III., p.305
10) Milata., s.176
11) Wegner., Bernd,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 Dokumente 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III.(Germanischen) SS-Panzerkorps',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49/2(1980), s.111
12) Milata., s.241
12) Milata., s.259
12) Milata., s.280

학자들의 노고(?)

옛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건 참 재미있는 경험이지요.

(전략)

돈키호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학자들의 노고는 주로 가난입니다. 모든 학자가 다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난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도 저는 그들의 불행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가난해서 좋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가 되면 그에 따라 부수적으로 오는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데 바로 배고픔에, 추위에, 헐벗은 차림으로, 혹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먹지 못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닌 것입니다. 비록 유행에서 약간 뒤쳐지거나 부자들이 쓰고 남긴 것을 쓰게 되더라도, 학자들의 최고의 고통은 바로 '수프를 찾아나서는 일'일 것 입니다. 그래도 남의 집에 가면 화로나 난로 옆에서, 몸을 데울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추위를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밤에는 집 안에서 잠을 잘 수도 있는 겁니다. 그 밖의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즉 속옷이 부족하거나, 여분의 신발이 없다거나, 털이 빠져 요상한 옷이라거나, 운 좋게 어느 연회에 가서 지나치게 많이 먹어 배탈이 나거나 하는 것 까지 나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학자는 내가 지금껏 이야기한 험난한 길에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넘어져, 이쪽에서 일어서고 또다시 저쪽에서 넘어지고 해서 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입니다."

(후략)

미겔 데 세르반테스/박철 옮김, 『돈키호테』, 시공사, 2004, 529~530쪽

오늘날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소위 학문이라는 일을 하면서 부자 소리를 들을 만큼 돈을 벌기란 참 어렵죠.

번역의 탄생

요즘 읽는 책 중에 『번역의 탄생』이 있습니다.

올해 들어 번역에 대해서 고민할 일이 많아져서 생각을 가다듬는데 필요한 책이 뭐 없을까 찾다가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구입했는데 구입하고 한참을 방치해 두고 있다가 지난달 부터 조금씩 읽는 중 입니다. 분량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한번에 모두 읽는것 보다는 조금씩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한번에 조금씩 나누어 읽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문제의식에 크게 공감한다는 점에서 이책을 추천해준 선배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자는 번역의 핵심이라고 할수있는 '우리말'의 문제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제가 쓰는 글들이 번역투라는 비판을 많이 들어서인지 한국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자주 들던터라 저자의 주제의식이 매우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금 느끼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쉽게 해결된 문제는 아니겠지만 노력은 해 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