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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5일 일요일

무장친위대의 기사십자훈장(Ritterkreuz) 수훈자에 대한 분석

제 블로그를 자주 들러주시는 분들이라면 척 보고 아시겠지만 별 의미없는 땜빵 포스팅 하나 나갑니다. 갑자기 일하다가 귀찮음을 느껴서 충동적으로 포스팅을 하려다 보니;;;;

오늘은 통계 세개를 올려봅니다. 무장친위대에 대한 유명한 정치사회사적 연구인 베른트 베그너Bernd Wegner의 저서, Hitlers Politische Soldaten : Die Waffen-SS 1933-1945, (Schönigh, 7.Auflage, 2006)에 실린 통계로 무장친위대의 기사십자훈장 수여자들을 부대별, 계급별, 직위별로 분석한 것 입니다.

첫 번째 표는 사단별 기사십자훈장 수여자 통계입니다. 베그너가 사단 이하급 부대는 통계에 포함시키지 않아 좀 아쉽긴 합니다만 어쨌든 이정도라도 정리해 놓은 덕에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가 있습니다.(특히 술자리 잡담용으로!)


표1. 사단별 기사십자훈장 수여자(훈장 수여당시 부대 기준)
사단
총 수여자
2.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72
5.SS 기갑사단 비킹
54
1.SS 기갑사단 LSSAH
52
3.SS 기갑사단 토텐코프
46
11.SS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27
8.SS 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
23
23.SS 기갑척탄병사단 네더란트
20
4.SS 경찰기갑척탄병사단
19
12.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15
10.SS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13
9.SS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12
19.SS 척탄병사단
12
7.SS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
6
6.SS 산악사단 노르트
5
18.SS 기갑척탄병사단 호르스트 베셀
5
22.SS 기병사단 마리아 테레지아
5
13.SS 산악사단 한트샤르
4
17.SS 기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
4
20.SS 척탄병사단
4
15.SS 척탄병사단
3
28.SS 기갑척탄병사단 발로니엔
3
33.SS 척탄병사단 샤를마뉴
2
14.SS 척탄병사단
1
16.SS 기갑척탄병사단
1
27.SS 척탄병사단 랑게마르크
1
36.SS 척탄병사단
1
[표 출처: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 Die Waffen-SS 1933-1945, (Schönigh, 7.Auflage, 2006), p.279]

사단별 통계를 보면 그 기원이 전쟁 이전으로 올라가는 무장친위대의 1~3사단과 5사단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수상자를 낸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전쟁 초기부터 참전한 4, 6사단의 수상 내역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이 부대가 1~3사단과 5사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용한” 북부 전선에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베그너의 분석에 따르면 1940년 부터 1943년 까지 무장친위대의 기사십자훈장 수훈자는 158명인데 이 시기 선전의 대상이 될 만한, 그리고 훈장이 나올 만한 굵직한 전투들은 거의 대부분 1~3사단과 5사단이 치러냈지요.

두 번째 도표는 기사십자훈장 수여당시의 계급별 분석입니다.


표2. 계급별 기사십자훈장 수여자(수여당시 계급 기준)
계급
총 수여자
수여자 중 예비역
중장(Obergruppenführer)
5
소장(Gruppenführer)
5
준장(Brigadeführer)
7
상급대령(Oberführer)
13
1
대령(Standartenführer)
12
중령(Obersturmbannführer)
40
3
소령(Sturmbannführer)
88
5
대위(Hauptsturmführer)
86
22
중위(Obersturmführer)
69
21
소위(Untersturmführer)
29
5
사관후보생(Standartenoberjunker)
2
상사(Hauptscharführer)
23
중사(Oberscharführer)
29
6
병장(Unterscharführer)
24
1
상병(Rottenführer)
7
1
일병(Sturmmann)
4
2
이병(Schütze)
2
[표 출처: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 Die Waffen-SS 1933-1945, (Schönigh, 7.Auflage, 2006), p.280]

계급별 수여 내역을 살펴보면 당연하게도 위관에서 영관급 장교가 수여자의 75.7%인 337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대~대대 단위 지휘관에 해당하는 대위와 소령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에는 SS하사(Scharführer) 계급으로 기사십자 훈장을 수여 받은 사례가 없는데 이것은 한번 따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시간은 꽤 걸리겠지요?)

마지막 표는 직위별 수여 내역인데 역시 대대~중대급 지휘관들의 수여가 가장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표3. 직위별 기사십자훈장 수여자
직위
총 수여자
친위대 및 경찰 상급지휘관(Höherer SS- und Polizeiführer)
1
군단장
2
군단 참모장
1
사단장
15
사단작전참모
6
연대장
60
연대 부관
3
대대장
131
대대장 대행
3
대대 부관
5
중대장/포대장
91
중대장 대행
5
전투단 지휘관
23
소대장
40
반장
5
분대장
3
전차장
5
포반장
6
기타
12
직위 미상
35
[표 출처: Bernd Wegner, Hitlers Politische Soldaten : Die Waffen-SS 1933-1945, (Schönigh, 7.Auflage, 2006), p.280]

위에서 언급한 기타는 대부분 사병으로 포사수, 기관총사수, 전령 등으로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순히 숫자로 따지면 중대~대대급 지휘관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단, 이 도표에 언급된 전투단은 규모가 다양하기 때문에 분류가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오늘의 땜빵 포스팅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 일이나 하겠습니다.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뭔가 이상한 인종차별;;;;

1945 년 4월 2일, 뷔딩엔 인근에서 미군에게 포위된  6SS 산악사단은 부대를 소규모로 나누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포위망을 형성한 미군 부대 중에는 흑인으로 편성된 제761전차대대도 있었는데 이 대대의 한 장교에 따르면 이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전투 임무에서 우리는 독일군을 숲에서 몰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낮게 사격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제군들, 사격을 좀 높이 해서 나무들을 날려 버려라. 이렇게 해서 파편이 좀 더 많이 튀었고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으며 독일군들을 숲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다. 독일군들은 백기를 흔들면서 외쳤다.

“Kameraden!(전우들!) ”

나는 부하들에게 해치를 잠그고 전차 안에 있다가 적들이 전차 가까이 오거든 그대로 보병들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런데 몇몇 친구가 해치를 약간 일찍 열었다. 독일놈들이 이걸 보더니 말했다.

“Schwarze Soldaten!(흑인 군인이다!)”

독일놈들 사이에 이 소리가 퍼지더니 녀석들은 다시 그 좆같은 숲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제761대대 C중대장 찰스 게이츠(Charles Gates) 대위의 회고

Joe W. Wilson, Jr, The 761st Black Panther Tank Battalion in World War II(McFarland, 1999), p.168

물론 다시 숲으로 들어갔던 독일군들은 생각을 고쳐 먹고 항복 했다지만 미군들은 기분이 별로 였을듯;;;;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2차대전 중 루마니아의 Volksdeutsche

2차대전 당시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베그너(Bernd Wegner)의 연구에 나타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몇몇 사단들은 병력의 상당수를 이러한 독일계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지요. 독일계 외국인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에도 상당수가 복무했지만 역시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친위대였습니다. 히믈러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이런 독일계 외국인을 친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대략 1,500명의 주데텐(Sudeten) 독일인이 일반친위대(Allgemeine SS)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1) 2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은 동유럽의 점령지와 동맹국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독일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계 독일인이었으며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한 인원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연구는 2차대전 기간 중 친위대 조직에 소속된 루마니아계 독일인의 숫자는 63,000명에서 65,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

물론 1943년 이전까지는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 이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개별적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사례는 있었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Andreas Friedrich)라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SS-VT에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모병운동이 시작됩니다. 안드레아스 슈미트(Andreas Schmidt)가 이끄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나치당 조직(NSDAP der Deutschen Volksgruppe in Rumanien)은 1940년 말 부터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입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모병을 담당한 것은 루마니아 독일인 나치당의 하부 조직인 루마니아 독일 청소년연맹(Deutsche Jugendbund in Rumanien, 이하 DJR로 약칭)이었습니다.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무장친위대에 대규모로 입대한 것은 1941년 4월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에 600명이 입대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3) 이때 모병된 루마니아계 독일인들은 총 4개 중대로 구성된 야전훈련병대대(Feldrekruten-Bataillon)로 편성되어 빈(Wien) 근교의 병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당시 막 SS소령(SS-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한 하인츠 하르멜(Heinz Harmel) 이었습니다.4)

그러나 1941년 초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의 비밀모병은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독일군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국가적 동원태세를 취하면서 루마니아 시민인 독일계도 동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총력전 하에서 외국군대에 자국 국민을 빼앗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이었으며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묵인하던 친위대의 비밀모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독일 정부 또한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1월 13일 친위대 모병국(SS-Ergänzungsamt)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무장친위대 입대를 금지시킵니다.5)

그러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2년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사단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독일계 주민의 부족으로 편성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에 친위대 측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모병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때 대상이 된 것은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인 Banat 지방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장인 아르투어 플렙스(Artur Phleps)는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루마니아인 보충병을 사단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루마니아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6) 여기에 1942년 초 동부전선의 니콜라예프에서는 무장친위대가 루마니아군 부대에서 탈영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150여명을 보충병으로 모집해 루마니아 정부가 송환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7) 결국은 루마니아 정부가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한 루마니아군 탈영병들의 송환 요구를 중단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측의 횡포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 루마니아 정부의 불만은 결국 1943년 부터 루마니아가 독일군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탈영 공작을 하도록 만듭니다.8)

어쨌든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꿈꾸던 히믈러에게 남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의 존재는 탐스러운 꿀단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의 압력에 따라 17세 이상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독일 국방군 또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더라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9) 이것은 히믈러가 1941년 말 이래로 구상하고 있던 독일계 외국인의 대규모 모병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믈러는 1943년 초 독일계 헝가리인 5만명, 독일계 루마니아인 2~3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독일계 헝가리인은 2만명이 모집된 데 비해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5만명이 모집됩니다.10) 이렇게 대규모로 모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당시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되는 무장친위대 부대의 강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위대 제3기갑군단과 그 예하의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과 네더란트(Nederland) 여단이었습니다. 이 군단의 1944년 3월 경의 병력현황을 살펴보면 총 병력의 44.5%가 독일계 외국인이며 특히 사병의 경우는 독일계 외국인의 비중이 53.1%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외국인의 대부분은 1943년에 대규모로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이었습니다.11)

※ 친위대 제3기갑군단의 출신지별 병력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친위대 제3기갑군단 다음으로 1943년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배치된 부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킨 프린츠 오이겐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에 배치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가장 많았을 때는 7,609명에 달했다고 하니 사실상 사단의 주력이었던 셈 입니다.12) 이 사단의 독일계 루마니아인 신병에 대한 처우는 신통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다 사단내의 본토 독일인들은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을 왈라키아인(Walach,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이라는 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 처럼)이라고 부르면서 깔보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사단의 신병훈련은 첫 10일간은 오전 6시에 기상해 기상하자 마자 바로 1km 구보를 한 뒤 30분간 세면과 오전식사를 마치고 바로 7시 부터 12시까지 훈련, 그리고 1시간 동안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뒤 다시 1시 부터 5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병사들은 입대 초기의 훈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는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루마니아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도중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도 비극은 비극이지요.

1943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당수는 1943년에 신규편성되거나 개편된 부대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약 17,000명 정도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무장친위대의 제9, 10기갑사단과 제16, 17기갑척탄병 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13) 이들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핵심적인 부대들에 배치된 까닭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 기간 중 무장친위대에 배속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약 8,000명에서 9,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4)



1) Daugherty III., Leo J, 'The Volksdeutsche and Hitler's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8 No.2(June 1995), p.300
2) Milata., Paul, Zwischen Hitler, Stalin und Antonescu : Rumäniendeutsche in der Waffen-SS, Böhlau Verlag, 2007, s.297
3) Milata., s.112
4) Weidinger., Otto, Division Das Reich Bd.II, Munin Verlag, 1983(3.Auflage), s.350
5) Milata., s.113
6) Milata., ss.116~117
7) Milata., s.128
8) Daugherty III., p.306
9) Daugherty III., p.305
10) Milata., s.176
11) Wegner., Bernd,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 Dokumente 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III.(Germanischen) SS-Panzerkorps',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49/2(1980), s.111
12) Milata., s.241
12) Milata., s.259
12) Milata., s.280

2009년 9월 28일 월요일

이탈리아군의 일상적인(?) 굴욕

Karl-Heinz Golla의 'Der Fall Griechenlands 1941'을 읽는 중 입니다. 저자는 독일군의 침공 직전 배경 설명을 위해서 1940년 이탈리아군의 그리스 침공을 간략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대략적인 흐름은 알고 있지만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초장 부터 돈좌되는 묘사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침공군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이탈리아군 25군단은 공세 초기에 주력이 격파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 군단에 소속된 첸타우로(Centauro) 기갑사단은 L3/35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공세 초반에 상당수의 전차를 진창에 빠트려 상실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Ian W. Walker의 'Iron Hulls, Iron Hearts' 58쪽에 약간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는데 첸타우로 사단은 10월 28일 공세를 시작했으나 진창으로 인해 사단의 선두 전차대가 이틀동안 24km(;;;;) 진격하는데 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무리하게 공격만 거듭하다가 공세역량을 소진했고 그리스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진창에 빠진 전차들을 내버리고 패주했다고 합니다. 이 단 한번의 전투로 첸타우로 사단의 전력은 큰 타격을 받아서 12월 9일에는 재편성을 위해 예비대로 돌려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Golla에 따르면 역시 같은 군단에 소속된 산악부대 줄리아(Julia) 사단도 그리스군이 후방으로 침투하자 큰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고 하는군요. 이탈리아군의 알피니 사단은 이탈리아군 중에서도 나름 정예인데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명색이 산악사단인데 산악지형에서 일반 보병사단에게 우회 포위를 당하질 않나;;;;

뭐랄까. 이탈리아군이 모두 엉터리인 군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실전기록들을 보면 압도적인 황당함을 선사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니 나쁜 인상을 벗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잡담하나. 그런데 이 경우에는 이탈리아군이 못 싸운 걸까요 아니면 그리스군이 잘 싸운 걸까요?

2008년 10월 11일 토요일

김홍일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 이어지는 속편 되겠습니다.

1949년에 출간된 『국방개론(國防槪論)』을 읽다 보니 책의 후반부에 통일 이후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김홍일 소장의 구상이 나와 있었습니다.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의 편성 등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해당 부분을 한번 발췌해 봅니다.

오래된 책이다 보니 맞춤법을 요즘 사용하는 언어에 가깝게 고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육군국 일까, 해군국 일까, 아니라면 육해군병진국 일까.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해안선이 면적에 비하여 과장(過長)함으로 해군국이 될 소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래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 인국(隣國)인 소련, 중국이 모두 육군국 이요, 강대한 해군국 이던 일본도 패전으로 다시 해군재건이 불능케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많은 것은 육군이매 우리는 육군을 주로, 해군은 보조로 국방군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하야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하겠음으로 중급장비사단의 1만2천명을 1개 사단으로 하고 최소 상비군 15개 사단은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 최소로써 3개 장갑사단과 3개 모터화사단이 필요하고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2개 산악사단이 요구된다.
국력에 비하여 강대한 육군은 짧은 시일 안에 편성키 곤란함으로 통일 전에 남한에서 우선 강고한 기초를 세우고 통일 후에는 3, 4년 예산으로 수보(遂步)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얼마만한 물자와 경제가 필요한가, 그 개념으로 보통 1개 장갑사단의 장비를 열거해 본다.

차량
輕탱크 287량
中탱크 110량
정찰차 276량
運兵트럭 28량
이륜 모터싸이클 408량
삼륜 모터싸이클 201량
화물트럭 1000량

무기
0.30 重기관총 44정
0.30 경기관총 412정
0.50 기관포 113정
37mm 대전차포 36문
60mm 박격포 21문
75mm 평사포 8문
75mm 유탄포 24문
81mm 박격포 16문
105mm 유탄포 12문
※탱크 車上의 기관총과 화포는 計入치 않았다.

이 외에도 병원차, 수리차, 보급차 등 다수 차량이 있다.

金弘一, 『國防槪論』, 高麗書籍株式會社, 1949, 82~85쪽

이 글을 읽은 느낌은 지난번에 썼던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과도 비슷합니다. 김홍일 소장도 이청천과 비슷하게 한국의 주적은 ‘북괴’가 아니라 소련과 중국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건설될 통일 한국군 15개 사단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6개 사단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작전할 기계화 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홍일 소장이 이 글을 쓰던 1948년~1949년 초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북한 인민군은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괴뢰들은 제껴 두고 이들의 상전인 중국과 소련을 상대할 구상을 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이청천의 구상과도 동일한 배경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음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갑사단의 장비 문제입니다. 먼저 과도하게 기계화장비에 대한 의존이 높고 보병의 비율은 기형적일 정도로 작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의 기동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비율이 2:1라는 것 입니다. ‘이청천 장군의 원대한 "建軍" 구상’에서 이청천은 ‘차량화연대’의 경전차와 중전차 비율을 5:1로 잡고 있었는데 이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전차의 비중이 극도로 높습니다. 그리고 정찰용 장갑차까지 경전차에 포함시킬 경우에는 이 비율이 5:1 정도가 되는데 왜 이렇게 남한의 군사지도자들은 경전차에 집착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보병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작다 보니 보병 수송용 차량은 28대에 불과한 반면 기갑장비가 많다 보니 보급용 트럭은 무려 1,000대에 달합니다. 보급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으니 그나마 낫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사단의 편제는 둘째치고 소련을 가상적으로 시베리아 작전까지 상정하고 있는데 고작 6개의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으로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구상하고 있다는 것이 좀 난감합니다. 아무래도 현대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온 구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후~대한민국 초기 한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신생국가의 군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희망찬 구상이란 점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군의 최고 수뇌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유감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