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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1일 일요일

기묘한 인생역정

슬라브 군사연구(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권 4호에 실린 Timothy P. Mulligan의 Escape from Stalingrad 라는 소논문을 읽었는데 이 글은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 양 진영을 오락가락한 독일계 소련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프리드리히 지몬(Friedrich Simon) 이라는 사람입니다. 지몬은 1942년 4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제118소총병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전투에서 독일 제14기갑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군에 보조원(Hilfswillige)으로 자원해서 사단본부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제14기갑사단은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몬은 1943년 1월 27일에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많은 보조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지몬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그 대신 독일군에 항복한 '죄'로 고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669소총병연대에 배속되어 오룔 지구에 투입됩니다. 669소총병연대는 1943년 8월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몬은 다시 한번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지몬은 두 번째로 항복한 다음 독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례인 에듀아르트 쉘(Eduard Schell)은 1940년 1월 소련군에 징집됐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인 1941년 7월에 독일군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 포로가 되어 지몬과 마찬가지로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쉘은 15보병연대 2대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했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쉘은 보조원으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지몬과 같이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쉘의 운명이 이쯤에서 끝장났다면 역사가들의 눈에 띄일 수가 없었겠지요. 쉘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잘 아는 소련인을 만나 소련 군복과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갑니다(;;;;) 쉘 또한 1943년 8월에 다시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탈출한 쉘을 알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명이 쉘의 신원보증을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은 사례는 그야말로 극소수였습니다. 제6군에 소속된 5만명 가량의 보조원 대부분은 포위망 안에서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반역자로서 처벌받았으니 말입니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2차대전 중 루마니아의 Volksdeutsche

2차대전 당시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베그너(Bernd Wegner)의 연구에 나타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몇몇 사단들은 병력의 상당수를 이러한 독일계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지요. 독일계 외국인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에도 상당수가 복무했지만 역시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친위대였습니다. 히믈러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이런 독일계 외국인을 친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대략 1,500명의 주데텐(Sudeten) 독일인이 일반친위대(Allgemeine SS)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1) 2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은 동유럽의 점령지와 동맹국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독일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계 독일인이었으며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한 인원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연구는 2차대전 기간 중 친위대 조직에 소속된 루마니아계 독일인의 숫자는 63,000명에서 65,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

물론 1943년 이전까지는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 이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개별적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사례는 있었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Andreas Friedrich)라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SS-VT에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모병운동이 시작됩니다. 안드레아스 슈미트(Andreas Schmidt)가 이끄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나치당 조직(NSDAP der Deutschen Volksgruppe in Rumanien)은 1940년 말 부터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입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모병을 담당한 것은 루마니아 독일인 나치당의 하부 조직인 루마니아 독일 청소년연맹(Deutsche Jugendbund in Rumanien, 이하 DJR로 약칭)이었습니다.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무장친위대에 대규모로 입대한 것은 1941년 4월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에 600명이 입대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3) 이때 모병된 루마니아계 독일인들은 총 4개 중대로 구성된 야전훈련병대대(Feldrekruten-Bataillon)로 편성되어 빈(Wien) 근교의 병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당시 막 SS소령(SS-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한 하인츠 하르멜(Heinz Harmel) 이었습니다.4)

그러나 1941년 초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의 비밀모병은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독일군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국가적 동원태세를 취하면서 루마니아 시민인 독일계도 동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총력전 하에서 외국군대에 자국 국민을 빼앗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이었으며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묵인하던 친위대의 비밀모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독일 정부 또한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1월 13일 친위대 모병국(SS-Ergänzungsamt)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무장친위대 입대를 금지시킵니다.5)

그러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2년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사단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독일계 주민의 부족으로 편성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에 친위대 측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모병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때 대상이 된 것은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인 Banat 지방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장인 아르투어 플렙스(Artur Phleps)는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루마니아인 보충병을 사단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루마니아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6) 여기에 1942년 초 동부전선의 니콜라예프에서는 무장친위대가 루마니아군 부대에서 탈영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150여명을 보충병으로 모집해 루마니아 정부가 송환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7) 결국은 루마니아 정부가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한 루마니아군 탈영병들의 송환 요구를 중단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측의 횡포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 루마니아 정부의 불만은 결국 1943년 부터 루마니아가 독일군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탈영 공작을 하도록 만듭니다.8)

어쨌든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꿈꾸던 히믈러에게 남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의 존재는 탐스러운 꿀단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의 압력에 따라 17세 이상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독일 국방군 또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더라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9) 이것은 히믈러가 1941년 말 이래로 구상하고 있던 독일계 외국인의 대규모 모병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믈러는 1943년 초 독일계 헝가리인 5만명, 독일계 루마니아인 2~3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독일계 헝가리인은 2만명이 모집된 데 비해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5만명이 모집됩니다.10) 이렇게 대규모로 모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당시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되는 무장친위대 부대의 강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위대 제3기갑군단과 그 예하의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과 네더란트(Nederland) 여단이었습니다. 이 군단의 1944년 3월 경의 병력현황을 살펴보면 총 병력의 44.5%가 독일계 외국인이며 특히 사병의 경우는 독일계 외국인의 비중이 53.1%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외국인의 대부분은 1943년에 대규모로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이었습니다.11)

※ 친위대 제3기갑군단의 출신지별 병력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친위대 제3기갑군단 다음으로 1943년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배치된 부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킨 프린츠 오이겐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에 배치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가장 많았을 때는 7,609명에 달했다고 하니 사실상 사단의 주력이었던 셈 입니다.12) 이 사단의 독일계 루마니아인 신병에 대한 처우는 신통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다 사단내의 본토 독일인들은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을 왈라키아인(Walach,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이라는 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 처럼)이라고 부르면서 깔보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사단의 신병훈련은 첫 10일간은 오전 6시에 기상해 기상하자 마자 바로 1km 구보를 한 뒤 30분간 세면과 오전식사를 마치고 바로 7시 부터 12시까지 훈련, 그리고 1시간 동안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뒤 다시 1시 부터 5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병사들은 입대 초기의 훈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는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루마니아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도중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도 비극은 비극이지요.

1943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당수는 1943년에 신규편성되거나 개편된 부대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약 17,000명 정도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무장친위대의 제9, 10기갑사단과 제16, 17기갑척탄병 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13) 이들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핵심적인 부대들에 배치된 까닭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 기간 중 무장친위대에 배속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약 8,000명에서 9,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4)



1) Daugherty III., Leo J, 'The Volksdeutsche and Hitler's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8 No.2(June 1995), p.300
2) Milata., Paul, Zwischen Hitler, Stalin und Antonescu : Rumäniendeutsche in der Waffen-SS, Böhlau Verlag, 2007, s.297
3) Milata., s.112
4) Weidinger., Otto, Division Das Reich Bd.II, Munin Verlag, 1983(3.Auflage), s.350
5) Milata., s.113
6) Milata., ss.116~117
7) Milata., s.128
8) Daugherty III., p.306
9) Daugherty III., p.305
10) Milata., s.176
11) Wegner., Bernd,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 Dokumente 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III.(Germanischen) SS-Panzerkorps',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49/2(1980), s.111
12) Milata., s.241
12) Milata., s.259
12) Milata., s.280

2007년 2월 18일 일요일

아무리 다급해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만드는 독일인들

아래의 이야기는 1944년 겨울 부다페스트에 포위된 독일군이 부다페스트 근교의 한 독일계 마을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부다페스트가 포위된 뒤 독일군이 Solymar에 주둔하게 됐다. 하지만 독일군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전쟁으로 남성들이 징집됐던 터라 독일 병사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독일 병사들은 장작을 패거나 추수를 도왔고 마을 사람들은 독일 병사들을 매우 좋아했다. – 물론 이들은 아기가 아니라서 같은 침대에서 재우지는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줬다. 병사들 중 한명은 Erzsebet에게 자신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적어줬다고 한다. 그 병사가 적은 것은 아돌프 헤르만 라인플루스라고 돼 있는데 Erzsebet은 라인플루스가 병사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병사의 고향 마을 이름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다른 병사 한명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크리스마스만 되면 포위망 안에 갇히네요.”

소련군은 Solymar를 점령하자 독일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소련군은 마을 광장에 카츄샤를 배치하고 Varhegy(부다에 있는 성채언덕, 독일군의 마지막 거점 중 하나)를 포격했다. 나중에 포위된 독일 무장친위대 병력이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을 때 이들 중 일부가 Solymar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들에게 식량을 주고 도망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옷을 빌려줬다. 하지만 도망치던 독일군 대부분은 소련군에게 잡혀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그리고 소련군이 Solymar를 다시 점령한 뒤 남은 패잔병들도 사로잡혀 죽었다. 마을사람들은 독일군을 좋아했기 때문에 학살된 독일군들을 마을 묘지에 매장했다. Erzsebet도 일년에 한번 라인플루스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Cecil D. Eby, Hungary at War : Civilian and Soldiers in World War II, The Pennsylvan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8, p201

포위망에 갇혀 오늘 내일 하는 중에도 크리스마스는 잘 챙기는 걸 보면 역시 독일인들은 크리스마스를 아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지원병은 얼마나 됐을까?

국내의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무장친위대의 “의용병” 규모를 굉장히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글들이 많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의용병 부대들이 대부분 외국인 지원자들로 충원된 것 처럼 생각하고 있다. 특히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11 SS 기갑척탄병사단(11 SS Freiwilligen Panzergrenadier Division Nordland)은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서유럽 지원병들로 구성됐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떠했을까?

친위대가 몸집 불리기를 준비하고 있던 1943년 초, 무장친위대, 의용군단(Freikorps) 소속의 북방계 “게르만”인은 다음과 같았다.

표1. 1943년 2월 6일 무장친위대/의용군단 소속 "게르만"인

국적/민족무장친위대(야전부대)무장친위대(보충부대)의용군단(야전부대)의용군단(보충부대)비 고
네덜란드인7906251,263693-
플랑드르인88153528373-
노르웨이인131121613318-
덴마크인205209633366-
핀란드인28221900-
에스토니아인001,222야전부대 및 보충부대 합계

3 SS 기갑군단의 편성 명령이 떨어진 것은 불과 1개월 뒤인 1943년 3월 30일이었다. 간판은 germanisches라고 달아놓긴 했는데 정작 게르만계 외국인 지원병은 일부분에 불과했던 셈이다. 실제로 11 SS 기갑척탄병 사단 소속의 SS 24 기갑척탄병연대 단마르크(Danemark)의 모체인 Freikorps Danmark 소속의 덴마크 지원병들은 1943년 5월에 연대로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독일인 연대장과 기간요원들이 대규모로 충원되자 여기에 반발해 복무연장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Freikorps는 그 동안 육군 보병사단의 일반 보병연대에 편입됐을 때 별 탈없이 잘 싸웠다는 점이다.)
연대의 명칭은 “노르게(Norge)” “단마르크”로 붙여 해당 국가의 지원병이 주축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인과 독일계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원래 11 SS 사단 소속 연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던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는 그나마 네덜란드인 지원자가 많아서 독립여단으로 편성했지만 이 여단조차 병력의 절반 이상을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으로 채우는 실정이었다.
미하엘리스(Rolf Michaelis)의 11 SS 기갑척탄병 사단사에는 1943년 2월까지는 11 SS 사단을 라트비아인 지원병으로 편성할 계획이었다고 돼 있는데 아마 이쪽이 훨씬 병력 보충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덤으로, 히믈러의 원래 계획은 나중에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단대호가 된 12 SS를 리투아니아인 사단에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3 SS 기갑군단 편성시 병력 보충에 도움을 준 것은 1943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독일군에 편입된 점이었다. 운 좋게도 3 SS 기갑군단이 편성될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편제표를 채우게 됐다.
히믈러는 지원병 군단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6 SS 산악사단 소속의 스위스인과 노르웨이인 150명이 차출해 3 SS 기갑군단에 배속시켰다.

티케(Wihelm Tieke)의 SS 3 기갑군단사 부록에는 노르트란트 사단의 1943년 9월 15자 외국인 병력 현황이 실려있다.

표 2. 1943년 9월 15일 노르트란트 사단의 외국인

국적/민족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덴마크인331621,191-
노르웨이인2050464-
스웨덴인0339-

1943년 12월의 병력 현황은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있다.
베그너(Bernd Wegner)의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의 부록에 실린 SS 3 기갑군단의 1944년 3월 31일자 보고서에는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이 오라니엔바움 지구에 투입됐을 당시 병력 구성이 나와있는데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표 3.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a. 군단 사령부 / 군단 경비중대 / 헌병대 / 기타 직할대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2049433,319-
독일인53144136-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3181-
독일계 헝가리인021-
독일계 크로아티아인004-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28129-
덴마크인2523-
플랑드르인031-

군단 보급수송대 (SS-Korps-Nachschub-Truppen 103)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2049433,319-
독일인62975-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1192-
독일계 헝가리인002-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106-
플랑드르인001-

b. 11 SS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Nordland)”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5583,39112,612-
독일인2321,4962,403-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225,738-
독일계 네덜란드인021-
독일계 덴마크인52616-
독일계 벨기에인001-
독일계 헝가리인0169-
독일계 크로아티아인126-
독일계 우크라이나인002-
독일계 리투아니아인001-
독일계 라트비아인002-
독일계 에스토니아인001-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119254-
덴마크인411931,123-
플랑드르인1915-
노르웨이인2962705-
스웨덴인1533-

c.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Nederland)"

-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편제상 병력3251,8956,740-
독일인94497457-
Volksdeutsche
독일계 루마니아인0252,070-
독일계 네덜란드인011-
독일계 덴마크인124-
독일계 벨기에인001-
독일계 헝가리인0426-
독일계 크로아티아인0010-
독일계 우크라이나인001-
독일계 리투아니아인002-
외국인 지원병
네덜란드인331991,984-
덴마크인006-
플랑드르인105-
노르웨이인002-

대략적인 통계를 보면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제외한 “게르만 계” 지원병은 전체 군단에서 1/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친위대는 일종의 선전효과를 위해 “게르만 계 지원병 군단”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빼면 거의 알맹이도 없는 셈이었다.

1944년 5월 25일 자료에 따른 외국인 지원병 현황은 더 좋지 않다.(Tieke)

표 4. 1944년 5월 25일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11 SS 기갑척탄병사단

국적/민족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덴마크인37220852-
노르웨이인2148269-
스웨덴인2819-

4 SS 기갑척탄병여단

국적/민족장 교(Führer)부사관(Unterführer)사 병(Mannschaften)비 고
네덜란드인392912,406-
플랑드르인2810-

독일군은 전쟁 기간 내내 병력 보충에 애를 먹었지만 특히 이들 외국인 지원병들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보충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독일인이 아닌 이상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히틀러의 덜떨어진 이상을 위해 독일인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고 싶겠는가? 실제로 1941년 7월 중립국이던 포르투갈 정부는 지원병 부대(portugiesischen Legion) 편성을 허가했지만 지원자가 거의 없어 부대 편성까지는 되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현명한 친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