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만헤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만헤이 옆동네 그랑므닐에 전시되어 있는 판터 사진을 몇장 올려볼까 합니다. 2008년에 벨기에에 놀러갔다가 찍은 사진입니다. 귀국한 뒤 블로그에 몇 장을 올렸었는데 지난번에 올리지 않았던 사진까지 더해서 크기도 조금 더 키워서 올려볼까 합니다. 사진을 올려놓고 보니 여행이 가고 싶군요. ㅋ
2011년 11월 28일 월요일
2008년 2월 9일 토요일
2008년 유럽여행 경과 보고
이번 유럽여행은 19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관광 + 답사 + 지름 이라는 3대 과제를 모두 수행해 보자는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좀 어정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여행 방식은 대략적인 계획만 세우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여행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편이어서 약간의 돌발 변수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답사와 서적구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행을 했다면 훨씬 알찬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구상한 원래의 일정과 실제 여행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구상한 원래의 일정과 실제 여행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
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지원병은 얼마나 됐을까?
국내의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무장친위대의 “의용병” 규모를 굉장히 과장되게 인식하고 있는 글들이 많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의용병 부대들이 대부분 외국인 지원자들로 충원된 것 처럼 생각하고 있다. 특히 동부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11 SS 기갑척탄병사단(11 SS Freiwilligen Panzergrenadier Division Nordland)은 거의 대부분의 인원이 서유럽 지원병들로 구성됐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떠했을까?
친위대가 몸집 불리기를 준비하고 있던 1943년 초, 무장친위대, 의용군단(Freikorps) 소속의 북방계 “게르만”인은 다음과 같았다.
표1. 1943년 2월 6일 무장친위대/의용군단 소속 "게르만"인
3 SS 기갑군단의 편성 명령이 떨어진 것은 불과 1개월 뒤인 1943년 3월 30일이었다. 간판은 germanisches라고 달아놓긴 했는데 정작 게르만계 외국인 지원병은 일부분에 불과했던 셈이다. 실제로 11 SS 기갑척탄병 사단 소속의 SS 24 기갑척탄병연대 단마르크(Danemark)의 모체인 Freikorps Danmark 소속의 덴마크 지원병들은 1943년 5월에 연대로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독일인 연대장과 기간요원들이 대규모로 충원되자 여기에 반발해 복무연장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Freikorps는 그 동안 육군 보병사단의 일반 보병연대에 편입됐을 때 별 탈없이 잘 싸웠다는 점이다.)
연대의 명칭은 “노르게(Norge)” “단마르크”로 붙여 해당 국가의 지원병이 주축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인과 독일계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원래 11 SS 사단 소속 연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던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는 그나마 네덜란드인 지원자가 많아서 독립여단으로 편성했지만 이 여단조차 병력의 절반 이상을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으로 채우는 실정이었다.
미하엘리스(Rolf Michaelis)의 11 SS 기갑척탄병 사단사에는 1943년 2월까지는 11 SS 사단을 라트비아인 지원병으로 편성할 계획이었다고 돼 있는데 아마 이쪽이 훨씬 병력 보충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덤으로, 히믈러의 원래 계획은 나중에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단대호가 된 12 SS를 리투아니아인 사단에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3 SS 기갑군단 편성시 병력 보충에 도움을 준 것은 1943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독일군에 편입된 점이었다. 운 좋게도 3 SS 기갑군단이 편성될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편제표를 채우게 됐다.
히믈러는 지원병 군단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6 SS 산악사단 소속의 스위스인과 노르웨이인 150명이 차출해 3 SS 기갑군단에 배속시켰다.
티케(Wihelm Tieke)의 SS 3 기갑군단사 부록에는 노르트란트 사단의 1943년 9월 15자 외국인 병력 현황이 실려있다.
표 2. 1943년 9월 15일 노르트란트 사단의 외국인
1943년 12월의 병력 현황은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있다.
베그너(Bernd Wegner)의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의 부록에 실린 SS 3 기갑군단의 1944년 3월 31일자 보고서에는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이 오라니엔바움 지구에 투입됐을 당시 병력 구성이 나와있는데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표 3.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a. 군단 사령부 / 군단 경비중대 / 헌병대 / 기타 직할대
군단 보급수송대 (SS-Korps-Nachschub-Truppen 103)
b. 11 SS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Nordland)”
c.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Nederland)"
대략적인 통계를 보면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제외한 “게르만 계” 지원병은 전체 군단에서 1/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친위대는 일종의 선전효과를 위해 “게르만 계 지원병 군단”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빼면 거의 알맹이도 없는 셈이었다.
1944년 5월 25일 자료에 따른 외국인 지원병 현황은 더 좋지 않다.(Tieke)
표 4. 1944년 5월 25일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11 SS 기갑척탄병사단
4 SS 기갑척탄병여단
독일군은 전쟁 기간 내내 병력 보충에 애를 먹었지만 특히 이들 외국인 지원병들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보충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독일인이 아닌 이상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히틀러의 덜떨어진 이상을 위해 독일인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고 싶겠는가? 실제로 1941년 7월 중립국이던 포르투갈 정부는 지원병 부대(portugiesischen Legion) 편성을 허가했지만 지원자가 거의 없어 부대 편성까지는 되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현명한 친구들이다.
친위대가 몸집 불리기를 준비하고 있던 1943년 초, 무장친위대, 의용군단(Freikorps) 소속의 북방계 “게르만”인은 다음과 같았다.
표1. 1943년 2월 6일 무장친위대/의용군단 소속 "게르만"인
국적/민족 | 무장친위대(야전부대) | 무장친위대(보충부대) | 의용군단(야전부대) | 의용군단(보충부대) | 비 고 |
네덜란드인 | 790 | 625 | 1,263 | 693 | - |
플랑드르인 | 88 | 153 | 528 | 373 | - |
노르웨이인 | 131 | 121 | 613 | 318 | - |
덴마크인 | 205 | 209 | 633 | 366 | - |
핀란드인 | 282 | 219 | 0 | 0 | - |
에스토니아인 | 0 | 0 | 1,222 | 야전부대 및 보충부대 합계 |
3 SS 기갑군단의 편성 명령이 떨어진 것은 불과 1개월 뒤인 1943년 3월 30일이었다. 간판은 germanisches라고 달아놓긴 했는데 정작 게르만계 외국인 지원병은 일부분에 불과했던 셈이다. 실제로 11 SS 기갑척탄병 사단 소속의 SS 24 기갑척탄병연대 단마르크(Danemark)의 모체인 Freikorps Danmark 소속의 덴마크 지원병들은 1943년 5월에 연대로 확대 개편되는 과정에서 독일인 연대장과 기간요원들이 대규모로 충원되자 여기에 반발해 복무연장을 거부하기도 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Freikorps는 그 동안 육군 보병사단의 일반 보병연대에 편입됐을 때 별 탈없이 잘 싸웠다는 점이다.)
연대의 명칭은 “노르게(Norge)” “단마르크”로 붙여 해당 국가의 지원병이 주축인 것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독일인과 독일계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원래 11 SS 사단 소속 연대로 재편성될 예정이었던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는 그나마 네덜란드인 지원자가 많아서 독립여단으로 편성했지만 이 여단조차 병력의 절반 이상을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으로 채우는 실정이었다.
미하엘리스(Rolf Michaelis)의 11 SS 기갑척탄병 사단사에는 1943년 2월까지는 11 SS 사단을 라트비아인 지원병으로 편성할 계획이었다고 돼 있는데 아마 이쪽이 훨씬 병력 보충은 쉬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덤으로, 히믈러의 원래 계획은 나중에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단대호가 된 12 SS를 리투아니아인 사단에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3 SS 기갑군단 편성시 병력 보충에 도움을 준 것은 1943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독일군에 편입된 점이었다. 운 좋게도 3 SS 기갑군단이 편성될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이 편제표를 채우게 됐다.
히믈러는 지원병 군단이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6 SS 산악사단 소속의 스위스인과 노르웨이인 150명이 차출해 3 SS 기갑군단에 배속시켰다.
티케(Wihelm Tieke)의 SS 3 기갑군단사 부록에는 노르트란트 사단의 1943년 9월 15자 외국인 병력 현황이 실려있다.
표 2. 1943년 9월 15일 노르트란트 사단의 외국인
국적/민족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덴마크인 | 33 | 162 | 1,191 | - |
노르웨이인 | 20 | 50 | 464 | - |
스웨덴인 | 0 | 3 | 39 | - |
1943년 12월의 병력 현황은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있다.
베그너(Bernd Wegner)의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의 부록에 실린 SS 3 기갑군단의 1944년 3월 31일자 보고서에는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이 오라니엔바움 지구에 투입됐을 당시 병력 구성이 나와있는데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표 3. 1943년 12월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a. 군단 사령부 / 군단 경비중대 / 헌병대 / 기타 직할대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204 | 943 | 3,319 | - |
독일인 | 53 | 144 | 136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3 | 181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2 | 1 | - |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 0 | 0 | 4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2 | 8 | 129 | - |
덴마크인 | 2 | 5 | 23 | - |
플랑드르인 | 0 | 3 | 1 | - |
군단 보급수송대 (SS-Korps-Nachschub-Truppen 103)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204 | 943 | 3,319 | - |
독일인 | 6 | 29 | 75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1 | 192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0 | 2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1 | 0 | 6 | - |
플랑드르인 | 0 | 0 | 1 | - |
b. 11 SS 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Nordland)”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558 | 3,391 | 12,612 | - |
독일인 | 232 | 1,496 | 2,403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22 | 5,738 | - |
독일계 네덜란드인 | 0 | 2 | 1 | - |
독일계 덴마크인 | 5 | 26 | 16 | - |
독일계 벨기에인 | 0 | 0 | 1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1 | 69 | - |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 1 | 2 | 6 | - |
독일계 우크라이나인 | 0 | 0 | 2 | - |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 0 | 0 | 1 | - |
독일계 라트비아인 | 0 | 0 | 2 | - |
독일계 에스토니아인 | 0 | 0 | 1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1 | 19 | 254 | - |
덴마크인 | 41 | 193 | 1,123 | - |
플랑드르인 | 1 | 9 | 15 | - |
노르웨이인 | 29 | 62 | 705 | - |
스웨덴인 | 1 | 5 | 33 | - |
c. 4 SS 기갑척탄병여단 "네더란트(Nederland)"
-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편제상 병력 | 325 | 1,895 | 6,740 | - |
독일인 | 94 | 497 | 457 | - |
Volksdeutsche | ||||
독일계 루마니아인 | 0 | 25 | 2,070 | - |
독일계 네덜란드인 | 0 | 1 | 1 | - |
독일계 덴마크인 | 1 | 2 | 4 | - |
독일계 벨기에인 | 0 | 0 | 1 | - |
독일계 헝가리인 | 0 | 4 | 26 | - |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 0 | 0 | 10 | - |
독일계 우크라이나인 | 0 | 0 | 1 | - |
독일계 리투아니아인 | 0 | 0 | 2 | - |
외국인 지원병 | ||||
네덜란드인 | 33 | 199 | 1,984 | - |
덴마크인 | 0 | 0 | 6 | - |
플랑드르인 | 1 | 0 | 5 | - |
노르웨이인 | 0 | 0 | 2 | - |
대략적인 통계를 보면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제외한 “게르만 계” 지원병은 전체 군단에서 1/4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친위대는 일종의 선전효과를 위해 “게르만 계 지원병 군단”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독일인과 독일계 외국인을 빼면 거의 알맹이도 없는 셈이었다.
1944년 5월 25일 자료에 따른 외국인 지원병 현황은 더 좋지 않다.(Tieke)
표 4. 1944년 5월 25일 SS 3 기갑군단의 외국인
11 SS 기갑척탄병사단
국적/민족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덴마크인 | 37 | 220 | 852 | - |
노르웨이인 | 21 | 48 | 269 | - |
스웨덴인 | 2 | 8 | 19 | - |
4 SS 기갑척탄병여단
국적/민족 | 장 교(Führer) | 부사관(Unterführer) | 사 병(Mannschaften) | 비 고 |
네덜란드인 | 39 | 291 | 2,406 | - |
플랑드르인 | 2 | 8 | 10 | - |
독일군은 전쟁 기간 내내 병력 보충에 애를 먹었지만 특히 이들 외국인 지원병들은 전쟁 말기로 갈수록 보충에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독일인이 아닌 이상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히틀러의 덜떨어진 이상을 위해 독일인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고 싶겠는가? 실제로 1941년 7월 중립국이던 포르투갈 정부는 지원병 부대(portugiesischen Legion) 편성을 허가했지만 지원자가 거의 없어 부대 편성까지는 되지 못했다고 한다.
역시 현명한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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