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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4일 일요일

클라우제비츠, 마키아벨리 그리고 중립

2차대전기 독일의 군사동맹이 가진 문제점을 연구한 군사사가 디나도Richard L. DiNardo는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이론가들은 동맹을 맺고 싸우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디나도의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런 사례의 하나로 클라우제비츠를 들고 있습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는 동맹국과의 연합작전에 대해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1)

그런데 프로이센-독일의 군사이론에서 군사 동맹이 큰 관심을 받지 못 한 것과 클라우제비츠를 연계 시키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전쟁론』에서는 동맹국과의 연합작전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외교에 대해 무관심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클라우제비츠 연구자 중 한 명인 베아트리체 호이서Beatrice Heuser는 클라우제비츠의 외교에 대한 시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마키아벨리를 꼽습니다. 실제로 클라우제비츠가 남긴 글에서 마키아벨리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 많으며 마키아벨리의 저작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클라우제비츠는 『군주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21장은 모든 외교관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따르지 못하는 이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2)

클라우제비츠가 극찬한『군주론』의 21장은 그 유명한 ‘외교적 중립’의 문제점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장입니다. 마키아벨리는 21장에서 인접한 두개의 강국이 충돌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어느 한 편에 서서 참전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이 경험한 현실 때문에 더욱 더 마키아벨리에 주목했을지도 모릅니다. 프로이센은 1805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프랑스와 싸우고 있을 때 중립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맹국이 남지 않았던 1806년이 되어서야 전쟁에 끼어들었고 그 결과는 굴욕적인 패전이었습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외교적인 부분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은 것은 약간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가 마키아벨리를 높게 평가한 것을 보면 굳이 외교적인 측면은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1)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5~6
2) Beatrice Heuser, Clausewitz lesen!, (Oldenbourg Verlag, 2010), p.9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