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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3일 토요일

수령님의 경제관;;;;

최근 sonnet님이 북한의 개혁 개방 가능성에 대해 전망하는 글을 통해 김정일 체제의 구조적인 한계점을 지적했습니다. 저 또한 김정일 정권의 정통성이 김일성의 노선을 따르른 데서 나온다는 점이 체제의 융통성을 제약한다는 sonnet님의 지적에 동의하는 편 입니다.

김일성은 살아있는 동안 북한 체제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북한 인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일성은 쓸데없이 말이 많았으며 그 점은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중공업화와 이에 기초한 자력갱생 노선을 강조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중공업화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당연히 걸어야 할 것이었고 경공업 부터 시작해 중공업으로 이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나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나라들의 공업 발전 력사를 보면 많은 나라들에서는 우선 일정한 기간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킨 다음 경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경공업을 먼저 발전시켜 돈을 모아가지고 중공업을 건설하였습니다.

량현갑 편, 『전후 우리 당 경제 건설의 기본 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1), 4쪽

김일성은 이렇게 중공업화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기 부터 중공업 위주의 경제건설에 집착했습니다. 그런 점은 1950년대에 김일성이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납니다.

1957년 인민경제계획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에 기초하여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마차가지로 다음해에도 중공업부문에 투자를 집중하고 많은 힘을 돌릴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조치입니다.

지금 일부 나라들에서는 중공업을 좀 죽이자거니 살리자거니 하는 론의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절대로 설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전반적인 인민경제의 토대를 튼튼히 할 수 없으며 인민생활도 높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경제건설의 객관적 요구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가 이런 큰 힘과 튼튼한 밑천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로선이 옳았으며 당의 령도밑에 전체 인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투쟁하여 이 로선을 훌륭히 관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3개년 계획기간에 당의 방침대로 중공업발전에 힘을 넣지 않았더라면, 인민생활을 높인다고 하여 형제나라들의 원조 같은 것도 그대로 다 때려먹었더라면 그때 한 두해 동안은 잘 살수 있었을지 몰라도 오늘에 와서 아무것도 자체로 할 수 없는 곤난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을 것 입니다.

김일성,「사회주의건설에서 혁명적대고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6년 12월 13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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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후시기에 우리가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지 않고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의 내부원천을 주로 인민들의 개인적 소비에만 돌렸더라면 우리는 자체의 경제토대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오늘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울수도 없었을 것 입니다. 전후시기에 있어서의 우리 당 경제정책의 커다란 의의는 그것이 형제나라들의 원조와 우리 나라 내부원천을 가장 합리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인민생활을 높일수 있게 하였으며 우리 인민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자립적 토대를 기본적으로 닦을 수 있게 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김일성,「모든것을 조국의 륭성발전을 위하여 :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차회의에서 한 연설, 1958년 6월 11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15~16쪽

김일성에게 있어 중공업은 민족적 자립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생각한 민족적 자립경제는 대외무역으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대외무역을 통해 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면 정치적인 자립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자립적 민족 경제의 기본 내용에 대한 김일성 동지의 명제에서 기본으로 되는 것은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보장할 수 있도록 경제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서는 경제를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키고 부문들 간의 유기적인 련계를 확고히 보장하는 종합적인 경제 체계를 형성하여야 하며 인민 경제를 현대적 기술로 장비하고 자체의 원료 기지 등 생산의 물질적 요인을 자체로 튼튼히 조성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자체의 기술, 자체의 자원, 자체의 간부와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며 생산 수단과 소비재에 대한 국내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자립적 민족 경제는 자체의 수요를 기본적으로 자체로 충족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주로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발전하게 된다.

(중략)

대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경제 발전의 일면성과 기형적인 구조를 면할 수 없으며 국내 수요의 원만한 충족을 보장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예속 경제의 참혹한 처지에서 결코 벗어 날 수 없게 한다.

정태식,『우리 당의 자립적 민족 경제 건설로선』(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3), 9~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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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갱생. 이것은 자기 나라 혁명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주체적력량에 의거하여 완수하려는 철저한 혁명적 립장이며 자기 나라 건설은 자기 인민의 로동과 자기 나라의 부원으로 진행하려는 자주적 립장입니다.

이러한 혁명적 립장과 혁명적 원칙을 견지하여야만 우리는 어떠한 복잡하고 어려운 정세에서도 혁명적 절개를 굽히지 않고 투쟁을 계속할 수 있으며 전진도상에서 제기되는 난관과 애로를 용감하게 이겨내고 혁명투쟁의 승리와 건설사업의 성과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이 없으면 자기의 힘을 믿지 않게 되고 자기 나라의 내부원천을 동원하기 위하여 노력도 하지 않게 되며 안일성과 해이성에 사로잡히고 소극성과 보수주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여야만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고 나라의 부강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자립은 정치적 독립의 물질적 기초입니다. 경제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나라의 추종 국가로 되며 경제적으로 예속된 민족은 정치적으로도 식민지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의 물질 기술적 토대를 쌓을 수 없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천리마운동과 사회주의건설의 대고조에 대하여』(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0), 317~318쪽

그렇다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적 교류가 북한의 '민족경제 수립'에 있어 수행해야 할 역할은 무었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김일성의 생각은 다음의 인용문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주의 시장을 공고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개 형제나라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건설의 공동위업의 승리를 위한 정치적 리익으로 부터 출발하여 경제적 호상관계에서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숭고한 정신을 발휘하여 협애한 민족리기주의를 철저히 없애는 것 입니다. 특히 발전된 사회주의 나라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들에 어떠한 정치적 부대조건도 아무런 사심도 없는 더 많은 물질적 지원을 주어야 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렬강들의 경제 봉쇄를 성과적으로 물리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과의 거래를 적게 하고 사회주의 시장에 의거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외무역관계에서도 결코 계급적 립장을 떠나거나 공산주의적 도덕과 동지적 의리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김일성, 「국가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 자립, 자위의 혁명정신을 더욱 철저히 구현하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1967년 12월 16일」, 앞의 책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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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한 형제 국가가 뒤떨어진 나라에 대하여 사심 없는 원조를 제공하여 자립적 민족 경제의 건설을 최대한으로 촉진하며 락후한 나라는 자력 갱생의 정신으로 부터 출발하여 최단 기간에 나라의 경제력을 강화하여 형제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정태식, 위의 책 31쪽

위의 인용문은 '외국의 간섭은 귀찮으니 경제적 지원은 아무 조건 없이 날로먹게 해주세요' 정도로 번역하면 적절할 것 입니다.

김일성은 정치적 자립(=고립)을 위해 자체 완결적인 산업 구조를 필요로 했으며 외국과의 교류는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최소한의 교류 또한 북한에 대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선에서 용인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북한은 전후복구기에 사회주의 국가들의 막대한 원조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김일성은 대외 원조보다는 북한의 자체적인 역량을 과신했습니다. 동시에 대외지향적인 공업화를 외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의 길로 보았다는 점은 북한경제가 1960년대 남한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요.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북한, 수입차 관세율을 30%에서 100%로 인상

마이니치 신문에 재미있는 소식이 하나 실렸습니다.

北朝鮮:輸入車関税100%に 市民の車所有はほぼ絶望的

북한이 수입차에 대한 관세를 100%로 인상했다고 합니다.(;;;;)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면 북한 내에도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는 자동차 수요가 있는 모양입니다. 예전에 합작으로 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것을 보고 과연 저것을 북한 내부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아무래도 그 보다는 상황이 좋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올해 10월 이전에는 수입차에 대한 관세율이 30%였다는데 이것도 상당히 높았군요.

짤막한 단신 기사이지만 꽤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2008년 7월 26일 토요일

이승만 시기 수출정책에 대한 잡상

지난번에 sonnet님이 올리신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이라는 포스팅에 반론이 하나 달렸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sonnet님이 「일본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달라, 그것도 내일 당장 달라」라는 포스팅으로 다시 반론을 제기해 주셨으니 저는 사족을 조금 더 달아볼까 합니다.

박정희 시기의 경제개발도 그렇지만 이승만시기 수출정책에 대해서도 당연히 평가가 상이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의 하야까지 한국의 수출은 큰 증가 없이 정체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미 sonnet님의 글에서 지적되었지만 한국의 수출은 1958년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에 있었고 1958년 이후 부터의 성장도 겨우 1953년 수준의 수출을 회복하는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의 목표는 1961년까지 1억달러 수출을 돌파하는 것 이었는데 실제로는 1961년의 수출액은 3864만6천달러로 목표의 3분의 1 수준에 그쳤고 겨우 1953년의 수출실적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959년의 실적과 1960년의 실적도 목표치를 한참 밑돌고 있었으니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은 대실패였습니다. 이걸 단순히 성장률로 평가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 정부하의 수출5개년계획에도 불구하고 수출 실적은 형편없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대근의 지적이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이대근은 『해방후ㆍ1950년대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이승만 정부하에서 이뤄졌던 수출 계획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 계획은 농수산물 등 1차 산품을 위주로 한 것이었는데 수출의 핵심이었던 미국에 대한 텅스텐 수출이나 일본에 대한 수산물 수출은 정책적인 요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해 정부의 수출 의지만으로는 목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것 입니다. 이대근은 경제적 요소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수출 상대국의 정책적 요소에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수출5개년계획은 확고한 실현가능성이 크게 부족한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수출이 제자리 걸음을 했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직접적인 수출진흥책이 부족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출5개년계획이 1960년대 이후 수출에 필요한 잠재력을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상철 조차도 이승만 정부하에서는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사실상 전무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은 거의 절대적으로 원조에 의존해야 했는데 원조자금은 수출산업이 아니라 수입대체산업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는 점도 많은 경제사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이승만 정권기에 적극적인 수출 지원책이 부족했다는 근거로 연구자들에게 많이 이용되는 것이 바로 수출보조금입니다. 수출5개년계획이 진행 중이던 1958년~1960년까지 수출 보조금은 1달러당 1.2원에서 1.3원에 불과했는데 이것은 군사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1962년에는 1달러당 21.5원으로 폭증합니다. 그리고 1963년을 제외하면 수출보조금은 계속 증가하는데 1964년에는 27.4원이던 것이 1966년에는 51.6원으로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군사정권과 제 3공화국 초기에 급격한 수출 증가가 있었던 원인으로는 이렇게 직접적인 수출지원정책이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수출5개년계획 기간인 1957년부터 1961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이 2억7400만 달러였는데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시행된 1962년부터 1966년까지의 대외원조액은 1억6800만 달러로 이승만 정권은 돈이 없어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을 시행하지 못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직접적인 수출보조금 지급의 부족을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으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김낙년 같은 연구자들은 외화예치제도를 통한 프리미엄이 실제로는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시세로 매도해서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은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게 기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그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승만 정부가 전후 복구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제를 안정시키고 향후 60년대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외 수출은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이렇다 할 적극적인 수출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닙니다. 1957년부터 시행된 수출5개년계획은 구체적인 수출 증대 방안도 없이 만들어 졌으며 결과적으로 목표액의 30% 수준을 달성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시행된 수출 진흥책도 결과적으로는 과대평가된 공정환율에 기대는 것 이었는데 이런 방식이 계속되는한 원조 달러에 대한 의존을 끊기가 어려웠겠지요. sonnet님의 「미국의 대한원조와 경제성장의 시작」에 대해 반론하려면 이승만 시기의 수출정책이 과연 원조에 의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나갔는가를 설명해야 할텐데 당시의 사례를 보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2007년 6월 6일 수요일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중립

네덜란드는 1차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면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가진 경제적,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따른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도 점령해 버리면 편하지만 그렇게 되면 잃어 버리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계획을 수립하면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면 해상봉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독일의 무역을 위해서라도 대서양의 출입에 용이한 중립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독일과 외부와의 무역을 중개해 줄 수 있는 대서양 국가는 사실상 네덜란드 밖에 없지요. 특히 로테르담은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을 독일로 공급하는 주요 항구였기 때문에 독일로서는 네덜란드와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네덜란드가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몰트케는 1차대전 발발 이전부터 외교 채널을 통해 독일은 전쟁 시 네덜란드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하지요. 네덜란드는 벨기에가 독일군의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독일의 의도에 대해 많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측의 중립 보장은 너무나도 중요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독일에 대한 식료품 공급처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식량 비축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수입된 곡물을 외국으로 재수출 하는 것을 금지 시켰는데 이때 독일 정부는 즉시 외교적 공갈을 통해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 시켰습니다.
지정학적 위치상 네덜란드는 미국과 독일간의 밀 중개무역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 결과 독일은 네덜란드를 통한 식료품 공급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1915년에는 독일이 수입하는 식료품의 50%가 네덜란드를 통해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지요. 네덜란드가 1916년에 독일에 수출한 식량은 독일인 120만명이 하루에 3,500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독일은 해상봉쇄 때문에 네덜란드는 물론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스웨덴을 통한 식량수입을 늘렸고 네덜란드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Marc Frey의 Bullying the Neutrals : The Case of the Netherlands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914년 1~6월에 독일로 감자 및 밀가루 11,411톤, 버터 7,671톤, 치즈 6,312톤, 달걀 7,868톤, 고기 5,820톤을 수출했는데 이것이 1916년 1~6월에는 각각 51,201톤, 19,026톤, 45,969톤, 20,328톤, 40,248톤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물론 네덜란드가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합군의 해상봉쇄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드니 영국의 눈치도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외교부는 1916년 11월에 영국 정부에게 독일에 대한 식료품 수출을 늘리는 것은 독일의 침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 정부가 양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특히 무역에 대한 국가의존도가 높은 만큼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무역제제에 동참할 경우 독일 해군이 네덜란드 상선을 공격할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영국 측을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는 있는지라 영국 정부는 네덜란드 측에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50%이상 감축하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여기에 미국이 참전하자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됩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한술 더 떠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금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1917년 10월, 미국이 독일에 대한 무역 금지 요구에 합류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독일은 1916년 말부터 유사시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고 네덜란드 역시 독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독일은 양면전쟁의 여파로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할 만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으로 부터의 석탄 공급이 감소했기 때문에 독일의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점도 독일과의 무역을 계속해야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미국이 참전한 이후 미국과 영국 양측의 압력에 못 이겨 독일에 대한 수출을 감축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석탄공급을 확보하기 위해서 미국,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독일에 대한 식량 수출을 중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가 독일에 대한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 것은 1918년 9월로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 진 뒤 였고 바로 휴전이 이어진 뒤 네덜란드는 다시 독일에 대한 수출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 네덜란드는 융통성있는 외교와 약간의 행운의 덕택으로 중립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미국과 독일을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금 비축량은 1914년 6월 30일 기준으로 3억620만 굴덴이었는데 1918년 12월 31일에는 10억6890만 굴덴에 달했다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