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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이탈리아의 국력에 대한 아주 탁월한 평가

이탈리아의 국력, 특히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평가가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아주 왕성한 식욕을 가졌지요. 그런데 이빨이 영 시원찮습디다.”
(Diese Italiener, sie haben zwar großen Appetit, aber schlechte Zähne.)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대사에게, 1881년.

Hendrik L. Wesseling, Teile und herrsche: die Aufteilung Afrikas 1880-1914, (Franz Steiner Verlag, 1999), p.25

재치도 있거니와 아주 정확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탈리아인들에겐 좀 안됐지만. 그런더 더 안습인건 2차대전이 발발할 때 까지도 이탈리아의 군대가 시원찮아서 2차대전에 대한 저작에서도 이미 2차대전으로 부터 60년 전에 있었던 저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는 겁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외교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한번쯤 이 일화를 접해 보셨을 겁니다;;;;;

이런 일화를 보면 비스마르크는 만담가의 자질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2010년 3월 13일 토요일

강대국 정치의 일면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독일 통일 문제가 다시 떠오르면서 전략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있던 소련은 판을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해보자는 계산에서 독일 통일 문제에 소련과 미국은 물론 영국과 프랑스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을 분할 점령하고 분단체제를 형성한 당사국이니 명분은 꽤 그럴싸 했던 셈입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부담을 가질 것이고 이 두나라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소련으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4개국이 주도적으로 독일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이 서독에게는 굴욕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내놓은 절충안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당사자인 서독과 동독, 그리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여한 이른바 "2+4"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4대강국이 독일의 자주적 통일 문제에 끼어드는 모양이긴 했습니다만 소련이 제안한 4대강국 중심의 협의체 보다는 서독에게 훨씬 나은 방안이었을 겁니다.

한편, "2+4"를 통해 독일 통일문제를 협의한다는 방안은 1990년 2월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다른 국가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판에 끼워달라고 들고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었던 제임스 베이커(James A. Baker III)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우리가 오타와 회의에서 당시 추진 중이던 "2+4" 방식의 협상에 대해 발표하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토 회의에서 다룰 생각이었다. 그러자 사태는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그리고 다른 나라들도 독일 문제에 끼고 싶었기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만약 발언권을 가진 15개, 또는 16개국 대표가 발언을 신청해 독일이 재통일 될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 상황을 어찌 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 회의에서 미국측이 "독일의 재통일에 대한 우리의 계획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발표하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지아니 데 미첼리스(Gianni de Michelis)가 발언을 신청했다.

"독일 재통일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 문제는 이탈리아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고 유럽의 미래와도 관계된 문제입니다. 우리도 협상에 참가해야 겠습니다."

그러자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겐셔는 거칠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이 게임에 끼어들 수 없어!(Sie sind nicht mit im Spiel)"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태도에 꽤 놀랐다. 서독과 동독이 협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종결지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독일과 서유럽의 15개국... 아니 14개국, 그리고 소련과 미국, 여기에 캐나다 까지 끼어들었다면 의사 소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Alexander von Plato, Die Vereinigung Deutschlands - ein weltpolitisches Machtspiel(2. Aflg)(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 2003), ss.283~284

겐셔는 외교적으로 매우 무례한 발언을 했는데 사실 이건 강대국이 중심이 되는 국제정치의 찝찝한 일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일이 보기엔 한 수 아래의 나라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문제에 끼어드는 것 만으로도 불쾌한데 그 보다 국력이 더 떨어지는 작은 나라들이 끼어들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 없었겠지요. 근대이후의 국제관계에서는 형식상 모든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합니다만 실제로는 국력이 그대로 반영되지요.

그리고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아웅다웅 거리는 것은 더 큰 나라들이 보기에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커가 미국의 "2+4"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유럽 각국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세바르드나제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베이커가 놀랄만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역사적으로 위험한 문제였던 독일의 군국주의가 나타날 조짐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도 기본적으로 미국측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 이오." 소련은 새로운 현실에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일 독일의 장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고르바초프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는 유럽 내부의 주도권을 어느 나라가 쥐게 될 것인지 신경쓴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소련이나 미국이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소련과 미국은 대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세력 균형을 좌우할 능력이 있지요."**

Philip Zelikow and Condoleezza Rice, Germany Unified and Europe Transformed : A Study in Statecraft(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p.182.

독일의 통일 과정은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만 그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대상은 실력이 뒷받침 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 밖에 없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처럼 딴지를 걸고 나설 자격미달(???)의 나라는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본격적으로 논의 될 때 몽골이나 베트남이 한 자리 요구할 리는 없겠지요^^;;;;

*위에서 인용한 겐셔의 발언은 꽤 유명해서 독일 통일과 관련된 많은 저작들에 실려있습니다. 젤리코와 라이스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 외교문서를 참고했기 때문에 베이커의 구술을 참고한 플라토의 서술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은 직역하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의역을 했습니다. 원문은 "We are big countries and have our own weight." 입니다.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벼락치기 이탈리아 구경 - 밀라노, 베네치아

툰 기갑박물관 구경을 마친 뒤 다시 베른 중앙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다음 행선지인 이탈리아로 넘어갈 차례가 됐으니까요.


일단 밀라노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생긴것도 별로에 맛도 별로더군요.


맛없는 피자를 뱃속에 집어 넣은 뒤 밀라노로 가는 CIS를 탔습니다. 그런데 멋진 ICE에 익숙해 져서 그런지 CIS는 뭔가 좀 모자라 보이더군요.


밀라노에 도착하고 바로 제일 싼 호텔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형편없는 시설에도 불구하고 방값은 비쌌는데 과연 관광객의 등골을 빼먹는 이탈리아다 싶었습니다.


대충 씻은 뒤 김윤진이 이탈리아말로 떠드는 로스트 시즌 2를 보고 잤습니다.

이놈이 지난 밤에 잤던 호텔입니다.

다음날 일어나자 마자 두오모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중간에 중앙역을 다시 보게 됐는데 맑은 날씨에 보니 꽤 멋진 건물이더군요. 시설이 허접한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두오모 성당으로 가는 길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걸으면서 계속해서 독일과 비교를 하게 되더군요. 일단 알아보기 어렵게 붙여 놓은 도로표지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호텔에서 대충 한 시간 정도 걸으니 두오모 성당이 나왔습니다.

1차 목적지 도착!

그리고 두오모 광장 근처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크. 역시 먹는것 하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이탈리아 만세!


승리의 이탈리아! 승리의 이탈리아!

식사를 하고 광장 주변을 어슬렁 거렸습니다. 비둘기 모이를 강매하는 파키스탄인(?)만 제외하면 즐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San Lorenzo 성당으로 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보수 공사중이어서 그 멋지다는 교회의 모자이크를 구경하지 못 했습니다. 책자의 설명으로는 370년 경에 처음 건립되었고 16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함께 모자이크도 만들어 졌다는데 이거 구경을 할 수 없으니 정말 아쉽더군요.



아래 사진은 교회 쪽에서 밖을 보고 찍은 것인데 앞에 있는 돌 기둥들이 제가 밀라노에서 본 유일한 로마시대 유적이었습니다. 이 돌기둥 들도 제법 유명한 모양이더군요.


San Lorenzo 성당 다음에는 Sant'Eustorgio 성당으로 갔습니다. 이 성당은 군사사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르바로사가 밀라노를 털때 성당의 성물인 동방박사의 유골을 탈취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뭐, 실제고 그게 동방박사의 유골일 리는 없었겠지만 종교란게 다 그렇죠...


Sant'Eustorgio 성당을 구경한 뒤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원래 계획에서는 밀라노와 파비아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베네치아를 구경하려 했는데 중간에 아르덴느 구경을 한 번 한 덕분에 멋진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단 하룻동안 '발가락'만 담그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귀국 한 뒤 이탈리아만 3개월 여행했다는 분을 만나서 아주 부러워 하기도 했지요.

왠지 반가운 화교 상점

중간에 어떤 중고차 가게에서는 재미있는 아이템을 하나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성 마리아(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으로 갔습니다. 음. 역시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아줌마들로 득시글 거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참 앉아서 쉰 다음에 구경했습니다. 크... 그런데 이 어린양은 미적 감각이 제로여서 그런지 막상 유명한 물건을 구경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감흥이 없더군요;;;




마지막으로는 Sforzesco성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없다 보니 이 멋진 건물은 정말 "밖에서 살짝" 구경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아르덴느를 구경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구경을 하루 줄인게 '살짝' 후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생각해 보니 애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걸어다니는 것 보다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물론 뒤늦은 후회였습니다.;;;;;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해서 전에 예약해 놓은 야간열차를 확인한 뒤 바로 베네치아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에 타니 자리가 없어서 베네치아 까지 꼼짝없이 서서 가나 싶었는데 어떤 친절한 승무원이 빈 좌석이 많은 객차를 알려줬습니다. 아아. 이탈리아 만세!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베네치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시내 구경은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베네치아역의 물품 보관소는 그야말로 날강도 들이더군요. 시간 단위로 돈을 받아 먹는건 둘째 치고 그야 말로 살인적은 요금이었습니다. 1~2유로면 하루를 맡길수 있는 독일의 무인보관함이 한없이 그리워 졌습니다.


물품보관소에서 삥을 뜯긴뒤(?) 두시간 정도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었으니 시내 구경이라 하기도 민망했습니다만...



그리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적당한 식당 한 곳을 찾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마자 물품보관소의 불친절과 바가지에 대한 반감은 싹 사라지고 이탈리아 만세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Viva Italia!

Viva Italia!

Viva Italia!

Viva Italia!

2008년 2월 9일 토요일

2008년 유럽여행 경과 보고

이번 유럽여행은 19일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관광 + 답사 + 지름 이라는 3대 과제를 모두 수행해 보자는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좀 어정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여행 방식은 대략적인 계획만 세우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여행 일정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편이어서 약간의 돌발 변수도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답사와 서적구매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행을 했다면 훨씬 알찬 여행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구상한 원래의 일정과 실제 여행의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

1938~1939년 시기에 실시된 육군의 대규모 기동은 어느 나라나 엉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련이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실시한 동원에서 벌인 삽질은 특히 전설의 경지에 다다른 것 이지요. 그런데 그럭저럭 정예로 간주되는 독일군도 평시의 기동에서 삽질을 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그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의 기동입니다.

뭐, 사실 3월 10일 이전까지 독일육군은 제대로 된 오스트리아 진주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는게 더 이상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총통의 명령을 받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베크(Ludwig Beck)는 다시 자신의 똘마니(?)인 작전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총통의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인지 이 황당한 명령을 받은 만슈타인은 3월 10일 오후에 동원 및 기동계획을 거의 완성하는 재주를 부립니다. 그리고 베크는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라 이날 늦게 보크(Fedor von Bock)를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제8군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보크가 지휘할 제 8군은 예하에 다음과 같은 병력을 배속 받았습니다.

제7군단 :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25기갑연대 1대대, 제1산악사단
제13군단 : 제10보병사단, 제17보병사단
제16차량화군단 : 제2기갑사단, SS-VT
군직할 : 헤르만괴링연대, 제97향토사단(Landwehr-division)

그리고 제8군은 이틀 뒤인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게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시기의 독일군은 팽창기에 있는지라 인력, 특히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로 진격할 부대들을 편성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였습니다.
먼제 제8군의 예하 부대들을 통제할 통신부대인 제507통신연대는 히틀러가 동원령을 내린 지 6일 뒤에야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또 제16차량화군단의 직할 의무부대는 동원 5일차에야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소집명령을 받고 집결지에 도착한 예비역들은 소속부대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97향토사단의 한 연대의 경우 동원 1일차에 부대에 제대로 도착한 장교는 단 한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동원계획 이라는게 만슈타인이 반나절 만에 뚝딱 완성한 것이었으니 혼란이 없었다면 거짓말 이었겠지요. 오스트리아로 진주할 부대들을 편성하고 있던 제13군관구(Wehrkreis)의 경우 60먹은 노인들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하는 황당한 착오도 범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제빵병들이 포병부대로 배치되거나 보병사단의 수색대에 배치된 병사가 말을 탈 줄 모르는 등 동원소집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산악사단의 경우 4개 대대는 전혀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 사단의 사단장은 최소한 14일은 걸려야 동원된 예비역들을 쓸만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인력 뿐 아니라 장비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제2기갑사단이 동원명령을 받고 사단 소속의 전차들을 점검했을 때 무려 30% 이상이 가동불능 이거나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제8군 전체를 통틀어 2,800대의 차량이 부족했습니다. 주력인 육군의 상태가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2선급으로 취급받던 SS-VT나 헤르만괴링연대는 구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닥치는대로 긁어 모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엉망진창으로 동원이 계속되고 있던 3월 12일 오전 08시, 그런대로 동원이 완료된 부대들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행군은 개판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로 진입하는 몇 안되는 도로에 여러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뒤죽박죽으로 굴러들어가니 행군은 시작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은 사단 예하 지원부대 없이 전투부대만 먼저 출발했고 제7보병사단은 행군 도중 사단 전체가 대대 단위로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 같은 사단 소속의 부대들이 10km 이상 씩 떨어져 버려 행군 도중 사단들이 뒤섞이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지만 독일군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2기갑사단은 국경의 집결지까지 이동할 연료는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연료는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국경을 넘었습니다. 제8군 사령부는 4일 뒤에야 제2기갑사단에 충분한 연료를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사단이 보유한 전차 중 39대가 빈으로 진격하는 도중 고장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보병사단들은 황급히 징발한 늙은 말들이 보급품 수레나 야포를 견인하지 못해 골탕을 먹었습니다. 많은 군사사가들이 지적하듯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조금이라도 저항을 했다면 독일군은 심각한 곤란에 직면했을 것 입니다.

행군이 엉망으로 꼬여버렸기 때문에 헌병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됐습니다. 독일군 내에서는 이 난감한 상황을 교통의 무질서(Verkehrsanarchie)라고 불렀다지요. 3월 14일이 되면 이 혼란은 극에 달합니다. 제10보병사단의 경우 각 보병연대간의 간격이 60km(!!!!)에 달했고 포병이나 기타 직할대는 마지막 보병연대의 훨씬 후방에서 따라오는 지경이었습니다. 제10보병사단은 하루 평균 43km를 행군했지만 이 속도는 사단이 전투부대로서 대형을 유지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 사단의 직할대들은 160km 후방에서 도로 정체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전진하려 했지만 이미 혼란한 상황을 통제할 능력을 잃은 사단사령부는 뒤에 처진 사단직할대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 참상을 목도한 제13군단 사령부가 제10사단의 직할대들을 철도로 수송해 볼까 했지만 철도는 제27보병사단을 수송하는 것 때문에 만원이었습니다. 결국 제10보병사단의 직할대들은 오스트리아 병합이 끝날 때 까지 본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제7보병사단은 하루당 최저 15km의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체가 분해되어 선두의 대대는 제10보병사단의 사이에 끼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사단장은 군사령부에게 하루 동안 행군을 정지하고 부대를 수습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예비역들을 대규모로 보충받은 제1산악사단은 나이먹은 예비역들이 행군도중 줄줄이 뻗어나가는 통에 행군이 엉망으로 변했습니다. 제100산악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로 진입한 첫날에만 40%에 달하는 예비역들이 행군으로 나가떨어지는 참극(?!?!)을 연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진주는 엉망진창으로 진행됐고 군사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독일군을 환영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독일군은 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빈 주재 이탈리아 무관이 독일군의 행군을 관찰한 뒤 “행군군기가 결여돼 있다”라고 평가한 것은 독일군에게는 망신살이 뻗치는 일 이었을 겁니다.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이탈리아의 파시즘 -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

계속해서 날림 번역글로 때우고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쓸만한 글을 써 볼까 하는데 시간도 잘 안나고 그렇습니다. 당분간 쓸만한 저작들에서 발췌한 날림 번역글이 계속 올라갈 듯 싶습니다.

실패한 전시동원체제의 유산(The legacy of failed mobilization)

1차세계대전과 그 이후 시기를 잇는 가장 큰 요소는 사상 – 즉 우익사상이 전쟁을 통해 형성되고 전후 20년간 이탈리아 국민들의 삶에 스며든 것이었다. 우익사상은 국민동원의 실패에 대한 반동이었고 특히 1920년 이후 시기까지를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1차세계대전 기간동안 전무했으며 이탈리아 정부가 전시동원을 통해 만들려 했던 국민적 단합을 우익들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려 한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은 (개인에게)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만 (이탈리아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법은 바로 국가의 통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요소, 바로 “사회주의”를 파괴하고 박멸하는 것 이었다. 독일과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1920년대 독일의 우익 “호교론자”들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1918년 11월에 노동자들이 “등 뒤에 칼을 꽃았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등 뒤의 칼”에 대한 주장이 이미 전쟁 중인 1916년에 등장했는데 전쟁 초반부터 연달아 터진 참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있는 적의 위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쟁 중 충원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은 이런 소문을 더 부채질 했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달리 군사적 전통이 일천한 까닭에 수준 높은 장교집단을 만들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젊은 장교들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록 전쟁에서 승전국이 되긴 했어도 전쟁 때문에 생긴 국가의 분열은 상처로 남았다. 전쟁으로 각인된 야심과 적개심은 파시스트들에게 전쟁에서 얻어야 했지만 얻지 못한 것과 전쟁에서 쳐부숴야 했지만 쳐부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시즘은 총력 동원체제를 구현하는 방법처럼 비춰졌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극성을 부린 지역은 전쟁 중에 동원체제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새로우며 진정한 동원체제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파시스트들이 꿈꾸는 이상의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만들고자 한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용맹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돼 있는 완벽하게 동원된 전사였다. “새로운 파시즘적 인간”은 패배주의자, 탈영병, 병역기피자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인간이었다. 사실 “믿음, 복종, 투쟁”은 파시스트들이 도덕적으로 반드시 따르게 하려 했던 것 들이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쟁을 수행할 때와 같은 군사적 규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창설될 당시부터 군사적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자본가들이 구사대로 고용하던 깡패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파시스트들은 “행동대(squadrismo)”의 폭력행위에서 전우애 같은 안도감과 참호전투 같은 흥분을 전시 보다 “훨씬 안전한” 조건에서 체험했다. 파시스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 이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병대(Milizia Volontaria di Sicurezza Nazionale)를 만들었고 이와 유사한 준군사조직이 여성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직됐다. 제복, 경례, 제식훈련, 목총(으로 하는 총검술) 그리고 행군은 이런 조직의 하루 일과였다. 파시즘은 이렇게 전쟁을 흉내내면서 전쟁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해 냈다. 이러한 영속적인 동원체제는 결코 동원해제 될 수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전쟁으로 인한 절망감이 만들어낸 전쟁에 대한 패러디였다.

그리고 전투에 대한 언급은 갈수록 많아졌다. 파시즘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이것을 “전투”라고 칭했다. 식량 증산에 대해서는 “밀과의 전투”, 1927년의 화폐 개혁은 “리라와의 전투”라고 불려졌다. 그리고 미래의 전사를 확보하기 위해 출산 전투가 벌어졌다. 이러한 군사적 비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고 계속해서 언급됐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문제였다. 파시즘은 그 특성 대문에 평화시에도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의 사상에 전쟁의 심리적 긴장을 불어넣으려 했다. 그 이유는 단지 전쟁이 평화시에는 얻을 수 없는 심리적 의무감을 불어넣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전쟁에 대해 환기해야만 파시즘이 가지는 정치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시스트들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애국적이고 국가적인 목표가 있으면 사회에 대한 억압과 전제적인 정부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부의 적”들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호한 수단을 통해 박멸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박멸한다고 생각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정부는 파시즘 체제에 대항하는 세력 또한 지속적인 전시 체제 속에서 박멸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파시즘이 전쟁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강요된 애국심”은 전쟁시기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강제, 억압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이와 함께 거대한 변혁기에 “강요된 애국심”은 사회적 투쟁과 기술적 진보를 혼란에 빠뜨리는 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질서에 복종하도록 하는데 이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규율, 사회의 위계질서, 가부장적 질서, 애국심 등의 사회적 가치들은 전쟁 그 자체를 재정의 함으로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도 “총력전” – 제대로 말하면 “총력전”을 펼치는데 실패한 – 의 트라우마는 평화에 대한 관념을 제약했다.

비록 이탈리아 사회는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분열돼 있었지만 파시즘의 출현에 따른 반작용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1차세계대전 이전에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억압은 비체계적이고 산발적이었으나 전쟁으로 얻은 경험을 활용해 보다 체계적이고 극도로 조직적으로 발전했으며 이것을 통해 국가총동원의 경험으로 드러난 이탈리아 사회의 분열과 나약함을 극복하려 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약화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두 번째 요소가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을 통해 형성된 국가적, 애국적 이상은 무솔리니의 통치기간 동안 파시즘의 지배 원리로 작용했다. 애국심은 정권의 목표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그 목표가 가진 정당성도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파시즘 체제에 대한 저항은 자동적으로 국가와 국가적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반역으로 몰려 국가 반역죄로 처벌받았다. 파시스트들이 1차세계대전의 국가 총동원 경험을 통해 만든 파시즘의 내부 논리는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 여러 면에서 전쟁을 위한 “총동원”은 새로운 전체주의적 개념의 어설픈 전주곡이었다. 전쟁 시기에나 일어나야 할 일들이 평화시에도 일어난 것 이었다.

Paul Corner and Giovanna Procacci,『The Italian experience of ‘total’ mobilization 1915~1920』State, society and mobilization in Europe during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p.237~239

2007년 3월 15일 목요일

독일의 점령지역 산업시설 활용 1939-1945 - 항공산업의 사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시 동원과 관련해 자주 논의되는 이야기 중 하나는 1940년 독일이 장악한 서유럽의 공업기반이 독일의 전쟁 수행능력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줬는가 하는 점 입니다.

가장 먼저…

전후 연합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에 점령된 국가들이 독일 공군에 공급하기 위해 생산한 항공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국 가1941194219431944총 계
프랑스626681,2855022,517
체코슬로바키아8195688051,9554,147
네덜란드1675414442947
헝가리0073344417
이탈리아003279111
Richard Overy, The Luftwaffe and the European Economy 1939-1945,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1979/2


통계에도 나타나 있듯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본 국가는 체코였습니다. 일단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온 산업화된 국가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국항공성(RLM) 내에는 체코의 기업들에게는 항공기 완제품 생산대신 부품과 반조립 정도만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우데트(Ernst Udet)가 체코의 공업시설 활용을 적극적으로 밀어 붙였기 때문에 이미 1939년 말에 체코의 항공기 제조업체들은 독일공군으로부터 총 1,797대의 항공기 생산을 수주 받습니다. AVIA가 이때의 경험으로 전후에도 Bf 109의 짝퉁(?)을 생산한 것은 유명하지요.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체코의 군수 산업체들은 독일 점령지역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고 기여도가 컸다는 점 입니다. 체코의 기술 좋은 노동자들은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사보타지에 취미가 없었다지요. 군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경호를 위해 무장 병력을 붙여줘야 했던 유고슬라비아에 비하면 체코는 독일 기업들이 털어먹기 좋은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슬로바키아는 명색은 독립국이었지만 실제 사정은 옆 동네인 체코와 같아서 거의 일방적으로 독일에 털립니다. 독일의 공군사절단(Luftwaffenmission)은 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국영 항공기 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는데 사실 이건 반 강제적인 것이었지요. 독일은 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슬로바키아의 국영 공장이 생산한 항공기의 75%는 독일 공군이 인수하고 25%만 슬로바키아 공군에 공급한다는 조항을 강요해서 아주 재미를 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꽤 흥미로운 경우입니다.
먼저 독일 점령지역의 공장과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의 공장을 다루는 주체가 달랐습니다. 비시 정부 관할 지역은 1943년 점령 이전까지는 스위스, 스웨덴과 함께 중립국으로 분류돼 독일항공산업위원회(DELIKO, Deutsche Luftfahrtindustriekommision)의 담당이었습니다. 반면 독일 점령지역은 제국항공성의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특히 항공기 완성품 뿐 아니라 중간 부품의 공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다음으로 항공 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독일 기업들이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국항공성이 나서기 전에 기업들이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지요. 많은 수의 항공 기업(특히 융커스)들은 아직 프랑스와의 휴전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즉 이론적인 교전상태)에서 프랑스 기업들과 사업계약을 체결하러 인력을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는 전체적인 항공기 생산에서는 슬로바키아에 뒤지긴 하지만 독일 공군의 중요한 해외 파트너(?) 였습니다. 1942년 까지 독일 공군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프랑스 기업은 192개사였다고 합니다.(같은 기간 독일 육군은 60개사, 해군은 9개사)
프랑스는 휴전 이후에도 자국 정부를 위해서 항공기 생산을 계속했는데 가끔은 독일이 제 3국에 공여할 목적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1943년에 불가리아 정부는 독일측에게 Dewoitine D.520(도데체 왜 이걸 독일에?) 96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이건 취소되고 Bf 109 16대가 공여 됩니다.

폴란드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안습 입니다. 국가사회주의 강도단의 두목인 괴링 부터가 폴란드는 산업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약탈할 건덕지가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켈은 크라쿠프에, 융커스는 포즈난에 부품 생산 공장을 확보합니다. 물론 폴란드의 경우 서유럽과 달리 항공기 완성품을 조립할 수 있는 공장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폴란드와 유사한 국가로는 유고슬라비아도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항공 기업들은 독일 점령과 동시에 독일 항공기업들의 자회사로 강제 흡수됩니다. 전쟁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항공기업이었던 Aeroput은 루프트한자의 정비공장으로 바뀌고 Rakovica는 융커스의 엔진 부품 공장으로 전환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일이 가장 재미를 보지 못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이탈리아의 항공기업들을 독일의 항공기 생산에 활용하려 했으나 성과가 매우 시원치 않았다고 하지요. 항공기 생산이 1943년에 32대, 1944년에 79대로 독일의 한달 치 생산도 안 되는 규모였습니다.

독일이 해외의 산업 기반을 활용한 것은 이렇게 외형적으로나마 합법의 탈을 쓴 것도 많았지만 아예 노골적인 약탈로 나가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많았습니다.
먼저 체코슬로바키아가 점령된 다음 접수된 장비와 시설은 불가리아로 매각됐고 폴란드 점령 후 압수된 항공기와 기자재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등지로 매각, 또는 공여 됐습니다.
독일 공군은 점령지로부터 산업 시설을 인수하는데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을 앞두고는 제국항공성 내에 산업시설 노획을 위한 조직(Beute-Sonderkommando)를 만들었습니다. 이 조직은 1941년 한 해 동안 소련의 점령 지역내에서 8,400여대의 대형 공작기계를 약탈해서 독일로 보냈다고 합니다.
뭐, 어쨌건 소련도 전쟁이 끝난 뒤 실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기계들을 잔뜩 뜯어 갔으니 피장 파장이려나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항공산업 부문만 놓고 보면 독일인들은 2차 대전기간 동안 충분히 재미를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으로 거덜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그것 조차 미국의 경제원조로 피해가니 말 다했지요.

2007년 1월 6일 토요일

1차 대전 발발당시 이탈리아의 재정문제

세계대전 기간의 이탈리아라고 하면 뭔가 부실하다는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뭘 읽던간에 이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만 눈에 잘 들어오더군요. 예전에 읽은 책에서 1차 대전기 이탈리아의 전시 재정 문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조금 옮겨 봅니다.

이탈리아는 경제 성장에 힘입어 1897-98, 1910-11 회계연도에 재정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1년의 리비아 침공과 지올리티(Giovanni Giolitti)의 사회 개혁은 국가 재정을 적자로 돌려놓았다. 이탈리아는 1915년에야 참전했지만 1914년부터 전쟁에 대비해 군비 증강을 하면서 재정 적자 구조가 더 악화됐다. 즉, 이탈리아는 전쟁에 참전하기 3년 전부터 사실상 전시 경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는 프랑스나 독일과 비슷하게 전쟁 이전 쌓인 채무가 재정을 심하게 압박하는 상황에서 전쟁에 돌입했다.

Hew Strachan, Financing the First World War, p.92

이탈리아는 1914년 8월 까지도 양호한 재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5년 4월 참전하기 전부터 외환보유고가 감소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로 주요 교전국들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이탈리아는 처음으로 수출이 수입을 능가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교역 규모는 감소했으며 얼마 안되는 무역 흑자 조차 비가시적인 부문의 손실을 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탈리아의 주요 외화 획득 수단이었던 관광산업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붕괴돼 버렸다. 더 심각했던 것은 해외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본국으로 송금하는 외환의 감소였다. 1913년에 해외 거주자의 본국 송금은 8억2800만 리라 였는데 1915년에는 4억9700만 리라로 격감했으며 1913년의 화폐 가치로 계산하면 3억9000만 리라에 불과했다. 가장 크게 감소한 것은 미국으로 부터의 송금이었으며 이로 인한 적자는 대미 수출에서 발생한 흑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1915년 가을부터 미국 시장에 국채를 유통시켰으나 이탈리아 국채는 다른 교전국의 국채보다 인기가 없었고 1915년 10월까지 2500만 달러를 판매하는데 그쳤다.

ibid p.185


어떻게 이런 나라가 1930년대까지 강대국 대접을 받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전쟁 이전 이탈리아가 가장 재정적으로 의존하던 국가는 프랑스였습니다.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 측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이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재정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었다고 하죠. 그리고 전쟁이 발발한 다음 프랑스가 재정적으로 곤란에 빠지자 영국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마침내는 미국에 의존하게 됩니다.

남의 돈이 없으면 전쟁도 못 하면서 강대국 시늉을 해야 되는 국가라니,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2006년 11월 4일 토요일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Thomas Schlemmer

독일에서 쓸만한 군사사, 특히 현대 군사사 부문의 연구를 많이 내놓는 곳은 역시 연방군 산하의 MGFA 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곳으로는 뮌헨의 현대사 연구소(Institu fuer Zeitgeschichte)가 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대학이나 일반 연구자들도 흥미있는 연구를 많이 내놓고 있으며 굳이 학술적인 연구가 아니더라도 좋은 책이 많긴 하지만 왠지 앞의 두 곳에 비하면 뭔가 하나씩은 빠졌다는 허전한 느낌이 든다.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는 현대사 연구소에서 지난해 10월에 출간한 책으로 제목이 바로 말해주듯 동부전선에 참전한 이탈리아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동부전선의 독일 동맹군들은 매우 흥미가 당기면서도 쓸만한 책이 가뭄에 콩나듯 소개되는 지라 돈 좀 생기는 대로 사야지 하며 벼르다가 다른 책에 우선 순위가 밀려 지난달에야 구입할 수 있었는데...

재미있는게 본문은 매우 짧고 부록이 엄청나다. 처음에 이 책을 주문할 때 이탈리아군의 작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되는 부분은 바로 부록이 아니던가!

부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독일이 이탈리아군에 파견한 연락장교의 보고서와 번역된 이탈리아측의 문헌자료로 돼 있다. 특히 이탈리아 쪽 자료는 이탈리아어라고는 하나도 모르다 보니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친절하게도 번역을 해서 실어 주고 있다. 독일군 연락장교의 보고서에는 소련군의 동계공세 당시 몇몇 사단의 작전 상황에 대해서 유익한 정보들(특히 그동안 궁금했던 동부전선의 이탈리군의 전차 운용 같은)이 많이 실려 있다.

그러나 지도가 부실한 점은 매우 유감이다. 지도는 책의 가장 끝에 작은 지도 두개가 붙어 있는데 기존의 다른 저작들에 실린 지도 보다 깔끔하게 편집은 돼 있지만 내용은 그저 그렇다. 좋은 지도가 여러장 뒷받침 됐다면 훨씬 더 멋진 책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