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비스마르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비스마르크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이탈리아의 국력에 대한 아주 탁월한 평가

이탈리아의 국력, 특히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되는 평가가 하나 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아주 왕성한 식욕을 가졌지요. 그런데 이빨이 영 시원찮습디다.”
(Diese Italiener, sie haben zwar großen Appetit, aber schlechte Zähne.)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대사에게, 1881년.

Hendrik L. Wesseling, Teile und herrsche: die Aufteilung Afrikas 1880-1914, (Franz Steiner Verlag, 1999), p.25

재치도 있거니와 아주 정확한 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탈리아인들에겐 좀 안됐지만. 그런더 더 안습인건 2차대전이 발발할 때 까지도 이탈리아의 군대가 시원찮아서 2차대전에 대한 저작에서도 이미 2차대전으로 부터 60년 전에 있었던 저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는 겁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외교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한번쯤 이 일화를 접해 보셨을 겁니다;;;;;

이런 일화를 보면 비스마르크는 만담가의 자질도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2007년 12월 6일 목요일

무능함으로 적을 괴롭힌 사나이 - 비스마르크도 벌벌 떨게한 나폴레옹 3세

Cato님의 글에서 트랙백합니다.

유능해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반대로 무능해서 적을 괴롭히는 경우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주의 법칙은 오묘한지라 무능함으로서 적을 괴롭힌 특출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나폴레옹 3세였습니다.

사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가 던진 떡밥을 덥석 집어 물고 전쟁에 뛰어들 때 까지만 해도 쓸모있는 바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의 골치거리가 되고 맙니다.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출전을 결심한 이유로는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갈수록 대중들의 지지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승리를 통해 이것을 만회하려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신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면 승리를 거둔 야전 사령관들에게 영광과 명예가 집중될 것도 우려했다고 설명되지요.

마침내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기차편으로 프랑스의 주력군인 라인 야전군(Armée du Rhin) 사령부가 있던 메츠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러나 라인 야전군은 전쟁 초반에 포위되어 버리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샬롱 야전군(Armée de Chalons)에 합류해 스당 방면으로 진출합니다. 이 후의 이야기야 뭐 다들 잘 아시는 스당 전투지요.

나폴레옹 3세가 군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비스마르크와 몰트케가 구상한 신속한 전쟁 종결은 물 건너 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재인 비스마르크는 무능한데다 인기도 없는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하면 그대로 프랑스 제정은 붕괴되고 공화정이 들어서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 또한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샬롱 야전군을 포위하기 위해 기동 중이던 8월 25일에 바이에른의 레오폴드 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한다면 이건 우리에게 크나큰 골치거리가 될 게요.”

그래서 비스마르크와 몰트케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직전까지 빨리 나폴레옹 3세가 군대를 버리고 파리로 도망치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맥없이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어쨌건 이 인기 없는 황제는 약간의 센스는 있었는지 항복 직후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약간의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후의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전쟁의 장기화였습니다. 어쨌거나 전쟁에 이기긴 했는데 비스마르크가 구상했던 신속하고 깔끔한 승리는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독일군은 프랑스 곳곳에서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고 이건 결국 독일과 프랑스간에 갈등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2007년 9월 15일 토요일

프로이센의 징병제에 대한 미국의 시각

1차대전 이후로 프로이센 하면 보수 반동과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는데 한때는 프로이센의 군대 조차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생각되던 곳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의 나라 미리견이었습니다.

(전 략)

비록 그랜트 행정부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 자신과 유럽 각국의 미국 외교관들은 프로이센의 북독일연방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으며 “시민”으로 이뤄진 그 군대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주미 프랑스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북독일 연방은 내전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또 연방의 공채를 구매해 주었다”고 이야기 한 바 있었다. 8월 말에 접어들어 전세가 프로이센에 유리하게 기울자 주불 대사에게 “사실 나는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프로이센의 군사제도는 너무 완벽하네”라고 털어놓았다.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일반 언론들과 정치, 문화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독일은 『전제군주정이며 제국주의적인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와는 달리 (비록 프로이센도 군주정이기는 했으나) 지방 분권적이며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며 (지방 분권과는 다소 일치하지 않긴 하지만) 또 독일의 민족 통일을 향한 열망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가이며 또 비스마르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는 독일의 승리를 찬양하면서 “무기를 든 인민들이 전제왕정의 타락한 무리들을 쳐부쉈다”고 적었다. 밴크로프트는 뒤에 국무장관 피쉬(Hamilton Fish)에게 “우리 나라가 유럽 대륙에서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를 하나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독일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일의 국가 제도와 우리의 그것은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독일을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1871년 1월 베르사이유에서 선포된 독일 제국이 앞으로 미국이 그랬던 것 처럼 강력한 공화적 연방국가를 지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랜트 대통령은 1871년 2월 상원 연설에서 미국과 독일 민족국가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비록 일부 미국인들은 단순히 나폴레옹 3세 체제에 대한 혐오감에서 프로이센을 지지했지만 많은 수의 미국인들은 비록 매우 깊지는 않더라도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독일을 “지적이며 근면한 인민들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독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국가이며 국민들은 교육을 중요시하며 문학, 음악, 철학 그리고 과학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프로이센의 군사적 전통에 대해서도 개별 인물들의 장점을 위주로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대왕은 작은 나라인 프로이센을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로부터 지켜냈으며 폰 스토이벤(Friedrich Wilhelm von Steuben) 남작은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고 또 뷜로우(Friedrich von Bülow)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을 도와 나폴레옹을 물리쳤다는 식이었다.

또 미국언론들은 북독일 연방과 개별 가맹국들이 남북전쟁 당시 북부 연방을 지지했으며 독일의 자본가들이 개별적으로 연방 정부를 지지했음을 상기시켰다. 또 현재의 프로이센 지도자들은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연방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싸웠듯 독일 민족으로 이뤄진 연방국가를 만들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는 이 매체가 종종 그랬듯 과장적인 어조로 “미국인들은 빌헬름 국왕과 비스마르크 수상이 그동안 분열되었던 위대한 민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도구라고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융커 지주층에 대한 비판적 여론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머지 않아 독일에서도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진보가 이뤄지면 자연히 정치적 자유화도 이뤄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한 유력 일간지는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훨씬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독일의 인민들은 자유를 지향하는 성향이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에 대한 지지 여론의 배후에는 독일인들이 19세기에 미국에 이주한 이민자 중 가장 큰 민족집단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1870년 당시 외국에서 이주해온 1세대 미국시민 중 30%가 독일계였다. 1860년대에 독일계 미국인들 대다수는 공화당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노예제를 반대했으며 또 강력한 연방 지지자였다는 것을 뜻했다. 1870년에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많은 외국어 언론이었던 독일어 신문들은 앞다투어 프랑스의 패배를 환영하고 독일 연방의 승리와 새로 탄생한 독일 제국을 찬양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독일계 미국인들은 프로이센의 군사제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독일에서 군생활을 했으며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이민 온 하인첸(Kark Heinzen)은 프랑스의 패배와 독일 제국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848년 혁명당시 바덴(Baden)의 혁명 지도자 중 하나였으며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혁명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한 헤커(Friedrich Hecker)는 대다수가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871년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있었던 독일의 승전 축하 행사에서 주 연설자로 나선 그는 독일이 거둔 군사적 승리를 찬양하고 의무교육제도와 국민개병제야 말로 독일 군대가 진정한 평등적 집단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왕정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군대내의 사회적 분열을 우려했기 때문에 징집병의 비중을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1870년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빈농과 도시 빈민, 그리고 북아프리카 식민지 출신(주아브나 투르코)의 장기복무 직업군인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훨씬 사거리가 긴 우수한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프로이센의 우수한 훈련과 애국심,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지휘관들에 의해 압도되었다.(그리고 포병의 경우 프로이센이 우세했다) 전쟁이 벌어진지 겨우 한달도 채 안된 1870년 9월 1일의 스당 전투에서는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군대 10만과 함께 항복했다. 그리고 3일뒤 파리의 민중은 봉기를 일으켜 제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후 략)

John Whiteclay Chambers II, 『American View of Conscription』The People in Arms : Military Myth and National Mibilization since the French Revolu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82~85

2007년 1월 21일 일요일

싱거운 위기(?) - 1887년 독일의 러시아 선제 공격계획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뛰어난 외교력에 힘입어 1890년까지 러시아와 동맹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881년에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그 동맹이 다소 불안하게 유지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동맹을 중시한 반면 대슬라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부터 공공연히 프랑스에 우호적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는 특히 독일 육군내에 러시아라는 새로운 가상 적국에 대해 경계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황태자 시절 터키와의 전쟁에서 직접 야전군을 지휘한 바 있었고 베를린회의에서 비스마르크에게 농락당했다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 즉위 이후 러시아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드러난 육군의 문제점을 개혁하기 위해서 동원체제 개편, 신형 장비 도입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독일측에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의 육군 개혁에 대해서는 러시아 육군의 개혁 1880-1914을 참고 하시고.]

그리고 1887년 하반기부터 발칸반도, 특히 불가리아 문제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반독, 반오스트리아 감정이 고조됐습니다.

일이 터진 것은 1887년 11월이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동원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것은 발칸반도 문제 때문에 독일을 선제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립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군의 공격 시기는 1888년 봄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참모본부의 정세분석을 보고합니다.

독일은 러시아군의 총 병력이 824,000명이고 동원체제의 개편으로 전쟁이 개시되면 2,424,800명의 예비군이 동원 가능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가 독일 전선에 투입 가능한 최대 병력을 약 250만 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었는데 이것만 하더라도 제대로 동원만 되면 독일로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훈련이 개선된 점과 보병화기와 포병이 개선된 점, 그리고 폴란드와 러시아 내륙간의 철도망이 확대된 점은 독일측이 가장 큰 불안요인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독일 육군참모본부는 1882년에 러시아의 서부 철도망에 대해 비밀리에 조사를 실시해 폴란드의 철도 수송능력이 크게 향상됐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러시아의 철도망 확충으로 병력 동원 시간이 어느 정도가 걸릴지 모른다는 점은 러시아와의 전쟁계획의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가장 큰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군사적으로 약체라는 점도 동부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몰트케는 러시아도 오스트리아 육군, 특히 보병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도발한다면 가능한 이른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몰트케는 비스마르크에게 당장 병력 동원을 실시해 12월에서 1888년 1월 중으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몰트케는 1884년에 이미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선제 공격한다면 러시아의 동원 체제가 갖춰지기 전에 병력 우세를 점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1885년 대 러시아 전쟁 계획은 제 4군(3개 군단, 4개 예비사단)과 제 3군(6개 군단, 5개 예비사단)으로 동원 개시 10일차에 국경을 돌파해 제 4군은 Kovno에 집결하고 있는 러시아군에 파쇄공격을 감행하고 제 3군은 Pulutsk 방면으로 공격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격파해 전선을 단축한 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릴 때 까지 전략적으로 방어를 취하는 것이 1885년 계획의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몰트케의 주장에 대해 1887년 체결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조약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선제 공격할 경우에 효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독일이 러시아를 선제공격 할 경우 오스트리아는 동맹의 의무가 없었다는 점이고 독일 단독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는 위험을 떠안게 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프랑스와도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양면 전쟁을 치루는 경우 프랑스 우선 전략에 따라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결시켜야 하고 당연히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근본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무엇보다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독일을 공격하는 일은 프랑스와 독일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만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기간이 유효한 마당에 성급하게 러시아를 도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선제 공격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행이 어려웠기 때문에 1887년 겨울의 전쟁 위기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러시아가 비밀리에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도 잘못된 정보로 밝혀집니다.

1887년의 선제공격 계획은 이렇게 용두사미로 끝나 버렸습니다. 독일은 알렉산드르 3세의 즉위 이후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판단합니다만 다행히도 알렉산드르 3세가 살아있을 때는 약간의 신경전을 제외하면 별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결국 1914년에 전쟁이 발발해 독일과 러시아 두 제국은 간판을 내리게 되긴 합니다만…

===================================

참고자료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ndiana University Press
Konrad Kanis, Miliärführung und Grundfragen der Außenpolitik, Das Miliär und der Aufbruch in die Moerne 1860-1890, Oldenbourg
Terence Zuber,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 Oxford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