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하인츠하르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하인츠하르멜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2차대전 중 루마니아의 Volksdeutsche

2차대전 당시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있어 제법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전에 소개했던 베그너(Bernd Wegner)의 연구에 나타난 것 처럼 무장친위대의 몇몇 사단들은 병력의 상당수를 이러한 독일계 외국인으로 충당하고 있었지요. 독일계 외국인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에도 상당수가 복무했지만 역시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장친위대였습니다. 히믈러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이런 독일계 외국인을 친위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고 전쟁 이전에 대략 1,500명의 주데텐(Sudeten) 독일인이 일반친위대(Allgemeine SS)에 입대한 상태였습니다.1) 2차대전의 발발로 독일은 동유럽의 점령지와 동맹국에 거주하는 독일계 외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독일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루마니아계 독일인이었으며 무장친위대에 '자원입대'한 인원은 6만3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연구는 2차대전 기간 중 친위대 조직에 소속된 루마니아계 독일인의 숫자는 63,000명에서 65,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

물론 1943년 이전까지는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독일군에 입대하는 것이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쟁 이전부터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개별적으로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는 사례는 있었습니다. 1938년 1월에는 안드레아스 프리드리히(Andreas Friedrich)라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SS-VT에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모병운동이 시작됩니다. 안드레아스 슈미트(Andreas Schmidt)가 이끄는 루마니아의 독일인 나치당 조직(NSDAP der Deutschen Volksgruppe in Rumanien)은 1940년 말 부터 비밀리에 무장친위대 입대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비밀 모병을 담당한 것은 루마니아 독일인 나치당의 하부 조직인 루마니아 독일 청소년연맹(Deutsche Jugendbund in Rumanien, 이하 DJR로 약칭)이었습니다. 루마니아계 독일인이 무장친위대에 대규모로 입대한 것은 1941년 4월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에 600명이 입대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3) 이때 모병된 루마니아계 독일인들은 총 4개 중대로 구성된 야전훈련병대대(Feldrekruten-Bataillon)로 편성되어 빈(Wien) 근교의 병영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대대의 지휘관은 당시 막 SS소령(SS-Sturmbannführer)으로 진급한 하인츠 하르멜(Heinz Harmel) 이었습니다.4)

그러나 1941년 초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 무장친위대의 비밀모병은 독소전쟁 발발과 함께 차질을 빚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독일군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국가적 동원태세를 취하면서 루마니아 시민인 독일계도 동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명의 병력도 아쉬운 총력전 하에서 외국군대에 자국 국민을 빼앗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이었으며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묵인하던 친위대의 비밀모병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독일 정부 또한 동부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맹국의 비위를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으며 이에 따라 1941년 11월 13일 친위대 모병국(SS-Ergänzungsamt)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무장친위대 입대를 금지시킵니다.5)

그러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1942년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 사단을 창설하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독일계 주민의 부족으로 편성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에 친위대 측은 독일계 루마니아인을 모병하려는 시도를 계속합니다. 이때 대상이 된 것은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인 Banat 지방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습니다. 프린츠 오이겐 사단장인 아르투어 플렙스(Artur Phleps)는 상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루마니아인 보충병을 사단내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루마니아와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6) 여기에 1942년 초 동부전선의 니콜라예프에서는 무장친위대가 루마니아군 부대에서 탈영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150여명을 보충병으로 모집해 루마니아 정부가 송환요구를 하고 있었습니다.7) 결국은 루마니아 정부가 프린츠 오이겐 사단과 무장친위대에 입대한 루마니아군 탈영병들의 송환 요구를 중단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했으나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측의 횡포에 큰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 루마니아 정부의 불만은 결국 1943년 부터 루마니아가 독일군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의 탈영 공작을 하도록 만듭니다.8)

어쨌든 무장친위대의 확장을 꿈꾸던 히믈러에게 남동부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독일계 주민의 존재는 탐스러운 꿀단지(???)라 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1943년 5월 루마니아 정부는 독일의 압력에 따라 17세 이상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독일 국방군 또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하더라도 시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됩니다.9) 이것은 히믈러가 1941년 말 이래로 구상하고 있던 독일계 외국인의 대규모 모병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히믈러는 1943년 초 독일계 헝가리인 5만명, 독일계 루마니아인 2~3만명을 모병할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독일계 헝가리인은 2만명이 모집된 데 비해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예상을 뛰어넘는 5만명이 모집됩니다.10) 이렇게 대규모로 모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당시 새로 편성되거나 재편성되는 무장친위대 부대의 강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친위대 제3기갑군단과 그 예하의 노르트란트(Nordland) 사단과 네더란트(Nederland) 여단이었습니다. 이 군단의 1944년 3월 경의 병력현황을 살펴보면 총 병력의 44.5%가 독일계 외국인이며 특히 사병의 경우는 독일계 외국인의 비중이 53.1%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일계 외국인의 대부분은 1943년에 대규모로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이었습니다.11)

※ 친위대 제3기갑군단의 출신지별 병력현황은 이 글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친위대 제3기갑군단 다음으로 1943년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대규모로 배치된 부대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킨 프린츠 오이겐 사단이었습니다. 이 사단에 배치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은 가장 많았을 때는 7,609명에 달했다고 하니 사실상 사단의 주력이었던 셈 입니다.12) 이 사단의 독일계 루마니아인 신병에 대한 처우는 신통치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에다 사단내의 본토 독일인들은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을 왈라키아인(Walach,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이라는 지명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한 것 처럼)이라고 부르면서 깔보는 경우도 꽤 많았다고 합니다. 사단의 신병훈련은 첫 10일간은 오전 6시에 기상해 기상하자 마자 바로 1km 구보를 한 뒤 30분간 세면과 오전식사를 마치고 바로 7시 부터 12시까지 훈련, 그리고 1시간 동안 점심식사와 휴식을 취한뒤 다시 1시 부터 5시까지 훈련을 하는 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에 프린츠 오이겐 사단에 입대한 독일계 루마니아인 병사들은 입대 초기의 훈련 일정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는 사례가 꽤 많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루마니아까지 돌아가기 보다는 도중에 붙잡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이것도 비극은 비극이지요.

1943년에 모집된 독일계 루마니아인의 대부분은 위에서 언급한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그 외에도 상당수는 1943년에 신규편성되거나 개편된 부대들에 배치되었습니다. 약 17,000명 정도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무장친위대의 제9, 10기갑사단과 제16, 17기갑척탄병 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13) 이들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전쟁 말기에 무장친위대의 핵심적인 부대들에 배치된 까닭에 수많은 희생을 치렀으며 전쟁 기간 중 무장친위대에 배속된 독일계 루마니아인 중 약 8,000명에서 9,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14)



1) Daugherty III., Leo J, 'The Volksdeutsche and Hitler's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8 No.2(June 1995), p.300
2) Milata., Paul, Zwischen Hitler, Stalin und Antonescu : Rumäniendeutsche in der Waffen-SS, Böhlau Verlag, 2007, s.297
3) Milata., s.112
4) Weidinger., Otto, Division Das Reich Bd.II, Munin Verlag, 1983(3.Auflage), s.350
5) Milata., s.113
6) Milata., ss.116~117
7) Milata., s.128
8) Daugherty III., p.306
9) Daugherty III., p.305
10) Milata., s.176
11) Wegner., Bernd, 'Auf dem Wege zur pangermanischen Armee. Dokumente 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III.(Germanischen) SS-Panzerkorps', Militärgeschichtliche Mitteilungen 49/2(1980), s.111
12) Milata., s.241
12) Milata., s.259
12) Milata., s.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