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 군사연구(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0권 4호에 실린 Timothy P. Mulligan의 Escape from Stalingrad 라는 소논문을 읽었는데 이 글은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소련군 양 진영을 오락가락한 독일계 소련인들의 이야기도 다루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프리드리히 지몬(Friedrich Simon) 이라는 사람입니다. 지몬은 1942년 4월 소련군에 징집되어 제118소총병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7월의 전투에서 독일 제14기갑사단에 포로가 되었는데 독일군에 보조원(Hilfswillige)으로 자원해서 사단본부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제14기갑사단은 스탈린그라드의 포위망 안에 갇혀 버립니다. 지몬은 1943년 1월 27일에 부상을 당해 야전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이 많은 보조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소련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전투에서 포로가 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지몬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는데 그 대신 독일군에 항복한 '죄'로 고생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669소총병연대에 배속되어 오룔 지구에 투입됩니다. 669소총병연대는 1943년 8월의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지몬은 다시 한번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지몬은 두 번째로 항복한 다음 독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례인 에듀아르트 쉘(Eduard Schell)은 1940년 1월 소련군에 징집됐습니다.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인 1941년 7월에 독일군 제29차량화보병사단에 포로가 되어 지몬과 마찬가지로 보조원이 되었습니다. 쉘은 15보병연대 2대대에서 통역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이 항복했을 때 포로가 되었습니다. 쉘은 보조원으로 꽤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독일군 군복을 입고 있어서 지몬과 같이 적당히 둘러대고 위기를 모면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쉘의 운명이 이쯤에서 끝장났다면 역사가들의 눈에 띄일 수가 없었겠지요. 쉘은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잘 아는 소련인을 만나 소련 군복과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고 다시 소련군으로 돌아갑니다(;;;;) 쉘 또한 1943년 8월에 다시 독일군에 항복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운이 좋았던 것이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에서 탈출한 쉘을 알고 있는 독일군 장교 한명이 쉘의 신원보증을 해 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운이 좋은 사례는 그야말로 극소수였습니다. 제6군에 소속된 5만명 가량의 보조원 대부분은 포위망 안에서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반역자로서 처벌받았으니 말입니다.
보조원이라면 저런 식으로 소련군 병사였다가 독일군을 위하여 복부한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요?
답글삭제그런 보조원이 제6군에만 5만명이 있었다니..대단한 숫자군요.
거의 4개 사단 가까운 숫자네요..
두 사람다 용케도 NKVD의 눈을 피할 수 있었군요. 정말 운이 센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답글삭제세상은 역시 약삭빠른사람들이 승자이군요. 고지식하게 초지를 관철한 사람들은....(묵념)
답글삭제Hilfswillige의 의미를 그대로 옮길 만한 한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저는 그냥 원어를 병기하면서 '보조원'으로 쓰고 있습니다.
답글삭제어찌보면 참 신기한 이야기여서 실화였을까 싶기도 한데 일단 독일군 쪽의 기록에 나와있으니 말입니다.
답글삭제고지식한 사람들은 요단강을 빨리 건너죠.
답글삭제인생역정 (이라 쓰고 행운이라 읽는다 ) 이 화려하군요.
답글삭제제가 군대있을 때 진중문고로 읽은 '삼색의 군복'이라는 책(일종의 회고록)이 있는데 거기선 저자가 학병으로 끌려가서 일본군 --> 탈출해서 국민당군 --> 광복 후 한국군으로 예편했죠. 저자가 중국에 있을 당시 김일성 동생과의 우정(?) 이야기 등도 있어서 흥미로왔습니다.
답글삭제예.
답글삭제전형적인 국가유공자 루트로군요^^
답글삭제어떤 의미에서는 '달인' 이라고 봐야할 것 같네요 -.,-
답글삭제동감입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