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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3일 수요일

전장의 미식가들

언제나 그렇듯 땜빵용 불법 날림 번역입니다.

인류학과 관련된 글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관찰자들이 자신들이 보기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특이한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쓰는 글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류학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학문인 만큼 관찰자인 '우리'와는 다른 뭔가 특이한 것을 잡아내는게 특출나죠. 그리고 후진적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창기의 인류학자들은 그런 경향이 아주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올리는 불법 날림 번역글도 특이한 대상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인데 이 글에서는 피지, 그리고 볼리비아의 카우카 계곡(Valle del Cauca) 지역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주제는 특이한 식성을 가진 전쟁터의 미식가들에 관한 이야기 이지요.

이 절에서 살펴보게 될 피지와 카쿠아 계곡 지역에서 일어나는 관행은 아마 전쟁 중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일 것이다. 바로 식인 풍습이다.

식인행위는 전쟁에서 부터 다른 생활 양상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윌리엄스(Thomas Williams)는 피지인들을 관찰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식인 풍습은 피지인들의 관습 중 하나이다. 식인 풍습은 사회의 여러 요소들과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다. 식인은 피지인들이 추구하는 일 중 하나이며 그들 대부분은 식인 풍습이 고상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의 식인 풍습은 이미 유럽인들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무렵 오래된 관습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왜 이 지역에서 식인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 가 없다. 그렇지만 잡아먹는 대상이 주로 증오하는 적이라는 점을 보면 식인 풍습이 처음에는 적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로, 윌리엄스는 이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피지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주된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시체를 먹음으로써 살아있는 자들에게 겁을 주는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적을 잡아 먹는 것 행동 보다 더 증오와 경멸감을 보여줄 수 있는 행동도 없을 것이다. 이제 두 사회에서 일어나는 식인 풍습의 양상을 살펴보자.

카우카 계곡 지대의 남자들은 전쟁에 나갈 때 포로들을 묶기 위해 특별히 밧줄을 준비해 간다. 물론 사로잡혀 꽁꽁 묶인 포로들이 목숨이 붙은 채로 그들을 잡은 자들의 마을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전사들은 포로를 묶을 밧줄과 함께 목을 벨 돌칼을 함께 가지고 나가며 종종 전장에서 곧바로 적을 요리해 먹었다.
반면 피지인들은 거의 대부분 전쟁 포로들을 마을로 데려와서 잡아먹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전사들은 바콜로(bakolo - 잡아먹을 사람)가 있을 경우 마을에 들어서기 전 북을 쳐서 포로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북소리를 듣는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주로 여자들)은 북 소리에 한껏 부푼 마음으로 즐거움에 겨워 광란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카우카 계곡 지역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를 숙이고 정신을 잃을 때 까지 곤봉으로 얻어 맞은 뒤 목이 잘렸다. 그 다음에는 요리를 위해 잘게 토막이 났다. 피지에서 포로를 도살할 때는 칼질에 숙달된 남자가 희생자를 '관절 별로 여러 토막을 냈다.'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에서는 종종 더 끔찍한 방법도 사용됐는데 희생자가 살아있는 상태로 토막을 내고 희생자가 보는 상태에서 갈비살을 베어 먹었다. 이것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스는 이렇게 적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행동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가장 악랄하고 잔혹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은 희생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그의 몸 일부, 특히 갈비뼈를 잘라내서 희생자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해 먹어치우거나 때로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고기를 먹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두 지역 모두 희생자의 피를 받아 마셨다. 카우카 계곡 지방의 어떤 군장국가에서는 시체의 지방을 녹여 광산용 램프를 켤 때 쓰는 연료로 만들었다고 한다.

피지인들은 바콜로를 요리하기 위해 주로 특수한 화덕을 만들었으나 동시에 삶아 먹는 경우도 많았다. 카우카 계곡 지대에서는 시체를 굽거나 삶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사람 고기를 날 것으로 먹기도 했다. 피지인들은 사람 고기를 날로 먹는 경우가 없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시체를 통째로 화덕에 넣어 요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피지와 카우카 계곡 지대 모두 시체를 토막 내서 요리했다.

두 지역 모두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사로 잡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성인 남성과 마찬가지로 먹어치웠다. 카우카 계곡 지역의 여자들은 종종 남자들과 함께 식인 축제에 참여했으나 윌리엄스에 따르면 피지에서는 "여자들은 바콜로를 잘 먹지 않았다."

시체는 대부분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카우카 계곡 지역에서는 사람의 갈비살을 가장 즐겨 먹었지만 내장, 예를 들어 심장, 간, 창자도 먹었다. 내장을 발라낸 몸통은 그냥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피지인들은 "심장, 허벅지, 팔꿈치 윗 부분의 팔을 진미로 여겼다." 피지인들은 사람을 먹을 때 그 유명한 '식인용 포크'를 사용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피지의 한 추장은 적의 해골로 그릇이나 컵을 만들고 정강이 뼈는 바늘로 쓰게 했다. 그렇지만 피지에서는 카우카 계곡 지역의 뛰어난 전사들이 잘라낸 적의 시체를 전리품으로 잔뜩 쌓아둔 것과 달리 시체를 전리품으로 만드는 경우가 드물었다. 특히 추장들은 적의 해골이나 말린 머리를 대나무 장대에 꽂아 자신의 집 밖에 세워두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장식품은 가까운 방문객들이 그 추장의 위대한 힘을 느끼고 공포와 존경심을 가지도록 했다.

최소한 카우카 계곡의 한 군장국가에서는 적의 시체를 통째로 훈제해서 장기간 보관했다. 이 집단의 가장 강한 추장은 시체를 훈제하기 위해 아주 큰 건물을 만들었는데 스페인 인들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건물에는 약 400명의 적 전사들의 시체가 무기를 손에 쥐고 다양한 자세로 훈제된 채 빽빽하게 차 있었다.

이 두 지역에서는 식인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 졌을까? 그 규모가 상당했음은 확실하다. 윌리엄스는 1860년대에 피지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전사자는 1,500명에서 2,000명 정도라고 추산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솥이나 화덕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피지보다 인구가 더 많았던 카우카 계곡에서는 잡아먹힌 사람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정복 초기 스페인 연대기 작가 중 가장 신뢰할 만한 인물인 치에자 데 레온(Cieza de Leon)에 따르면 1538년의 대기근 당시 포파야얀의 주민 중 상당수는 "죽은 사람을 자신의 위장에 장사지냈다"고 하며 그 해에 약 5만 명이 살해되어 먹혔다고 한다. 트림본(Hermann Trimborn)은 이 추정치가 과장되었으며 기근으로 인한 특수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식인 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헤레라 (Herrera)에 의하면 카우카 계곡의 집단 중 하나인 아르마(Arma) 에서는 1년 동안 8천명이 잡아먹혔다. 트림본은 역시 이 추정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고 있으나 설사 희생자의 숫자를 줄여 잡는다 하더라도 대규모 식인 행위임은 분명하다.

보다 구체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정확할 가능성이 높은 치에자의 기록에 따르면 카라파(Carrapa)와 피카라(Picara) 두 부족은 그들의 숙적인 포조(Pozo) 족을 무찌른 뒤 300명을 잡아먹었다고 한다. 뒤에 전세가 역전되어 포조족이 카라파, 피카라, 그리고 파우쿠라(Paucura) 족을 무찔렀을 때는 페레키타(Perequita)라는 포조족의 추장과 그의 수하들은 단 하룻동안 100명의 적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사람을 잡아먹는 잔치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주로 참여한 것은 바로 추장들이었다. 피지의 추장들은 그들이 먹어치운 사람 고기의 무게로 유명했다. 이 중에서 라 운드로인데(Ra Undreundre)라는 추장은 다른 추장들 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 추장은 자신의 집 뒤에 먹어치운 사람의 숫자 만큼 돌을 쌓았는데 돌 한개 당 사람 한 명을 먹은 것 이었다. 당대의 한 목격자에 따르면 라 운드로이네의 집 뒷 마당은 쌓인 돌이 232 걸음에 돌의 숫자는 872개에 달했다고 한다. 게다가 많은 돌이 중간에 없어졌다고 하니 이것들 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가 먹은 사람의 수는 900명은 되었을 것이다.

Robert Carneir, 'Warfare in Fiji and the Cauca Valley', Jonathan Hass(ed), The Anthropology of War(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p.202~205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미식가들입니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

漁夫님이 지난 4일에 쓰셨던 '20세기 최악의 기록들; 독재자'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漁 夫이 언급하셨듯 집단의 규모가 크지 않은 부족단위 사회에서는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매우 높으며 특히 남성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단락을 할애해 설명하고 있으니 Keely의 이야기를 한 번 소개해 보지요.

Keely의 설명에 따르면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을 통계화 할 경우 미국이나 유럽 등의 '문명화된' 사회보다 '비문명화된' 사회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프랑스에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인구 손실은 전체 인구의 2.5%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지만 야노마뫼(Yanomamo)족의 경우 20%를 거뜬히 넘어가며 히바로(Jivaro)족의 경우는 30%를 넘어간다고 합니다. 게다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성인남성의 경우는 수치가 더 높아지는데 야노마뫼족은 전쟁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전체 남성의 40% 가량이 사망하며 히바로족은 그 비율이 거의 6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이외에 Keely가 인용한 인류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보면 비교대상으로 선정한 '문명화된' 사회와 '비문명화된' 사회의 통계에서 대부분의 '비문명화된'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를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에서 압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Keely는 비록 부족단계의 '비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은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에 비해 사망자의 숫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지만 전쟁이 발생하는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으며 이밖에 복수 등의 동기에서 개인 단위의 습격이나 살인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높은 사망률의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전쟁에 동원되는 남성의 비율도 극단적으로 높으며 교전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기준으로는) 잔혹한' 대우 등 사망률을 높이는 요인이 많습니다. 여기에 사망자의 숫자가 적지만 그만큼 사회의 규모도 작아서 한번 피해를 입으면 회복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뉴기니아의 한 작은 부족은 결혼한 성인남성이 총22명이었는데 4개월 반의 전투를 겪은 뒤 결혼한 성인남성의 '27%'에 해당하는 여섯명의 남성이 전사하고 여덟명의 남성은 부족에서 이탈해 도망쳐 버렸다고 합니다. 결혼한 성인 남성 22명 중 14명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 부족은 엄청난 타격을 받은 셈이지요.

몇몇 사례들을 보면 우리의 사회에서는 말로 해결될 것도 창과 활이 동원되고 있으니 사망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현대의 문명사회가 살인 기술에 있어 훨씬 효율적이지만 폭력을 사회적 제도로 억제하고 있는 까닭에 전체 사망률에서는 비문명화된 사회보다 낮은 경향이 나타납니다. 물론 문명사회의 경우 한번 폭력을 사용하면 그 피해는 어마어마한 수준이 되긴 합니다만;;;;;

2009년 4월 13일 월요일

부족사회의 폭력성

漁夫님께서 뉴기니의 어떤 부족 촌장들이 새로운 문명을 접한뒤 보여준 놀라운 창의력에 대해 글을 써 주셔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댓글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漁夫님의 답변 하나가 눈에 쏙 들어오더군요.


예.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漁夫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족사회의 폭력 정도는 현대 사회 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전에 한 번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했었던 킨리(Lawrence H. Kee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라는 책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킨리의 연구에 따르면 야노마뫼(Ya̧nomamö) 족의 경우 전쟁시 남성의 사망률이 전체 남성의 37%에 달하고 에콰도르 등에 거주하는 히바로(Jivaro) 족의 경우 59%라고 합니다. 반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을 통틀어 유럽과 미국의 남성 사망률은 전체 남성의 1%를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하지요. 전체 인구집단의 규모나 전쟁 방식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높은 사망률인 것은 사실입니다.

킨리가 책 전체에 걸쳐 주장하듯 평화로운 야만(Peaceful Savage) 같은 것은 상상속에나 존재하는 것이죠.

2006년 11월 13일 월요일

War before Civilization 내용 요약

요즘은 책을 읽어도 기억이 잘 안납니다. 책을 덮는 순간 읽었던 내용이 휘발되어 사라지는군요.

그런고로 예전에 읽었던 책 중에서 재미있었던 놈들을 골라 요약문을 써 볼까 합니다.

1번 타자는 Lawrence H. Keenley의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입니다. 1996년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됐는데 그 해 LA Times의 올해의 역사서적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다고 하는군요. 이하는 내용 요약입니다.

1장 The Pacified Past
홉스는 Leviathan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이 처한 환경을 “the war of every man against every man"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반면 루소는 홉스와 달리 ”문명 이전“의 인간은 본능에 따라 평화롭게 욕구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문명화로 인해 평화가 깨졌다고 보았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홉스의 이론을 경멸했다. 흥미롭게도 루소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신대륙에서 귀환한 탐험자들의 보고서와 자료를 활용하려 했는데 탐험가들이 관찰한 ”미개인“ 사회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루소는 ”선한 자연의 자녀들이 그렇게 사악해 질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루소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동안 선사시대 인간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홉스의 이론이 통용됐다. 특히 “야만적인 미개사회”를 유럽의 기독교 문명으로 평화롭게 한다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홉스의 “미개사회”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식민지 개척에서 돌아온 선교사, 탐험가, 군인들은 미개한 원시사회의 실상을 서구사회에 알리면서 이것을 “문명화”의 정당한 근거로서 제시했다. 19세기에는 오직 개혁적인 지식인, 예술인 정도만이 루소의 견해를 지지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18세기 이래로 축적돼 온 “미개사회”에 대한 정보들이 학문이라는 체계하에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인류학자들은 이제 “미개사회”에 가까이 접근해 좀 더 심도깊은 관찰과 분석을 시도했다. 이 시기에는 식민화가 완료돼 더 이상 이들 “미개인”들이 전쟁을 할 수 없었지만 인류학자들은 구전과 소수의 사례 연구를 통해 “미개인”들의 사회도 평화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론을 체계화 했다. 1941년에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는 “인류학으로 인해 .... 인류의 선조들이 평화로운 ”황금시대“에 살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평화로운 야만(Peaceful Savage)"시대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루소의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인류학의 연구성과를 활용했다. 즉 ”미개인“의 전쟁은 근본적으로 그 규모도 작고 살상도 적게 일어나며 ”문명사회“의 그것에 비하면 전쟁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전쟁 중에는 ”원시 전쟁(Primitive War)“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전쟁이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 이론은 시카고 대학의 라이트(Quincy Wright, 1890~1970)에 의해 체계화 되기 시작했다. 라이트는 1926년부터 시카고 대학에서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라이트의 연구는 1942년 A Study of War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는데 라이트는 “전쟁”을 “무장한 집단으로 투쟁을 벌이는” 합법적인 상태라고 정의했다.
또 터니-하이(Harry Holbert Turney-High, 1899~1982)는 몬타나주의 인디언들을 연구해 1949년 Primitive War라는 연구를 출간했다. 특히 터니-하이는 장기간 직업군인으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트와 터니-하이는 “미개 사회”의 전쟁은 문명사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견해를 보였다. 즉 미개인들의 전쟁은 인간의 그것 보다는 원숭이 집단의 싸움에 가깝다는 견해였다. 터니-하이는 원시 시대의 전쟁은 어린애장난 같은(childish) 것이었으며 문명사회의 전쟁과는 원인, 동기, 수행 방식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미개사회’의 전쟁은 그 파괴력도 미약하며 사회, 기술적 발전이 없는한 전쟁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보았다. 
2차 대전이후 인류학계를 중심으로한 원시사회의 전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전쟁의 원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1950~60년대에 뉴기니와 남미(주로 아마존강 유역)에서 활동한 인류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사례연구가 발표됐다. 2차 대전이후 원시사회의 전쟁에 대한 논쟁은 소위 ‘문화생태론자(cultural ecologist)’와 ‘문화유물론자(cultural materialist)’간에 전개됐다. 
문화유물론자들은 원시사회의 전쟁에서 물질적 요인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즉 원시사회의 전쟁은 각 부족간의 부족한 자원(식량, 가축, 경작지)을 재분배하고 잉여 인구를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 이었다. 이런 주장은 ‘물질적 궁핍’을 전쟁의 원인으로 보고 있어 루소의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반면 문화유물론적 견해에 반대하는 인류학자들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1960년대 후반 발표된 야노마뫼(Yamomamo)족에 대한 샤농(Napoleon Cagnon)의 연구는 문화유물론적 견해에 큰 도전이었다. 샤농은 야노마뫼족이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복수, 또는 여성을 약탈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점에 주목했다. 샤농의 연구는 문화유물론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문화유물론에 반대하는 진영 중 사회적 특성에 주목한 집단은 신홉스주의자(Neo-Hobbesian)로 분류된다. 신홉스주의자 중 대표적인 학자로 할파이크(C. R. Hallpike)는 국가이전 단계의 사회들이 아무런 물질적 이득이 없는데도 전쟁을 계속하는 점에 주목했다. 신홉스주의자들은 원시사회의 전쟁은 매우 잦으며 특별히 중요한 원인이 없이도 전쟁을 벌인다고 주장했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원시사회가 기본적으로 평화로운 사회였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고고학 분야는 전쟁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고 있으며 유명한 개설서들은 전쟁에 대해서 따로 다루지 않고 있다.
고고학에서는 선사시대를 평화로운 시기로 서술하고 있다. 고고학 개설서 중 가장 유명한 편에 속하는 페이건(Brian Pagan)의 고고학 개설서는 영국에서 발굴된 기원전 4000년경의 유적지에 있는 해자가 군사적인 용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를 연구하는 벨기에의 한 고고학자는 무기와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이 전사(warrior)라고 주장했으나 무기는 단지 무덤주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류 고고학계는 선사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성곽의 흔적과 무기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퍼거슨(Brian Ferguson)등 신 루소주의자들은 1950~60년대에 인류학자들이 관찰한 부족사회의 전쟁은 원시시대의 전쟁이 잔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들의 전쟁이 잔인성을 띄게 된 것은 유럽문명과의 접촉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신 루소주의자들은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문의 연구방법을 도입하는데 소극적이다. 일부 신 루소주의자들은 민족학(ethnographic)의 연구성과를 활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민족학이 원시시대의 생활상을 설명하는데 부적합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신 루소주의자들은 기존연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반면 유럽문명과의 접촉 이전에 원시사회들이 어떤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가설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루소주의적 견해는 점차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됐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를 거치면서 원시사회의 전쟁이 위험하지 않다는 주장은 ‘선사시대의 평화(prehistoric peace)’라는 가설로 발전하게 됐다. 오늘날(1990년대 중반) 신 루소주의적 선사시대관은 지식인과 일반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지식인들의 담론과 대중문화에서 “전쟁”은 서구문명의 특수한 “정신병적(psychosis)”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2장. The Dogs of War : The Prevalence and Importance of War
만약 신 루소주의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인류학, 민족학, 고고학적 근거가 뒷받침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미개사회”에 대한 사례는 매우 드문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매우 증거가 많다.
그리고 전쟁을 벌이는 빈도가 낮은 부족이나 무리(band)의 경우에는 집단내의 인구대비 살인률이 매우 높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흔히 서구사회에 평화로운 부족으로 알려진 쿵산(Kung San, 부시맨)족의 경우 1920년부터 1955년까지 인구대비 살인률이 미국에 비해 80배가 높았으며 종종 Tswana족을 집단으로 습격하기도 했다. 캐나다의 Copper 에스키모역시 높은 살인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고립된 집단도 마찬가지로 남미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Yaghan족의 살인률은 미국보다 10배가 높다.
리(Richard Lee)나 해리스(Marvin Harris, 1927~2001)는 쿵산족을 비롯한 사회를 평화로운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이들의 살인률에 대한 통계는 사실상 조작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서구사회의 경우 전쟁에서의 사망률을 합쳐서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리와 해리스의 주장처럼 전쟁에서의 사망률을 합쳐서 비교하더라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뉴기니 Gebusi족의 살인률을 그대로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입할 경우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 9년째에 베트남인을 멸종시켰을 것이다. 농경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는 부족사회의 경우 확실히 “평화로운” 사회의 사례가 있기는 하다. 말레이반도의 Semai족은 전쟁을 하지 않으며 다른 부족이 공격해오면 어쩔수 없이 대항하거나 대개는 도망을 친다. 그러나 Semai 부족은 영국이 1950년대 말레이시아 독립운동을 진압할 때 영국군에서 대 게릴라전 부대로 활약했다. 한 Semai족 참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죽이고, 또 죽이고 계속 죽였습니다. 말레이인들은 시체를 뒤져서 시계나 돈을 훔쳤지만 우리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직 적을 죽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적의 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확실히 전쟁을 거의 하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는 존재하지만 그 사례는 지극히 드물다.
미국 서부 평원지대의 인디언 부족 중 86%는 매년 습격이나 보복습격을 벌이며 단지 북아메리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뉴기니의 Dugum Dani족에 대한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5개월 2주 동안 일곱차례의 전투와 아홉차례의 습격을 벌였다고 한다. 아마존 유역의 한 야노마뫼 부족은 15개월간 총 25차례의 전쟁을 벌였다.

한편, 인구대비 전투원의 비율에서도 원시사회는 "문명사회“보다 높은 경향을 보인다. 타히티인들의 평균적인 남성인구대비 병력 동원률은 45%를 넘는데 이른바 ”문명사회“인 소련의 2차대전기 병력 동원률은 25%를 약간 밑도는 수준이었고 미국은 20%를 넘지 못했다. 특히 문명사회는 생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병력 동원에 제약이 있지만 부족사회, 무리사회의 경우 사실상 적정 연령대의 남성은 거의 대부분 동원이 가능하다.
선사시대에도 전쟁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는 매우 많다. 이탈리아 그리말디(Grimaldi)에서 발굴된 34,000~24,000년 전 오리냑(Aurignac) 문화기의 유적에서는 척추에 관통상을 입은 어린아이들의 뼈가 대량으로 발굴됐다. 프랑스에서 발굴된 오리냑 문화기의 한 유골은 두개골에 가죽을 벗겨낸 흔적이 있기도 했다. 이집트의 Gebel Sahaba의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유골의 40%는 돌로 만든 도구에 의해 뼈가 훼손되어 있었다. Gebel Sahaba를 발굴한 웬도프(Fred Wendorf, 1925~)는 이 유적에 매장된 사람의 50% 이상이 살해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인류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은 생산양식이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이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수렵채집 단계에서도 집단적인 무력 사용이 흔했다는 증거가 더 많다.
3장 Policy by Other Means
1장에서 언급한 터너-하이는 원시사회에는 문명사회와 달리 정교한 전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퍼거슨의 최근 연구는 전술이 문명화에 따라 급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원시사회의 전투 참여자는 문명화된 사회의 군인보다 기술적으로는 뒤떨어지지만 사실상 평생을 전사로 지내기 때문에 전투원으로서의 숙련도는 매우 높다. Oglala Sioux 부족은 미국 정부와의 전쟁에서 복잡한 기만전술을 구사해 여러 차례 승리했다.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투에서 매복, 측면 공격 등의 전술을 구사한다. 스페인의 모레야 라 비야(Morella la Villa)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벽화에는 전투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이 벽화에서도 적의 측면을 공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원시사회의 전술과 조직력은 사회 구조상의 문제 때문에 여러 모로 결함이 많다. 뉴기니의 한 부족은 전투를 지휘하는 리더도 전사의 일원이기 때문에 직접 전투를 벌이다가도 뒤로 빠져 지휘를 하고 다시 전투에 뛰어든다. 이런 경향은 원시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권위가 비교적 약하고 평등주의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원시사회의 무기는 타격(Shock)무기와 발사(fire)무기로 나뉜다. 화약 이전의 발사무기는 기본적으로 타격무기보다 정확도가 뒤떨어지기 때문에 전투는 타격무기에 의해 주도된다. 특히 사냥에도 이용되는 활과 달리 타격무기는 원시사회에서는 가장 전쟁에 특화된 도구이다. 곤봉같은 물건은 전쟁 외에는 다른 용도가 없다. 발사 무기로는 활과 투창류, 돌팔매가 있는데 특히 투창은 국가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많이 사용되는 발사 무기이다. 투창은 활 보다는 사거리가 짧지만 위력은 보다 강해 많이 사용된다. 돌팔매는 사용하기가 쉬우나 위력이 떨어진다.
터너-하이는 원시 사회는 거주지역을 요새화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유럽의 경우 초기 신석기 시대에 이미 주거지를 요새화 하고 있으며 미주리 강 일대에서 발견된 14~15세기 경의 주거지 유적도 요새화가 돼 있었다. 요새시설은 크게 요새화된 주거지, 요새화된 피난처, 요새화된 지배층의 거주지, 그리고 순수한 군사적 목적의 요새로 나뉜다. 원시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요새화된 주거지이다.
과거의 인류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원시시화는 요새의 존재에 무지하거나 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기반이 뒷받침 되지 않기 때문에 요새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4장 Imitaing the Tiger
Dugum Dani족은 다른 부족과 전쟁을 결심하면 전령을 보내 결투를 신청한다. 상대방이 결투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다음날 전령을 보내 결투를 신청하고 상대방이 싸우러 나올때 까지 같은 방법을 반복한다. 뉴기니의 마링(Maring)족은 상대방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로 쳐들어가서 승리할 경우 상대방을 몰살시킨다. 태평양 지역과 아메리카의 부족사회들은 이렇게 사전에 선전포고 형식으로 전투를 준비한다. 선전포고는 대개 상대방에 대한 모욕으로 이뤄진다.
이와 함께 원시사회의 전쟁은 형식화, 또는 스포츠화 되어있는 경향이 강하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북미 평원 인디언들의 관행인 “counted coup"가 있다. 이것은 전투에서 용맹한 행위를 하는 것인데 적의 말을 훔치거나 일대일로 싸워 적을 죽이거나 다친 동료를구하거나 혹은 단독으로 많은 적과 싸우는 행위등이 그것이다. 전쟁에서 용맹한 행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이른바 문명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전쟁은 의식적인 측면이 매우 희박하다. 서구 사회의 경우 19세기 말 까지 깃발과 같은 상징적인 것들을 중요시 했는데 줄루 전쟁에서 두명의 영국 장교는 줄루족에 패해 도망칠 때 연대기를 무사히 들고 도망쳤기 때문에 빅토리아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정작 줄루족은 영국군의 연대기에 관심이 없었다.) 이외에 화려하고 요란한 군복도 서구 문명의 전쟁에 남은 의식적인 측면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원시사회에서는 전투에 투입된 병력 대비 사상자율도 문명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비슷한 부족이나 언어집단간에는 전쟁 시 사상자 비율이 제한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승리한 측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한다.
한편, 원시사회의 전투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습과 습격이 일반적이다. 기습과 습격은 연중 여러 차례 행해지는데 2장에서 언급한 야노마뫼 족은 25번의 습격으로 전 인구의 5%를 잃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전투 보다는 기습과 습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 Lilloet 족은 이웃 부족의 기습으로 전 인구의 10%인 400명의 사망자를 냈다는 기록이 있다.
원시사회의 전쟁은 이렇게 기습과 습격 단계에서 점차 격화돼 학살로 발전한다. 뉴기니의 사례를 보면 한 부족은 기습으로 순식간에 인구의 8%를 잃었고 역시 뉴기니의 경우 한 부족연합군이 한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전체의 13%에 해당하는 인명을 잃었다. 캐나다의 노란칼 부족은 개갈비 부족에게 여러 차례 학살을 당해 결국에는 다른 부족에 흡수됐다.
대량 학살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학살은 10~20년에 한번 발생하는 수준이다. 일부 학자들은 대량학살이 유럽인의 영향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고학적인 근거에 따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사우스 다코타의 크로 크릭(Crow Creek)에서는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량 학살터가 발견됐는데 여기서 무려 500구의 유골이 출토됐다. 남아있는 가옥 유적들을 가지고 추산했을 때 학살된 부족은 전 인구의 60%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5장 A Skulking Way of War : Primitive Warriors vs Civilized Soldiers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아프리카의 유럽인 지배는 해안 지역에 국한됐다. 창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은 수발식 총을 쓰는 유럽인들에 비해 여러모로 우세했다. 인디언 전쟁에서도 미군은 종종 압도적인 수의 인디언에 포위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50명의 Modoc 부족 전사들은 1,200명의 미군에 맞서 물이 떨어질 때 까지 다섯달 간이나 버텨냈다.
동시기의 미군보다 잘 훈련된 유럽의 군대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영국군은 줄루전쟁에서 후장식 소총, 개틀링건, 대포를 갖췄지만 이산들와나(Isandlwana), 마이어스 드리프트(Myer's Drift) 전투에서 연달아 참패했다. 1890년대 프랑스군도 투아렉(Tuareg) 족에게 여러차례 패배했으며 독일은 헤레로(Herero)족과 나마(Nama)족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개의 경우 문명화된 사회의 군대가 이런 야만사회와 싸워 이긴 것은 유럽의 전투방식을 버리고 이들의 방식에 맞추는 것이었다. 많은 경우 야만족과 싸우기 위해 다른 야만족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문명화된 군대가 항상 야만족에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었다. 14세기 카나리아 군도의 부족들은 나무창과 돌팔매를 가지고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의 침략군을 여러차례 무찔렀다. 스페인인들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제압한 것은 첫 침략으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1496년이었다. 신대륙의 정복자들이 승리를 거둔데는 보이지 않는 동맹, 즉 바이러스, 박테리아 같은 것들의 역할이 컸다. 스페인군과 전투를 벌이다 죽은 아즈텍인은 10만명으로 추정되는 반면 스페인인들이 옮긴 전염병에 죽은 아즈텍인은 8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문명사회가 야만인들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문명인들의 압도적인 숫자였다.

6장 The Harvest of Mars : The Casualties of War
뉴기니의 Mae Enga 부족은 상대방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 그를 난도질해 죽인다. 성인 남성은 무장을 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무조건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족간의 전쟁에서는 항복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다.
부족사회의 전쟁에서는 포로를 잡지 않는데 이것을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없는 상태다. 줄루 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가 줄루족 포로에게 왜 우리가 너희들을 죽이지 않느냐고 묻자 줄루족 포로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백인포로를 죽이는 것은 그것이 흑인의 관습이기 때문이듯 그러지 않는 것은 백인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차 영국군도 줄루족의 관습을 따르게 됐다.
일부 부족사회는 제물로 바치거나 의식을 위해 포로를 잡는다. 이로코이 족은 포로를 잡아 고문하는데 고문 끝에 포로가 죽으면 포로를 죽인 사람이 그 포로의 신체 일부를 먹는다. 남미의 투피(Tupi)족은 고문한 포로를 어린이들에게 죽이도록 하는데 이것은 그 어린이가 전사가 되겠다는 의식의 일부이다. 남 태평양의 여러 부족사회에는 적을 고문하거나 잡아먹는 관습이 널리 퍼져있다. 동부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은 몸값을 받기 위해 포로를 잡기도 한다. 남아메리카의 일부 군장 사회는 포로들을 자기 집단내의 여성들과 결혼시키기도 하는데 이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투아렉 족은 전투에 지면 가족들을 남겨두고 도망치는데 이것은 그들이 비전투원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많은 부족 사회에서 여성을 사로잡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종종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종종 포로로 잡은 여성이 부족 구성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수렵채집사회에서 여성의 노동력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여성 포로는 더욱 더 중요시된다. 
그러나 적을 몰살시키는 관습을 가진 부족도 많다. 타히티 원주민들은 적의 부인과 자식들을 잡아 창으로 꿰어 죽인다. 마오리족은 적의 여성을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부상을 입힌 뒤 강간하고 잡아먹는다. 대개의 경우 포로 학살이 시작되면 몰살시키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대 국가의 문명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야만인들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연간 사망률은 원시사회가 문명사회의 그것을 크게 능가한다. 미국의 남북전쟁과 영국의 크림전쟁 기간 중 사망자율은 비전투 손실을 합쳐도 북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남미 원주민의 그것 보다 훨씬 낮다. 여기서 순수하게 전투의 결과로 죽은 사람을 빼면 그 차이는 더 벌어진다.
신 루소주의자들은 미개 사회가 유럽과 접촉하면서 더 잔인해 졌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북아메리카의 경우 유럽인이 이주한 이후 폭력으로 사망한 원주민의 비중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시사회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을 몰살시키기 때문에 사망자의 비중이 매우 높다. 남성대 여성의 사망비 역시 부족사회의 그것이 더 높다. 2차 대전기간 중 연합군의 독일 폭격은 많은 여성을 죽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남성대 여성의 사망비는 16대1이었다. 원시사회는 그 비율이 1대1에서 1대7 정도이다. 
7장 To the Victor : The Profits and Losses of Primitive War
타히티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적의 시체를 곤봉으로 내리쳐 짓이긴 뒤 그 위에 걸터 앉는다. 많은 사회에서는 시체를 훼손함으로서 그 영혼과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이런 행위는 승리자의 영혼을 더 강하게 한다는 믿음도 있다.
승리자가 가장 애호하는 전리품은 적의 머리나 해골이다. 적의 머리를 자르는 풍습은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오늘날 수정주의자들은 북미 인디언들이 머리가죽을 벗기는 행위가 원래 백인들이 하던 것이 인디언에게 퍼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백인들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머릿가죽을 벗기는 행위는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머리외의 전리품으로는 적의 성기, 손, 이빨 등이 있다.
설사 전리품이 아니더라도 적의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많다. 줄루족은 죽인 적의 복부를 가르는데 이것은 적의 영혼이 머무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평원 인디언들도 시체 훼손을 많이 한다. 수 족은 목을 자르고 샤이엔 족은 팔을 자르고 아라파호 족은 코를 벤다.

신체 훼손중 가장 극단적인 행위는 식인이다.
인류학자들은 의식으로서의 식인과 단순한 식사로서의 식인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중남미의 많은 부족들에서 식인행위는 매우 널리 퍼져있는 행위였다. 어떤 부족은 하루에 100명의 적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나중에 먹기 위해 시체를 훈제해서 보관하기도 한다. 식인 행위는 태평양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이외에 의식으로서의 식인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아즈텍 제국이 있는데 해리스는 아즈텍을 “식인 국가”로 정의했다. 일부 문화 유물론자들은 아즈텍 제국이 인구밀도는 높은데 가축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인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즈텍의 식인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어쨌건 아즈텍의 식인은 대규모로 이뤄졌다. 
전리품으로 적의 식량을 약탈하는 행위도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많은 경우 이런 약탈은 도망친 적들이 굶어 죽게 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진다. 또 가축을 약탈할 경우 특정 종의 동물만 약탈하기도 하는데 베두인들은 낙타를 빼앗고 동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소를 약탈한다. 원시 사회의 사회 인프라는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불과 수일간의 전쟁과 약탈만으로도 부족의 생활 기반 자체게 붕괴된다.
한편, 원시 사회의 전쟁은 영토획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가설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많은 경우 승자는 패배자의 영역을 빼앗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뉴기니의 Mae Enga 부족이 벌인 전쟁 중 75%가 전쟁이 끝난 뒤 영역 조정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설사 영역 흡수가 없어도 전쟁으로 인한 무인지대의 발생, 잦은 습격으로 인한 황폐화는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8장 Crying Havoc : The Question of Causes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과학자들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원시사회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연구했다. 원시사회에서 전쟁의 원인은 가장 많이 연구되면서도 어려운 대상이다.
코흐(Klaus Koch)의 뉴기니 Jalemo 부족의 전쟁에 대한 연구사례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A 마을은 B 마을이 지난 전쟁에서 도움을 줬기 때문에 돼지 몇 마리를 빌려줬다. 어느날 A마을의 남자 한명이 B마을의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유혹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친척들과 함께 의심가는 남자를 습격했다. 그러자 B 마을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A 마을은 B 마을에 정식으로 전투를 신청했다. 양측은 곧 휴전하기로 했으나 B마을의 전사가 단독으로 친척의 복수를 했기 때문에 전투가 재개됐고 결국 전투가 2년간 계속됐다. 이 경우 어떤 행위가 실질적으로 2년간의 전쟁을 일으킨 것인지 명확히 정의내리기 힘들다.
1798년 맬서스(Thomas Malthus)가 인구론(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저술한 이래 인구 증가에 따라 전쟁이 증가한다는 것이 일반화 됐다. 7장에서 살펴 봤듯 전리품 중에는 생산물과 생산수단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은 인구증가와 전쟁의 확대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첫 번째는 인구 증가에 따라 갈등이 증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차 문화 비교(Cross cultural comparison)에서는 이런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교차 문화 비교를 활용한 몇몇 연구는 인구 증가와 전쟁의 발생 빈도가 반드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맬서스식의 단순한 인구밀도 비교는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평망마일 당 한명은 북극의 툰드라 지대에서는 매우 높은 인구밀도지만 사바나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높은 인구밀도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 하나의 추론은 부족간 교역과 결혼 문제도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상이한 집단간의 교류는 전쟁 위험을 줄인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어떤 부족들은 서로 교역과 결혼을 하지만 가끔 전쟁을 벌이는 사례도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알래스카의 에스키모들은 여름에 교역 기간을 가지지만 교역하는 부족이라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뉴기니의 Mae Enga족의 경우 전투를 벌일 때 자신의 친척을 발견해 죽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교역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한 부족이 어떤 중요한 자원을 독점했을 때이다. 북부 캘리포니아의 원주민들은 종종 소금 확보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교역과 전쟁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고고학자들은 여태까지 이 사실을 무시해왔다. 많은 경우 특정한 유물이 출토되면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교역의 증거로만 해석했다. 그러나 이런 유물들은 동시에 전리품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교역은 전쟁이 일어나기 쉬운 조건을 만들기도 한다. 
9장 Bad Neighborhoods : The Context for War
Joseph Jorgensen은 아메리카 서북부의 인디언에 대한 연구에서 한 지역마다 습격을 많이하는 특정 부족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왜 한 부족이 특별히 호전적인가는 인류학, 역사학적인 의문의 대상이다.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호전적인 부족은 인구와 영토가 꾸준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콜로라도강 하류에서는 Mohave 족이 가장 호전적이지만 이들의 인구는 1770년대 3천명에서 1872년에 4천명으로 증가하는데 그쳤다. 반면 Mohave의 주요 적들은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인구증가는 호전성을 높이며 동시에 전쟁을 치를 인적자원을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기술의 발전도 호전성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assegai를 개발한 줄루족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벌인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호전적인 부족이 계속해서 호전적이지는 않다. 한 때 흉포한 야만인이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인들이 지금은 가장 평화로운 인종이 됐다. 
일부 인류학자들은 교역이 이뤄지는 집단간의 경계지역이 가장 평화롭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8장에서 살펴봤듯 교역이 전쟁의 위험을 감소시킨다는 근거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경계지역은 오히려 적의 습격에 더 빈번히 노출되는 지역이다. 경계지역이 평화롭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들은 몇 가지의 사례만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미 확정된 경계지역도 위험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경계지역은 더 위험하다. 경계지역의 변동은 한 집단이 확대됨에 따라 그 반대집단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상호 교류가 평화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약 7,000~6,000년 전 서부유럽의 신석기 농경민들이 수렵채집을 하는 중석기인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두 집단간에 충돌이 빈번했던 것으로 보인다.
10장 Naked, Poor, and Mangled Peace : Its Desirability and Fragility
문명사회도 그렇지만 부족사회들은 전쟁에 대해서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대개 전쟁에 대해서 전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는 부족은 없다. 일반적으로 많은 부족사회들은 적을 죽인 전사가 영적으로 오염됐다고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정화하기 위한 의식이 존재한다. 뉴기니의 Huli족 전사는 사람을 죽이면 수일간 사람을 죽인 손을 쓰지 않는다. 또 가장 호전적인 부족조차도 전투에서 가장 용맹을 떨친 사람을 지도자로 삼지 않는다. 또 전쟁에서 전리품은 남성의 몫이며 여성과 어린이는 배려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전쟁을 싫어한다. 매우 호전적인 남미의 Jivaro족 조차 자신들이 저주를 받아 전쟁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는 한 부족의 지도자가 전쟁을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평화협상은 양측의 피해가 비슷한 수준일 때 이뤄진다.

11장 Beating Sword into Metaphors : The Roots of the Pacified Past
원시사회가 평화로웠다는 견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줬으며 특히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후 대중문화에는 반전 성향이 두드려졌으며 전쟁의 영광과 영웅적 행위를 다루던 미국의 전쟁 소설들은 세계대전 이후 정신병적인 상관들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되는 군인들을 소재로 다루는 등 반전 성향이 강해졌다. 2차대전 이후 대학에서는 군사문제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시작된 냉전과 핵무기 경쟁은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불러왔다. 다음번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3차 대전이 아니라 아마게돈이 될 것이었다.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은 단순히 선과 악의 문제에서 멸망을 부르는 광적인 행동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서구문명은 치유 불능의 상태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와 함께 식민지의 독립이 이뤄지면서 유럽 열강들은 몰락했고 각각 미국과 소련의 위성국화 돼 유럽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유사 식민지(Quasi Colonies) 상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유럽이 그동안 누리던 우월적인 위치를 상실하자 한때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제 3세계에 대한 재인식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이 ‘야만사회’를 바라보던 홉스주의적 시각이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홉스주의적 시각은 19세기 말 이른바 ‘백인의 부담(White-man's burden)'이라는 개념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 했으며 학자들은 여기에 다윈주의(Darwinism)와 인종주의를 덧 붙여 정교화 했다.
그러나 2차 대전은 이런 모든 인식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나치는 비 백인뿐 아니라 유럽인들조차 열등한 종자(lesser breed)로 인식했으며 백인이 비 백인에게 저지르던 행동을 같은 백인에게 저질렀다. 거위를 요리할 때 쓰던 소스를 기러기에게도 쓰기 시작한 것이다.(the souce for the goose had finally been applied to the gander) 나치의 충격과 뒤이은 유럽의 몰락은 백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한편, 재인식이 이뤄지던 시기에 그 인식의 대상이었던 제 3세계는 빠르게 문명화됐다. 그 결과 이들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문명이전 사회에 대한 서구의 동경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또 암울한 미래로 진보에 대한 확신도 줄어들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시작한 것은 “황금 시대에 대한 신화”였다.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은 이제 제 3세계를 물질적 진보에 의한 희생자로 인식했다. 해리스가 관찰한 뉴기니의 화물 숭배(cargo cult)처럼 서구 문명은 원시사회를 타락 시켰다. 지식인들은 이 악의 근원을 서구 문명과 물질적 진보에서 찿으려 했다. 신 루소주의적 시각은 마침내 원시사회가 평화로운 사회라는 왜곡된 신화를 퍼트렸다.
12장 A Trout in the Milk : Discussion and Conclusions
원시사회의 전쟁이 서구사회 못지않게 잔인하다는 것은 백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백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다른 세계보다 더 우월하고 효율적이라고 자부해 왔다.
이런 신화를 만든 주체는 인류학자들이었다. 2차대전 후 인류학자들은 ‘원시사회’의 전쟁이 단순하고 피해도 적다는 시각을 체계화 했다. 그들의 본질적인 의도가 어땠건 간에 이런 왜곡된 시각으로 만들어진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 졌다. 그러나 민족학과 고고학에 의해 이런 신화들을 부인하는 근거가 꾸준히 발견됐다. 
전쟁은 나무로 만든 창으로 사람을 찌르건 아니면 네이팜탄을 투하하건 간에 본질적으로 끔직한 행위이다. 평화로운 원시사회라는 것은 매우 드물게 존재한다. 이른바 문명사회가 아닌 곳에서 전쟁은 자주 일어나며 종종 더 치명적이기도 하다. 원시사회의 전쟁은 어린아이 장난이 아니라 문명사회의 전쟁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을 다 가지고 있다. 원시사회의 전쟁에 결여된 것은 전략에 불과하다. 제 3세계에서는 원시사회에서 많이 쓰는 전투 방식인 게릴라전에 현대적인 무기를 결합해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즉 원시사회의 전쟁은 제한적인 수단이 사용되는 ‘총력전'이다.(Primitive warfare is simply total war conducted with very limited means)
그러나 전쟁은 인류의 생활에서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충분한 준비 기간이나 회복 기간 없이 전쟁이 계속된다면 인류는 이미 멸종하고 없을 것이다. 루소의 원시 황금 시대가 단순한 상상이라면 홉스식의 끊임없는 투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원시사회가 평화로웠다는 ‘신화’는 서구 지식인들의 자기 인식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제국주의가 백인우월론을 내세웠듯 원시사회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류의 지적, 정신적, 육체적인 동등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2006년 7월 17일 월요일

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 by Lawrence H. Keeley

이번 미사일 사태를 통해 나타난 국내 일부 지식인들의 매우 “나이브”한 국제 정세와 군사문제 인식은 꽤 심각한 수준이다.

일단 이들은 “미국”만이 동북아의 전쟁 유발 요인이며 “미국”만이 침략전쟁을 한다는 괴상한 발상을 두뇌에 탑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나이브한 인식이 이들 소수의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좀 더 겉 멋 든 바보들에게 전염되는 것이다. 이미 소위 인터넷 논객이라는 머저리들에게 이런 경향이 전염되는 것으로 보여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런 가방 끈 긴 바보들의 망상을 깨 줄 필요가 있다.

사족이 길었는데 이번에 살펴볼 책은 나온지 10년(1996년 출간)이 넘은 책으로 전쟁에 대해 안이한 발상을 하는 바보들을 위한 책이다.

이름하여 “War before Civilization”. 부제는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인 Lawrence H. Keeley는 책의 서문에서부터 서구 지식사회에 만연된 “평화로운 문명 이전 시대”와 “야만적인 문명사회”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학부생 시절 참여했던 발굴을 예로 들며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지식인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풍부한 고고학적 증거와 인류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인용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미 수만년 전부터 지독하게 폭력적인 존재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선사시대의 사회”가 기술적으로 뒤떨어졌기 때문에 살상 능력도 부족했고 이 때문에 전쟁을 하더라도 살상률은 낮을 것 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러나 저자는 1960년대 이후 인류학자들이 뉴기니 등 오지에서 벌어진 부족전쟁을 관찰한 내용을 인용하며 “오히려”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이 더 잔인하고 살상률도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미국의 대학들이 1960년대부터 80년대 까지 선사시대의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화로운 선사시대”라는 왜곡된 인식을 확산 시켜왔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특히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지식인 사회의 염전 풍토도 언급하고 있다.)
저자의 비판 대상으로는 유명한 브라이언 페이건의 개설서도 포함돼 있다.

저자는 각 장에서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 수행 방식, 조직 등을 고고학과 인류학적 증거를 동원해 설명하고 있다.
여러 자료들을 통해 재 구성한 “비 문명화된 사회”의 전쟁 양상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
비문명화된 사회는 정교한 행정 조직이 없더라도 인구 대비 병력 동원률이 현대 국가들 보다 높으며 인구 당 전사율은 현대 국가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저자의 주장은 실증적인 자료들을 동원해 구성됐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지식인”들의 망상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의 폭력과 전쟁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 안이하게 생각하는게 어디 미국 지식인 사회만의 문제이겠는가.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야만적이고 문명화 된 미국이 쏴대는 “토마호크”와 순박한 북조선이 쏴대는 “대포동”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믿는 바보들이 넘쳐나고 있다.
결정적으로 이 바보들이 자신들의 망상을 전염시키기 위해 광분하고 있어 더더욱 불안하다.

2006년 4월 29일 토요일

아즈텍의 전쟁수행 양식과 보급문제(삼탕!)

제목은 거창하나 내용은 어린양 블로그의 다른 글들이 다 그렇듯 별 거 없다.

몇 년 전에 Center for Hellenic Studies에서 나온 War and Society in the Ancient and Medieval Worlds라는 책을 얼떨결에 구하게 된 일이 있었다. 고대사쪽은 거의 아는게 없는지라 내가 왜 이 책을 가지게 됐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인데 한가지 확실한 것은 꽤 재미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각 문화권 별로 여러개의 짧은 글들이 실려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바로 Ross Hassig가 쓴 14장의 아즈텍 문화권의 전쟁이다.

Ross Hassig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의 전쟁 수행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잘 발달된 도로망의 부재(대 도시를 제외하면 군사적으로 쓸만한 도로가 없었다고 한다)와 적절한 수송수단의 부재였다고 한다. 특히 도시간의 전쟁에서 이런 문제점은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고 한다.

아즈텍 군대의 기본 단위는 대략 8,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구성된 xiquipilli라고 하는데 말이 없었으므로 전 병력은 보병이었고 행군 속도가 지독히 느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양이다. Hassig는 하나의 xiquipilli가 하룻 동안 이동할 수 있는 최대의 거리가 19km정도 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사정이 열악해서 행군 대형은 쓸데 없이 길었다고 하는데 한개의 xiquipilli가 행군하면 부대 선두의 사제 부터 제일 후위의 병사까지의 길이가 대충 12km 정도 됐다고 한다.

※ 참고로, John Haldon의 저서에 따르면 도로망이 비교적 양호한 9세기경 비잔티움 군대의 경우 보병 10,000명과 기병 5,000으로 편성된 부대의 행군 대형은 14km였다. 여기서 본대 보다 2~3km 앞서서 나가는 정찰대와 역시 본대 보다 2~3km 뒤에서 따라오는 후위 부대가 차지하는 거리를 빼면 실제 행군 대형은 8~9km 정도다.

문제는 8,000명 정도의 대 병력이 이동하면서 보급을 해결할 수 있는 규모의 도시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모든 보급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보급품은 병사 개개인이 가지고 다녀야 했고 무게와 부피가 많이 나가는 식량은 병사 한명당 한명의 짐꾼(tlamemes)이 배속되었다고 한다. 보통 짐꾼 한명이 23~25kg정도의 식량을 지고 행군했는데 이건 아무리 후하게 쳐 줘도 병사 두명과 짐꾼 한 명이 8일 정도 먹는 분량이었다.
결국 아즈텍의 도시 하나가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일 경우 최대 작전 가능 범위는 대략 65~70km정도였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Hassig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3일간 행군한 뒤 하루 싸우고 하루 쉰 뒤 3일간 행군해서 돌아와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황제가 지휘하는 군대는 행군로 상의 도시들에게 사전에 식량과 보급품을 모으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도시들 보다는 작전 가능한 범위가 좀 더 넓었다고 한다.

※덤으로 Hassig의 설명에 따르면 아즈텍의 전쟁에서 "기습"이란 요소는 별로 달성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한 도시가 다른 곳과 전쟁을 벌일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시장에서 소집 명령을 내리고 소집 명령이 내려지면 calpoleque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대표가 자신의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아 온 뒤 숫자가 차면 행군을 시작했는데 위에서 말한대로 행군 속도가 지독하게 느려서 군대가 출정을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나서 상대방이 전쟁이 시작된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뭐, 아즈텍의 전쟁은 종교 행사적인 성격이 되려 강했다고 하니 기습같은건 애시당초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