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군님이 쓰신 마른전투와 1차대전 직전 프랑스군의 공격 위주의 군사사상에 대한 글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배군님의 글에 전쟁직전 프랑스군의 포병 이야기가 잠깐 나온 만큼 편승하는 포스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프랑스 육군이 1차대전 발발당시 105mm급 이상의 대구경 야포에서 독일군에게 압도된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으로는 프랑스 육군이 전술교리의 문제 때문에 대구경 야포의 필요성을 경시했다는 점이 꼽히고 있습니다.
1차대전 이전 프랑스의 야포 운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랑글루아(Hippolyte Langlois) 장군이었습니다. 랑글루아는 1892년에 출간한 ‘야전포병과 타 병과에 대하여(L’Artillerie de Campagne en liaison avec les autres armes)’라는 저작에서 미래의 전장에서 속사가 가능한 야포가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고찰하려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전투가 ‘서전(緖戰)’, ‘포격전’, ‘소모 전투’, ‘결정적 공격’의 네 단계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중 전투의 ‘서전’에서 포병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는 전위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며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전위의 보병 및 기병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야전부대가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무전기술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포병이 보병 및 기병과 긴밀한 협력을 하기 위해서는 관측병의 시야 범위내에서,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할 수 있는 거리내에 배치되어야 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기동이 편리하고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화포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무거운 대구경 야포는 이러한 환경하에서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습니다. 대구경 야포의 장점은 긴 사거리인데 적을 직접 보고 사격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니 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인 ‘포격전’ 단계는 양측의 주력이 전장에 집결하여 포격전을 가하는 단계인데 랑글루아는 이 두번째 단계에서 적의 포병을 격파하고 화력의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이 경우에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소모 전투’ 단계에서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을 직접 지원하며 보병이 기동을 완료하면 새로운 진지에서 적군의 반격을 분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랑글루아는 역시 이 단계에서도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유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포병이 적 소화기의 유효사거리까지 전진해 화력지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속한 사격이 가능해야만 적의 보병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1)
그리고 랑글루아의 저작이 출간된 뒤에 채용된 75mm Mle 1897은 이러한 교리에 적합한 장비였습니다. 우수한 속사능력을 갖춘 이 포는 당시 독일군 사단 포병의 주력장비인 77mm 야포를 단숨에 구식화 시켰습니다.
랑글루아의 견해는 당시의 군사기술을 고려한다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포병이 적 보병의 소화기 사거리내에서 작전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보불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입증된 바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1870년 8월 18일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 만슈타인(Albrecht von Manstein)이 지휘하는 제9군단의 예하 포병대는 프랑스군의 소화기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물론 이 전투는 북독일연방측의 승리로 끝났으며 프랑스군 사상자의 70%가 독일 측의 포격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포병의 위력을 과시한 전투였지만 동시에 포병 전술의 한계를 보여준 전투이기도 했습니다.2)
러일전쟁의 결과도 프랑스군의 포병교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 포병은 엄폐된 포진지에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꽤 재미를 봤으나 포병 운용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러시아군은 속사가 가능한 경량급 야포가 거둔 성과에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러일전쟁 이후의 러시아군 교리에서는 여전히 포병이 최대한 전방에 배치되어 적 포병과 보병을 제압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3)
프랑스군도 러시아군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으며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랑글루아의 교리가 타당하다는 믿음을 더 강화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 포병의 훈련을 보면 적으로부터 1800m 떨어진 거리에서 사격하는 경우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포병 자체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공격하는 보병에게 최대한의 화력지원을 제공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포병의 방어는 포방패를 야포에 다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러일전쟁 직후까지도 포병이 후방에 위치할 경우 보병과 원활하게 소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도 프랑스군이 포병의 전진 배치를 선호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선전화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신뢰성 문제와 전화선이 포격에 절단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4)
그러나 독일군이 105mm급 야포의 생산을 늘려갔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뒤늦게 대구경 야포의 개발과 배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독일군은 이미 1900년부터 105mm l.FH 98을 양산하고 있었으며 1910년에는 개량형인 l.FH 98/09가 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1911년에는 독일군의 23개 군단에 3개 포대로 구성된 105mm 유탄포 대대가 배속되었으며 이보다 더 위력적인 150mm s.FH 02는 1913년까지 400문이 배치되었습니다.5)
1910년 총참모장에 취임한 조프르(Joseph Joffre)는 1911년 최고군사평의회(Conseil Superieur de la Guerre)에서 독일의 대구경 야포 도입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군도 대구경 야포의 배치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조프르 뿐 아니라 새로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 메시미(Adolphe-Marie Messimy) 또한 프랑스군이 중포 보유량에서 독일군 보다 열세에 있다는 점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6)
그러나 중포에 대한 프랑스군의 인식은 여전히 낮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포병장비 도입을 담당하고 있던 총참모부 제3국의 국장 레미(Rémy) 대령은 75mm Mle 1897의 우수성을 확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레미 대령은 독일군 포병의 3/4는 여전히 77mm 야포를 장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현저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105mm 유탄포의 도입에 긍정적이었던 포병위원회의 위원장 라모트(de Lamothe) 장군도 이 이상의 대구경 야포는 야전포병이 아닌 공성포병의 장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7)
물론 군단포병 이하에서 운용되는 야전포병과 군급에서 운용되는 공성포병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120mm 이상의 구경은 공성포로 보았으며 이것은 150mm 중유탄포를 군단급에 배치한 독일군과 큰 차이가 있는 것 이었습니다. 이미 프랑스는 전쟁 시작 전부터 독일군의 동급 제대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공성포병으로 분류하는 중포병 부대도 군단의 지휘하에 운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8)
프랑스는 독일군에 비해 중포의 개발과 배치에서 뒤처져 있었으며 야전 중유탄포의 개발은 1911년 7월 27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쟁부는 신형 야전유탄포의 시제품의 사격시험 날짜를 1911년 12월 31일로 잡았으나 무리라는 것이 판명되었고 국영조병창을 고려해 사격시험 날짜를 4개월 늦추는 방안이 고려되었습니다. 결국은 1912년 2월 6일에 총 여섯 종류의 야포에 대한 사격시험이 실시하도록 결정됩니다. 이 시험에 참여할 것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유탄포, 105mm 유탄포, 120mm 캐논, 그리고 포신을 교체하는 방식의 75mm 야포/ 120mm 유탄포 겸용 모델과 슈나이더(Schneider)사의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을 서두른 탓에 사격시험은 계속 차질을 빚었습니다. 먼저 1912년 1월에 제3국 국장 레미 대령은 국영조병창의 120mm 캐논은 1912년 3월, 120mm 유탄포는 1912년 10월이나 되어야 시험사격이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2월과 3월에 두 차례의 사격시험이 실시되었으며 이때는 105mm 유탄포와 106.7mm 캐논이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신형야포의 개발을 담당한 칼레 위원회는 시험결과 105mm 급은 탄의 위력이 약하기 때문에 추가로 120mm 또는 155mm 유탄포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신형 야포의 개발이 계속 늦어졌기 때문에 전쟁부장관과 개발 책임자인 라모트 장군간에는 꽤 험악한(?) 편지가 오고 갔다고 하는군요.9)
발칸전쟁은 프랑스군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만을 심어줬습니다. 프랑스군 관전무관은 불가리아군이 포병과 보병간의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비효율적이었던 반면 세르비아군은 시야를 잘 확보할 수 있도록 능선에 포병을 배치한 덕분에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엄폐한 포병의 사격은 비효율적이며 전통적인 교리에 따라 보병의 직접지원을 하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10) 이에 따라 대구경 야포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소구경 야포의 보조적인 수준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칼레 위원회는 1913년 1월 106.7mm 캐논의 구경을 105mm로 낮춘 야포를 채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라모트 장군은 105mm 야포는 야전군에서 운용할 수 있으며 보병의 공격을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경이라고 생각했으며 120mm 이상은 어디까지나 공성포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11)
결국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 프랑스군은 105mm 이상의 야포는 독일군 보다 훨씬 열세인 상태에 있었으며 전쟁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14년의 전투는 프랑스측에게 자신들의 포병 교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패는 잘못된 교리가 가장 큰 원인이었고 기술적인 문제점은 교리의 문제점에 비하면 작은 것 이었습니다. 만약 기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면 대전 전기간 동안 꽤나 난감한 풍경이 연출되었을 것 입니다.
<주>
1) Ripperger, Robert M. ‘The Development of the French Artillery for the Offensive, 1890~191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Oct, 1995), pp.600~601
2) Wawro, Geofrrey. The Franco-Prus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172~174
3) Menning, Bruce W.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Indiana University Press, 1992/2000, P.203, 258
4) Ripperger, ibid, pp.603~604
5) Brose, Eric Dorn.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Oxford University Press, pp.149~151
6) Hermann, David G.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 p.150
7) Ripperger, ibid, pp.607~608
8) Ripperger, ibid, pp.611~612
9) Hermann, ibid, p.151
10) Ripperger, ibid, p.614
11) Ripperger, ibid, p.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