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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3일 일요일

이탈리아 사나이들이 ★고☆자★ 되는 이야기


주말 내내 미세먼지로 고통을 받으니 쓸데없이 잡생각만 많아 지는군요. 이탈리아 사나이들이 아두와 전투에서 고자되는 이야기를 트위터에서 꺼낸 김에 그 이야기가 실린 책의 일부를 번역해 봅니다.

**********

아두와에 어둠이 깔리면서 에티오피아군은 추격을 멈췄다. 덕분에 도망가던 이탈리아군의 일부는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어둠과 함께 풍경의 색이 바뀌면서 또다른 공포가 시작되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비에 젖어 눅눅한 전장 곳곳에 불을 질렀다. 수증기와 연기, 불꽃, 화염이 들판을 덮으면서 다시 주변이 환해졌다. 그리고 풀밭 사이에서 마치 유령 같은 형상들이 연기와 함께 일어나 화염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사지를 질질 끌면서 움직였다. 이런 으스스한 형상들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광경은 마치 저주받았거나 구원받지 못한 망자들이 땅속에서 일어선 듯 했다. 이들은 부상을 당했거나 죽은 척 하며 누워있던 이탈리아 병사들이었다. 화염을 피해 일어난 병사들은 포로들을 상대로 한 마지막 수확의 희생물이 되었다.1)
아두와의 전장 곳곳에 벌거벗겨진 시체가 널려 있었다. 전사자들의 시체를 벗기는 일은 명예롭지는 않아도 그 기원은 오래된 관습이었다. 이동하는 군대는 많은 자산을 함께 가지고 다녔다. 전사자의 시체를 뒤져 현금이나 다른 귀중품을 얻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2) 전사자들에게서 벗겨낸 옷가지는 재활용하거나 다른 물품과 교환, 판매할 수 있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국가의 군대, 특히 에티오피아 군과 같이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적의 시체를 터는게 병사들의 유일한 수입원이기도 했다. 이게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적군의 시체 자체도 용맹을 입증할 상징이었다. 알베르토 보츠트(Alberto Woctt) 대위는 다보르미다(Dabormida) 장군이 지휘한 여단 예하 제3아프리카보병대대 소속이었다. 그는 밤이 되자 아두와의 하늘에 뜬 밝은 달이 퇴각하면서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를 비추었다고 회고했다. “사방에 훼손된 시체가 널려있었다. 밝은 달 빛 때문에 시체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창백했다.”3) 문제는 전투중에 아무 곳에나 입은 상처가 아닌 경우였다. 전사자나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환을 잘라낸 것이었다.
부사관이었던 지오반니 테도네(Giovanni Tedone)는 같은 부대 소속의 어떤 병사가 겪은 고통을 목격했다. 테도네는 그 병사의 이름을 몰랐지만 죽어가던 그 병사가 그와 같은 베르사글리에리 부대 소속이라는 점은 알았다. 군복을 보고 알았던 건 아니다. 그 병사는 옷이 모조리 벗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테도네의 이름을 알고 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테도네는 그 병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다. 그는 가슴, 다리, , 그리고 머리를 기병도에 맞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부상병은 최소한 체면 치레를 하려고 사타구니를 손으로 가렸다. 거세를 당해 입은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이다. 테도네는 그 병사에게 고환만 잘렸고 음경은 무사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거세당한 병사의 상처 부위에 작은 조각이 하나 붙어있었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피에 젖지 않은 지방 덩어리로 추정된다.4) 이런 광경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던 병사들도 거세로 인한 출혈 때문에 죽게 됐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테도네는 이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거세를 해도 출혈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테도네는 가축 사육 기술을 예로 들어 거세에 대해 설명했다. “측면으로 두 번 칼집을 낸 다음 아래에서부터 위로 자르면 된다. 이정도면 충분하다.”
테도네는 포로가 되어 에티오피아군의 진영으로 끌려가 거세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도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그의 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에티오피아 병사들은 테도네를 완전히 벌거벗겼는데, 그가 머리에 쓴 베르사글리에리 부대의 검은 깃털이 달린 헬멧은 예외였다. 테도네는 모욕감을 느꼈다. 머리 부분만 빼고 털이 뽑힌 수탉의 꼴 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 옆에서는 에티오피아군 병사 두 명이 피투성이 자켓을 포함한 테도네의 물건을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테도네는 같은 부대의 병사들인 티발디(Tibaldi)와 스포르티글리오네(Sportiglione)가 벌거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쇠약해진 상태로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누워있는걸 발견했다. 두 사람은 테도네를 보더니 자신들도 같은 꼴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에티오피아놈들이 우리도 거세하려고 한다!”5)
아두와 전투가 벌어지기 겨우 몇 달 전 에티오피아에 배치된 루이지 고즈(Luigi Goj)는 오로모 기병대에 항복해 포로가 됐다. 그는 에티오피아군 진영으로 가던 중 흑인과 백인들의 시체 무더기 속에서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물 좀 주세요.” 고즈는 물을 달라고 한 사람이 이탈리아 군인이었고 심각한 상처를 입고 끔찍하게도 거세까지 당한것을 보았다.6)

유럽인들이 에티오피아와 처음 접촉한 이래로 전사자와 부상자의 고환을 자르는 행동은 악명을 떨쳤다. 거세는 노예 무역과 함께 아비시니아인의 야만성을 보여주면서 유럽인이 문명화의 사명을 띄고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 하는 사례로 이용됐다.
유럽인들은 에티어피아와 접촉하면서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 적군의 고환을 자르는 관습을 철폐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놓았다. 1855년 테우드로스(Tewodros)가 즉위하자 영국 영사 월터 플로덴(Walter Plowden)은 에티오피아의 새 국왕이 이 두가지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본국에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드리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 테우드로스는 카사이 공(Dejajmatch Kasai)을 무찌르고 오오베아이 공(Dejajmatch Oobeay)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강력한 경쟁자들을 무찌르고, 살라마 주교(Aboona Salama)와 에티오피아의 모든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화려한 대관식을 열고 에티오피아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플로덴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화려한 문체로 이렇게 주장했다. 테우드로스는 노예 무역 폐지와 전사한 적의 시체를 야만적으로 훼손하는 두가지 관습을 폐지한다는 두가지의 위업을 이룩했습니다.”7) 플로덴의 생각은 아주 낙관적이었다는게 드러났다. 달리 말하면, 유럽인들은 테우드로스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건 파악했지만 그의 권한에 한계가 있다는걸 몰랐다. 칙령을 내리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칙령을 실제로 이행하는건 훨씬 어려운 문제였다. 테우드로스는 물론 요하네스, 그리고 메넬리크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노예무역과 거세 관습은 지속됐다.
거세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8) 쉽게 대답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거세하는 관습은 전시에만 행해진 것도 아니었다. 에티오피아의 형법을 보면 구금하거나 징역에 처하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보상, 또는 상징적인 보상을 해야 했다. 예를들어 가족 중에 한 명이 살해를 당한 경우에는 살인자에 사형을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족들이 구금을 요구할 경우에는 암바스(Ambas)라고 부르는 높은 언덕에 구름을 했다. 암바스는 경사가 급하고 등반이 매우 어려워 감금 장소로는 완벽한 지형이었다. 이곳에 가려면 매우 위험한 좁은 길을 따라 오르거나 정상에서 밑으로 떨어트린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다. 어거스투스 와일드(Augustus Wylde)의 기록에 따르면 간수직은 거세된 남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간수를 하려면 거세를 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평생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9)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다른 논리가 있었다. 남성성을 인정받으려면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 했다. 에티오피아 남성들이 강한 전사이자 적을 잘 죽이는 인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관습이 머리카락을 땋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에티오피아인에 우호적이었던 언론인 어거스투스 와일드는 아두와 전투가 끝난 뒤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아살라피 하일루(Asalafie Hailou)를 만난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하일루는 에티오피아인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하일루의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땋은 뒤 머리 뒤쪽으로 넘겨 한 가닥으로 묶여있었다. 그의 동포들을 죽인 아비시니아인들의 머리 모양과도 같았다.”10)
거세를 하는 행위도 승리의 상징의 일종이었다. 가장 기본적으로 전사자의 고환을 자르는 것은 전리품을 얻는 동시에 용맹을 증명하는 행위였다.11) 단순히 머리카락을 땋은 것 만으로는 그의 용기를 증명할 수 없었다. 적의 신체 일부가 있으면 증거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적군의 고환을 자르는 것은 적의 귀를 자르거나 머릿가죽을 벗기는 일, 또는 손가락을 자르는 것과 같다. 적의 시체에서 일부분을 잘라내는 행동은 적의 신체를 완전히 정복했음을 생생하게 입증해 주는 증거가 된다. 적을 죽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고환을 자르는 것은 귀나 손가락을 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환은 남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다.12) 그러므로 고환을 자르는 것은 단순히 전리품 이상의 보다 직접적인 행위였다. 고환을 자르는 행동은 죽은 적의 신체를 완전히 굴복시켰음을 상징했다. 또한 패배한 적군이 용맹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패배하면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전사로서의 자질도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거세는 전투에서 남성성을 입증하지 못한 자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13)
거세하는 것은 미래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단순히 발기를 하고 사정만을 하는데는 음낭과 고환이 핵심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다. 거세를 하면 성인 남성을 불임으로 만들 수 있다. 거세당한 적은 살아남는다 해도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다. 즉 적을 거세하는 행동은 거세당한 적군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인 셈이다.


주석
1) Chris Prouty, Empress Taytu and Menelik II: Ethiopia, 1883~1910(London: Ravens, 1986), 158.
2) 프랑스군은 1798~1801년 사이의 이집트 원정에서 전사한 맘루크들의 시체에서 약탈을 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맘루크들이 금화를 비롯한 귀중품을 옷 속에 지니고 다닌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aul Strathern, Napoleon in Egypt(New York: Bantam, 2007), 305를 참고하라.
3) Gian Carlo Stella, Battaglia di Adua, 1 marzo 1896:  memorie vive ed inedite di un ufficiale superstite(Parma: E. Albertelli, 1991), 91.
4) Giovanni Tedone, Angerà: I ricordi di un prigioniero di Menelik(Milan: Giordano, 1964), 28.
5) Tedone, Angerà, 25. 테도네는 이탈리아인 포로가 고환을 담아놓은 담요를 나르는 걸 거부했다가 처형당한 일도 목격했다. Angerà, 27.
6) Luigi Goj, Adua e prigionia fra I galla(Millan: Scuola Tip, Salesianan, 1901), 28. 프란체스코 프리스니아(Francesco Frisinia)Memorie di un prigioniero d’Africa(Reggio Calabria: P. Lombardi, 1899), 29에서 비슷한 광경을 이야기 했다.
7) Consul Plowden to the Earl of Clarendon, Massawa, 3 March 1855. In Parliamentary Papers, Correspondence Respecting Abyssinia, 1846~1868(London: Harrison and Sons, 1868), 146. Sven Rubenson, King of Kings: Tewodros of Ethiopia(Addis Ababa: Haile Selassie I University, 1966), esp.55도 참고하라.
8) 서아프리카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 관한 해석 중 하나로는 Florence Bernault, “Body, Power and Sacrifice in Equatorial Africa,” Journal of African History 47(2006): 207~239를 참고하라.
9) Augustus Blandy Wylde, Modern Abyssinia(London: Methuen, 1901), 310.
10) Augustus Blandy Wylde, “An Unofficial Mission to Abyssinia,” Manchester Guardian, 24 May 1897, 5.
11) 유럽인들도 전사한 적의 머리를 자르는 것 처럼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비슷했다. Edgar V. Winans, “The Head of the King: Museums and the Path to Resistance,” Comparative Studies in Society and History 36(1994): 221~241 그리고 David Thomas, Skull Wars: Kennewick Man, Archaeology and the Battle for Native American Identity(New York: Basic Books, 2000)을 참고하라.
12) “Lorsqu’on demande au Abyssiniens pourquoi ils coupent ce member plutôt qu’un autre, ils répondent sans hésiter que c’est là seilement ce qui caractérise ;’homme.” Edmond Combes and Maurice Tamisier, Voyage en Abyssinie, dans le pays des Galla, de Choa et d’Ifat: précédé d’une excursion dans l’Arabie-heureus, et accompagné d’une carte de ces diverses contrés(Paris: L. Desessart, 1838), 1:221~222를 참고하라.
13) 니콜라 다마토(Nicola d’Amato)는 이 행위를 이렇게 해석했다. Da Adua ad Addis-Abeba ricordi d’un prigioniero(Salerno: A. Volpe, 1898), 6.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pp.221~224.

2016년 8월 31일 수요일

★기적의☆ 인류학(?!)


제국주의 시대의 절정기에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과 러일전쟁은 백인의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먼저 있었던 이탈리아-이디오피아 전쟁은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무렵 유색인종이 처음으로 유럽의 '백인' 군대를 격파했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백인 군대가 '검둥이'들에게 박살났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두와 전투의 소식이 미국 전역을 뒤흔들기 하루 전날, 애틀랜타 컨스티튜션(Atlanta Constitution)이라는 신문은 아프리카로의 귀환 운동을 전개하던 300명의 흑인이 3월 1일 조지아주의 사바나를 출발했다는 소식을 조롱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아프리카는 모두 유럽인에 의해 분할될 것이기에 아프리카인들은 주권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남부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3월 1일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주장을 전개하는게 이치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3월 1일 이후로는 그러한 신념이 흔들리게 되었다.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논조는 짐 크로우(Jim Crow) 법안과 유럽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던 당대의 기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미국 대법원은 짐 크로우 법안의 기저에 깔린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주장이 미국 헌법에 합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애틀란타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이른바 '대서양을 아우르는 지배권'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아프리카의 미래는 유럽의 통치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또한 유럽계 미국인의 통치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남건 아프리카로 돌아가건 간에 유럽인에 의해 지배받는 암울한 미래만 있을 뿐이라고 전망했다. 즉 짐 크로우 법안은 제국주의의 절정기에 팽배한 인종적 우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짐 크로우 법안의 친척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두와 전투는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의 기사에서 아프리카인의 열등성을 주장할 수 있도록 했던 신념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 최소한 전투의 소식이 알려진 직후에는 말이다. 3월 4일의 머릿기사는 이디오피아인들이 3천명의 이탈리아군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 지휘관 오레스테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가 패배의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오보도 실렸다. 이후에 실린 기사들도 아프리카에 대한 엄청난 무지와 심리적인 충격 때문에 오류 투성이었다. "이탈리아의 불운"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이디오피아가 아프리카 남부에 있다고 썼으며, 이탈리아가 실패한 것이 이디오피아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은 이디오피아인들이 검둥이가 맞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비시니아인에 대한 의문"이라는 기사에서는 아프리카인의 인종적 특성에 대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이디오피아인들의 특성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라는 제언을 했다. 이 기사는 이디오피아인에게서는 "호텐토트 인종에게서 나타나는 평발과 펑퍼짐한 코"를 찾아볼 수 없으므로 콩고에 사는 아프리카인들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실 이디오피아인들은 완벽한 흑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시각은 애틀랜타 컨스티튜션에 실린 삽화들에도 반영됐다. 이 신문에 처음 실린 메넬리크의 초상화는 그를 1895년에 즉위한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 2세와 놀라우리 만치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이디오피아인들이 거둔 승리의 규모가 자세히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남부의 언론들만 메넬리크가 백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뉴욕 월드(New York World)지도 기사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으며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도 다음날 뉴욕 월드의 기사를 전제했다. 미국 남부와 중서부, 그리고 대서양 지역의 주요 언론들은 모두 이디오피아인이 백인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뉴욕 월드는 "아비시니아인의 대부분은 코카서스 인종이다"라고 쓰고 여기에 덧붙여 "이디오피아인들은 외모가 수려하고 멋지다"고 주장했다.
Raymond Jonas, The Battle of Adwa: African Victory in the Age of Empire, (2011, Harvard University Press), pp.268~269.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

그럴싸한 변명

어떤 논문을 읽다가 웃기는 구절이 있어서...

패배한 이탈리아 군대의 장군들은 놀라울 정도로 패배의 원인을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라 마르모라(Alfonso Ferrero La Màrmora)도 1866년(쿠스토자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 패배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바라티에리(Oreste Baratieri)도 아도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이탈리아인 부대를 탓했다. 그리고 카도르나(Luigi Cadorna)는 1917년 카포레토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렇게 변명했다.

“나는 쿠스토자와 아두와에서 패배했었던 군대를 지휘했을 뿐이다.”

John Gooch, “Italian Military Competence”,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5-2(1982), pp.262-263

비겁한 변명이지만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