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병영생활일망정 그런대로 익숙해 가던 1951년 5월 중순, 그 곳(9사단 보충대)에 배치된 지 스무 날 쯤 되었을 때다. 어느 날 새벽 천막 밖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어 연병장에 뛰쳐나온 우리들 신병 셋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장판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표현이리라. 사단 앞의 연병장은 말할 것도 없고, 냇가 건너편의 골짜기까지 군인들로 꽉 찬 것이 아닌가.
내가 속했던 사단만의 병력은 분명 아니었다. 당시는 개개인의 부대인식표가 없어서 다른 사단의 병력이 섞인 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는 없었으나, 어림짐작해 보건대 1개 사단 병력은 훨씬 넘는 인원이었다. 그것도 어제까지의 활기찼던 군인이 아니고 지칠 대로 지친 참담한 몰골의 패잔병들이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작대기 하나 없는 이등병 주제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어 잔뜩 주눅 든 채 취사반에서 밥을 타다가 배식하면서 귀동냥한 결과, 인접부대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그 틈으로 적군이 몰려들어 포위되었다는 것 이었다.(뒤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의 포위가 유명한 현리전투라고 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각자 배낭을 챙긴 뒤,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여 중대장의 주의사항을 듣고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한쪽엔 쌀, 한쪽엔 ‘씨레이션’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포위망 돌파에 며칠이 걸릴지 모르니까 각자 지닐 만큼의 식량을 휴대하라는 것 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들 이등병은 한쪽 얻어먹기가 그렇게도 어려웠던 그 씨레이션을 마음대로 가져가라니 꿈같은 얘기였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것 이어서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지만, 고참들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별일이 아닌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고참들은 이런 포위는 항용 있어온 일이라는 듯 2~3일분 식량만 챙겼는데, 그 이상은 짐스럽기만 할 뿐 실제로는 별 쓸모가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우리 셋은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것이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배낭속을 몽땅 비우고 7일분 씨레이션을 짊어졌다.
(중략)
그 동안 부대 앞의 냇가를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는 수많은 트럭들의 질주행렬이 이어졌으나, 출발한 지 1시간도 못 되어 요란한 기총소리가 났고, 이어 피격당한 흔적이 완연한 트럭들이 다시 돌아왔다. 말은 질주행렬이라고 했으나 실제로 차량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구간은 사단본부 앞 연병장 정도나 될까, 그 밖에는 소달구지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임간(林間) 도로였기 때문에 남쪽 길목만 막으면 우리 사단 뿐만 아니라 같은 골짜기에 있던 다른 사단까지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독안의 쥐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쪽은 사단 본부가 진주하면서 길이 만들어졌지만, 북쪽은 그것조차도 없는 오지였다. 지금은 국도가 아닌 웬만한 지방도로도 포장이 되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지만, 당시 강원도 산간의 도로는 포장은 커녕 간신히 일방통행이나 가능할까, 마음대로 오고 갈 수도 없는 길이었으니 희생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부대 앞의 연병장엔 동서남북 사방을 향해서 105밀리 곡사포를 비롯한 박격포 등을 배치하여 사격을 개시하였고, 사격이 끝나자 포들을 분해하여 땅속에 묻었다. 동서남북 사방이 적군이라는 말없는 설명인 셈이었다. 그 많은 씨레이션과 쌀더미, 퇴로가 막힌 트럭들엔 휘발유가 뿌려졌고, 우리들은 불길을 뒤로 하고 방향도 모른 채 고참병의 뒤를 따라 산을 타기 시작했다.
정양섭, 『어이없는 참전기 : 어느 북파공작원의 회상』(지식산업사, 2004), 76~79쪽
그야말로 “자다가 일어나 보니 현리”라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아직 패주의 초반이기 때문에 그냥 고참병들의 분위기에 따라 별로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전투가 계속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이 포위망 속의 1주일은 방향은 둘째로 치고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앞사람만 따라다녀야 했던 1주일 이었다. 지휘계통이 무너진 후퇴, 그것도 포위망 속의 후퇴는 후퇴가 아니라 차라리 방황이라고 해야 옳았다.
웬놈의 피리소리는 그렇게도 처량하던지, 다른 군인들은 그 피리소리가 공격 시에도 울렸다고 했으나 내가 듣기엔 밤중, 그것도 유독 달밤에만 울린 것 같았다. 처음엔 처량하기만 했으나 날이 가면서 피리소리만 나면 소름이 끼쳤다.
(중략)
어차피 지리멸렬되어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포위망 속이라면, 그럴수록 분산되어 3~4명 정도로 행동하는 것이 습격받을 기회도 적어서 더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심정은 흩어지면 꼭 일을 당할 것만 같아서 자꾸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무리가 커질수록 공격받을 가능성은 늘어나는데도 그런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공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사단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참모 등 서슬 퍼렇던 그 많은 고급 장교들은 모두 어디 갔는지 포위 첫날 부터 볼 수 없었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나마 눈에 띄던 위관급 장교들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대오를 이룬 후퇴로 지휘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앞서가는 사람은 앞선 대로, 뒤쳐지는 사람은 뒤쳐진 대로 뒤섞이다 보니 완전한 오합지졸이 되었다.
저 멀리 가뭇가뭇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무리가 적군인지 아군인지조차도 모른 채 각자 알아서 앞사람의 뒤만 따라갔다. 살 길을 찾아서가 아니고 그 밖에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어서, 막연하게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따라갔을 뿐이다.
그리고 기습을 받을수록 우리들의 몰골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갔다. 배낭은 말할 것도 없고 철모는 불편해서 벗어버렸다 해도 작업모조차 쓰지 못한 맨대가리가 있는가 하면,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는 그만두고 개인화기조차 제대로 갖춘 군인보다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점차 늘어났다. 나 자신도 세 번째로 당한 밤중의 기습에서 M1 소총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깜깜한 밤중이어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데다가, 넝쿨 때문에 총을 지닌 채로는 도저히 숲 속을 해쳐 나갈 수 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들은 말이 있어서 방아틀뭉치만은 빼내어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 총기를 그대로 버리는 것과는 달리 방아틀뭉치를 뽑으면 그 총은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부득이 버릴 때는 총기 대신 방아틀뭉치만은 지니고 돌아와야 처벌을 면한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그 방아틀뭉치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양섭, 위의 책 79~82쪽
포위된 상태가 길어지면서 점차 부대가 와해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특히 훈련과 전투경험,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한 한국군이었던 만큼 공황상태가 지속되면서 모든 지휘계통이 무너지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몇몇 부대는 상당한 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양섭의 회고에 따르면 현리 포위전 와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나는 석 달 가까이 방위군에서 고생한 끝에 입대한 것 이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무척 버거웠다. 때문에 늘 뒤쳐질 수 밖에 없어서 행렬의 뒤끝에서 빨리 오라는 고참들의 재촉을 받으며 따라가던 어느 날 이었다.하지만 이런 양호한 사례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포위가 계속되면서 포위망 내의 부대들은 그야말로 지리멸렬해 버립니다. 정양섭이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이야기는 부대 단위를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바로 옆의 동료 조차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날도 뒤쳐졌던 나를 뒤에서 쫓아온 1개 소대의 군인들이 앞지르면서 당장 내 눈앞에서 전투태세로 산개하고는 빨리 가라고 호통쳤다. 장교고 사병이고 모두가 쥐구멍만 찾는 판국에 자신들의 반격에 동참하라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가라고 소리치다니 도데체 그들이 무엇을 시도하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치 너희들같이 도망이나 다니는 패잔병들도 군인이냐는 투였다.
기관총이나 박격포 같은 공용화기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개인화기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군인이 적지 않은 판에 그들은 개인장비는 물론 60밀리 박격포까지 갖춘 완전한 전투부대였다. 마치 하늘에서 방금 공수된 특전사 병력 같은 모습으로, 모두가 도망가기 바쁜 상황에 추격해 오는 적군과 일전을 준비하는 그들이 내 눈에는 신기하기 조차 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짐작해볼 때, 그들도 연대나 대대 같은 상급 부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거나 설사 연락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미 작전체계가 무너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반격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기 보다는 소대 자체의 자의에 따른 반격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내가 속했던 사단의 경우 신설 사단이어서 그랬겠지만 하사(지금의 상병)면 분대장, 중사(하사)면 선임하사 급인데 견주어, 그들은 중사가 분대장 급으로 나 같은 이등병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최하가 하사 급이었다.
그들은 18연대라고 했다. 18연대면 사변 전 옹진전투에서부터 용명을 날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같은 한국군이라도 ○○연대는 아무리 공격해 보아야 고지점령은 커녕 당하기만 한다고 해서 ‘○○연대 공격하나마나’. ××연대의 경우 아무리 보급품을 줘 보아야 모두 적군의 손에 빼앗기기 때문에 ‘××연대 보급 주나마나’였는데 반해, 18연대는 아무리 포위당해도 모두 빠져나온다고 해서 ‘18연대 포위당하나마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다분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나 ○○연대나 ××연대에 견주면 18연대야 말로 전투부대였다.
정양섭, 위의 책 86~88쪽
어떤 때는 용감한 고참병이 몇몇 사병과 함께 기습하는 적군을 반격하여 물리치고 보니, 불과 10여명도 안 되는 분대 단위의 기습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할 때마다 희생자는 늘어났고 앞뒤로 흩어졌던 병사들은 다시 무리를 이루게 되어 또 습격을 받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내 경우는 그나마 7일분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아쉬운대로 기아를 면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지니지 못했던 군인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포위된 지 사흘만에 만난 여군의 몰골은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목불인견 그것이었다. 말은 여군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군인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여자였다. 부대인식표는 아예 없던 시절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계급장은 커녕 군인다운 징표가 전혀 없는 달랑 군복뿐인 여자였다. 당시의 전투사단 편제에 여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신분이 수상한 여자였다.
남자들은 각자 배낭 속에 적으나마 비상식량을 지녔고 또 작업복 위에 ‘판초’를 갖추어 웬만한 안개비쯤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여군은 먹을 것은 둘째로, 우의조차 갖추지 않은 입은 옷 그대로의 단벌인 채로 추위에 떨고 기아에 시달려 지나가는 길섶에 누워서 먹을 것을 구걸하고 있어서, 그 모습을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장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나 자신도 끝장이었다. 모두가 굶주린 판국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씨레이션은 바닥이 날 것이 뻔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배가 고프면 숲 속에 혼자 쳐져서 배낭 속의 씨레이션을 꺼내서 작업복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그것마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뒤쳐져 우물우물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내 수통속의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조금만 마시고 나면 허리에 찬 수통에선 출렁출렁 물소리가 났고, 그렇게 되면 한 모금 달라는 전우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을 것 이어서, 위급할 때를 생각해서 아예 물통이 빈 것 처럼 행세해야 했다.
그 래서 운 좋게 물통을 채울 수 있는 샘물을 만날때 까지는 마음대로 마실 수도 없었다. 골짜기로 내려가면 냇물이 있어 물통을 채울 수는 있었으나 당장 어디서 뛰쳐나올지 모를 적군이 무서웠다. 사실 그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졌다가 낙오될지도 모르는 것이 더 겁이 났다.
정양섭, 위의 책 90~91쪽
이 책의 저자인 정양섭은 원래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현역으로 빠진 경우인데 하필 처음으로 경험한 전투가 현리전투이다 보니 당시의 한국군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18연대와 같이 긍정적인 사례도 있긴 합니다만 현리전투 자체가 작은 미담으로 덮기엔 너무나 큰 참사지요. 정양섭은 장교들의 부정부패, 고참들의 폭력, 형편 없는 군기문제 등 삼류군대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데 읽을 때 마다 씁슬하기 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