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외교라는 요소는 독일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것 보다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당장 첫 번째
동맹국으로 전쟁에 뛰어든 이탈리아 부터가 시작부터 독일의 지원에 기대는 형국이었으니 말입니다. 이탈리아가 가진 전력 중 독일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을 해군력 조차 독일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소모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941년 2월
독일에게 자국 해군이 최소한 25만톤의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작전을 지속하기가 어렵다고 통보했습니다. 1940년 기준으로 독일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수입하던 석유의 양이 150만톤, 독일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인조석유가 400만톤 정도였으니 이탈리아 해군만
단독으로 25만톤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양이었습니다.1)
부족한 전략 물자를 동맹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탈리아를 필두로 한 독일의
동맹국들이 세계 일류급 병기를 제작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점 입니다.(이탈리아 해군은 제외하고) 특히 육군과 공군 장비에
있어서 그런 문제가 두드러 졌지요. 그랬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동맹국들은 독일에 근대적인 장비를 공여해 줄 것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독일의 공업 생산능력은 자국군대의 수요를 충족하는데도 버거운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동맹국들을 근대적인 장비로 무장시키는데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의 대표적인 사례라면 이탈리아 공군에 대한 급강하 폭격기 지원을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탈리아 공군도 급강하 폭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쓸만한 기종을 개발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공군의 기대를 모은 SM.85는 급강하 폭격기로서 실패작이었고 결국 독일의 Ju 87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공군은 1940년 6월 독일 정부에 50대의 Ju 87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방군총사령부OKW는
독일 공군에 우선적으로 공급되어야 할 기종을 수출하는데 반대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괴링이 수출을 승인함으로써 이탈리아
공군은 Ju 87을 장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측은 먼저 7월에 15대, 8월에 15대, 9월에 나머지 분량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2)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 제 96 독립 급강하폭격기 중대96º Gruppo Autonomo Bobardieri a Tuffo에 인도된 첫 번째 Ju 87은 공장에서 생산된 신품이 아니라 독일 공군이 사용하던 중고품 이었습니다.3) 인도 자체도 당초 약속 보다 느리게 이루어져 이탈리아 공군의 두 번째 급강하폭격기 부대인 97 급강하폭격기 중대는 11월 11일에 편성되었습니다.4)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괴링의 판단은 크게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독일 공군에 주어져야 할 장비가 다른 곳으로 새나가는 것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본토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독일공군, 특히 중형폭격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손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습니다. 독일 공군은 1940년 5월 부터 9월 까지 총 210대의 Ju 87을 잃었는데 이것은
1940년 5월 4일을 기준 으로 한 급강하폭격기 대수의 50%에 달하는 것 이었습니다.5)
독일이 불과 50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지원하는 것 조차 버거워 했던 것에 비해 비슷한 시기 미국은 전시 동원체제에 돌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수백대의 항공기를 생산해서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공군은 1940년 5월 1일
기준으로 커티스 호크75 306대를 포함해 440대의 미국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불과 한 달 뒤에는 이것이 544대에 달하게
됩니다.6)
전쟁이 확대되어 가면서 이탈리아의 원조 요청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탈리아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 국방군총사령부에 3,000대(!)의 트럭을 알바니아에 주둔한 이탈리아군에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7)
그 무렵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프랑스와 영국제 노획차량 까지 긁어모아 배치하고 있던 독일군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이 요구는 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일군은 당연히 이 엄청난 요청을 거부합니다. 독일측은 트럭을 원조하지
못하는 대신(그리고 그 당시까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그리스를 고려하여) 이탈리아군의 수송 지원을 위해 Ju 52를 장비한
제1 특수임무 폭격비행단 3대대III./Kampfgeschwader z.b.V.를
파견합니다. 이 대대는 1940년 12월 10일 부터 1941년 2월 5일 까지 이탈리아군 29,000명과 물자 2,700톤을
알바니아로 수송했고 부상병 7,500명과 그 밖의 병력 2,900명을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로 후송했습니다.8)
물론 이러한 지원이 이탈리아군에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군 자체의 능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장비가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투력의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것은 이후 북아프리카 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1940년 프랑스의 패배 이후 독일 진영으로 합류한 루마니아는 이탈리아 보다 더 상황이 안좋은 곳이었습니다. 얼마안가 닥치게 될
바르바로사 작전은 기계화 부대가 중심이 된 대규모 지상전 위주였는데 루마니아는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는 1935년 까지도 1919년에 구입한 르노FT-17을 주력전차로 사용하고 있었고 이것들이 완전히 구식화
되고 제대로 가동도 되지 않게 된 1935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대적인 전차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는 기갑전력의
확충을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126대의 LT-35 전차와 417대의 CKD AH IV 소형전차Tankette, 프랑스에는 200대의 르노 R-35 전차를 주문했습니다. 이 중에서 루마니아가 주문한 대로 양도된 것은 LT-35 뿐이었고 CKD AH IV소형전차는 35대, 르노 R-35는 40대만이 인도되었을 뿐 입니다.9)
루마니아는 프랑스가 패배한 뒤 독일의 편으로 갈아타면서 독일이 자국의 부실한 기갑전력을 보충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루마니아 주재 독일육군사절단Deutsches Heeresmission in Rümanien, 약칭 DHM은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과 군사원조 요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에 대한 훈련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두고
루마니아에 독일군이 대규모로 증파되면서 훈련에 투입할 인력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의 제5, 6, 13,
18, 20 보병사단에 독일식의 소부대 전술 교육을 위한 훈련소가 설치되었고 별도로 독일육군사절단 본부에 의해 독일식의 전쟁대학Kriegsakademie과 유사한 고급장교 교육과정이 설치되었습니다.10)
하지만 장비 지원은 거의 성과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독일의 3호전차와 같은 현대적인 전차를 원했지만 독일군도 전차가 부족한
실정이어서 결국 프랑스와 폴란드에서 노획한 30여대 정도의 R-35전차가 양도되는데 그칩니다. 이탈리아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괴링과 달리 육군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는 루마니아 정부의 독일제 전차 수출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11) 히틀러는 대 프랑스전이 종결된 직후인 1940년 7월 9일 월간 전차생산량을 380대로 높일 것을 지시했지만 독일의 공업력으로는
단시일 내에 이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1940년 9월 28일 명령에서 전차생산량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게 됩니다. 이에 따르면 1940년 9월 부터 1941년 4월 까지 전차 1,490대, 즉 월간 213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12) 이런 상황에서 동맹국에게 까지 최신형 전차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루마니아 공군도 비슷한 실정이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소수의 Bf109와 He111을 판매하긴 했으나 독일제 항공기의
면허생산은 거부했습니다. 현대적인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수입한 항공기들로 공군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루마니아
공군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폴란드, 루마니아제 등 잡다한 항공기를 운용해야 했습니다.13)
1941년에는 독일의 동맹군들이 제한적인 작전에만 참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장비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용감히 싸우긴 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오데사를 둘러싼 전투에서는 소련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할
때 까지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데사 공격을 담당한 루마니아 제4군은 오데사가 함락 될 때 까지 장교 4,161명을
포함해 11만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습니다.14)
특히 루마니아의 유일한 기계화부대인 제1기갑사단은 오데사 전투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LT-35를
장비한 1기갑사단의 1전차연대는 오데사의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서 글자 그대로 소모되었습니다. 손실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독일 뿐이었는데 독일의 전차 생산능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15)
헝가리가 파병한 부대 중 유일하게 이렇다 할 기갑전력을 갖춘 쾌속군단(1, 2차량화여단과 2기병여단으로 편성)은 루마니아군의
1기갑사단 보다도 전투력이 더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헝가리의 쾌속군단은 이탈리아제 CV35 65대와 스웨덴의 L60 전차를
면허생산한 톨디 전차 95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루마니아가 보유한 LT-35나 R-35와 마찬가지로 동부전선에
투입하기에는 심각하게 부족한 장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쾌속군단은 루마니아군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우크라이나
깊숙히 진격, 1941년 10월 말에는 이쥼Ізюм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을 따라 진격하면서 우마니Умань
전투 등 일련의 격전을 치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헝가리 쾌속군단은 1941년 11월 재편성을 위해
전선에서 이탈할 때 까지 전차의 90%를 상실했고 차량 1200여대와 병력 26,000명 중 8,000명을 잃었습니다.16)
이탈리아가 파견한 소규모 원정군, “이탈리아 러시아 원정군단Corpo di Spedizione Italiano in Russia, 약자 CSIR”
은 1941~1942년 전역을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군단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한 기갑사단을 제외한다면
이탈리아군에서 가장 잘 장비된 사단들로 편성되었지만 루마니아나 헝가리군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이
군단에 배속된 3개 사단 중 차량화사단Divisioni autotrasportabile이었던 파수비오Pasubio사단과 토리노Torino사단은 완전한 차량화 사단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문에 군단장 메세Giovanni Messe는 작전 중 종종 두 사단 중 한 사단에 차량을 집중시켜 차량화시키고 나머지 사단은 일반 보병사단으로 운용하기도 했습니다.17) 그리고 쾌속사단Divisione celer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PADA(Principe Amedeo d’Aosta)사단은 2개 기병연대로 편성된 기병사단으로 역시 기계화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습니다. 이탈리아 원정군단은 기동수단으로 5,500대의 차량과 1,550대의 오토바이, 4,600마리의
말/노새를 보유했는데 이러한 장비 내역은 반쪽짜리 기계화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기갑전력은 PADA사단에 배속된 60대의
L3/33(CV33)이 고작이었습니다.18)
독일의 1942년 전역은 이렇게 누적된 문제가 재앙으로 전이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동맹국들은 1942년 전역에 더욱
더 대규모로 참전합니다. 헝가리와 이탈리아는 원정군의 규모를 1개 야전군으로 증강했고 루마니아군은 1941년과 달리 독일군을
따라 남부 러시아 깊숙히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에게 75mm Pak 40과 같은 일선급
대전차포를 요청했습니다. 또한 루마니아와 헝가리는 1941년 전역에서 크게 소모된 기갑전력을 복구하는데도 독일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역시 1941년 전역의 피해를 채 복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독일은 동부전선의 동맹국들에게 Pak 40 대신 노획한 프랑스제 75mm포를 개조한 Pak 97/38이나
50mm Pak 38, 37mm Pak 36을 제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강력한 75mm Pak 97/38은
수량이 충분치 못해 이탈리아 제8군의 경우 1942년 5월 1일 기준으로 5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습니다. 이탈리아군 대전차 전력의
주력은 구식인 47mm 대전차포 297문이었고 이것은 T-34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여기에 포병연대에서 야포로 사용하는
75mm포(Cannone da 75/32 Modello 37) 201문이 유사시 대전차전을 수행하는 정도였습니다.19) 루마니아군의 사정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 1942년 전역이 시작될 무렵에는 37mm Pak 36이나 47mm 대전차포가 주력이었습니다.20) 그리고 이탈리아군 보다도 더 늦은 1942년 10월이 되어서야 Pak 97/38이 소량 보급되는데 그쳤습니다.
Pak 97/38은 1942년 11월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독일의 동맹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 였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소련군의 동계반격 당시 보병사단 당 6문 정도의 Pak 97/38를 보유하고 있었고 여전히 대부분의 대전차 전력을
37mm나 47mm 대전차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대전차 지뢰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빴습니다.21) 루마니아군 기병사단의 경우는 상황이 더 나빠서 5기병사단이 75mm 대전차포 4문을 보유하는데 그쳤고, 루마니아군 8기병사단은 단 한문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습니다.22) 이탈리아 제8군도 그다지 나을 것은 없어서 사단 당 4문에서 16문 정도의 Pak 97/38을 보유하는데 그치고 있었습니다.23) 그리고 Pak 97/38 조차도 T-34에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하자 루마니아군과 이탈리아군은 급격히 붕되었습니다.24) 독일은 동맹국들에게 겨우 겨우 소량의 75mm 대전차포를 지원했지만 충분한 대전차용 탄약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기갑전력에 있어서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은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에 구식화된 35(t) 전차나
38(t) 전차를 소량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3호전차나 4호전차와 같은 일선급 전차의 지원은 매우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헝가리군은 1942년 하계공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1942년 5월 까지 불과 22대의 4호전차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헝가리는
독일의 지원이 너무 소규모 였기 때문에 독일이 루마니아군에 신형 장비를 우선적으로 지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25)
하지만 전차 지원은 헝가리군이 루마니아군 보다 나았습니다. 루마니아군은 보충용으로 LT-35의 독일판인 35(t) 전차를
지원받다가 1942년 9월이 되어서야 겨우 75mm포 탑재 3호전차와 4호전차(50mm 장포신형 3호전차로 기술한 자료도 있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을 때 루마니아군 제1기갑사단의 주력은 87대의 LT-35, 35(t)
전차였고 3호전차(와 4호전차)는 21대에 불과했습니다.26)
공군에 대한 지원도 그다지 나을것이 없었습니다. 독일이 1942년 초 부터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한 항공기는 글자그대로 한줌에
불과한 수준으로 Bf 109 E-7 15대(1월~3월), He 111 H-6 10대(1~3월), Do 17M 10대(4~5월),
Ju 52/3m 18대, He 114 10대(4월), Fi 156 14대(4월) 정도였습니다.27)
헝가리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헝가리 또한 산업기반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1938년 부터 항공산업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켰고 1941년 6월 6일에는 독일과 항공기 공동생산을 위한 협약에 조인해 Bf 109, Me 210 그리고 DB
605엔진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헝가리의 항공산업은 독일의 부족한 항공기 생산능력을 보완해 주는 존재였던 것 입니다.
이 협약은 독일이 부품과 기술을 제공하는 대신 헝가리가 생산하는 항공기와 엔진을 일정 비율로 독일공군에 납품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Bf 109는 독일과 헝가리의 비율이 2:1, Me 210은 1:1, DB 605엔진은 2:1였습니다.28) 물론 헝가리의 부족한 산업력으로 현대적인 공군을 단시간 내에 육성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긴 했습니다만 헝가리의 노동력이 독일의 부족한 산업력을 보완하는데 사용된 셈입니다.
1943년 이후 독일의 군수물자 생산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동맹국에 대한 장비 지원도 다소 증가하게 됩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50대의 38(t) 전차외에 4호전차 31대와 돌격포 4대를 인도받았는데 1944년에는 4호전차 100대와 돌격포
114대를 인도받았습니다. 헝가리는 1944년에 4호전차 62대, 돌격포 40대, 헤처 75대, 판터 5대, 티거 3대를
인도받았습니다. 이밖에 다른 동맹국들도 예전 보다는 많은 전차를 지원받았습니다. 핀란드는 1943년 부터 1944년까지 4호전차
15대와 돌격포 59대를 받았고, 불가리아는 1943년에 38(t) 전차 10대와 3호전차 10대, 4호전차 46대, 돌격포
25대를 받았습니다. 슬로바키아는 1943년에 2호전차 16대, 38(t) 전차 37대, 3호전차 7대, 마더II 자주포 18대를
받았습니다.
항공기 지원도 비슷하게 증가해서 독일은1943년 부터 루마니아 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Bf 109G, Ju 88, Ju 87,
Hs 129등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942년과 비교하면 1943년 이후의 항공기 지원은 다소 증가했습니다. Bf 109의 경우
1944년 7월에 60대, 8월에 40대가 루마니아 공군에 인도되었고 9월 이후로는 월간 20~25대를 인도할 예정이었습니다.29) 또한 뒤늦게나마 루마니아의 Bf 109 면허생산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공군의 지속적인 손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구식화된 He 111이나 Ju 86도 함께 지원되는 등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헝가리의 경우 1942년 부터 1944년까지 Me 210 270(272)대와 Bf 109 471(488)대를 생산했습니다.30) 하지만 루마니아는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는 1943년에 Fi 156 3대, 1944년에 Fi 156 7대와 Bf 109 6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습니다.31)
독일의 지원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입니다. 미국은 1942년 이후 동맹국들이 여러개의 기갑사단을
편성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장비를 원조했습니다. 독일이 동맹국들에게 수십대의 전차를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2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전차를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에게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항공기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이
불과 수십대의 Ju 87을 인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1940년만 하더라도 미국은 수백대의 항공기를 외국 군대에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예로 들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납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습니다. 반면 독일은
자국의 차량 수요도 채울 수 없었으며 독일의 동맹국들은 그보다 더 심각한 기동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최신 장비들을 대량으로 공여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그럴 수가 없어 노획장비나 구식화된 장비들을 소규모로
제공하는데 그쳤습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의 조병창”이었던 반면 독일은 동맹국들의 자원까지 쥐어짜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 않는 동맹국들의 산업력조차 적절하게 동원하지 못했습니다.
주
1) Adam Tooze, The Wages of Destruction : The Making and Breaking of the Nazi Economy, (Viking Penguin, 2007), p.411
2) Hans Werner Neulen, Am Himmel Europas : Luftstreitkräfte an deutscher Seite 1939~1945, (Universitas Verlag, 1998), pp.37~38
3) John Weal, Junkers Ju 87 Stukageschwader of North Africa and the Mediterranean, (Osprey Publishing, 1998), p.16
4) Richard L. DiNardo, Germany and the Axis Powers : From Coalition to Collapse,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44
5) Williamson Murray, The Luftwaffe 1933~45 : Strategy for Defeat, (Brassey’s, 1996), p.45
6)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 :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Verlag, 1995), p.55
7) Richard L. DiNardo, ibid., p.77
8) Karl-Heinz Golla, Der Fall Griechenlands 1941, (Mittler&Sohn, 2007), p.65
9) Alexander Statiev, “The Ugly Duckling of the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41”,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2(1999. 6), pp.220~224
10) Richard L. DiNardo, ibid., p.99
11) Alexander Statiev, ibid., p.225
1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Mittler&Sohn, 1988), pp.21~22
13) Richard L. DiNardo, ibid., p.98, 111
14) Peter Gosztony, Hitlers Fremde Heere : Das Schicksal der nichtdeutschen Armeen im Ostfeldzug, (Econ Verlag, 1976), p.152
15) Alexander Statiev, ibid., pp.237~239
16) Peter Gosztony, ibid., pp.154~156, 161
17) Richard L. DiNardo, ibid., p.128
18) Gerhard Schreiber, “Italiens Teilnahme am Krieg gegen die Sowjetunion : Motive, Fakten und Folgen”, Jürgen Förster(hrsg), Stalingrad : EreignisㆍWirkungㆍSymbol, (Piper, 1992), p.259; Thomas Schlemmer, Die Italiener an der Ostfront 1942/43 : Dokumente zu Mussolinis Krieg gegen die Sowjetunion, (Oldenbourg Verlag, 2005), pp.14~15
19) Thomas Schlemmer, ibid., p.29;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0) Richard L. DiNardo, ibid., p.141
21)
Manfred Kehrig, Stalingrad : Analyse und Dokumentation einer Schlacht,
(Deutsche Verlags-Anstalt, 1974), p.66; Richard L. DiNardo, ibid., p.150
22) Manfred Kehrig, ibid., p.667
23) Peter Gosztony, ibid., pp.501~507
24) Richard L. DiNardo, ibid., p.154
25) Richard L. DiNardo, ibid., pp.140~141
26) Manfred Kehrig, ibid., p.668
27) Hans Werner Neulen, ibid., p.103
28) Miklos Szabo, “The Development of the Hungarian Aircraft Industry, 1938~1944”,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65(2001. 1), p.64
29) Hans Werner Neulen, ibid., p.108, 114
30) Hans Werner Neulen, ibid., p.329; 괄호 안의 수치는 Miklos Szabo, ibid., p.76
31) Hans Werner Neulen, ibid., p.328
2011년 9월 17일 토요일
2008년 6월 4일 수요일
슈투카에 대한 오해
바로 아랫글에서 코럼 이야기를 다룬 김에 독일공군에 대한 오해 하나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이 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진실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사실들이 입에서 입을 거쳐 전해지면서 마지막으로는 더 이상한 형태로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모든 분야에 걸쳐 골고루 나타나는데 군사사도 예외는 아닐 것 입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독일공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마 독일공군과 관련해서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오해 중의 하나는 슈투카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슈투카에 대해서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바로 괴링의 측근이었던 우데트(Ernst Udet)가 미국에서 구입해온 커티스 헬다이버가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 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먼저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해서 커티스 헬다이버를 구입한 것은 1934년의 일인데 Ju-87의 개발은 1933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Ju-87은 독일군이 개발한 첫 번째 급강하 폭격기도 아니었고 급강하 폭격에 대한 개념이나 교리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했을 무렵에는 He-50이 급강하폭격기로 잘~ 사용되고 있었지요. Ju-87은 독일공군의 첫번째 급강하폭격기가 아니라 공군의 교리에 맞는 첫번째 ‘중’급강하폭격기 였습니다.
그리고 교리나 군사사상에서 보면 육군복무규정 300에는 따로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내용이 있지요. 일반적으로 무기의 개발은 먼저 작전개념과 교리가 확립되면 그에 맞춰 이뤄지는 것이니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개발에 미국이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 처럼 인식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데트가 기종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공군 기술국장에 임명된 것은 1936년입니다!
그럼 슈투카의 개발에 있어서 우데트의 역할은 무엇이냐?
좀 심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데트는 그냥 급강하 폭격기 빠돌이 정도 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데트가 활약(???)한 것은 1936년 이후 여러 항공기의 개발에 관여하면서 많은 계획들을 파탄(???)에 가깝게 몰아넣은 것이 되겠습니다. 우데트가 급강하 폭격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Ju-88, He-177, Me-210 등 독일공군의 차기 주력기종에 모조리 급강하 폭격 능력을 넣으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죠. Ju-88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으나 He-177은 급강하 폭격을 가능하게 하려다가 개발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결론을 말하면 우데트는 Ju-87 슈투카의 개발에 대해 그다지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우데트가 미국에서 구입해온 커티스 호크는 Ju-87의 개발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긴 했지만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개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코럼이 1997년에 출간한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에 간략히 소개한 바 있고 예전에 제가 날림으로 번역했던 코럼의 글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에도 역시 관련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이 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진실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사실들이 입에서 입을 거쳐 전해지면서 마지막으로는 더 이상한 형태로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모든 분야에 걸쳐 골고루 나타나는데 군사사도 예외는 아닐 것 입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독일공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아마 독일공군과 관련해서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오해 중의 하나는 슈투카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슈투카에 대해서 국내에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바로 괴링의 측근이었던 우데트(Ernst Udet)가 미국에서 구입해온 커티스 헬다이버가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 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먼저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해서 커티스 헬다이버를 구입한 것은 1934년의 일인데 Ju-87의 개발은 1933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게다가 Ju-87은 독일군이 개발한 첫 번째 급강하 폭격기도 아니었고 급강하 폭격에 대한 개념이나 교리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데트가 미국을 방문했을 무렵에는 He-50이 급강하폭격기로 잘~ 사용되고 있었지요. Ju-87은 독일공군의 첫번째 급강하폭격기가 아니라 공군의 교리에 맞는 첫번째 ‘중’급강하폭격기 였습니다.
그리고 교리나 군사사상에서 보면 육군복무규정 300에는 따로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내용이 있지요. 일반적으로 무기의 개발은 먼저 작전개념과 교리가 확립되면 그에 맞춰 이뤄지는 것이니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개발에 미국이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 처럼 인식하는 것은 크게 무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데트가 기종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공군 기술국장에 임명된 것은 1936년입니다!
그럼 슈투카의 개발에 있어서 우데트의 역할은 무엇이냐?
좀 심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데트는 그냥 급강하 폭격기 빠돌이 정도 되겠습니다.;;;;;
오히려 우데트가 활약(???)한 것은 1936년 이후 여러 항공기의 개발에 관여하면서 많은 계획들을 파탄(???)에 가깝게 몰아넣은 것이 되겠습니다. 우데트가 급강하 폭격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Ju-88, He-177, Me-210 등 독일공군의 차기 주력기종에 모조리 급강하 폭격 능력을 넣으려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죠. Ju-88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으나 He-177은 급강하 폭격을 가능하게 하려다가 개발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결론을 말하면 우데트는 Ju-87 슈투카의 개발에 대해 그다지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우데트가 미국에서 구입해온 커티스 호크는 Ju-87의 개발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긴 했지만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개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코럼이 1997년에 출간한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에 간략히 소개한 바 있고 예전에 제가 날림으로 번역했던 코럼의 글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에도 역시 관련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2008년 1월 1일 화요일
'전격전의 전설'의 명사 표기 문제 몇 가지
전격전의 전설에 대한 서평은 조금 뒤에 올리고 일단은 지금까지 읽으면서 생각난 것을 조금 적어 보려 합니다. 독일어판과 대조하면서 읽고 있는지라 생각보다 속도가 안 나가는군요.
진중근 대위님을 모신 자리에서도 잠시 이야기가 나왔지만 몇 가지 명사 표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독일군 장성의 계급 표기나 특수한 부대 명칭, 장비 명칭 등에 대해서는 사실 국내에서 일관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금까지 읽은 부분에서 나타난 가장 기본적인 명사의 표기 문제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박격포(Granatwerfer, Gr.W)가 유탄발사기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 표기가 서적 전체에 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물론 총류탄 발사기를 Gewehr-granatwerfer라고 부르고 있긴 합니다)
64쪽에는 경보병포(leichtes Infanteriegeschütz)와 중보병포(schweres Infanteriegeschütz)가 각각 경보병무반동총과 중보병무반동총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Infanteriegeschütz라는 단어는 서적 앞 부분에서 보병용 돌격포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번역 이후 교열 과정에서 처리가 안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21cm Mörser는 210mm 박격포로 되어 있는데 독일어에서 Mörser가 박격포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 입니다. 2차 대전당시의 Mörser는 대구경 공성포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이죠.
그리고 90쪽에는 35(t) 전차와 38(t) 전차를 각각 35톤 전차와 38톤 전차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서적 앞부분의 용어해설에서 t(tschechisch) : 체코의, 체코형, 체코산 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교열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로 보입니다.
94쪽에서는 대전차포(Pak)를 대전차로켓으로 적어 놓았는데 이것 또한 교열 과정의 실수 같습니다.
101쪽(독일어판 59쪽)의 슈투카에 대한 설명에서는 ‘기관포의 명중률은 대단히 높았지만..’으로 문장이 되어 있는데 원판의 문장은 ‘Zwar erschien die Treffengenauigkeit bemerkenswert, ..’로 문맥상 급강하 폭격시 폭탄의 명중률을 말하는 것 입니다.
181쪽(독일어판 124쪽)에서는 ‘Kanisterversorgung’을 ‘드럼통 보급’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Kanister는 보통 제리캔이라고 부르는 작은 기름통이죠.
그나 저나 많은 분들이 서평을 쓰려고 대기하고 계시니 어떻게 하면 독창적인 서평을 쓸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진중근 대위님을 모신 자리에서도 잠시 이야기가 나왔지만 몇 가지 명사 표기의 문제가 있습니다. 독일군 장성의 계급 표기나 특수한 부대 명칭, 장비 명칭 등에 대해서는 사실 국내에서 일관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고 지금까지 읽은 부분에서 나타난 가장 기본적인 명사의 표기 문제 몇 가지만 언급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박격포(Granatwerfer, Gr.W)가 유탄발사기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 표기가 서적 전체에 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물론 총류탄 발사기를 Gewehr-granatwerfer라고 부르고 있긴 합니다)
64쪽에는 경보병포(leichtes Infanteriegeschütz)와 중보병포(schweres Infanteriegeschütz)가 각각 경보병무반동총과 중보병무반동총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Infanteriegeschütz라는 단어는 서적 앞 부분에서 보병용 돌격포로 표기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번역 이후 교열 과정에서 처리가 안 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21cm Mörser는 210mm 박격포로 되어 있는데 독일어에서 Mörser가 박격포에 해당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 입니다. 2차 대전당시의 Mörser는 대구경 공성포 종류를 지칭하는 단어이죠.
그리고 90쪽에는 35(t) 전차와 38(t) 전차를 각각 35톤 전차와 38톤 전차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서적 앞부분의 용어해설에서 t(tschechisch) : 체코의, 체코형, 체코산 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교열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로 보입니다.
94쪽에서는 대전차포(Pak)를 대전차로켓으로 적어 놓았는데 이것 또한 교열 과정의 실수 같습니다.
101쪽(독일어판 59쪽)의 슈투카에 대한 설명에서는 ‘기관포의 명중률은 대단히 높았지만..’으로 문장이 되어 있는데 원판의 문장은 ‘Zwar erschien die Treffengenauigkeit bemerkenswert, ..’로 문맥상 급강하 폭격시 폭탄의 명중률을 말하는 것 입니다.
181쪽(독일어판 124쪽)에서는 ‘Kanisterversorgung’을 ‘드럼통 보급’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Kanister는 보통 제리캔이라고 부르는 작은 기름통이죠.
그나 저나 많은 분들이 서평을 쓰려고 대기하고 계시니 어떻게 하면 독창적인 서평을 쓸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2007년 2월 27일 화요일
[번역글][재탕] 독일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예전에 페리스코프의 게시판에 올렸던 글 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코럼은 제가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는 군사사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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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호에 실린 James S. Corum의 The Luftwaffe’s Army Support Doctrine, 1918~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James S. Corum은 독일의 재 무장과 독일 공군의 창설 과정에 대한 두 권의 매우 훌륭한 저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께서도 James S. Corum의 저서를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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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59호에 실린 James S. Corum의 The Luftwaffe’s Army Support Doctrine, 1918~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James S. Corum은 독일의 재 무장과 독일 공군의 창설 과정에 대한 두 권의 매우 훌륭한 저서를 낸 사람입니다. 아마 여기 오시는 분들께서도 James S. Corum의 저서를 접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독일 공군의 육군 지원 교리, 1918~1941
독일공군은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고도로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곧 전 세계는 독일 공군이 지상 작전을 지원하는 능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폴란드와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독일 공군은 급속도로 발전한 지상군 지원 교리와 전술을 선보였다. 1941년 소련 침공은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으며 또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이 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독일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능력은 전쟁 초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공군과 육군 항공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의 성공은 물량이나 기술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교리와 훈련에 의한 것 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간략하게 어떤 방식으로 독일 공군이 지상 지원 교리를 발전 시켜 왔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어떠한 면이 이것을 지상전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만들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오늘날 급강하 폭격기를 조종했던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회고록이나 독일 공군의 항공기와 장비를 다룬 책은 매우 많지만 상대적으로 독일 공군의 교리와 이것이 어떻게 발전해 갔는가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드물었다. 독일어로 된 저작 중에서 교리 문제를 다룬 훌륭한 서적이 소수 존재하는 실정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와 편제 발전에 대한 좋은 글로는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n Weltkrieg 제 2 권에 실린 클라우스 마이어(Klaus Meier)의 글이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상군 지원 작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호르스트 보크(Horst Boog)가 담당한 같은 책 제 4권에 실린 독소전 초기의 항공 작전에서는 지상 작전에 대해서 잘 서술하고 있다. 영어로 된 자료로는 The Conduct of the Air War에 실린 미첼 포겟(Michel Forget)의 “Co-operation between Air Force and Army in the French and German Air Forc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이 1940년 전역 당시 독일 공군의 전력과 구성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 리처드 멀러(Richard Muller)의 “The German Air War in Russia”는 독일 공군의 항공 작전에 대해 훌륭한 분석을 하고 있으나 근접 항공지원 보다는 일반 폭격기 부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윌리엄슨 머레이(Williamson Murray)는 Case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lose Air Support에 실린 “The Luftwaffe Experience 1939~1941”에서 전쟁 초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나 그 분량은 적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나갔는가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다. 사실 머레이는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가 대부분 1930년대 말에 발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1930년대 초기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었다고 보고있다.
본 필자는 머레이의 가설과는 반대로 독일 공군의 지상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 말기부터 독소전 발발시 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보고 있다. 비록 독일공군의 교리에서 근접 항공 지원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으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의 필요성은 독일 공군의 장비와 조직, 항공기등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논문에서 본 필자는 지상군 지원(Army Support), 근접 항공 지원(CAS, Close Air Support), 근접 저지(Close Interdiction)등의 용어를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독일 공군의 개념 정의는 비교적 모호한 편 이었으며 이러한 융통적인 면은 근접 항공 지원을 전력 폭격 만큼이나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
초기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
1차 대전 기간 동안 독일 육군 항공대(Luftstreitkäfte)는 매우 수준 높은 근접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을 발전 시켰다. 플랑드르의 제 4 야전군 항공대 지휘관 이었던 헬무트 뷜버그(Helmut Wilberg)대위는 중무장한 하노버와 할버슈타트 2인승 전투-정찰기를 이용하여 세계 최초의 전문적인 지상 공격기 부대를 편성했다. 지상공격기 부대는 흔히 보병(지원) 항공대(Infanterie-Flieger)로 불렸는데 이들은 조종사, 연료탱크,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력을 강화한 항공기를 이용했다. 1918년에 이르자 독일 육군 항공대는 융커스 J-1 이나 C1.I 같은 완전 금속제 항공기를 개발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두 기종 모두 5정의 기관총과 크롬-니켈 합금제인 5mm 두께의 방어 장갑을 가지고 있었으며 J-1의 경우는 폭탄 탑재량이 150kg에 달했다. 1917년 말에 이르러서는 독일 육군 항공대의 항공기중 10.5%가 지상지원 전용 항공기로서 그 당시로서는 가공할 전력이었다.
1917년 말 독일 육군 항공대는 매우 효과적인 근접 항공 지원 교리를 만들었으며 이 새로운 항공 전력의 운용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는 중요한 지점을 선정하여 최대한 집중 운용하는 것을 강조 받았다. 1917년 11월의 깡브레 반격 작전을 예로 들면 이전투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반격에 투입된 돌격대를 지원하여 영국군의 방어진지를 폭격하고 기총소사했다. 1918년에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이른바 공격기(Schlachtflugzeug)가 돌파 작전에서 매우 유용한 화력 지원과 충격 수단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지상 공격기 부대의 최우선 목표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진지와 포병대, 지휘소, 예비대였다. 1918년 2월 육군항공대 사령관 폰 회프너(von Hoeppner)장군은 지상 공격기 부대는 미리 준비된 계획에 따라 운용하지 말고 최 전방의 지상군 지휘관들의 요청에 따라 융통성있게 운용하도록 지침을 하달했다. 1918년 1월의 공군 교범은 지상군 작전을 지원하고 지상군의 공격 훈련시 합동 훈련을 할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1918년 봄의 대공세에서 지상 공격기 부대는 육군 부대에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입증했다. 공세 초기 단계에서 주공을 맡은 3개 야전군은 총 27개 항공 중대로 편성된 지상공격기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지상공격기 부대의 임무는 적의 방어 거점과 포병, 예비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상댕수의 항공 중대가 예비대로 대기하면서 육군의 지원요청이 떨어지고 30분 이내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발달
전쟁 직후인 1919~20년 사이에 독일 육군 항공대는 130명의 노련한 항공 지휘관과 참모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항공 교리를 수립할 자료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 계획은 헬무트 뷜버그가 주도했다. 헬무트 뷜버그는 1920년부터 1927년 까지 독일군 내에서 항공부대에 관한 고위 간부였으며 또한 그 자신이 1차 대전 당시 명성을 떨친 유능한 지상공격기 부대 지휘관 이었다. 전술 및 기술 위원회에 속했던 간부들 중에는 뒤에 독일 공군의 고위 지휘관이 된 장교들이 속해 있었는데 밀히(Erhard Milch), 슈투덴트(Kurt Student), 예쇼넥(Hans Jeschonneck), 슈페를레(Hugo Sperrle), 우데트(Ernst Udet)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직후 중점이 주어진 것은 항공력을 지상작전 지원에 사용하는 문제였다. 네 명 에서 여섯 명으로 구성된 많은 소 위원회가 정찰 항공, 근접 항공 지원, 전방 지역에 대한 차단 작전 등의 임무를 연구했다. 독일 공군의 전술 공군으로서의 성격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1차 대전 당시 전술 항공 부대의 성과에 대한 분석과 당시 독일군 내의 항공 병과 간부인 뷜버그, 펠미, 슈투덴트, 밀히 등이 전투기 조종사나 정찰기 조종사로서 전쟁 기간 동안 지휘관 혹은 조종사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군이나 1930년대의 독일 공군 간부 중에서 폭격기 부대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독일군 내의 항공 교리는 육군 항공 참모부에 의해서 발전 되었으며 곧 간부 및 참모 본부 간부 훈련에 항공 교리 학습이 추가 되었으며 육군의 기본 작전 교리에도 포함 되었다. 육군 규정 487호 제병 합동 지휘와 전투(Führung und Gefecht der Verbundenen Waffen)에서는 항공력의 사용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서는 1차 대전 당시의 근접 항공 지원 경험을 공격 비행단(Schlachtgeschwader)이라는 장에 설명해 놓았다. 지휘관들은 항공력을 분산 운용하지 말고 집중 운용할 것을 강조 받았다. 여기에서는 지상 공격 항공 부대는 “적은 물론 아군에게도 심적 물리적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설명했다.
독일군의 근본적인 항공 교리는 1920년부터 26년 까지 육군 사령관을 맡았던 젝트(Hans von Seeckt)상급 대장에 의해 기초가 닦였다. 젝트는 양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항공 교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폰 젝트는 항공 부대를 독립된 병종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항공력이 전장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 시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적을 패배시키는 것은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항공대의 주요 임무는 두 가지의 공세 작전이었다. 첫째는 적의 항공력을 격멸하여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 이었으며 두 번째는 적 지상군에 대한 차단 임무로서 적의 철도 교통망, 창고, 군기지를 타격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과 전장에 대한 차단 임무는 부차적 임무로 취급 되었으며 이것은 제공권을 획득한 이후에야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1920년대의 전술 교범은 젝트의 전쟁 사상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항공력은 지상군 지원에 있어서 차단과 지상군 타격을 주 임무로 삼고 있었다. 폰 젝트는 항공력의 임무를 지상군과의 합동 작전의 차원에서 파악했다. 항공전의 승리는 신속히 기동하는 지상군이 적 지상군을 격파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의 중점은 적 방어선의 돌파 지원에 맞춰졌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근접항공지원은 순전히 이론적인 연구에 머물렀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군은 러시아의 레뻬츠끄에 시험 및 전투 조종사 훈련소를 가지고 있었다. 리뻬츠끄에서 폭탄과 기관총을 사용한 지상공격 훈련은 전투기 조종사의 필수 교육 과정에 포함되었다.
전술과 기술의 발전 : 1934~1939
독일 공군은 대규모 징병과 재무장, 육군으로 부터의 간부 전입 등에 힘입어 1934년에 실질적으로 창설되었다. 지상군에 대한 항공지원의 기초적인 바탕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독일 공군의 기본적인 작전 교리는 헬무트 뷜버그가 이끄는 위원회에 의해 1934년에 작성되고 1935년에 배포된 공군 규정 제 16호, 항공전 지휘(Luftkriegführung)에 잘 나타나 있다. 규정 제 16호 에서는 항공전력을 기본적으로 제병 합동 작전의 틀 안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적의 인구 및 산업 밀집지구에 대한 전략 폭격은 중요한 임무였지만 공군의 최 우선 임무는 아니었다. 공군의 전시 주요 임무는 적 군사력의 격멸이었다. 규정 제 16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서 군의 임무는 적의 저항 의지를 분쇄하는 것 이다. 국가의 의지는 그 군대의 의지와 연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의 군사력을 분쇄하는 것은 전쟁 수행의 근본적 목적이다.”
공군 규정 16호 에서는 지상군 지원 임무를 중요한 임무의 하나라고 정의했다.
“지상군과 해군에 대한 직접 지원은 전체적인 전쟁 전략의 틀 내에서 중요한 작전인가의 여부에 따라 수행 되어야 한다.”
독일 공군 사령부는 독일 육군과 합동으로 공군은 “결정적 지상 작전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했다.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육군의 요청과 공군의 다른 작전, 지상 작전에 투입될 전력의 비율에 대해서 연구했다. 1930년대에 공군내의 주요 논점은 공군이 근접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근접 항공 작전에 필요한 전술과 기술을 개발하는 것 과 지휘 통제에 대한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지휘와 통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1차 대전 당시 지상군을 지원한 항공대는 각 야전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항공부대 지휘관은 야전군 사령관의 직할로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독립된 병종이었으며 지상군의 지휘하에 움직일 수 있는 항공 부대를 지휘할 지휘 통제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 했다.그 대신 공군은 장군 한 명을 육군 총 사령부에 배속 시켜서 연락 장교의 역할을 하게 하고 육군에 소속된 정찰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공군에서 육군에 배속시킨 장교들은 공군 지휘관(Kommandeure der Luftwaffe, 약자로 Kolufts)으로 불렸다. 이들은 각 야전군과 군단에 배속된 정찰 항공대를 통제하고 육군에 배속된 항공 부대의 군수 지원 문제를 담당했다. 각 군단과 야전군에 배속된 상급 공군 장교는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항공 작전에 관련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Kolufts는 자신의 지휘선을 통해 지상군에 대한 지원임무를 요청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요청에 따라 육군 지휘관은 공군에 지원 요청을 했다. 그러나 Kolufts는 독자적으로 공군 지휘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근접 항공 지원 임무 수행에는 효과적이지 못 했다.
이 때문에 독일 공군 본부는 육군의 상급 제대와 공군 부대간의 직접 연락 체계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공군의 관점에서 볼 때 Kolufts는 육군 지휘관에게 직접 배속 되어 있어서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부적합 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공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Kolufts에 더해서 독자적으로 각 지상군 부대 지원에 배속된 항공대 소속 장교에서 차출되고 공군과 연락 체계를 갖춘 연락 장교(Fliegerverbindungs Offiziere)를 배치했다. 1936년에 독일 공군 참모총장 베버(Walther Wever)대장은 연락 장교가 원거리에서도 배속된 군단과 지원 공군 부대를 연결 할 수 있는 통신팀을 배속 받도록 했다. 베버 대장은 공군 연락장교의 훈련에 매우 높은 우선 순위를 두고 실행했다.
1930년대 중반의 공군 연락 장교 체계는 근접 항공 지원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였다. 연락 장교 양성에 있어서 공군은 물론 육군의 작전 체계를 이해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교육 이었다. 공군 참모 대학은 1930년대 중반에 육군 교리와 육군 지원을 강조하는 교육 과정을 개설했다. 1937년에 공군 참모 대학 학생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공군 지휘관, 공군 연락장교, 전선 후방 차단 임무, 방어와 공격시 지상군에 대한 근접 항공 지원 등 이었다. 1935년의 훈련 보고에서 베버 대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육군의 훈련 방식을 가능한 한 비슷하게 도입해서 공군 장교들이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략) 공군은 훈련 시작부터 대규모 독립 작전이 육군의 작전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한 경우에 따라서 육군에 대한 직접 지원을 수행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육군과의 직접적인 협력은 불필요한 행정 수요를 감소 시킬 것 이며 훈련에 참가하는 부대들에도 매우 유용할 것이다.”
육군과 공군과의 협력은 독일 공군내에 지상군 지원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군의 장교 훈련 규정은 공군 장교가 타 병종의 훈련과 워 게임에 참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공군 장교는 육군과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이들의 작전 수행 방식을 익힐 것이 강조 되었다. 육군과 공군의 합동 작전은 전쟁 발발 이전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육군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의 기초를 익히는데 중점을 두었다. 1937년 가을의 기동훈련에는 차단 작전과 근접 항공 지원이 연습 되었다. 새로이 창설된 기갑 부대는 육군의 다른 병과 보다 공군과의 합동 작전을 더 강조했다. 1936년에 기갑 부대 사령관(Kommandeur der Panzertruppen)이었던 루츠(Oswald Lutz)대장은 기갑 사단 지휘관 들에게 공군과의 합동 작전, 특히 무전기 사용과 정찰 훈련을 강조했다. 루츠는 정찰기 조종사들이 효과적인 전술적 보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보았다. 루츠는 성능이 충분한 항공기만 갖춰 진다면 정찰 임무를 훈련 받은 조종사가 훌륭한 지상 공격기 조종사도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루츠는 또한 항공관구(Luftgau)사령부에 육군 참모를 둘 것을 요구 하기도 했다.
장비의 도입
공군은 항공 지원 교리와 전술, 훈련 등을 발전 시키는 동안 교리에 적합한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흔히 독일 공군에 대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 중에는 슈투카가 에른스트 우데트의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채택되었다고 믿는 것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데트는 1936년에 독일 공군 기술감이 되었는데 그는 이전에 두 대의 미제 커티스 호크 급강하 폭격기(XF-11 C-2)를 조종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커티스 호크에 매우 매료되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우데트는 이 때문에 그의 전임자인 리히토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급강하 폭격기의 도입을 중단 시킨 것에 대해 의견 충돌을 보였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실제로 리히토펜과 우데트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해서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육군과 공군 참모본부는 그 이전부터 급강하 폭격기가 목표물에 대한 정밀 타격에 크게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1928년 초에 융커스 J u-47 단엽 전투기는 지상 공격기와 급강하 폭격에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 받았다. 1930년에 항공 참모부는 경 급강하 폭격기와 중 급강하 폭격기의 성능에 대한 기본 안을 내놓았다. 경 급강하 폭격기는 중 전투기의 역할도 겸하며 2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중 급강하 폭격기는 완전히 급강하 폭격전용 으로서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했다. 두 종류의 급강하 폭격기 모두 전방 기지의 임시 활주로 에서도 운용 가능해야 했다. 1932년에 육군의 급강하 폭격기 개발 계획은 He-50 복엽기의 시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He-50은 500kg의 폭탄 탑재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1933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He-50은 본격적인 급강하 폭격기가 등장하기 전 까지 임시로 사용될 예정이었으며 동시에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 양성에도 사용되었다. 1934년에 국방군 재무장 위원회는 중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 개발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그 결과 중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이 Ju-87 이었으며 경 급강하 폭격기로 채택된 것은 Hs-123 이었다.
밀히가 작정한 독일 공군의 제 1차 항공기 생산 계획에서는 항공기 3,820대 중 473대를 급강하 폭격기로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1934년에 항공 참모부는 1938년 까지 각 90대의 슈튜카로 편성된 3개 급강하 폭격 비행단을 창설할 계획을 세웠다. 급강하 폭격 비행단은 예비대로서 공군 사령관의 직할로 중점 지구에 집중 투입될 것 이었다. 벡(Ludwig Beck)대장이 편집한 육군복무규정 300(Heeresdienstvorschrift 300), 부대 지휘에서는 급강하 폭격기에 대한 장이 따로 있었으며 급강하 폭격기는 “특정 목표 타격이 가능한 무기”로 설명 되었다.
1936년 이전에 육군과 항공 참모부는 급강하 폭격기를 파괴력이 강력한 폭탄을 목표에 정확히 투하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독일이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에서 슈투카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 주된 근거는 슈투카가 대공포와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급강하 폭격기의 개념은 그 시대의 요구에 따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제 2 세대 급강하 폭격기인 Ju-87과 Hs-123은 매우 튼튼하고 일정한 타격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슈투카의 설계상 장점으로는 전방 전진 기지의 비포장 비행장에서도 운용이 가능했다는 점이고 활주 거리가 불과 400m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1934년에 재무장 위원회는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최 우선 순위를 주었고 급강하 폭격기를 다양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긴 항속거리를 가진 기체로 파악했다. 계획상으로는 급강하 폭격기를 전략 폭격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Ju-87의 초기 양산형은 매우 짧은 항속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Ju-87 B 형의 행동 반경은 최대 폭탄 탑재량일 경우 111~124 마일에 불과했다. 항속거리 문제와 전방 기지에서도 작전 가능한 능력은 슈투카를 근접 항공 지원 병기로 쓰게 만들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 육군의 전투 교리는 적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1차 대전의 경험을 반영한 것 이었으며 주적으로 설정된 프랑스는 국경지대에 강력한 요새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육군의 기본 교범이던 육군 규범 487은 항공 전력의 주 임무가 지상군 지원을 위해 적의 요새 방어선을 파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대형 폭탄을 이용한 요새선 격파는 Ju-87이 스페인 내전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전역에서 잘 수행한 임무였다.
그러나 Ju-87은 불과 2정의 7,92mm 기관총 만을 장비하고 있어서 지상 공격기로서 이동 목표를 타격하는데는 큰 효과가 없었으며 실질적 타격 보다는 심리적 위력이 더 컸다. 독일 공군은 상대적으로 느린 급강하 폭격기의 속도와 약한 방어력에 우려를 하고 있었다. 1937년에 독일 공군은 지상 공격 전용의 항공기의 요구 성능을 발표하고 입찰을 시작했다. 이에 필요한 항공기는 20mm 기관포를 장비하고 충분한 고속에 방어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 결과 Hs-129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 기종은 약한 엔진 출력과 기술적 복잡함, 그리고 좋지 못한 조종성 때문에 독일 공군의 실패작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소련은 충분히 무장을 갖추고 방어력도 강력하고 기술적으로도 단순하고 양산에 적합한 IL-2를 채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Hs-129는 독일 공군의 교리의 실패로 인한 것은 아니었으며 설계와 생산에 큰 문제가 있었다. 독일 공군은 1937년에 지상 공격기를 발주하면서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발전 시켜 나갔다.
스페인 내전 1936~1939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 공군이 얻은 작전 경험은 그 동안 잘못 이해 되어 왔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 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했으며 “콘도르 군단이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 교리의 시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근접 항공 지원은 리히토펜 같은 선구자들이 열성적으로 발전 시켰으며 공군 사령부는 이에 무관심 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 봤듯이 독일의 육군 지원 교리는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공군 파견 장교 체제는 1935~36년을 거치면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스페인 내전에서 He-51 복엽 전투기를 근접 항공 지원에 사용한 것은 새로 생긴 독자적인 교리가 아니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은 1920년대 이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제 2차 적인 임무였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에서 달성한 것은 기존에 발전시켜온 교리를 성공적으로 실전에 적용했다는 것이다. 독일 공군의 교리는 근접 항공 지원은 제공권을 달성한 뒤에 행해져야 하는 것 이었다. 근접 항공 지원은 대량으로 운용될 때 적의 사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이 내전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작전을 통해 입증 되었다. 독일의 근접 항공 지원은 1937년과 38년의 작전에서 돌파 작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 되었다.
리히토펜은 스페인내전에 처음에는 콘돌 군단의 참모장으로 나중에는 그 부대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근접 항공지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페인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독일 공군에서 근접 항공 지원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리히토펜이 예상했던 근접 항공 지원에서의 항공기 손실은 실제로는 매우 적게 나타났다. 1938년 5월부터 공화국 군이 20mm와 45mm 대공포를 투입한 이후에도 지상 공격기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충분히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히토펜의 감독하에 독일 공군은 최신예 항공기들의 실전 시험을 했다. 이 중에는 8대의 Ju-87 과 6대의 Hs-123이 포함 되었다. 리히토펜은 내전 후반기에 콘도르 군단에 제공권을 장악하자 새로운 근접 항공 지원 전술을 시험해 볼 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기갑 부대와 차량화 부대에 대한 근접 항공지원 기술은 스페인 내전의 경험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1938년 3월 콘도르 군단은 에브로 강 전선에 서 프랑코 군의 기갑 부대를 지원하는 작전에 투입 되었다. 공세 첫 단계에서 콘도르 군단은 공화국군의 비행장을 공격하여 제공권을 장악한 뒤 전선 후방의 도로와 철도를 타격함 으로서 적 예비대의 증원을 차단했다. 그리고 콘도르 군단은 근접 항공 지원에 집중하여 공화국군의 거점과 야전 축성을 무력화 시켰다. 항공기와 전차는 돌파에 매우 유용한 전력 이었으며 1938년 3월 12일에 콘도르 군단은 프랑코 군이 36km의 전진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외에도 독일 공군은 다른 여러 교리를 시험했으며 대부분 성공적 이었다. 콘도르 군단은 집중 공격뿐 아니라 제파 공격도 함께 행했다. 중점 지역에는 6대로 구성된 1개 편대가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고 바로 뒤에 다른 편대가 공격을 반복했다. 적을 계속적인 항공 공격으로 타격함 으로서 적의 사기에 대한 영향은 더 증대 되었다. 이러한 계속적인 공격은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전매 특허” 처럼 되었다.
한편 공군과 육군과의 통신 문제는 내전 기간 중 큰 문제로 남았다. 당시까지 지상과 항공기간의 교신을 확실하게 해줄 무전기가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지상 공격 임무는 사전에 세밀하게 준비 되었으며 아군에 대한 오폭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상으로 부터의 표지판, 연막, 신호탄, 불빛 등에 의해 조정되었다. 콘도르 군단의 첫 지휘관 이었던 슈페를레와 그의 후임자 였던 리히토펜은 중요한 지상 공격 임무는 전방 작전 지휘소 에서 직접 지휘했으며 비행장과의 직접 연락 체계를 갖추었다. 중요한 지상 지원 임무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독일 공군 고위 장교들의 관행이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얻은 경험들은 베를린에서 집중적으로 분석 되었다. 예쇼넥 대령은 1939년 6월에 “근접 지원 임무는 공군의 임무 중 가장 어려운 임무”라고 지적하고 이런 임무는 “공군과 공군이 지원하는 육군 부대 간에 밀접한 연락이 뒷 받침 되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폴란드 침공을 계획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공군은 1939년 여름에 슈투카 전력의 절반을 리히토펜이 지휘하는 특수 항공단에 집중 시켰다. 스페인 내전은 독일에게 대규모의 전문화된 근접 지원 전력을 만들도록 했을뿐 아니라 근접 지원을 체득한 우수한 조종사와 근접 항공 지원 작전을 수립하고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을 얻게 해 주었다. 스페인 내전 말기에 많은 독일 공군의 고위 장교 – 슈페를레, 드룸, 폴크만, 플로쳐, 자이데만, 폰 리히토펜 등 – 들이 지상군 지원등의 실전 지휘 경험을 쌓았으며 기갑 부대 작전에 대한 항공 지원 등의 현대적 전술을 체득하게 되었다.
폴란드 전역
폴란드 전역에서 독일 공군의 급강하 폭격기와 지상공격기 부대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 공군은 366대의 Ju-87과 40대의 Hs-123이 가동 가능했으며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지상 공격을 위해서 Hs-123과 Ju-87은 각 야전군을 지원하는 항공사단들에 분산 배치되었다. 1개 항공대(Gruppe)의 Ju-87 30대가 동프로이센에 배치되어 있던 항공 사단에 배속 되었으며 3개 항공대와 1개 항공 중대(Staffel)의 Ju-87 112대가 제 1 항공사단(1. Flieger-Division)에 배속 되었다. 나머지 지상 공격기와 슈투카는 폰 리히토펜의 특수 항공단에 집중 되었다.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4개 슈투카 항공대(160대)와 1개 Hs-123 항공대(40대)가 배속되어 있었으며 1개 정찰 항공 중대와 2개 전투기 항공대가 호위를 위해 배속되어 있었다. 폰 리히토펜의 임무는 주공을 맡은 제 10 군을 지원하는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은 폴란드군의 부대 집결지를 타격하는데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슈투카의 500kg 폭탄은 대형 공성포의 역할을 대체했으며 모들린의 요새를 포함한 폴란드군의 요새들을 무력화 시켰다. 슈투카 부대는 교리에 따라 대량으로 집중 운용 되었다. 보통 1개 항공대가 기본 단위로 투입 되었다. 9월 26일과 27일에 폰 리히토펜은 모들린 공격에 약 1천 소티의 출격을 해서 지원했다. 모들린은 항공 공격만으로 항복했다.
스페인에서 입증된 교리와 전술은 폴란드에서 그 위력을 입증했다. 근접 항공 비행대는 기동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이것은 1939년 에는 다른 어떤 나라의 공군도 할 수 없었던 지휘력 이었다. 리히토펜의 특수항공단은 제 4 항공함대로 이동했으며 별다른 문제 없이 작전했다. 슈투카와 지상공격기들은 폴란드 전역의 지상 작전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작전 초기에 슈투카 부대는 폴란드 공군의 무력화에 집중했다. 9월 7일부터 12일 사이에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라돔-데블린 지구의 폴란드군을 섬멸하는데 투입되었다. 13일부터 17일 까지 리히토펜은 Byzura 강의 폴란드군 방어선을 공격하여 제 10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라이헤나우 상급 대장은 특수 항공단이 전장의 전황을 결정 지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사용한 제파 공격은 폴란드 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슈파이델은 “슈투카 공격은 적의 사기를 꺾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독일 공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은 상당 부분 기동성 있는 지상 지원 부대와 보급 조직의 효율성에 기인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전투기 부대는 그 임무를 위해서 최대한 전방에 가까운 비행장에서 작전해야 했다. 특히 Hs-123의 경우 최대 무장 탑재시 행동 반경이 70 마일 이었으며 Ju-87의 경우는 110마일에 불과했다. 전방 지역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 공군은 1939년에 117개 차량화 보급 수송대를 편성했다. 폴란드 전에서 제 2 항공 함대와 리히토펜의 부대에는 총 11개 비행장 지원 중대가 배속되었다. 이러한 지원 부대들은 수시간 안에 임시 활주로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전방 기지로부터 작전하는 슈투카들은 하루에 보통 4~5회의 전투 출격을 했는데 이것은 독일군의 전력을 배가 시켰다.
폴란드는 기갑-항공 합동 작전을 최초로 대규모로 실시한 전역이 되었다. 공군 연락 장교는 각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 참모진과 함께 이동했으며 때때로 전방까지 가서 정확한 상황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기갑 사단과 차량화 사단의 급속한 진격은 종종 전방 지역에서 식별의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부족한 통신 문제와 결합하여 종종 슈투카가 독일군을 공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폴란드전에서 얻은 경험은 신속히 공군 본부에 의해 부석 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후방에 대한 종심 타격은 슈투카 부대가 대공포에 심한 피해를 입어서 중단 되었다. 폴란드전 직후 대부분의 슈투카 비행대와 Hs-123 비행대는 폰 리히토펜의 지휘하에 집중 되었으며 이 부대는 제 8 항공군단이 되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폰 리히토펜은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을 맡으면서 근접 항공 지원의 지휘 통제 체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각 기갑사단과 군단에 배속된 공군 연락 장교는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로 직접 연락을 취했으며 더 이상 육군측에 항공 작전 참모 역할을 하거나 항공 지원 요청을 부탁하지 않았다. 제 8 항공 군단 사령부 에서는 항상 클라이스트의 기갑집단 사령부와 연락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사단 사령부의 상황 보고가 접수되면 바로 수분내에 일선 항공대에 공격 명령이 하달 되었다. 제 8 항공 군단은 항시 1개 슈투카 비행대와 1개 전투 비행대를 출격 시킬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출격 명령이 하달된지 45분에서 75분 내에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슈투카 부대는 네덜란드에 대한 세계 최초의 공수 작전을 지원하는데 투입 되었다. 폰 리히토펜의 부대는 네덜란드 공군 기지와 대공포 진지, 그리고 기타 목표를 파괴하여 제 7 항공사단 병력이 네덜란드의 주요 목표를 점령하는 것을 지원했다.
폰 리히토펜이 1940년 전역에서 일으킨 최고의 혁신은 항공 전력을 지상 작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수단으로 만든 것 이었다. 대규모로 집중된 슈투카 공격은 1940년 5월 14일 스당(Sedan)의 프랑스군 방어를 붕괴 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슈투카는 방어선에 배치된 병력에는 타격을 별로 입히지 못 했으나 후방의 포병을 타격함 으로서 프랑스 포병이 도하하는 독일군을 공격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 군의 사기에 미친 영향 역시 캐우 컸다. 이날 밤에 프랑스 제 55 사단은 무너졌으며 이들의 퇴각에는 특히 항공 공격이 큰 도움을 주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초기에 제 8 항공 군단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및 스당 방면 돌파등을 지원했다. 작전 초기에 리히토펜은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에 제 8 항공 군단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고 상급 부대에 건의했다. 5월 16일에 리히토펜은 괴링을 만나 바다로 진격하는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아 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너무나 신속한 진격에 당황했으며 5월 14일 이후 맹진격 하는 기갑사단과 보병사단간에 큰 간격이 생겼다. 5월 16일에 룬트슈테트는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늦춰서 보병 사단이 따라 붙도록 명령했다. 리히토펜은 예하 부대에 보병사단이 따라 붙을 동안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기갑집단의 측면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 때문에 기갑사단에 대한 지원은 2차적인 임무로 돌려졌다. 육군측은 리히토펜이 측면에 대한 방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8시간 뒤에는 프랑스군이 제 2의 마른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 했다는 것이 명백해 졌다. 최고 사령부는 다시 진격을 명령했다.
그동안 리히토펜은 육군의 측면을 잘 방어해 냈다. 8 항공군단의 정찰기들은 반격을 위해 이동하는 프랑스군 사단을 발견했으며 끊임 없이 프랑스 지상군을 공격하고 도로망을 타격했으며 프랑스 기갑부대의 집결지를 공격했다. 프랑스 제 9 군은 항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제 8 항공군단은 5월 17일 드골의 제 4 기갑사단이 몽꼬르네(Montcornet)에 가한 반격을 격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월 20일에 제 8 항공군단의 주력은 뒤아-라-샤토(Douai-la-Cateau)에 집결한 연합군 기갑 부대를 공격했으며 롬멜의 제 7 기갑사단이 아라(Arras)에서 영국군 전차 부대의 반격을 받았을때도 지원했다.
그러나 Ju-87은 전차에 명중탄을 잘 맞추지 못 했으며 Hs-123은 중 기관포가 없어서 공군의 공격으로 직접 격파한 전차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항공 공격은 전차 부대를 후속하는 지원-보급 부대로부터 분리 시키고 전차를 지원하는 보병과 포병에 큰 피해를 입혔다. 많은 자료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제 8 항공군단의 지상군 측면 보호와 근접 항공 지원 임무는 매우 성공적 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전역 전체를 놓고 볼 때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독일의 대 승리를 가져온 가장 결정적인 요인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러시아 전역
독일 공군은 프랑스에서 처럼 소련 침공에서도 주공이 집중되는 지역의 기갑사단에 항공 지원을 수행했다.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러시아 전선에서 매우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1941년 전역에서 독일공군은 지휘 통제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특히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으로 인해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넓게 분산되어 운용되었으며 전장의 확대로 인해 각 기갑 군단과 항공 군단, 항공 함대간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 많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가 6월부터 10월 사이에 편성 되었다. 1942년 초에 그동안 유지되었던 Koluft는 완전히 폐지 되었으며 이것은 공군 장군에게 배속된 1개 항공 정찰 사령부로 변경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술적 혁신은 리히토펜이 가져왔다. 그는 소련 침공 당시도 제 8 항공 군단장으로 있었으며 그는 경험많은 슈투카 조종사를 항공기와 교신할 수 있는 무전기를 장비한 3호 전차에 탑승시켜서 이동 지상 관제관으로 활용했다. 이 때부터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최 전선의 지상 부대와 직접적으로 합동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의 교훈으로부터 근접 항공 지원과 차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항공기 무장을 강화 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얻어졌다. 1940년 전역에서 슈투카의 위력은 물리적 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 컸다. 슈투카가 장비한 무기 중 전차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은 폭탄 뿐 이었다. 그리고 전차에 폭탄이 직접 명중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독소전 개전 당시 독일 공군은 여전히 Ju-87 B-2형을 주력으로 장비하고 있었으나 그 무렵부터 Ju-87 D 형이 양상 배치되고 있었으며 D 형은 늘어난 탑재량과 행동 반경을 가지고 있었다. 독소전을 치루면서 J u-87은 37mm Flak 18을 탑재하여 대전차 공격기로 활용 되었으며 근접 항공 지원을 수행하던 Hs-123은 1942년에 가서 대전차 공격 임무도 수행하기 위해 20mm 기관포로 무장을 교체했다.
1941년에 독일 공군은 SD-2 폭탄을 사용했는데 이 폭탄은 특히 보병 집단과 경장갑 목표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SD-2는 원시적인 집속 폭탄으로 각 폭탄 본체는 각 3파운드 무개의 자탄 96개를 넣고 있었다. 폭탄 본체는 공격시 열리면서 자탄을 살포했다. SD-2 하나는 차량 대열 전차나 보병 집결지 전체를 초토화 시킬 수 있었다. SD-2는 매우 효과적 이어서 미국 공군도 이를 복제해서 수년간 사용했다. 또한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또 다른 혁신은 우수한 다목적 폭격기인 Ju-88의 대량 사용이었다. 폴란드 전역과 프랑스 전역의 경험으로 개발된 신무기 중 특이한 것은 보조 로켓 추진에 장갑 목표를 관통할 수 있는 탄두를 가진 1,000kg 폭탄(PC 1000)이었다. 이 폭탄의 사용으로 대부분의 요새 시설은 항공 공격에 무력해 졌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1941년의 러시아 전역을 정점으로 해서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0년 전역을 치룬 이후 독일 공군은 전해 보다 더 적은 숫자의 항공기를 가지고 소련 침공에 들어갔다. 독일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은 꾸준히 장비와 전술을 개선 시켜 나갔지만 더 이상 확실하게 제공권이 장악되지 못 했다. 제공권이 없는 상황에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더 이상 적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 했다. 비록 독일 공군은 근접 항공 지원을 매우 중요시 했지만 러시아 전선의 인적, 물적 소모는 매우 심각했으며 결국은 독일 공군의 지상 공격 부대를 무력화 시켰다. 독일 공군의 우수한 교리와 전술은 물량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스페인과 폴란드, 프랑스에서 얻은 교훈은 근접 항공 지원은 최대한 집중해서 운용해야 효과가 있다는 점 이었다. 독일 공군이 1940~41년 사이에 조종사 양성과 항공기 증산에 실패했다는 점은 러시아의 광대한 전장과 함께 독일 공군이 더 이상 1940년 5월 스당에서 했던 것과 같이 대규모의 집중을 달성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 론
독일이 항공력을 지상군 작전 지원에 간접, 직접적으로 사용한 사실은 군사 교리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1939년에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독일 공군의 임무 우선 순위에서 제공권 달성과 원거리 차단에 이어 세번째에 해당했다.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근접 지원은 좀더 우선 순위가 높아 졌으며 제 8 항공군단이 창설 되었다. 폰 리히토펜이 클라이스트 기갑 집단의 돌파와 측면 보호에 큰 역할을 수행하자 이제 작전 수행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41년 전역에서 근접 항공 지원과 근접 차단 임무는 원거리 차단과 동등한 중요도를 가지게 되었다.
독일이 연합군에 비해서 훨씬 더 우수한 지상군 지원 세력과 교리를 가지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먼저 독일 공군과 육군은 교리면에서 특정 사상이나 개념에 구속 받지 않았다. 독일 공군의 교리를 보면 전략 항공 공격이나 항공력의 작전 단위 사용에 명확한 구분을 두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은 Ju-87을 전략적 임무에 투입하는 것이나 Bf-110이나 Ju-88 같은 중형 항공기를 근접 항공 지원 임무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법은 전략 임무와 전술 임무를 명확하게 구분한 영국공군이나 미국 육군 항공대와는 매우 다른 것 이었다.
독일 공군의 참모 조직은 다른 어느 나라의 공군 보다도 1차 대전과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각 전역이 끝날 때 마다 독일 공군은 그 교리를 각 전역의 교훈에 맞춰서 수정해 나갔다. 이것은 영국 공군과 미 육군 항공대가 1차 대전 당시 근접 항공 지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근접 항공 지원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나 영국, 미국은 독일 육군이나 공군과는 달리 경험 으로부터 별다른 교훈을 얻어 내지 못했다. 심지어 폴란드 전역의 교훈 조차도 이들 국가들에서는 무시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별다른 근접 항공 지원 세력이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독일 공군의 최대 강점 중 하나는 육군과의 합동 작전을 강조한 것 이었다. 1930년대부터 독일 공군과 육군은 제병 협동에 기초한 양 병종간의 합동 작전을 시작했으며 정기적으로 합동 기동 훈련과 연습이 행해졌다.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은 2차 대전 이전에 육군과의 합동 작전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또한 독일 공군은 매우 효과적인 참모 조직을 발전 시켰으며 이를 통해 독일 공군은 각 전역 마다 대규모 항공 부대를 특정 구역에 집중 투입 할 수 있었다. 또한 참모 조직은 독일 공군의 이동시 보급과 지원 문제에도 큰 효율성을 발휘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근접 항공 지원 부대는 전선에 인접한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보급 조직은 부대의 전투력을 배가 시켰으며 공군 비행대가 하루에도 4회 혹은 그 이상의 전투 출격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우수한 지휘관들이 독일의 성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뷜버그, 밀히, 슈페를레, 예소넥, 폰 리히토펜 같은 지휘관들은 근접 항공 지원 부대와 그 교리를 형성하는데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것이야 말로 독일 공군이 육군 지원 교리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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