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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9일 수요일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번동아제님이 쓰신 군기시(軍器寺)터 발굴에 대한 글을 읽던 중 '건물지 11호'에서 조선시대의 화약이 출토되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번동아제님이 지적하신 것 처럼 이를 통해 조선시대 화약의 화학적 성분을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읽고 나니 예전에 읽었던 Bert S. Hall의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중세말기~르네상스 시기의 군사적 발전을 '기술적' 관점에서 분석한 책인데 3장 전체를 할애해 15세기의 화약에 대한 분석을 하고 있어서 읽을 당시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이 난 김에 이 책에 대해서 조금 소개를 해 보려 합니다.

이 책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출간한 기술사연구(Johns Hopkins Studies in the History of Technology)의 열 다섯번째 저작입니다. 몇 년전 2차대전에서 근대유럽전쟁 전반으로 관심사가 옮겨가면서 근대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기의 전쟁에 대해 쓸만한 서적이 없을까 찾아보던 중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Bert S. Hall은 중세말~르네상스 시기의 군사기술이 전쟁의 양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라면 유사한 주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과 어떠한 차이점이 있느냐는 질문이 들어올 법 합니다. 네. 그래서 Hall은 화약 무기에 대한 기술적 분석과 전술의 변화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화약 무기의 생산을 뒷받침한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분석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저자는 14세기에 공성병기로서 화약무기의 사용이 확산된 데 대해 대포의 위력뿐 아니라 138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하기 시작한 화약의 가격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에 걸쳐 화승총으로 대표되는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하게 된 데에도 단순히 화약의 개선과 기술적인 요인만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자는 화승총의 개발과 확산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주도된 데 주목하여 이 지역의 분열된 정치체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봅니다. 즉 영국, 프랑스와 달리 작은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치자들은 공세적인 전쟁을 치르기 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는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이때문에 방어 전투에 적합한 개인용 소화기가 급속히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입니다.(이러한 주장은 초기 화승총의 운용이 야전에서도 창병과 참호의 지원을 받아 방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단순히 군사기술적 측면에만 집중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전쟁의 변화를 고찰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설명으로는 해결하기 곤란한 의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또한 기술적 측면에 대한 분석도 충실합니다. 15세기 화약 생산을 분석한 3장과 초기 화약무기의 탄도적 특성을 분석한 5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의 경우 20세기에 실시된 15~16세기 화약무기에 대한 실험 등 초기 화약무기의 기술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을 분석하여 기술적 한계가 어떻게 화약무기를 활용한 전술을 형성했는지 고찰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1988년 부터 1989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서 실시된 실험인데 이 실험의 결과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저자는 활강식 총신과 탄두의 형태로 인한 낮은 명중율과 원거리에서의 위력 부족으로 초기의 소화기는 근거리에서 대규모 일제사격을 퍼붓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런 전술에서는 명중율 보다 발사속도가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총신에 강선을 파는 방식으로 명중율을 높이는 방법이 있음에도 널리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장전속도가 느려져 대규모 보병전투에는 약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이런 구성은 꽤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한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서 다른 시기의 전술적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면서 중간에 변화의 요인이었던 기술적 문제에 대해 별도의 장을 활용해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이어지는 장을 이해하는데 훨씬 편리하다는 생각입니다. 기술적 변화와 전술적 변화를 함께 서술하는 것 보다 명료한 구성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례가 매우 풍부하다는 점 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영미권 학계에서 이 시기의 전쟁을 기술 할 때 영국과 프랑스의 사례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이탈리아, 보헤미아, 스페인 등 기술적, 군사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다른 지역의 사례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후스전쟁과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전쟁 말기의 화약무기 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후스전쟁에 대한 군사적 분석은 꽤 드문편이라 읽으면서 반갑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대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5월 7일 월요일

1차대전 당시 독일육군의 포병 지휘 구조

불법 날림 번역으로 땜빵하는 것은 계속 됩니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군은 야전포병(Feldartillerie)과 중포병(Fußartillerie)을 엄격히 분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전포병 내에서도 중야전포대대는 기동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쟁 초기의 경험을 통해 잘못됐다는 것이 입증됐다. 전투의 주역인 보병지휘관들의 견해가 가장 존중됐는데 이들은 중포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 때문에 이 무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급 포병지휘관들도 점차 보병 전투의 양상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됐다. 포병지휘관들은 중포와 경야포의 화력 통제를 담당할 책임을 지게 됐다. 이 때문에 각 포병부대를 통합해서 지휘할 수 있는 통일된 고급포병지휘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런 대대적인 개편을 담당하는 것은 힌덴부르크 체제하에서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야전포병의 경우 가장 높은 지휘부는 보병사단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Kommandeur der Feldartillerie-brigade)였다. 전쟁 발발 당시 독일 육군에는 총 52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1914~1916년 사이에 신규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중 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18개, 예비포병지휘부가 14개, 향토야전포병지휘부가 1개, 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4개 였다.1)

중포병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는데 군단의 경우 동원 개시 당시 단 한 개의 중야전포병대대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군단포병의 경우 고급포병지휘부가 없었다. 대신 야전군 사령부나 육군총사령부 직속 예비대로 1~3 중포병사령부(General der Fußartillerie)2)와 1~9 중포병여단지휘부(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3)가 있었다. 야전군급 부대는 강력한 공성포병부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고급중포병지휘부도 있었다. 이 때문에 제 2군의 경우 제 3중포병사령부를, 제 4군과 제 6군은 각각 제 1중포병여단지휘부와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Königlich Bayerisches Fußartillerie Brigade-kommando 2)를, 제 5군은 제 1중포병사령부와 제 6중포병여단지휘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참호전이 장기화 되자 전 전선에 걸쳐 중포병의 수요가 증가했고 육군총사령부는 각 야전군 사령부 직할로 중포병부대를 총괄 지휘할 사령부를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또한 필요에 따라 투입할 수 있도록 동급의 사령부를 예비로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마침내 1915년 가을, 독일군은 모든 야전군급 포병 사령부의 명칭을 “중포병사령부”로 통일함과 동시에 20개의 사령부를 신설했다.4) 이후 야전군 예하 포병부대의 화력분배 및 사격통제는 중포병사령부과 총괄하게 됐다. 베르됭 전투에서 중포병 부대를 집중운용 한 결과 중요한 전역에 추가로 투입할 수 있도록 고급포병지휘부를 추가로 편성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 결과 중포병사령부는 37개로 늘어났다.

그 결과 힌덴부르크 체제에서 고급포병지휘부는 총 89개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37개의 중포병사령부로 증가했다. 포병이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과 중포병과 야전포병의 효과적인 협동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조직이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육군총사령부는 이것을 위해서 통합된 포병 지휘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1917년 2월 독일 전쟁성(Kriegsministerium) 명령에 따라 야전포병여단지휘부와 중포병사령부를 통합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제 1~13 포병사령부(General der artillerie)를 창설하고 (2) 각 사단에 배속된 경포병대대와 중포병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포병지휘부(ArKo, Artillerie Kommandeur)를 둔다.

13개의 포병사령부 사령관 중 단 한명을 제외하면 모두 중포병사령부 출신이었다. 이 중 제 9포병사령부는 1917년 3월 해체됐다. 그리고 다시 1917년 7월 6일 이것을 대신해 제 14포병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8년 7월 14일에 제 15, 16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육군총사령부는 각 포병사령부를 상황에 따라 강력한 포병 전력을 필요로 하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당연히 포병사령부가 주로 투입된 곳은 서부전선이었다.

포병사령부의 지휘관은 보통 여단장이나 연대장급이었으며 두 명의 부관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포병사령부는 야전군 사령부에 배속되면 두 명의 참모 장교와 함께 야전군 소속의 통신반을 배속 받았다. 제 1포병참모장교(StOArt, Stabsoffizier der Artillerie)는 모든 전술, 조직문제와 가스탄, 고폭탄 사격 훈련과 매일 발생하는 문제의 교정 등을 담당했다. 제 2포병참모장교는 포병에 대한 보급 및 정비반에 대한 보급을 담당했다. 마지막으로 통신반은 포병관측기구반, 사진반, 포병조사반과 연계해 적 부대의 배치에 대한 최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했다. 또한 정보반은 포병용 지도의 작성을 책임졌다.

이쯤에서 1916년 4월 29일 동부전선의 나로치(Нароч) 호수 전투에서 강력한 포병부대를 통합 운용해 큰 성과를 거둔 포병 지휘관 한명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브루흐뮐러(Georg Bruchmüller) 중령은 전쟁 이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포병 지휘체계의 대대적인 개편 이후 제 86포병지휘부(ArKo 86)의 지휘관이 됐다. 이동탄막사격, 즉 포격을 보병의 전진에 맞춰 수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모든 포병 지휘관 보직에 충분히 경험 있는 장교들을 충원할 수는 없었다.

브루흐뮐러는 초기부터 야전군 사령부의 중앙 통제하에 실시되는 포격의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의 서부전선에서는 이동탄막사격을 할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브루흐뮐러는 동부전선에서 이동탄막사격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휘체계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독일 육군총사령부는 브루흐뮐러를 서부전선으로 배속시켜 1918년 춘계대공세 준비를 담당하게 했다. 브루흐뮐러의 방식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입증됐다. 부르크 호에넥(Burg Hoheneck)에 있는 브루흐뮐러의 조각상 밑에는 기념비가 있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 [돌파 브루흐뮐러 Durchbruchmüller라는 별명을 가진 브루흐뮐러 대령은 1918년 3월 21일 제 18군의 포병을 지휘해 성공적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실시해 아미앵 방면으로 대규모 돌파를 성공시켰다.]

1918년의 대공세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포병사격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실시됐다. 이 사격은 이른바 풀코프스키(Pulkovski) 방식에 의한 훈련을 통해 가능했다. 이 방식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오차를 없앴으며 신속한 수정 사격을 가능하게 했다.

포병지휘부(ArKo)는 포병사령부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 졌으며 기존에 있던 야전포병여단을 대체했다. 이 중 27개는 기존의 야전포병여단지휘부를 개편해 만들어 졌다. 그리고 나머지는 신규편성 되거나 다른 야전포병이나 중포병 부대를 개편해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단포병지휘부의 단대호는 제 1~8근위, 제 1~23바이에른, 제 1~255(중간에 65개가 빠진)였다. 새로 개편된 단대호에서는 예비 또는 향토 부대의 구분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총 221개의 Arko가 편성되었다. 포병지휘부의 지휘관은 계급상 연대장 이하였다. 포병지휘부의 참모진은 한명의 부관, 두 명의 연락장교, 한 명의 통신 장교로 구성됐다.

ArKo의 지휘관은 실제 전투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포병 지휘관이었다. 포병지휘부의 명령하에 사단 편제 포병과 상급 부대에서 배속된 수많은 야전포병 및 중포병 부대가 움직였다. Arko는 부여된 임무 내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인접 사단의 포병과 배속된 독립 포병부대간의 조율도 책밈 져야 했다.
원거리의 목표에 대한 포격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야전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Hermann Cron, Imperial German Army 1914-18 : Organisation, Structure, Orders-of-Battle, Helion & Company, 2002, pp.131~134

각주

1) 새로 편성된 지휘부는 제 5근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0바이에른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50, 52, 54, 56, 58~67, 123, 220야전포병여단지휘부(이 중에서 61, 65, 66포병여단지휘부는 육군총사령부 직할이었다.), 제 23, 24, 26, 28, 75~82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 8 바이에른예비야전포병여단지휘부, 제 1바이에른향토야전포병여단지휘부, 그리고 제 4, 8, 10, 19보충야전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다.
2) 이와 함께 세 개의 중포병총감부(Fußartillerieinspektion)가 있었다.
3) 전쟁 이전에는 8개의 중포병여단지휘부가 있었으며 1914년 8월 새로 제 2바이에른중포병여단지휘부가 편성됐다.
4) 1917년 9월 17일자 전쟁성 명령에 따라 제 1~6중포병사령부와 제 1~3바이에른중포병사령부, 바르샤바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벨기에 총독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 마지막으로 해안방어사령부 소속의 중포병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이번에 베낀 책은 193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인데 그다지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흥미로운 점 하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ArKo는 사단급 포병을 지휘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점 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ArKo는 군단급 포병 지휘부였지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병부대의 구조에 대해서는 채승병님의 글, 2차 세바스토폴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독립 포병부대를 참고하십시오.

2006년 8월 9일 수요일

독일 육군의 포병 1871-1914

1.1870-71년 전쟁

보불전쟁에서 크룹(Krupp)의 6파운드 포를 장비한 독일 포병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독일 포병은 불과 4년 전 보오전쟁의 쾨니히스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포병에 압도돼 보병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던 것과는 달리 주요 전투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전술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마-라 투르(Mars-la-Tour) 전투에서 프랑스군 사상자의 60%가 독일 포병에 의한 것 이었고 그 직후의 그라벨로(Gravelotte) 전투에서는 무려 70%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 포병은 그라벨로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보다 세배 많은 포탄을 발사하면서 화력면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으며 프랑스군의 국지적인 역습을 격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포병은 청동제 포신에 강선도 없는 포구 장전식 4파운드 포와 위력은 좋지만 기동전에는 부적합한 12파운드 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군 보다 화력면에서 뒤떨어 졌다. 그리고 수 년 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화력의 집중운용을 써먹어 크게 재미를 봤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군이 이 방식을 써먹는 바람에 피박을 보게 됐다.

이 전쟁을 참관한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독일군의 후미장전식 철제 강선포가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 크게 주목했다.
이미 벨기에는 1866년에 크룹의 철제 강선포를 도입했고 보불전쟁 이후 유럽 각국은 철제 강선포 확보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독일 포병은 전술 운용 면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제는 보병에 대한 직접 화력지원을 위해 적의 소총 사거리 안 까지 무리하게 전진해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 포병은 공격하는 보병중대의 600m 후방까지 따라붙어 직접화력지원을 했는데 보오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소총은 이 거리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던 반면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개틀링과 샤스포 소총은 900m 에서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라벨로 전투에서 18 보병사단을 지원하던 포병들은 프랑스군의 샤스포 소총 사격을 많은 피해를 입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군 포병은 총 병력의 6.5%의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은 기병의 6.3% 보다도 조금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어쨌든 독일은 승리했다.
독일은 포병 전력의 우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신형 장비의 도입을 서둘렀다.

2.러시아-터키 전쟁과 대구경 야포 도입 문제 : 1872-1882

보불전쟁 이후 세계 각국의 군사 관계자들은 현대 전쟁에서 포병의 중요성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게 됐다.
독일군이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보여줬듯이 효과적인 공격준비 사격은 중요한 요소였지만 이를 위해서는 소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효과적으로 포격을 할 수 있는 야포가 필요했다.

독일은 보불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6파운드 포를 대체할 신형 야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1874년 채용된 것이 88mm C-73 이었다.
C-73의 최대 사거리는 7,000m로 6파운드 포에 비해 거의 2배 이상 늘어났으며 함께 도입된 신형 포탄의 파편효과도 크게 향상돼 보병에 대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편효과가 두 배 향상된 C-76 유탄이 도입됐다.

그러나 아직 1870년대의 포병 장교들은 C-73의 향상된 사거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전술에 맞춰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무렵의 일반적인 포병 전술은 2,000-2,500m 에서 적 포병을 무력화 시킨 뒤 600-700m 까지 전진해 직접 화력지원을 하는 것 이었다.
1876년 당시 포병 소령이었던 호프바우어(Ernst Hoffbauer)가, 그리고 1878년에는 포병 연대장이었던 쉘(Adolf von Schell)이 이런 내용의 교범을 저술했다. 특히 쉘의 경우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1880년에 이르러 C-73이 기존의 야포들을 대체하면서 이 우수한 물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강구됐고 점차 군사 이론가들은 보병을 뒤따르며 직접화력을 지원하는 것 보다는 보다 늘어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활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인정하게 됐다.
먼저 1880년 몰트케가 직접 화력지원에는 포병 전력의 극히 일부만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포병은 적 방어전면으로부터 최소 2,000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사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881년 7월에는 이것이 문서로 공식화 됐다.
그리고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에 대한 중요성이 줄어 들면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소구경, 경량의 화포 보다는 장거리에서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대구경 화포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했다.
쉘 같이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는 이론가들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은 보수적인 이론가들에게도 충격을 안겨 줬다.

1877년의 플레브나(Plevna) 전투는 대구경 야포의 도입을 주장하던 이론가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았고 경량의 소구경 야포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을 강조하던 이론가들에게는 그들의 이론이 미래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줬다.
러시아군은 플레브나의 터키군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매번 막대한 손실만 내고 실패했다. 러시아 포병은 주요 공세 때 마다 300-400문의 야포를 동원해 3-6시간의 공격 준비사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의 소구경 야포들은 참호로 강화된 터키군의 방어진을 분쇄하는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독일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야전 축성의 중요성과 이를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이미 남북전쟁 시기부터 제기하고 있었다.
남북전쟁 당시 중령의 계급으로 북군의 여러 요새 공격을 참관한 프로이센군의 쉘리아(von Scheliha)는 소구경 화포의 포격이 남군의 야전 축성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어 보불전쟁에서도 4파운드 포와 6파운드 포는 참호에 들어앉은 프랑스군을 때려잡는데 효과가 적다는 것이 입증됐다.

보불전쟁 직후인 1872년, 젊은 포병 장교들은 보다 대구경인 120mm 유탄포의 도입을 요구했으나 군 상층부는 당시 개발 중이던 C-73으로 야전포병의 장비를 통일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120mm 유탄포는 결국 도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브나 전투의 결과 독일의 보수적인 이론가들 조차 적의 야전 축성을 분쇄하기 위한 대구경 화포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C-73은 기존의 포병 교리에 맞춰 개발됐고 특히 탄도가 직사인데다가 사용하는 포탄도 파편효과를 노리고 개발된 것 들이어서 야전 축성에 대한 공격에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플레브나 전투 이후 몰트케는 총참모부에 현대 야전 축성과 이를 공략하기 위한 대구경 야포 문제를 적극적으로 연구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은 1882년 새로 도입한 150mm 구포(Mörser)와 1872년 도입된 210mm 구포로 적 참호에 대한 공격을 시험해 봤으나 두 종류 모두 매우 형편없는 결과를 보였다.
게다가 프랑스가 1885년과 1886년에 걸쳐 베르덩(Verdun), 벨포르(Belfort) 요새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강화한 것은 독일군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줬다.
당시 독일 포병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구성된 야전 축성을 분쇄할 효과적인 수단이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3.프랑스의 도전과 러일전쟁의 영향 : 1883-1904

독일의 군사 이론가들이 새로운 전쟁 환경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프랑스는 복수의 칼을 열심히 갈고 있었다.
혁신적인 포병 장교단은 1886년부터 대구경 유탄포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887년이 돼서야 뒤늦게 120mm 유탄포가 독일군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0mm 유탄포의 초기 야전 실험은 포병들이 직사탄도를 가진 C-73에 익숙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군 상층부에서는 C-73과 기존의 포병 운용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1897년에 도입된 77mm C-96은 포신에 니켈 합금강을 사용해 C-73의 단점이었던 짧은 포신 수명을 극복했지만 기본적으로 20년이나 뒤떨어진 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가 1898년에 도입한 75mm 포에 비해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프랑스군의 75mm 포는 유압식 제퇴기 등 최신 기술을 적용해 분당 발사속도가 최대 20발(!)에 달했는데 이것은 보병에 대한 직접지원사격을 중시하는 교리에서 보면 엄청난 장점이었다. 반면 C-96은 분당 발사속도가 5발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어수선한 상황을 해결한 것은 발더제의 뒤를 이어 육군 총참모장이 된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이었다.
슐리펜은 1896년 참모본부에 대구경 유탄포의 잠재성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결과 105mm l.FH 98의 개발이 시작됐다. C-96을 선호한 보수적인 포병 장교들은 l.FH 98이 일곱 종류의 탄약을 사용해 신속한 이동과 운용이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특히 1891년에 포병감에 임명된 호프바우어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FH 98은 1900년부터 양산돼 대량으로 장비되기 시작했다. 결국 호프바우어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포병장교단과 슐리펜을 중심으로 한 총참모부 및 개혁적인 포병장교단의 대결은 후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한편, 1900대 초 까지 88mm C-73과 77mm C-96이 주력 야포였던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유압식 제퇴기를 갖춘 75mm포의 등장으로 크게 한방 먹게 됐다.
무엇보다 프랑스군의 75mm포의 압도적인 발사 속도는 독일 총참모부에 큰 충격이었다.
1901년에 전쟁상 이었던 고슬러(Heinrich von Gossler)는 육군에 프랑스군의 75mm포에 대응할 야포의 개발을 명령했다.
특히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압도적인 포병 전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이 사용한 막심 75mm 포의 속사에 큰 피해를 입었고 이것은 독일군에게도 속사가 가능한 야포의 개발을 서두르게 했다.
그 결과 1907년에 C-96을 개량한 C-96 n/A(neue Art)이 채용됐는데 이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한편, 러일전쟁은 독일군에게 현대적인 요새를 효과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대구경 화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 줬다.
일본군은 려순 요새 공격에 총 443문의 야포를 투입했지만 18문의 280mm 포와 72문이 투입된 150mm 구포를 제외하면 러시아군의 방어망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인 물건은 별로 없었다. 특히 120문이 투입된 75mm 포는 잘 구축된 야전축성에 대해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 했다.

4.중포의 도입과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 : 1905-1914

독일은 1903년 까지 총 23개 군단 중 105mm 이상의 중포를 장비한 군단이 단 하나도 없었으나 1904년 150mm s.FH 02가 채용되면서 조금씩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04년 10개 포대가 150mm s.FH 02를 장비한 이후 배치가 확대됐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 했듯 프랑스군의 75mm 포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으로 C-96의 개량형인 C-96 n/A가 1907년부터 육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C-96 n/A는 유압식 제퇴기를 갖춰 프랑스군의 75mm와 거의 비슷한 발사 속도를 가지게 됐고 포 방패를 장비해 포병에 대한 보호도 강구 됐으나 신형 포신을 장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정거리는 프랑스의 75mm 보다 1,000m가 짧았다.
이와 함께 105mm l.FH 98를 개량한 l.FH 98/09가 1910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신형 105mm 포의 생산과 함께 23개 군단에 각 3개 포대로 구성되는 105mm 포병 대대를 배속시키는 한편 1913년 까지 105mm 포의 배치를 664문으로 늘려 프랑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리고 사단 포병의 1개 대대는 105mm l.FH 98/09를 장비해 프랑스군 사단을 화력면에서 완전히 압도할 수 있게 됐다.
또 150mm 유탄포는 1913년 까지 400문이 배치돼 각 군단은 4개 포대의 150mm를 보유할 수 있게 됐다.

신형 장비의 도입과 함께 포병 교리도 완전히 바뀌게 됐다.
1907년의 포병 교범은 이미 사실상 폐지된 것이나 다름 없던 보병에 대한 직접화력 지원을 폐기했다.
러일전쟁에서 드러 났듯 참호에 들어 앉은 보병을 1,000m 이내의 근거리에서 직접 사격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리고 1907년 포병감으로 임명된 슈베르트(Schubert) 장군은 프랑스 군과 마찬가지로 포 진지를 위장하고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른 사격을 강조했다.
유선 전화의 도입은 전방의 관측 장교와 후방의 포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효율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10년 독일군의 야전 기동을 참관한 프랑스 장교단은 자신들이 먼저 사용한 방식을 독일군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점에 주목했다.
물론 대개 보병 병과인 군단장급 장성들은 5,000m 이상의 거리에서 관측장교의 통제에 따라 사격하는 것을 포탄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갈수록 강화되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은 대구경 공성포의 개발을 가속시켰고 1903년에는 신형 210mm 구포가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총참모부는 여러 실험을 거친 결과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구축된 요새에 효과적인 물건은 1906년 당시 겨우 6문이 생산된 305mm 베타(Beta Gerät)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보다 더 강력한 공성포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1909년에는 420mm 유탄포인 감마(Gamma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는 2년에 걸친 테스트를 받은 뒤 1911년 육군에 인도 됐다.
그러나 감마는 무려 175톤에 달하는 괴물이었기 때문에 육군에서는 크룹에 좀더 이동과 운용이 용이한 420mm 포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고 이 결과 44톤에 불과한 420mm M Gerät가 개발됐다.
감마의 최대 사거리가 17km에 달한 반면 M Gerät는 그 절반에 불과한 9km에 불과했고 포탄의 위력도 약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벨기에와 프랑스의 요새들을 격파하기 서는 8문의 420mm와 16문의 305mm, 그리고 이를 지원할 100문 이상의 210mm급 구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305mm의 경우 배치된 수량이 부족해 1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스코다제 305mm포를 빌려와야 했다.
독일군은 1911년 까지 예산 문제로 305mm 포를 10 문 확보하는데 그쳤는데 이것은 1년 평균 1 문도 생산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1914년 까지 추가로 2문이 더 생산되는 데 그쳤다.

독일군의 중포 및 공성포 배치는 원래 계획에는 조금 못 미치는 것 이었으나 다른 경쟁국들에 비하면 압도적인 것 이었다.
특히 개전초기의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화력은 벨기에의 요새들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Eric D. Brose, The Kaiser’s Army – The Politics of Military Technology in Germany during the Machine Age 1870-1918
Antulio J. Echevarraia Jr, After Clausewitz – German Military Thinkers before the Great War
David G. Herrmann, The Arming of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First World War
Jonathan M. House, Combined Arms Warfare in the Twentieth Century
Jay Luvaas, The Military Legacy of the Civil War – The European Inheritance
Bruce W. Menning, Bayonets before Bullets – The Imperial Russian Army, 1861-1914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ian War – The German Conquest of France in 1870-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