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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3일 일요일

러시안 소설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의 역작인 스탈린그라드 3부작의 마지막 3부의 출간 소식을 접한 뒤 제2권을 한번 더 훑어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글랜츠의 저작 중에서 러시아와 독일 자료의 교차검증이 가장 잘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꽤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교차 검증을 통해 소련이 독일군의 전력이나 피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물론 유동적인 전장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이것만 가지고 소련 자료들을 엉터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꽤 흥미로운 지적들이니 몇가지 예를 인용해 보지요.(원서의 주석은 일단 생략합니다.)



대부분의 소련과 러시아 문헌은 제62군의 병력 54,000명과 제64군의 병력 36,000명을 합쳐 총 90,000명의 소련군이 독일군 170,000명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제14기갑군단을 포함해 독일군이 시가전에 투입하지 않은 부대를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공격한 바익스Maximilian Freiherr von Weichs의 충격 집단의 병력은 80,000명으로 전차와 돌격포 100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중략)

러시아 문헌들은 대부분 독일 제6군이 소련 제62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 지구에 5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9월 13일 기준으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는 제24기갑사단과 제14기갑사단을 합쳐 전차 30~40대, 제29차량화 사단의 전차 20대를 포함해 100대 남짓한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David M. Glantz, Armageddon in Stalingrad : September-November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9), pp.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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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추산에 따르면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은 증원병력을 받아 제62군을 공격하는 충격집단의 규모를 병력 90,000명으로 늘리고 여기에 2,300문의 야포와 박격포, 전차와 돌격포 300대, 제4항공군에 소속된 항공기 1,000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추산한 통계는 신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집계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때 이 부대들의 병력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북서쪽의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남쪽의 호수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제14기갑사단은 일일 평균 50대 정도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였으며 제24기갑사단은 30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 지구에서 소련군을 상대한 독일 제6군의 충격집단에 소속된 기갑전력은 제244돌격포 대대와 제245돌격포대대의 돌격포를 합쳐도 100대가 채 안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러시아 문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76보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사단에 배속된 부대 중에서 스탈린그라드 공장지구에 대한 최후의 공격에 투입된 부대는 사실상 없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에 소속된 보병과 기갑척탄병은 심각하게 소모되어 제6군의 일선 전투 병력은 80,000명 미만으로 소련 제62군의 55,000명과 비슷하거나 이것 보다 더 적은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독일 제6군은 10월 17일 기준으로 총 병력을 334,000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일선의 전투 병력은 고작 66,549명으로 이중 상당수는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Glantz, ibid., pp. 355~356


사실 이시기 소련군의 야전부대는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고 전투가 계속되면서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추이코프라는 인물의 회고록 입니다. 제2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보니 제62군 사령관 추이코프의 회고록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공식 기록 보다도 과장이 심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노골적인 왜곡으로 보이는 부분까지 있습니다. 전쟁 당시 소련군 야전부대의 정보 분석은 실전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잘못된 분석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가 있는데 추이코프 회고록은 그런 식으로 변호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9월 말에 있었던 노동자 주택단지를 둘러싼 전투에 대한 추이코프의 회고에 대해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9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제24기갑사단의 에델샤임 전투단과 빈터펠트 전투단은 진격하면서 포로 280명을 잡고 전차 5대, 대전차포 9문, 대전차소총 32정, 박격포 7문, 화염방사기 2개, 자폭견 4마리를 격파, 사살하거나 노획했으며 전사자 25명과 부상자 164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24기갑사단이 획득한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을 방어하는 소련 제62군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제24기갑사단은 9월 28일의 전투에서 총 28명의 전사자와 94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략)

9월 28일의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데, 제100경보병사단은 전사자 70명, 부상자276명, 행방불명 10명이 발생했으며 제295보병사단은 전사자 10명과 부상자 44명이 발생했다. 


(중략) 

추이코프는 9월 28일의 전투에서 독일군이 “최소한 1,500명의 전사자”와 “30대 이상의 전차를 완전손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마예프 쿠르간의 비탈에만 독일군의 시체 500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추이코프는 제62군의 손실이 심각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포포프의 제23전차군단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626명이나 냈으며, 바튜크의 제284소총병사단은 300명의 인명 손실을 당했다. 고리쉬늬의 제95소총병사단은 “한줌의 병력만 남은” 상태에 불과했다. 

Glantz, ibid., pp. 26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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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오전 늦게 제389보병사단은 제24기갑사단의 1개 전차중대와 제245돌격포 대대의 돌격포 10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해 제37근위소총병사단의 방어선 중앙과 우익을 공격했다. 제389보병사단의 2개연대에 소속된 여러개의 대대급 전투단들이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부터 슈넬헤프터 블록의 북서쪽의 철도 지선을 따라 공격을 감행했고, 3분의 1 정도의 병력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서쪽을 직접 공격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전차 20여대의 지원을 받는 2개 연대 병력만 투입했지만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과장했다. 

“이 공격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적은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2개 사단과 5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해 공격해왔다.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다. 졸루데프가 지휘하는 사단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은 예비대를 동원해 여러차례에 걸쳐 공격을 계속했다. 적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날 저녁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한 블럭을 점령했으며 경기장 근처까지 밀고들어왔다. 스타호노브체프와 스쿨프투르늬 공원은 아군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제62군의 일지는 추이코프의 회고록 보다는 정확한 편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디젤나야, 바리카디 마을, 107.5고지 일대에 집결한 적은 대규모의 병력(2개 사단과 전차 80~90대)를 동원하여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방향으로 총공격을 해왔다.제37근위소총병사단과 제84전차여단은 전차 45~50대의 지원을 받는 적 2개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적은 베르흐네-우딘스크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그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와 지토미르스크 등 다른 축선에서도 공격해왔다. 적은 첫번째 공격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중략) 

붉은 군대 총참모부의 일일작전요약에서는 추이코프가 보고한 10월 7일의 전투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추이코프가 주장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62군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차량화 사단으로 구성된 적을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전개했다. 적은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제37근위소총병사단, 제84전차여단, 그리고 제112소총병사단의 잔여 병력은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와 지토미르스크를 공격하는 적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7일이 끝나갈 무렵 적은 수르코프 거리와 우스튜즈스카야 거리의 끝, 지토미르스크와 스쿨프투르늬 공원 외곽에 도달했다. 이날 4개 대대 규모의 적 병력과 전차 16대를 섬멸했다. 적은 더이상의 진격하지 못했다. 제42소총병여단은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쪽의 두개의 건물과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부를 잇는 선에 도달했다. 제62군에 소속된 다른 부대의 위치는 동일하다.” 

추이코프가 과장한 독일군의 규모가 어떻던 간에, 예네케가 지휘하는 제389보병사단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남쪽의 소련군 방어선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제51군단의 전선을 균일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0월 7일에 전개된 짧지만 격렬한 전투로 제24기갑사단은 장교와 병사 51명이 부상당했고, 제389보병사단은 전사 20명, 부상 45명의 피해를 냈다. 

Glantz, ibid., pp. 338~340


추이코프는 10월 중순의 트랙터 공장 전투의 결과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 제51군단이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이 10월 14일에 입은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쳐 538명이었다.  

Glantz, ibid.,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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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10월 17일의 전투 결과를 평가했는데 독일군이 우세했던 것이 확실하다. 독일군은 바리카디 공장의 서쪽과 북쪽에서 소련 제6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구르티예프의 제308소총병사단을 섬멸하고 류드니코프의 제138소총병사단이 지리멸렬하여 바리카디 공장으로 패주하게 만들었다. 제51군단의 보고에 따르면 투항자 103명을 포함해 860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장비가 노획되었다. 추이코프는 제51군단의 전차 40대를 격파하고 독일군 2,0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독일군의 손실은 576명에 불과했다. 손실 내역은 전사 91명, 부상 469명, 행방불명 16명이었다. 하지만 추이코프가 주장한 독일군의 전차 손실은 실제와 비슷하다. 10월 17일이 끝날 무렵 제24기갑사단은 전투 시작 당시 가동가능했던  전차 33대 중 4대만 남아 있었으며, 제14기갑사단은 33대 중 19대만 남아 있었다. 

Glantz, ibid., pp. 418~419.


인용한 것 이외에도 추이코프가 전과를 과장하고 전황을 왜곡하는 사례가 몇건 더 실려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역사가인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로브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소련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졸렬한 지휘를 변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승리하는 경우에는 전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피해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추이코프도 예외는 아닌 것 입니다.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발상의 전환? : 모스크바 전투당시 소련군의 영국제 전차 운용

미국과 영국의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승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렌드-리스로 원조된 물품 중에서 전차와 항공기 같은 전투장비는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중 소련이 생산한 전차의 대수와 렌드-리스로 제공된 전차의 대수를 비교해 본다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입니다. 소련이 생산한 기갑차량을 모두 합치면 11만대에 달하는데 영국이 원조한 전차는 4,542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게 그렇게 당연하다면 세상은 정말 심심하겠지요.

캘거리 대학 교수인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관점을 살짝 바꿔 볼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 전 기간 동안 원조된 전차의 대수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의 전차가 원조되었는지 살펴보자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기준을 그렇게 바꿔본다면 의외의 결론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힐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호 2권(2006)에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for Moscow, November-December 1941—A Research Note라는 제목의 짤막한 논문을 기고 했고 이어서 22호 4권(2009)에 이것을 수정 보완한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of Moscow, November-December 1941 — Revisit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힐이 이 두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영국이 원조한 영국제 전차는 소련군 기갑전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를 통해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주요 공업지대에서는 생산설비의 소개를 시작했고 이것은 일시적으로 군수품 생산에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위해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각종 군사장비를 원조했고 여기에는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750대의 전차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이 중 466대가 12월까지 소련에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에 원조된 영국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발렌타인으로 총 259대가 보내졌고 마틸다(A12)는 187대, 그리고 나머지는 테트라크(Tetrarch, A17) 경전차 였습니다. 이중 소련군 부대에서 인수한 것은 발렌타인이 216대, 마틸다가 145대 였습니다. 영국제 전차가 처음 소련군에 인도된 것은 10월 28일로 이날 20대 가량의 발렌타인이 카잔 전차학교에 도착해 승무원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면서 영국제 전차를 인도받은 부대들은 황급히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목전으로 쇄도하고 있던 11월 20일에 영국제 전차를 장비한 소련군 부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대
마틸다
발렌타인
146전차여단 137전차대대
21
146전차여단 139전차대대
21
131독립전차대대
21
132독립전차대대
2
19
136독립전차대대
3
9
138독립전차대대
15
6

이 중 132독립전차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총 96대가 투입된 셈인데 이것을 당시 소련군이 모스크바 축선에 투입하고 있던 기갑전력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힐은 러시아측의 자료를 인용해 11월 말에 모스크바 방면에 배치된 소련군의 기갑전력은 영국제 전차를 포함하여 670대, 그리고 이중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중형 이상의 전차는 205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방면 소련군의 중형전차가 205대로 집계되었던 것이 정확하게 11월 20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모스크바 방어전의 결정적이었던 시점에서 영국제 전차는 결정적이진 않더라도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영국제 전차들은 신통치 않은 성능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렌타인이나 마틸다는 최고 35~40cm의 눈이 덮인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었는데 이건 고작 T-60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T-34는 70cm 정도의 눈이 덮힌 야지에서도 거뜬히 움직였으니 비교하기가 좀 그렇죠. 게다가 2파운드 포는 전차포로서 범용성이 떨어지는 고약한 물건이었고;;;; 하지만 당시 소련측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됐습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문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소련은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었고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T-30이나 T-40 같은 경전차도 12월까지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국제 전차들이 T-34나 KV 계열에는 못 미치지만 최소한 소련이 생산하고 있던 경전차들 보다는 좀 더 유용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국제 전차를 받은 부대는 15일 정도의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전선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성능 고약한 영국 전차에 훈련 부족한 전차병들이 탔으니 뒷 이야기는 대략 상상이 가능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의 전차 운용 방식은 영국제 전차들의 운용방식과도 어느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것 입니다. 소련군 기갑부대는 독소전 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이때문에 대규모 전차군단은 대부분 전멸하거나 해체되게 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 당시에는 전차여단이나 독립전차대대 단위로 분산 운용되면서 보병부대의 지원을 주임무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틸다와 발렌타인은 바로 '보병전차'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힐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영국이 제공한 전차들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중요한 '머릿수'를 채우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동부전선에서 운용하기에는 성능도 부족하고 기계적 신뢰도가 낮은데다 승무원들의 훈련 수준도 낮았지만 있어줘야 할 시점과 장소에 존재했다는 것 입니다.

2007년 11월 16일 금요일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소련의 동원 문제

오늘의 이야기는 독일육군의 흑역사 -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시의 사례에 이은 속편입니다. 이번의 주인공은 천하의 대인배 스탈린 동지의 지도를 받는 붉은군대입니다.
사실 전편의 독일군은 총통의 갑작스러운 명령으로 만슈타인이 불과 몇 시간 만에 뚝딱 만든 계획으로 움직이다 보니 엉망이 되었는데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의 소련군은 오래전부터 계획이 세워지고 준비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었다는 점에서 더 안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과거 소련의 공식적인 문헌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는군요.

소련군대에 폴란드 국경을 넘어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근로인민들을 폴란드 의 압제와 파시스트의 노예화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마자 벨로루시 전선군과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든 병사와 지휘관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영광된 인민해방의 임무를 달성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선군 군사평의회의 명령서는 소련 병사들은 서부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로 «정복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형제들을 지주와 자본가들의 모든 압제와 착취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진격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소련 병사들은 특히 인민들을 위협자들로부터 보호하고 민족에 상관없이 인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며 폴란드군과 폴란드 정부 관료들이라도 소련군에게 저항하지 않을 경우 정중하게 다루도록 명령받았다. 또한 공세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도시와 마을에 대한 포격 및 폭격은 금지되었으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했다.
소련군대는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군작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소련군은 해방 전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엄격한 군기와 조직력을 유지해야 했으며 또한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 작전은 단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근로인민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독일 파시스트들의 노예화와 빈곤화, 그리고 완전한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수백년 동안 그들의 원래 조국과 민족으로 다시 통합되기를 갈망해온 인민들의 염원을 민주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Excerpts on Soviet 1938-40 operations from The History of Wafare, Military Art, and Military Science, a 1977 textbook of the Military Academy of the General Staff of the USSR Armed Forces」,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6 No.1, March 1997, pp.110-111

그런데 실제로 이 임무는 그다지 영광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특히 그 준비 과정은 영광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까지의 거리 만큼이나 멀었던 것 같습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이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폴란드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즉시 침공준비를 시작합니다. 9월 3일에는 키예프 특별군관구, 벨로루시 특별군관구, 하리코프 군관구, 오룔 군관고, 칼리닌 군관구,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에 다음과 같은 지시가 하달됩니다. 1) 전역까지 1년 남은 병사들은 1개월간 복무 연장 2) 각급 부대 지휘관 및 정치장교들의 휴가 취소 3) 모든 부대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기, 장비 및 물자를 점검할 것. 그리고 9월 6일에는 22호 동원계획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군관구의 예비역들은 전역 12년차 까지 소집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보로실로프는 동원 부대들에게 집결지들을 지정하고 이에 따라 폴란드와 인접한 벨로루시 특별군관구와 키예프 특별군관구는 소속 부대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이무렵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저항을 차근 차근 분쇄하면서 바르샤바로 쇄도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9월 11일에는 벨로루시 특별군관구가 벨로루시 전선군으로, 우크라이나 특별군관구가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개칭되어 침공준비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 동원된 붉은군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 : М. П. 코발레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3군 : В. И. 쿠즈네초프 군단지휘관
- 제 11군 : Н. П. 메드베데프 사단지휘관
- 제 10군 : И. Г. 자하르킨 군단지휘관
- 제 4군 : В. И. 추이코프 사단지휘관
- 볼딘 기병-기계화집단(Конно-механизированная Группа) : В. И. 볼딘 군단지휘관. 제 3, 6기병군단, 제 15전차군단
- 제 23 독립소총병군단
- 제 22 항공연대

우크라이나 전선군 : С. К. 티모셴코 1급 야전군지휘관
- 제 5군 : И. Г. 소베트니코프 사단지휘관 : 제 8, 27소총병군단, 제 14, 36전차여단
- 제 6군 : Ф. И. 골리코프 군단지휘관 : 제 13, 17, 49, 36소총병군단, 제 2기병군단, 제 24, 10, 38전차여단
- 제 12군 : И. В. 튤레네프 2급 야전군지휘관 : 제 6, 37소총병군단, 제 23, 26전차여단
- 제 13군 : 제 35소총병군단
- 기병-기계화집단 : 제 4, 5기병군단, 제 25전차군단
- 제 15 독립소총병군단
- 제 13 항공여단

이렇게 출동할 부대가 정해지고 집결지도 지정되었으니 해당 부대들이 기동을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미 소련은 1938년부터 22호 동원계획에 따른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했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1년 동안 준비를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첫 단계부터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원령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이 느리게 이뤄져서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이 작전을 위해 신규 편성하는 야전군들은 9월 17일이 돼서야 “대충” 동원을 완료할 수 있었고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을 때는 계획과는 달리 이미 편성이 완료된 부대들만 진격을 해야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동원이 완료된 것은 9월 27일의 일이었는데 이 때는 상황이 거의 종료됐을 무렵이죠;;;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핵심 기동전력인 제 25전차군단은 동원 3일차 까지 편제의 30%도 채우지 못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병력 뿐 아니라 장비 동원도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야 억지로 머릿수를 채울수는 있을텐데 없는 물건은 땅에서 솟는게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제 36전차여단의 경우 완전편제시 트랙터 127대가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동원된 것은 42대에 불과했으며 ZIS-6 트럭은 187대가 필요했는데 실제로는 15대에 불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제 25전차군단은 편제상 각종 차량 1,142대가 있어야 했는데 9월 11일 까지 451대를 확보하는 데 그쳤습니다. 제 13소총병군단은 편제상 2,500대의 트럭이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9월 7일까지 확보한 것은 1200대에 그쳤고 게다가 이 중에서 20%는 예비부품이나 타이어가 없어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단은 1,400통의 연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160통만 가지고 있었으니 차량이 있어도 모두 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벨로루시 전선군의 제 6전차여단은 장갑차가 단 1대도 없었습니다.
차량 같은 것은 대형 장비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원된 예비군에 지급할 개인 장비까지 부족했습니다. 제 27소총군단은 철모 16,379개가 모자랐으며 제 15소총군단은 군화 2,000족이 없었고 제 36소총군단은 허리띠 2,000개가 부족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동원된 부대들을 폴란드 국경까지 이동시킬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 입니다.
철도 수송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소련의 철도는 이탈리아의 철도와 비슷하게 돌아갔던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제 96소총병사단의 선발대인 41소총병연대는 두 시간 늦게 열차에 탑승했는데 제 44소총병사단의 경우 포병연대와 직할대는 침공이 개시될 때 까지 기차를 타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차 시간이 늦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집결지에서 기차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특히 전차부대의 경우는 심각했다고 합니다. 침공에 투입된 부대들 중에는 T-26을 장비한부대가 많았는데 T-26은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 기차역으로 행군하는 동안 자주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지요. 간신히 기차역에 도착한 몇몇 부대는 전차들의 엔진 및 동력계통의 수명이 행군도중(!!!!) 초과되어 기차를 탈 수 없었다는 어이없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머리가 세개 달린 T-28을 장비한 제 10전차여단은 12일에 기차에 탑승해 이동해야 했으나 실제로는 제때 화차가 준비되지 못 해서 16일에야 장비 적재를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대가 국경에 전개를 완료한 것은 19일 이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을 때는 일부 부대는 아직 화차에서 내리지도 못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철도는 물론이고 도로 이동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부대의 기동을 위해서는 사전에 도로를 잘 배분해 놔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지 못 해 한 도로에 여러 부대가 뒤섞이는 문제가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한편, 소련군대가 사전에 준비된 동원조차 완료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독일군은 폴란드를휩쓸고는 독소불가침조약에서 합의된 소련 영역까지 넘어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소련은 동원이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준비된 병력만 가지고 침공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은 부대들도 상당수는 편성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360독립통신대대의 경우 침공 당시 편제의 60%에 불과했고 제 362독립무전대대는 편제의 82%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1939년 9월 17일 오전 5시 40분, 폴란드 침공은 동원이 대충 완료된 상황에서 시작됐고 선발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 원래 침공에 같이 투입될 나머지 부대들은 계속 편성 중 이었습니다.
제 60소총병사단은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편제의 67%까지만 동원이 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특수병과의 동원률은 매우 낮았습니다. 제 81소총병사단의 경우 기술병과는 45%, 행정 및 보급병과는 69%, 의무병과는 47%, 수의병과는 79%만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을 수송할 자동차 대대의 정비중대는 편제의 20%만 채운 상태였습니다. 제 99소총병사단은 침공 직전인 16일 까지도 포병연대가 편성되지 않아 보병만 달랑 있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편, 먼저 나간 침공부대들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력 및 장비 부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특히 비전투 부대는 편제율이 낮았는데 이것은 작전 수행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경우 제빵부대들의 편제미달이 심각해 사단당 하루 12톤의 빵만 배급되고 있었습니다.(실제 배급 소요량은 17톤) 대부분의 침공 부대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진격했고 폴란드군의 식료품을 탈취하지 못한 부대들은 작전이 종료될 때 까지 배를 곯았다고 전해집니다.

폴란드 침공에서 드러난 소련군의 문제라면 크게 두 개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과 준비가 꾸준히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동원은 엉망이었다는 점. 둘째, 자국 영토 내에서 이동하는 것 조차 엉망이었다는 점. 이런 문제점은 핀란드 전에서도 거듭되었고 결국 1941년의 대재앙의 기원이 되고 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