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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9일 목요일

판필로프의 28 근위대원 등 소련의 전시 프로파간다에 대한 잡설


소련의 유명한 전쟁 영웅담인 판필로프의 28 근위대원이 종군기자에 의해 날조된 이야기라는 점은 이제 역사학계에서 '거의' 공인된 사실입니다. 물론 러시아 내에서는 다른 날조된 영웅담들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멍청한 짓에 불과하죠.

하지만 판필로프의 28 근위대원이 날조된 선전에 불과하다고 해도 무의미한 비웃음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관한 네권의 연구서를 낸 데이빗 스타헬(David Stahel)은 마지막권인 The Battle for Moscow(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의 144쪽에서 판필로프의 28 근위대원 이야기에 대해 '비록 날조된 이야기이지만 이로인해 다른이들이 용기를 내 분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꽤 공정한 시각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비단 전쟁 초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소련쪽 주장과 독일 자료를 교차검증해 보면 어떨때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련군의 전술적 졸렬함은 구제불능 수준입니다. 러시아 역사가 발레리 자물린은 전쟁 당시 소련군 내에서는 기록의 과장과 날조가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 사실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해서 소련군의 많은 손실을 정당화 하려는 경향은 현대의 러시아 연구에서도 간혹 나타납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수많은 이들의 용맹과 희생을 통해 승리를 거둔 것 또한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특히 적군이 수도의 코 앞에 육박해온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판필로프의 28 근위대원과 같은 영웅담이 날조된 것은 어쩔수 없는 결과였을 것 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수많은 날조된 영웅담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이 소련인들이 거둔 승리의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은 아닐 겁니다.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발상의 전환? : 모스크바 전투당시 소련군의 영국제 전차 운용

미국과 영국의 렌드-리스(Lend-Lease)가 소련의 승리에 어떤 공헌을 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렌드-리스로 원조된 물품 중에서 전차와 항공기 같은 전투장비는 상대적으로 기여도가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 중 소련이 생산한 전차의 대수와 렌드-리스로 제공된 전차의 대수를 비교해 본다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입니다. 소련이 생산한 기갑차량을 모두 합치면 11만대에 달하는데 영국이 원조한 전차는 4,542대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게 그렇게 당연하다면 세상은 정말 심심하겠지요.

캘거리 대학 교수인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관점을 살짝 바꿔 볼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전쟁 전 기간 동안 원조된 전차의 대수만 볼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어느 정도의 전차가 원조되었는지 살펴보자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기준을 그렇게 바꿔본다면 의외의 결론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힐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호 2권(2006)에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for Moscow, November-December 1941—A Research Note라는 제목의 짤막한 논문을 기고 했고 이어서 22호 4권(2009)에 이것을 수정 보완한 British Lend-Lease Tanks and the Battle of Moscow, November-December 1941 — Revisited라는 논문을 기고합니다. 힐이 이 두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영국이 원조한 영국제 전차는 소련군 기갑전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를 통해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 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 시피 소련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주요 공업지대에서는 생산설비의 소개를 시작했고 이것은 일시적으로 군수품 생산에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국은 새로운 동맹을 위해 아르항겔스크를 통해 각종 군사장비를 원조했고 여기에는 전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750대의 전차를 보내기로 약속했고 이 중 466대가 12월까지 소련에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에 원조된 영국제 전차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발렌타인으로 총 259대가 보내졌고 마틸다(A12)는 187대, 그리고 나머지는 테트라크(Tetrarch, A17) 경전차 였습니다. 이중 소련군 부대에서 인수한 것은 발렌타인이 216대, 마틸다가 145대 였습니다. 영국제 전차가 처음 소련군에 인도된 것은 10월 28일로 이날 20대 가량의 발렌타인이 카잔 전차학교에 도착해 승무원 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면서 영국제 전차를 인도받은 부대들은 황급히 전선으로 투입됩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목전으로 쇄도하고 있던 11월 20일에 영국제 전차를 장비한 소련군 부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부대
마틸다
발렌타인
146전차여단 137전차대대
21
146전차여단 139전차대대
21
131독립전차대대
21
132독립전차대대
2
19
136독립전차대대
3
9
138독립전차대대
15
6

이 중 132독립전차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가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총 96대가 투입된 셈인데 이것을 당시 소련군이 모스크바 축선에 투입하고 있던 기갑전력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힐은 러시아측의 자료를 인용해 11월 말에 모스크바 방면에 배치된 소련군의 기갑전력은 영국제 전차를 포함하여 670대, 그리고 이중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중형 이상의 전차는 205대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방면 소련군의 중형전차가 205대로 집계되었던 것이 정확하게 11월 20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모스크바 방어전의 결정적이었던 시점에서 영국제 전차는 결정적이진 않더라도 꽤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물론 영국제 전차들은 신통치 않은 성능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발렌타인이나 마틸다는 최고 35~40cm의 눈이 덮인 야지에서 기동할 수 있었는데 이건 고작 T-60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T-34는 70cm 정도의 눈이 덮힌 야지에서도 거뜬히 움직였으니 비교하기가 좀 그렇죠. 게다가 2파운드 포는 전차포로서 범용성이 떨어지는 고약한 물건이었고;;;; 하지만 당시 소련측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됐습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의 문전에 다다른 시점에서 소련은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하고 있었고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T-30이나 T-40 같은 경전차도 12월까지 생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국제 전차들이 T-34나 KV 계열에는 못 미치지만 최소한 소련이 생산하고 있던 경전차들 보다는 좀 더 유용한 물건이었을 겁니다. 소련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영국제 전차를 받은 부대는 15일 정도의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전선으로 직행했다고 합니다. 성능 고약한 영국 전차에 훈련 부족한 전차병들이 탔으니 뒷 이야기는 대략 상상이 가능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모스크바 전투 당시 소련의 전차 운용 방식은 영국제 전차들의 운용방식과도 어느정도 맞아 떨어졌다는 것 입니다. 소련군 기갑부대는 독소전 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이때문에 대규모 전차군단은 대부분 전멸하거나 해체되게 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전투 당시에는 전차여단이나 독립전차대대 단위로 분산 운용되면서 보병부대의 지원을 주임무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틸다와 발렌타인은 바로 '보병전차'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힐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영국이 제공한 전차들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중요한 '머릿수'를 채우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비록 동부전선에서 운용하기에는 성능도 부족하고 기계적 신뢰도가 낮은데다 승무원들의 훈련 수준도 낮았지만 있어줘야 할 시점과 장소에 존재했다는 것 입니다.

2007년 5월 29일 화요일

1924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 설정 문제

sonnet님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글에 첨부된 마지막 지도를 보니 꽤 재미있는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예전에 잠시 언급했었던 F. Hirsh의 Empire of Nations : Ethnographic knowledge and the making of the Soviet Union을 보면 소연방의 형성 초기 연방 내 각 공화국간의 경계 확정을 둘러싼 이야기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크라이나의 사례는 꽤 재미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북카프카즈 지방(край)과 돈 주(타간로그~샤흐티를 포함하는 지역)가 어느 쪽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인종적으로 돈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거주하는게 맞긴 했는데 러시아 사회주의공화국의 주장은 돈 주의 주민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계가 맞긴 하지만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우크라이나에 포함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경제적으로는 북카프카즈와 더 가깝다는 논리를 폅니다.
소연방 중앙정부는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압력을 넣는데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돈 주를 북카프카즈에 포함시키는 반대 급부로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를 우크라이나에 포함시켜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지역도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 인이라는 논리였지요. 그러자 당연히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여기에 강력히 반발합니다. 그 결과 소련방 중앙집행위원회(Центра́ль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СССР) 지역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담당하게 됩니다.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측의 대표 볼디레프(Михаил Болдырев)는 쿠르스크와 보로네시, 브랸스크의 거주민들에게서 우크라이나 인으로 간주할 만한 문화적 특성이 전혀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극 소수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발언은 무시해도 된다는 발언을 합니다.(여기에 대부분의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은 러시아로 남아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여 집니다) 여기에 러시아 경제학자들이 가세하는데 이들은 쿠르스크와 보로네시가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 특히 모스크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곡창지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의 주장이 모두 말도 안되는 것이 이 지역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어 딱히 어느 인종이라고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접경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죠. 우크라이나의 경우가 문제가 됐던 것은 벨라루스와 달리 우크라이나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그러니 벨라루스같이 민족주의적 경향이 약하고 모스크바에 비교적 순종적인 곳과는 달리 최대한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챙기는 방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다 보니 아예 러시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을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켜 버리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는 현실성 없는 이야기 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사는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양도하는 안을 내 놓았고 우크라이나는 돈 주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대신 러시아로부터 일부 지역을 양도 받는 것으로 문제는 마무리 됩니다.

민족문제란 이래 저래 골치 아픈 것 같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에 일본어나 중국어만 쓰는 "한국계"가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면 나라꼴이 볼만할 것 입니다. 그 점에서 언어와 인종이 단일하다고 할 수 있는 한국에 사는 것은 그럭 저럭 복 받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