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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7일 월요일

스탈린 동지의 현대전 강의

1940년 4월 14일 부터 17일 사이에 모스크바에서는 핀란드전 전훈을 평가하고 분석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는 스탈린도 직접 참여해 지휘관들의 의견을 듣고 스탈린 본인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 포병 운용에 관한 내용을 발췌해 봅니다.


(전략) 

스탈린: 제122소총병사단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소? 

추이코프(핀란드 침공시 제9군 사령관): 제122소총병사단의 병력은 12,000명이었고 여기에 1개 산악소총병연대, 제88소총병연대, 그리고  NKVD 1개 연대가 배속되었습니다. 

스탈린: 제122소총병사단의 정면은 130km고 담당 지역에는 이렇다 할 자연장애물이 없었소.

추이코프: 스탈린 동지. 만약 제122소총병사단이 퇴각하지 않았다면 이 사단도 다른 사단들 처럼 남쪽으로 부터 포위를 당했을 것 입니다. 이 사단은 35~40km를 후퇴했습니다. 

스탈린: 이 사단은 국경으로 부터 120베르스타(약 8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철수를 멈췄소. 이 사단은 대략 스무번은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소. 이것은 사단장에게 달려있는 것이오. 만약 훌륭한 사단장이 있다면 사단도 잘 운용될 것이요. 형편없는 사단장이라면 사단을 붕괴시키거나 사단의 사기를 떨어트릴 것이오. 훌륭한 지휘관은 형편없는 사단이라도 훌륭한 사단으로 만들 수 있소. 지휘관들이 항상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역량을 지닌 것은 아니지. 
동지가 부대를 지휘하는데 방해가 되는 자는 없었소? 

추이코프: 없었습니다. 

스탈린: 주저하지 않고 ‘없었다’고 말하는구려. 

추이코프: 질문하시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누가 방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스탈린: 나야 모르지요. 그저 당신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추이코프: 없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특히 군사위원회의 성원들과 협조를 잘 했습니다. 이제 레닌그라드 군관구에서는 기존의 전차 중대, 차량화 소총중대, 혹은 유사한 중대의 편제에 기반한 수색대대를 편성 중에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수색대대가 제9군의 작전지역 같은 곳에서 유용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편제의 수색대대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스키 부대가 필요합니다. 스키 부대는 겨울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소택지에도 투입할 수 있습니다.무장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동화기 사격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탄약 소모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데그차레프 기관단총을 직접 시험사격해봤는데 이건 매우 우수한 무기였습니다. 한 발만 명중 시켜도 목표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사격을 하면 목표를 명중시키는데 더 많은 탄환이 필요합니다. 

스탈린: 핀란드군이 기관단총을 쏘는 것 처럼 하시오. 여기서 쏘는거요.[의미 불명] 탄약을 조금만 사용한다면 더 많은 병력을 희생해야 하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병사를 아끼면서 총포탄을 더 많이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총포탄을 아끼면서 병사를 더 많이 희생시킬 것인지. 어느게 낫겠소? 

추이코프: 정확한 사격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당신은 틀렸소. 그런건 진부한 생각이오. 만약 아군 포병이 특정한 목표물만 타격했다면 아직도 핀란드와 전쟁을 하고 있었을 거요. 우리 포병이 승리한 이유는 하룻 동안 23만발의 포탄을 퍼부었기 때문이오. 어떤 사람들은 포탄을 많이 소모했다고 비난하기도 하더군. 나는 이런 자들이야 말로 문제라고 생각하오. 이왕이면 23만발 보다 40만발을 퍼붓는게 낫지 않았겠소? 만약 포탄 20발 중에서 한 발이라도 헛간이건 뭐건 간에 목표를 맞춘다면 그건 괜찮은 일이오. 만약 100발의 포탄을 쐈는데 99발은 빗나가고 한발만 목표를 맞췄다 치더라도 이건 근사한 일이 아닐 수 없소. 이런 식으로 포탄을 퍼부어서 적의 후방을 타격하고, 적이 방어선을 강화하는 것을 막으며 적의 움직임을 봉쇄했던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핀란드군을 패배시켰소. 당신은 포병 사격에 정신이 붕괴되어 달아난 핀란드군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오? 핀란드측은 포격으로 충격을 받은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한 특수 시설을 개설했다고 하오. 이것이 바로 포병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오. 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총포탄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면 인명 희생도 줄고 전쟁도 다섯배는 빨리 끝낼 수 있었을 거요. 

추이코프: 제가 스웨덴 의용군을 상대로 1만발의 포탄을 사용하자 곧바로 왜 그렇게 많은 포탄을 사용했냐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스탈린: 누가 그랬소? 

추이코프: 총참모부였습니다. 

스탈린: 그건 잘못된 것이오. 총참모부가 현대전의 본질을 모르는구만. 

추이코프: 저는 총참모장으로 부터 왜 그렇게 많은 포탄을 사용했냐는 전문을 받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웨덴 의용군을 상대로 더 많은 포탄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4만발은 쐈어야지. 만약 더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면 올해 2월에는 승리했을 것이오. 전쟁을 한달만 더 일찍 끝냈다면 비용을 얼마나 아낄 수 있었겠소? 10억 루블은 절약됐겠지. 그리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요. 포탄이 별거요?  만약 당신이 현대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오. 당신은 더 많은 소총수가 필요했다고 하지만 그 불쌍한 동무들이 뭘 할 수 있었겠소? 포병이 없다면 이들은 헛되이 죽었을 거요. 

추이코프: 스탈린 동지. 제9군 구역에서 공병이 포병 진지를 구축하는데는 최소한 5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스탈린: 괜찮소. 포병 진지를 준비하는데만 10일이 소요되더라도 말이오. 제8군과 제15군도 비슷한 조건에 있었소. 모든 것은 포병에 달려있소. 포병이 모든 것을 결정한단 말이오. 

추이코프: 공군도 포병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오. 항공기는 기상 조건에 영향을 받지않소. 항공기 지원을 많이 받을 수도 없소. 게다가 항공기는 기상조건에 좌우되니 언제나 쓸 수 있는게 아니오. 하지만 포병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잖소. 당신도 포병을 후방에 남겨둬야 한다는 이론가들을 알고 있을 것이오. 이들은 사단 전체에 스키를 지급해 보병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했지. 허무맹랑한 소리 아니오? 핀란드군은 강력한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소. 이들은 중기관총과 37mm포, 3인치 포를 가지고 있었지. 야포를 견인하는게 어렵다는 이유로 포병을 후방에 남겨둔 스키 사단이 적군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공격했다면 사상자만 잔뜩 내고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을 것이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추이코프: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군단 포병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지만 우리는 군단 포병을 활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군이 레폴라Repola로 진격했을때 아군의 보병, 포병, 공군의 합동 작전은 최고로 잘 수행되었습니다. 아군은 4만발의 포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레폴라 방면에 할당된 재고량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스탈린: 말을 끊어서 미안하오. 포탄 사용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소? 

추이코프: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도로 상태와 보급이었습니다. 


(후략)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열린 대 핀란드전 전훈 수집을 위한 지휘관 회의, 1940년 4월 15일 제3차 모임.  Alexander O. Chubaryan and Harold Shukman(ed.), Stalin and the Soviet-Finnish War 1939~40, (Routledge, 2013), pp.94~96에서 재인용.

2014년 4월 13일 일요일

러시안 소설

데이빗 글랜츠David Glantz의 역작인 스탈린그라드 3부작의 마지막 3부의 출간 소식을 접한 뒤 제2권을 한번 더 훑어봤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글랜츠의 저작 중에서 러시아와 독일 자료의 교차검증이 가장 잘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꽤 흥미로운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교차 검증을 통해 소련이 독일군의 전력이나 피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물론 유동적인 전장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니 이것만 가지고 소련 자료들을 엉터리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꽤 흥미로운 지적들이니 몇가지 예를 인용해 보지요.(원서의 주석은 일단 생략합니다.)



대부분의 소련과 러시아 문헌은 제62군의 병력 54,000명과 제64군의 병력 36,000명을 합쳐 총 90,000명의 소련군이 독일군 170,000명을 상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치에는 제14기갑군단을 포함해 독일군이 시가전에 투입하지 않은 부대를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시가지를 공격한 바익스Maximilian Freiherr von Weichs의 충격 집단의 병력은 80,000명으로 전차와 돌격포 100여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중략)

러시아 문헌들은 대부분 독일 제6군이 소련 제62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 지구에 500대의 전차를 투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9월 13일 기준으로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한 독일군 부대는 제24기갑사단과 제14기갑사단을 합쳐 전차 30~40대, 제29차량화 사단의 전차 20대를 포함해 100대 남짓한 기갑차량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David M. Glantz, Armageddon in Stalingrad : September-November 1942,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9), pp.1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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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추산에 따르면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은 증원병력을 받아 제62군을 공격하는 충격집단의 규모를 병력 90,000명으로 늘리고 여기에 2,300문의 야포와 박격포, 전차와 돌격포 300대, 제4항공군에 소속된 항공기 1,000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군이 추산한 통계는 신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집계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때 이 부대들의 병력 대부분은 스탈린그라드 시가지가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북서쪽의 돈강과 볼가강 사이의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남쪽의 호수 지역에서 소련군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제14기갑사단은 일일 평균 50대 정도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였으며 제24기갑사단은 30대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 지구에서 소련군을 상대한 독일 제6군의 충격집단에 소속된 기갑전력은 제244돌격포 대대와 제245돌격포대대의 돌격포를 합쳐도 100대가 채 안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과 러시아 문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투입된 독일군에  제76보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 제60차량화보병사단, 제16기갑사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들 사단에 배속된 부대 중에서 스탈린그라드 공장지구에 대한 최후의 공격에 투입된 부대는 사실상 없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의 보병사단과 기갑사단에 소속된 보병과 기갑척탄병은 심각하게 소모되어 제6군의 일선 전투 병력은 80,000명 미만으로 소련 제62군의 55,000명과 비슷하거나 이것 보다 더 적은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독일 제6군은 10월 17일 기준으로 총 병력을 334,000명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이중에서 일선의 전투 병력은 고작 66,549명으로 이중 상당수는 스탈린그라드 북쪽과 남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Glantz, ibid., pp. 355~356


사실 이시기 소련군의 야전부대는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고 전투가 계속되면서 정보 수집과 판단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추이코프라는 인물의 회고록 입니다. 제2권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시가전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보니 제62군 사령관 추이코프의 회고록이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공식 기록 보다도 과장이 심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노골적인 왜곡으로 보이는 부분까지 있습니다. 전쟁 당시 소련군 야전부대의 정보 분석은 실전 상황에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잘못된 분석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가 있는데 추이코프 회고록은 그런 식으로 변호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9월 말에 있었던 노동자 주택단지를 둘러싼 전투에 대한 추이코프의 회고에 대해 글랜츠는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9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제24기갑사단의 에델샤임 전투단과 빈터펠트 전투단은 진격하면서 포로 280명을 잡고 전차 5대, 대전차포 9문, 대전차소총 32정, 박격포 7문, 화염방사기 2개, 자폭견 4마리를 격파, 사살하거나 노획했으며 전사자 25명과 부상자 164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24기갑사단이 획득한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을 방어하는 소련 제62군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제24기갑사단은 9월 28일의 전투에서 총 28명의 전사자와 94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략)

9월 28일의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데, 제100경보병사단은 전사자 70명, 부상자276명, 행방불명 10명이 발생했으며 제295보병사단은 전사자 10명과 부상자 44명이 발생했다. 


(중략) 

추이코프는 9월 28일의 전투에서 독일군이 “최소한 1,500명의 전사자”와 “30대 이상의 전차를 완전손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마예프 쿠르간의 비탈에만 독일군의 시체 500구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추이코프는 제62군의 손실이 심각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포포프의 제23전차군단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626명이나 냈으며, 바튜크의 제284소총병사단은 300명의 인명 손실을 당했다. 고리쉬늬의 제95소총병사단은 “한줌의 병력만 남은” 상태에 불과했다. 

Glantz, ibid., pp. 262~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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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오전 늦게 제389보병사단은 제24기갑사단의 1개 전차중대와 제245돌격포 대대의 돌격포 10대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공격을 시작해 제37근위소총병사단의 방어선 중앙과 우익을 공격했다. 제389보병사단의 2개연대에 소속된 여러개의 대대급 전투단들이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부터 슈넬헤프터 블록의 북서쪽의 철도 지선을 따라 공격을 감행했고, 3분의 1 정도의 병력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서쪽을 직접 공격했다. 독일군은 이 공격에 전차 20여대의 지원을 받는 2개 연대 병력만 투입했지만 추이코프는 독일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과장했다. 

“이 공격은 전면적인 것이었다. 적은 베르후네우딘스카야 거리에서 2개 사단과 5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해 공격해왔다. 첫번째 공격은 격퇴했다. 졸루데프가 지휘하는 사단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은 예비대를 동원해 여러차례에 걸쳐 공격을 계속했다. 적은 치열한 전투 끝에 이날 저녁 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의 한 블럭을 점령했으며 경기장 근처까지 밀고들어왔다. 스타호노브체프와 스쿨프투르늬 공원은 아군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제62군의 일지는 추이코프의 회고록 보다는 정확한 편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디젤나야, 바리카디 마을, 107.5고지 일대에 집결한 적은 대규모의 병력(2개 사단과 전차 80~90대)를 동원하여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방향으로 총공격을 해왔다.제37근위소총병사단과 제84전차여단은 전차 45~50대의 지원을 받는 적 2개연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적은 베르흐네-우딘스크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그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와 지토미르스크 등 다른 축선에서도 공격해왔다. 적은 첫번째 공격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중략) 

붉은 군대 총참모부의 일일작전요약에서는 추이코프가 보고한 10월 7일의 전투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에 대해 추이코프가 주장한 내용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62군은 3개 보병사단과 1개 차량화 사단으로 구성된 적을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전개했다. 적은 오전 11시 30분경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로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제37근위소총병사단, 제84전차여단, 그리고 제112소총병사단의 잔여 병력은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와 지토미르스크를 공격하는 적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7일이 끝나갈 무렵 적은 수르코프 거리와 우스튜즈스카야 거리의 끝, 지토미르스크와 스쿨프투르늬 공원 외곽에 도달했다. 이날 4개 대대 규모의 적 병력과 전차 16대를 섬멸했다. 적은 더이상의 진격하지 못했다. 제42소총병여단은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쪽의 두개의 건물과 스쿨프투르늬 공원 북부를 잇는 선에 도달했다. 제62군에 소속된 다른 부대의 위치는 동일하다.” 

추이코프가 과장한 독일군의 규모가 어떻던 간에, 예네케가 지휘하는 제389보병사단은 트랙터 공장  부속 주택단지 남쪽의 소련군 방어선을 뒤로 밀어냈다. 하지만 제51군단의 전선을 균일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10월 7일에 전개된 짧지만 격렬한 전투로 제24기갑사단은 장교와 병사 51명이 부상당했고, 제389보병사단은 전사 20명, 부상 45명의 피해를 냈다. 

Glantz, ibid., pp. 338~340


추이코프는 10월 중순의 트랙터 공장 전투의 결과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추이코프는 독일 제51군단이 3,0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 독일군이 10월 14일에 입은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쳐 538명이었다.  

Glantz, ibid.,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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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10월 17일의 전투 결과를 평가했는데 독일군이 우세했던 것이 확실하다. 독일군은 바리카디 공장의 서쪽과 북쪽에서 소련 제62군의 방어선을 돌파했으며, 구르티예프의 제308소총병사단을 섬멸하고 류드니코프의 제138소총병사단이 지리멸렬하여 바리카디 공장으로 패주하게 만들었다. 제51군단의 보고에 따르면 투항자 103명을 포함해 860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으며 막대한 양의 무기와 장비가 노획되었다. 추이코프는 제51군단의 전차 40대를 격파하고 독일군 2,0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독일군의 손실은 576명에 불과했다. 손실 내역은 전사 91명, 부상 469명, 행방불명 16명이었다. 하지만 추이코프가 주장한 독일군의 전차 손실은 실제와 비슷하다. 10월 17일이 끝날 무렵 제24기갑사단은 전투 시작 당시 가동가능했던  전차 33대 중 4대만 남아 있었으며, 제14기갑사단은 33대 중 19대만 남아 있었다. 

Glantz, ibid., pp. 418~419.


인용한 것 이외에도 추이코프가 전과를 과장하고 전황을 왜곡하는 사례가 몇건 더 실려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역사가인 발레리 자물린은 “프로호로브카 : 신화의 기원과 전개과정”이라는 글에서 소련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졸렬한 지휘를 변명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전력을 과장하고 승리하는 경우에는 전과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독일군의 피해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하는데 추이코프도 예외는 아닌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