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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22일 일요일

어떤 "민주화"

1945년 8월, 중소우호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던 중 있었던 일화랍니다. 협정문에 대한 논의가 오가던 중 이런 일이 있었다는군요.

중국 공산당 문제에 대해서 중요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우호동맹조약 초안의 1조에서 소련은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부로서 지지할 것을 서약하고 있었는데 스탈린은 여기에 한 구절을 더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국민당 정부가 “중국의 국가적 통합과 민주화”를 이행하는 것을 소련 정부가 확인한 이후에 (1조를 이행한다) 는 것이었다. 이것은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조장하기 위한 스탈린의 노력이었다. 중국 대표단은 이 조건을 삭제할 것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되물었다. “여러분은 중국을 민주화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겁니까?”

쑹[쯔원, 宋子文]은 그러한 통고는 중국의 내정에 대한 간섭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이렇게 해명했다. “만약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을 계속해서 탄압한다면 우리가 중국 정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간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국민당이 계속 공산당과 싸운다면 우리가 여러분을 진심으로 지지하기가 어려워 질 것 입니다.” 결국 스탈린은 포기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양보를 했습니다. 중국의 공산당원들은 우리를 저주하겠지요.” 스탈린은 이 문제에 있어 크게 양보했지만 양측은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Tsuyoshi Hasegawa, Racing the Enemy :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224~225

사실 제가 쑹쯔원이라 해도 저런 식의 민주화는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ㅋㅋㅋ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 직계 보병사단의 편제

제가 이것 저것 늘어놓고 질질끄는 성향이 있다 보니 공수표만 남발하고 아직 못쓴 글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 독일 군사고문단이 훈련시킨 국민당군의 독일식 사단에 대한 글이 하나 있는데 기분 내킬 때 몇 줄씩 쓰는 제 성향상 언제 다 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중일전쟁 직전 국민당 중앙군의 사단 편제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해 봤는데 오늘은 이거나 올려볼까 합니다.

※이 글의 내용은 모두 曹剑浪, 国民党军简史 上册(解放军出版社, 2009) 457쪽~496쪽을 정리한 것 입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국민당군과 여기에 속한 군벌군대는 전형적인 4각 편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인데 유럽의 군대가 1차대전을 거치면서 3각 편제로 전환한 것과 비교하면 편제의 개편이 지독하게 늦었다고 할 수 있지요.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군은 4각 편제사단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3각 편제로 편성된 사단도 상당수 존재하는 상태였습니다.


1. 4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사실 국민당군의 4각 편제는 제대로 된 4각 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기본적인 편제는 각각 2개 보병연대로 편성된 2개 보병여단 이었지만 사단 직할대의 규모가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편제상의 편성만 보더라도 포병은 불과 대대급에 불과했으니 말입니다. 1차대전 초기 일반적인 4각 편제 보병사단은 2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1개 포병여단을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군의 포병전력이 얼마나 약했는지는 편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대 국민당군의 4각 편제 보병사단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단사령부
-참모처(參謀處)
-부관처(副官處)
-군계처(軍械處)
-군수처(軍需處)
-군법처(軍法處)

보병여단(2개)
-보병연대(3개 보병대대)
 >보병대대(3개 보병중대)
   =보병중대(3개 보병소대)
     -보병소대(3개 분대(班))
   =기관총중대(機槍連, 기관총 6정)
 >박격포중대(박격포 6문)
 >통신소대(通信排, 2개 분대)
 >수송소대(輸送排)
 >후송소대(擔架排, 3개 분대)

기병중대(4개 소대)
-기병소대(2개 분대)

포병대대(砲兵營, 3개 중대)
-포병중대(3개 소대)
 >포병소대(2개 분대)
-통신소대
-수송소대(3개 분대)
-탄약대(彈藥隊, 3개 분대)

공병대대(3개 중대)
-공병중대(3개 소대)
 >공병소대(3개 분대)
-수송소대(3개 분대)

특무대대(보병대대와 편성 동일)

병원(300 침상 규모)

통신대

정비대(修械所)
(中国军事史 编写组, 中国历代军事制度(解放军出版社, 2006), p.627 )

하지만 편제란 어디까지나 편제라서 중일전쟁 발발당시 국민당 중앙군 직계 사단 중에서 실제로 포병대대를 제대로 갖춘 사단은 15개 사단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사단은 포병중대 1개만 가졌거나 아예 포병이 편제에 없었지요;;;; 편제대로 1개 포병대대를 가져봐야 산포 16문 정도에 불과하니 완전 편제된 일본군 보병사단에게 상대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군에서 정예로 꼽혔던 독일식 사단도 산포 1개 대대만 달고 있었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국민당군 보병사단의 편제상 공용화기 및 중화기 보유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경기관총 : 274정
중기관총 : 54정
경박격포(擲彈筒) : 243문
박격포 : 30문
산포/야포 : 16문

국민당군 직계사단 중 중일전쟁 발발당시 4각 편제로 편성되어 있던 사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 1, 공병대대 1, 보급대대(輜重營) 1, 기병중대 1, 특무중대1
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의무대(衛生隊)1
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 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위생대1
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1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2,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1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위생대1
1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2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보급중대1
36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2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4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보충연대 1, 포병대대1
4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중대1, 통신중대1
4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54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군병원 1
5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특무중대1
5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5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통신대대1, 공병중대1
6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7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보급대대1, 기병주대1, 특무중대1
80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포병중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3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7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8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특무중대1
8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대전차포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중대1, 군병원1
95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8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공병대대1, 보급대대1, 통신중대1, 특무중대1
99사 : 2개 여단 4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2. 3각 편제로 구성된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한편,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 중에도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3각 편제사단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5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43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4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51사 : 3개 보병연대, 통신중대1, 특무중대1, 위생대1
59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60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대2, 의무대1, 전신반1
61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보급대대1, 특무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2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의무대1
93사 : 3개 보병연대,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6사 : 3개 보병연대,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97사 : 3개 보병연대, 포병대대1, 특무대대1, 보급대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3. 특이한 편제를 가진 보병사단
특이한 편제를 갖춘 사단도 있었습니다.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인 2보병사단은 무려 6개 보병연대에 보충연대도 하나 가진 특이한 사단이었습니다. 물론 포병은 달랑 1개 대대로 머릿수만 많은 사단이었지만 말입니다;;;

2사 : 3개 여단 6개 보병연대, 보충연대1, 기병연대1, 포병대대 1, 공병대대1, 통신대대1, 기병중대1, 보급중대1, 특무중대1, 의무대1

94사의 경우는 3각 편제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별도로 2개 보병대대가 더 추가된 편제입니다.

94사 : 3개 보병연대 2개 보병대대, 특무대대1, 포병중대1, 공병중대1, 통신중대1, 보급중대1


이 글에서는 국민당 중앙군 직계사단만 이야기 했는데 사실 국민당 중앙군의 직계가 아닌 사단이나 군벌 사단도 이것 보다 나을 건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군벌군대까지 정리를 하면 한번 표로 정리해서 다시 올려보겠습니다.

잡담하나. 이 글을 쓸 때 참고한 曹剑浪의 国民党军简史는 원래 두권 짜리였는데 2009년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세권으로 늘어났습니다. 처음 개정판을 샀을 때는 구판과 크게 다른 것이 없어 보여 김이 샜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니 꽤 괜찮은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상권의 앞부분에서 국민당군의 복잡한 계통을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해 놓았는데 이게 정말 좋더군요. 구판에서는 그냥 간단히 중앙군과 군벌군대에 대한 설명만 있어서 좀 아쉬웠지요.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오늘 도착한 책 몇권

얼마전 중국 아마존에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습니다. 발송했다는 이메일을 받은 뒤 9일만에 도착했는데 지금까지 선박편으로 주문했던 것 중 가장 빨리 도착한 것 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빨리 도착한 게 10일 걸렸고 보통 2주정도 걸렸는데 드디어 배송기간이 한자리수로 내려갔군요.


뭐 언제나 그렇듯 군사서적 위주로 주문했는데 이번에 도착한 서적 중에서 가장 반가운 녀석은 이놈입니다.

『국민당군사제도사(国民党军事制度史)』는 예전에 조금 썼던 국공내전 후반기 국민당군에 대한 글을 이어서 써볼 생각으로 샀습니다. 겨울에 간단하게 써보고 싶은 글 중에 중공군이 3대전역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국민당군이 재편되는 과정에 대한 글이 있거든요. 이 책은 상하 두권으로 되어있는데 상권은 육해공군의 전투부대의 편제와 전투서열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고 하권은 후방지원부대, 헌병, 준군사조직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권을 조금 훑어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육군의 전투서열 변화를 시기별로 잘 정리해 놓아 베껴써먹기 좋은것 같습니다.


『국민당 역사상의 158개군(国民党历史上的158个军)』은 중화민국 수립부터 국공내전이 종결될때 까지 편성된 국민당군의 군(군단급)단위 부대들의 부대사를 간략히 정리한 서적입니다. 역시 국민당군의 재편성 과정에 대한 글을 쓸때 참고하려고 샀습니다.
예전에 글을 쓸때 국민당군의 편성에 관해서는 주로 『국민당군간사』를 참고했는데 참고할 만한 서적이 늘어나는건 괜찮은 일이지요.

이것들 말고는 모두 인민해방군에 대한 책인데 나중에 따로 소개를 하던가 하겠습니다.

2009년 8월 8일 토요일

대륙의 기상

Uncertain Partners을 읽다보니 각주에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있더군요.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뒤 국내의 치안 안정을 위해 대대적인 반혁명진압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의 성과가 꽤 엄청납니다. 류샤오치가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 운동으로 처형된 인원이 71만명, 징역에 처해진 인원이 129만명, 사회교화형에 처해진 인원이 12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뒤에 마오쩌둥이 루산(廬山) 전원회의에서 이 운동기간중 백만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했다고 이야기 한게 과장은 아닌 셈이죠.

The Road to Terror에 따르면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1937년 부터 1938년까지 소련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인원이 68만명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반혁명 진압운동도 1950년 12월 부터 1952년까지 진행되었으니 기간으로 볼때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규모입니다.

게다가 반혁명 진압운동과 함께 토비(土匪)의 토벌도 진행되어 1950년 부터 1952년까지 140개 사단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으니 굉장하지요. 밖으로는 미국과 싸우는 와중에 국내에서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 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기상인듯. 물론 뒤에 닥칠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예고편 정도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만.

2008년 11월 8일 토요일

Gunpowder - 1948년 3차대전이 발발했다면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이 새로운 가상적이 되자 미군 수뇌부는 매우 심각한 전략적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2차대전이 종결된 뒤 병력 감축이 급속히 이루어진 결과 재래식 전력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소련을 상대하기가 버겁게 된 것 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핵무기에서의 열세를 재래식 전력으로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재래식 전력의 강화에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1947년에 들어오면 재래식 전력에서 육군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에서 미합동참모본부(JCS)는 1948년 5월 소련과의 전쟁을 상정한 반달(Halfmoon) 계획을 작성합니다. 반달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아시아 전선에서는 지상군으로 방어가 어려운 중국과 한국의 미군 병력을 철수하고 그 대신 일본은 사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국민당 정부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었습니다. 반달계획에 이어서 1949년 1월 28일에는 다시 트로잔(Trojan) 계획이 수립되는데 이 계획은 소련과의 전면전 발발시 전쟁 첫 해는 재래식 전력을 축적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 주도의 핵폭격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은 소련이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기 전 까지는 전쟁 초기에는 핵 전력을 중심으로 소련을 상대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전 측면에서는 주 전장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이고 아시아는 부차적 전장으로 전략적 방어를 수행할 계획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의 전략적 방어는 대규모 지상군이 필요한 중국과 한국은 포기하고 해군과 공군으로 방어가 용이한 일본을 방어하는 다소 소극적인 측면이 보입니다.

합참의 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 전략방어를 수행할 극동군 사령부는 건파우더(Gunpowder) 라는 개념계획을 작성합니다. 이것은 정식 작전계획은 아니고 개념 연구로서 반달계획이 수립되고 4개월이 지난 1948년 9월 8일에 수립되었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개념계획 몇 가지를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초 RG 554의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문서를 보던 중 1948년 12월에 작성된 건파우더 계획의 수정안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읽어 보니 흥미로운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합참의 거시적 전략의 틀 안에서 수립된 계획이다 보니 중국과 한국에서의 철수, 핵무기 사용 등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일부 있더군요.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들을 조금 발췌해 봅니다.

먼저 전쟁초기 미군과 그 동맹국의 능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b) 아군 :
(1) 미군은 한국에 대한 침공을 격퇴할 수 없을 것이다.
(2) 태평양함대는 Y일로부터 15일이 지난 뒤에야 제한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 이다.
(3) 극동공군(FEAF)은 Y일로부터 3일에서 9일이 지나기 이전에는 대한해협에서 소규모의해상 활동을 보호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이 기간 동안) 제공권을 장악하지는 못 할 것이다.
(4)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이다.
(5) 국민당정부는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겠으나 만주와 화북, 산동반도의 주요 철도노선과 항구를 적이 이용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 할 것이다.
(6) 블라디보스톡, 부산,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은 각각 한 발의 핵폭탄으로 핵 폭격을 실시하면 이후 90일간 주요 항구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b) Own Forces:
(1) That US forces will be unable to repel the invasion of Korea
(2) That Pacific Fleet units will be available for limited operations on or before Y plus 15 days.
(3) That FEAF will be unable to maintain air superiority over the Korea-Tsushima Straits area except for limited ability to protect ship movements from Y plus 3 through Y plus 9 days.
(4)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people will wholeheartedly support the defense of Japan.
(5) That the National Government of China will declare war and will be unable to prevent hostile use of the principal rail lines and ports of Manchuria, North China and the Shantung Peninsula.
(6) That one atomic bomb at each port can effectively deny Vladivostok, Pusan, and Port Arthur-Dairen as major embarkation points for 90 days after detonation.

December 31, 1948,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RG 554,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G-2, Intelligence, Subject File, 1945-52, Entry 2, Box 5

이 연구안 에서는 한국은 방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으며 국민당 정부의 능력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연구 단계의 계획이지만 부산에 대한 핵폭격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 3차대전이 났다면 부산에도 평화공원이 하나 생겼겠군요;;;;

작전에서는 일본 본토의 방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보겠습니다.

4. 작전
a. 생략(작전지역)
b. 작전은 일본 본토와 류쿠에 대한 전략적 방어를 기본으로 한다.
c. 총괄 기동계획에 따라 한국과 화북에의 병력 철수를 신속히 하고 극동군 병력을 규슈 북부와 혼슈에 집결시키고 홋카이도는 가능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방어하되 극동군사령부의 특정한 명령이 있을 경우 포기한다.
d. 간토(関東) 평야는 일본의 핵심적인 지역이기 때문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해야 한다.
e. 극동군 사령부의 지도하에 일본정부는 다음의 지역에 전반적인 방어시설을 건설할 것이다. : 가고시마(鹿児島), 고베(神戶)-오사카(大阪), 나고야(名古屋), 도쿄-요코하마(橫濱), 센다이(仙台)
f. 중국에 주둔한 미군은 해로를 통한 철수를 고려하여 칭타오(靑島)를 가능한 장기간 방어해야 한다.
g. 중국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은 가능한 오랫동안 활동을 지속해야 한다.
h. 제5공군은 초기에는 방공 임무에 주력하며 서부 내해 지역(동해)에서 아군 측 선박 항행에 대한 적의 공습을 저지하고 24군단의 철수를 보호하며 홋카이도-쓰가루(津輕) 해협 지구에서도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i. 오키나와에 전개한 중(中)폭격비행단들은 가능할 경우 간토 평야 지대로 이동해 극동에서의 전략 폭격 임무에 참가한다.
j. 해군은 위에서 언급한 해상 철수 임무를 수행하며 극동 지역에서의 기뢰 부설, 극동 해역의 제해권 확보를 수행한다.

4. Operations
a. –
b. Operations are based upon a strategic defense of Japan and the Ryukyus.
c. The general scheme of maneuver visualizes a precipitate evacuation of Korea and North China, a concentration of CINCFE forces in north Kyushu and Hinshu, and the defense of Hokkaido to the maximum effort practicable, to be abandoned only upon specific order of CINCFE.
d. The Kanto plain in considered the vital area of Japan, to be defended at all costs.
e. All-round field defenses will be construct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under general CINCFE direction in the following areas : Kagoshima, Kobe-Osaka, Nagoya, Tokyo-Yokohama, and Sendai.
f. US forces in china will hold Tsingtao as long as practicable consistent with Water withdrawal.
g. The Military Advisory Group in China will continue their functions as long as practicable.
h. The 5th Air Force is initially employed in air defense, in preventing hostile air attacks on friendly ship movement in the western inland seas area, in protecting the withdrawal of XXIV Corps, and similar mission in the Hokkaido-Tsugaru Straits area.
i. Medium bomb groups are concentrated on Okinawa, are displaced to the Kanto Plain area as feasible, and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Strategic Air Offensive.
j. Naval forces will conduct evacuation as indicated above, will participate in the Far East minig campaign, and secure control of seas in Far East waters.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일본을 공격방어한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무조건 철수고 중국에서도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면 철수. 그리고 일본은 결사 방어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은 공군에 의해 주도되며 해군에 의한 해상봉쇄가 함께 수행될 계획입니다.

그리고 주한미군으로 있었던 24군단에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a) 24군단
(1) 지연전 수행.
(2) 인천과 부산의 항만 시설 파괴.
(3) 한국에서 민간인 철수.
(4) 한국에 잔류 시킬 정보조직의 구성.

(a) XXIV Corps
(1) Delaying Action
(2) Destruction of port facilities of Inchon and Pusan
(3) Evacuation of civilians from Korea.
(4) An intelligence establishment to remain in Korea.

「Memorandum for General Almond, Status of Gunpowder」, 위의 문서

역시 한 줄 요약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발을 뺀다(;;;;)


네. 만약 이 개념계획이 정식 작전계획으로 승격되었다면 주한미군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겁니다.(;;;;;) 물론 소련과의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군사적 선택이긴 합니다만. 당시 한국인들이 미군 내부에서 저런 이야기가 오간다는 걸 알았다면 매우 실망했을 것 입니다.

결국 위기상황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선택하게 되는데 1948년 무렵미국에게 있어 일본은 전자에 속했고 한국은 후자에 속했습니다. sonnet님이 예전에 태풍이 몰아치면 차라리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이야길 하셨었는데 이 경우가 딱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국공내전에 대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진명행님의 “북한군 국공내전 참전...국내, 해외 신문자료”라는 글에 진명행님이 다신 댓글입니다.


결정적 단서를 잡았다고 기뻐하시는 진명행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렇지만 진명행님이 예측하셨듯 저는 신문기사는 오보가 많으니 당연히 신뢰도를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진명행님이 인용하신 언론보도들의 내용을 입증해 줄 직접적인 자료는 없습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진명행님이 퍼오신 신문보도의 신뢰도는 급강하합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심심하니 관련보도들의 신뢰성을 가지고 논지를 전개하는 방법도 써봐야겠지요. 진명행님이 북한군의 중국내전 참전을 입증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문기사의 신뢰도를 평가해 보지요.

저도 할 일이 많으니 진명행님이 퍼온 자료 중 웹에서 간단히 퍼올 수 있는 동아일보 기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검색창에 임표를 넣고 검색하면 자료의 종류별로 분류가 됩니다. 연속간행물에는 173건의 정보가 있군요. 이제 연속간행물을 클릭해 보지요.


몇 번 클릭하면 진명행님이 퍼 온 동아일보 기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를 확대해 보지요. 아하.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로군요.


자. 그러면 진명행님이 퍼온 동아일보의 기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요. 마침 진명행님이 퍼온 기사의 바로 밑에도 임표 관련 기사가 있군요. 이 기사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으앗! 정말 충격적입니다.

林彪將軍被殺!!!



확대해도 몇몇 글자가 잘 안보이긴 합니다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한편, 중공 측 임표(林彪) 장군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반전적(反戰的) 부하에게 사살(射殺)되였다는 보●는 사실이다.”

아앗! 국민당군의 정보부 발표를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임표는 벌써 1946년에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1971년에 사망한 임표는 가짜란 말입니까?????

자. 이렇게 당시의 중국정부의 공식발표를 인용하던 동아일보의 기사는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쉽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정보력이 취약해 국민당 정부측의 선전에 의존하던 당시 한국 신문들의 국공내전 기사의 신뢰도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신문들은 회해전역 초반에는 국민당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기사까지 내 보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단편적인 신문기사들이 역시 신뢰성에 문제가 있는 ISNK의 정보를 입증해 줄 수 있겠습니까?

진명행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08년 10월 5일 일요일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

이 글은 지난 번에 올렸던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을 보충하는 글 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간단히 전체 사단 중 몇 개 사단이 중앙군 계열 이냐만 이야기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단이 어떤 계열인지는 설명하지 않아서 여기에 궁금증을 가진 분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리한 표를 하나 올립니다. 지난번 글에서 중앙군 직계 부대를 분류할 때 약간의 오류가 있었는데 그것도 덤으로 수정했습니다.

아래의 표는 지난번 글에서도 인용했던 曹剑浪의『国民党军简史』,下권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 입니다.


위의 표에서 112, 152师는 반직계 사단이기 때문에 기타로 분류했습니다. 112师는 원래 동북계, 152师는 광동계 부대였는데 중앙군으로 편입된 사단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글 에서는 제6병단의 8师, 99师를 기타로 분류했었는데 다시 찾아 보니 이 두 사단도 중앙군 직계 사단이더군요.

사단급 제대에 비해 군단급(军) 제대의 계통은 간단한 편 입니다.

원래 사천계에서 중앙군으로 넘어온 반 직계의 44군과 사천계의 41, 47군, 서북계의 55, 68, 59, 77군을 제외하면 모두 중앙군 직계 军입니다.

※ 덤으로, 1945년의 독일군 전투서열도 나름 막장으로 알고 있는데 국공내전 말기의 국민당군 전투서열도 만만치 않더군요. 사단장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단이 수두룩 하니 말이 안나올 정도입니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에 대한 약간의 잡설

그냥 잡담입니다. ^^

첫 번째 잡설. 국민당군의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에 대한 것 입니다. 원래 sonnet님의 글, “회해전투 당시 사단 무장”을 읽은 뒤 관련 자료를 찾아서 트랙백 해야 겠다 하다가 건망증으로 잊어 버리고 이제서야 올리게 되는 군요.

1947년 중순 3각 편제로 편성된 일반적인 “장개석 직할 사단”의 무장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비교 대상으로 비슷한 시기 인민해방군의 군단급 부대인 종대(纵队)의 장비현황도 같이 올려 봅니다.


이 표에서 재미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의 한 등급 높은 부대 조차 장비와 화력에서 국민당군 사단에 비해 열세인 것은 사실인데 50mm박격포와 경기관총에서는 격차가 그나마 적다는 점 입니다. 국민당군에 비해서 중화기는 부족하지만 경장비는 그럭저럭 충실한 수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국민당군 보다 장비가 열세인 것은 어쩔 수 없지요. 인민해방군은 차량 같은 경우는 아예 보유하고 있질 못 합니다.

두 번째 잡설. 회해전역(淮海战役) 당시 국민당군의 전투서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회해전역 당시 국민당군의 사단급 전투서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2병단 : 사령 구청천(邱淸泉)
-제5군 : 45사, 46사, 200사
-제70군 : 32사, 96사, 139사
-제74군 : 51사, 57사, 58사
-제12군 : 112사, 238사
-제72군 : 34사, 233사, 122사
-제116군 : 287사, 288사
기병 제1여
독립여

제6병단 : 사령 이연년(李延年)
-제99군 : 92사, 99사, 268사
-제39군 : 103사, 147사
-제54군 : 8사, 198사, 291사
-제96군 : 141사, 212사

제7병단 : 사령 황백도(黃百韜)
-제25군 : 40사, 108사, 148사
-제63군 : 152사, 186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00군: 44사, 63사
-제44군 : 150사, 162사

제13병단 : 사령 이미(李彌)
-제8군 : 42사, 107사, 237사
-제9군 : 3사, 166사, 253사
-제115군 : 39사, 180사
-제64군 : 156사, 159사

제16병단 : 사령 손원량(孫元良)
-제41군 : 122사, 124사
-제47군 : 125사, 127사

제12병단 :사령 황유(黃維)
-제10군 : 18사, 75사, 114사
-제14군 : 10사, 85사, 83사
-제18군 : 11사, 49사, 118사
-제85군 : 23사, 110사, 216사

제4수정구(绥靖区) : 사령 류여명(劉汝明)
-제55군 : 29사, 74사, 181사
-제68군 : 81사, 119사, 143사

제3수정구 : 사령 풍치안(馮治安)
-제59군 : 38사, 180사
-제77군 : 37사, 132사

독립 제107군 : 260사, 261사
독립 제20군 : 133사, 134사

이상의 전투서열은 중국 국민당군의 구조에 대해 꽤 재미있는 점을 보여줍니다. 장개석 직계부대와 군벌 계통 부대가 뒤섞여 있는 잡탕이란 점이죠.
회해전역에 투입된 국민당 군의 총 77개 사단 중 장개석 직계, 즉 중앙군 직계 사단은 46개 사단입니다. 원래 동북군계에서 장개석 쪽으로 넘어온 112사와 광동계에서 넘어온 152사를 중앙군 계열로 분류하면 48개 사단이군요. 여기에 기병 1여가 중앙군 직계이니 장개석 직계의 부대는 총 48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됩니다. 나머지 32개 사단은 국민당이 아니라 다른 군벌 소속 부대로 장개석 쪽에 붙은 사단이 되겠습니다.
다시 각 병단 별로 중앙군 직계 사단의 비율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2병단 : 총 16개 사단, 2개 여단 / 중앙군 직계 13개 사단, 1개 여단
제6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9개 사단
제7병단 : 총 11개 사단 / 중앙군 직계 5개 사단
제13병단 : 총 10개 사단 / 중앙군 직계 7개 사단
제16병단 : 총 4개 사단
제12병단 : 총 12개 사단 / 중앙군 직계 11개 사단
제4수정구 : 총 6개 사단
제3수정구 : 총 4개 사단
독립 제107군 : 총 2개 사단 사단 / 중앙군 직계 2개 사단
독립 제20군 : 총 2개

중앙군 직할 사단의 숫자로 보면 구청천의 제2병단과 황유의 제12병단이 실질적인 주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7병단은 중앙군에 광동계(粤)와 사천계(川) 사단이 뒤섞여 있었고 16병단은 4개 사단 전체가 사천계, 그리고 제3수정구와 제4수정구는 모두 서북계, 독립 제20군은 모두 사천계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북벌 자체도 국민당 직계에 잡다한 군벌 부대를 긁어모아 완성한 것이었고 이런 난감한 구조는 중일전쟁을 거치면서도 결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제롬 첸(陳志讓)이 재미있게 지적한 것 처럼 중국의 상황은 일본의 전국시대와 비슷했는데 장개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니었던 것 이죠.

다시 회해전역 이야기로 돌아가면, 인민해방군의 제 1단계 공격으로 괴멸당한 황백도의 제7병단은 서북군벌인 풍치안의 제3수정구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해방군에 가담하면서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됩니다. 제3수정구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입니다. 상대적으로 기동성에서 우위에 있었던 제7병단은 어이없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도보로 추격해온 인민해방군에게 따라잡히게 됩니다. 만약 제3수구의 반란이 없었다면 제7병단은 예정대로 철수를 마쳤을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해서 퇴로가 차단된 제7병단은 서주방면으로 돌파하려 노력합니다만 서주에서 증원 나온 제2병단과 제13병단의 지원공격도 반란을 일으킨 제3수구에 인민해방군 산동병단 소속의 3개 종대가 증원되면서 막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 제7병단은 그대로 전멸해 버리고 맙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벌부대가 다수 섞여 있어 전투력이 떨어졌던 것이 제7병단이 돌파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데 이 점은 나중에 더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인민해방군의 회해전역 2단계 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정예부대인 황유의 제12병단이 섬멸된 문제입니다. 1948년 11월 24일, 장개석은 숙현(宿懸)을 탈환해 진포철도를 개통한 뒤 주력부대를 회남으로 철수시켜 방어에 임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원래 숙현지역을 방어하던 것은 제4수정구 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제4수정구도 제3수정구와 같은 서북계 부대였습니다. 제4수정구는 11월 15일 인민해방군 주력의 1단계 공격에 그대로 밀려나면서 숙현을 넘겨줬습니다. 인민해방군은 숙현 탈환을 위해 북상하는 황유 병단을 유인해서 섬멸할 계획을 짰는데 숙현이 제대로 방어됐더라면 이런 덫이 놓이진 않았겠지요. 황유의 제12병단이 예정대로 숙현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인민해방군은 유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철수했고 이를 추격한 황유 병단은 그대로 포위되어 섬멸됩니다.

그리고 회해전역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배는 두율명이 지휘하는 제 2, 제 13병단이 포위되어 섬멸된 것이었습니다. 두율명 집단이 포위된 것은 황유 병단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니 결국은 제3, 제4수정구가 문제였던 셈 입니다. 서북군벌계의 이 두 수정구는 장개석의 이탈리아군(?)이 된 셈 입니다.

국공내전시기의 다른 전역에 대해서도 장개석의 중앙군과 군벌계 사단의 전투 양상을 분석해 보면 아주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참고문헌
中国人民革命军博物馆 编,『中国人民解放军战史图集』,中国地图出版社, 1990
曹剑浪,『国民党军简史』下, 解放军出版社,2004
国防大学 “战史简编” 编写组,『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1983/2003
국방군사연구소, 『중공군의 전략전술 변천사』, 1996
陳志讓, 박준수 옮김, 『軍紳政權 : 근대중국 군벌의 실상』, 고려원, 1993

2007년 8월 8일 수요일

국공내전 기간 중 양군의 인명피해

이번 중국행에서 사온 책 중에는 중국 국방대학교가 출간한 중국인민해방군전사간편(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이 있습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창군부터 국공내전 종결 까지 인민해방군의 주요 작전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데 1983년에 제 1판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산 것은 2003년에 출간된 제4판입니다. 지도와 통계가 잘 정리되어 있어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종이가 너무 얇아 신경이 쓰이는군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인민해방전쟁, 즉 우리가 말하는 국공내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지도와 함께 인민해방전쟁시기 양군의 인명손실에 대해서 정리해 놓고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1946.7 ~ 1947.6
1947.7 ~ 1948. 6
1948. 7 ~ 1949. 6
1949. 7 ~ 1950. 6
합 계
인민해방군 사상자
336,000
407,600
490,000
79,100
1,312,700
국민당군 사상자
426,000
540,200
571,610
173,300
1,711,110
인민해방군 포로
2,500
5,300
2,600
3,300
13,700
국민당군 포로
677,000
953,000
1,834,010
1,122,740
4,586,750
국민당군 귀순
?
?
242,780
390,730
633,510
국민당군 집단전향
17,000
28,200
130,600
671,150
846,950
국민당군 재개편
?
?
271,000
22,030
293,030
인민해방군 실종
19,500
40,000
129,400
7,200
196,100
(표 출처 : 国防大学<战史简编>编写组, 『中国人民解放军战史简编』, (解放军出版社, 2003), p.641)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자체는 양군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 입니다. 물론 양군의 전력차를 감안해 보면 인민해방군이 상당히 선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비록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국민당군의 손실 대부분이 포로, 또는 귀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꽤 재미있는 점입니다. 이것을 직접 통계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군요. 내전 초기 단계부터 60만이 넘는 포로가 발생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6월까지는 국민당군이 공산군을 압박하면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포로만 60만이 넘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포로의 숫자는 전쟁 후기로 갈수록 급증하며 여기에 더해 자발적인 투항, 즉 귀순하는 비율도 월등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개인 귀순이나 집단 귀순만 150만 가까이 된다는 점은 국민당군이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잘 정리된 통계를 보는 것은 또 색다른 느낌입니다. 통계 작성과정의 신뢰성은 둘째 치고라도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입니다.

2007년 6월 15일 금요일

중국공군항전사 - 唐學鋒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 있는 화문서적에 갔다가 중국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의도로 구매한 책 입니다. 가격은 22위안인데 4,500원에 샀습니다. 이 책은 중일전쟁 발발부터 2차대전 종전까지 국민당 공군의 작전과 편제 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관심은 있으되 아는게 없는 분야고 가격도 5,000원이 안되는지라 바로 질렀는데 조금 훑어보니 심각한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각주와 참고문헌 목록이 없습니다! 맙소사. 명색이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인데 이럴수가! 경악했습니다. 사회주의권의 책들이 이런 경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동독의 군사사가인 그뢸러(Olaf Groehler)도 자신의 저작에 각주를 달지 않았지요. 물론 이 사람은 참고문헌 목록까지 빼 먹진 않았습니다만.... 이 당학봉이란 양반은 더 대인배로군요.

다음으로는 제본 상태가 불안합니다. 이거 몇년이나 더 갈런지... 물론 중국책이 러시아 책 보다는 더 잘만들긴 하는데 아직 평균적으로는 한국 만큼 잘 만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에 쓰는 종이도 질이 약간 낮은 것 같고...

이것을 제외하면 개설서로서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중국공군(국민당공군)의 주요 작전을 잘 다루고 있으며 일본측 자료도 많이 참고한 듯 일본측에 대한 서술도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 전선에서 작전한 미육군항공대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어서 대략 훑어본 느낌으로는 개설서로서 상당히 충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초기 공군발전과정에 대해서도 앞 부분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는 점도 좋은 점 입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von Hardesty의 Red Phoenix에 비교할 만한 저작 같습니다. 각주와 참고문헌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뺀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