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ertain Partners을 읽다보니 각주에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 있더군요.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뒤 국내의 치안 안정을 위해 대대적인 반혁명진압운동을 벌였는데 이 운동의 성과가 꽤 엄청납니다. 류샤오치가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이 운동으로 처형된 인원이 71만명, 징역에 처해진 인원이 129만명, 사회교화형에 처해진 인원이 12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뒤에 마오쩌둥이 루산(廬山) 전원회의에서 이 운동기간중 백만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했다고 이야기 한게 과장은 아닌 셈이죠.
The Road to Terror에 따르면 스탈린의 대숙청이 절정에 달했던 1937년 부터 1938년까지 소련에서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인원이 68만명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반혁명 진압운동도 1950년 12월 부터 1952년까지 진행되었으니 기간으로 볼때 그보다 조금 더 많은 규모입니다.
게다가 반혁명 진압운동과 함께 토비(土匪)의 토벌도 진행되어 1950년 부터 1952년까지 140개 사단이 이 작전에 투입되었으니 굉장하지요. 밖으로는 미국과 싸우는 와중에 국내에서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 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륙의 기상인듯. 물론 뒤에 닥칠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에 비하면 예고편 정도 밖에 안되는 것 같습니다만.
2009년 8월 8일 토요일
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7년 8월 26일 일요일
부하린이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입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하시오.
스탈린 동지께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아마도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공문서 형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 입니다. 이 편지의 존재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 아마도 내 삶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정적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내가 아직 글을 쓸 수 있을 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리고 아직 나의 두뇌가 기능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죽음을 동지께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오해도 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 점들을 밝히고 싶습니다.; a) 나는 내가 고백한 혐의를 부인하지 않을 것 입니다 b)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가 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순전히 동지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지금 나는 동지께 이 문제를 반드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1) 나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벼랑의 끝에 몰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므로 솔직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밝혔듯 어떠한 범죄와도 관련이 없는 무죄입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보더라도 회의에서 이미 밝혔듯 다음과 같은 사실 외에는 더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a) 나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쿠즈민(Кузьмин)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쿠즈민이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합니다.
b) 아이헨발드(Айхенвальд)는 예전에 나와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회의, 또는 회의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안스럽게 생각해서 아이헨발드와 이야기 한 사실에 대해 숨겼습니다.
c) 나는 1932년도에 내가 당에서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이라고 믿고 나를 따르던 나의 추종자들과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대해서 유죄를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이 점은 내가 말한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다른 혐의들은 모두 허구이거나 설사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체회의에서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당의 노선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실히 따랐으며 동지를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3) 나는 제게 씌여진 혐의나 “다른 이들의” 자백을 시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무장해제 당했다”는 허위 사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것 입니다.
4) 이와 관계없는 것과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번 숙청에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a) 전쟁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b)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숙청에는 1) 범죄혐의자 2)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3) 잠재적으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또한 이 세 가지의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집단과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이제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상호간의 불신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입니다. 나는 내 명예를 훼손한 라덱()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으며 결국 그의 뒤를 따르게 됐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지도부는 자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는 말이 동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이번 숙청에 어떤 계획, 어떤 의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가깝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스탈린 동지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각한 역설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5) 만약 내가 동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입니다. 하긴,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동지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동지께서 내가 유죄라는 점을 믿고, 또 동지가 진심으로 내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즉 나 자신이 이런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했다는 것 입니까?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지금 나의 머리는 이런 혼란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때문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만들겠지요.
도데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도데체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6)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고취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보복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동지께서 진심으로 알고 싶을 것 같아 이야기 하는데, 내가 답답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과거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92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동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동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지는 내가 왜 동지를 나의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건 동지는 음모 같은 것을 꾸미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래서 나는 “그렇지요. 나는 음모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카메네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지께서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 마치 유대인들의 원죄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바보짓이란 말인지! 결국 카메네프와의 친분 때문에 지금 나의 명예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코바.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나의 처지를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내가 당 지도부나 나를 수사한 수사관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나는 나의 주변이 모두 암흑천지 같이 보이고 어둠이 감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7) 내가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동지를 여러 차례 보았고 한번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도데체 당신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오시프에게 말해서 당신을 빼내겠어요.” 이 환상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지께 제발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저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제가 동지에게 어떤 악독한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결국 나의 피폐한 정신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겠지요. 나는 동지와 수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 이런. 만약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동지에게 나의 영혼을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지께서 내가 스테츠키(Стецки)나 탈(Тал) 같은 사람과 달리 나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지께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동지께서는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칼을 거두도록 했던 것 같은 천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끔찍한 운명은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a)사실 나는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목숨을 끊어버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동지께서도 나의 성품을 잘 알 것입니다. 나는 당이나 소연방의 적이 아니며 나의 힘이 닫는 한도 내에서 당의 의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나의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나를 재판에 회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겠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판 이전에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b) 만약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동지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또 진심으로 총살은 피하도록 부탁 드립니다. 나는 총살 대신 독약으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모르핀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점은 내게 중요합니다. 동지께서 내게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도록 부탁 드리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 이고 또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지께서도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동지께서도 나와 같이 하시겠지요. 결정을 내리시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충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씩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느낄 때 마다 내가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내게 치사량 만큼의 모르핀을 주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c) 그리고 나의 아내(Анюта,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내 딸은 만나고 싶지 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내 딸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입니다. 그리고 나디아(부하린의 첫 번째 아내)와 제 아버지 역시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뉴타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 이전에 아뉴타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나의 가족들이 재판에서 나의 (조작된) 진술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아 자살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려 합니다.
d) 만약 나의 예상과 반대로 내가 석방된다면 (나의 아내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안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미국에 몇 년 정도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재판을 받는 대신 정치 활동을 하겠습니다. 즉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혼란에 빠진 지식계층들의 마음을 사로 잡겠습니다. 또 나는 반 트로츠키 주의자가 되어 트로츠키를 타도하는데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동지께서는 나에게 비밀경찰 한 명을 감시 목적으로 붙이고 그래도 미덥지 않으시다면 나의 아내를 내가 트로츠키와 그 일당에게 큰 타격을 입힐 때 까지, 즉 여섯달 정도 본국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래도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시면 뻬초라(Печора)나 콜릐마(Колыма)의 수용소에 25년 정도 유배를 보내십시오. 나는 유배지에서 대학과 지역 문화 박물관, 연구소, 그리고 미술관, 민속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언론사를 세우겠습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은 내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문화 사업을 전개할 것 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월 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사안을 고려하면 내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재판이 언제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 원고들은 내가 죽더라도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가치있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은 당신에게 충실했던 가장 유능한 측근을 하나 잃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가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레이 드 톨리(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를 반역 혐의로 의심해서 결국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평했던 글을 읽었었는데 지금 나의 상황이 마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지와 당, 그리고 당의 뜻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나는 동지에게 모든 것을 다 적었습니다. 내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주십시오. 지금 나의 상황이 당장 내일이라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는 미리 적었습니다. 신경이 쇠약해 졌기 때문에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두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씁니다. 코바, 나의 양심은 당신 앞에 떳떳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오직 마음속으로만 표현해 주십시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품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이로군요. 이 불쌍한 사람을 좋게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부하린 1937년 12월 10일
J.Arch Getty and Oleg v. Naumov(ed),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Yale University Press, 1999), pp.556~560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
2006년 9월 21일 목요일
1958년 북한 군대의 숙청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 하나
개인적으로 북한군의 1958년 대규모 숙청은 상당히 흥미있는 사건이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물론 정확히 파악하는게 불가능 하겠지만) 이 숙청으로 군을 완전히 장악한 만주파 지휘관들의 능력이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 소련의 경우를 보면 1937년-38년의 육군에 대한 숙청은 흐루쇼프 시기에 스탈린 격하와 함께 선전한 것 처럼 군의 유능한 간부단을 완전히 쓸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 반대파의 주장대로 정말 유능한 간부들이 숙청으로 전멸했다면 주코프와 샤포쉬니코프는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이 틀림없고 그외에 전쟁 초-중기에 군의 중추를 담당한 사단장 이상급의 장교들은 무었이겠는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숙청이 소련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영미권 소련학계에서 많은 재평가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북조선은?
북조선의 군대 숙청은 전쟁이 끝나고 5년이나 지나 이뤄졌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소련은 숙청 직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장교단의 자질을 검증할 기회가 있었지만 북한의 경우 군대 숙청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자질을 검증 받은 연안계와 소련계가 사실상 전멸했다. 물론 만주파의 군사적 자질을 폄하할 수는 없기 때문에 궁금함이 더 하다.
일단 연안계의 경우 민족보위부상 김웅, 총참모장 리권무, 부참모장 최인, 총정치국부국장 김을규, 공군사령관 왕련, 해군참모장 김칠성 등 1958년까지 남아있던 고위간부단이 완전히 전멸당하고 소련계는 소련으로 망명, 또는 귀국해 버렸다.
결국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만주계였는데 과연 이들의 지휘능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가 궁금한 점이다.(물론 소련측은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이들 만주계가 한국 전쟁 기간 중 어느 정도의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자료가 있어야 될텐데 현재 내 수준에서 그런 자료를 입수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북한쪽의 선전용 찌라시들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북한쪽 일차 사료들이 공개된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 같진 않다.
이야기를 잠깐 돌려 소련의 경우를 보면 1937년-38년의 육군에 대한 숙청은 흐루쇼프 시기에 스탈린 격하와 함께 선전한 것 처럼 군의 유능한 간부단을 완전히 쓸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 반대파의 주장대로 정말 유능한 간부들이 숙청으로 전멸했다면 주코프와 샤포쉬니코프는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이 틀림없고 그외에 전쟁 초-중기에 군의 중추를 담당한 사단장 이상급의 장교들은 무었이겠는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숙청이 소련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영미권 소련학계에서 많은 재평가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북조선은?
북조선의 군대 숙청은 전쟁이 끝나고 5년이나 지나 이뤄졌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소련은 숙청 직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장교단의 자질을 검증할 기회가 있었지만 북한의 경우 군대 숙청을 통해 한국전쟁에서 자질을 검증 받은 연안계와 소련계가 사실상 전멸했다. 물론 만주파의 군사적 자질을 폄하할 수는 없기 때문에 궁금함이 더 하다.
일단 연안계의 경우 민족보위부상 김웅, 총참모장 리권무, 부참모장 최인, 총정치국부국장 김을규, 공군사령관 왕련, 해군참모장 김칠성 등 1958년까지 남아있던 고위간부단이 완전히 전멸당하고 소련계는 소련으로 망명, 또는 귀국해 버렸다.
결국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만주계였는데 과연 이들의 지휘능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가 궁금한 점이다.(물론 소련측은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려면 이들 만주계가 한국 전쟁 기간 중 어느 정도의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자료가 있어야 될텐데 현재 내 수준에서 그런 자료를 입수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고 북한쪽의 선전용 찌라시들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북한쪽 일차 사료들이 공개된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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