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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6일 목요일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

그러나 과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정치와는 무관한 군인들이었을까? 또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2차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려고 했을까? 또는 리델 하트에게 한 말들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었을까?

(리델 하트와의 대화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은 독일 장군들이 리델 하트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했는지 보여준다. 그리즈데일(Grizedale)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장교 중 한 명인 헨리 펄크(Henry Faulk) 중령의 회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5년 12월 28일에 리델 하트가 독일 장군들에게 면담을 신청했을 때 펄크 중령은 그들에게 리델 하트가 찾아 왔으니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독일 장군들은 모여서 리델 하트와 이야기 할 때 어느 정도 선 까지 정보를 알려 줄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어가 유창했던 펄크 중령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리델 하트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리델 하트는 펄크 중령의 말을 듣고도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펄크 중령은 아마도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은 엘리트적이고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둔 집단이므로 신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정말 리델 하트가 펄크 중령의 말대로 독일 장군들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면? 전범재판이 시작될 무렵인 1945/46년 겨울에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인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델하트 자신도 영국측의 전범 기소 책임자인 쇼크로스(Hartley Shawcross)를 만난 1945년 9월 무렵부터 전범재판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리델하트는 자신이 전쟁성과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독일 장군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laric Searle, "A Very Special Relationship :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1953", War in History Vol 5 Issue 3,(1998), pp.332~333

이 이야기는 리델 하트가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을 면담하면서 The Other side of the Hill의 저술을 준비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The Other side of the Hill은 2차대전 초기 아주 큰 삽질로 거의 매장(???) 당할 뻔 한 리델 하트가 다시금 명성을 되찾도록 해 준 저작이고 또 냉전시기 독일 국방군 장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한 저작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Alaric Searle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군사이론가와 군사사가로서의 명성에 타격을 받았던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의 이런 점을 잘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펄크 중령의 증언은 리델 하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지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리델 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를 이용해 독일 장교단은 나치나 히틀러의 범죄와는 무관한 애국적인 집단이었다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퍼트릴 수 있었습니다. 리델 하트는 지속적으로 독일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만토이펠은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무장친위대 장군 비트리히를 구하기 위해서 리델 하트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지요.

사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런 종류의 뒷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

2007년 8월 26일 일요일

부하린이 감옥에서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글입니다.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인지 편지의 곳곳에서 불안한 심리가 표출되고 있으며 또 성경의 일화를 언급하는 등 공산주의자 답지 않은 모습도 조금씩 보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환각을 본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한때 최고의 이론가이던 사람의 몰락에 비참함 마저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삶을 체념했다고 적고 있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스탈린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제가 보기에도 목숨을 체념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아 안스럽습니다.)

스탈린 동지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이 편지를 읽지 못하도록 하시오.

스탈린 동지께

요시프 비사리오노비치(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아마도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이 편지를 공문서 형식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 편지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 입니다. 이 편지의 존재 여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단계, 아마도 내 삶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과연 이것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감옥의) 정적은 나를 오싹하게 만들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리고 내가 아직 글을 쓸 수 있을 때, 내가 눈을 감기 전에, 그리고 아직 나의 두뇌가 기능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죽음을 동지께 미리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한 오해도 피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 점들을 밝히고 싶습니다.; a) 나는 내가 고백한 혐의를 부인하지 않을 것 입니다 b)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동지가 내 문제를 어떻게 처리 하실지에 대해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순전히 동지와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것 입니다. 지금 나는 동지께 이 문제를 반드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 때문에 이 편지를 쓰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1) 나는 지금 벗어날 수 없는 벼랑의 끝에 몰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이므로 솔직히 이야기 하겠습니다. 나는 수사과정에서 밝혔듯 어떠한 범죄와도 관련이 없는 무죄입니다.

2)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보더라도 회의에서 이미 밝혔듯 다음과 같은 사실 외에는 더 말씀 드릴 것은 없습니다.

a) 나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누군가 무슨 소리를 질렀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쿠즈민(Кузьмин)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쿠즈민이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합니다.

b) 아이헨발드(Айхенвальд)는 예전에 나와 함께 시내를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회의, 또는 회의 비슷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안스럽게 생각해서 아이헨발드와 이야기 한 사실에 대해 숨겼습니다.

c) 나는 1932년도에 내가 당에서 다시 실권을 잡을 것이라고 믿고 나를 따르던 나의 추종자들과의 “표리부동한” 태도에 대해서 유죄를 시인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추종자들을 당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이 점은 내가 말한 그대로 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다른 혐의들은 모두 허구이거나 설사 그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은 전혀 알지 못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전체회의에서 이야기 한 것은 모두 진실이며 거짓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당의 노선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실히 따랐으며 동지를 따르고 존경했습니다.

3) 나는 제게 씌여진 혐의나 “다른 이들의” 자백을 시인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무장해제 당했다”는 허위 사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것 입니다.

4) 이와 관계없는 것과 3번과는 별도로, 나는 우리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 이번 숙청에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a) 전쟁 이전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으며, b)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숙청에는 1) 범죄혐의자 2)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 3) 잠재적으로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 또한 이 세 가지의 범주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으며 일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집단과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일부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이제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고 상호간의 불신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이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입니다. 나는 내 명예를 훼손한 라덱()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으며 결국 그의 뒤를 따르게 됐습니다…) 이 방식을 통해 지도부는 자체에 대한 권위를 확립했습니다.

아무쪼록 내가 하는 말이 동지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이번 숙청에 어떤 계획, 어떤 의도, 그리고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나와 가깝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스탈린 동지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각한 역설적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5) 만약 내가 동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입니다. 하긴, 그게 어쨌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만약 동지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동지께서 내가 유죄라는 점을 믿고, 또 동지가 진심으로 내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했다고 믿고 있을 것 같아 답답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나 자신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당하게 만들었다, 즉 나 자신이 이런 행동이 범죄라는 것을 알고도 그대로 했다는 것 입니까? 만약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지금 나의 머리는 이런 혼란으로 어지럽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외침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죽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때문에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의 빌미를 만들겠지요.

도데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도데체 내가 뭘 하면 좋겠습니까?

6)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개심을 고취하지 않았고 나 또한 누구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당의 노선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보복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동지께서 진심으로 알고 싶을 것 같아 이야기 하는데, 내가 답답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 과거에 있었던 일 중 하나를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92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내가 동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동지는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동지는 내가 왜 동지를 나의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건 동지는 음모 같은 것을 꾸미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소?” 그래서 나는 “그렇지요. 나는 음모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카메네프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동지께서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지만 카메네프와의 관계는 나에게 있어서 마치 유대인들의 원죄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 이런. 이게 무슨 유치한 생각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바보짓이란 말인지! 결국 카메네프와의 친분 때문에 지금 나의 명예와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코바.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지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 나는 이 편지를 쓰면서 나의 처지를 더욱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내가 당 지도부나 나를 수사한 수사관이건 간에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나는 나의 주변이 모두 암흑천지 같이 보이고 어둠이 감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심한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지의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7) 내가 환상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동지를 여러 차례 보았고 한번은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스탈린의 두 번째 아내)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 환상 속에서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도데체 당신들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오시프에게 말해서 당신을 빼내겠어요.” 이 환상이 너무나 사실 같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동지께 제발 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금 저의 정신은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나데즈다 세르게예브나는 제가 동지에게 어떤 악독한 음모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결국 나의 피폐한 정신이 이런 환상을 만들어 냈겠지요. 나는 동지와 수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 이런. 만약 나의 마음을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동지에게 나의 영혼을 모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동지께서 내가 스테츠키(Стецки)나 탈(Тал) 같은 사람과 달리 나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지께 바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동지께서는 나를 용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에게서) 칼을 거두도록 했던 것 같은 천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나의 끔찍한 운명은 이제 결정되었습니다.

8) 마지막으로, 나의 마지막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a)사실 나는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목숨을 끊어버릴 기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을 뿐입니다. 동지께서도 나의 성품을 잘 알 것입니다. 나는 당이나 소연방의 적이 아니며 나의 힘이 닫는 한도 내에서 당의 의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 나의 힘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많은 고뇌를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당신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합니다. 제발 나를 재판에 회부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겠지요.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재판 이전에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b) 만약 내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동지께서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하고 또 진심으로 총살은 피하도록 부탁 드립니다. 나는 총살 대신 독약으로 목숨을 끊고 싶습니다. (모르핀을 맞고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특히 이점은 내게 중요합니다. 동지께서 내게 자비로운 행위를 베풀도록 부탁 드리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정치적으로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 이고 또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알지 못 할 것 입니다.
하지만 나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십시오. 동지께서도 나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동지께서도 나와 같이 하시겠지요. 결정을 내리시면 알려주십시오. 나는 충분히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끔씩 죽음의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혼란을 느낄 때 마다 내가 정신적으로 고갈된 상태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사형이 선고된다면 내게 치사량 만큼의 모르핀을 주십시오. 진심으로 간청합니다.

c) 그리고 나의 아내(Анюта,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와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단, 내 딸은 만나고 싶지 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함을 느낍니다. 나의 죽음은 내 딸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입니다. 그리고 나디아(부하린의 첫 번째 아내)와 제 아버지 역시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뉴타는 아직 젊으니 충분히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 이전에 아뉴타를 만났으면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약 나의 가족들이 재판에서 나의 (조작된) 진술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아 자살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려 합니다.

d) 만약 나의 예상과 반대로 내가 석방된다면 (나의 아내와 먼저 상의하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안을 부탁 드리고자 합니다.
- 미국에 몇 년 정도 망명을 하고 싶습니다. 나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재판을 받는 대신 정치 활동을 하겠습니다. 즉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고 혼란에 빠진 지식계층들의 마음을 사로 잡겠습니다. 또 나는 반 트로츠키 주의자가 되어 트로츠키를 타도하는데 진심으로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동지께서는 나에게 비밀경찰 한 명을 감시 목적으로 붙이고 그래도 미덥지 않으시다면 나의 아내를 내가 트로츠키와 그 일당에게 큰 타격을 입힐 때 까지, 즉 여섯달 정도 본국에 두고 감시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래도 나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으시면 뻬초라(Печора)나 콜릐마(Колыма)의 수용소에 25년 정도 유배를 보내십시오. 나는 유배지에서 대학과 지역 문화 박물관, 연구소, 그리고 미술관, 민속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언론사를 세우겠습니다. 즉 나와 나의 가족은 내가 죽을 때 까지 그곳에서 문화 사업을 전개할 것 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일을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는 2월 전체회의에서 있었던 사안을 고려하면 내가 석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재판이 언제라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하나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의 철학 원고들은 내가 죽더라도 없애지 말아 주십시오. 매우 가치있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은 당신에게 충실했던 가장 유능한 측근을 하나 잃게 되었습니다. 나는 마르크스가 알렉산드르 1세는 바클레이 드 톨리(Михаи́л Богда́нович Баркла́й-де-То́лли)를 반역 혐의로 의심해서 결국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잃었다고 평했던 글을 읽었었는데 지금 나의 상황이 마치 바클레이 드 톨리와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지만 나는 눈물을 거두고 이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동지와 당, 그리고 당의 뜻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 말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나는 동지에게 모든 것을 다 적었습니다. 내 편지를 꼼꼼하게 읽어 주십시오. 지금 나의 상황이 당장 내일이라고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편지는 미리 적었습니다. 신경이 쇠약해 졌기 때문에 지금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감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두통과 눈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씁니다. 코바, 나의 양심은 당신 앞에 떳떳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오직 마음속으로만 표현해 주십시오) 이런 이유로 나는 나의 마음속에 당신을 품고자 합니다. 영원한 이별이로군요. 이 불쌍한 사람을 좋게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부하린 1937년 12월 10일

J.Arch Getty and Oleg v. Naumov(ed), The Road to Terror : Stalin and the Self-Destruction of the Bolsheviks, 1932~1939, (Yale University Press, 1999), pp.556~560

추가 1. 이 편지의 러시아어판은 이 사이트에 있습니다.

추가 2. 이 편지 말고도 한국에 번역된 부하란 : 인간, 학자 그리고 혁명가라는 책에는 부하린이 자신의 두 번째 아내에게 쓴 편지가 부록으로 실려 있습니다. 이 두 번째 편지는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 비해 조금 더 차분한 마음에서 쓴 것 같아 보이며 또 상당히 슬픕니다.

2006년 10월 26일 목요일

독일군 포로송환 완료 뒤 프라브다에 실린 어떤 기사

독일 연방공화국에서는 모든 선전기관들이 석방된 전쟁범죄자들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포장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귀향자들을 수용하는 프리들란트(Friedland) 수용소는 뻔뻔하게도 과거 히틀러의 앞잡이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찬양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비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프라브다 1955년 10월 21일, G. Knopp, Die Gefangenen s.380 재인용


아데나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1955년 미송환된 독일인 포로들, 특히 주로 전범으로 분류된 무장 친위대나 고위 간부들의 송환을 성공 시킨 것이다. 무장친위대 소속의 포로들은 소련측에서 씨를 말려버릴 심산이었기 때문에 송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걸 성공 시킨 것이다.

이때의 일로 흐루쇼프는 "독일인들이 벌써 부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며 내심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포로를 송환한 뒤에도 이런 식으로 심통을 부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샤먼의 코트(재탕)

예전에 아마존에 실린 독자들의 서평을 보고 한번 사 봐야지 하다가 귀차니즘 발동과 지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통에 사보질 못 했는데 2주 전쯤 지하철역에서 번역판을 5,000원에 사게 됐다. 이것과 함께 만화 한국전쟁도 있었는데 탄약이 부족해 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책의 번역은 재미있게 잘 된 것 같다. 물론 원판을 아예 못 읽어 봤으니 단정하긴 그렇지만.

이 책의 주제와 저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A History of Pagan Europe 과 유사하다. A History of Pagan Europe이 기독교가 동진하면서 붕괴된 유럽의 전통 문화를 차례대로 보여줬다면 "샤먼의 코트"는 전통 문화를 상실하고 기독교화된 유럽이 동진하면서 붕괴된 시베리아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시베리아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 불교 등 많은 외래 문화의 공격을 받았다.

시베리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6세기 부터 적극적으로 동진을 시작한 러시아 세력이다.
러시아인들은 동진하면서 요새도시를 세워 주변지역을 러시아화 하고 원주민들을 복속시키면서 전통 사회를 파괴하고 덤으로 환경도 파괴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했으나 대포와 총, 그리고 각종 전염병으로 무장한 러시아인들 앞에 처절하게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여러가지 공격중에 최악의 공격은 "사회주의"에 의한 것 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종교를 강요했고 스탈린 체제는 사상의 강요 보다 학살을 택했다. 스탈린 보다 온건한 편 이었던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전통사회를 붕괴시킨건 마찬가지였고 소련이 붕괴될 무렵에는 더이상 말살할 만한 전통 문화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됐다.
스탈린 시기의 전통문화 말살은 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강제 기독교화와 비교하더라도 그 야만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 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해 인민의 적들을 박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에서 샤먼을 집어 던지고 총살하고 강제 노역으로 혹사시켜 죽이고...

결국 현재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박제화된 과거의 흔적 뿐이다.

책의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시베리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은 독자들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게 해 준다.

전반적으로 슬픈 이야기로 일관된 슬픈 책이다. 우울할 때 읽으면 쥐약이고 기분이 들떠 있을때 읽으면 좋을 듯...

아주 멋진 책이다.

그리고 덤으로..

1. 이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용맹한 추크치족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아해하는 중국이 추크치족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추크치족 이십니까?"

"그렇다."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그렇다."

"중국의 인구가 10억명 이라는걸 아십니까?"

"그래?"

다시 말을 잇는 추크치족이 가로되

"그럼 너희들 모두를 어디에 묻어 주랴?"

2.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비드야 단다론"이라는 부랴트족 불교 승려는 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수용소에서도 다른 라마교 승려들과 수도하면서 포교도 했다고 한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장 자크 아노가 이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제법 재미있을 듯.

2006년 4월 23일 일요일

소련군 포로들의 생 고생(재탕+약간 수정)

다들 잘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 첫 해인 1941년에 기록적인 대 승리를 연달아 거두면서 엄청난 숫자의 포로를 사로 잡았다. 전쟁 첫해의 붉은군대 수뇌부가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박살나지 않아도 될 부대들까지 무더기로 박살나 버렸고 그 덕에 독일군은 좀 지나치게 포로를 많이 잡았다. 독일군이 첫 6개월간 잡은 소련군 포로는 1차 대전 전 기간동안 잡은 러시아군 포로의 숫자보다도 훨씬 많았으니.

독일측의 기록(독일연방문서보관소 III W 805/5-7, 재인용)을 보면 1941년 6월부터 1941년 12월 말 까지 사로잡힌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41년 6월 22일~ 6월 30일 : 112,784명
1941년 7월 1일 ~ 7월 31일 : 701,246명
1941년 8월 1일 ~ 8월 31일 : 698,580명
1941년 9월 1일 ~ 9월 30일 : 989,203명
1941년 10월 1일 ~ 10월 31일 : 1,037,778명
1941년 11월 1일 ~ 11월 30일 : 291,934명
1941년 12월 1일 ~ 12월 31일 : 75,440명


확실히 좀 많이 잡혔다…

소련/러시아 측에서 주장하는 수치는 독일쪽 기록 보다는 다소 적은 편인데 그렇다 치더라도 기록적인(!) 수치인 것은 틀림 없다.

물론 독일측도 전쟁 이전부터 포로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계획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련 침공 직전인 1941년 6월 16일에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동부전선에 투입될 집단군과 야전군 사령부에 포로 대우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고 한다. 이 지령에서는 비록 소련은 제네바 조약 가입국이 아니지만 소련군 포로에 대해서 제네바 조약이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별도의 예외 조항을 첨가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지고 위에 적힌 것과 같이 엄청난 숫자의 포로가 계속 잡히자 독일군은 포로를 처리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당장 포로에게 먹일 만한 식량이 충분히 공급된 것도 아니고(진격하는 독일군 부대들도 보급 추진이 안 돼서 애를 먹었으니 포로를 고려하는건 애당초 어려운 문제였다.) 일반 독일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인종적으로 깔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다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의 많은 지휘관들도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문명”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같은 “문명국가”와의 전쟁과는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쟁의 성격이 좀 별날 수 밖에 없었다.

일반 독일 지휘관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다음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5월 2일에 제 4기갑집단 사령관 회프너 상급대장이 예하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문서의 내용 중 일부다.

소련과의 전쟁은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이 전쟁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게르만 민족 대 슬라브족의 투쟁이며 유럽의 문명을 모스크바와 아시아적인 것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고 유대-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투쟁이다.
이 싸움의 목적은 지금의 러시아 그 자체를 격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후략)


다들 잘 아시다 시피 개전 초반부터 소련군 포로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가 격화된 9-10월에 사로 잡힌 포로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태에 처하게 됐다. 7월에 독일 중부집단군 지구에서 생포된 소련 포로들이 후방으로 이송되는 동안 지급 받은 식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날자 불명 : 수수 20 그램, 빵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100 그램
날자 불명 : 수수 50 그램, 빵 200 그램


이렇게 부실한 식사를 제공 받고 후방의 수용소로 강행군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포로의 사망률은 지독하게 높았다. 1941년 10월 말에 가면 중부 집단군 지구의 포로 사망률은 하루 평균 2%에 달했다고 한다. 1941년 10월에 후방으로 이송 되지 못하고 벨로루시아 지역에 있던 포로 361,000명 중 99,0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하니 소련군 포로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는지는 잘 아실 수 있을 게다.

소련 포로들에 대한 기본적인 식량 배급도 엉망이었으니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더 고통 받은 것은 부상 당한 포로들 이었다. 독일측은 포로들에게 식량을 보급하는 것 조차 벅찼기 때문에 의료 지원은 더더욱 어려웠다. 1941년 8월에 우만에 세워진 소련군 포로 임시 수용소의 예를 한번 들어보자. 이곳에 수용된 약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부상당한 포로들은 의료 도구와 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한 채 방치되어 사망자가 많았다고 한다. 군의관이 있으면 뭐하나 치료할 의약품과 의료기구가 없는데…

부상당한 포로들은 노동도 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쓸모없는 식충이(nutzlose Esser)로 취급 받았다. 포로 부상자들은 비 노동인력으로 분류되어 하루 평균 1,500칼로리의 식사만 지급 받도록 규정 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높았다. 끔찍하다.
소련 포로들과는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군 포로의 대우는 그런대로 좋은 편 이었다고 한다. 독일은 1941년 9월에 부상이 심한 영국군 포로 1,500명을 중립국을 통해 이송했다고 한다. 거참. 하지만 중상을 입은 소련 포로들은 이런 대우를 받기는커녕 치료조차 못 받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심한 경우 부상당한 포로들을 의학 실험에 쓰기도 했다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망할 녀석들.

그리고 덤으로 소련 포로들을 괴롭힌 것은 악명 높은 행동대(Einsatzgruppen)였다. 이미 행동대는 폴란드 전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을 훌륭히(?) 수행한 전력이 있었기에 대 소련전에서는 그 실력을 한층 더 발휘해서 소름끼치는 활약을 했다. 1941년 7월 17일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 전쟁포로국(Abteilung Kriegsgefangene)은 소련군 포로들 중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politisch untragbaren)”을 선별해서 행동대에게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불온한자들에는 인텔리 계층, 광신적인 공산당원, 그리고 모든 유태인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41년 가을 보리소프 수용소에 투입된 Sonderkommado 4a가 학살한 유대인 포로 1,109명 중 78명은 부상을 입은 포로들이었다고 한다. 망할 놈들 같으니. 한 독일인 연구자는 행동대의 무자비한 학살에 희생된 소련 전쟁 포로의 숫자를 약 50만 명 정도로 추산 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독일측의 가혹한 포로 대우는 독일내에서 조차 말이 많았다. 1941년 9월에 카나리스 제독은 소련군 포로 처우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방군 총사령부에 소련군 포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폴란드와 독일 동부의 수용소에 도착한 포로들에겐 아직 고생이 끝난 게 아니었다. 독일의 전쟁 포로 수용에 대한 준비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고생은 계속 됐다.
사실 독일 국방군 사령부는 1941년 초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수용인원 3만에서 5만 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포로 수용소 단지들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터진 다음에 포로들이 쏟아져 들어올 때 까지 독일측이 해 놓은 것은 포로수용소 부지에 철조망 울타리를 쳐 놓는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도착하자 마자 부실한 도구와 자재로 자신들이 지낼 막사를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생포된 포로가 예상외로 너무 많았던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폴란드 지역에서는 교도소와 텅 빈 공장 단지를 수용소로 전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부족했다.

대략 1941년 겨울 이 되자 독일측도 그럭저럭 독소전 초반의 어수선한 포로 관리를 정리하고 소련 포로에 대한 처우도 약간은 개선 되었다. 1941년 12월에 독일 국방군 사령부가 하달한 소련 포로에 대한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포로에 대한 일일 식량 배급 규정(단위 : 그램)

빵 214
고기 29
지방 19(주로 마가린)
치즈 9
설탕 32
마멀레이드 25
오트밀, 시리얼 21
감자 1214
야채 161
절인 양배추 39
분말 음료 4
소금 25

※참고로 소련 정부의 육체 노동자에 대한 1944년도 식량 배급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 정부의 육체노동자 공식 배급량(단위 그램)

빵, 또는 밀가루 700(매일)
설탕 800(한달 치 배급)
곡물 1,500(한달 치 배급)
지방 600(한달 치 배급)
고기, 생선 2200(한달 치 배급)

하지만 소련 포로들이 규정된 식량을 받는 대가는 가혹한 중노동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처우라고 하기도 그랬다. 소련 포로들에게 지급된 빵은 러시아빵(Russenbrot)라고 불렸는데 그 재료는 호밀 기울 50%, 사탕무 20%, 가루 20%, 셀러리가루 20%, 밀짚 가루 10%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재료만 봐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중노동과 충분치 못한 식량 때문에 포로 수용소에서도 사망자가 많았다. 1944년 12월 독일측 기록에 따르면 독일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소련 포로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장교 47,980
군의관 1,265
부사관 22,595
사병 845,272
민간인 3,587

위의 통계를 보면 전쟁 기간 동안 잡힌 500만이 넘는 소련 포로 중 독일군에 자원한 150만 명을 빼더라도 수백만의 소련 포로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에는 거꾸로 수백만의 독일 포로가 소련에서 고생을 해야 했는데 독일 포로들은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아마도 많은 독일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소련을 건드린 건 큰 실수였다는 후회를 했을거다. 하여튼 전쟁은 남는장사가 되긴 어려운 비즈니스다.


이 글이 베낀 자료들.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Joachim Hoffmann, Die Ostlegionen 1941-1943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
Christian Streit, Die Behandlung der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 und völkerrechtliche Probleme des Krieg gegen Sowjetunion
Christian Streit, Das Schicksal der verwundeten sowjetischen Kriegsgefange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