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 Steven J. Brady의 Eisenhower and Adenauer : Alliance maintenance under pressure, 1953-1960이 있습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해서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았는데 앞 부분 부터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부분은 1953년 미국을 방문한 아데나워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의료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부분입니다. 명목상으로는 의료인력 지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간접적으로나마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적 기여를 하겠다는 의사 표명인 셈이지요. 사실 이때는 독일의 재무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던 시점이라 이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무렵 기민당은 10만명 수준의 군대 창설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쓸모있는 동맹이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데나워는 이후 소련의 엉성한(???)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친미-친서방노선을 고수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통일 된 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2차대전 이후의 소련은 독일을 위험한 잠재 적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일을 중립화 해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아데나워같은 보수진영의 선수들은 이런 엉성한 속임수를 간단히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친미노선을 고수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요즘 중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한국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역시나 흐루쇼프 이래의 엉성한 속임수인게 한눈에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조잡한 수작이 의외로 민족주의적인 진영에서 잘 먹히는 것 처럼 보이는 겁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합니다만 한미동맹이 존속하려면 한국 쪽에서 동맹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진영은 이런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요. 한국전쟁 직후와 같이 대립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동맹이 비교적 잘 기능했습니다만 냉전이 끝나고 표면적으로 평화가 정착된 지금 시점에서는 안보적 동맹이 제대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점은 흐루쇼프가 엉성한(?!?!) 평화공세를 시작했을 때 한국 내의 일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은 이것을 새로운 변화의 전조로 받아들였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제3세계의 부상을 바라보면서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한미동맹 구도에 비판적인 집단 중 일부는 바로 1960년대에 뿌리를 둔 지식인들이지요. 물론 저도 미래를 내다보는 재주가 없으니 예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과거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전망이 계속해서 빗나간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주장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2006년 10월 26일 목요일
독일군 포로송환 완료 뒤 프라브다에 실린 어떤 기사
독일 연방공화국에서는 모든 선전기관들이 석방된 전쟁범죄자들을 영웅이나 순교자로 포장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귀향자들을 수용하는 프리들란트(Friedland) 수용소는 뻔뻔하게도 과거 히틀러의 앞잡이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찬양하는 무대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비난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프라브다 1955년 10월 21일, G. Knopp, Die Gefangenen s.380 재인용
아데나워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1955년 미송환된 독일인 포로들, 특히 주로 전범으로 분류된 무장 친위대나 고위 간부들의 송환을 성공 시킨 것이다. 무장친위대 소속의 포로들은 소련측에서 씨를 말려버릴 심산이었기 때문에 송환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는데 이걸 성공 시킨 것이다.
이때의 일로 흐루쇼프는 "독일인들이 벌써 부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며 내심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포로를 송환한 뒤에도 이런 식으로 심통을 부리기도 했던 모양이다.
어쨌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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