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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진보라는 용어의 식상함

윤해동 교수의 『근대역사학의 황혼』의 서두에서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서 비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부분입니다. 윤해동 교수는 한국에서 진보라는 개념이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봅니다. 진보 개념이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개혁에 대한 요구를 진보로 포장할 때 혼란이 초래된다고 보는 것 입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정치의 문제를 아주 잘 꼬집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판은 더 신랄합니다. 한국에서 사용되는 진보 개념은 지극히 속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 입니다. 필자는 진보라는 간판이 이상하게 사용되는 몇가지 현상을 비판합니다. 필자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직접 읽어보면 어떤 세력을 비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번째 비판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필자는 진보가 그냥 일종의 기호로 작용하게 된 것은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자의식 없이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결과이며 결국 그 집단에게 강박증을 강요하는 상황이라고 봅니다. 결국 진보라는 기호에 대한 강박은 그 자체로서 진보를 칭하는 진영의 보수화를 보여주는 것 이라고 봅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비판은 현재의 진보를 칭하는 몇몇 정치집단의 문제를 아주 잘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 집권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으면서 단지 집권을 위한 통합만이 논의 중심이 되고 그런 정치 집단이 진보를 칭하는 현상은 정말 기괴합니다. 정치가 종교적인 속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진보라는 개념이 마치 점집의 卍자처럼 사용되는 것은 기괴하다 못해 웃기기 까지 합니다. 진보라는 간판을 단 사이비 예언자들이 넘쳐나는 지금 저는 진보라는 단어에 굉장히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피곤한 사이비 예언자들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겠지요.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히틀러 집권기 독일의 보탄(Wotan)신앙

히틀러 집권기의 보탄(Wotan, 오딘) 신앙은 과거 이글루스 시절에 댓글로 한 번 언급했던 문제인데 이글루스를 날려먹었으니 재탕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인용한 책은 "그 때의 그 책" 입니다.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하던 시기(1933~1945)에는 이단 신앙이 널리 고취되었다는 서술이 많은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 중에는 1933년 의회에서 가톨릭 정당의 나치당 지지가 있었는데 이로인해 나치당은 집권당이 될 수 있었다. 수많은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이 나치 정권을 열렬하게 지지했다. 나치 정권이 이교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2차세계대전 중의 전시선전을 통해 형성되었다. 신비학자(Occultist) 루이스 스펜스(Lewis Spence)는 대독일선전의 일환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오딘과 토르 신앙'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신앙은 수많은 문학적 찬양의 대상이었다. 나는 민속학과 신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고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앙이 다른 하급 종교는 물론 폴리네시아나 고대 페루의 신앙과 비교하더라도 특별히 품격있거나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고대 독일신앙은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이 부활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히틀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몰락한다면 인위적으로 부활시킨 다른 이교신앙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히믈러와 헤스라는 두 명의 '극단적인 나치 광신자'들은 우수인종이 미래의 지배자가 된다는 믿음을 고무하는 아리아 신비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종했던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1941년에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보탄(Wotan)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야. 우리의 고대 신화는 기독교 신앙이 확립되었을 때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스펜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 국가사회주의를 "나치의 이단 교회"인 다신신앙과 결부시키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존 요웰(John Yeowell)의 최근 연구는 다신교도들이 나치 독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박해받는 존재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다신종교의 지도자들은 나치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체포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루넨마이스터(Runenmeister)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마르비(Friedrich Bernhard Marby)는 1936년에 체포되어 이후 9년동안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마르비만 체포된 것이 아니었다. 1941년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다신교와 밀교 단체가 불법화 되었다.(이 중에는 보탄 숭배자이며 아리아주의자였던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추종자들도 포함되었다.) 수많은 다신교도들이 다른 히틀러 정권의 희생자들처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Prudence Jones and Nigel Pannick, A History of Pagan Europe, (Routlege, 2000), pp.218~219

물론 여기서 제가 인용한 구절은 사실의 일부분을 전달할 뿐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프리드리히 마르비가 탄압받았던 원인으로는 다신교간의 교파 분쟁으로 히믈러의 지원을 받은 교파가 승리한 결과라는 주장이 있으며 히틀러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나치당의 소수 인사들이 이교도 신앙에 심취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치 집권기를 통해 독일의 전통 신앙이 광범위하게 부활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만화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이런 이상한 선입견이 확산되는 것은 찝찝한 일이지요.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1차 중동전쟁과 레바논군

캠브리지 대학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The War for Palestine 2판을 읽는 중입니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 확대되면서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글이 한편 추가되었더군요. 휴즈(Matthew Hughes)가 쓴 이 짧은 글은 꽤 재미있는데 이 글을 바탕으로 관련 1차 중동전쟁 당시 레바논군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레바논은 마론파 기독교도와 수니파, 시아파 이슬람교도, 드루즈파 등 잡다한 종교집단이 뭉쳐져 만들어진 나라이다 보니 독립부터 약간 불안한 출발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바논은 2차대전 중 자유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약속 받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에 국가협약을 체결해 독립국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 협약은 1932년도 인구조사에 따라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의 주요 직위를 각 종파별로 배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가지는 식입니다.
물론 기독교도는 물론 이슬람교도 중 상당수가 이 국가협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레바논에서 이슬람의 우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미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192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이슬람교도에 상당수의 권력을 양보한 국가협약에 극도로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측이 시리아의 지원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 처럼 기독교도들도 이전부터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이스라엘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위임통치 시기에 대통령을 지낸 에데(Emile Edde)는 1948년 7월 3일에 이스라엘과 비밀리에 회동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을 침공할 경우 기독교도가 베이루트에서 반정부 무장폭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벤 구리온은 레바논이 아랍의 포위망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레바논 기독교도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므로 에데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Hughes, 2007, p.206]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전쟁으로 치달을 경우 국가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은 아랍연맹의 가맹국 중 유일하게 최후까지 외교적 해결을 주장했습니다.[Pappe, 2001, p.102~103]

어쨌든 정부에 반발하는 기독교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만큼 레바논 군대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규군도 기독교도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 입니다. 국가협약에서 국방부장관이 기독교도에 배분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령관도 기독교도인 셰합(Fuad Chehab) 대령 에게 돌아갔고 참모장은 드루즈 출신이 맡았습니다. 여기에 군 장교단의 상당수는 기독교도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레바논군이 정식으로 발족했을 때 레바논군 장교단의 71.8%가 기독교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식민통치의 유산이었습니다. 레바논 군대는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만든 식민지군대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당시 기독교도와 함께 군대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시리아인들은 레바논이 독립하자 시리아로 돌아가 버리고 레바논 군은 기독교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장교단 중 이슬람교도는 1958년 까지도 20%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셰합 대령은 신생 레바논군의 장교단을 소수의 정예화된 장교들로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했고 교육수준이 낮은 시아파나 수니파 이슬람교도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의 이슬람 교도들은 레바논군을 ‘우리의 군대’라기 보다는 ‘기독교도 군대’로 인식하는 실정이었습니다.

1948년 전쟁 당시 레바논군은 4개 경보병대대(Battaillons de Chasseurs)와 1개 포병대대, 1개 기갑대대, 약간의 기병대와 독립 공병, 의무, 수송대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1차 중동전 당시 레바논군의 총 병력에 대해서는 Herzog의 2,000명 설에서 5,000명 설 등이 있는데 레바논군의 작전일지를 활용한 휴즈는 3,000명에서 3,5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장비로는 18대의 프랑스제 전차(아마도 R-35)와 장갑차, 75mm와 105mm 포가 혼재된 2개 포대 규모의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제 전차를 대체하기 위해 미국측과 M-4 셔먼을 도입하는 문제를 협상했는데 이것은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7월 까지도 진전이 없었다고 하는군요.[Hughes, 2007, p.207]

레바논은 아랍연맹(Arab League)에 가입한 만큼 이스라엘에 대한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기는 했습니다.물론 실제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투입된 것은 3대대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레바논군은 1차 중동전 와중에도 국내 치안 유지와 산적 토벌 등을 위해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이스라엘 군과의 전투는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교전한 3대대 조차 1948년 5월 7일에 바알벡(Baalbek)의 치안 유지를 위해 1개 중대를 차출해서 보냈다고 하니 어떤 상태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친 시리아 성향 이슬람 교도들이 시리아와 연계할 것을 우려해 공식적으로는 이스라엘과 교전하는 상황에서도 동맹국(!)인 시리아 국경에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Hughes, 2007, p.208]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바논군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교전한 것은 1개 대대에 불과했습니다. 1차 중동전쟁에서 레바논군의 역할은 미미하다 보니 대부분의 연구들은 레바논군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출간된 중동전쟁 개설서인 김희상(金熙相)의 『中東戰爭』에서는 레바논군의 공세에 대해 ‘네 줄’만을 할애하고 있지요(;;;;)[김희상, 1989, 59쪽]
1948년 5월 중순, 아랍연합군은 레바논군에게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군과 합류해 갈릴리 방면에 대한 공세에 나서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처음에 레바논 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아크레를 점령한 뒤 하이파 방면으로 공세를 확대하는 것 이었습니다.[Pappe, 2001, p.125] 그러나 셰합 대령은 레바논군의 전력이 고작 4개 대대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전투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공세에 적합하지 않다고 연합군 수뇌부를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도인 레바논 대통령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셰합 대령의 방어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결국 레바논군이 담당한 알 나쿠라(al-Naqura) 지구에서는 별다른 교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레바논 국내의 이슬람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정부에 공격을 요청했기 때문에 레바논군은 결국 소규모의 공격에 나서게 됩니다.
레바논군의 공격목표인 말리키야(Malikiyya)는 5월에 아랍해방군(ALA)이 잠시 점령했다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레바논군에게는 다행히도 원래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이프타흐(Yiftach) 여단의 1대대가 예루살렘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전투경험이 부족한 오데드(Oded) 여단의 예하 부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 부대는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투경험이 부족한데다 장비도 형편없어서 전투력이 낮았습니다.
1948년 6월 5일, 레바논군 3경보병대대(병력 436명)이 공격을 개시하자 오데드 여단은 약간의 저항만 하고는 이날 17시30분에서 18시 사이에 말리키야를 버리고 퇴각했습니다. 레바논군은 전사자 두 명을 내는데 그쳤으며 이스라엘 측은 8명이 전사했습니다. 전투경험이 부족했던 오데드 여단은 이것을 최소 2개여단 규모의 대공세로 착각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스라엘 측의 이런 착각이 전후의 연구에도 반영되어 대표적인 개설서로 꼽히는 Herzog의 저작에도 이날의 전투는 시리아-레바논 연합군 2개 여단에 의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측은 이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시리아-레바논 연합군이 말리키야를 점령한 뒤 유대인 지구에 대한 공세를 계속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 전투는 소규모로 전개된 전투였으며 레바논군은 국내외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공세에 나선 만큼 말리키야를 점령한 선에서 공세를 멈추려 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군은 7월 8일에는 아랍해방군에게 말리키야를 인계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으로 1차 중동전에서 레바논군의 작전은 사실상 종료되어 버립니다.

이 전투는 군사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레바논 정부는 국내의 이슬람교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말리키야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기념하여 베이루트에서 각 종파 지도자들의 참석 하에 대대적인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레바논군이 생색내기용 전투를 벌이고 승전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말리키야를 인계 받은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 측의 대대적인 반격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아랍해방군은 정규군이 아니다 보니 창설에 관여한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 모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비정규부대 답게 부대원의 질적 수준도 들쑥 날쑥해서 그야말로 강간과 약탈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건달부터 열렬한 아랍 민족주의자까지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훈련과 장비 모두가 부족해 정규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것 이었습니다. 게다가 보급도 부족해 9월 이후 탄약 재고가 영국제 소총은 1정당 18발, 프랑스제 소총은 1정당 45발, 기관총은 1정당 650발 수준이었습니다. 사실 아랍연맹의 가맹국들은 겉으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국내의 단결을 외치고 있었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서로 주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개시될 당시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국내의 강경한 여론 때문에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시리아나 이라크 등은 아랍해방군 같은 군사조직을 지원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기묘하게도 당시 이스라엘은 아랍해방군의 전투력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 발발할 무렵 아랍해방군의 총 병력을 25,000명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장비와 훈련수준도 높다고 보았습니다.[Pappe, 2001, p.129] 물론 실제로는 아니었습니다만.

※ 1차 중동전쟁에 대한 과거의 저작들은 아랍해방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 측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먼저 7월 8일 발동된 데켈(Dekel) 작전으로 7월 18일 까지 중부 갈릴리 지역이 이스라엘의 손에 떨어집니다. 아랍해방군은 이스라엘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방적으로 패주해 버립니다. 데켈 작전 종료 이후 일시적인 소강기가 시작되자 아랍해방군 병사들은 식량 부족, 질병 등의 이유로 대규모로 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9일 이스라엘이 다시 히람(Hiram) 작전을 발동해 공세로 나서자 이미 붕괴 상태에 있던 아랍해방군은 전면적으로 패주합니다. 식량은 커녕 물 조차 보급받지 못하자 병사들은 물을 찾아 부대를 이탈해 버리고 일부 병사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 레바논 경찰에 총을 팔아 버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아랍해방군의 제1 야르무크(Yarmuk) 대대는 히람 작전 기간 동안 불과 세 명의 전사자만 냈으며 피해의 대부분은 탈영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하니 전투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패주의 뒷면에는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더러 있는데 패주하던 아랍해방군 병사들이 같은 무슬림 형제들을 약탈하거나 강간했다는 것 들입니다.

이미 승전행사를 한 뒤 쉬고 있던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의 대공세를 맞은 아랍해방군이 포병 지원을 요청하자 점잖게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을 석권한 이스라엘이 레바논 국경을 넘자 교전을 회피하고 퇴각해 버렸습니다. 결국 레바논군에게 실질적인 전투는 말리키야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1차 중동전이 끝나고 포로 교환이 있었을 때 레바논측은 36명의 포로가 귀환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아랍해방군에 지원한 레바논의 이슬람교도였다고 합니다.

레바논은 놀랍게도 1948년의 난장판을 별다른 손실 없이 회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항상 이렇게 좋은 결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가 결국 참혹한 내전에 휘말려 콩가루가 되었다는 씁슬한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요.


참고문헌
金熙相, 『中東戰爭』, 日新社, 1977/1989
Chaim Herzog, Shlomo Gazit, The Arab-Israeli Wars: War and Peace in the Middle East, Greenhill, 2004
Matthew Hughes, ‘Collusion across the Litani? Lebanon and the 1948 War’, The War for Palestine(2nd E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2007
Ilan Pappe, The making of the Arab-Israeli conflict 1947~1951, I. B. Tauris, 1992/2001

※잡담 1. 참고 자료를 찾아 볼까 해서 레바논군 웹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영어, 프랑스어, 아랍어로 서비스가 되는군요. 레바논군 박물관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레바논이 안전해 지면 한번 구경해 보고 싶은 곳 입니다.

※잡담 2. 이번에 글을 쓰면서 찾아 보니 셰합 대령은 나중에 레바논 대통령이 되었더군요. 역시 어느 사회에서나 군고위직은 더 높은 자리로 가는 징검다리인가 봅니다.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원래 슈타인호프님이 올려주신 글에 호응해서 올리려 했는데 좀 늦어졌습니다. 이준님도 관련 글을 한 편 써 주셨군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당연한 말 이겠지만 어느 나라건 간에 외국인의 자국군대 입대에 대한 법적 근거는 있기 마련이고 독일도 당연히 그런 법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5년 5월 21일에 제정된 독일 국방법(Wehrgesetz)의 1조 1항은 모든 ‘독일남성’을 대상으로 국방의무를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국적자가 아닌 외국인과 무국적자의 경우에는 18조 4항에 의거해 총통의 허가를 받을 경우 자원입대가 가능했습니다. 외국인의 자원입대를 허가하는 권한은 다시 1935년 6월 26일에 전쟁성장관(Reichskriegsminister)에게 주어졌다가 1938년 2월 4일에는 국방군총사령관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사령부는 1939년 10월 7일자로 이중국적자, 무국적자, 외국인, 독일계 외국인(Volksdeutschen)의 국방군 입대를 허용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법령과 명령들이 전쟁 기간 중 잡다한 외국인 지원병 부대를 편성하는 근거가 됩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독일은 전쟁 초반부터 잡다한 외국인 의용부대를 편성합니다. 이것이 본격화 된 것은 독소전 발발 이후이지만 그 이전에도 서유럽에서 모병활동이 있었지요. 어쨌건 초기에는 유럽인 위주로 외국인 입대를 허용했지만 소련 및 미국과의 전쟁으로 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독일군도 인종전시장이 되어 버립니다.

독일이 인도인 부대를 편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41년 4월 3일 찬드라 보스(Chandra Bose)가 소련을 경유해 독일로 입국한 뒤였습니다.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잘 나와 있는데 보세는 스탈린이 인도 독립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크게 실망해서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보세가 독일로 오자 독일 외무성은 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트로트 주 졸츠(Adam von Trott zu Solz) 참사관의 관할하에 ‘인도 특별국(Sonderreferats Indien)’을 설치합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스탈린 처럼 인도 독립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보스는 1941년 4월 29일에 처음으로 인도군 포로를 중심으로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 주장을 했으나 독일측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스는 독일 측에 소련의 지원을 얻어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독립군을 인도로 진격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 방안은 현실성이 부족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스는 독일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1942년 5월 27일에 히틀러와 회견하고 인도 독립문제를 논의했으나 역시 별다른 결과는 없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펀자브 출신의 이슬람교도인 무함마드 셰다이(Mohammed Iqbal Shedai)라는 독립운동가가 반영 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셰다이는 종교 때문에 이슬람 중심의 인도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1941년 12월 보스와 회담한 뒤에는 힌두교도와의 협력으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움직여 인도독립군을 편성하자는데 합의합니다. 보스의 활동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인도독립군 편성에 동의하게 됩니다. 인도독립군의 근간은 북아프리카에서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 수용된 인도군 포로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42년 6월 자유인도군단(Freie Indische Legion, 이하 인도군단)이 창설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1942년 7월에 1,738명의 인도인 포로가 기차편으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에 롬멜이 1942년 6월 21일에 토브룩을 함락시키면서 추가로 6천여명의 인도군 포로가 잡히게 됩니다. 인도군 포로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인도 독립군을 연대 급으로 편성하는 방안이 고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이탈리아에서 공작원으로 공수훈련을 받고 있던 80명의 인도군 포로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도 자체적으로 인도군 포로들을 활용할 계획은 가지고 있었으나 1942년 이후 사실상 이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포로들을 받고 보니 보스 휘하의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는 포로들이 많았습니다. 1942년 7월에 인도군단에 자원한 포로는 280명에 불과했고 이것은 당초 보스의 예상을 밑도는 규모였습니다. 이탈리아로부터 인도받은 포로 중 인도군단에 지원하지 않은 자들은 다시 안나부르크(Annaburg)와 람스도르프(Lamsdorf)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 모집을 계속했습니다. 독일군은 최초의 자원자가 모집되자 작센의 프랑켄베르크(Frankenberg)에서 첫 번째 대대의 편성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레스덴 근교의 쾨니히스브뤽에 훈련소가 설치되고 이후의 부대편성과 훈련은 이곳에서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인도군단의 본대와 별도로 50명이 브란덴부르크 교도연대(Lehrregiment Brandenburg)로 보내져 특수공작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도군단의 편성 초기에는 자원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지원자 중에는 부사관 이상의 포로가 전혀 없어 소대 편성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측은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부사관 교육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여기에 포로들은 거의 대부분 독일어를 몰랐기 때문에 독일어 교육부터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한줌밖에 안되는 포로들이 또 다시 카스트와 종교별로 나뉘었습니다. 포로 중 50%는 힌두교도, 25%는 이슬람교도, 20%는 시크교도, 5%는 기독교도였는데 이들을 그냥 섞어놓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인도군단은 1942년 10월까지 추가 지원자를 받아들여 대대급으로 확장됩니다. 첫 인도군 대대의 지휘관은 크라페(Kurt Krappe) 소령이었습니다. 이 대대는 42년 10월 보스와 주독일본대사관 무관 등의 참관하에 대대훈련 시범을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전 목적이 강한 훈련이었습니다. 인도군단은 1943년 2월에는 제3대대의 창설을 마치고 총 15개 중대 3,000명으로 증강됩니다.

그런데 이때는 동부전선과 아프리카 전선 모두 정신 없이 꼬여가던 시점이라 독일군 수뇌부는 인도군단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스도 독일의 태도에 실망해 일본으로 떠나버렸고 인도군단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어쨌든 1개 연대를 만들어 놓았으니 그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국방군 총사령부는 인도군단을 프랑스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인도군단 병사들 중 일부는 당초 인도독립전쟁을 위해 자원한 만큼 프랑스로 갈 수 없다고 항의하며 시위를 벌입니다. 독일측은 이 중 주모자 두 명은 6년형을 선고하고 이외에 시위에 가담한 40명도 수용소로 보내버립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명령을 받은 인도군단은 1943년 5월 벨기에로 이동해 제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됩니다. 이때 인도군단은 제950보병연대로 개편됩니다. 연대장은 크라페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 맡게 되었습니다. 16공군야전사단에 배속된 2개 대대는 다시 네덜란드로 이동해 1대대는 Ymuiden에, 2대대는 Texel섬에 배치됩니다. 인도군단의 2개대대는 다시 1943년 9월에 남부프랑스로 이동해 제344보병사단에 배속됩니다. 1944년 1월 8일에 제159예비사단이 보르도를 담당하게 되자 인도군단은 159예비사단으로 배속 변경됩니다. 인도 자원병에 대한 교육훈련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1943년 10월 1일에는 12명의 인도인 부사관이 소위로 임관되었습니다.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일-힌두어 사전이 보급되어 언어 문제도 그럭저럭 해결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1944년 6월 30일, 인도군단의 9중대(장교 3명, 부사관 및 사병 199명)에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9중대는 278보병사단에 배속되어 44년 7월 리미니(Rimini)에 배치됩니다. 9중대는 1945년 1월까지 이탈리아 전선에서 빨치산 토벌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인도군단의 나머지 병력은 연합군이 남부 프랑스에 상륙한 이후 퇴각전 과정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교전했는데 이중 레지스탕스에 항복한 29명이 9월 22일에 학살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프랑스 측은 인도군단이 퇴각 과정에서 범죄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이라고 항의했는데 실제로 인도군단 병력이 레지스탕스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민간인을 살해하고 약탈행위를 한 사례가 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독일 국경으로의 퇴각 과정에서 인도군단 병사 중 상당수가 탈영하기도 합니다. 인도군단 3대대는 9월 16일에 미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별다른 중장비가 없는데다 전의도 없어서 그대로 붕괴되어 버립니다. 제3대대가 콜마-스트라스부르 지구에 도착했을 때는 대대 병력 중 300명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에서 퇴각한 이후 인도군단은 후방 경계 및 진지 공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도군단이 프랑스에서 퇴각전을 치르는 동안 인도군단에 관심을 가진 고위층이 한 명 나타났습니다. 친위대의 몸집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히믈러였습니다. 인도군단은 1944년 8월 8일부로 친위대 해외국(Auswärtigen Amt) 관할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인도군단이 퇴각전 중이었기 때문에 크라페 중령이 계속해서 지휘관으로 있었습니다. 퇴각전을 치르고 알자스에 도착한 인도군단은 그제서야 자신들의 관할이 친위대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1944년 11월, 인도군단은 다시 독일 영내로 이동해 라스타트(Rastatt)와 뷜(Bühl) 지구에 주둔하다가 다시 12월 말에는 호이베르크(Heuberg) 훈련장으로 이동합니다. 이 무렵 인도군단은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1945년 초에는 계속 후퇴만 하다가 4월에 모든 전투장비를 독일측에 반납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인도군단의 일부는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군단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됩니다. 본대와는 떨어져 있던 인도군단의 보충대대(Ersatzbataillon)는 미군에 항복합니다.

인도군단 소속 병사들이 항복한 뒤에 있었던 일은 슈타인호프님의 글에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서적
Rudolf Absolon, Die Wehrmacht im Dritten Reich Band V, Harald Boldt Verlag, 1988
Carlos Caballero Jurado,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 Osprey, 1983
Franz W. Seidler, Avantgarde für Europa : Ausländische Freiwillige in Wehrmacht und Waffen-SS, Pour le Merite, 2004

※ 위에서 언급한 저작 들 중 Carlos Caballero Jurado의 Foreign Volunteers of the Wehrmacht 1941~45는 오류가 몇 가지 있더군요. 인도군단에 대한 내용 자체도 짤막하긴 하지만 연대 편성에 대해 나와 있어서 참고했습니다.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 -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어제 지하철에서 한국일보를 읽다 보니 고종석이 쓴 무신론에 대한 칼럼이 실려있었습니다. 짧긴 했지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칼럼이 꽤 재미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 그러다 보니 저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확고히 해준 책이 한 권 생각나더군요.

바로 Frank Moore Cross『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은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스는 미국의 사해문서 연구의 권위자이고 또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과 구약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마크 스미스(Mark S. Smith) 같이 이 사람이 가르친 학자들도 비슷한 주제로 재미있는 책들을 펴내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이 책은 매우 기억에 남는 책 입니다. 학부시절 어떤 학술지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주문을 했습니다. 책 제목에 Essays라고 적혀 있으니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도착한 책을 몇 장 훑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연구사 정리도 없이 전혀 모르는 기존의 구약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 텍스트가 튀어나오니 정신이 없더군요;;;; 영어 해석이 뒤에 붙어있긴 한데 처음 펼쳐봤을 때는 순간적으로 뜨악 했습니다. 게다가 수없이 나오는 다양한 학술저널과 주요 연구문헌들의 약자는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앞장의 약어표를 찾아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일단 무신론자라면 결코 재미가 없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구약 연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자는 야훼와 유대교의 뿌리인 가나안의 신화에 대한 문헌을 분석해 가나안의 신앙체계가 후대의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크로스가 이 에세이집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야훼’의 기원과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일신 숭배가 확립되는 과정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야훼’라는 신의 기원입니다. 저자는 1장의 3개 절에서 엘(El)과 야훼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엘’은 고대 가나안의 여러 신 들 중에서도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신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로서의 특성은 꽤 중요합니다. 크로스는 야훼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 모든 것의 아버지’인 가나안의 신 ‘엘’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의 특성을 차용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Yahweh라는 신의 명칭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 문외한이긴 하지만 여러 문헌의 교차검증을 통한 추적과정은 매우 인상깊더군요. 다음으로, 야훼와 바알의 관계에 대한 서술 역시 흥미롭습니다. 크로스는 초기 문헌에서 나타나는 야훼의 전사로서의 모습이 폭풍신 바알에서 차용해 온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야훼는 여기 저기서 핵심 개념을 빌려온 아주 빈곤한 ‘신’인 것입니다. 아. 정말.

저는 혹시나 신을 믿더라도 이런 허접한 짝퉁신은 결코 믿지 않을 겁니다.;;;;

4장과 5장은 구약시대 역사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크로스는 문헌분석을 통해 신의 역사인 구약을 인간의 역사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권에 대한 부분이나 열왕기에 대한 분석은 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저자가 인용하는 그 많은 학설들을 따라가며 내용을 이해 하는 게 좀 어려웠습니다. 책 후반부에서 그게 더 크게 느껴지더군요.

원래 197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요즘도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산 것은 1997년에 나온 9판입니다. 사실 이것만 봐서는 이때까지의 최신 연구성과가 얼마나 반영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소장한 서울대도서관에 있는 것도 제것과 같은 1997년판인 모양이더군요.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영국인 교사 일단은 위기를 모면

곰인형 덕분에 요단강을 건널 위기에 처했던 영국 교사가 수단 대통령에 의해 사면 받았다고 하는 군요.

Sudans Präsident begnadigt britische Lehrerin

그런데 이제 수단 대통령 각하가 대신 욕을 먹게 생겼군요. 이제 이 양반에게 애도를.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곰 인형이 사람을 잡는다!

워싱턴타임즈에 아주 난감한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Militants demand teacher's death

사연인 즉슨 영국인 여교사가 애들에게 곰인형의 이름을 무함마드로 짓도록 해서 수단인들이 분개했다는 군요. 분노한 무슬림들이 이 여교사를 처형하라고 대규모로 시위를 하고 있답니다.

푸아. 광신도들이란. 이슬람은 도통 호감이 안가는 종교입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어떤 승려와 목사의 말싸움 중에서

좀 오래전에 어떤 목사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겠노라고 공개적으로 종교 토론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토론에 나온 승려 한명이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항상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상식을 초월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눈을 갖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것은 지옥과 같은 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타에게 그러한 지옥의 눈의 지혜는 없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기독교의 친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나쁜일들, 예를 들어서 인간들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 혹은 소변을 보는 것 등을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요?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보고 계시는 여호와의 괴로움은 그야말로 지옥의 괴로움에 비유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실론의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불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여호와의 전지전능을 자랑하는 영국 목사 데이비드 데 실바를 조롱하면서

석오진 편역, 『파아나두라 대논쟁 : 기독교인가 불교인가?』, (운주사, 2001), 202쪽

과연, 전지전능한 것이 다 좋은건 아닌가 봅니다.

2007년 8월 16일 목요일

2007년 8월 7일 화요일

탈레반의 센스도 제법이군요

이번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언론과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 문제가 TV에 나오면 인질들을 비웃는 정도로 그치는군요.

그런데 오늘은 연합뉴스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탈레반, 인질처리 고심..이슬람 개종 권고"<외신>

기독교 선교를 하러 간 사람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고하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폭력을 쓰지 않고도 이렇게 골탕먹이는 것이 가능하군요.

전도하러 간 자매님들이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2007년 6월 9일 토요일

줄기의 권능은 무한하기도 하여라...

삼거리 무스탕 소년의 최후(2005)라는 영화의 한장면 입니다.


핵심 부분을 확대하면...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것이 2005년이니 줄기세포의 허무개그적 성격을 파악하고 넣은 장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웃겼습니다. 영화 자체는 별로였으나 이런 자잘한 요소들은 마음에 들더군요.

이 영화는 DVD도 동대문에서 3,000원 정도에 팔리고 있으니 한번 사 보셔도 경제적 부담은 되지 않을 성 싶습니다. 씨네 21에 관련 기사가 하나 더 있더군요.

2007년 4월 25일 수요일

The God Delusion - 리처드 도킨스

이 책은 채승병님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지른 물건인데 읽을 책들이 밀려 있어 한동안 못 읽다가 도착한지 한달이 넘어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읽은 도킨스의 책 중에서는 국내에 번역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눈 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이 있는데 특히 눈 먼 시계공은 제법 유쾌(???) 하게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제목 부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데 처음 책을 훑어 보니 속 표지에는 "더글라스 아담스를 기리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더글라스 아담스를 기리는 문구를 넣은 것을 보니 이거 엄청 웃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31쪽을 보니 아주 멋진 구절이 하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The God of the Old Testament in arguably the "most unpleasant character in all Fiction".

철십자 훈장에서 슈타이너 선생이 말씀하신 "I believe God is a sadist."라는 대사와 쌍벽을 이룰만합니다. 흐흐흐.

현재 2장을 읽는 중인데 제법 배꼽 빠지는 구절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삐딱한 종교문화를 혐오하는 터라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이게 국내에 번역되면 출판사 하나가 불타는건 아닐까 걱정(???)이 듭니다.

2006년 10월 20일 금요일

이시대의 참 종교인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종교인에 대한 훈훈한 소식 하나를 접했다.

일찌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하라(데살로니가 전서 3:10)


아. 그동안 교회의 쇠락을 가슴아프게 지켜보던 차에 이렇게 말씀을 실천하는 참 목사를 알게 되니 마음이 뿌듯하다.

할렐루야!

2006년 9월 25일 월요일

아프가니스탄 여성운동가 피살

sonnet님의 검역소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전 관련 뉴스를 보러 갔다가 이런 뉴스도 보게 됐다.

참 이동네에서는 여성운동 하기가 힘들구나.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팔자라니.

과연 이 동네는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불교를 믿을 때에도 여성들을 이렇게 억압했을까?

2006년 9월 17일 일요일

God, Demons and Symbols of Ancient Mesopotamia by J. Black and A. Green

인터넷의 눈부신 발전은 나의 게으른 면을 보면 축복일 수 있지만 또 아날로그 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소 난감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난감 한 것 중 하나는 좀 두리뭉실한 사전류의 책의 효용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어지간한 것들은 위키피디아만 두들겨 봐도 제법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갈수록 책장을 넘기는 것 보다 키보드를 두들기게 되는 것이다.

God, Demons and Symbols of Ancient Mesopotamia가 딱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이 책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신앙과 관련된 여러가지 사항들을 제법 보기 좋은 그림들과 함께 설명해 놓은 사전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인터넷이 대중화 되기 전인 1992년인데 그때에는 매우 매우 활용도가 높았을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좀 아닌듯…

그래도 다행인 점은 사전 답게 매우 사소한 아이템 까지도 한 꼭지씩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런 점이 없었다면 지금쯤 책장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었을 물건이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션을 잘 배치했다는 느낌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림이 너무 작다는 것. 좀 크다면 스캔해서 써먹어도 좋을 듯 싶다.

※ 이 책의 Demons, Monsters 항목과 Symbols of the Gods 항목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니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어느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2006년 5월 8일 월요일

샤먼의 코트(재탕)

예전에 아마존에 실린 독자들의 서평을 보고 한번 사 봐야지 하다가 귀차니즘 발동과 지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통에 사보질 못 했는데 2주 전쯤 지하철역에서 번역판을 5,000원에 사게 됐다. 이것과 함께 만화 한국전쟁도 있었는데 탄약이 부족해 지르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책의 번역은 재미있게 잘 된 것 같다. 물론 원판을 아예 못 읽어 봤으니 단정하긴 그렇지만.

이 책의 주제와 저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A History of Pagan Europe 과 유사하다. A History of Pagan Europe이 기독교가 동진하면서 붕괴된 유럽의 전통 문화를 차례대로 보여줬다면 "샤먼의 코트"는 전통 문화를 상실하고 기독교화된 유럽이 동진하면서 붕괴된 시베리아의 전통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시베리아에 살던 수많은 민족들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 불교 등 많은 외래 문화의 공격을 받았다.

시베리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6세기 부터 적극적으로 동진을 시작한 러시아 세력이다.
러시아인들은 동진하면서 요새도시를 세워 주변지역을 러시아화 하고 원주민들을 복속시키면서 전통 사회를 파괴하고 덤으로 환경도 파괴했다.
원주민들도 저항했으나 대포와 총, 그리고 각종 전염병으로 무장한 러시아인들 앞에 처절하게 붕괴되어 갔다.

그러나 여러가지 공격중에 최악의 공격은 "사회주의"에 의한 것 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들에게 "과학"이라는 종교를 강요했고 스탈린 체제는 사상의 강요 보다 학살을 택했다. 스탈린 보다 온건한 편 이었던 이후의 통치자들역시 전통사회를 붕괴시킨건 마찬가지였고 소련이 붕괴될 무렵에는 더이상 말살할 만한 전통 문화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됐다.
스탈린 시기의 전통문화 말살은 중세 유럽에서 행해진 강제 기독교화와 비교하더라도 그 야만성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 이었다. 사회주의를 위해 인민의 적들을 박멸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비행기에서 샤먼을 집어 던지고 총살하고 강제 노역으로 혹사시켜 죽이고...

결국 현재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박제화된 과거의 흔적 뿐이다.

책의 저자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시베리아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어린 시각은 독자들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게 해 준다.

전반적으로 슬픈 이야기로 일관된 슬픈 책이다. 우울할 때 읽으면 쥐약이고 기분이 들떠 있을때 읽으면 좋을 듯...

아주 멋진 책이다.

그리고 덤으로..

1. 이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용맹한 추크치족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의아해하는 중국이 추크치족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추크치족 이십니까?"

"그렇다."

"우리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그렇다."

"중국의 인구가 10억명 이라는걸 아십니까?"

"그래?"

다시 말을 잇는 추크치족이 가로되

"그럼 너희들 모두를 어디에 묻어 주랴?"

2. 그 다음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비드야 단다론"이라는 부랴트족 불교 승려는 스탈린 시절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수용소에서도 다른 라마교 승려들과 수도하면서 포교도 했다고 한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포로가 된 독일군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장 자크 아노가 이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제법 재미있을 듯.

A History of Pagan Europe - by Prudence Jones & Nigel Pennick

피상적으로 떠오르는 켈틱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 처음으로 March of the Celt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지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엔야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자연히 켈트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렇게 해서 지금은 유럽의 전통신앙, 흔히 말하는 "이교도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 이와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접했던 책이 바로 이 책 "A History of Pagan Europe"이다.

이책은 전형적인 개설서로 구성은 고대 그리스 부터 시작해서 20세기의 "이교도 신앙"까지를 연대 순으로 다루고 있다. 구성상 이 책은 거꾸로 뒤집어 본 기독교 발전사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마 후기 이후 부터의 내용은 기독교의 교세가 성장해 가면서 각 지역의 토착 신앙을 말살하는 내용들이다. 특히 8세기 독일 지역의 강제 개종을 위한 대량 학살은 읽는 사람을 소름끼치게 한다. 아마도 독일 지역의 강제 개종이야말로 최초의 종교 전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저자들은 계속 유럽의 동쪽으로 무대를 옮겨 가면서 토착 종교들이 소멸되는 과정을 덤덤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0장과 11장에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전통 재발견 차원에서 고대의 신앙들이 조금씩 재발견되어 가는 과정이 나온다.

책 후반부에는 짤막하게 Neo-paganism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우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히틀러 시기의 오딘 숭배주의자들은 독일 카톨릭계의 지지를 얻기 위한 히틀러의 조직적 박해로 괴멸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전통 신앙들은 완전히 말살 되지는 않고 기독교적 전통과 조금씩 융합되어 오늘날 까지도 그 잔재가 조금씩 남아 있기도 하다.이 책은 매우 슬픈, 사라진 전통들에 대한 잘 정리된 글이다. 아직 절판 되진 않았으니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