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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31일 수요일

고지전 단평

얼마전에 nishi님이 영화 고지전에 대한 제 감상을 물어보셨는데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한국일보 라제기 기자는 영화에 나타나는 남북한 군인들의 교류가 퇴행적인 욕망을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매우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전쟁영화라는 평도 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전쟁영화를 못 만드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겠지요. 예. 솔직히 이 영화의 반전메시지가 지겹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한두편도 아니고. 솔직히 저는 반전영화는 1930년에 나온 서부전선 이상없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들은 제법 진지한 척 폼을 잡으며 전쟁의 허무함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제 눈엔 조성모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에서 절규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전쟁이 나쁘다는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수없이 계속해온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위해서 영화를 한 편 더 만들 필요는 없지요.

고지전의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 뭔진 모르겠는데 전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본인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진지한 반전영화라기 보다는 반전영화 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그저 그런 영화입니다.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제가 보기엔 10년도 가지 않아 잊혀질 그저그런 영화입니다. 한국영화계는 남북문제를 다룰때 수십년간 작용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작용인지 지나치게 무리해서 그 반대로 나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다루는 영화 중에서 가장 짜증나는건 웰컴 투 동막골과 같은 겉멋만 잔뜩 든 골빈 영화인데 고지전은 그보다는 수준이 조금 낫지만 비슷한 영화로 보입니다. 솔직히 고지전을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는 영화 평론가 중에서 전쟁영화가 아닌 전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한국전쟁에 대한 진정한 걸작이 나오려면 일단 한국전쟁의 유산이 완전히 과거의 역사로 사라져야 할 것 입니다. 한국전쟁이 현실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한 걸작 보다는 진지한 척 하고 싶어하는 겉멋만 잔뜩 든 영화만 나올 가능이 훨씬 높습니다.

2010년 5월 24일 월요일

고종석의 노무현에 대한 평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 어제 있었던 노무현 1주기 추모행사가 나왔다. 벌써 1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은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의 인간적인 매력은 어느정도 인정하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인지라 노무현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친노정치인들의 행각에는 코웃음만 나왔다.

며칠전 광화문에 갔다가 노무현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로 묘사한 그림을 보고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노무현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면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글쎄올시다. 노무현 재임기는 훗날의 역사에서 지나가는 에피소드 정도나 되면 다행일 것이다.

노무현이 퇴임하기 직전 한국일보의 고종석은 '노무현 생각'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노무현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평가를 했다. 결론 부분만 조금 인용해 보자.


노무현과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조차, 노무현이 실패한 대통령이었음은 엄연하다.


100% 공감이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시사IN 85호 특집과 오늘자 한국일보 사설

시사IN 85호는 커버스토리로 ‘촛불 1년 무엇을 남겼나’라는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특집 치고도 매우 많은 분량을 촛불 1년 기획특집이 차지하고 있더군요. ‘미네르바 인터뷰’라던가 보수주의 논객들의 촛불 1주년 좌담회 등 흥미로운 기사가 많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제 개인적으로는 작년 촛불시위의 의의에 대해서 정리가 덜 된 상태인데 한 가지 확실하게 인정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 입니다. 그 방법이 비록 세련되지 못하고 몇몇 부분에서는 매우 거칠게 표출된 것 도 사실이지만 시민들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촛불시위로 촉발된 정치적 관심이 투표 참여 등 현실정치에 대한 참여로 제대로 전환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장기적으로는 개선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해 보기도 합니다.
물론 촛불 시위 과정에서 근거 없는 주장이 횡행하고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성이 표출된 사례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낸 점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해야 할 것 입니다.

시사IN 85호의 특집 기사 중에서 ‘보수주의자 3인 방담 : 촛불이 진보의 성찰 기회 날렸다’라는 대담은 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대담에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대변인 변철환, 공정언론시민연대 사무처장 최홍재, 미디어 워치의 변희재(;;;;) 등 세 사람이 참여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최홍재의 지적 중 ‘광우병 대책회의’가 쇠고기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나 진보 진영이 촛불 시위의 성과에 고무되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상실했다는 주장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네르바 박대성 인터뷰는 예상보다도 알맹이가 없었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박대성의 해명 몇 가지는 꽤나 미심쩍습니다. 특히 미국 금융계에서 일했다는 거짓말을 한 이유에 대해서 어떤 자전수필의 내용을 따라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보다는 언론에서 보도했던 것 처럼 만화책 주인공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수백기가 분량의 논문 자료를 가지고 공부했다고 자랑을 하면서 검찰이 모든 자료를 압수하고 돌려주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아무래도 정말 거짓말 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리고 한국일보 이야기로 넘어가서…

오늘 자 한국일보에는 황영식 논설위원이 꽤 재미있는 글을 썼는데 노사모와 박사모를 모두 연예인 팬클럽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노사모에서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지 않을 듯 싶은데 제 생각에는 황영식 논설위원의 평가가 적절한 듯 싶더군요.

하지만 오늘 자 한국일보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신문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신문 엑스포’라는 사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지난번에 혹평한 동아일보 사설, ‘읽기 문화와 신문 발전, 민주주의 기반이다’와 마찬가지로 신문이 팔리지 않아 힘드니 신문 좀 읽자는 내용이지만 호들갑 떨지 않고 차분하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한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동아일보 사설은 좌빨신문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치졸한 중상모략 까지 했지요;;;)

잡담 하나. 1주년을 맞아 다시 촛불을 들자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다시 촛불을 드는 것은 무익한 역량의 낭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년의 촛불 시위도 2개월 만에 동력을 소진하고 탄력을 잃었는데 대중의 광범위한 참여가 불확실한 이 시기에 무리해서 판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싶군요. 물론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갑자기 대중 참여를 촉발할 새로운 사건이 생길수도 있겠습니다만…

잡담 둘. 시사IN의 이번 특집 기사 중 여대생 사망설을 유포해 구속된 ‘또랑에 든 소’라는 사람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이 양반은 아직도 여대생 살해가 은폐 되었다고 믿고 있으며 진실 규명을 위해 특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지부조화도 이 정도면 가히 정신병 수준입니다.

2009년 3월 24일 화요일

소외받는 한국일보

어제 있었던 ‘신문에 대한 공적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놓친 것은 꽤 아쉽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 시기의 언론 정책 중에서 ‘신문발전기금’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노무현에 비판적인 쪽에서는 한겨레나 오마이뉴스 같이 친여당적 성향을 보이는 매체를 지원하기 위한 꼼수라고 비난했지만 한국일보 같이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도 ‘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비교적 공정하게 운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민주당 측이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한겨레와 경향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언론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에 일정 부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어제 토론회를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문순 의원의 홈페이지에서 자료집을 다운받았습니다. 자료집에 실린 발제문은 신문발전위원회의 신학림 위원이 썼는데 역시나 언론노조 위원장 출신답게 조중동에 대한 비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한겨레와 경향을 띄워주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발행 부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족벌 신문들의 신뢰도는 신문이나 언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나머지 신문들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근(access)권을 판매 및 배달 과정에서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08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촛불 집회를 통해 신문과 신문 업계에도 작지만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에 대한 신뢰도의 폭발적인 증가가 그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문 전체의 신뢰도 하락 추세가 멈추거나 상승으로 되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신학림, ‘신문에 대한 공적재원 투입 더 늦출 수 없다’, 2009

이런 식의 편들기는 정말 낮 뜨겁습니다;;;;

신학림은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구독하는 신문에 대해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지만 조중동의 구독자들은 자신들이 구독하는 신문에 대해 신뢰도가 낮다는 점을 들어 조중동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뒤집어 보면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구독층은 맹목적으로 해당 신문을 믿는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에 별로 좋은 이야기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한국일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다 한국일보 이야기를 한다고 해 봐야 신문시장의 경쟁을 촉발했다는 부정적인 이야기 뿐이더군요. 뭐랄까. 조중동처럼 악의 축이 되어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한겨레나 경향처럼 ‘정론지’로 떠받들어 지는 것도 아니고;;;; 아마 최문순이나 신학림과 반대점에 서있는 한나라당 쪽에서도 반대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뿐 한국일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듯 싶습니다;;;; 한국일보가 비교적 보수적 성향이긴 하지만 정파성은 조중동이나 한경에 비해 옅은 편이지요. 사실 그나마 균형을 잘 잡고 있는 신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극단의 양 쪽에 있는 쪽에서는 박쥐 정도로 보는 모양입니다.

한국일보를 즐겨 보는 입장에서 매우 씁슬하군요.

2009년 3월 3일 화요일

타임라프 2차대전사에 대한 잡상

게르니카에 대한 글을 한 편 쓰려고 오랜만에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지 새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2차대전과 관련해서 관심있는 책들을 조금씩 사서 읽다 보니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이 전집은 창고에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책을 다시 읽을 일은 없을 듯 해서 적당한 시기에 처분을 할 까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다시 읽어 보니 당분간은 계속 가지고 있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론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건의 맥락을 잘 잡아내고 있고 작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겉돌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개설서로서 아주 모범적인 글쓰기 방식인 것 같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새로울 것이 없더라도 글쓰는 방식을 배우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배울 만한 점이 많더군요.

역시 책은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관심도 두지 않고 있던 책에서 신선한 자극을 받을 줄이야.

2009년 1월 7일 수요일

가카의 대약진운동 2

정부의 일자리 대책에 대해서 언론들이 재원 조달 방안이 미흡하다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녹색 뉴딜] 급한 일자리+친환경 성장 '한국형 뉴딜'

조선일보도 비판적인 사설을 실었군요.

[사설] '녹색 뉴딜'로 정말 96만 개 일자리 창출 가능한가

이번 대책은 정책적 고려가 부족한 상태로 상부의 지시에 의해 졸속으로 수립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이런 불황 상태에서는 정부 지출로 이런 임시적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건 일단 재원 조달 방안은 확실해야 믿을 수 있지요. 그런데 정부의 계획은 도통 믿음이 가지 않는군요.




뭐 어떻습니까. 일자리만 늘어나면 되는거죠!

한국일보에서 퍼왔습니다.




중국이 철 생산량을 늘린 것 처럼 말입니다!

2009년 1월 6일 화요일

가카의 대약진운동

지하철 가판대에서 한국일보를 사보니 1면에 아주 멋진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올해는 완전고용 시대?

가카께서 명령을 하달하니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이건 무슨 대약진운동 시기의 농민대회를 보는 것 같군요;;;;


공업에서의 대약진에 앞서 먼저 식량 생산에서 증산 경쟁 운동이 일어났다. 1958년에 ‘최고의 수확을 다짐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 과거 밀 수확량은 1에이커 당 500근에 불과했으나 이날 출전한 첫번째 인민공사 대표는 1에이커 당 3,000근을 목표로 내세웠다. 두번째 대표는 4,000근을, 세번째 대표는 5,000근을 다짐했으며 결국 대회에서는 모두 10,000근을 달성할 것을 결의했다.

차문석, 『반노동의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 박종철출판사, 2001, 244쪽

넵. 물론 결과는 다들 잘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과연, 우리의 가카는 마오주석 부럽지 않은 양반입니다. 가카께서 일자리를 만들라고 하시니 각 부처별로 일자리 만들기 경쟁을 하는군요. 벌써 일자리가 100만개를 넘어섰다고 하니 남조선은 구원받았습니다!

※ 역시 한국일보는 돈 주고 사 볼 가치가 있는 신문입니다. 같은 내용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기사를 뽑아낸다는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패배의 조선일보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아주 재미있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靑 "미네르바, 처벌 아닌 경제관료로 기용" 주장 진위 여부 주목

그렇다면 이 기사의 출처가 된 한국일보의 칼럼을 보시죠.

[서화숙 칼럼/11월 20일] 핵심관계자 대 미네르바

하지만 이건 그냥 농담입니다.

※ 서화숙 칼럼에 대한 해설(?)은 sprinter님 블로그에 올라온 농담이겠지?를 참조하세요

아흙. 이런 개그에 낚이면 어쩌자는 거냐 조선일보! 어떤 글이건 끝까지 다 읽어 봐야지;;;;;

아아. 패배의 조선일보;;;;

※ 프레시안이 낚인 언론들에 대한 기사를 썼군요. 낚인 언론이 한두곳이 아니었네요;;;

"'미네르바 경제관료 기용' 칼럼은 '패러디'"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 -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어제 지하철에서 한국일보를 읽다 보니 고종석이 쓴 무신론에 대한 칼럼이 실려있었습니다. 짧긴 했지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칼럼이 꽤 재미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 그러다 보니 저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확고히 해준 책이 한 권 생각나더군요.

바로 Frank Moore Cross『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 Essays in the Hi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입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책은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 해설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스는 미국의 사해문서 연구의 권위자이고 또 이스라엘 종교의 기원과 구약시대 역사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마크 스미스(Mark S. Smith) 같이 이 사람이 가르친 학자들도 비슷한 주제로 재미있는 책들을 펴내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이 책은 매우 기억에 남는 책 입니다. 학부시절 어떤 학술지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서 주문을 했습니다. 책 제목에 Essays라고 적혀 있으니 비전공자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도착한 책을 몇 장 훑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연구사 정리도 없이 전혀 모르는 기존의 구약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어 텍스트가 튀어나오니 정신이 없더군요;;;; 영어 해석이 뒤에 붙어있긴 한데 처음 펼쳐봤을 때는 순간적으로 뜨악 했습니다. 게다가 수없이 나오는 다양한 학술저널과 주요 연구문헌들의 약자는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앞장의 약어표를 찾아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굉장히 재미있더군요. 일단 무신론자라면 결코 재미가 없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구약 연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쉽게 읽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자는 야훼와 유대교의 뿌리인 가나안의 신화에 대한 문헌을 분석해 가나안의 신앙체계가 후대의 유대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크로스가 이 에세이집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야훼’의 기원과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일신 숭배가 확립되는 과정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야훼’라는 신의 기원입니다. 저자는 1장의 3개 절에서 엘(El)과 야훼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엘’은 고대 가나안의 여러 신 들 중에서도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신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로서의 특성은 꽤 중요합니다. 크로스는 야훼가 ‘하늘과 땅의 창조자, 모든 것의 아버지’인 가나안의 신 ‘엘’이 가지고 있는 초월자의 특성을 차용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Yahweh라는 신의 명칭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 문외한이긴 하지만 여러 문헌의 교차검증을 통한 추적과정은 매우 인상깊더군요. 다음으로, 야훼와 바알의 관계에 대한 서술 역시 흥미롭습니다. 크로스는 초기 문헌에서 나타나는 야훼의 전사로서의 모습이 폭풍신 바알에서 차용해 온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야훼는 여기 저기서 핵심 개념을 빌려온 아주 빈곤한 ‘신’인 것입니다. 아. 정말.

저는 혹시나 신을 믿더라도 이런 허접한 짝퉁신은 결코 믿지 않을 겁니다.;;;;

4장과 5장은 구약시대 역사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크로스는 문헌분석을 통해 신의 역사인 구약을 인간의 역사로 살려내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권에 대한 부분이나 열왕기에 대한 분석은 꽤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 대한 학술적 연구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저자가 인용하는 그 많은 학설들을 따라가며 내용을 이해 하는 게 좀 어려웠습니다. 책 후반부에서 그게 더 크게 느껴지더군요.

원래 1973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요즘도 꾸준히 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산 것은 1997년에 나온 9판입니다. 사실 이것만 봐서는 이때까지의 최신 연구성과가 얼마나 반영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는데 국내에서 이 책을 소장한 서울대도서관에 있는 것도 제것과 같은 1997년판인 모양이더군요.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낚시의 왕국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낚시의 사회가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낚시질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낚는 자와 낚이는 자로 나뉘는 형국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낚시질에는 점잖아야 할 언론사들까지 끼어들고 있지요. 게다가 소위 메이저 신문들도 어떻게는 더 많은 사람을 낚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낚시나 일삼는 언론들끼리 서로의 낚시질을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메이저 언론들에 반대하는 인터넷 언론들도 낚시질에는 환장을 하지요.

오늘 소개할 인터넷언론의 낚시질 피해 사례는 친일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영훈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2004년 9월 2일 저는 MBC방송의 토론회에 나갔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청산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던 반대편의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를 미국군의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를 가리켜 총독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벌러 간 공창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저를 몰아 세웠습니다. 이후 저와 그 국회의원 사이에 어지러운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만, 그에 대해서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논쟁을 지켜본 오마이뉴스라는 웹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는 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했다고,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새삼스레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중략)

경상도 거창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제가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의 언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때문에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정대협이 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 기록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것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사는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읽어야 합니까”라고 반박하더군요. 읽을 필요가 없다고요. 진정 그러합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62~166쪽

우리 사회의 낚시질은 대책이 없습니다. 더 우울한 것은 낚시에 낚이는 사람들에게는 낚이고 싶은 심리가 내재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정한 낚시에 꾸준히 낚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낚이고도 떡밥만 입맛에 맞다면 낚시질도 옹호하는 붕어들입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 틀리다고 악을 쓰는 사회는 정말 우울하고 재미없는 사회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군요. 자신의 입맛과 다른의견은 아예 들어보려 하지도 않을 정도로 꽉막힌 사회에 무슨 발전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그나마 낚시질을 자제하는 언론이라고는 한국일보 정도 밖에 없는 것 같군요.

2007년 8월 16일 목요일

2007년 4월 20일 금요일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한국 언론의 히스테리

버지니아 사건에 대한 한국언론의 반응은 매우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주요 일간지들이 웹사이트의 대문에 큼지막하게 특집 기사를 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을 즐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과도하게 이 사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져서 미국 영주권자가 미국에서 저지른 미국의 살인사건인데 이게 과연 한국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인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중국계가 이 사건을 저질렀다면 이 정도로 요란하게 다룰지는 의문입니다. 말 그대로 한국계가 살인범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에 이정도로 난리를 치는 것 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국내문제인데 한국계가 개입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언론들이 이 사건을 울궈 먹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점 입니다. 사실 미국에서 터진 사건이니 별도로 취재할 필요 없이 미국내 반응, 한국내 반응, 네티즌들의 반응 이런 것들로도 충분히 지면과 웹사이트를 도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가 싶군요. 물론 '민족'이라면 반사적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뉴스 소비자들의 성향도 여기에 한 몫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나마 사건이 터진지 시간이 조금 지나니 언론 마다 자성(?) 적인 기사를 하나 씩 싣고 있긴 하지만 그나마 이것도 구색 맞추기로 집어넣은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국내의 소위 유명인사라는 자들이 기고하는 칼럼은 왜 이정도 수준 밖에 안되는지.

[시론] '조승희 개인' 문제 라곤 하지만…

이 정신나간 교수는 주요일간지에 사과를 하자고 난리를 치는군요. 이런 멍청한 논리로 따지면 9.11 테러 때 사우디 정부는 미국에 공식 사죄를 했어야 겠지요. 이런 교수에게 교육받는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갈수록 글발이 떨어지고 계신 이문열 선생께서도 한마디 하십니다.

`자신만의 내부적 악마 키웠다 예수 흉내냈지만 종교성 빈약`

참 할일이 없으시군요.

김지하 시인께서는 추모시를 바치셨답니다.

김지하 시인 참사 추모시

이래서 이 어린양은 시를 읽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번 사건에 대해서 국내 언론에 실린 글 중 그럭 저럭 쓸만한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인은 한국책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보다 한국이 더 시끄럽다` `천박한 민족주의` 논란

그나마 한겨레가 나은 편 입니다. 솔직히 이번 사건으로 가장 놀랐던 건 그동안 매우 중립적이고 쓸만한 기사를 싣던 한국일보가 맛이 갔다는 점 입니다. 한국일보가 사옥을 옮기더니 이상해졌습니다.

언제까지 이 사건을 우려먹을지 궁금합니다만 6개월 쯤 지나면 언제 이런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잠잠해 질 것입니다. 뭐, 모든 일이 다 그렇지요.

덤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최악의 만평은 조선일보에 실린 만평입니다. 조선일보의 만평이 주요 일간지 중 가장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허접하다니. 도데체 이렇게 수준낮은 사람에게 만평을 맡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006년 12월 27일 수요일

황교주님 우리 동네 오셨네~

저는 상당히 불효자식이다 보니 가끔 가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갈 때 마다 동네 근처에 어떤 건물이 하나 지어지는게 가끔 신경이 쓰이더군요. 그리고 또 동네에 있는 어떤 썰렁한 농장 하나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도 간간히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일자 한국일보를 보니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더군요.

황우석씨 연구활동 계속

할 말을 잃었습니다. 교주님이 이런 촌구석에 새로이 둥지를 트시다니! 아아. 이 감격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할 일이 많다 보니 성지 순례를 며칠 미뤄야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성지를 한번 순례하고 오는 길 입니다.

새해에도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께 줄기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라멘.

2006년 9월 13일 수요일

이래서 한국일보를 본다

오늘자 한국일보에 아주 멋진 기사가 나왔다.

일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도 중국이 역사를 빼앗고, '민족혼'을 빼앗는다고 온 나라가 소란하다. 처음에 '민족혼'을 위협한다더니, 이제는 '영토 야욕'을 성토한다. 반발의 방향도 혼란스럽다. 중국이 고구려 유적을 홀대해도 난리고, 치장해도 시끄럽다. 언제는 북한이 국경획정 협상에서 득을 봤다더니, 이제는 중국이 성산(聖山)인 백두산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법석이다.

그런 와중에 얄궂은 민족주의만 기승을 부린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국수주의적 시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근거로 한국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단언하건대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설 수 없다.

역사 서술의 잣대로 지역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민족 중심의 역사 서술을 내세워 봐야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허깨비를 좇고 있는 중국의 몸짓에 덩달아 춤을 추는 격이다. 그런 허망한 몸짓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끔 역사를 편의점 간판 정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답답했는데 그런 양반들이 이 글을 한번 읽어 주셨으면 한다.

이래서 한국일보를 본다.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