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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일 토요일

최근의 정세를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글

요즘 돌아가는 정세를 보니 작년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재일교포인 장박진 박사의 『허구의 광복: 전후 한일병합 합법성 확정의 궤적』 (경인문화사, 2017) 결론 부분입니다.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이라 해당 내용을 발췌해 봅니다.

"그러나 2005년 노무현 정권하의 한국 정부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안고 왔던 과거사 관련의 문제들을 재검토하는 과제들의 일환으로 한일회담 공식 기록을 공개하고 아울러 국가가 관여한 비인도적인 범죄 행위에 따른 개인청구권 문제는 한일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이것은 1990년대 초부터 이미 최대의 현안이 되었었던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 등을 주로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었던 한국 사회는 이 결정을 기본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국민감정이야 어쨌건, 이 판단은 한일 청구권 교섭의 실태를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 한일 간에서 청구권 문제의 해결 원칙을 정한 1965년 4월 3일자의 합의 도출 시, 한국정부는 협정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범위를 전후에 새롭게 생긴 재산권에 기초한 문제에만 한정하는 것에 일찍 동의했다. 역으로 말해 종전 전에 이미 발생했었던 인적 피해에 기인한 청구권 문제에 관해서는 그것이 협정으로 해결되는 범위에 들어간다는 것에 일찍이 동의한 셈이었다.
(중략) 
그럼에도 2005년 한국정부는 미해결 과제 여하의 기준을 '느닷없이'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스스로가 진행한 교섭에 대한 엄격한 검증을 분명히 결여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결정까지 이미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미해결 과제의 상징이 되었던 위안부 문제 역시 1990년대 초에는 이미 초미의 관심 대상으로 대두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그 평가를 막론하고 사실상 청구권 협정을 다시금 보완하는 사업으로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 의한 추가 대응이 취해졌다. 이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일본 측이 운영 책임을 지고 진행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성격상 설립이나 운영에 관해서는 한일 두 정부 간에 조정이 이루어졌다. 한국정부는 이런 조정 과정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협정 대상에 포함될 것인가라는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엄격한 검증을 필요로 하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2005년의 결정은 지극히 정서적인 대일 여론 동향에 말려든 포퓰리즘에 좌우된 자의적인 판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것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일관된 입장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중략) 
한국정부가 과거 한일 청구권 교섭에서 스스로가 진행한 교섭의 실태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경제적인 보상 문제만큼 그 효력에 따라 국내에서 처리하도록 협정을 준수했었더라면 그 이외에 각 피해자 개인이 요구하는 사죄의 문제도, 관련 피해의 기록이나 교육 실천 문제도 일본에게 보다 강한 발언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 청구권협정은 경제적인 문제만을 처리한 것이지, 사죄의 문제 기타까지 '해결'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정부가 과거의 교섭 경위도 그 후 관련 문제에 관해 일본 측과 일정한 정도 조정을 거듭해 왔었다는 사실과의 정합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2005년의 결정을 내린 결과 과거사를 둘러싼 흐름은 오히려 후퇴했다. 실제 협정의 효력을 부정하는 형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결과 일본과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 위안부 교섭 역시 사실상 향후의 입막음의 대가로서 받게 된 엔화 10억의 신규 출자로 인해 '불가역적'으로 끝나게 되어 버렸다. 
(중략) 
그러나 벌어진 일을 그냥 탄식만 해도 소용은 없다. 결국 남은 것은 문제의 포기만이다. 비록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에는 장시간 필요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개인청구권 문제는 청구권협정의 효력에 따라 국내에서 처리한다는 원칙으로 꾸준히 실천해 나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 꾸준한 실천을 통해 일본에 대해 신뢰감을 주고 병합의 비합법성을 확인해도 추가적인 청구권 문제는 일절 생기지 않는다는 확신을 줘 나가도록 할 길 이외에 대처 방안은 없다. 국내에서는 이와 같은 '나약한 대응'에 불만을 안고 욕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클 것이다. 그러나 감정 어린 즉흥적인 대응이 결국 목적으로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뿐더러, 보다 많은 것을 잃게 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한국 사회는 늘 가슴에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간에 외교에는 항상 자기의 힘으로는 통솔하지 못하는 상대가 존재한다. 그러니만큼 외교는 애초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만 얻어낼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장박진, 『허구의 광복: 전후 한일병합 합법성 확정의 궤적』 (경인문화사, 2017) 631~636쪽.

2012년 10월 13일 토요일

후지사키 이치히로 주미일본대사의 강연을 갔다 왔습니다

어제는 NARA에 가지 않고 브루킹스 재단에서 주최하는 주미일본대사 후지사키 이치히로(藤崎 一郎)의 강연을 갔다 왔습니다. 영어 공부도 할 겸, 현재 시끄러운 현안에 대한 일본 외교관의 입장은 어떤가 들어볼 겸 갔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심심한 강연이었습니다.

후지사키 이치히로(藤崎 一郎) 주미일본대사

강연제목은 Japan in Asia였습니다. 좀 모범답안 같은 분위기를 풍기긴 했습니다.

후지사키 대사는 주로 경제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점은 일본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서구에서 바라보는 것 처럼 심각한 위기는 아니라는 것 이었습니다. 일본대사는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국과 독일의 리더쉽 부재를 일본에 빗댄 이코노미스트를 가지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면서 일본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직업외교관 답게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오바하지 맙시다."
다음으로는 에너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지난 후쿠시마 참사 이후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의존을 줄이려는 노력이 진행중이며 앞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이야기 했습니다.

원래 기대했던 센카쿠 문제라던가 과거사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었고 오키나와의 미군 재배치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모범답안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미군 재배치 문제는 나름 재미있더군요. 오키나와의 미군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지역의 안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요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재 골치가 아픈 후텐마 기지 문제도 간략하게 언급을 했는데 메모를 해 놓지 않아서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네요;;;;

나름 재미있었던 부분은 현재 일본 청년들의 도전 정신의 부족을 질타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건 무슨 일본판 20대 XXX론인가 싶었는데 일본 청년들이 일본에 만족하여 더 큰 세상에 도전하려는 성향이 없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일본 청년들의 시야가 일본 안으로 좁아지는 것에 대한 우려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영어 능력 부족에 대해서도 우려했습니다. 일본의 외국어 교육은 실패했다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제 짧은 영어 실력이 생각나서 민망하더군요.

일본대사의 연설이 끝난뒤 사회자의 정리가 있고나서 방청석의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많이 제기된 질문은 센카쿠 문제였습니다. 홍콩에서 온 중국인 한명과 타이완 인 두명이 센카쿠 문제를 제기했는데 일본대사는 당연히 일본정부의 공식입장을 설명하고 끝냈습니다. 다소 귀찮아 한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그리고 필리핀인으로 생각되는 여성 한명이 일본의 군사력을 "억제(Deterrence)"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느냐는 요지로 질문을 했는데 일본대사는 일본의 군사력은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한 것이지 억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 한명이 위안부 문제와 과거사 문제를 제기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드는 등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음을 강조하는 판에 박힌 답변을 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심심한 강연이었지만 직업외교관의 태도나 화술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습니다. 특히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 자신은 정책입안자가 아니라 옵저버의 위치에 있다고 전제하면서 답변하는게 기억에 남는군요.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낚시의 왕국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낚시의 사회가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낚시질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낚는 자와 낚이는 자로 나뉘는 형국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낚시질에는 점잖아야 할 언론사들까지 끼어들고 있지요. 게다가 소위 메이저 신문들도 어떻게는 더 많은 사람을 낚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낚시나 일삼는 언론들끼리 서로의 낚시질을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메이저 언론들에 반대하는 인터넷 언론들도 낚시질에는 환장을 하지요.

오늘 소개할 인터넷언론의 낚시질 피해 사례는 친일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영훈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2004년 9월 2일 저는 MBC방송의 토론회에 나갔습니다. 현 정부가 추진 중인 과거사청산이 토론의 주제였습니다.

(중략)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제 말을 듣고 있던 반대편의 어느 국회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를 미국군의 위안부와 등치시키는 것은 일본의 우익이 위안부를 가리켜 총독부가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돈 벌러 간 공창이라고 하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저를 몰아 세웠습니다. 이후 저와 그 국회의원 사이에 어지러운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만, 그에 대해서까지 소개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다음날 그 논쟁을 지켜본 오마이뉴스라는 웹 신문의 어느 경박한 기자는 제가 위안부를 공창이라고 했다고,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발언을, 대문짝만 하게 보도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새삼스레 기억도 하기 싫을 정도입니다.

(중략)

경상도 거창의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은 제가 이완용의 손자라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어 왔습니다. 서울 강동구의 어느 고등학교 교사와의 언쟁도 기억납니다. “교수님 때문에 학생들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으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정대협이 출간한 위안부들의 증언 기록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것을 읽고 그대로 가르치면 되지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합니까.” 그랬더니 그 교사는 “그런 것을 왜 자기가 읽어야 합니까”라고 반박하더군요. 읽을 필요가 없다고요. 진정 그러합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훈,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강의 -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2007, 162~166쪽

우리 사회의 낚시질은 대책이 없습니다. 더 우울한 것은 낚시에 낚이는 사람들에게는 낚이고 싶은 심리가 내재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정한 낚시에 꾸준히 낚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낚이고도 떡밥만 입맛에 맞다면 낚시질도 옹호하는 붕어들입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의 주장은 무조건 틀리다고 악을 쓰는 사회는 정말 우울하고 재미없는 사회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가 그런 것 같군요. 자신의 입맛과 다른의견은 아예 들어보려 하지도 않을 정도로 꽉막힌 사회에 무슨 발전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그나마 낚시질을 자제하는 언론이라고는 한국일보 정도 밖에 없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