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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1일 목요일

Das Reich 기갑연대 4중대의 만헤이(Manhay) 전투

이 글은 World War II, 2005 년 11월호의 26~32, 80쪽에 실린 George F. Winter의 글 Panther’s rampage in the Ardenne를 날림으로 번역한 것 입니다. 이미 예전에 채승병님이 바르크만의 시각에서 본 만헤이 전투에 대한 글을 번역하신 적이 있는데 Winter의 글은 미국쪽의 시각도 반영돼 있어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둘러싼 전투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콩떼 뒤부아 생-장(Comte du Bois Saint-Jean)이라는 성은 벨기에의 오데뉴(Odeigne)에서 4마일 떨어진, 바라끄-드-프레뛰르-라-로셰(Banique-de-Fraiture-La-Roche) 가도의 교차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1944년 12월 말, 아돌프 히틀러의 아르덴느 공세가 이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이 구석진 곳의 작은 성은 제2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의 제2SS기갑연대 1대대 4중대소속 판터전차의 공격을 위한 집결지가 되었다.

4중대는 제6SS기갑군이 뮤즈강을 향해 공세를 펼치면서 계속해서 전력이 소모되는 와중에도 다행히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다스라이히 사단이 전투에 투입될 시기가 왔다. 다스라이히 사단은 제2SS기갑군단의 예하 제대로서 만헤이(Manhay) 방면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SS기갑군단장 비트리히(Wilhelm Bittrich)는 리에쥬(Liege)와 바스토뉴(Bastongne)를 잇는 N15도로가 지나가는 만헤이를 점령함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두가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만헤이를 점령할 수 있다면 비트리히는 그의 군단을 그대로 리에쥬를 향해 북진시키거나 아니면 바스토뉴로 방향을 돌려 이곳을 방어하는 미 제101공수사단과 그 배속부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제5기갑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12월 24일 오전, 1대대의 3개 전차중대는 오데뉴에서 발진해 오통(Hotton)-만헤이 가도를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기갑척탄병들의 지원을 받으며 그랑므닐(Grandmenil)과 에레제(Erezee)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 두 마을을 함락시키면 만헤이는 고립되기 때문에 미군은 만헤이를 버리고 퇴각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진격은 프레뉘(Freyneux)와 라모르므닐(Lamormenil)에 방어선을 형성한 미 3기갑사단의 TF 케인(Kane) 소속의 셔먼 전차 11대와 지원 보병의 저항을 받아 저지되었다.

그러나 비트리히는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비트리히는 이 지구의 미군은 지난 수일간의 격전으로 전력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한번의 결정적인 타격만 가한다면 붕괴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타격”을 가하는 것이 4중대 소속의 판터전차들의 임무였다.
많은 전투로 단련된 정예부대인 다스라이히 사단에서도 제1대대의 4중대는 특히 우수한 부대였다. 4중대는 폴(Ortwin Pohl) SS대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폴 대위는 러시아 전선을 거친 역전의 용사로 1944년 4월 4중대의 중대장을 맡았으며 노르망디 전투에서는 12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의 중대원 중 한명은 폴 대위가 “쾌활한 성격의 지휘관이었으며 중대원들을 잘 배려했다”고 회상했다. 다른 한 중대원은 “과묵하지만 병사들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고 회고했다.폴 대위의 부관은 바르크만(Ernst Barkmann) SS상사(Oberscharführer) 였다.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농부의 아들이었던 바르크만은 폴과는 성격이 판이했지만 그 역시 경험많은 전차장이었다. 그의 전우들은 바르크만에 대해 “뛰어난 사냥꾼”이라고 평했으며 “언제 엄폐하고 언제 기동해야 할지 잘 아는” 바르크만의 능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바르크만은 노르망디 전투기간인 7월 27일에 그의 뛰어난 능력으로 생 로-쿠탕스(Coutances) 가도에서 9대의 셔먼을 격파한 바 있었다. 바르크만은 이 전투의 공적을 인정받아 기사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

성 인근의 숲에서 비트리히의 만헤이 공격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며 전투 투입을 고대하던 중대원들은 한 고급 장교의 방문을 받았다. 폴 대위는 새벽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 장군은 나에게 즉시 북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군과 일개 대위와의 대화치고는 특이한 일이었는데 폴은 그 장군에게 자신의 연대장인 엔셀링(Rudolf Enseling) SS중령(Obertsturmbannführer)과 먼저 상의해 보는 것은 어떻겠는지 물었다.
바로 뒤에 폴은 연대장에게 호출되어 오데뉴의 교회에 위치한 연대본부로 갔으며 엔셀링은 폴에게 다시 한번 공격을 지시했다. 엔셀링, 폴, 그리고 바르크만은 만헤이 도로 부근을 정찰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차로 공격하기에 불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우리쪽은 기동할 공간이 제한되어 있는데 비해 미군은 고지대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사격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는 연대장에게 야간 공격을 제안했고 연대장은 나에게 공격에 대한 모든 것을 일임했습니다.”
폴의 공격계획은 그의 중대가 제3SS 기갑척탄병연대 소속의 척탄병의 지원을 받으며 오데뉴에서 만헤이 도로로 진출하는 것 이었다. 일단 고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만헤이로 진격한 뒤 만헤이를 탈취하고 다시 이곳에서 오통 방면으로 진출, 미 3기갑사단의 측면으로 우회해 돌파구를 넓힌 뒤 후속 부대들이 전과를 확대하도록 한 다는 것 이었다. 이 공격은 24일 밤 22시에 예정되었다.

바르크만과 폴은 공격준비를 위해 중대로 돌아갔다. 16시38분에 4중대의 전차들은 오데뉴에 집결해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중대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중대의 3개 소대 모두가 완편상태였고 17대의 판터 전차를 가지고 있었다.
공격의 선봉에 서는 것은 프라우셔(Franz Frauscher) SS원사가 지휘하는 3소대 소속의 판터 5대였다. 프라우셔는 1939년에 SS에 입대한 베테랑으로 소련 전선에서 8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했으며 노르망디에서는 두 대의 셔먼을 격파했다. 프라우셔의 뒤에는 역시 노르망디 전투의 베테랑인 피셔(Oskar Fischer)의 전차가 따랐으며 피셔의 사수는 비숍(Bischof)이었다.
폴의 402호차는 3소대의 바로 뒤에 후속했으며 폴의 뒤는 바르크만의 401호차가 따랐다. 중대본부의 뒤에는 비스만(Alfred Wissmann) SS소위가 지휘하는 2소대의 판터 5대가 후속했다. 2소대의 뒤는 얼마전 갓 임관한 크노케(Heinrich Knocke) SS소위의 1소대가 따랐다.
엔셀링은 폴의 타격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2중대 소속의 하게샤이머(Manfred Hargesheimer) SS중위가 지휘하는 판터 6대를 배속시켰다. 하게샤이머의 소대는 프레뉘 외곽에서 4중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하게샤이머는 폴의 중대원들과 친숙했는데 그는 동부전선에서 바르크만과 같은 전차를 타면서 19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한 바 있었다. 마지막으로, 폴 SS대위가 지휘하는 23대의 판터를 지원하기 위해서 제3SS 기갑척탄병연대의 16중대인 돌격공병중대가 배속되었다.

독일군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무렵, 오데뉴에서 3/4마일 떨어진 숲에는 미 7기갑사단 제40전차대대의 A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알렌(Malcolm Allen) 대위가 지휘하는 A중대에는 셔먼 전차 6대가 남아 있었으며 A중대는 마을 바깥으로 향하는 도로의 북쪽, 만헤이 도로의 교차점 부근에 포진하고 있었다.이 교차점에서 북쪽으로 1마일 떨어진 곳에는 서쪽방향으로 도로가 꺾어졌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어지는 S자 커브가 있었으며 도로는 양 옆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이 도로의 동쪽 가에는 풀밭이 있었고 여기에는 넬슨(Roy Nelson) 대위가 지휘하는 제40전차대대 C중대 소속의 셔먼 9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도로는 S커브로 된데다 양 옆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쌓여 시계가 불량했지만 한편으로는 넬슨의 중대에 엄폐물을 제공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도저를 장착한 전차가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얕은 구덩이를 파 놓았기 때문에 넬슨의 전차들은 포탑만 내밀어 폭로면적이 줄어들었고 또 독일군의 포화로 부터도 어느 정도 방어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C중대의 혼드롭(Donald Hondorp) 하사는 여전히 불안감을 느꼈다. “우리는 마치 하얀 바탕의 검은 점 처럼 두드러져 보이는 목표물이었습니다.”
넬슨의 중대가 배치된 풀밭의 동쪽으로는 B중대와 D중대 소속의 전차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두 중대의 셔먼과 M5A1경전차들은 말랑프레(Malempre) 마을 주위에 배치되었다.
브라운(Cook Brown) 중령의 제40전차대대 본부는 만헤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40전차대대는 전투 초기에 생-비트에서 격전을 치뤘다. 그 결과 16일 전투 시작당시 60대였던 대대의 전차는 32대로 줄어들어 있었다.
제40전차대대는 역시 만헤이에 본부를 둔 로젠바움(Dwight Rosenbaum) 대령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로젠바움 대령의 A전투단은 40전차대대와 48기계화보병대대(Armored Infantry Battalion), 그리고 1개 소대의 구축전차와 전투공병, 포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전투로 소모된 로젠바움의 부대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거의 탈진상태였다. 만헤이로 이동한 로젠바움의 전투단은 크리스마스 이브만은 조용히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18시, 만헤이에 도착한지 겨우 6시간이 지났을 때 로젠바움 대령은 제18군단을 지휘하는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소장으로부터 다시 만헤이를 버리고 그 북쪽의 고지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40전차대대가 철수의 후위를 맡으며 이동시간은 22시 30분으로 예정되었다.

22시 정각, 폴은 계획대로 오데뉴를 벗어나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분뒤 폴의 중대는 알렌 대위의 A중대와 교전했고 이 전투로 셔먼 두 대와 판터 한대가 격파되었다. 프라우셔의 전차가 기동 불능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전차로 갈아타고 공격을 지휘했다. 독일군이 재정비 하는 동안 A중대는 만헤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야간 전투 중에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바르크만은 북쪽으로 이동하던 도중 자신의 중대와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바르크만은 만헤이 가도에 도착한 뒤 (원래의 대형대로) 아직도 프라우셔가 자신의 앞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북진하기로 결정했다.
맑은 하늘과 밝은 달이 눈내린 들판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좋았으며 바르크만은 만헤이로 향하는 낮은 경사로를 따라 올라갔다. 무전기의 문제 때문에 나머지 중대의 차량들과 교신이 되지 않던 그때, 바르크만은 앞쪽의 길가에 서 있는 한대의 전차를 발견하고 그것이 프라우셔의 전차라고 생각했다.
바르크만은 전우들과 합류하게 됐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가갔고 포탑 위에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프라우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전차의 승무원은 그대로 해치를 닫아 버렸고 바르크만도 (상황을 깨닫고) 포탑 안으로 들어왔다.
바르크만은 즉시 그의 사수인 포겐도르프(Horst Poggendorf)에게 포탑을 돌려 옆의 전차를 쏘라고 명령했다. 두 대의 전차는 너무 가깝게 붙어 있어서 포겐도르프는 포탑을 선회할 수가 없었다. 바르크만의 조종수는 명령도 없이 반사적으로 전차를 후진시켜 포겐도르프가 포탑을 돌려 사격할 수 있도록 했다.
판터가 발사한 포탄은 그대로 셔먼의 후부를 관통해 버렸는데 놀랍게도 그 셔먼의 승무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셔먼의 사수인 오스타체브스키(Frank Ostaszewski)가 부상을 입는데 그쳤으며 바르크만이 프라우셔라고 착각했던 마티어스(Mathias) 하사는 다른 승무원을 구출해서 숲 속으로 숨었다.
바르크만의 401호차 승무원들은 자신들의 운에 감사하면서 그대로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바르크만은 오른쪽을 살펴보다가 셔먼으로 보이는 전차 두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즉시 사격하라고 명령했고 두 대 모두를 격파했다.” 바르크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격파된 두 대의 장갑차량은 셔먼이 아니라 제814 대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M10이었다.
바르크만은 여전히 본대를 찾지 못한데다가 적의 전차 세대와 맞딱드리게 되자 속도를 줄이고 조금 더 조심해서 전진하기로 했다. 바르크만은 그 직후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우리의 앞에 나무가 없는 개활지,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 앞의 도로는 큰 S자 커브로 꺾여 있었고 그 앞은 나무로 둘러 쌓인 내리막 길 이었다. 순간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그 목초지에는 적의 전차 아홉 대가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바르크만은 이 상황에서는 능청을 떠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조종수에게 그대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바르크만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 나갔고 도로가 굽어지는 곳 까지 나간 뒤 전차를 멈추게 했다. 이제 한대의 셔먼을 제외하고는 바르크만을 쏠 수 없는 위치였다.
바르크만의 회고는 계속된다.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미군 전차병들이 전차에서 나와 숲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이제 바르크만의 전차가 중대의 선두라는게 확실해 졌고 바르크만은 뒤따라오는 프라우셔가 미군 전차들을 처리해 주기를 바라면서 미군 전차들을 쏘는 대신 전진을 계속했다.

바르크만이 생각했던 대로 그가 떠나고 몇 분 뒤 프라우셔의 전차가 초지에 도착해 미군 전차들을 발견했다. 그런데 모든 미군 승무원들이 숲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 프라우셔의 전차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셔먼이 프라우셔에게 발포를 했는데 그것은 빗나갔다. 프라우셔는 조명탄을 발사해 주변을 밝혔다.
조명탄이 타오르는 동안 프라우셔의 사수는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다섯대의 셔먼이 격파되었다. 혼드롭 하사는 자신의 셔먼을 구덩이에서 몰고 나오는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엔진부가 피격되어 전차에 불이 붙었습니다.” T. C. 그레이(Gray) 하사가 전차장인 두번째 셔먼도 구덩이에서 후진해 나왔다. “우리는 두발을 사격했지만 곧 전차포의 제퇴기가 고장나 버렸습니다.” 혼드롭과 그레이는 전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프라우셔와 그의 소대 소속 전차들은 예기치 못하게 미군과 조우했지만 미군 전차들의 뒤로 들어가 S자로 커브가 진 도로 주변의 지형을 유리하게 이용했으며 다시 만헤이로 향하기 전에 C중대 소속의 셔먼 아홉대를 모두 격파했다.
한편, 바르크만은 만헤이에 도착했다. 그랑므닐로 향하는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려던 찰나 그는 세대의 미군 전차를 발견했다. 바르크만은 미군 전차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그대로 만헤이로 들어갔다. 만헤이는 오후에 로젠바움 대령이 받은 철수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미군으로 가득차 있었다.
날이 어두운데다가 미군들은 각자의 임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바르크만의 판터가 독일 전차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커다란 판터 전차가 언제까지나 미군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곧 미군들은 독일 전차가 나타난 것을 알게 되었다. 제40전차대대 본부의 골디(William Goldie) 소위는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커다란 판터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대로 건물로 뛰어들어와 대령에게 독일 전차가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전차포가 발사되는 소리를 들었고 대령은 모두 빨리 움직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모두 바삐 움직였고 나도 마찬가지였지요.”
골디 소위에게 발견 되기 전에 바르크만은 한대의 지프를 깔아 뭉개 버렸다. 바르크만의 판터와 지프가 충돌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은 그때 도로의 바깥에 서 있던 하프트랙의 운전병 파웰(Morris W. Powell) 이었다. “우리는 오른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걸 들었습니다. 한대의 탱크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섬광이 번쩍였고 곧이어 충돌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큰 탱크는 처음 봤습니다. 아마도 88mm 포 같았는데 그거 전봇대 처럼 큼지막 하더군요. 지프는 두 명의 사람을 태운 채로 뒤집어져 그대로 그 괴물에게 뭉개졌습니다.”
운전병들이 바르크만의 전차를 피하려고 운전을 하는 통에 로젠바움 대령이 계획한 질서정연한 후퇴는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바르크만은 마을을 벗어난 뒤 포탑 밖으로 나와 마을쪽을 바라봤다. “우리를 추격하는 적 차량 중에는 셔먼도 있었다.” 바르크만은 포탑을 6시 방향으로 돌려 두 대의 셔먼을 격파했다.이제 도로는 완만한 오르막 길이었다. 포겐도르프는 이동하는 와중에 마을을 향해 포격을 계속했다. 스튜어트 경전차 세대와 하프트랙 한대, 그리고 셔먼 한대가 더 격파되었다. 그러나 이제 판터의 엔진도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더 이상 운이 따를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바르크만은 전차를 숲으로 이동시켜 숨은 뒤 중대장과 나머지 전차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만헤이는 점점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바르크만이 만헤이를 빠져나가고 얼마 뒤 프라우셔가 만헤이에 도착했다. 프라우셔는 “뒤에 매복해 있던 한대의 셔먼이 내 전차의 왼쪽 측면을 명중시켰고 내 전차는 그대로 기동불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사격은 A중대의 셔먼이 발사한 것이었고 이것을 발사한 사수 코소브스키(Nicholas Kosowsky)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선두의 적 전차가 집 바로 옆에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그 전차를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뒤의 두 번째 적 전차가 조명탄을 발사한 뒤 우리 전차의 왼쪽 구동륜을 파괴했지요.” 셔먼의 승무원들은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 기동불능이 된 전차에서 탈출했다.
프라우셔는 그날 밤 두 번째로 다른 판터로 갈아타고 지휘를 계속했다. 프라우셔는 전차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셔먼 한대를 더 격파했다. 이제 미군은 만헤이에서 밀려났는데 폴 대위는 마을 북쪽으로 더 나가는 대신 만헤이에서 빠져나와 그랑므닐 방향인 서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랑므닐로 향하는 도로는 북쪽과 남쪽의 숲으로 경계지어 있었으며 그 뒤로는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작은 개울이 보말(Bomal) 북서쪽으로 향하는 하수도의 위를 지나 흐르고 있었다. 판터들이 진격하는 동안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1소대를 지휘하는 크노케 소위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적의 포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차를 좌측으로 회피시켰고 동시에 숲속을 향해 대응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길 가장자리와 경사면을 살펴보지도 않은채 전차를 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포탑과 포신이 그대로 초지에 처박히게 됐고 전차는 그대로 멈춰 버렸습니다.” 크노케는 포탑 밖으로 나와 조종수가 뒤로 빠져나가도록 유도했고 그의 전차는 다시 도로로 올라섰다. 하지만 크노케는 어두운 가운데 포구를 살펴보고 진흙으로 막혀버려 사격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나는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전우들을 놔두고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포탑과 차체의 기관총은 사용이 가능했으니까요. 그랑므닐 근처에서 나는 중대장의 전차를 만났습니다.” 폴 대위는 포탄의 파편에 머리를 크게 다쳐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크노케의 사수가 폴 대위의 차량에 대신 탑승해 전차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무렵 프라우셔는 보말의 도로 교차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랑므닐로 진입한 상태였다. 프라우셔는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 포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내 뒤를 따르던 내 소대의 네번째 전차가 화염에 휩싸인 채 멈춰섰습니다.” 그 전차는 순식간에 불타올랐고 피셔와 사수인 비숍, 장전수와 조종수 등 네 명은 그대로 타 죽었다. 무전수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프라우셔는 그의 우측 150m 떨어진 곳에서 피셔의 전차를 격파한 셔먼으로 생각되는 차량을 발견했다. 피셔의 판터가 불타면서 주변을 환하게 밝혔기 때문에 프라우셔는 미군의 전차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프라우셔는 사수에게 포탑을 세시 방향으로 돌리라고 명령하고 목표를 확인한 뒤 발사명령을 내렸다. 미군의 전차는 순식간에 격파되었다. 첫번째 전차를 격파한 직후, 프라우셔는 셔먼으로 생각되는 두번째 차량을 발견했고 그 것 또한 격파했다. 프라우셔가 셔먼이라고 착각한 그 두대의 차량은 제628대전차대대 소속의 M10이었다.
뒤를 따르던 2소대의 판터들은 격파된 피셔의 전차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정지해야 했다. 비스만은 조종수에게 왼쪽으로 선회해 도로 옆의 초지로 우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대의 나머지 전차들은 비스만의 전차를 따랐다. 그러나 얼마 뒤 다섯대의 판터들은 제238공병대대가 매설한 지뢰지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뢰폭발로 구동륜과 궤도가 파괴되었다. 네대가 가동 불능이 되었으며 다섯 번째 차량은 길 가에 멈춰섰다.
이제 프라우셔는 궁지에 몰리게 됐다. 그의 뒤는 격파된 판터와 지뢰밭에 의해 차단된데다 사방은 미군 천지였다. 프라우셔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지났습니다. 나는 홀로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엔진을 끄고 상황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한편, 비스만은 전차에서 탈출해 지뢰밭을 건너 도로로 올라왔고 근처의 집으로 피했다. 그리고 잠시 뒤 1소대장 크노케가 합류했다. 두 사람이 다음 단계를 의논하고 있을 때 프라우셔도 집으로 들어왔다. 간단한 의논을 한 뒤 세 사람은 에레제까지 가기로 하고 그곳에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결정을 했다.
의논을 마친 뒤 후속하는 크노케의 전차는 격파된 피셔의 판터를 피해서 집 앞의 정원으로 우회해 앞으로 나갔다. 크노케의 전차는 이 장애물을 통과해 프라우셔의 전차와 합류했고 그곳에서 5마일 떨어진 에레제를 향해 나갔다.

에레제에 도착한 그들은 2중대의 하게샤이머와 합류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 하게샤이머는 폴이 중상을 입은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 그가 공격을 지휘해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공격을 지휘하게 된 하게샤이머는 프라우셔와 문제를 상의했다. 하게샤이머는 미군의 방어외에도 이제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기 때문에 미군의 공습에 대해서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격하는 와중에 전차를 지원할 보병들과도 접촉이 끊어졌다.
하게샤이머는 자기 전차로 돌아가다가 길 가장자리의 구덩이에 미군 두세명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게샤이머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총을 빼앗으려 했지요. 그러자 갑자기 그들 중 한명이 내 어깨를 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미군들은 달아났다. 하게샤이머에게 있어 전쟁은 끝났다. 하게샤이머는 만헤이로 후송됐고 나머지 전차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나머지 전차들은 그랑므닐에 도착해 그곳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날이 밝아오자 미군의 비행기들이 나타났다. 프라우셔는 이렇게 회상했다. “적의 항공우세는 엄청났습니다. 도로로 나가는 차량들은 하늘 위를 계속 선회하고 있는 세대의 적기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4중대원들은 최선을 다해 엄폐했지만 그들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크노케는 이렇게 회상했다. “25일 내내 미군의 포화는 격렬했습니다. 이른 오후 무렵 내가 탄 411호차는 두 발의 포탄을 맞았습니다. 나는 내 승무원들에게 해치를 열라고 했는데 잠시 뒤 내 차량은 연기와 화염으로 뒤덮였습니다. 결국 전차를 버리고 탈출했습니다.”

그랑므닐의 판터들이 지독한 포격에 시달린 이유는 4중대의 나머지 전차들이 만헤이를 떠난 뒤에 있었던 일의 결과였다. 그날 아침, 숨어있던 바르크만은 숲에서 나와 만헤이로 돌아갔다. 거기서 그는 파괴되거나 뒤집어진 지프, 트럭, 하프트랙, 전차들을 목격했다. 미군들은 철수했고 기갑척탄병들이 마을을 장악하고 있었다. 바르크만은 폴 대위가 탑승하던 판터를 만날 수 있었다. 두대의 전차는 마을의 북쪽 방향으로 부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오전 늦게 미군들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마을 북쪽의 고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31전차대대 B중대 소속의 셔먼 다섯대가 마을을 탈환하려 했다. 오전이 끝나갈 무렵 셔먼 전차들은 은폐하고 있던 곳에서 나와 지원하는 보병들과 함께 만헤이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곧 판터 두대의 사거리안에 들어왔고 독일군은 발포를 시작했다. 선두에 선 셔먼의 장전수였던 놀티(John Naulty) 상병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그날의 임무를 받고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버려진 아군의 차량들을 지나쳤습니다.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두발의 포탄은 피했지만 결국 차체 전면 좌측에 한발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따르던 네대의 셔먼도 모두 격파됐다.
그리고 잠시 뒤 올프(Emerson Wolfe) 대위가 지휘하는 10대의 셔먼이 도착했다. 클라크(Bruce Clarke) 준장은 올프 대위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올프 대위는 심하게 주저했다. 올프 대위는 클라크 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있는 곳에서 만헤이 사이에 대여섯대의 셔먼이 격파되어 흩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헤이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진격하는 도중) 만헤이 북단에 위치한 적의 포화에 취약해 집니다. 이건 자살행위입니다.” 올프 대위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긴 제7기갑사단 B전투단의 지휘관 클라크 준장은 만헤이 공격을 지켜보기 위해 근처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에게 갔다. 두 장군은 30분 정도 상의를 한 뒤 올프 대위에게 그의 중대를 후퇴시키라고 명령했다.

미군은 전차로 공격하는 대신에 8개 대대의 포병을 동원해 만헤이 일대를 포격했다. 포격은 꾸준히 계속됐으며 포격이 끝난 27일까지 총 8,600발의 포탄이 독일군을 강타했다. 만헤이와 그랑므닐을 방어하던 독일군 척탄병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두 마을의 건물 중 멀쩡한 것은 단 한채도 없었다.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인 25일 저녁, 폴의 중대원들은 그랑므닐에서 철수했다. 이틀 뒤, 4중대는 사단 본대의 철수에 따라 이 지역을 벗어났다.

폴의 중대는 수많은 미군 전차와 차량을 격파하고 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더 이상 전진할 수 는 없었다. 만헤이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은 비트리히가 그의 부대를 북쪽의 리에쥬로 전진시키지도 못하고 또 남쪽의 바스토뉴로도 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4중대는 그들의 공격력을 서부전선의 마지막 대공세에서 소진한 뒤 점점 줄어드는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는 전투에 휩쓸렸다. 4중대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날 까지 싸움을 계속했다. 마지막 포탄을 발사한 뒤 중대장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중대원들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고하고 중대를 해산했다.

2007년 9월 6일 목요일

책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전략)

그러나 과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정치와는 무관한 군인들이었을까? 또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2차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하려고 했을까? 또는 리델 하트에게 한 말들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었을까?

(리델 하트와의 대화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은 독일 장군들이 리델 하트를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대했는지 보여준다. 그리즈데일(Grizedale)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장교 중 한 명인 헨리 펄크(Henry Faulk) 중령의 회고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45년 12월 28일에 리델 하트가 독일 장군들에게 면담을 신청했을 때 펄크 중령은 그들에게 리델 하트가 찾아 왔으니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독일 장군들은 모여서 리델 하트와 이야기 할 때 어느 정도 선 까지 정보를 알려 줄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어가 유창했던 펄크 중령은 독일 장군들의 대화를 엿듣고는 이것을 그대로 리델 하트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리델 하트는 펄크 중령의 말을 듣고도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펄크 중령은 아마도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은 엘리트적이고 기사도 정신에 바탕을 둔 집단이므로 신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정말 리델 하트가 펄크 중령의 말대로 독일 장군들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면? 전범재판이 시작될 무렵인 1945/46년 겨울에 리델 하트는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인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델하트 자신도 영국측의 전범 기소 책임자인 쇼크로스(Hartley Shawcross)를 만난 1945년 9월 무렵부터 전범재판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리델하트는 자신이 전쟁성과 영국 정부의 고위층에 가지고 있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 독일 장군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Alaric Searle, "A Very Special Relationship : Basil Liddell Hart, Wehrmacht Generals and the Debate on West German Rearmament 1945~1953", War in History Vol 5 Issue 3,(1998), pp.332~333

이 이야기는 리델 하트가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을 면담하면서 The Other side of the Hill의 저술을 준비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The Other side of the Hill은 2차대전 초기 아주 큰 삽질로 거의 매장(???) 당할 뻔 한 리델 하트가 다시금 명성을 되찾도록 해 준 저작이고 또 냉전시기 독일 국방군 장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이 정립되는데 큰 기여를 한 저작입니다.

이 글의 저자인 Alaric Searle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군사이론가와 군사사가로서의 명성에 타격을 받았던 리델 하트가 자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포로가 된 독일 장군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의 이런 점을 잘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펄크 중령의 증언은 리델 하트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지적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리델 하트는 자신의 명성을 상당 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으며 독일 장군들은 리델 하트를 이용해 독일 장교단은 나치나 히틀러의 범죄와는 무관한 애국적인 집단이었다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퍼트릴 수 있었습니다. 리델 하트는 지속적으로 독일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만토이펠은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던 무장친위대 장군 비트리히를 구하기 위해서 리델 하트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지요.

사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이런 종류의 뒷이야기들은 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