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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24일 월요일

스페인 내전당시 공화파 기갑부대의 작전

소련은 스페인 내전에 약 3,000명의 지원병과 항공기 648~806대, 전차 331~362대, 장갑차 60~120대, 야포 1,044~1,186문, 기관총 15,113~20,486정, 소총 414,645~497,813정, 폭탄 110,000발, 수류탄 500,000발, 포탄 3,400,000발, 소화기 탄약 862,000,000발 등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전이 진행되던 기간 중 상당 부분은 프랑스와의 국경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파에 대한 지원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기갑장비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대적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어중간한 국력의 국가들은 1920년대에 도입한 프랑스제 르노 FT-17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는데 이 점은 스페인도 마찬가지여서 독일의 1호전차, 이탈리아의 CV-33, 그리고 소련의 T-26이 대량으로 지원되기 전 까지는 양군 모두 이렇다 할 기갑전력이 없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소련항공기들이 전쟁 초반을 제외하면 독일측에 별다른 인상을 끼치지 못한 것과 달리 전차는 독일이 지원한 1호전차가 시원찮은 물건이었던 덕분에 전쟁 말기까지도 상당한 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대한 군수물자 지원은 НКВД내의 X과(X는 스페인을 의미)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련의 지원은 1936년 가을과 1937년 초에 집중되었습니다. 1937년 하반기 부터는 공화파가 가진 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지원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자본주의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지요.

소련이 지원한 기갑장비와 인력이 스페인으로 처음 보내진 것은 1936년 9월로 여기에는 50대의 T-26과 전차병 51명, 장갑차 30대, 그리고 탄약 및 유류가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10월 12월에 카르타헤나에 도착, 곧 바로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10월 말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T-26 111대와 전차병 330명을 파견하자고 건의, 승인을 받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주재 소련무관 고레프(Владимир Горев) 여단지휘관(Командир бригады)은 전차병 양성을 위해 아르헤나(Archena)에 기갑학교를 창설합니다. 이 학교의 교장은 크리보세인(Семён кривошеин) 여단지휘관이 임명되었습니다. 원래 소련 전차병들은 훈련 임무에만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마드리드가 압박 받는 상황 때문에 전차병을 양성할 시간이 충분치 못했습니다. 결국 고레프는 소련 전차병들이 직접 전차를 운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요.(여기에 약간의 스페인 전차병이 합류합니다.)

T-26의 성능은 의심할 나위 없이 1호전차나 CV-33에 비해 월등했지만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병은 러시아인인데 보병은 스페인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 통할리가 없었겠지요. 소련이 스페인에 파견한 인력 중 통역병이 204명이나 됐지만 이들이 모든 부대와 전차 한대마다 일일이 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은 월등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소련제 전차들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지요.
T-26이 처음 투입된 1936년 10월 27~29일의 세세냐(Sesena) 전투는 이런 문제점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는 소련인 노박(А. Новак)이 지휘하는 BA-3 장갑차 6대와 T-26 7대로 편성된 기갑집단과 스페인인으로 구성된 1개 전차소대, 그리고 아르만(Паул Арман) 대대지휘관(Командир батальона)이 지휘하는 1개 중대 등 3개의 전차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전투 초기에 아르만은 전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공격에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아르만이 지휘하는 15대의 T-26중 세대가 대전차지뢰로 기동불능이 되었고 또 한대의 전차는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세세냐 외곽의 한 마을로 진입해 화염병을 맞고 격파됐습니다.(이게 스페인 내전에서 최초로 화염병에 의해 전차가 격파된 사례라고 합니다.) 아르만의 중대는 마을을 돌파한 뒤 프랑코군의 야포 1개 포대를 유린했습니다. 이때 3대의 CV-33이 반격해 왔지만 1대가 T-26에 의해 격파되고 한대는 T-26에 들이 받혀 전복(!!!)돼 버립니다. 아르만은 보병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격을 계속했지만 두 대가 더 화염병에 의해 격파되고 세대는 야포에 의해 파괴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는 마드리드가 압박받던 상황에서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내용면에서는 불합격이었습니다. 특히 보전협동이 되지 않으니 전차들이 적 보병을 몰아내고 특정 지점을 점령하더라도 적이 반격을 해 올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프랑코군은 1938년까지 30개 대전차포 중대(중대당 대전차포 6문)를 편성했는데 이것은 1937~1938년 전역에서 공화파의 전차부대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와 함께 지상전에 전용된 88mm 대공포도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세세냐 전투 이후 공화파는 전차와 장갑차를 집결시켜 T-26 48대와 BA-3 장갑차 9대로 대대규모의 기갑전력(아랑훼즈Aranjuez 집단)을 만들기는 했지만 실제 운용은 중대 단위로 보병에 분산 배치되는 방식이 계속됐습니다. 당연히 기갑부대의 집중운용에 따른 파괴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랑훼즈 집단은 11월부터 12월에 걸쳐 마드리드를 둘러싼 공방전에 투입됐습니다. 공화파는 전쟁 이전에 편성된 제 1전차연대(FT-17 장비) 대부분을 예하에 두고 있었고 제 1전차연대는 아랑훼즈 집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술적 미숙함과 기계 자체의 신뢰성 미달로 전차의 손실은 매우 컸습니다. 1936년에 지원된 전차 중 52대가 1937년 2월까지 상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37년 9월에 이르면 전차 손실은 170대에 달했습니다.(이때 까지 지원된 전차는 T-26 256대) 흔히 생각하는 것 과는 달리 소련전차들의 기계적 신뢰성은 형편없었는데 T-26의 경우 150시간 마다 정비를 받아야 했으며 600시간 뒤에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습니다.(소련전차의 기계적 신뢰성은 T-34 초기 생산분 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질 연료에다 끊임없는 격전으로 전차부대를 후방으로 돌려 정비할 시간이 없었으니 손실은 지속적으로 높아만 갔습니다. 여기다가 보충도 간헐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전차의 집중운용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아르만의 전차중대는 800시간이 넘도록 정비를 받지 못해 살아남은 전차들도 상당수가 고장으로 운용 불능이 됐습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차병 제 2진을 파견합니다. 제 2진은 전차병 및 정비병 200명으로 벨로루시 군관구의 제 4 독립전차여단에서 차출한 병력이었고 지휘관은 파블로프(Дмитрий Г. Павлов) 여단지휘관이었습니다. 소련정부는 기존에 파견된 병력을 파블로프의 부대에 합류시켜 기갑여단으로 개편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갑여단의 편성은 난항을 겪었습니다. 먼저 전차의 손실을 막기 위해 경험이 부족한 스페인 전차병은 포탑에 배치하고 숙련도가 높은 소련 전차병이 조종수를 맡는 식으로 여단이 편성되었는데 러시아 전차병들이 모두 조종수는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전차의 손실률이 높아 여단은 편제(96대) 미달이었습니다.

새로 편성된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초부터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여단은 크리보세인이 지휘하는 1대대와 페트로프(М. П. Петров) 대대지휘관이 지휘하는 2대대로 편성되었는데 신규편성인 2대대의 전투력이 1대대 보다는 양호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전투에 투입될 당시 47대의 전차를 보유했습니다. 제 1기갑여단은 1937년 1월 11일 마드리드 서쪽에서 제 12인터내셔널 여단과 제 14인터내셔널 여단이 개시한 반격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은 스페인 사람 보다는 말이 잘 통했는지 보전협동이 원활히 이뤄져 이 반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3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는 새로운 위협이 등장했는데 바로 독일의 37mm 대전차포 Pak 36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격파된 전차 모두가 이 37mm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7mm 대전차포는 독일이 지원한 지상장비 중 가장 효과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이어서 전개된 1월 말의 Jarama강 공세는 보전협동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전차포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잘 보여줬습니다. 이 전투에 투입된 제 1기갑여단의 전차 60대 중 거의 40%가 격파되었고 이 중 상당수는 대전차포에 의한 것 이었습니다.

1937년 3월의 과달라야라(Guadalajara) 전투는 겨울의 전투에 비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주로 상대한 이탈리아군은 T-26을 장비한 부대와 수차례 교전을 벌인 뒤 전투를 회피하게 됐습니다. 이탈리아군의 주요 장비가 CV-33이었으니 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3월 18일의 반격에서 이탈리아군은 T-26을 앞세운 공화파군에게 격파당해 패주합니다. 그러나 제 1기갑여단의 손실도 커서 3월 말에는 가동 가능한 T-26이 9대로 줄어듭니다.

그러나 1937년 3월부터 5월에 걸쳐 150대의 T-26이 보충되면서 제 1기갑여단은 129대의 T-26, 43대의 BA-3 장갑차와 30대의 예비전차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937년 7월부터 시작된 마드리드 구원 공세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규모 공세에서도 37mm대전차포의 집중운용은 공화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공세 첫날인 7월 6일 전투에서는 1문의 대전차포가 12대의 T-26을 격파하기도 했다지요. 피해는 급증해서 7월 11일이 되자 여단의 가동 전차대수는 38대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공세에서 주공을 맡은 5군단과 18군단은 막심한 손실을 입은 끝에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결국 7월 18일부터 프랑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구원공세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랑코군이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운용하면서 보전협동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전차병들은 대전차포가 조준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최고 속도로 움직였는데 보병들은 이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죠.

1937년 여름에 소련은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지원합니다. 바로 BT-5 전차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로 이 연대는 소련이 특별히 고리키 전차학교에서 교육시킨 인터내셔널 여단의 외국인 지원병들과 붉은군대 제 5기계화군단 소속의 전차병으로 편성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인 전차병들이 충원되어 이 부대는 편성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 전차병의 경우 조종훈련은 충분히 받은 편이지만 소대나 중대단위의 훈련은 전혀 받지 못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BT-5를 장비한 인터내셔널 전차연대는 1937년 8월부터 진행되고 있던 사라고사 공방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임무는 제 35보병사단의 공격을 지원, 사라고사를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터내셔널 전차연대가 공격 개시 하루 전날인 10월 12일 밤에야 집결지에 도착했다는 것이고 작전 명령도 도착 직후에야 전달받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연대참모들은 작전지역에 대한 지형 정찰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을 개시해야 했습니다. BT-5가 고속전차라는 점 때문에 제 35보병사단장은 전차에 보병을 태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전투 기동간에 전차에 올라탄 보병 중 상당수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다른 전차에 깔려 죽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지형도 전차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관개시설이 된 경작지였습니다. 결국 첫 번째 공격에서는 탄약을 모두 소모할 정도로 교전하고도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고사에 대한 공격 이후 공화파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보충을 받지 못 한채 지속적으로 감소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1937년까지도 상당수를 차지하던 소련인 전차병들은 전사하거나 본국으로 귀환해 스페인인들이 전차부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1937년 10월에 공화국 전차부대를 총괄하는 페랄레스(Sanchez Perales) 대령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전차부대를 2개 기갑사단으로 개편했습니다. 이 “기갑사단”은 지원부대가 부족해 거의 전차로만 편성된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38년에 T-26 25대를 보낸 것을 끝으로 전차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새로 편성된 기갑사단은 주로 자동차를 개조한 장갑차를 장비하게 됐습니다. 공화파의 기갑전력은 1938년 5월에 전차 176대와 장갑차 285대였는데 이것이 같은 해 12월에는 전차 126대와 장갑차 291대가 됩니다. 장갑차만이 겨우 보충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공화파군의 기갑사단이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것은 1937년 12월 15일로 이때 투입된 기갑사단은 T-26을 장비한 2개 전차대대와 인터내셔널 전차연대의 잔존병력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이 사단은 작전 개시 당시 104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대부분의 전차가 기계 수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63대는 오버홀을 받아야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현지 부대에서 어떻게든 수리를 해서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1938년 2월 22일까지 전선에서 활동했는데 특별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련은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전차병 351명을 지원했고 이중 53명이 전사했습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T-26과 BT-5의 성능이 현대적 대전차 병기를 견디기 어렵다고 보고 신형전차를 개발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지만 대규모 전차부대의 운용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스페인 내전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대숙청이 함께 진행된 것도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소련의 전차지휘관들은 예상치 못한 실전 결과 때문에 위축되어 교훈을 도출하기 보다는 실패를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193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대규모 기계화부대의 편성과 교리개발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실전 경험을 반영해 기계화 부대를 개혁해야 할 기계화부대지도국(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이 숙청으로 풍비박산 난 것은 가장 큰 타격이었습니다.

참고자료

Michael Alpert, "The Clash of Spanish Armies: Contrasting Ways of War in Spain, 1936~1939'", War In History, Vol.6. No.3(1999)
Mary Habeck, Storm of Steel: The Development of Armor Doctrine in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1919~1939, (Cornell University Press, 2003)
G. F. Krivosheev, Soviet Casuali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Green Hill Books, 1993, 1997)
Stanley G. Payne, The Spanish Civil War,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Yale University Press, 2004)
Steven J. Zaloga, "Soviet Tank Opera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Vol.12. No.3(September 1999)

2007년 8월 8일 수요일

아뉘(Hannut) 전투에서 독일군이 입은 손실

제가 중국에 있는 동안 페리스코프 포럼에 deSaxe란 분이 질문 하나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분이 질문하신 페리스코프 포럼에 답글을 다는게 예의 인데 이상하게도 로그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로그인이 되는 대로 답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소개해 주신 위키피디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롭기 때문에 따로 여기에 글을 조금 적어둘까 합니다.

deSaxe란 분은 제가 예전에 썼던 아뉘 전투에 대한 글,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가 위키의 내용과는 다르다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위키피디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When Erich Hoepner's XVI Panzer Corps, consisting of 3rd and 4th Panzer Divisions was over the bridges launched in the direction of the Gembloux Gap, this seemed to confirm the expectations of the French Supreme Command that here would be the German Schwerpunkt. The two French Cavalry armoured divisions, the 2nd DLM and 3rd DLMs (Division Légère Mécanique, "Mechanised Light Division") were ordered forward to meet the German armour and cover the entrenchment of 1st Army. The resulting Battle of Hannut on 12 May-13 May was, with about 1,500 AFVs participating, the largest tank battle until that date. The French lost about a hundred tanks, the Germans lost over 160 but managed on the second day to breach the screen of French tanks, which on 14 May were successfully withdrawn after having gained enough time for the 1st Army to dig in.

이 글에서는 독일군이 160대의 전차를 잃었다(lost)고 적고 있습니다. lost란 단어는 풍기는 뉘앙스가 "완전손실"에 가깝지요.

그런데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제가 썼던 글에도 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즉 독일군의 손실이 160대 라는 것은 수리가능한 피해까지 합산한 것 입니다.

아뉘전투와 장블뢰전투가 사실상 끝난 5월 16일까지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의 전차 완전손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 3기갑사단 : 1호전차 10대, 2호전차 6대, 3호전차 2대, 4호전차 1대, 지휘전차 1대
제 4기갑사단 : 1호전차 15대, 2호전차 5대, 3호전차 4대, 4호전차 5대

두개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인 16일 까지 두 기갑사단을 합쳐서 49대의 전차를 잃은 것 입니다. 게다가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 이기때문에 12~13일의 아뉘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당연히 더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투 피해를 집계할 때 언제나 혼동되는 것 이지만 완전손실과 수리가능한 손실을 혼동할 경우에는 뭔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위키에서 사용한 "lost over 160"은 약간 무리가 있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군요.

2007년 3월 4일 일요일

독일과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전투 : 독일 16차량화군단과 프랑스 기병군단의 교전사례

1940년 프랑스 전역은 6주만에 독일의 전무후무한 대승리로 끝났고 유럽 최고의 육군국이라고 자부하던 프랑스는 힘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연합군의 주력은 아르덴느 삼림지대 북쪽으로 투입된 반면 독일군의 주공은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집중됐기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 양군 모두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급 이상의 기갑전투는 별로 치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군단급 기갑부대가 역시독일군의 군단급 기갑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한 사례가 한 건 있긴 합니다. 바로 1940년 5월 12일부터 14일 까지 회프너가 지휘하는 독일 제 16차량화군단(XVI. Armeekorps(mot.)) 소속의 제 3, 4기갑사단이 프랑스 육군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 지휘관 René Prioux 중장) 소속의 제 2, 3경기계화사단(DLM, Divisions légères mécaniques)과 벌인 전투입니다.
이 외에 독일 제 5, 7기갑사단이 프랑스군 제 1기갑사단과 격돌한 Flavion 전투도 있는데 프랑스군이 1개 사단이므로 군단급 기갑전투라고 하긴 좀 그렇습니다.
이 전투는 1940년 여름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거의 유일한 군단급 기갑전투이기 때문에 독일군과 프랑스군 기동부대의 실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1. 양 측의 전력

이 전투에 투입된 양측의 기갑전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군 제 16 차량화군단

제 3기갑사단(Horst Stumpff 소장) : 1호전차 117대, 2호전차 129대, 3호전차 42대, 4호전차 26대, 지휘전차 27대
제 4기갑사단(Johann Joachim Stever 중장) : 1호전차 135대, 2호전차 105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0대
-> Jeffrey A. Gunsburg의 Battle of the Belgian Plain에는 제 4기갑사단이 1호전차 141대, 2호전차 111대, 3호전차 40대, 4호전차 24대, 지휘전차 15대를 보유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프랑스군 기병군단

제 2경기계화사단(Gabriel Bougrain 준장) : S35 87대, H35 및 H39 87대, AMZ-ZT 63대
제 3경기계화사단(Langlois 소장) : S35 87대, H35 및 H39 150대
-> Karl-Heinz Frieser의 Blitzkrieg-Legende 302쪽 에는 이 전투에 프랑스군이 176대의 S35와 239대의 H계열 전차를 투입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전차의 구성을 보면 독일측은 중형전차 64~68대를 보유한 반면 프랑스는 S35만 87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H35나 H39는 모두 37mm 전차포를 탑재하고 있으며 보병지원 용도에 걸맞게 45mm의 정면장갑을 가진 반면 독일 기갑사단의 주력인 1호, 2호는 기껏해야 20mm 미만의 기관포/기관총을 장비했으며 방어력도 소화기나 겨우 막는 수준에 지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 프랑스군은 사단 마다 독일군의 경전차보다 화력이 우세한 P-178 장갑차를 45대씩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3, 4기갑사단은 각각 56대의 정찰용 장갑차를 장비했지만 독일군이 장비한 장갑차들은 모두 20mm 기관포 이상은 장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전차 전력은 독일측이 37mm 대전차포와 47mm 대전차포를, 프랑스군이 25mm 대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어 독일측이 조금 우세하다고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포병의 경우는 독일군 기갑사단의 사단 포병이 최하 105mm급을 장비한 대 반해 프랑스군은 75mm 포를 장비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합니다.

2. 황색작전 개시와 독일 16차량화군단의 벨기에 국경 돌파

“황색작전”의 1939년 10월 29일 계획안에서 독일 제 6군의 공격 축선에는 5개 기갑사단이 투입될 계획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아르덴느가 주공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이 축선에는 제 3, 4기갑사단만 투입되는 것으로 변경됐습니다. 독일 제 16차량화군단의 2개 기갑사단은 제 6군의 중핵으로 주공 부대가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돌파하는 동안 연합군 주력을 고착, 견제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독일 제 6군은 2개 기갑사단으로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의 기갑부대 주력을 상대해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회프너의 임무는 Gembloux를 점령하고 연합군 주력을 견제하는 것 이었습니다. 만약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회프너의 군단을 격파한다면 프랑스 제 1군은 병력을 차출해 아르덴느 삼림지대로 돌파하는 독일군을 저지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황색작전 발동과 함께 독일군은 에반 에말(Eben Emael) 요새를 점령하고 알베르 운하를 돌파해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이 교두보를 통해 공격을 개시할 독일군의 선봉은 제 4기갑사단 이었습니다. 독일측의 계획에 따르면 벨기에 영내에 진입하기 전 까지는 4기갑사단이 선봉에 서고 3기갑사단은 4기갑사단을 후속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4기갑사단은 네덜란드 국경을 돌파한 뒤 신속히 벨기에 영내로 진입할 계획이었으나 네덜란드군이 주요 기동로의 교량을 폭파하면서 후퇴했기 때문에 10일 저녁까지 네덜란드 영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이 벨기에로 진입한 것은 5월 11일 오전이었습니다. 벨기에 영내로 진입하면서 프랑스군 선발대와 교전해 경전차(?) 1대가 격파되긴 했지만 이날 오전 동안 산발적인 연합군의 공습을 제외하면 진격은 순조로운 편 이었습니다.
오후 12시15분에 제 4기갑사단을 제 16차량화군단에 배속시킨다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후 회프너는 계획대로 이 제 3, 4의 두개 기갑사단을 Gembloux를 향해 진격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후 4시30분 경에 서쪽으로 퇴각는 벨기에군 병력이 포착돼 제 6군 사령부는 제 4기갑사단에 일부 병력을 차출해 벨기에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병력이 벨기에군의 퇴각을 저지하는데 투입됐고 오후 늦게야 원래 계획대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결국 제 16군단이 진격을 재개할 수 있게 된 것은 11일 오후 5시45분이었습니다.

한편, 제 4기갑사단을 후속하는 제 3기갑사단의 진격도 매우 느려서 3기갑사단이 뮤즈(Meuse)강을 도하한 것은 원래 작전계획보다 5시간 30분 늦은 11일 오후 6시 30분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진격이 늦어졌기 때문에 제 4기갑사단의 우익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제 4기갑사단의 비전투 직할대는 여전히 Maas 동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상급 사령부의 명령 변경과 제 3기갑사단의 늦은 진격 때문에 이날 밤 9시가 돼서야 제 4기갑사단에 12일의 작전지시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이 12일에 확보해야 할 목표는 Hannut였습니다. 11일 저녁, 12일의 사단 주력의 공격에 앞서 사단 기갑수색대대(제 7기갑수색대대)가 Hannut 동쪽 5km인 Geer-Tal 까지 진출해 위력 수색을 실시하고 포로 수 백명을 생포했습니다.

3. 프랑스 기병군단의 대응과 양군의 조우

한편, 프랑스 기병군단은 먼저 선발대인 제 2경기계화사단을 5월 10일 오전 4시 30분에 벨기에 영내로 투입했고 그 뒤를 이어 제 3경기계화사단을 투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이 겨우 벨기에 영내로 진입한 11일 오전에 이미 Gembloux 지구에 도착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장 Prioux는 프랑스 제1군 사령부에 독일군이 알베르 운하와 뮤즈강을 돌파하기 전에 이 선에서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으나 벨기에군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져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Gembloux 지구에 전개해 방어준비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벨기에군은 이 지역에 방어시설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한편, 10일과 11일에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독일군은 12일 오전 5시 30분 경 Gembloux 북동쪽 30km 지점인 Hannut 근교에 도달했습니다. Hannut는 독일 제 16군단의 1차 목표였고 회프너는 예하의 2개 기갑사단에게 Hannut를 확보한 뒤 여기서 다시 공격을 재개, Gembloux 방향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은 오전 8시 20분경 Hannut 외곽에 진입해 프랑스군의 정찰대와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장 슈테버(Johann Joachim Stever) 중장은 프랑스군의 기계화 부대가 투입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접촉한 부대가 제 1경기계화사단이라고 오인 했으며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에 걸친 진격으로 연료가 부족해 일단 Hannut 서쪽에 대한 공격은 잠시 보류해야 했습니다. 연료는 12일 오후에야 낙하산으로 보급됐다고 합니다.
이날 첫 번째 전차전은 제 35기갑연대 5중대가 Hannut 서쪽에서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 제 11용기병연대 1대대 소속의 H-35/39 전차와 교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5중대 소속의 3호전차들이 프랑스 11용기병연대의 전차 7대(독일측은 11대 격파를 주장)를 격파하고 프랑스군을 퇴각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이 교전에서 전차 5대가 피격되고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흥미로운 점은 프랑스 전차들의 고질적인 약점인 시야 불량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 입니다. 독일측의 보고에 따르면 프랑스 군은 독일 전차들이 100~150m 이내로 접근 할 때 까지도 독일 전차를 발견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한편, 전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독일 6군 사령부는 회프너에게 “적이 전면 퇴각”하고 있으니 신속히 추격해 Gembloux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 시각 독일 4기갑사단은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주력과 조우, 본격적인 교전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회프너는 오전 9시 20분에 제 4기갑사단에 Hannut-Braives를 잇는 선을 확보하고 남서쪽 방향으로 위력수색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슈테버 중장은 오전 8시경 공격을 재개, Hannut 남서쪽의 Crehen을 공격했습니다. Crehen은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 소속의 제 5경기계화여단(5e Brigade Légère Mécanique) 2 흉갑기병연대(2e Régiment de Cuirassiers)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오전의 전투로 11~12대의 전차를 잃고 11시 무렵 Merdorp에서 퇴각했습니다. 프랑스 기병군단은 제 5경기계화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후 3시경 제 2경기계화사단의 1개 전차중대를 투입해 Merdorp를 탈환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오후에 여세를 몰아 Crehen을 공격했지만 보병의 지원 없이 시가지로 진입했다가 S-35 4대를 잃고 다시 Merdorp 방향으로 퇴각합니다.

독일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나타난 것은 완전편제의 2개 경기계화사단 이었기 때문에 슈테버 중장은 4기갑사단 만으로 공격을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10일부터 진격이 지지부진했던 제 3기갑사단이 Hannut 지구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후 8시가 되어서 였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독일 제6군 사령부는 항공정찰을 통해 Gembloux 지구에 프랑스군 차량화 보병사단들이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회프너에게 신속히 프랑스 기병군단을 분쇄한 뒤 프랑스군이 Gembloux 지구의 방어를 굳히기 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12일 독일 제 6군의 상황은 회프너의 제 16차량화군단이 Hannut 지구에서 프랑스군 기동부대와 교전하는 동안 보병으로 편성된 4군단소속의 18보병사단이 이 16군단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오고있었고 27군단은 여전히 벨기에군 소탕 때문에 리에쥬(Liege) 북쪽에 묶여있었습니다. 즉 제 16차량화군단의 좌익인 남쪽 측면은 뻥 뚫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2일 오후 8시, 슈테버는 제 4기갑사단의 정면에 프랑스군의 2개 경기계화사단이 나타났다고 보고했고 회프너는 13일 오전을 기해 제 3기갑사단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날 저녁 양군은 다음날 전투를 위해 Hannut 부근의 촌락들을 둘러싸고 소규모 교전을 계속했습니다. 독일측은 에버바흐 중령의 지휘하에 대대급 전투단을 편성해 Hannut 서쪽의 Thisnes를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에버바흐가 탄 지휘전차가 격파됐지만 결국 프랑스군은 Thisnes를 빼앗기고 퇴각했습니다. 12일 야간과 13일 새벽에 걸쳐 독일군 보병은 오전에 있을 전차부대의 공격을 위해 Hannut 서쪽의 마을들을 공격해 상당수를 확보하는데 성공합니다.
한편, 프랑스군도 12-13일 야간에 독일군의 전차부대가 집결한 곳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교란 사격을 산발적으로 퍼부었고 이로 인해 독일군은 차량 몇 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4. 독일 3기갑사단의 도착과 13일 전투, 프랑스 기병군단의 퇴각

13일 전투는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13일 새벽 5시30분에 30대의 S-35 전차를 투입해 Crehen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지만 독일군은 대전차포를 주요 거점에 매복시켜 프랑스군의 전차대를 저지합니다. 프랑스군은 보전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옥을 거점으로 배치된 독일군의 대전차포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5월 13일 오전, 마침내 독일 제 4군단 소속의 제 18보병사단이 도착해 제 16차량화군단의 우익에 전개하기 시작했고 제 16차량화군단 소속의 2개 기갑사단도 계획에 따라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회프너의 계획은 13일 저녁까지 제 3기갑사단은 Gembloux 동쪽 10km 지점인 Thorenbais, 제 4기갑사단은 Thorenbais 남쪽의 Perwez을 점령하는 것 이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의 5, 6기갑연대는 오전 11시 30분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제 3기갑사단을 상대하는 프랑스군의 제 6경기계화여단 소속 제 11차량화용기병연대(11e Régiment de Dragons Portés)는 이미 북쪽의 독일 18보병사단과 교전하고 있는데다가 우세한 독일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자 크게 고전했습니다. 제 6경기계화여단장 Loges 대령은 배속받은 제 1흉갑기병연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대전차포에 걸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결국 11용기병연대는 오후 2시경에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잘 버티다가 탄약이 거의 떨어지자 후퇴하게 됩니다.

제 3기갑사단 좌익(남쪽)의 4기갑사단은 사단의 좌익에 “뤼트비츠 전투단(Gefechtsgruppe Lüttwitz, 사단수색대대, 사단대전차대대 1중대, 9기관총대대(Maschinengewehr-Bataillon 9), 654 대전차대대(Panzerabwehr-Abteilung 654)로 편성됨)과 제 79기갑공병대대를 배치해 프랑스 제 2경기갑사단을 견제하도록 하고 사단 주력은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했습니다. 전력으로만 보면 뤼트비츠 전투단은 프랑스군 1개 사단을 막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프랑스 전차부대의 공격은 집중적이지 않은 중대 단위의 산발적 공격에 불과해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제 4기갑사단은 먼저 오전 11시 45분부터 15분간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뒤 보병을 투입해 촌락들을 제압하고 오후 1시가 돼서야 예비로 있던 2개 기갑연대를 투입했습니다. 서쪽으로 진격하던 35기갑연대는 Merdorp에서 프랑스군의 제 2흉갑기병연대 소속 전차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독일측에게는 다행히도 오전의 공격준비 사격으로 대전차포 진지 다수가 제압 된데다 프랑스군은 보병 매우 부족해 전차들이 보병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독일측은 보병을 투입해 프랑스군 전차들을 격퇴했습니다. Merdorp를 방어하던 프랑스군은 S-35 3대와 6대의 H-35/39를 잃고 후퇴했습니다. 독일측의 주장에 따르면 제 4기갑사단은 Merdorp에서 프랑스군 400명을 생포하고 25mm 대전차포 4문과 전차 5대를 노획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마침내 독일 제 27군단 소속의 제 269보병사단이 제 4기갑사단의 좌익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제 2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의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하게 되자 제 4기갑사단을 상대하던 전차부대들을 돌려 제 269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결국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독일군 기갑부대의 주공을 그대로 얻어 맞게 돼 버립니다. 불과 12km밖에 안되는 지구에 독일군 2개 기갑사단의 전차가 집결해 공격을 개시하자 그 효과는 결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13일까지의 전투에서 총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었습니다. 독일 3기갑사단은 1호 전차 2대와 2호전차 1대를 잃는데 그쳤고 4기갑사단의 피해는 확실치 4기갑사단의 전차 손실은 확실치 않으나 병력 손실은 12일부터 13일 까지 전사 36명, 부상 104명, 행방불명 13명 이었습니다. 이날의 전투 결과는 독일군의 승리였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 사단은 독일군 3개 사단(제 3, 제 4기갑사단, 제 18보병사단)에 압도돼 큰 손실을 입고 밀려났으며 프랑스 제 2경기계화 사단은 불과 3개 대대급에 불과한 4기갑사단의 좌익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해 제 3경기계화군단 방어선이 뚫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비록 프랑스군 기병군단의 임무는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 것 이었지만 원래 계획은 15일 까지, 그리고 변경된 계획에서도 14일 까지는 버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명백히 프랑스군의 패배라고 하겠습니다.

프랑스 제 3경기계화사단은 예비대를 모두 투입한 상태에서 피해가 가중되자 오후 3시30분 경 군단사령부에 철수허가를 요청합니다. 군단장 Prioux 중장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즉시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먼저 오후 4시부터 제 3경기계화사단이 교전을 중단하고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5시부터 우익의 제 2경기계화사단도 후퇴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이날 저녁 8시 경 Beauvechain-Perwez를 잇는 선 까지 퇴각해 방어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회프너는 프랑스 기병군단이 전면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확인한 뒤 제 3, 제 4기갑사단에 추격을 명령합니다.

5. 5월 14일 전투와 프랑스 제 1군 주력과의 교전

13일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군단에 큰 피해를 입힌 독일군은 14일 오전 5시 공격을 재개합니다. 제 4기갑사단은 계속해서 원래 목표인 Gembloux 방향으로 전진했습니다. 슈테버는 36 기갑연대를 선두에 세우고 35 기갑연대가 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무렵 숲속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의 공격으로 전진이 지연됐으며 슈테버는 다시 보병을 투입해 숲에 매복한 프랑스 전차들을 격퇴해야 했습니다.
한편, 3기갑사단은 5기갑연대로 사단 우익(북쪽)을 방어하도록 하고 6기갑연대만 서쪽으로 전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프랑스군 기계화부대가 출현했다는 잘못된 정보로 공격이 지연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3기갑사단은 프랑스 제 4군단의 모로코 보병사단이 방어하는 Gembloux 북쪽의 Ernage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2일부터 14일 까지 전개된 전투로 프랑스 기병군단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제 3경기계화사단만 보유 전차 중 30대의 S-35와 75대의 H-35/39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측은 독일군의 손실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독일군의 전차 손실 중 완전 손실은 20대 가량에 불과했고 전체 피해는 5월 14일 기준으로 수리가능 한 피해와 고장을 합쳐 160대 정도였습니다.
독일군의 두 기갑사단은 5월 16일까지 49대의 전차를 "완전손실"로 잃었다고 하며 이 피해의 상당수가 5월 15일부터 16일까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Hannut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더 적다고 봐야 할 것 입니다. 프랑스 기계화 부대는 객관적으로는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더 큰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제 1군의 주력인 보병군단들이 Gembloux 지구에 증원돼 전체적으로는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증원된 부대는 3군단 소속의 제 2북아프리카보병사단(Divisions d’infanterie nord-africaine)과 제 1차량화보병사단(Division d’infanterie motorisee)과 4군단 소속의 모로코 보병사단 및 제 15차량화보병사단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은 저녁부터 4개 보병사단과 지원 전차부대를 투입해 독일 제 16군단에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회프너는 오후 늦게 까지 큰 피해 없이 진격이 계속되다가 새로운 프랑스군 부대가 출현해 맹렬히 반격을 개시하자 크게 놀랐습니다.

14일 저녁까지 회프너의 2개 기갑사단은 마침내 목표지점인 Gembloux 외곽에 도달했으며 프랑스군 4개 보병사단과 상대하게 됐습니다. 회프너는 14일 오후 동안 공격을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보병사단들이 도착할 때 까지 기다릴 것인지 고민하다가 다음날 공격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3일에 걸친 대규모 전차전은 독일측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기술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우세한 것이 확실했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제 3경기계화사단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 전차들을 중대 단위로 분산 배치했고 제 2경기계화사단 역시 중대별로 산발적인 공격만 거듭해 성과를 거두지 못 했습니다.
독일측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이유가 독일군이 연대단위로 작전하는데 비해 프랑스군은 대대 이하 단위로 작전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독일측은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급 이상의 S-35 전차를 집중 운용했다면 상대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소형 포탑에 시계가 불량하고 무전기가 부족한 프랑스 전차들은 무전기를 장비하고 각급 지휘관들의 일사분란한 지시에 따라 단위부대로 전투를 벌이는 독일군의 전차들에게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전차는 수치상으로는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전차 역시 사람이 타는 물건입니다. 프랑스 전차에 탑재된 47mm포는 1940년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 쓸만한 물건이었지만 이 전차포가 탑재되는 포탑은 시야가 불량하고 전차장 한명이 지휘부터 사격까지 겸하는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측의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였습니다. 프랑스군은 기병군단의 임무를 주력 부대가 방어선에 전개할 때 까지 독일군을 저지하는 소극적인 것에 한정했고 이 때문에 11-12일에 전체적으로 프랑스군이 우세한 상황에서 방어로 일관했습니다.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제 2경기계화사단은 제 3경기계화사단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군은 공세적으로 과감하게 작전한 결과 전투 초반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지요.

1941년 여름, 역시 숫적으로 우세했던 소련 전차부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와해돼 버리는데 소련군 역시 프랑스군 기갑부대와 유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서적

Karl-Heinz Frieser, Blitzkrieg-Legende(Oldenbourg, 1995)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the Belgian Plain",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56, April 1992
Jeffrey A. Gunsburg, "The Battle of Gembloux", The Jounal of Military History 64, Jan 2000
Thomas Jentz, Panzer Truppen vol.1(Schiffer, 1996)
Ernest R. May, Strange Victory(Hill and Wang, 2000)
Joachim Neumann, Die 4. Panzer-Division 1938-1943 : Bericht und Betrachtung zu zwei Blitzfeldzügen und zwei Jahren Krieg in Russland(Selbstverlag, 1985)

2006년 12월 30일 토요일

[번역글]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삼탕!)


재탕을 거친 삼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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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99년 2호에 실린 Alexander Statiev의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미운 오리새끼 - 루마니아 기갑 부대의 발전 1919-1941  

루마니아 육군 총사령부는 연합군이 1차 대전에서 거둔 성과를 분석한 뒤 기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는 1919년에 72대의 르노 FT-17 전차를 수입해서 1개 기갑대대와 기갑학교를 창설했다. 2년 뒤에 기갑대대는 약간의 전투 지원 부대를 배속받아 기갑 연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힘찬 출발은 곧 정체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35년에도 루마니아군의 기갑전력은 여전히 72대의 르노 전차였고 이제는 형편없는 구식으로 전락한데다 대부분 고장으로 가동 불능 상태였다. 전차에 대한 교리 역시 전차 만큼이나 발전하지 못했다.
양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루마니아의 국방 정책은 매우 보수적 이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의 전략적, 경제적 측면을 분석해 보면 단지 보수적인 정책만이 루마니아의 기갑 전력을 낙후 시킨 요소는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루마니아 내각은 국방비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기갑전력은 이러한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 대 본영은 국방예산 문제로 압박을 받아서 새로운 기갑 장비를 도입 할 수가 없었다. 기갑 사단 한 개를 편성하는데는 보병사단 15개에 해당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기갑전력은 매우 사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루마니아 군 수뇌부는 무리하게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느니 제한된 예산을 차라리 보병과 포병화기의 표준화와 근대화에 쏟아 넣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이 루마니아군 전체에 일반적 이었다.
또한 루마니아의 낙후된 공업 또한 기갑 전력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이었다. 1937년에 루마니아의 군사 이론가인 라두 다비데스쿠(Radu Davidescu)는 기갑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1. 수입은 비용이 많이 든다 2. 기술발전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외국에서 최신 전차의 시제품을 도입하더라도 그것이 인도될 무렵에는 구식화 될 것이다 3. 기갑 장비는 지속적으로 부품 지원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장비 교체가 필요하고 4. 전쟁이 시작되면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다비데스쿠는 문제 제기만 했을 뿐 해결책은 내 놓지 못 했다. 루마니아는 전차 공업을 일으킬 시설과 이에 수반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루마니아 육군은 기계화에 있어서 전차 보다는 차량 획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2차 대전 발발 이전에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은 일일 트럭 생산량 6~10대에 불과한 공장 한곳 뿐이었으며 이것 조차 수입 부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차 생산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전쟁이전에 루마니아가 이룬 가장 큰 발전은 프랑스로부터 면허를 얻어 126대의 무한궤도식 수송 차량을 생산하고 부분적으로 국산화에 성공한 것 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기간동안 루마니아는 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용 엔진은커녕 전차용 장갑판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 했다. 사실 루마니아 군 수뇌부 역시 첨단 무기의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오직 수입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1934년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기갑전력이 낙후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의 산업 발전은 이를 따라가지 못 하는 점에 위기를 느꼈으며 루마니아의 기갑전력은 “낙후와 되고 (현대전에) 불 충분하며 (주변국에) 압도당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갑전력의 근대화는 소총이나 야포에 비해 훨씬 복잡한 것 이었다. 그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수입에 의존해서라도 전차를 수입하느냐 아니면 자국의 수준으로 감당 가능한 재래식 전력에 의존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는데 당연히도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루마니아군의 뒤떨어진 군사 사상 역시 기갑전력의 현대화를 가로 막았다. 전차는 공격용 무기였지만 전쟁 이전의 루마니아군 교리는 거의 방어적 이었다. 참모본부의 전쟁 계획중 공세를 가정하고 세워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교리는 “적을 준비된 종심깊은 방어선에서 고착시켜 전력을 고갈 시킨 뒤 단계적인 반격으로 격퇴하는”것 이었다. 이 때문에 전차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기갑부대 인력들은 다른 병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교관과 프랑스 교리에 의해 교육 받았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그들의 프랑스인 교관들 처럼 전차를 전략적 공세에 필요한 무기가 아니라 전술적인 제한적 반격에 필요한 무기라고 인식했다. 루마니아군의 교범은 “보병 운영의 성공이 작전의 성공을 보장하며” “전차의 기본적인 임무는 보병의 지원이다”라고 못 박았다. 또한 전차의 공격 종심은 포병의 지원 사격이 가능한 범위에 한정되었다. 즉 수 km에 불과했다. 전차는 “이동 포대로서 …. 적의 거점 파괴”를 통해 보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는데 이것은 독일이나 소련의 교리와는 정 반대의 것 이었다. 
루마니아의 교범은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루마니아군의 전차 교범은 단지 보병 지원을 위한 중대, 대대규모의 운용만을 명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독립된 기갑 부대 또한 없었다. 기갑 연대는 창설 초기에 보병 기술감 예하 소속이었으며 나중에 포병감 예하 부대로 배속 변경 되었다. 그리고 연대 예하의 기갑 중대들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기갑 중대들은 전술적으로 보병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영국의 전차 운용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독일이나 소련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1930년대의 급속한 기갑 교리 발전은 루마니아군 내부에서 소수의 기갑 장교가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주장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30년에 라두 디눌레스쿠(Radu Dinulescu)소령은 미래의 전쟁은 근접 항공 지원 및 수많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지원을 받는 완전 궤도화 된 운송차량에 탑승한 보병과 포병으로 이뤄진 군대간의 전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체계화된 교리로 발전하지 못 했다. 기갑 교리는 육군의 전반적인 교리에 따랐으며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루마니아 기갑부대는 나머지 지상 병과의 교리에 전술을 맞춰야 했다. 
사실상 루마니아의 환경에서 다른 기갑교리란 불가능 한 것 이었다. 다른 열강들의 진보된 기갑 교리는 그 국가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큰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 기갑 사단은 종심 깊은 돌파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 이었다. 이 개념은 공격자가 방어군의 후퇴 속도 이상으로 돌파와 추격의 템포를 유지해서 적을 섬멸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작전은 오직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여러 개 동원해야만 가능한 것 이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전차의 대량 손실은 신규 생산과 수리를 통해 보충할 수 있어야 했다. 또한 다른 병과 역시 신속히 돌파를 선도하는 기갑부대를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차량화 되어야 했으며 여기에 대한 보급 지원을 계속 할 수 있어야 했다. 루마니아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어느 하나 이러한 전제를 충족 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마니아 군 장교들은 보수주의자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육군의 기갑 교리는 매우 뒤떨어진 것 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루마니아의 전략적, 군사적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창의력의 부족은 그나마 있는 교리 체계 내에서 조차 많은 전술적 결함을 가져왔다. 루마니아의 기갑 교리는 매우 융통성이 없었으며 사실 루마니아 군 내에서는 실전을 치루리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전차 운용은 대부분 기동에 양호한 지형에서의 제한적인 정면 공격에 초점이 맞춰졌다. 루마니아군 내의 기갑 이론가들은 조우전이나 시가전, 삼림지대나 기동이 곤란한 지형, 또는 후퇴전이나 방어전에서 전차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다른 병과와의 긴밀한 협동이 강조되었지만 실제 기동훈련은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루마니아군의 교범에는 전차와 항공기의 합동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1935년부터 국방 예산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총사령부는 기갑 병과에 대한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첫 단계로 총사령부는 구식화 된 전차부터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루마니아군의 교리에 맞는 외국제 전차의 시제품들이 검토되었다. 1930년대에는 아직 세계 각국이 경전차를 중시하고 있었으며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경전차만을 고려대상에 넣었다. 루마니아군은 126대의 체코제 LT-35와 200대의 프랑스제 르노 R-35를 주문했다. 루마니아군내의 기갑 전문가들은 스코다의 모델이 당시 획득 가능한 경전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며 스코다 측은 LT-35가 보병 지원용으로 만들어 졌다고 광고했다. (이 물건의 설계로 미뤄 볼 때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주장이었지만.) 반면 프랑스제의 R-35는 당시 기준으로 훌륭한 방어력을 가졌으며 보병 지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차였다. 그런데 루마니아의 도로 사정은 매우 형편 없어서 심지어 이런 경전차들 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재정 부족으로 도로 개선 사업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총사령부는 체코의 CKD로부터 417대의 AH IV tankette을 수입했는데 이 물건은 너무나 무장이 빈약하고 방어력이 약해서 보병 지원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tankette은 루마니아의 빈약한 도로망에서도 충분히 운용 가능했으며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이것이 자국 군대의 교리에 맞건 안맞건 상관없이 전체 기갑 전력의 56%를 tankette으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군에게는 다행히도 CKD는 계약한 대수를 다 채우지 못했고 단지 35대의 tankette만 인도되었다. 그리고 스코다에서 발주한 LT-35 경전차는 모두 무사히 인도되었다. 결국 tankette들은 기병 여단들에 정찰용으로 분산 배치 되었는데 사실 이게 더 적합한 임무였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서 1940년까지 40대의 R-35만이 인도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 기갑부대의 재편을 가속화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에 큰 인상을 받고 루마니아군이 보유한 모든 전차를 단일 부대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쓰러뜨린 지 3주 뒤인 1939년 10월 24일에 차량-기계화 여단이 편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즉흥적인 반응은 결코 루마니아군 수뇌부가 전차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루마니아 군내의 장기간의 발전 정체는 군 내부에 일관된 전차전 교리를 연구할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게 했다. 차량-기계화 여단은 2개 기갑대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로 편성되었는데 각 기갑대대는 따로따로 차량화 보병연대에 부속되었다. 여전히 전차의 역할은 보병지원에 머물렀다. 이 여단의 간부들은 나중에 부대의 편제와 뒤떨어진 운용 사상이 차량-기계화 여단의 전술적 운용 범위를 축소 시켰다고 인정했다. 
1940년 10월에 독일 군사 사절단(Deutsche Heeresmission, 이하 DHM)이 루마니아에 파견되었다. 독일 사절단은 1941년 2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루마니아군의 훈련을 맡았는데 다른 병과 보다 기갑병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루마니아군의 전략은 여전히 방어적이었지만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 교리가 도입되었다. 이로서 기갑부대 운용 방식도 제한적인 보병 지원에서 독립적인 전술적 종심 타격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추축국에 가담 함으로서 루마니아군은 비록 제한적 이기는 하지만 독일제 전차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원수는 독일 군사사절단에게 훈련을 마치는 대로 독일제 군사 장비를 판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실현 되었는데 독일 제 13 기갑사단과 제 16 기갑사단이 루마니아에 도착했을 때 전차 일부를 루마니아군에 매각했다. 이로서 루마니아군은 종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춘 두개의 독립 기갑 부대를 창설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동을 강조하는 풍토 속에서 훈련된 부대 – 독일군이나 독일식 교리로 훈련되고 차량화 된 루마니아 보병 사단 – 를 루마니아군 지휘하에 넣게 된다면 최소한 루마니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상당 하는 기계화 부대를 가질 수 있을 것 이었다.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리가 바뀌자 차량-기계화 여단의 입지가 자동적으로 강화되었다. 독일 기갑사단들의 연전 연승은 루마니아군 내의 전차 옹호론자들이 군 개혁을 부르짖게 했다. 여단의 일지는 여단 참모들이 “독일군의 기동전 교리에 맞출 수 있도록 부대 편제를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고 적었다. 여단은 곧 체코와 프랑스로부터 추가로 전차를 공급받고 독일이 폴란드에서 노획한 R-35까지 인도 받아서 1941년 1월에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다시 2월에는 제 1 기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이제 전차 부대는 보병으로부터 독립해서 독립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126대의 LT-35를 보유한 1개 연대와 75대의 R-35를 보유한 1개 연대, 그리고 2개 차량화 보병 연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대전차, 중대와 대공포 중대, 공병 중대와 통신 중대, 기갑 수색대로 편성된 혼성 지원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 사단만이 루마니아군 내에서 완전히 차량화 된 부대였다. 
그러나 많은 내부적 요인이 이 사단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없게 했다. 일부 요인은 장비에 있었지만 나머지 요인은 장기간의 발전 정체의 영향이었다. 장비의 문제는 만성적인 수량 부족과 장비의 수준에 있었다. 루마니아가 장비들을 주문할 당시에는 모두 최신 장비들 이었지만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1941년 무렵에는 모두 구식화 되어 있었다. 전차들은 구경도 작고 포구 초속도 느린 대포를 달았으며 LT-35는 너무나 방어력이 형편없었고 R-35는 너무 느려 보병 지원에도 써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루마니아군은 전차의 수준 면에서 절망적으로 형편 없지는 않았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차가 독일의 3호나 4호 전차만은 못 했지만 1940년 말 까지도 독일군 전차의 60%는 1호와 2호, 그리고 체코제 모델이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개전 당시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 13대중 1대 만이 신형 전차로 나머지는 루마니아군의 전차와 비슷하거나 더 못한 물건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루마니군의 기갑전력의 규모와 손실을 대체할 능력의 부족이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총 22,600대의 전차를 가진 소련에 대해 3,6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독일측에 전차 제공을 원했지만 이것은 불가능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상급 대장은 “독일군의 장비를 루마니아에는 양도할 수 없습니다. 생산되는 장비들은 우리 군대를 장비하기도 벅찹니다. 물론 우리가 노획한 적 장비들을 양도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태도는 전쟁 말기까지도 변함 없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위해서 체코나 프랑스의 공장에서 생산한 장비를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원래 의도한 수준에 도달 할 수 없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서류상의 편제인 2개 기갑연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 대신에 각 2개 대대로 편성된 1개 차량화 보병연대와 역시 각 2개 대대로 편성되고 모두 LT-35로 장비된 1개 기갑연대만으로 편성되었다. R-35는 너무느려서 제 2 기갑연대는 제 4 야전군 직할대로 변경되었다. 또한 제 1 기갑사단은 지원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래에 나온 것 처럼 사단의 이론상의 편성과 실제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구상한 기계화 사단 
사단 사령부
기갑여단
-차량화연대 : 기관총 대대×1, 경전차 대대×1
-기갑연대 : 경전차 대대× 1, 중형 전차 대대×2
차량화여단
-차량화 연대 : 오토바이 보병 대대×1, 차량화 대대×1
-차량화 보병 연대 : 차량화 대대×3
포병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공병대대
-통신 중대
-대전차포 대
-사단 항공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서류상)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제 2 기갑연대 : R-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2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대공포 중대
-통신 중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실제 편성, 개전당시)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공병 대대
-통신 중대

독소전 발발 당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가동전차 109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사단이라는 것은 이름 뿐이고 실제 전력은 기갑여단이나 기갑연대 전투단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사단은 명예로운 “사단” 칭호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종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단지 전차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술적인 능력도 부족했다.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지적했듯이 전차의 종심 타격은 오직 타 병과의 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루마니아군에는 제대로 된 차량화 보병 부대가 없었다. 차량 부족으로 인해서 루마니아군은 소수의 부대를 차량화 시켜서 나머지 사단들을 마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차량을 분산시켜서 모든 사단들을 일부나마 차량화 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결국 트럭은 사단 수송대와 중포를 견인하는데 쓰였으며 보병들은 여전히 자신의 두 다리에 의존해야 했다. 한줌 밖에 안되는 루마니아의 기갑 부대는 보병 부대들의 행군 속도에 묶여 버렸다.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던 소련군은 이 문제를 전차 부대와 기병부대를 혼성 편성하는 것으로 부분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45년 까지도 소련군이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용한 것을 보면 소련군 수뇌부는 이러한 해결 방식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루마니아군은 동부전선에 기병여단 6개를 투입했다. 이중 3개 여단은 각각 1개 차량화 보병연대를 배속받고 있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쟁 이전 교리에서 기병과 기계화 부대간의 합동 작전이 강조되긴 했지만 루마니아군 수뇌부는 이것을 기병부대에 소수의 전차대를 배속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고 대규모의 기병-기계화 집단을 편성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병-기계화 집단은 루마니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종심 작전 전력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대규모 공세, 특히 기갑부대 운용은 루마니아 군의 보급 능력 때문에 큰 제약을 받았다. 루마니아군의 보급은 철도와 징발한 민간차량,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차에 의존했다. 독일군은 바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도 루마니아군 총 참모부에 루마니아군의 역할이 전략적 공세가 아닌 방어적인 범주에서 제한된 규모의 공세를 수행하는 것 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루마니아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장애로 작용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측에 독일의 작전 계획을 알리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루마니아는 방어 작전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국내의 교통망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동전을 수행하려면 보급 수단의 질적 향상뿐 아니라 전반적이 체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했다. 공세 작전에는 차량화 수송대가 군수의 중추역할을 해야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차량화 된 야전군에 총 11,000대의 차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수량마저 채울 수 없었다. 이 시기 독일군의 보병사단은 평균 447대의 트럭을 보유했지만 루마니아 제 4 군 소속의 보병사단들은 평균 30대에 불과했다. 
개다가 트럭의 종류가 다양해서 트럭 자체의 보급만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결국 보급은 여전히 징발한 민간 마차와 군용 마차에 의존해야 했다. 농부들이 징발에 저항해서 좋은 말은 숨겼기 때문에 군대는 가장 약해 빠진 말만 얻을 수 있었다. 독일측의 사절단이 관찰한 결과 루마니아군의 보급 마차는 한 대당 겨우 탄약 상자 두개만 싣고 있었다.(더 실으면 말이 마차를 끌 수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마차 수송대는 규모만 클뿐 비 효율적이었다. 루마니아군이 참전할 당시 그 군대는 이동 정비소가 없었으며 운송수단들은 순식간에 고장으로 퍼졌다. 게다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은 기동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되는 보급 능력을 기동전에는 별 쓸모 없는 철조망 같은 것을 수송하는데 사용했다. 심지어 가구를 나르는데 트럭을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측은 수송이야 말로 루마니아군의 가장 큰 고충이라고 판단했다. 루마니아 제 3 야전군 사령부는 수송능력의 한계는 국경에서 50km까지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기갑부대의 작전 반경 제한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대의 형편없는 훈련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장비와 예산부족이 원인이었다.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전차를 기동훈련에 내보내는 것을 꺼려했는데 훈련을 하다가 고장이 나 버리면 실전에 투입할 수 없고 교체할 차량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비와 예산 부족 때문에 훈련은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독일군이 장비하나 없이 훈련만 잘 했다는 점으로 볼 때 루마니아군은 장비 문제가 아니라 열의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과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기갑병과에 속한다는 것이 특별히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갑 장교들의 자질도 우수하지 못 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이나 루마니아 군 자체가 인정하듯이 독일인 교관들이 교육을 담당하기 전 까지 루마니아군 기갑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에 별 관심도 없었으며 스스로 기량을 연마하려는 열의도 부족한 상태였다. 
독일인 교관들은 독일에서 성공한 방식대로 루마니아군을 아래에서부터 뜯어고쳤다. 먼저 병사 개개인부터 교육을 시켜서 점차 단위 부대를 높여가며 훈련을 시켜 나중에 완전한 사단급 기동훈련을 하려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군 병사들의 기초적인 훈련 부족은 이 계획을 좌절 시켰다. 1941년 여름까지 기갑과 차량화 보병은 소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며 포병은 포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나 사단 참모들이 지적했듯이 공병과 수색대는 훈련일 수가 18일에 불과했고 통신대는 무전기가 부족해 훈련을 하지 못했다. 결국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실전에 투입될 때 까지도 사단차원의 제병협동 훈련을 해 보지 못 했다.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간부들의 질적 수준은 물론 숫적인 문제도 책임 지고 있었다. 기계화 부대의 장비는 복잡해서 운용 인력의 교육과 훈련이 중요했다. 전차 부대는 육군내에서 가장 현역의 비율이 높았다. – 전쟁이전에 각 기갑 연대 병력의 25.5%가 장교와 부사관 이었다. 같은 시기에 포병 연대의 경우는 13.8%만이 간부였다. 그러나 총 사령부는 전투손실을 보충할 보충 병력의 양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특히 루마니아가 농업국 이어서 기술 교육을 받은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전쟁이 터지고 첫 전투를 치르고 나서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 부대의 인력은 특수한 훈련이 필요하고 양성에 1년 정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손실을 보충할 인력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독일의 군사 고문들은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취약성을 고려해서 사단의 임무를 돌파 작전 보다는 “일반적인 차량화 보병사단으로서 쉬운 임무에 투입할 것”을 강조했다. 사단 사령부는 특히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했으며 사령부의 간부들은 보통 보병이나 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제 1 기갑사단은 훈련도 부족했으며 장비와 인력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독일 군사 고문단은 최소한 사단 병사들에게 “엘리트”의식을 심는데 성공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루마니아 장교단에 발전된 기갑 교리를 성공적으로 전수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남부전선에 투입된 유일한 독일의 동맹국의 기계화 부대였다. 초기에 이 사단은 독일 제 11 군에 배속되었다. 오뎃사 포위전이 있기 전 까지 사단은 별 다른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 부대와의 교전만을 벌였다. 게다가 운도 좋아서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전력과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에 관해 연구하는 서방측 작가들의 흔한 실수 중 하나는 루마니아군이 작전을 수행한 오뎃사 군관구(Одесский Военний Округ)에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집단이 존재했다고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뎃사 군관구-개전 직후에 남부 전선군(Южный Фронт)으로 개칭됨-에 있던 3개 기계화 군단 중 두개 군단은 남서 전선군(Юго-западый Фрони)으로 이동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제 2 기계화 군단은 주로 독일군 사단들과 교전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만이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투입되었으며 그 숫자도 기껏 탱크 10대 안팎의 소규모 집단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기껏해야 비슷한 수준의 소련군 기갑 부대를 상대했으며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상대였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은 겨우 60여대의 신형 전차만 보유했으며 나머지 전차들은 BT-5,7, T-26등의 구식 전차였다. 
첫 2주간의 작전에서 제 2 제대로 운용되던 사단은 키쉬네프(Kishnev) 서쪽에서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을 저지하고 있던 소련 제 95 소총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드네스뜨르(Днестр) 강으로 향하는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를 방어하던 소련 기병 부대를 뚫고 언덕이 많은 지역을 돌파해서 키쉬네프를 북쪽-소련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하여 점령했다. 루마니아 군사사가들은 이것을 1941년에 사단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단 사령부는 이성공을 신속하고 과감한 기동에 의한 것 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기갑 사단의 장교들은 루마니아군에서 흔치 않게 과감한 결단력과 주도력을 보였다. 물론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이 소련군 보다 숫적으로 세배 우세했다는 점도 승리에 상당 부분 작용은 했을 것이다. 사단은 키쉬네프 시가지 공격에 보병 지원없이 1개 기갑대대만을 투입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소련군 주력은 시 서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가전에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1개 기병 중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루마니아 저항군 게릴라들의 지원만 받고 싸웠다. 그리고 사단은 소련 95 소총사단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독일 제 54 군단이 명령한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는 실패했다. 그러나 베사라비아의 주도인 키쉬네프의 수복은 루마니아측에게는 자랑스러운 일 이었다. 게다가 루마니아 전차 부대는 독일 제 72 보병사단 보다 10시간 먼저 시내에 진입한 것이다. 
사단의 최초의 실전 투입은 이 사단이 장비 보족과 기동전에 대한 경험 부족, 그리고 심각한 기초 훈련 부족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음을 보여줬다. 안토네스쿠는 개전 직전에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우리의 공군과 기갑사단은 소련군이 운신할 공간을 없애 버릴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다. 그러나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소련군 후위 부대의 소규모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는 것은 물론 야지 기동에서 조차 어려움을 겪는 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7월 6일, 9일, 15일에 각각 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방으로 돌파해서 이들이 모길례프, 소로차, 티기나 등 드네스뜨르 강의 도하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바았다. 그러나 이 임무는 실패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소련군을 쁘루뜨 강과 드네스뜨르강 사이에서 포착 섬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소련군은 후퇴에 성공한 사단들을 오뎃사에 투입하거나 아마도 끄림 반도에 까지 투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사단 사령부는 비가 오고 난 뒤 악화된 도로 사정이 기동을 제약했다고 보고했다. 평균적인 독일 기갑사단에서는 차량의 20%가 반 궤도 차량이었다. 소련군 역시 농업용 트랙터를 징발함 으로서 어느 정도 야지 기동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완전히 바퀴달린 차량에만 의존했으며 이들은 진창으로 변한 비포장 도로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비가 오는 날에는 말과 도보로 움직이는 보병사단들이 제 1 기갑사단 보다 더 기동력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단은 수색대의 오토바이들이 베사라비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에 가동불능이 되어버려서 위험한 삼림 지대에 정찰도 없이 전차를 투입해야만 했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독일 제 198 보병사단이나 루마니아 제 35 보병사단 처럼 소련 전차의 매복 공격에 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좋은 운 때문이었다. 사단의 차량들의 기동성 부족으로 전체 사단은 종종 먼 거리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제병 협동 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또한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독일측의 잇다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교통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수송로를 따로 분리하지 않아 생긴 교통 체증(독일군의 차량화 보급 부대와 루마니아군의 마차들이 도로에 뒤섞이는 결과를 초래했다)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보급 문제는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독일과는 달리 루마니아측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자연 문제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사라비아는 얼마 전 까지 루마니아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사단이 잘아는 지형에서 조차 기동에 실패한 원인은 전쟁 이전에 장거리 기동훈련을 한번도 제대로 실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군은 이런 결점을 기동전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실패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에 자신들을 가르친 프랑스인들 처럼 통신 문제를 경시했으며 이는 루마니아군 교범에도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역동적인 전장 환경에서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는데 통신에 대한 준비 부족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R-35 전차는 무전기가 아예 없었으며 LT-35 전차의 무전기는 교신 거리가 짧아서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차장들은 교전중인 위험한 상황에서 조차 수신호를 위해서 해치를 열고 나와야 했다. 개전 직전에야 사단은 7대의 장거리 무전기를 획득했지만 이조차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이것으로는 기껏해야 1개 대대에 한대가 돌아갈 수준이었다. 7월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무전기 다섯대는 고장으로 사용 불능이 되었으며 나머지 두 대의 교신 거리는 불과 30km에 그쳤다. 독일 병기국은 각 기갑사단은 군 사령부와의 교신을 위해 교신거리 250km 수준의 무전기가 있어야 하며 사단 예하 부대는 교신거리 50km의 무전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루마니아는 전자 산업이 전무했기 때문에 이 조잡한 무전기 조차 제대로 교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전을 겪고 나서 사단 본부는 무전기 교신 부호가 복잡해서 기동전하에서 제대로 사용하기가 골치 아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단 본부는 교신 수단의 부족으로 작전에 큰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도 이 점에서는 소련군 역시 루마니아군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남부 전선군 사령관인 이반 뜔레네쁘(Ибан В. Тюленев) 대장은 1941년 7월에 통신 수단의 부족으로 야전군과 예하 군단들은 소속 사단들의 위치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실상 소련군의 상급 제대들은 예하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사단장들은 “자발적으로”움직였다. 
루마니아 군이 전쟁 발발 이전에 겪고 있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수리-정비 부대의 조직에 실패했다는 점 이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창설이후 주둔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는 훈련을 나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단은 기동력을 가진 정비대를 갖추지 못했다. 루마니아 동부(그리고 나중에는 베사라비아로 이동한)에 있는 정비소는 기초적인 수리밖에 하지 못 했다. 반면 독일군 기갑 연대가 예하에 거느린 야전 정비 중대는 야외 기동시에도 엔진 교체를 할 수 있었다. 사단 사령부는 상급 사령부인 독일측에 전차의 예비 부품 보급을 끊임없이 요청했으나 독일측은 “단 하나의 부품도 공급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첫 3주간 별다른 큰 격전을 치루지도 않았는데 사단은 가지고 있는 전차의 절반 이상을 기계 고장으로 상실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 뒤에 사단은 장비들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10일간 후방으로 재 정비를 위해 이동했다. 이것은 모두 사단이 자체적인 수리는커녕 장비 정비 능력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초적인 훈련 부족으로 수많은 작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전차들은 전투 중에 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전차병들이 전차 안에서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생긴 화약 가스에 중독되었다. 이런 문제는 전쟁전에 훈련만 충분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들이었다. 심지어 르노 FT-17같은 구식 전차 조차 이런 훈련을 하는데 충분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뒤 사단 정비소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으며 제 1 기갑사단은 독일 제 11군에서 루마니아 제 4군 예하로 배속 변경되었다. 우선 사단은 병력과 장비 상태에 알맞은 임무를 맞게 되었다. 사단은 루마니아 제 5 군단에 배속되어 소련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하고 하루 평균 30km 정도씩 동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8월 10일, 사단에 남쪽으로 진격 방향을 바꿔 오뎃사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기습을 통해 오뎃사를 점령한다는 것은 능력 밖의 임무였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키쉬네프 탈환때의 경험이 다시 반복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사실 오뎃사의 동쪽 방어선은 가장 소련군의 방어가 약한 곳 이었다. 소련군은 루마니아군의 주공이 시의 서쪽과 남쪽에 집중되리라 판단했으며 2개 소총사단이 각각 정면 20~25km를 담당했다. 반면 동쪽 방어선에는 잡다한 부대를 긁어 모아 편성한 12,548명의 병력을 가진 혼성 부대가 정면 55km의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쟁 전 소련군의 교범이 명시한 km당 방어 병력의 4분의 1 수준이 불과한 것 이었다. 그러나 키쉬네프와 달리 오뎃사의 소련군 해안 군 사령부(Командовал дивизией-Приморской)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뎃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키쉬네프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으나 해안 군 사령부는 오뎃사외곽에 3중의 요새화된 방어망을 구축해 놓고있었다. 설사 기갑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가더라도 오뎃사로 향하는 최 단거리 루트에는 바다와 소금 호수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지협이 있었다. 이곳은 아주 이상적인 방어 지대로 만약 루마니아군이 진입하면 소련군은 호수의 댐을 폭파시켜서 바로 저지대를 침수시킬 수 있었다.
기갑사단의 첫 공격은 먼저 도착한 전차들과 1개 차량화 보병연대만 가지고 감행되었다. 사단 포병과 사단 직할 지원부대들은 후방에 뒤쳐저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8월 11일의 공격에서 기갑사단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방어선을 돌파하기는커녕 반격에 되 밀려 나왔다. 
다음날 전차들이 야포를 견인해 전선까지 이동시켰고 루마니아 제 5 군단은 제 15 보병사단과 제 1 기병여단을 증원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5 군단은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제 1 기병여단을 소련군 방어선 최 외곽으로 투입해 버렸다. 그리고 제 15 보병사단장은 보병들에게 전차 지원을 시키자는 기갑사단장의 제안을 묵살하고 보병 단독의 공격을 주장했다. 그 결과 기갑사단과 제 15 보병사단은 따로 따로 공격에 나섰고 그 결과 소련군의 단 2개 소총연대에 차례로 격퇴당했다. 게다가 이중 1개 연대는 개전 초기 실전 경험을 겪은 부대였으나 나머지 1개 연대는 루마니아측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흑해 함대에서 긁어 모아 편성한 해군 수병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비록 해군 보병들이 왕성한 사기와 전투의욕을 가졌지만 보병 훈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 두개 소총연대는 3일 동안 루마니아 15 보병사단과 제 1 기갑사단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전선에서 이탈해 다른 지구로 이동했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사단을 오뎃사 방어선의 북서쪽 지구에 정면 공격하는데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북서쪽 방어지구는 동쪽 지구 보다 전차 운용에 훨씬 적합한 지형으로 평탄한데다가 전차가 이동시 은폐가 가능한 야트막한 언덕들이 산재해 있었다. 소련 해안 군의 병력은 겨우 제 1 방어선만 커버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 1 방어선의 돌파만 성공하면 전차 부대는 충분히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비록 소련군의 대전차포는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에게 살인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오뎃사의 대전차 방어는 형편없었다. 8월 17일 당시 북서쪽 방어지구에는 방어 정면 1km당 6.4문의 야포가 배치되어 있는 수준이었으며 이중 2문 정도가 대전차 포 였다. 소련군은 전쟁 이전의 교범에서 대전차 방어에는 최소한 1km당 문의 대전차포가 대전차 장애물과 함께 투입되어야 하며 적의 공격에 취약한 지형에서는 1km당 25문의 대전차 포가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단은 상급 지휘관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전력이 약화되었다. 기갑사단이 독일 제 11군에 배속되었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사단의 통합성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해 훈련된 인력은 독일 제 11군과 루마니아 제 3 야전군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제 4 야전군에 사단이 배속됐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상습 지휘관들이 여전히 옛 교리에 얽매여 있음알 알게 되었다. 독일식의 기동전 이론을 습득한 기갑사단 간부들과 여전히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된다고 믿는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의 폭은 더 깊어졌다. 전쟁 이전에 루마니아 군의 교리에서 전차의 역할은 미미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군 고급 지휘관들은 전차가 어떻게 보병을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모호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다. 총사령부는 나중에 “초기의 전차 운용에서 전차 부대는 전차의 성격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루마니아군은 전차를 야간에 포도 밭이나 수풀에 매복한 적 보병을 몰아내는데 투입되었다. 사실 이것은 보병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임무였다.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단이 귀중한 전차들을 방어전에서 소모해 버리는 동안 나머지 수많은 보병들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급 지휘관들은 기갑사단이 보유한 장비를 모조리 다른 부대로 넘겨 버렸다. 8월 13일에 1개 기갑 중대는 사단 포병 주력과 함께 제 1 기병여단과 제 15 보병사단에 지원용으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이 중대는 “부적절한 운용으로”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나머지 기갑연대 병력도 계속해서 분리되어 나갔다. 1개 기갑대대는 제 11 보병사단에 배속되었고 다른 대대의 1개 중대는 제 7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아마 가장 끔찍한 착오는 보전 합동 훈련을 체득한 사단 차량화 보병연대를 다른 지구에 보병 부대로 돌려 버린 것 일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항공 정찰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분산 배치 현황을 파악했고 해안 군 사령부는 생포한 루마니아 포로를 심문해서 전차 부대의 투입 시기와 장소를 알아 냈다. 소련군은 시내에 배치된 대공포까지 동원해서 루마니아군의 주공방향에 집결시켰다. 또한 보병들에게 대전차 공격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대량의“몰로토프 칵테일”을 지급했다. 또한 루마니아군이 전차 공격에 보병을 수반할 것을 대비해서 제 95 소총사단 사령부는 40m당 1 정의 밀도로 기관총을 배치시켰다.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그들이 흔히 사용한 전형적인 화력 집중을 달성했다. 
8월 18일,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사실상 섬멸되었다.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은 전과 확대와 추격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정면 돌파에는 부적절 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제 4 군 사령부는 보병이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공병이 적 지뢰원과 대전차 방어를 분쇄한 이후에야 전차를 전과 확대를 위해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소련군의 기관총 화망에 보병의 진격은 돈좌되었고 보병사단에 배속된 기갑 대대의 운명은 보병 사단장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한 사단장이 보고했듯이 “적 자동화기와 박격포 사격이 맹렬하여 본 관은 전차들에게 공격을 선도할 것을 명령했”다. 태어나서 처음 전차를 구경한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를 따라 잡는데 실패했고 전차들은 소련군의 맹렬한 대전차 포 방어에 걸려들었다. 참호선을 돌파한 전차들은 그 후방에 준비된 대전차 장애물에 걸려 대부분 격파되었다. 
사단 사령부의 일지는 “32대의 전차가 소모되었다”는 씁쓸한 기록을 남겼으며 전차 전술에 무지한 보병 지휘관들에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총 참모부는 전차 전술에 대한 이해는 윗 계급으로 갈수록 형편없어 진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사단의 마지막 공격시 지휘관들이 내린 결정을 보면 고급지휘관들은 기갑 전문가와은 거리가 멀다는 이 평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제 4군 사령부는 8월 18일 공격에 R-35를 장비한 제 2 기갑연대로 기갑사단의 전력을 강화하지 않고 다른 공격지구에 투입해서 헛되이 소모만 시켰다. 이제 전투가 기동전에서 진지전을 바뀌고 있는 시점이어서 방어력이 약한 LT-35보다는 장갑이 강력한 R-35가 소련군 거점에 대한 공격에 더 필요했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이 계속해서 별다는 정찰 없이 전차대를 투입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전차 함정 조차 발견하지 못한채 걸려들어 소련군 대전차포에 격파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오뎃사 포위전이 끝난다음에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은 강력한 포병과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중전차가 적합하며 아군이 가진 경전차는 방어선이 보병에 의해 돌파당한뒤 성과를 확대하는데에만 쓸모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 해안 군은 전투 초기에는 전차가 한대도 없었으나 나중에 17대의 경전차와 12대의 Tankette가 보급되었다. 다시 15대의 경전차가 보급되었고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Tankette 50대가 보급되었다. 비록 트랙터를 개조해 만든 조잡한 차량들이 별로 성능이 좋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서 오뎃사의 소련군은 포위한 루마니아군과 비슷한 기갑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별 볼일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10월 2일에 전차를 투입해서 행한 반격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은 소련군 포로를 심문해서 소련 전차대의 공격 방향과 시간을 알아냈지만 여기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방어진지는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불과 7대의 차량만 잃고 종심 8km~10km를 돌파했다. 
이렇게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이 각기 다른 성과를 거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과 훈련 수준의 차이였다. 비록 공격에 투입된 차량중 35대만이 실제 전차였고 나머지는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소련 지휘관들은 상세한 작전을 짜서 보병과 포병(카츄사 로켓을 포함하여),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했다. 반면 루마니아군은 대략적인 계획만 짜고 항공지원만 받는 상황에서 전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소련군 대전차포의 성능은 우수했지만 루마니아군에겐 대전차 포탄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 해안 군은 보병들에게 대전차 전술을 철저히 가르쳤지만 루마니아 보병들은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 탱크를 구경한 경우가 많았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오뎃사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대한 기록에서 루마니아군 전차가 참호선을 돌파해도 고립된 소련군 거점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고 적었다. 반면 루마니아군 보병들은 전차가 나타나기만 해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전선 붕괴를 가져왔다. 
8월 18일의 재앙적인 공격이 있기 전날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에게 독일군의 공세 지원을 위해 제 1 기갑사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뎃사에 대한 공격이 끝나고 남은 가동 전차는 23대에 불과했다. 2개 기갑연대의 잔여 병력은 계속해서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으며 거듭하는 정면공격으로 전차만 잃어갔다. 루마니아는 독일측의 지원 없이 전차를 보충할 능력이 없었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몇 년전에 예상했듯이 국가가 자체적으로 기계화 전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기계화 부대는 소모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 이었다.

결 론
사단이 완전히 섬멸된 뒤 루마니아 육군 참모총장은 효율적인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먼저 국경선으로 그 값을 치뤘고 이제는 그 열 배가 넘는 피로 값을 치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화 부대의 발전을 저해한 육군의 보수적 장군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루마니아의 기갑부대 발전은 네 가지 주요한 요소에 의해 저해되었다. 첫째는 루마니아의 전쟁 이전 재정 정책이고 둘째는 낙후된 공업, 셋째는 육군의 뒤떨어진 교리, 넷째는 군 전반의 훈련 부족이었다.루마니아는 재정 부족으로 독립된 전차 생산 공업을 육성하지 못 했으며 얼마 안되는 재원을 자국의 뒤떨어진 교리에 적합한 값싼 무기를 획득하는데 투입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외국으로 부터의 기술 독립과 좀더 쉽게 유지와 현대화가 가능했다. 육군의 교리는 애당초 전차를 부차적으로 인식했으며 이것은 전반적인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장비의 부족과 기갑 병과에 대한 인식 부족은 장기간의 발전 지체를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 기갑병과 간부들의 자질 저하를 가져왔다. 장교들은 전술 발전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일정 수준의 훈련을 유지하는 것 조차 어려웠다.
외교 정책의 전환과 독일과의 동맹으로 인한 전략 변화는 루마니아 군 내에서 기갑 병과의 위치를 변화시킬 기회로 다가왔다. 비록 독일인 교관들의 훈련은 독일인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 했으나 루마나아 기갑 장교들은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의 원리와 독립된 전차부대가 제병 협동작전으로 이룰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새로운 교리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장비와 충분한 훈련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간의 훈련만 마친 채 사단은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얼마안되는 전투 기간동안 장비의 수량과 성능 부족, 전쟁이전의 정체 기간으로 인한 훈련의 부족등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런 약점은 사단이 기습이나 짧은 거리의 추격전에 투입되었을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독일 제 11군 사령부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문제점을 잘 인식했으며 이에 맞는 임무에만 투입했다. 그러나 기갑사단이 루마니아군 상급 사령부의 지휘하에 들어갔을 때 이들은 기갑전에 무지한 상급 지휘관들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 기갑병들의 용기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상급 부대가 사단에 부여하는 임무는 사단의 능력 밖이었기 때문에 사단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 역시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기갑부대는 “소규모의 국지적 교전에서도 별 성과를 못 거두고 소모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