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독일은 점령지역에서 징발이라는 이름의 약탈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군마"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부터 대량의 마필을 사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 수록 그 양은 늘어만 갔습니다. 1939년에 독일군은 59만 마리의 군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면 1,198,724마리로 늘어납니다. 전쟁이 지속될 수록 병력이 증가했고 동시에 차량의 보충이 손실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수단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지요. 그런데 독일은 자체적으로 군마의 대량 소모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전쟁 초기부터 점령지에서의 군마 징발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점령지역에서의 마필 감소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아직 기계화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아 축력에 의존했던 유럽의 농업 방식에 큰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징발이 유럽의 농업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연구자로는 디나도(Richard L. DiNardo)가 있습니다. 디나도는 1988년에 발표한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라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독일이 전쟁 기간 중 점령지에서 막대한 마필을 징발한 것이 전쟁 기간 중 유럽의 농업생산을 감소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점령된 폴란드는 독일의 주된 군마 공급처가 되었고 1940년 서부전역에 동원된 보충용 군마의 대부분을 충당했습니다. 폴란드의 농업생산량 감소는 매우 놀라운데 1939년에 227만톤이었던 밀 수확량이 1940년에는 177만8천톤으로 급감했고 이것이 1942년에는 133만2천톤 까지 떨어집니다.1) 서부전역이 독일의 대 승리로 끝난 뒤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독일의 새로운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경우는 폴란드 만큼 약탈이 심하지는 않았으나 농업용 마필의 감소는 뚜렸습니다.(네덜란드의 경우 전쟁 중 마필의 숫자는 증가했는데 농업용 마필만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독일에게 가장 혹독하게 당한 것은 소련일 것 입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1941년 6월 22일 부터 1942년 1월 20일까지 335,588마리(169,172마리 폐사+166,416마리 질병)의 말을 상실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같은 기간 동안 보충된 마필은 불과 47,801마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폴란드나 서유럽산의 말 보다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한 러시아산 말을 보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89,725마리의 러시아 말이 노획되었습니다.2) 1942년 이후 러시아산 말이 대량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산의 약한 말을 지칭하는 Panjepferde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지요.3)
사실 소련은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대량의 농기계를 생산했기 때문에 축력으로 부터 해방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만 1930년대 부터 군수산업으로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축력에 계속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쟁이 터지면서 농기계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자 기존에 생산된 농기계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4) 여기에 마필도 대량으로 동원되거나 독일군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사람이 쟁기를 끄는 참담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발발직전 소련에는 2100만 마리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780만 마리로 감소했습니다. 소련측의 추정에 따르면 전쟁 기간 중 700만 마리의 말이 죽거나 독일군에게 약탈당했다고 합니다.5)
디나도의 연구는 개괄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마필 징발은 유럽의 농업 생산구조에서 매우 취약한 부분을 타격했습니다. 독일은 전쟁 중 자체적인 자원의 부족으로 지속적으로 점령지역의 자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점령지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고 오랫동안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주
1) Richard L. DiNardo,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1. (Jan., 1988), p.139
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Herford, Mittler und Sohn, 1988), s.97
3) Katherina Filips, 'Typical Russian Words in German War-Memoir Literature', The Slavic and East European Journal, Vol. 8, No. 4. (Winter, 1964), p.409
4)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 A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in World War II(London, Longman, 1991), p.187
5) DiNardo, ibid., p.136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2007년 3월 6일 화요일
1951년 2-3월 한국 육군의 보병사단 차량 배분 계획안
미군사고문단 문서 RG338 File No.400.73.451에는 한국 육군이 1950-51년 동계전역의 참패를 수습하고 재정비를 시작할 무렵인 1951년 2월과 3월 보병사단의 차량 지급 계획에 대한 문서가 두 건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문서는 1951년 2월 27일에 작성된 것으로 이 문서에 나타난 한국군 보병사단의 차량 지급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 3/4톤 6V 발전차, 1½톤 PC, 2½톤 LWB는 일제 트럭을 대신 지급할 수 있음
그리고 한 달 뒤인 1951년 3월 26일자 차량 지급 계획은 다음과 같이 변경됐습니다.
1951년 3월 26일 차량지급 계획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보병사단의 대전차 대대가 편제에서 사라지면서 여기에 배치될 차량도 없어졌다는 점 입니다. 이것과 2½톤 LWB 분배가 약간 조정된 것을 제외하면 2월 27일 편제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3/4톤 6V 발전차, 1½톤 PC, 2½톤 LWB는 일제 트럭을 대신 지급할 수 있음
첫 번째 문서는 1951년 2월 27일에 작성된 것으로 이 문서에 나타난 한국군 보병사단의 차량 지급 계획은 다음과 같습니다.
차량종류 | 사단본부 | 통신중대 | 헌병중대 | 정비중대 | 보급중대 | 수색중대 | 각 보병연대 | 포병대대 | 공병대대 | 대전차대대 | 의무대대 | 총 계 |
1/4톤 트레일러 | 9 | 3 | 1 | 4 | 4 | 4 | 25 | 7 | 10 | 3 | 1 | 121 |
1톤 트레일러 | 1 | 1 | 1 | 2 | 1 | 1 | 3 | 5 | 4 | 1 | 5 | 31 |
1톤 트레일러(250갤런 탱크) | 1 | 1 | 1 | 1 | 1 | 1 | 4 | 4 | 4 | 1 | 5 | 32 |
1/4톤 | 18 | 12 | 12 | 4 | 4 | 10 | 51 | 22 | 16 | 6 | 10 | 267 |
3/4톤 구급차 | 0 | 0 | 0 | 0 | 0 | 0 | 0 | 1 | 1 | 0 | 27 | 29 |
3/4톤 12V 발전차 | 0 | 9 | 0 | 0 | 0 | 0 | 0 | 9 | 6 | 0 | 0 | 24 |
2½톤 | 0 | 0 | 0 | 0 | 0 | 0 | 0 | 36 | 0 | 0 | 0 | 36 |
2½톤 통신차량 | 0 | 3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2½톤 밴 | 0 | 0 | 0 | 3 | 0 | 0 | 0 | 0 | 0 | 0 | 0 | 3 |
4톤 레커 | 0 | 0 | 0 | 2 | 1 | 0 | 0 | 0 | 1 | 0 | 0 | 4 |
6톤 레커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1 |
6톤 견인차 | 0 | 0 | 0 | 0 | 0 | 0 | 0 | 0 | 3 | 0 | 0 | 3 |
3/4톤 6V 발전차 | 1 | 3 | 3 | 3 | 2 | 1 | 7 | 8 | 4 | 0 | 1 | 47 |
1½톤 PC | 0 | 3 | 0 | 0 | 6 | 1 | 0 | 0 | 0 | 0 | 1 | 11 |
2½톤 LWB | 4 | 10 | 2 | 20 | 34 | 2 | 38 | 20 | 4 | 12 | 10 | 232 |
※ 3/4톤 6V 발전차, 1½톤 PC, 2½톤 LWB는 일제 트럭을 대신 지급할 수 있음
그리고 한 달 뒤인 1951년 3월 26일자 차량 지급 계획은 다음과 같이 변경됐습니다.
1951년 3월 26일 차량지급 계획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보병사단의 대전차 대대가 편제에서 사라지면서 여기에 배치될 차량도 없어졌다는 점 입니다. 이것과 2½톤 LWB 분배가 약간 조정된 것을 제외하면 2월 27일 편제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차량종류 | 사단본부 | 통신중대 | 헌병중대 | 정비중대 | 보급중대 | 수색중대 | 각 보병연대 | 포병대대 | 공병대대 | 의무대대 | 총 계 |
1/4톤 트레일러 | 9 | 3 | 1 | 4 | 4 | 4 | 25 | 7 | 10 | 1 | 118 |
1톤 트레일러 | 1 | 1 | 1 | 2 | 1 | 1 | 3 | 5 | 4 | 5 | 30 |
1톤 트레일러(250갤런 탱크) | 1 | 1 | 1 | 1 | 1 | 1 | 4 | 4 | 4 | 5 | 31 |
1/4톤 | 18 | 12 | 12 | 4 | 4 | 10 | 51 | 22 | 16 | 10 | 261 |
3/4톤 구급차 | 0 | 0 | 0 | 0 | 0 | 0 | 0 | 1 | 1 | 27 | 29 |
3/4톤 12V 발전차 | 0 | 9 | 0 | 0 | 0 | 0 | 0 | 9 | 6 | 0 | 24 |
2½톤 | 0 | 0 | 0 | 0 | 0 | 0 | 0 | 36 | 0 | 0 | 36 |
2½톤 통신차량 | 0 | 3 | 0 | 0 | 0 | 0 | 0 | 0 | 0 | 0 | 3 |
2½톤 밴 | 0 | 0 | 0 | 3 | 0 | 0 | 0 | 0 | 0 | 0 | 3 |
4톤 레커 | 0 | 0 | 0 | 2 | 1 | 0 | 0 | 0 | 1 | 0 | 4 |
6톤 레커 | 0 | 0 | 0 | 1 | 0 | 0 | 0 | 0 | 0 | 0 | 1 |
6톤 견인차 | 0 | 0 | 0 | 0 | 0 | 0 | 0 | 0 | 3 | 0 | 3 |
3/4톤 6V 발전차 | 1 | 3 | 3 | 3 | 2 | 1 | 7 | 8 | 3 | 1 | 46 |
1½톤 PC | 0 | 3 | 0 | 0 | 6 | 1 | 0 | 0 | 0 | 1 | 11 |
2½톤 LWB | 4 | 9 | 3 | 18 | 31 | 2 | 37 | 36 | 0 | 10 | 224 |
※3/4톤 6V 발전차, 1½톤 PC, 2½톤 LWB는 일제 트럭을 대신 지급할 수 있음
2006년 12월 30일 토요일
[번역글]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삼탕!)
돈 없는 군대의 기계화 : 1930년대 이탈리아의 사례에 이어서...
재탕을 거친 삼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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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1999년 2호에 실린 Alexander Statiev의 The Ugly Dukling of Armed Forces : Romanian Armour 1919~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미운 오리새끼 - 루마니아 기갑 부대의 발전 1919-1941
루마니아 육군 총사령부는 연합군이 1차 대전에서 거둔 성과를 분석한 뒤 기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는 1919년에 72대의 르노 FT-17 전차를 수입해서 1개 기갑대대와 기갑학교를 창설했다. 2년 뒤에 기갑대대는 약간의 전투 지원 부대를 배속받아 기갑 연대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힘찬 출발은 곧 정체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35년에도 루마니아군의 기갑전력은 여전히 72대의 르노 전차였고 이제는 형편없는 구식으로 전락한데다 대부분 고장으로 가동 불능 상태였다. 전차에 대한 교리 역시 전차 만큼이나 발전하지 못했다.
양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루마니아의 국방 정책은 매우 보수적 이었다. 그렇지만 루마니아의 전략적, 경제적 측면을 분석해 보면 단지 보수적인 정책만이 루마니아의 기갑 전력을 낙후 시킨 요소는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루마니아 내각은 국방비를 최소화 하려고 노력했다. 기갑전력은 이러한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 대 본영은 국방예산 문제로 압박을 받아서 새로운 기갑 장비를 도입 할 수가 없었다. 기갑 사단 한 개를 편성하는데는 보병사단 15개에 해당하는 예산이 들어갔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기갑전력은 매우 사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루마니아 군 수뇌부는 무리하게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느니 제한된 예산을 차라리 보병과 포병화기의 표준화와 근대화에 쏟아 넣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이 루마니아군 전체에 일반적 이었다.
또한 루마니아의 낙후된 공업 또한 기갑 전력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이었다. 1937년에 루마니아의 군사 이론가인 라두 다비데스쿠(Radu Davidescu)는 기갑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1. 수입은 비용이 많이 든다 2. 기술발전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외국에서 최신 전차의 시제품을 도입하더라도 그것이 인도될 무렵에는 구식화 될 것이다 3. 기갑 장비는 지속적으로 부품 지원이 필요하며 지속적인 장비 교체가 필요하고 4. 전쟁이 시작되면 수입하는 것이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다비데스쿠는 문제 제기만 했을 뿐 해결책은 내 놓지 못 했다. 루마니아는 전차 공업을 일으킬 시설과 이에 수반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루마니아 육군은 기계화에 있어서 전차 보다는 차량 획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2차 대전 발발 이전에 루마니아의 자동차 산업은 일일 트럭 생산량 6~10대에 불과한 공장 한곳 뿐이었으며 이것 조차 수입 부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전차 생산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다. 전쟁이전에 루마니아가 이룬 가장 큰 발전은 프랑스로부터 면허를 얻어 126대의 무한궤도식 수송 차량을 생산하고 부분적으로 국산화에 성공한 것 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기간동안 루마니아는 큰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차용 엔진은커녕 전차용 장갑판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 했다. 사실 루마니아 군 수뇌부 역시 첨단 무기의 필요성은 절감했지만 오직 수입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1934년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기갑전력이 낙후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의 산업 발전은 이를 따라가지 못 하는 점에 위기를 느꼈으며 루마니아의 기갑전력은 “낙후와 되고 (현대전에) 불 충분하며 (주변국에) 압도당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갑전력의 근대화는 소총이나 야포에 비해 훨씬 복잡한 것 이었다. 그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수입에 의존해서라도 전차를 수입하느냐 아니면 자국의 수준으로 감당 가능한 재래식 전력에 의존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는데 당연히도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루마니아군의 뒤떨어진 군사 사상 역시 기갑전력의 현대화를 가로 막았다. 전차는 공격용 무기였지만 전쟁 이전의 루마니아군 교리는 거의 방어적 이었다. 참모본부의 전쟁 계획중 공세를 가정하고 세워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교리는 “적을 준비된 종심깊은 방어선에서 고착시켜 전력을 고갈 시킨 뒤 단계적인 반격으로 격퇴하는”것 이었다. 이 때문에 전차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기갑부대 인력들은 다른 병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교관과 프랑스 교리에 의해 교육 받았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그들의 프랑스인 교관들 처럼 전차를 전략적 공세에 필요한 무기가 아니라 전술적인 제한적 반격에 필요한 무기라고 인식했다. 루마니아군의 교범은 “보병 운영의 성공이 작전의 성공을 보장하며” “전차의 기본적인 임무는 보병의 지원이다”라고 못 박았다. 또한 전차의 공격 종심은 포병의 지원 사격이 가능한 범위에 한정되었다. 즉 수 km에 불과했다. 전차는 “이동 포대로서 …. 적의 거점 파괴”를 통해 보병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는데 이것은 독일이나 소련의 교리와는 정 반대의 것 이었다.
루마니아의 교범은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루마니아군의 전차 교범은 단지 보병 지원을 위한 중대, 대대규모의 운용만을 명시하고 있을 뿐 이었다. 독립된 기갑 부대 또한 없었다. 기갑 연대는 창설 초기에 보병 기술감 예하 소속이었으며 나중에 포병감 예하 부대로 배속 변경 되었다. 그리고 연대 예하의 기갑 중대들은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기갑 중대들은 전술적으로 보병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기갑 장교들은 영국의 전차 운용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독일이나 소련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1930년대의 급속한 기갑 교리 발전은 루마니아군 내부에서 소수의 기갑 장교가 전차의 대규모 운용을 주장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930년에 라두 디눌레스쿠(Radu Dinulescu)소령은 미래의 전쟁은 근접 항공 지원 및 수많은 경전차와 중전차의 지원을 받는 완전 궤도화 된 운송차량에 탑승한 보병과 포병으로 이뤄진 군대간의 전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체계화된 교리로 발전하지 못 했다. 기갑 교리는 육군의 전반적인 교리에 따랐으며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루마니아 기갑부대는 나머지 지상 병과의 교리에 전술을 맞춰야 했다.
사실상 루마니아의 환경에서 다른 기갑교리란 불가능 한 것 이었다. 다른 열강들의 진보된 기갑 교리는 그 국가들이 강력한 군사력과 큰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었다. 기갑 사단은 종심 깊은 돌파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 이었다. 이 개념은 공격자가 방어군의 후퇴 속도 이상으로 돌파와 추격의 템포를 유지해서 적을 섬멸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작전은 오직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여러 개 동원해야만 가능한 것 이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전차의 대량 손실은 신규 생산과 수리를 통해 보충할 수 있어야 했다. 또한 다른 병과 역시 신속히 돌파를 선도하는 기갑부대를 따라 잡을 수 있도록 차량화 되어야 했으며 여기에 대한 보급 지원을 계속 할 수 있어야 했다. 루마니아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어느 하나 이러한 전제를 충족 시킬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마니아 군 장교들은 보수주의자보다는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육군의 기갑 교리는 매우 뒤떨어진 것 이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루마니아의 전략적, 군사적 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적 창의력의 부족은 그나마 있는 교리 체계 내에서 조차 많은 전술적 결함을 가져왔다. 루마니아의 기갑 교리는 매우 융통성이 없었으며 사실 루마니아 군 내에서는 실전을 치루리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전차 운용은 대부분 기동에 양호한 지형에서의 제한적인 정면 공격에 초점이 맞춰졌다. 루마니아군 내의 기갑 이론가들은 조우전이나 시가전, 삼림지대나 기동이 곤란한 지형, 또는 후퇴전이나 방어전에서 전차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다른 병과와의 긴밀한 협동이 강조되었지만 실제 기동훈련은 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루마니아군의 교범에는 전차와 항공기의 합동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1935년부터 국방 예산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총사령부는 기갑 병과에 대한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첫 단계로 총사령부는 구식화 된 전차부터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루마니아군의 교리에 맞는 외국제 전차의 시제품들이 검토되었다. 1930년대에는 아직 세계 각국이 경전차를 중시하고 있었으며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경전차만을 고려대상에 넣었다. 루마니아군은 126대의 체코제 LT-35와 200대의 프랑스제 르노 R-35를 주문했다. 루마니아군내의 기갑 전문가들은 스코다의 모델이 당시 획득 가능한 경전차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며 스코다 측은 LT-35가 보병 지원용으로 만들어 졌다고 광고했다. (이 물건의 설계로 미뤄 볼 때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주장이었지만.) 반면 프랑스제의 R-35는 당시 기준으로 훌륭한 방어력을 가졌으며 보병 지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차였다. 그런데 루마니아의 도로 사정은 매우 형편 없어서 심지어 이런 경전차들 조차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재정 부족으로 도로 개선 사업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총사령부는 체코의 CKD로부터 417대의 AH IV tankette을 수입했는데 이 물건은 너무나 무장이 빈약하고 방어력이 약해서 보병 지원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tankette은 루마니아의 빈약한 도로망에서도 충분히 운용 가능했으며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군 총사령부는 이것이 자국 군대의 교리에 맞건 안맞건 상관없이 전체 기갑 전력의 56%를 tankette으로 채우기로 결정했다. 루마니아군에게는 다행히도 CKD는 계약한 대수를 다 채우지 못했고 단지 35대의 tankette만 인도되었다. 그리고 스코다에서 발주한 LT-35 경전차는 모두 무사히 인도되었다. 결국 tankette들은 기병 여단들에 정찰용으로 분산 배치 되었는데 사실 이게 더 적합한 임무였다. 그리고 프랑스 역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해서 1940년까지 40대의 R-35만이 인도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 기갑부대의 재편을 가속화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에 큰 인상을 받고 루마니아군이 보유한 모든 전차를 단일 부대에 집중시키기로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쓰러뜨린 지 3주 뒤인 1939년 10월 24일에 차량-기계화 여단이 편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즉흥적인 반응은 결코 루마니아군 수뇌부가 전차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꿨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루마니아 군내의 장기간의 발전 정체는 군 내부에 일관된 전차전 교리를 연구할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게 했다. 차량-기계화 여단은 2개 기갑대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로 편성되었는데 각 기갑대대는 따로따로 차량화 보병연대에 부속되었다. 여전히 전차의 역할은 보병지원에 머물렀다. 이 여단의 간부들은 나중에 부대의 편제와 뒤떨어진 운용 사상이 차량-기계화 여단의 전술적 운용 범위를 축소 시켰다고 인정했다.
1940년 10월에 독일 군사 사절단(Deutsche Heeresmission, 이하 DHM)이 루마니아에 파견되었다. 독일 사절단은 1941년 2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루마니아군의 훈련을 맡았는데 다른 병과 보다 기갑병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루마니아군의 전략은 여전히 방어적이었지만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 교리가 도입되었다. 이로서 기갑부대 운용 방식도 제한적인 보병 지원에서 독립적인 전술적 종심 타격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추축국에 가담 함으로서 루마니아군은 비록 제한적 이기는 하지만 독일제 전차를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 원수는 독일 군사사절단에게 훈련을 마치는 대로 독일제 군사 장비를 판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실현 되었는데 독일 제 13 기갑사단과 제 16 기갑사단이 루마니아에 도착했을 때 전차 일부를 루마니아군에 매각했다. 이로서 루마니아군은 종심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춘 두개의 독립 기갑 부대를 창설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동을 강조하는 풍토 속에서 훈련된 부대 – 독일군이나 독일식 교리로 훈련되고 차량화 된 루마니아 보병 사단 – 를 루마니아군 지휘하에 넣게 된다면 최소한 루마니아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상당 하는 기계화 부대를 가질 수 있을 것 이었다.
기동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리가 바뀌자 차량-기계화 여단의 입지가 자동적으로 강화되었다. 독일 기갑사단들의 연전 연승은 루마니아군 내의 전차 옹호론자들이 군 개혁을 부르짖게 했다. 여단의 일지는 여단 참모들이 “독일군의 기동전 교리에 맞출 수 있도록 부대 편제를 고치려 노력하고 있다.”고 적었다. 여단은 곧 체코와 프랑스로부터 추가로 전차를 공급받고 독일이 폴란드에서 노획한 R-35까지 인도 받아서 1941년 1월에 사단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다시 2월에는 제 1 기갑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이제 전차 부대는 보병으로부터 독립해서 독립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서류상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126대의 LT-35를 보유한 1개 연대와 75대의 R-35를 보유한 1개 연대, 그리고 2개 차량화 보병 연대, 1개 포병연대, 그리고 대전차, 중대와 대공포 중대, 공병 중대와 통신 중대, 기갑 수색대로 편성된 혼성 지원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 사단만이 루마니아군 내에서 완전히 차량화 된 부대였다.
그러나 많은 내부적 요인이 이 사단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 할 수 없게 했다. 일부 요인은 장비에 있었지만 나머지 요인은 장기간의 발전 정체의 영향이었다. 장비의 문제는 만성적인 수량 부족과 장비의 수준에 있었다. 루마니아가 장비들을 주문할 당시에는 모두 최신 장비들 이었지만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1941년 무렵에는 모두 구식화 되어 있었다. 전차들은 구경도 작고 포구 초속도 느린 대포를 달았으며 LT-35는 너무나 방어력이 형편없었고 R-35는 너무 느려 보병 지원에도 써먹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루마니아군은 전차의 수준 면에서 절망적으로 형편 없지는 않았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차가 독일의 3호나 4호 전차만은 못 했지만 1940년 말 까지도 독일군 전차의 60%는 1호와 2호, 그리고 체코제 모델이었다. 그리고 1941년 6월 개전 당시 소련군이 보유한 전차 13대중 1대 만이 신형 전차로 나머지는 루마니아군의 전차와 비슷하거나 더 못한 물건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루마니군의 기갑전력의 규모와 손실을 대체할 능력의 부족이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총 22,600대의 전차를 가진 소련에 대해 3,6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독일측에 전차 제공을 원했지만 이것은 불가능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상급 대장은 “독일군의 장비를 루마니아에는 양도할 수 없습니다. 생산되는 장비들은 우리 군대를 장비하기도 벅찹니다. 물론 우리가 노획한 적 장비들을 양도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태도는 전쟁 말기까지도 변함 없었다. 독일은 동맹국을 돕기 위해서 체코나 프랑스의 공장에서 생산한 장비를 지원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원래 의도한 수준에 도달 할 수 없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서류상의 편제인 2개 기갑연대와 2개 차량화 보병연대 대신에 각 2개 대대로 편성된 1개 차량화 보병연대와 역시 각 2개 대대로 편성되고 모두 LT-35로 장비된 1개 기갑연대만으로 편성되었다. R-35는 너무느려서 제 2 기갑연대는 제 4 야전군 직할대로 변경되었다. 또한 제 1 기갑사단은 지원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래에 나온 것 처럼 사단의 이론상의 편성과 실제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구상한 기계화 사단
사단 사령부
기갑여단
-차량화연대 : 기관총 대대×1, 경전차 대대×1
-기갑연대 : 경전차 대대× 1, 중형 전차 대대×2
차량화여단
-차량화 연대 : 오토바이 보병 대대×1, 차량화 대대×1
-차량화 보병 연대 : 차량화 대대×3
포병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공병대대
-통신 중대
-대전차포 대
-사단 항공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서류상)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제 2 기갑연대 : R-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2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대공포 중대
-통신 중대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편성(실제 편성, 개전당시)
사단 사령부
제 1 기갑연대 : LT-35 대대×2
차량화 보병연대 : 각 2개 보병대대
포병 연대 : 포병대대×3
사단 직할대
-수색대
-대전차 포 중대
-공병 대대
-통신 중대
독소전 발발 당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가동전차 109대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사단이라는 것은 이름 뿐이고 실제 전력은 기갑여단이나 기갑연대 전투단 수준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사단은 명예로운 “사단” 칭호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종심 작전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단지 전차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술적인 능력도 부족했다.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지적했듯이 전차의 종심 타격은 오직 타 병과의 지원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 이었다. 루마니아군에는 제대로 된 차량화 보병 부대가 없었다. 차량 부족으로 인해서 루마니아군은 소수의 부대를 차량화 시켜서 나머지 사단들을 마차에 의존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차량을 분산시켜서 모든 사단들을 일부나마 차량화 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결국 트럭은 사단 수송대와 중포를 견인하는데 쓰였으며 보병들은 여전히 자신의 두 다리에 의존해야 했다. 한줌 밖에 안되는 루마니아의 기갑 부대는 보병 부대들의 행군 속도에 묶여 버렸다. 비슷한 딜레마를 겪고 있던 소련군은 이 문제를 전차 부대와 기병부대를 혼성 편성하는 것으로 부분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45년 까지도 소련군이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용한 것을 보면 소련군 수뇌부는 이러한 해결 방식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루마니아군은 동부전선에 기병여단 6개를 투입했다. 이중 3개 여단은 각각 1개 차량화 보병연대를 배속받고 있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의 전쟁 이전 교리에서 기병과 기계화 부대간의 합동 작전이 강조되긴 했지만 루마니아군 수뇌부는 이것을 기병부대에 소수의 전차대를 배속시키는 것으로 이해했고 대규모의 기병-기계화 집단을 편성할 생각은 하지 못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기병-기계화 집단은 루마니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종심 작전 전력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대규모 공세, 특히 기갑부대 운용은 루마니아 군의 보급 능력 때문에 큰 제약을 받았다. 루마니아군의 보급은 철도와 징발한 민간차량,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차에 의존했다. 독일군은 바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도 루마니아군 총 참모부에 루마니아군의 역할이 전략적 공세가 아닌 방어적인 범주에서 제한된 규모의 공세를 수행하는 것 이라고 알리고 있었다. 이 잘못된 정보는 루마니아군의 개편을 추진하는데 장애로 작용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측에 독일의 작전 계획을 알리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루마니아는 방어 작전을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 국내의 교통망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동전을 수행하려면 보급 수단의 질적 향상뿐 아니라 전반적이 체제 자체를 뜯어 고쳐야 했다. 공세 작전에는 차량화 수송대가 군수의 중추역할을 해야 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차량화 된 야전군에 총 11,000대의 차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수량마저 채울 수 없었다. 이 시기 독일군의 보병사단은 평균 447대의 트럭을 보유했지만 루마니아 제 4 군 소속의 보병사단들은 평균 30대에 불과했다.
개다가 트럭의 종류가 다양해서 트럭 자체의 보급만도 골치 아픈 문제였다. 결국 보급은 여전히 징발한 민간 마차와 군용 마차에 의존해야 했다. 농부들이 징발에 저항해서 좋은 말은 숨겼기 때문에 군대는 가장 약해 빠진 말만 얻을 수 있었다. 독일측의 사절단이 관찰한 결과 루마니아군의 보급 마차는 한 대당 겨우 탄약 상자 두개만 싣고 있었다.(더 실으면 말이 마차를 끌 수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마차 수송대는 규모만 클뿐 비 효율적이었다. 루마니아군이 참전할 당시 그 군대는 이동 정비소가 없었으며 운송수단들은 순식간에 고장으로 퍼졌다. 게다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은 기동전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안되는 보급 능력을 기동전에는 별 쓸모 없는 철조망 같은 것을 수송하는데 사용했다. 심지어 가구를 나르는데 트럭을 사용하기도 했다. 독일측은 수송이야 말로 루마니아군의 가장 큰 고충이라고 판단했다. 루마니아 제 3 야전군 사령부는 수송능력의 한계는 국경에서 50km까지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문제는 당연히 기갑부대의 작전 반경 제한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대의 형편없는 훈련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장비와 예산부족이 원인이었다.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전차를 기동훈련에 내보내는 것을 꺼려했는데 훈련을 하다가 고장이 나 버리면 실전에 투입할 수 없고 교체할 차량도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비와 예산 부족 때문에 훈련은 이론적인 면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의 독일군이 장비하나 없이 훈련만 잘 했다는 점으로 볼 때 루마니아군은 장비 문제가 아니라 열의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과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기갑병과에 속한다는 것이 특별히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으므로 기갑 장교들의 자질도 우수하지 못 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이나 루마니아 군 자체가 인정하듯이 독일인 교관들이 교육을 담당하기 전 까지 루마니아군 기갑 장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에 별 관심도 없었으며 스스로 기량을 연마하려는 열의도 부족한 상태였다.
독일인 교관들은 독일에서 성공한 방식대로 루마니아군을 아래에서부터 뜯어고쳤다. 먼저 병사 개개인부터 교육을 시켜서 점차 단위 부대를 높여가며 훈련을 시켜 나중에 완전한 사단급 기동훈련을 하려 했다. 그러나 루마니아군 병사들의 기초적인 훈련 부족은 이 계획을 좌절 시켰다. 1941년 여름까지 기갑과 차량화 보병은 소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며 포병은 포대 단위 훈련을 마쳤으나 사단 참모들이 지적했듯이 공병과 수색대는 훈련일 수가 18일에 불과했고 통신대는 무전기가 부족해 훈련을 하지 못했다. 결국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실전에 투입될 때 까지도 사단차원의 제병협동 훈련을 해 보지 못 했다.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간부들의 질적 수준은 물론 숫적인 문제도 책임 지고 있었다. 기계화 부대의 장비는 복잡해서 운용 인력의 교육과 훈련이 중요했다. 전차 부대는 육군내에서 가장 현역의 비율이 높았다. – 전쟁이전에 각 기갑 연대 병력의 25.5%가 장교와 부사관 이었다. 같은 시기에 포병 연대의 경우는 13.8%만이 간부였다. 그러나 총 사령부는 전투손실을 보충할 보충 병력의 양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특히 루마니아가 농업국 이어서 기술 교육을 받은 인력이 크게 부족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전쟁이 터지고 첫 전투를 치르고 나서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 부대의 인력은 특수한 훈련이 필요하고 양성에 1년 정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손실을 보충할 인력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독일의 군사 고문들은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취약성을 고려해서 사단의 임무를 돌파 작전 보다는 “일반적인 차량화 보병사단으로서 쉬운 임무에 투입할 것”을 강조했다. 사단 사령부는 특히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했으며 사령부의 간부들은 보통 보병이나 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제 1 기갑사단은 훈련도 부족했으며 장비와 인력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독일 군사 고문단은 최소한 사단 병사들에게 “엘리트”의식을 심는데 성공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루마니아 장교단에 발전된 기갑 교리를 성공적으로 전수할 수 있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남부전선에 투입된 유일한 독일의 동맹국의 기계화 부대였다. 초기에 이 사단은 독일 제 11 군에 배속되었다. 오뎃사 포위전이 있기 전 까지 사단은 별 다른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 부대와의 교전만을 벌였다. 게다가 운도 좋아서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전력과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루마니아군에 관해 연구하는 서방측 작가들의 흔한 실수 중 하나는 루마니아군이 작전을 수행한 오뎃사 군관구(Одесский Военний Округ)에 소련군의 대규모 기갑 집단이 존재했다고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뎃사 군관구-개전 직후에 남부 전선군(Южный Фронт)으로 개칭됨-에 있던 3개 기계화 군단 중 두개 군단은 남서 전선군(Юго-западый Фрони)으로 이동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제 2 기계화 군단은 주로 독일군 사단들과 교전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만이 루마니아군을 상대로 투입되었으며 그 숫자도 기껏 탱크 10대 안팎의 소규모 집단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기껏해야 비슷한 수준의 소련군 기갑 부대를 상대했으며 질적으로도 별 차이가 없는 상대였다. 소련 제 2 기계화 군단은 겨우 60여대의 신형 전차만 보유했으며 나머지 전차들은 BT-5,7, T-26등의 구식 전차였다.
첫 2주간의 작전에서 제 2 제대로 운용되던 사단은 키쉬네프(Kishnev) 서쪽에서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을 저지하고 있던 소련 제 95 소총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드네스뜨르(Днестр) 강으로 향하는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위를 방어하던 소련 기병 부대를 뚫고 언덕이 많은 지역을 돌파해서 키쉬네프를 북쪽-소련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하여 점령했다. 루마니아 군사사가들은 이것을 1941년에 사단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단 사령부는 이성공을 신속하고 과감한 기동에 의한 것 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기갑 사단의 장교들은 루마니아군에서 흔치 않게 과감한 결단력과 주도력을 보였다. 물론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이 소련군 보다 숫적으로 세배 우세했다는 점도 승리에 상당 부분 작용은 했을 것이다. 사단은 키쉬네프 시가지 공격에 보병 지원없이 1개 기갑대대만을 투입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소련군 주력은 시 서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가전에서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1개 기병 중대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루마니아 저항군 게릴라들의 지원만 받고 싸웠다. 그리고 사단은 소련 95 소총사단을 격퇴하기는 했으나 독일 제 54 군단이 명령한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는 실패했다. 그러나 베사라비아의 주도인 키쉬네프의 수복은 루마니아측에게는 자랑스러운 일 이었다. 게다가 루마니아 전차 부대는 독일 제 72 보병사단 보다 10시간 먼저 시내에 진입한 것이다.
사단의 최초의 실전 투입은 이 사단이 장비 보족과 기동전에 대한 경험 부족, 그리고 심각한 기초 훈련 부족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음을 보여줬다. 안토네스쿠는 개전 직전에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우리의 공군과 기갑사단은 소련군이 운신할 공간을 없애 버릴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다. 그러나 안토네스쿠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소련군 후위 부대의 소규모 저항으로 진격이 지체되는 것은 물론 야지 기동에서 조차 어려움을 겪는 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7월 6일, 9일, 15일에 각각 사단은 퇴각하는 소련군의 후방으로 돌파해서 이들이 모길례프, 소로차, 티기나 등 드네스뜨르 강의 도하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바았다. 그러나 이 임무는 실패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소련군을 쁘루뜨 강과 드네스뜨르강 사이에서 포착 섬멸하는데 실패했으며 소련군은 후퇴에 성공한 사단들을 오뎃사에 투입하거나 아마도 끄림 반도에 까지 투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사단 사령부는 비가 오고 난 뒤 악화된 도로 사정이 기동을 제약했다고 보고했다. 평균적인 독일 기갑사단에서는 차량의 20%가 반 궤도 차량이었다. 소련군 역시 농업용 트랙터를 징발함 으로서 어느 정도 야지 기동능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완전히 바퀴달린 차량에만 의존했으며 이들은 진창으로 변한 비포장 도로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비가 오는 날에는 말과 도보로 움직이는 보병사단들이 제 1 기갑사단 보다 더 기동력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단은 수색대의 오토바이들이 베사라비아의 열악한 도로 사정에 가동불능이 되어버려서 위험한 삼림 지대에 정찰도 없이 전차를 투입해야만 했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독일 제 198 보병사단이나 루마니아 제 35 보병사단 처럼 소련 전차의 매복 공격에 당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좋은 운 때문이었다. 사단의 차량들의 기동성 부족으로 전체 사단은 종종 먼 거리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며 제병 협동 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또한 루마니아 총 사령부는 독일측의 잇다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교통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수송로를 따로 분리하지 않아 생긴 교통 체증(독일군의 차량화 보급 부대와 루마니아군의 마차들이 도로에 뒤섞이는 결과를 초래했다)으로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의 보급 문제는 심각한 곤란을 겪었다.
독일과는 달리 루마니아측은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자연 문제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사라비아는 얼마 전 까지 루마니아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사단이 잘아는 지형에서 조차 기동에 실패한 원인은 전쟁 이전에 장거리 기동훈련을 한번도 제대로 실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군은 이런 결점을 기동전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실패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에 자신들을 가르친 프랑스인들 처럼 통신 문제를 경시했으며 이는 루마니아군 교범에도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역동적인 전장 환경에서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는데 통신에 대한 준비 부족은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R-35 전차는 무전기가 아예 없었으며 LT-35 전차의 무전기는 교신 거리가 짧아서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전차장들은 교전중인 위험한 상황에서 조차 수신호를 위해서 해치를 열고 나와야 했다. 개전 직전에야 사단은 7대의 장거리 무전기를 획득했지만 이조차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이것으로는 기껏해야 1개 대대에 한대가 돌아갈 수준이었다. 7월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무전기 다섯대는 고장으로 사용 불능이 되었으며 나머지 두 대의 교신 거리는 불과 30km에 그쳤다. 독일 병기국은 각 기갑사단은 군 사령부와의 교신을 위해 교신거리 250km 수준의 무전기가 있어야 하며 사단 예하 부대는 교신거리 50km의 무전기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루마니아는 전자 산업이 전무했기 때문에 이 조잡한 무전기 조차 제대로 교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전을 겪고 나서 사단 본부는 무전기 교신 부호가 복잡해서 기동전하에서 제대로 사용하기가 골치 아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단 본부는 교신 수단의 부족으로 작전에 큰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행히도 이 점에서는 소련군 역시 루마니아군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남부 전선군 사령관인 이반 뜔레네쁘(Ибан В. Тюленев) 대장은 1941년 7월에 통신 수단의 부족으로 야전군과 예하 군단들은 소속 사단들의 위치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사실상 소련군의 상급 제대들은 예하 부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사단장들은 “자발적으로”움직였다.
루마니아 군이 전쟁 발발 이전에 겪고 있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수리-정비 부대의 조직에 실패했다는 점 이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창설이후 주둔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는 훈련을 나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단은 기동력을 가진 정비대를 갖추지 못했다. 루마니아 동부(그리고 나중에는 베사라비아로 이동한)에 있는 정비소는 기초적인 수리밖에 하지 못 했다. 반면 독일군 기갑 연대가 예하에 거느린 야전 정비 중대는 야외 기동시에도 엔진 교체를 할 수 있었다. 사단 사령부는 상급 사령부인 독일측에 전차의 예비 부품 보급을 끊임없이 요청했으나 독일측은 “단 하나의 부품도 공급해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첫 3주간 별다른 큰 격전을 치루지도 않았는데 사단은 가지고 있는 전차의 절반 이상을 기계 고장으로 상실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 뒤에 사단은 장비들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10일간 후방으로 재 정비를 위해 이동했다. 이것은 모두 사단이 자체적인 수리는커녕 장비 정비 능력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초적인 훈련 부족으로 수많은 작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전차들은 전투 중에 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해 전차병들이 전차 안에서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으로 생긴 화약 가스에 중독되었다. 이런 문제는 전쟁전에 훈련만 충분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들이었다. 심지어 르노 FT-17같은 구식 전차 조차 이런 훈련을 하는데 충분했다.
키쉬네프를 점령한뒤 사단 정비소가 이곳으로 이동해 왔으며 제 1 기갑사단은 독일 제 11군에서 루마니아 제 4군 예하로 배속 변경되었다. 우선 사단은 병력과 장비 상태에 알맞은 임무를 맞게 되었다. 사단은 루마니아 제 5 군단에 배속되어 소련군의 후위 부대를 격파하고 하루 평균 30km 정도씩 동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8월 10일, 사단에 남쪽으로 진격 방향을 바꿔 오뎃사를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루마니아 기갑사단이 기습을 통해 오뎃사를 점령한다는 것은 능력 밖의 임무였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키쉬네프 탈환때의 경험이 다시 반복 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사실 오뎃사의 동쪽 방어선은 가장 소련군의 방어가 약한 곳 이었다. 소련군은 루마니아군의 주공이 시의 서쪽과 남쪽에 집중되리라 판단했으며 2개 소총사단이 각각 정면 20~25km를 담당했다. 반면 동쪽 방어선에는 잡다한 부대를 긁어 모아 편성한 12,548명의 병력을 가진 혼성 부대가 정면 55km의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쟁 전 소련군의 교범이 명시한 km당 방어 병력의 4분의 1 수준이 불과한 것 이었다. 그러나 키쉬네프와 달리 오뎃사의 소련군 해안 군 사령부(Командовал дивизией-Приморской)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뎃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키쉬네프는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으나 해안 군 사령부는 오뎃사외곽에 3중의 요새화된 방어망을 구축해 놓고있었다. 설사 기갑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가더라도 오뎃사로 향하는 최 단거리 루트에는 바다와 소금 호수 사이에 부드러운 모래로 이루어진 지협이 있었다. 이곳은 아주 이상적인 방어 지대로 만약 루마니아군이 진입하면 소련군은 호수의 댐을 폭파시켜서 바로 저지대를 침수시킬 수 있었다.
기갑사단의 첫 공격은 먼저 도착한 전차들과 1개 차량화 보병연대만 가지고 감행되었다. 사단 포병과 사단 직할 지원부대들은 후방에 뒤쳐저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8월 11일의 공격에서 기갑사단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방어선을 돌파하기는커녕 반격에 되 밀려 나왔다.
다음날 전차들이 야포를 견인해 전선까지 이동시켰고 루마니아 제 5 군단은 제 15 보병사단과 제 1 기병여단을 증원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5 군단은 병력을 집중하지 않고 제 1 기병여단을 소련군 방어선 최 외곽으로 투입해 버렸다. 그리고 제 15 보병사단장은 보병들에게 전차 지원을 시키자는 기갑사단장의 제안을 묵살하고 보병 단독의 공격을 주장했다. 그 결과 기갑사단과 제 15 보병사단은 따로 따로 공격에 나섰고 그 결과 소련군의 단 2개 소총연대에 차례로 격퇴당했다. 게다가 이중 1개 연대는 개전 초기 실전 경험을 겪은 부대였으나 나머지 1개 연대는 루마니아측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흑해 함대에서 긁어 모아 편성한 해군 수병들로 편성된 부대였다. 비록 해군 보병들이 왕성한 사기와 전투의욕을 가졌지만 보병 훈련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 두개 소총연대는 3일 동안 루마니아 15 보병사단과 제 1 기갑사단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루마니아 기갑사단은 전선에서 이탈해 다른 지구로 이동했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기갑사단을 오뎃사 방어선의 북서쪽 지구에 정면 공격하는데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북서쪽 방어지구는 동쪽 지구 보다 전차 운용에 훨씬 적합한 지형으로 평탄한데다가 전차가 이동시 은폐가 가능한 야트막한 언덕들이 산재해 있었다. 소련 해안 군의 병력은 겨우 제 1 방어선만 커버할 수준이었기 때문에 제 1 방어선의 돌파만 성공하면 전차 부대는 충분히 성공을 거둘수 있었다. 비록 소련군의 대전차포는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에게 살인적인 위력을 발휘했지만 오뎃사의 대전차 방어는 형편없었다. 8월 17일 당시 북서쪽 방어지구에는 방어 정면 1km당 6.4문의 야포가 배치되어 있는 수준이었으며 이중 2문 정도가 대전차 포 였다. 소련군은 전쟁 이전의 교범에서 대전차 방어에는 최소한 1km당 문의 대전차포가 대전차 장애물과 함께 투입되어야 하며 적의 공격에 취약한 지형에서는 1km당 25문의 대전차 포가 필요하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단은 상급 지휘관들의 경솔한 행동으로 전력이 약화되었다. 기갑사단이 독일 제 11군에 배속되었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사단의 통합성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해 훈련된 인력은 독일 제 11군과 루마니아 제 3 야전군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제 4 야전군에 사단이 배속됐을 때 사단 지휘관들은 상습 지휘관들이 여전히 옛 교리에 얽매여 있음알 알게 되었다. 독일식의 기동전 이론을 습득한 기갑사단 간부들과 여전히 전차를 보병 지원에 사용해야 된다고 믿는 상급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의 폭은 더 깊어졌다. 전쟁 이전에 루마니아 군의 교리에서 전차의 역할은 미미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군 고급 지휘관들은 전차가 어떻게 보병을 지원해야 하는가에 대해 모호한 인식만 가지고 있었다. 총사령부는 나중에 “초기의 전차 운용에서 전차 부대는 전차의 성격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루마니아군은 전차를 야간에 포도 밭이나 수풀에 매복한 적 보병을 몰아내는데 투입되었다. 사실 이것은 보병이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임무였다.
8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단이 귀중한 전차들을 방어전에서 소모해 버리는 동안 나머지 수많은 보병들은 후방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급 지휘관들은 기갑사단이 보유한 장비를 모조리 다른 부대로 넘겨 버렸다. 8월 13일에 1개 기갑 중대는 사단 포병 주력과 함께 제 1 기병여단과 제 15 보병사단에 지원용으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이 중대는 “부적절한 운용으로” 순식간에 전멸당했다. 나머지 기갑연대 병력도 계속해서 분리되어 나갔다. 1개 기갑대대는 제 11 보병사단에 배속되었고 다른 대대의 1개 중대는 제 7 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아마 가장 끔찍한 착오는 보전 합동 훈련을 체득한 사단 차량화 보병연대를 다른 지구에 보병 부대로 돌려 버린 것 일 것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항공 정찰로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분산 배치 현황을 파악했고 해안 군 사령부는 생포한 루마니아 포로를 심문해서 전차 부대의 투입 시기와 장소를 알아 냈다. 소련군은 시내에 배치된 대공포까지 동원해서 루마니아군의 주공방향에 집결시켰다. 또한 보병들에게 대전차 공격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대량의“몰로토프 칵테일”을 지급했다. 또한 루마니아군이 전차 공격에 보병을 수반할 것을 대비해서 제 95 소총사단 사령부는 40m당 1 정의 밀도로 기관총을 배치시켰다.이렇게 해서 소련군은 그들이 흔히 사용한 전형적인 화력 집중을 달성했다.
8월 18일,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사실상 섬멸되었다. 루마니아군의 경전차들은 전과 확대와 추격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요새화된 적 방어선의 정면 돌파에는 부적절 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제 4 군 사령부는 보병이 적 방어선을 돌파하고 공병이 적 지뢰원과 대전차 방어를 분쇄한 이후에야 전차를 전과 확대를 위해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소련군의 기관총 화망에 보병의 진격은 돈좌되었고 보병사단에 배속된 기갑 대대의 운명은 보병 사단장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한 사단장이 보고했듯이 “적 자동화기와 박격포 사격이 맹렬하여 본 관은 전차들에게 공격을 선도할 것을 명령했”다. 태어나서 처음 전차를 구경한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를 따라 잡는데 실패했고 전차들은 소련군의 맹렬한 대전차 포 방어에 걸려들었다. 참호선을 돌파한 전차들은 그 후방에 준비된 대전차 장애물에 걸려 대부분 격파되었다.
사단 사령부의 일지는 “32대의 전차가 소모되었다”는 씁쓸한 기록을 남겼으며 전차 전술에 무지한 보병 지휘관들에 책임이 있다고 적었다. 총 참모부는 전차 전술에 대한 이해는 윗 계급으로 갈수록 형편없어 진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사단의 마지막 공격시 지휘관들이 내린 결정을 보면 고급지휘관들은 기갑 전문가와은 거리가 멀다는 이 평가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제 4군 사령부는 8월 18일 공격에 R-35를 장비한 제 2 기갑연대로 기갑사단의 전력을 강화하지 않고 다른 공격지구에 투입해서 헛되이 소모만 시켰다. 이제 전투가 기동전에서 진지전을 바뀌고 있는 시점이어서 방어력이 약한 LT-35보다는 장갑이 강력한 R-35가 소련군 거점에 대한 공격에 더 필요했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군 지휘관들이 계속해서 별다는 정찰 없이 전차대를 투입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대전차 함정 조차 발견하지 못한채 걸려들어 소련군 대전차포에 격파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오뎃사 포위전이 끝난다음에야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는 “요새화된 방어선에 대한 공격은 강력한 포병과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중전차가 적합하며 아군이 가진 경전차는 방어선이 보병에 의해 돌파당한뒤 성과를 확대하는데에만 쓸모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련 해안 군은 전투 초기에는 전차가 한대도 없었으나 나중에 17대의 경전차와 12대의 Tankette가 보급되었다. 다시 15대의 경전차가 보급되었고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Tankette 50대가 보급되었다. 비록 트랙터를 개조해 만든 조잡한 차량들이 별로 성능이 좋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서 오뎃사의 소련군은 포위한 루마니아군과 비슷한 기갑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별 볼일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10월 2일에 전차를 투입해서 행한 반격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루마니아군은 소련군 포로를 심문해서 소련 전차대의 공격 방향과 시간을 알아냈지만 여기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루마니아군의 방어진지는 붕괴되었고 소련군은 불과 7대의 차량만 잃고 종심 8km~10km를 돌파했다.
이렇게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이 각기 다른 성과를 거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과 훈련 수준의 차이였다. 비록 공격에 투입된 차량중 35대만이 실제 전차였고 나머지는 농업용 트랙터를 개조한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소련 지휘관들은 상세한 작전을 짜서 보병과 포병(카츄사 로켓을 포함하여), 그리고 항공기의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했다. 반면 루마니아군은 대략적인 계획만 짜고 항공지원만 받는 상황에서 전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소련군 대전차포의 성능은 우수했지만 루마니아군에겐 대전차 포탄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 해안 군은 보병들에게 대전차 전술을 철저히 가르쳤지만 루마니아 보병들은 대부분 태어나서 처음 탱크를 구경한 경우가 많았다. 독일 고문단은 “루마니아 보병들은 전차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제 1 기갑사단은 오뎃사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대한 기록에서 루마니아군 전차가 참호선을 돌파해도 고립된 소련군 거점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고 적었다. 반면 루마니아군 보병들은 전차가 나타나기만 해도 공황상태에 빠져들어 전선 붕괴를 가져왔다.
8월 18일의 재앙적인 공격이 있기 전날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에게 독일군의 공세 지원을 위해 제 1 기갑사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뎃사에 대한 공격이 끝나고 남은 가동 전차는 23대에 불과했다. 2개 기갑연대의 잔여 병력은 계속해서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으며 거듭하는 정면공격으로 전차만 잃어갔다. 루마니아는 독일측의 지원 없이 전차를 보충할 능력이 없었다. 라두 다비데스쿠가 몇 년전에 예상했듯이 국가가 자체적으로 기계화 전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기계화 부대는 소모되어 사라져 버리는 것 이었다.
결 론
사단이 완전히 섬멸된 뒤 루마니아 육군 참모총장은 효율적인 기계화 전력을 육성하지 못한 결과 “우리는 먼저 국경선으로 그 값을 치뤘고 이제는 그 열 배가 넘는 피로 값을 치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화 부대의 발전을 저해한 육군의 보수적 장군 중 한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루마니아의 기갑부대 발전은 네 가지 주요한 요소에 의해 저해되었다. 첫째는 루마니아의 전쟁 이전 재정 정책이고 둘째는 낙후된 공업, 셋째는 육군의 뒤떨어진 교리, 넷째는 군 전반의 훈련 부족이었다.루마니아는 재정 부족으로 독립된 전차 생산 공업을 육성하지 못 했으며 얼마 안되는 재원을 자국의 뒤떨어진 교리에 적합한 값싼 무기를 획득하는데 투입했다. 물론 이런 방식은 외국으로 부터의 기술 독립과 좀더 쉽게 유지와 현대화가 가능했다. 육군의 교리는 애당초 전차를 부차적으로 인식했으며 이것은 전반적인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장비의 부족과 기갑 병과에 대한 인식 부족은 장기간의 발전 지체를 불러왔으며 결과적으로 기갑병과 간부들의 자질 저하를 가져왔다. 장교들은 전술 발전에 별다른 열의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일정 수준의 훈련을 유지하는 것 조차 어려웠다.
외교 정책의 전환과 독일과의 동맹으로 인한 전략 변화는 루마니아 군 내에서 기갑 병과의 위치를 변화시킬 기회로 다가왔다. 비록 독일인 교관들의 훈련은 독일인들이 기대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 했으나 루마나아 기갑 장교들은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기동전의 원리와 독립된 전차부대가 제병 협동작전으로 이룰수 있는 가능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새로운 교리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장비와 충분한 훈련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해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간의 훈련만 마친 채 사단은 실전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얼마안되는 전투 기간동안 장비의 수량과 성능 부족, 전쟁이전의 정체 기간으로 인한 훈련의 부족등으로 많은 문제에 직면했다.
이런 약점은 사단이 기습이나 짧은 거리의 추격전에 투입되었을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독일 제 11군 사령부는 루마니아 기갑사단의 문제점을 잘 인식했으며 이에 맞는 임무에만 투입했다. 그러나 기갑사단이 루마니아군 상급 사령부의 지휘하에 들어갔을 때 이들은 기갑전에 무지한 상급 지휘관들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었다. 독일 군사 사절단은 루마니아 기갑병들의 용기에는 찬사를 보냈지만 “상급 부대가 사단에 부여하는 임무는 사단의 능력 밖이었기 때문에 사단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루마니아군 총 사령부 역시 유사한 결론을 내렸다. 기갑부대는 “소규모의 국지적 교전에서도 별 성과를 못 거두고 소모되어 갔다.”
2006년 12월 29일 금요일
돈 없는 군대의 기계화 : 1930년대 이탈리아군의 사례
한국 군대는 한정된 예산으로 챙겨야 할 게 많다 보니 첨단장비를 도입하면서 기존의 재래식 전력도 양호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항상 봉착해 있습니다.
이렇게 예산의 제약을 받는 국가가 방대한 재래식 전력을 유지하면서 또 첨단 전력을 확보하려고 고분 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라면 1920~30년대의 이탈리아가 생각납니다. 한국과 종종 비교되는 국가이기도 하군요.
이탈리아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가난한 국가였지만 1차 대전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데다 전쟁으로 별 재미를 못 봤기 때문에 계속 강대국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위태위태 했습니다. 하다못해 겨우 식민지 전쟁 수준인 이디오피아 전쟁조차 약간 과장을 하면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디오피아 전쟁으로 1935/6년과 1936/7년 에는 국방비가 크게 증가해 재정 적자가 십억 리라 단위를 돌파했다지요.
이탈리아와 같이 가난한 국가에서는 자원 배분이 매우 신중하게 이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대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 즉 보병과 기병이 있었고 이들을 유지하는 것도 이탈리아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전차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1920년대 동안은 눈에 띄는 기계화부대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쾌속사단(Divisione Celeri) 이었습니다. 쾌속사단은 기병을 주축으로 편성됐는데 1933년부터 대대급의 전차부대가 배속됐습니다. 사실 기병과 전차를 결합하는 것은 이 당시 가난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을 가졌고 많은 수의 보병과 기병부대를 보유한 폴란드나 루마니아가 비슷한 방법을 모색했지요.
스페인 내전에서는 차량화 부대인 리토리오(Littorio) 사단에 전차대대가 배속돼 기갑사단 비스무리하게 운용됐습니다만 임시 편제였으니 제대로 된 기계화부대로 분류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탈리아 육군이 제대로 된 정규편제의 기계화부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37년이었는데 이것 조차도 여단급 제대에 불과했습니다.
1937년에 편성된 1 기갑여단(Brigata Corazzata)은 1개 Bersaglieri 연대와 3개 기갑대대, 그리고 기타 직할대로 편성됐는데 1937년에 실시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7년 말 까지 2 기갑여단이 편성을 완료해 이탈리아는 2개 여단의 독립 기계화부대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육군의 기계화를 대규모로 실시하기에는 밑천이 부족한 국가였습니다. 1939년에 이탈리아는 총 71,000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이 중 군에서 징발해서 쓸만한 트럭은 12,000대였고 나머지는 일반 승용차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자동차 공업은 기술적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규모가 영세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하니 전시 동원을 하더라도 생산을 늘리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참고로, 이탈리아가 1940년 6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생산한 군용 차량은 최저 83,000대에서 최고 120,000대로 추정됩니다. 전시 동원치고는 형편 없군요.)
공업력은 둘째 치고 이미 많은 수의 보병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보병사단의 유지와 장비 교체에 들어가는 예산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기갑여단이 1937년에 창설된 것도 보병사단의 장비 교체에 우선순위가 밀리던 와중에 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탈리아육군이 본격적으로 사단급 기동부대의 편성을 시작한 것은 1939년 부터였습니다.이탈리아 육군도 자국의 공업력과 경제력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확장은 2개 기갑사단과 2개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편성된 기갑군단(Corpo d’Armata Corazzata) 정도에서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기갑사단은 기존의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확대 편성할 계획이었고 차량화 보병사단은 이미 편성된 부대가 있었으니 참 경제적인 계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기갑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개 쾌속사단으로 편성된 쾌속군단(Corpo d’Armata Celere)을 편성해 두 개의 군단으로 기동군을 편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물론 쾌속사단들도 이미 편성돼 있었으니 기갑여단을 기갑사단으로 확장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예산이 소요될 건덕지가 없었습니다.
아아… 슬픈 이탈리아.
새로 편성되는 기갑사단은 4개 기갑대대를 가진 1개 기갑연대, 1개 Bersaglieri 연대, 1개 포병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기존의 기갑여단들은 기갑전력과 포병전력을 대폭 증강했는데 쓸만한 중형전차나 중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기갑사단들도 어딘가 허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은 그냥 편제만 보더라도 여러모로 부실했습니다. 보병이 1개 연대 뿐인데다가 전차들은 아군에게 더 지장을 주는 경전차 뿐이라 전투력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편제상 대수는 184대였는데 전차의 성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육성한 1939년 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중형전차의 개발과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 기갑장비의 개선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육군은 보병사단과 쾌속사단의 장비 교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새로운 실험을 하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수단에 자원을 더 배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1930년대의 이탈리아 육군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1933년 부터 이미 2,000대가 넘는 CV33계열 전차(?)가 생산돼 있었기 때문에 기계화부대 편성과 전차 개발에 예산을 더 집어 넣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체가 얼마 안있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걸 알았다면 장군과 관료들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 졌겠지요. 그나마 1939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M11/39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물건이었고 그 후속작 M13/40도 별로 나을건 없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CV33 계열은 경전차로 분류하기조차 민망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는 전설적인 신화까지 만들어 냈는데 바로 이해 12월 15일에 벌어진 Dembeguina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디오피아군은 이탈리아군 보병들을 쓸어 버린 뒤 고립된 CV33들의 궤도를 별다른 장비도 없이 끊어 버린 다음 간단히 불을 질러서 격파하거나 그냥 전차병들을 끌어내 때려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선회포탑이 없고 방어력과 무장 모두 부실한 CV33은 보병지원이 없으면 말 그대로 철제 관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여러 차례 피박을 본 이디오피아 전쟁의 결과 겨우 이탈리아 육군은 선회 포탑을 가진 중형전차 개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만 그 결과 나온 M11/39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3호 전차 같은 걸출한 물건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사족 하나, 일부 군사사가들은 이탈리아 육군이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이디오피아 육군에 대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라는 걸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경향도 보이더군요.)
사단 포병은 겨우 24문의 75mm포를 가진 2개 대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지원 화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최저 105mm급을 장비한 독일군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화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대공화기나 대전차포도 부족했습니다. 각 기갑사단은 8문의 대전차포와 16문의 대공포를 보유했는데 대전차포의 부족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1940년 1월에 이탈리아 측에 대공포와 대전차포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정작 이탈리아는 자국 군대를 장비할 수량도 채우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무솔리니는 이 거래를 굴욕으로 생각하고 사위인 치아노에게 거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지요.
어쨌거나 뭔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갑사단 창설은 진행됩니다.
가장 먼저 편성된 기갑사단은 132 기갑사단 Ariete로 제 2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1939년 2월 1일에 편성됐습니다. 두 번째 기갑사단은 131 기갑사단 Centauro로 짐작하시다 시피 제 1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같은 해 4월 20일에 편성됐습니다. 이 두개 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을 위해 황급히 병력과 장비를 보충 받았는데 1939년 전반기 동안 80% 정도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중 Centauro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에 투입됐는데 알바니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 고장으로 상당한 수의 장비를 잃었다고 합니다. CV33, L3/35는 산악지형에서 종종 기계고장을 일으켜 행군을 방해했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귀환한 Littorio사단이 정식 기갑사단으로 승격돼 133 기갑사단 Littorio 가 됐습니다.
두체가 호기롭게 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 중 그나마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32, 133 두개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133 기갑사단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투입된 뒤 1941년 말이 돼서야 장비교체를 완료했고 1942년 1월에야 주 전장인 북아프리카로 파견됩니다.
나머지 하나인 131 기갑사단은 1940년 10-11월의 그리스 침공에서 그리스군에게 큰 손실을 입어 12월에는 예비대로 돌려져 재 편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단은 1941년 1월 다시 전투에 투입됐고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는 133 기갑사단 Littorio 와 함께 그럭저럭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마친 뒤 장비교체를 위해 1941년 3월부터 재편에 들어가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의 전투로 전차 소모가 급증한 결과 장비 보충이 더뎌 1942년이 돼서야 재편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갑사단에 배속돼 있던 4개 기갑대대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리비아로 파견되는 바람에 기갑사단들의 편성은 더욱 더 곤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실제로 영국과의 전쟁이 개시될 당시 이탈리아군이 투입할 수 있었던 기갑사단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32 기갑사단 Ariete는 1941년 1월, 영국군의 반격으로 먼저 파견된 1, 2, 3, 5 기갑대대가 박살 난 뒤에야 리비아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기갑부대 창설은 국가의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 낙후된 기술수준이 결합돼 처음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열강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고작 여단급 전력에 불과한 기갑사단 3개를 편성하고도 자원이 부족해 허덕였으니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선의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밑천이 달랑달랑하니 무솔리니가 꿈꾼 기적을 이룰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고서적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Calculations : Net Assessment and the Coming of WW II
Gerhardt Schreiber, Die politische und militaerische Entwicklung im Mittelmeerraum 1940/41, DRZW band 3
Ian W. Walker,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
Vera Zamagni, Italy : How to lose the war and win the peace,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이렇게 예산의 제약을 받는 국가가 방대한 재래식 전력을 유지하면서 또 첨단 전력을 확보하려고 고분 분투한 대표적인 사례라면 1920~30년대의 이탈리아가 생각납니다. 한국과 종종 비교되는 국가이기도 하군요.
이탈리아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가난한 국가였지만 1차 대전으로 막대한 채무를 지게 된데다 전쟁으로 별 재미를 못 봤기 때문에 계속 강대국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 조차 위태위태 했습니다. 하다못해 겨우 식민지 전쟁 수준인 이디오피아 전쟁조차 약간 과장을 하면 국가총력전에 가까운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디오피아 전쟁으로 1935/6년과 1936/7년 에는 국방비가 크게 증가해 재정 적자가 십억 리라 단위를 돌파했다지요.
이탈리아와 같이 가난한 국가에서는 자원 배분이 매우 신중하게 이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대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 즉 보병과 기병이 있었고 이들을 유지하는 것도 이탈리아에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1차 대전 당시 전차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긴 했지만 1920년대 동안은 눈에 띄는 기계화부대의 발전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쾌속사단(Divisione Celeri) 이었습니다. 쾌속사단은 기병을 주축으로 편성됐는데 1933년부터 대대급의 전차부대가 배속됐습니다. 사실 기병과 전차를 결합하는 것은 이 당시 가난한 국가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을 가졌고 많은 수의 보병과 기병부대를 보유한 폴란드나 루마니아가 비슷한 방법을 모색했지요.
스페인 내전에서는 차량화 부대인 리토리오(Littorio) 사단에 전차대대가 배속돼 기갑사단 비스무리하게 운용됐습니다만 임시 편제였으니 제대로 된 기계화부대로 분류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탈리아 육군이 제대로 된 정규편제의 기계화부대를 가지게 된 것은 1937년이었는데 이것 조차도 여단급 제대에 불과했습니다.
1937년에 편성된 1 기갑여단(Brigata Corazzata)은 1개 Bersaglieri 연대와 3개 기갑대대, 그리고 기타 직할대로 편성됐는데 1937년에 실시한 여러 차례의 기동훈련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7년 말 까지 2 기갑여단이 편성을 완료해 이탈리아는 2개 여단의 독립 기계화부대를 보유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육군의 기계화를 대규모로 실시하기에는 밑천이 부족한 국가였습니다. 1939년에 이탈리아는 총 71,000대의 차량을 생산했지만 이 중 군에서 징발해서 쓸만한 트럭은 12,000대였고 나머지는 일반 승용차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자동차 공업은 기술적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규모가 영세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숙련된 노동력이 부족하니 전시 동원을 하더라도 생산을 늘리기는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참고로, 이탈리아가 1940년 6월부터 1943년 6월까지 생산한 군용 차량은 최저 83,000대에서 최고 120,000대로 추정됩니다. 전시 동원치고는 형편 없군요.)
공업력은 둘째 치고 이미 많은 수의 보병사단이 있었기 때문에 보병사단의 유지와 장비 교체에 들어가는 예산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기갑여단이 1937년에 창설된 것도 보병사단의 장비 교체에 우선순위가 밀리던 와중에 된 것이라고 하지요.
이탈리아육군이 본격적으로 사단급 기동부대의 편성을 시작한 것은 1939년 부터였습니다.이탈리아 육군도 자국의 공업력과 경제력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갑부대의 확장은 2개 기갑사단과 2개 차량화 보병사단으로 편성된 기갑군단(Corpo d’Armata Corazzata) 정도에서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기갑사단은 기존의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확대 편성할 계획이었고 차량화 보병사단은 이미 편성된 부대가 있었으니 참 경제적인 계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기갑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3개 쾌속사단으로 편성된 쾌속군단(Corpo d’Armata Celere)을 편성해 두 개의 군단으로 기동군을 편성한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습니다. 물론 쾌속사단들도 이미 편성돼 있었으니 기갑여단을 기갑사단으로 확장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예산이 소요될 건덕지가 없었습니다.
아아… 슬픈 이탈리아.
새로 편성되는 기갑사단은 4개 기갑대대를 가진 1개 기갑연대, 1개 Bersaglieri 연대, 1개 포병연대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기존의 기갑여단들은 기갑전력과 포병전력을 대폭 증강했는데 쓸만한 중형전차나 중전차가 없었기 때문에 기갑사단들도 어딘가 허전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은 그냥 편제만 보더라도 여러모로 부실했습니다. 보병이 1개 연대 뿐인데다가 전차들은 아군에게 더 지장을 주는 경전차 뿐이라 전투력이 매우 떨어졌습니다. 편제상 대수는 184대였는데 전차의 성능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력은 매우 약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이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을 육성한 1939년 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중형전차의 개발과 생산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결과 기갑장비의 개선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지만 육군은 보병사단과 쾌속사단의 장비 교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새로운 실험을 하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수단에 자원을 더 배분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1930년대의 이탈리아 육군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1933년 부터 이미 2,000대가 넘는 CV33계열 전차(?)가 생산돼 있었기 때문에 기계화부대 편성과 전차 개발에 예산을 더 집어 넣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도 했습니다. 물론 두체가 얼마 안있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걸 알았다면 장군과 관료들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 졌겠지요. 그나마 1939년부터 생산에 들어간 M11/39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물건이었고 그 후속작 M13/40도 별로 나을건 없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CV33 계열은 경전차로 분류하기조차 민망한 물건들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 전쟁에서는 전설적인 신화까지 만들어 냈는데 바로 이해 12월 15일에 벌어진 Dembeguina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디오피아군은 이탈리아군 보병들을 쓸어 버린 뒤 고립된 CV33들의 궤도를 별다른 장비도 없이 끊어 버린 다음 간단히 불을 질러서 격파하거나 그냥 전차병들을 끌어내 때려 죽였다고 전해집니다. 선회포탑이 없고 방어력과 무장 모두 부실한 CV33은 보병지원이 없으면 말 그대로 철제 관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여러 차례 피박을 본 이디오피아 전쟁의 결과 겨우 이탈리아 육군은 선회 포탑을 가진 중형전차 개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기 시작합니다만 그 결과 나온 M11/39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3호 전차 같은 걸출한 물건들과 비교해 보십시오)
(사족 하나, 일부 군사사가들은 이탈리아 육군이 이디오피아 전쟁에서 이디오피아 육군에 대해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라는 걸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회의적인 경향도 보이더군요.)
사단 포병은 겨우 24문의 75mm포를 가진 2개 대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지원 화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최저 105mm급을 장비한 독일군 기갑사단과 비교하면 화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현대적인 대공화기나 대전차포도 부족했습니다. 각 기갑사단은 8문의 대전차포와 16문의 대공포를 보유했는데 대전차포의 부족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한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1940년 1월에 이탈리아 측에 대공포와 대전차포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타전했는데 정작 이탈리아는 자국 군대를 장비할 수량도 채우지 못해 헉헉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무솔리니는 이 거래를 굴욕으로 생각하고 사위인 치아노에게 거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지요.
어쨌거나 뭔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갑사단 창설은 진행됩니다.
가장 먼저 편성된 기갑사단은 132 기갑사단 Ariete로 제 2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1939년 2월 1일에 편성됐습니다. 두 번째 기갑사단은 131 기갑사단 Centauro로 짐작하시다 시피 제 1 기갑여단을 근간으로 같은 해 4월 20일에 편성됐습니다. 이 두개 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을 위해 황급히 병력과 장비를 보충 받았는데 1939년 전반기 동안 80% 정도의 편제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이 중 Centauro기갑사단은 알바니아 침공에 투입됐는데 알바니아군의 저항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계 고장으로 상당한 수의 장비를 잃었다고 합니다. CV33, L3/35는 산악지형에서 종종 기계고장을 일으켜 행군을 방해했다고 하지요.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귀환한 Littorio사단이 정식 기갑사단으로 승격돼 133 기갑사단 Littorio 가 됐습니다.
두체가 호기롭게 영국에 선전포고를 할 당시 이탈리아군의 기갑사단 중 그나마 전투에 투입 가능한 것은 132, 133 두개 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133 기갑사단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투입된 뒤 1941년 말이 돼서야 장비교체를 완료했고 1942년 1월에야 주 전장인 북아프리카로 파견됩니다.
나머지 하나인 131 기갑사단은 1940년 10-11월의 그리스 침공에서 그리스군에게 큰 손실을 입어 12월에는 예비대로 돌려져 재 편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단은 1941년 1월 다시 전투에 투입됐고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는 133 기갑사단 Littorio 와 함께 그럭저럭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마친 뒤 장비교체를 위해 1941년 3월부터 재편에 들어가게 되는데 북아프리카의 전투로 전차 소모가 급증한 결과 장비 보충이 더뎌 1942년이 돼서야 재편성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기갑사단에 배속돼 있던 4개 기갑대대가 이집트 침공을 위해 리비아로 파견되는 바람에 기갑사단들의 편성은 더욱 더 곤란에 빠졌습니다.
결국 실제로 영국과의 전쟁이 개시될 당시 이탈리아군이 투입할 수 있었던 기갑사단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132 기갑사단 Ariete는 1941년 1월, 영국군의 반격으로 먼저 파견된 1, 2, 3, 5 기갑대대가 박살 난 뒤에야 리비아에 도착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기갑부대 창설은 국가의 빈약한 경제력과 공업력, 낙후된 기술수준이 결합돼 처음부터 엉망이었습니다. 열강 행세는 하고 있었지만 고작 여단급 전력에 불과한 기갑사단 3개를 편성하고도 자원이 부족해 허덕였으니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일선의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밑천이 달랑달랑하니 무솔리니가 꿈꾼 기적을 이룰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고서적
Brian R. Sullivan, The Impatient Cat : Assessments of Military Power in Fascist Italy, 1936-1940, Calculations : Net Assessment and the Coming of WW II
Gerhardt Schreiber, Die politische und militaerische Entwicklung im Mittelmeerraum 1940/41, DRZW band 3
Ian W. Walker, Iron Hulls, Iron Hearts : Mussolini’s Elite Armoured Divisions in North Africa
Vera Zamagni, Italy : How to lose the war and win the peace,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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