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독일은 점령지역에서 징발이라는 이름의 약탈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군마"를 들 수 있을 것 입니다. 독일군은 전쟁 초기 부터 대량의 마필을 사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 수록 그 양은 늘어만 갔습니다. 1939년에 독일군은 59만 마리의 군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1945년 1월에 이르면 1,198,724마리로 늘어납니다. 전쟁이 지속될 수록 병력이 증가했고 동시에 차량의 보충이 손실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수단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지요. 그런데 독일은 자체적으로 군마의 대량 소모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전쟁 초기부터 점령지에서의 군마 징발에 크게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점령지역에서의 마필 감소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아직 기계화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아 축력에 의존했던 유럽의 농업 방식에 큰 피해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의 마필 징발이 유럽의 농업에 끼친 영향에 관심을 연구자로는 디나도(Richard L. DiNardo)가 있습니다. 디나도는 1988년에 발표한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라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독일이 전쟁 기간 중 점령지에서 막대한 마필을 징발한 것이 전쟁 기간 중 유럽의 농업생산을 감소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점령된 폴란드는 독일의 주된 군마 공급처가 되었고 1940년 서부전역에 동원된 보충용 군마의 대부분을 충당했습니다. 폴란드의 농업생산량 감소는 매우 놀라운데 1939년에 227만톤이었던 밀 수확량이 1940년에는 177만8천톤으로 급감했고 이것이 1942년에는 133만2천톤 까지 떨어집니다.1) 서부전역이 독일의 대 승리로 끝난 뒤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가 독일의 새로운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경우는 폴란드 만큼 약탈이 심하지는 않았으나 농업용 마필의 감소는 뚜렸습니다.(네덜란드의 경우 전쟁 중 마필의 숫자는 증가했는데 농업용 마필만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독일에게 가장 혹독하게 당한 것은 소련일 것 입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1941년 6월 22일 부터 1942년 1월 20일까지 335,588마리(169,172마리 폐사+166,416마리 질병)의 말을 상실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같은 기간 동안 보충된 마필은 불과 47,801마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폴란드나 서유럽산의 말 보다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한 러시아산 말을 보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89,725마리의 러시아 말이 노획되었습니다.2) 1942년 이후 러시아산 말이 대량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산의 약한 말을 지칭하는 Panjepferde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하지요.3)
사실 소련은 집단화를 추진하면서 대량의 농기계를 생산했기 때문에 축력으로 부터 해방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만 1930년대 부터 군수산업으로 전환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축력에 계속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쟁이 터지면서 농기계 생산이 사실상 중단되자 기존에 생산된 농기계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4) 여기에 마필도 대량으로 동원되거나 독일군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니 사람이 쟁기를 끄는 참담한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발발직전 소련에는 2100만 마리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780만 마리로 감소했습니다. 소련측의 추정에 따르면 전쟁 기간 중 700만 마리의 말이 죽거나 독일군에게 약탈당했다고 합니다.5)
디나도의 연구는 개괄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마필 징발은 유럽의 농업 생산구조에서 매우 취약한 부분을 타격했습니다. 독일은 전쟁 중 자체적인 자원의 부족으로 지속적으로 점령지역의 자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점령지역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고 오랫동안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주
1) Richard L. DiNardo, 'Horse-Drawn Transport in the German Army',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Vol. 23, No. 1. (Jan., 1988), p.139
2) Hartmut Schustereit, Vabanque : Hitlers Angriff auf die Sowjetunion 1941 als Versuch, durch den Sieg im Osten den Westen zu bezwingen(Herford, Mittler und Sohn, 1988), s.97
3) Katherina Filips, 'Typical Russian Words in German War-Memoir Literature', The Slavic and East European Journal, Vol. 8, No. 4. (Winter, 1964), p.409
4) John Barber and Mark Harrison, The Soviet Home Front 1941~1945 : A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in World War II(London, Longman, 1991), p.187
5) DiNardo, ibid., p.136
2010년 5월 21일 금요일
2010년 2월 11일 목요일
대원수 동지의 편지
스탈린이 다른 인간을 신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간혹 예외도 있었다고 합니다. 몰로토프가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래서 그런지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일대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Annals of Communism Series 중에는 바로 스탈린이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들을 추려서 단행본으로 낸 것이 한 권 있습니다. 이 책은 1936년까지의 편지들을 수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은 주로 1930년 까지의 편지에 많고 1931년 부터 1936년까지의 편지들은 매우 적은 분량만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가 편지들을 잘 선정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오늘 읽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봤습니다.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부를때 쓴 애칭 중 하나로 몰로토프가 유태인이란 걸 농담삼아 비꼰 것 입니다.
** 세명의 우파는 편지에 언급된 릐코프와 톰스키, 그리고 부하린(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입니다.
이 편지에서 역시 후덜덜한 부분은 농업 집단화의 성과를 자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지만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 사실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성과를 초과 달성한 것과 그의 정적들을 엿먹인 것에만 기뻐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눈꼽만큼도 관심없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초딩마인드이지요.
그런데 이게 도통 남의 일 같지만 않은게, 높은 자리에 초딩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들어앉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편집자가 편지들을 잘 선정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오늘 읽은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봤습니다.
몰로트슈타인(Молотштейн)*, 잘 지내고 있나?
도데체 거기서 뭘 하고 있길래 아무 소식도 없는겐가? 자네가 있는 곳의 사정은 어떤가? 잘 돌아가고 있나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 뭔가 좀 써서 보내주게나.
이곳은 잘 돌아가고 있네.
1) 곡물 징발은 꾸준히 진행중이네. 오늘 우리는 비상시를 대비해 곡물 비축량을 1억2천만 푸드(пуд, 1푸드는 약16.38kg)로 높여잡았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하리코프와 같은 공업도시에 대한 배급량을 높였다네.
2) 집단농장 운동도 급속히 고조되고 있네. 물론 농업용 기계와 트랙터가 부족해서 달리 방법이 없다보니 보통 농기구를 긁어모아 사용해야 했는데 파종 면적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네.(어떤 지역은 50퍼센트나 증가했네!) 볼가강 하류 지방에서는 전체 농민 중 60퍼센트가 집단농장에 가입했네.(이미 가입했단 말이지!) 우리 당내의 우파 녀석들은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어.
3) 대외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중국 문제를 처리해야 하네. 우리 극동군의 동지들이 중국인들에게 충분한 경고를 주었을 거야. 얼마전에 장쉐량(張學良)이 차이(蔡)와 시마노프스키 동지가 만나서 합의한 사안에 동의하겠다는 전문을 보냈네.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개입에 대해서는 거칠게 대응하지 않고 그냥 거절만 했네. 우리는 이정도만 할 수 있었으니까. 볼셰비키가 뭘 원하는지 그들도 알게 해 줘야지! 중국의 지주들은 우리의 극동군이 가르쳐준 교훈을 잊지 않을 거야. 우리가 내건 조건들이 이행되기 전에는 우리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네. 리트비노프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했던 연설을 한 번 읽어보게. 꽤 괞찮은 연설이었어.
4) 아마 자네도 신문을 통해 이번 인사이동에 대해 알고 있을것 같네. 이번 인사이동에서 새롭게 바뀐 것은 톰스키(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를 쿠이비셰프(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의 보좌역으로 임명한 것(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쿠이비셰프는 이 조치가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슈바르츠를 석탄협회 회장으로 임명한 걸세.(이 경우에는 더 나은 사람이 없었네)
5) (세명의) 우파들**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네만 별다른 진척을 거두지 못하고 있네. 릐코프(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는 야코블레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우리가 미리 손을 써 놓았지.
그래. 이제 때가 되었네.
1929 년 12월 5일
Lars T. Lih, Oleg V. Naumov, and Oleg V. Khlevniuk(ed.), Stalin's Letters to Molotov 1925-1936(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5), pp.183-184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부를때 쓴 애칭 중 하나로 몰로토프가 유태인이란 걸 농담삼아 비꼰 것 입니다.
** 세명의 우파는 편지에 언급된 릐코프와 톰스키, 그리고 부하린(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입니다.
이 편지에서 역시 후덜덜한 부분은 농업 집단화의 성과를 자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미 수없이 많은 농민들이 희생되었지만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 사실에는 눈꼽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성과를 초과 달성한 것과 그의 정적들을 엿먹인 것에만 기뻐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눈꼽만큼도 관심없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형적인 초딩마인드이지요.
그런데 이게 도통 남의 일 같지만 않은게, 높은 자리에 초딩 마인드의 소유자들이 들어앉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2009년 1월 9일 금요일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 - 김태우
국내의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 성과는 방대한 양이 축적되어 있지만 상당수가 전쟁의 기원과 발발과정, 또는 휴전과정과 그 영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쟁 시기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대부분은 전쟁기의 학살, 피난민 문제 등 사회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요. 본격적인 군사사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며 흥미로운 민간 연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태우(金泰佑)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측면을 다룬 보기 드문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게다가 재미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미공군 작전에 대한 연구로는 스튜어트(James T. Stewart)의 Airpower: The Decisive Force in Korea, 퍼트렐(Robert F. Futrell)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크레인(Conrad C. Crane)의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등이 있습니다. 냉전기에 출간된 스튜어트와 퍼트렐의 연구는 시기적 한계와 미국 공군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냉전 이후 출간된 크레인의 연구는 미공군의 입장을 반영한 기존 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기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퍼트렐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은 미공군군사사연구소(Air Force Historical Studies Office)에서 pdf 형식으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답게 90년대 이후 공개된 방대한 미공군 자료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군, 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북한과 공산군측의 입장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시기적으론 1950년부터 1951년에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후반의 작전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집중된 나머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수행된 미군의 항공작전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된 과정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공군의 지휘운용체제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 감행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작전을, 세 번째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전술항공작전, 네 번째로는 중국군 참전 이후 공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과 전선 고착 이후 항공압력전략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 1장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시기 미공군을 비롯한 열강들의 폭격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2차자료를 활용하고 있고 또 영어권 자료에 집중되어 지금 시각에서는 약간 잘못된 부분이 보입니다.(독일 공군의 폭격 정책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해를 위한 도입부로서 매우 잘 서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독의 반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줬으면 좋았겠지만 곁가지를 너무 많이 치면 논문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2장에서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수행한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나온 연구 답게 미국인들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북한의 대응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섬멸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대응은 방공호 건설과 피해 복구 등 철저히 수동적인 것에 제한 되었지만 이러한 수동적인 대응도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장에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의 전술지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효과적인 지상지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제5공군이 미국의 방어적 전략에 의해 일본의 방공에 중점을 두고 개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상군에 대한 전술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지상지원이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린 북한군이 점점 은폐에서 신경 쓰고 야간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미공군의 지상지원능력의 효과를 떨어트린 요소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남한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2장과 3장이 1950년 6월부터 겨울까지의 짧은 기간을 다룬 반면 4장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부터 전쟁 종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는 미군이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것과 전선 교착 이후 미공군이 항공압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는 시기가 방대하기 때문에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2장과 3장에서는 노획문서 등 북한 문헌의 활용을 통해 북한측의 대응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소련을 통해 공개된 문건 등으로 자료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1951년 이후로는 노획문건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폭격으로 북한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후 국가 주도의 농업집단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에 국내의 한국전쟁 연구가 거의 방치한 군사적 측면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군사사상은 물론 미공군의 장비, 전술 등의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실한 서술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초점을 맞춘 만큼 1951년 이후의 항공작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공전투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그 점까지 다뤘다간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된 문헌을 통해 북한측 시각을 최대한 공정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측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는 반쪽 짜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시각에서 군사적 측면을 다룬 연구가 나왔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당장 단행본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김태우(金泰佑)의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2008)는 한국전쟁의 군사적 측면을 다룬 보기 드문 연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한국전쟁 시기의 미공군 작전에 대한 연구로는 스튜어트(James T. Stewart)의 Airpower: The Decisive Force in Korea, 퍼트렐(Robert F. Futrell)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 크레인(Conrad C. Crane)의 American Airpower Strategy in Korea, 1950-1953등이 있습니다. 냉전기에 출간된 스튜어트와 퍼트렐의 연구는 시기적 한계와 미국 공군의 공식적인 견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제약이 있습니다. 반면 냉전 이후 출간된 크레인의 연구는 미공군의 입장을 반영한 기존 연구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냉전기에는 잘 언급되지 않았던 측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습니다.
※참고로 퍼트렐의 The United States Air Force in Korea 1950-1953은 미공군군사사연구소(Air Force Historical Studies Office)에서 pdf 형식으로 전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이 주제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답게 90년대 이후 공개된 방대한 미공군 자료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공군, 또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간과하기 쉬운 북한과 공산군측의 입장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시기적으론 1950년부터 1951년에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 후반의 작전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편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지나치게 전쟁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 집중된 나머지 전쟁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문은 한국전쟁기 수행된 미군의 항공작전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된 과정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공군의 지휘운용체제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로는 전쟁 초기 북한지역에 감행된 미공군의 ‘전략폭격’작전을, 세 번째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전술항공작전, 네 번째로는 중국군 참전 이후 공군에 의한 초토화 작전과 전선 고착 이후 항공압력전략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공군의 폭격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고찰한 1장은 1차대전과 2차대전 시기 미공군을 비롯한 열강들의 폭격 교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주로 2차자료를 활용하고 있고 또 영어권 자료에 집중되어 지금 시각에서는 약간 잘못된 부분이 보입니다.(독일 공군의 폭격 정책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이해를 위한 도입부로서 매우 잘 서술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독의 반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줬으면 좋았겠지만 곁가지를 너무 많이 치면 논문이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지요.
2장에서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수행한 북한 지역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서 나온 연구 답게 미국인들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북한의 대응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전쟁 초기에 북한 공군이 섬멸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대응은 방공호 건설과 피해 복구 등 철저히 수동적인 것에 제한 되었지만 이러한 수동적인 대응도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장에서는 전쟁 초기 남한 지역에서의 전술지원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입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공군이 효과적인 지상지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제5공군이 미국의 방어적 전략에 의해 일본의 방공에 중점을 두고 개편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상군에 대한 전술지원 체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상황이 유동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지상지원이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미공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눌린 북한군이 점점 은폐에서 신경 쓰고 야간 작전으로 전환한 것도 미공군의 지상지원능력의 효과를 떨어트린 요소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남한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2장과 3장이 1950년 6월부터 겨울까지의 짧은 기간을 다룬 반면 4장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부터 전쟁 종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중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후퇴하는 미군이 초토화 작전의 일환으로 공군력을 동원한 것과 전선 교착 이후 미공군이 항공압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에 비해서 다루는 시기가 방대하기 때문에 서술의 밀도가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특히 2장과 3장에서는 노획문서 등 북한 문헌의 활용을 통해 북한측의 대응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4장에서는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소련을 통해 공개된 문건 등으로 자료가 제한되고 있습니다. 1951년 이후로는 노획문건이 급감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미국의 폭격으로 인한 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폭격으로 북한 경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후 국가 주도의 농업집단화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논문은 기존에 국내의 한국전쟁 연구가 거의 방치한 군사적 측면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군사사상은 물론 미공군의 장비, 전술 등의 측면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실한 서술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미군의 ‘폭격’에 초점을 맞춘 만큼 1951년 이후의 항공작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제공전투에 대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섭섭하지만 그 점까지 다뤘다간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것 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공개된 문헌을 통해 북한측 시각을 최대한 공정하게 반영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측 연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입니다. 아무래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연구는 반쪽 짜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시각에서 군사적 측면을 다룬 연구가 나왔다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 입니다.
당장 단행본으로 나와줬으면 하는 재미있는 논문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2008년 7월 29일 화요일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
sonnet님이 쓰신 「잉여농산물원조와 삼백산업의 발달」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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