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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9일 화요일

전후 복구시기 북한에 대한 약간의 잡설

sonnet님이 쓰신 「잉여농산물원조와 삼백산업의 발달」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인용해 온 글에 나타난 문제점은 당연히(?) 북조선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전후 복구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발전을 주장합니다.

김일성은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선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공업으로 제철, 기계, 조선, 광업, 전기, 화학, 건설자재 공업을 꼽았고 경공업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쳤습니다. 중공업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 입니다. 서동만에 따르면 이 발표에서 김일성은 농업에 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넵. 수령님은 북조선이 처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중공업화를 추진하기로 이미 결심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전후복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중공업화가 이뤄졌는데 김일성은 아예 전후복구 자체를 중공업화로 밀어 붙이려 한 것 입니다. 소련의 경우 이 문제를 두고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소련이야 중공업 기반이 이미 있는 나라이니 북한과는 이야기가 다르죠. 물론 전후 복구의 물주는 소련이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1953년 9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중공업 우선 노선을 잠시 보류합니다. 소련의 반대에 따라 1954년 3월의 개각에서는 경제 분야 간부의 임명이 경공업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남의 말은 절대 안들어 처먹는 수령님이니 만큼 물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습니다. 중공업 우선 노선의 반격은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었는데 1954년 11월 소련의 압력에 따라 임명된 재정상 최창익의 해임, 1955년 1월 경공업상 박의완의 해임에 따라 경제 간부들의 개편이 시작됐습니다. 그 결과 중공업화를 지지하는 이주연과 이종옥이 각각 재정상과 경공업상으로 임명됩니다. 중공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중공업 우선론자들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 ‘1955년도 인민경제복구발전계획에 관한 내각결정’으로 중공업기업소의 확장과 경공업, 농촌경제를 동시에 복구 발전시킨다는 노선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병행발전인데 실제로는 중공업우선 노선을 관철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겠습니까. 이미 1955년부터 공업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어렵게 되자 당장 1956년도 공업생산목표에 대한 수정에 들어갑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수령님은 이 문제의 원인을 국가계획위원회의 탁상 행정으로 돌리는 파렴치함을 보입니다. 이에 따라 경공업 발전을 지지하던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은 집중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20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0차 회의에서는 1956년도의 공업총생산액을 오히려 더 늘려 잡습니다. 전후 복구기간 인 1954~56년 사이에 북한은 인민경제에 대한 총 투자 중 49.6%를 공업에 투자했는데 이 중 81.1%가 중공업에 들어갔습니다. 전후 복구 기간 중 국가의 투자가 중공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경공업은 지방공업의 몫이 되었는데 사실상 지방공업은 별다른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과가 신통치 못했으리라는 점은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물론 중공업에 가용 가능한 자원을 싹~ 쓸어넣었기 때문에 ‘공업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통계상'으로.

그렇다면 농업은?

전후 복구기간 중 중공업화와 동시에 농업집단화도 적극적으로 추진됩니다. 북한은 1945년 이후 농업집단화에 성공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합니다.(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보의 단행본이 설명을 잘 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북한의 농업집단화 비율은 1955년 봄에 전체 농가호수의 44%에 달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농으로 남아있던 농민, 특히 중농층은 엄청난 동요를 보입니다. 집단화에 반발한 농민들은 이미 소련의 농민들이 했던 것 처럼 가축을 도살하거나 곡물수매에 비협조 하는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농민들의 가축 도살로 인해 한우와 돼지의 두수는 1954~55년 사이에 감소했다가 집단화가 진전되어가면서 점차 증가세로 들어섭니다. 또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소극적 저항의 표시로 태업을 일삼았는데 그 결과 벼의 생산은 1954에 감소했다가 1956년에야 1953년의 생산량을 겨우 넘어섭니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은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로 협동조합의 탈퇴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중농이 발달했던 황해도에서의 저항은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농업이 엉망으로 돌아가니 당연히 식량사정은 엉망이 됩니다. 1955년 1월 북한에서는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서 공업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달에 하루 치 식량을 아끼자는 운동을 벌입니다. 김일성은 그의 선배(?)들 처럼 농촌을 쥐어짜(?) 중공업 육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장 공장 노동자들이 먹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쌀 1kg의 공정가격은 5원이었는데 이미 1955년 2월 암시장에서는 400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의 한달 임금은 1,000~1,500원 수준이었으니 고깃국은 고사하고 이밥도 못 먹을 지경이었습니다. 식량난은 매우 심각해서 함경남도의 경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동이 보고될 정도 였습니다. 그나마 식량 사정이 좋았던 황해도에서도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는데 헝가리 의료진이 파견된 사리원의 한 병원에는 1955년 4월~5월 사이에 20명 정도의 아사자 또는 아사직전의 환자가 실려올 정도였습니다. 수도인 평양의 사정도 좋지 않아서 소련 외교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평양 일대의 야산에서는 새싹을 뜯는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 해 5월 춘궁기가 닥치자 식량 상황은 위기에 도달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의 긴급 식량원조로 간신히 급한 불을 끄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난감한 상황들은 결코 중공업화에 대한 수령님의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비록 1957년 이후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원조도 줄어들었지만 북한은 천리마운동 같은 대중동원운동 등으로 60년대까지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합니다.

'통계상'으로만.

대략 수박 겉핧기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렸는데 전후 복구기간 중 북한이 이룩한 인상적인 공업생산의 증가는 뒤로는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업생산 자체도 성장률이라는 통계수치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북한은 60년대에 베트남, 쿠바 등에 공산품을 수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3년 북한이 북베트남에 수출한 강철 4,000톤 중 3,300톤이 저질이라서 반송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쿠바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데 1962년 북한이 10만톤의 설탕을 기계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수출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쿠바는 35,000톤의 설탕만을 보냅니다. 왜냐. 북한이 생산한 기계는 도저히 받아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이후 전후복구 과정에서 북한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80년대 운동권에서 돌던 ‘북한바로알기’류의 괴담(?)들이 여전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