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자유당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자유당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어떤 소신(???)

정치인들의 소신 발언(???)을 시간이 지난 뒤 읽어보는 것은 호사가들의 소소한 재미입니다.


나는 자유당에 소속하여 일하고 있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있다. 왜 그러냐하면 오늘날 우리 나라의 현 실정으로 보아 양단된 국토와 파괴 혼란된 강토우에 국리만복을 증진할 길은 오직 하나 있으니, 이것은 협력-건설일 것이다. 정치의 혼란은 행정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싸움과 혼란속에서 국민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무엇이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인가 말이다. 난경(難境)을 극복하고 궁지를 벗어나는 유일의 비결은 언제나 있는 힘을 다 합치는 협력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국토가 평화될 때 까지는 무엇보다도 협력건설이다. 싸움은 그 후의 이야기다. 정치는 인기 노름인데, 인기없는 자유당에 소속하여 묵묵히 일하는 것이 하나의 애국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럼으로 해서 나는 자유당에 소속하여 일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한다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가 하로바삐 성실의 정치, 노력의 정치의 정도로 올라가기를 염원하고 나 역시 과거에 걸어온 성실과 노력의 신조를 장래에도 꾿꾿히 가지고 나가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한희석(韓熙錫, 1909~1983)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 나의 政治白書』(월간 新太陽별책, 신태양사, 1957),   312쪽


한희석은 자유당 소속으로 천안의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당의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으로 3ㆍ15부정선거의 주모자 중 한명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묵묵히 일하는게 너무 지나친 듯 싶습니다. 당연히 한희석은  4월 혁명이 터지고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구속 됩니다. 이듬해에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한희석에게 일생 일대의 위기가 되는데 바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된 것 입니다.


그러나 한희석은 감형되어 출소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무탈하게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갔다고 합니다.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국개론;;;;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발췌해 봅니다.

무엇보다 가장 논난될 수 있는 일은 1948년의 한국 선거가 너무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투표에 있어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문맹도의 기준을 문자해독에 두는 것은 국어교육에서 할 일이고 정치에서는 사리판단이 문맹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정치적 사리판단이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이 옳은가, 나쁜가의 판단과 같이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일제의 제한된 식민지 교육에서 그러한 정치적 판단능력이 기루어 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번에 바로 보통선거제를 채택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녀평등이라고 하여 여성에게도 무제한 선거권을 주었으나 당시 정치가나 입법자의 이상적 기질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여성 득표공작의 안이성을 고려한 manipulation이었던가. 프랑스에서 보통선거제가 안정된 것은 대혁명을 거친 훨씬 뒤였으며 영국에서는 1832년, 1847년의 선거법개정 이후에야 되었으며 여성참정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실현되었고 瑞西(스위스)의 일부에서는 아직 여성참정권이 거부되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은 자기의지가 박약하여 남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다. 구주에서는 성직자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공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거민이 있는 곳에 비합리적인 통치자가 등장하기 쉬운 것이다. 자유당이 붕괴하고 이승만씨의 단점이 내외에서 폭로되기까지 사실상 그의 mana를 많은 국민이 믿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에서의 투표율이 대체로 80%~98%에 이르렀다고 해서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반드시 계수로 표시해야만 만족하는 부류의 순진성일 따름이다. 투표율이 높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며 선진국에서 투표율이 약 60~70%된다고 해서 그 정도가 이상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99.9%의 투표율과 98%의 지지율을 공표해야 자기의 통치가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만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투표율이 줄어서 50% 이하로 내려가는 것은 우려할 사태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통 90% 정도의 투표율을 보이다가도 가끔 50% 미만의 사례도 나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국민이 갑자기 무관심의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높은 투표율 가운데 이미 무관심의 투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무관심은 단순히 붓대를 눌러 동그라미를 치고서는 어디다 눌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정치적인 관심은 없으나 받은 것이 있으므로 일종의 계약 이행으로서 투표하는 그런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른바 준봉(遵奉)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관권에 스스로 압복(壓伏)되거나 혹은 관의 투표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선거시의 테로 행위는 살상가상격이었다. 이러한 현성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도시의 중산층이나 지식층이 아무리 정부와 여당의 횡포에 대해서 투표로서 항의하고 투표함을 사수하고 해도 그외의 다수인구가 횡포한 권력의 지지세력(?) -엄밀히 말하면 투표수-으로 남아 있는 한 정권교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거가 정권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나 교체가 있어야 마땅한 지경에서 선거가 아무런 역활을 할 수 없다면 그러한 선거는 ‘하나 마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처음부터 5대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채택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정부 수립이래 여러번 치루었던 선거가 한결같이 기존 집권자의 승리로 끝났는데 앞으로도 얼마간이나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될지 알지 못한다.

裵成東, 「제도와 상황의 거리 : 한국의 두 정치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판」『靑脈』11호(1965. 8), 110~111쪽

*필자인 배성동은 서울대 교수, 11,12대 국회의원(민정당),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글에 대한 제 개인적은 감상을 이야기 하라면 ‘투표란건 원래 그런게 아닐까’ 입니다. 

50~60년대의 지식인들이 자유당이나 공화당이 계속 집권하는 꼴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 어쨌든 간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놈의 보통선거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타격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2009년 1월 18일 일요일

각하의 정치력, 가카의 정치력

이명박의 낮은 정치력은 박근혜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고 갈등만 키우는 점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청와대측에서 한나라당 중진들을 오찬회동에 초대하면서 관례를 무시한 행동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요.

한나라 중진들, 靑 '의전소홀' 떨떠름

Sonnet님이 얼마 전에 지적했 듯 박근혜와 같은 강력한 정적을 제어하는데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큼지막한 감투를 하나 던져주는 것 입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막강한 정적들을 쳤지요. 이 방법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그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명박에게 가장 쓸만한 카드였을 것 입니다. 만약 집권 초에 이 카드를 썼다면 아마도 지금쯤 개각을 핑계로 박근혜를 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이 방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은 사람은 이승만일 것입니다. 이승만은 첫 내각을 구성하면서 처음에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이 의회에서 거부당하자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해 통과시킵니다. 게다가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을 겸임하여 그야말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미국 측에서는 군 장교단이 이범석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이범석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앉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범석의 중요한 권력 기반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해체시켜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에 흡수시켜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이범석이 저항을 하긴 했지만 이승만은 그것을 간단히 제압해 버리지요. 이승만은 족청을 해체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이범석을 국방부장관에서 해임시켜 버립니다. 족청이라는 강력한 방패가 없어지자 이범석의 정치적 위상은 취약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1950년 4월에 이범석을 국무총리직에 해임 함으로서 이범석에게 결정타를 먹이지요.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할 때 다시 한번 이범석을 끌어들인 뒤 또 한번 등에 비수를 꽂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수완을 과시합니다. 1952년 대선에서 이범석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물론 가카의 정치적 수완이 바닥이라는 점은 그의 정적들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우리 같은 일반 시민에게도 좋은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