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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9일 일요일

1963년 9월 20일 김종필이 Farleigh Dickinson 대학에서 한 연설

지난번에 이야기 했었던 김종필의 연설문 한개를 번역했습니다. 읽어보시면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의 축약본 같다는 느낌도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 쪽 반응이 어땠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는데 나중에 확인할 기회가 생긴다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사마티노Peter Sammartino 총장님, 존경하는 여러 교수님,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곳과 같은 명문 대학에서 “신생 민주국가의 리더쉽Leadership in the Newly Developing Democratic Countries”에 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며 더구나 정치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짧은 시간에 이같이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말씀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래로 자유세계 전체를 지도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의 운명은 미국에 달려있기 때문에, 자유세계의 미래는 바로 여러분, 미국 학생들의 리더쉽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저 뿐만 아니라 자유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역사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 청년 학생들의 성향과 포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여러분이 세계에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와 같이 보잘것 없는 학생이 이곳에 모이신 훌륭한 분 들 앞에 서게 된 것 입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대략 50만년 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긴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는 성쇠를 거듭하면서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그리고 진화라는 불변의 법칙에 따라 현재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민족 집단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실제 인류 역사에서는 한 종족이 다른 종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Nevertheless, the history of humanity is the history of national races, and it is a reality of world history that antagonism of one race to another has played a principal part.)

오늘날 우리는 민족 집단의 상대적인 가치가 개발-저개발, 문명-야만, 풍요-빈곤과 같은 단어에 의해 명확하게 구분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적인 차이는 50만년에 걸친 인류 역사에 작용한 진화의 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차이가 지난 수 세기 동안 있었던 진보적인 종족과 보수적인 종족 사이에 있었던 불가피한 차이로 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의 발전은 어떠한 형태도 없는 불안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특정한 경향을 가진 규칙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역사적인 현상의 필수적인 요인들은 절대로 우연적인 지위가 아니라 항상 필연적인 지위에 있다.” 19세기를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 반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한다면,  20세기는 아시아 국가들이 식민 지배자들의 압제를 떨쳐내고 자주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민족주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입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며 착취당하는 운명에 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후진국들이 설사 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수용하는데 그친다 하더라도, 이들 국가들이 민족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원인과 그 영향의 연쇄작용입니다. 지금 시작된 원인은 수십년 뒤, 또는 수백년 뒤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어떤 원인의 상대적인 평가는 후손 세대의 행운 혹은 불운에 따라 매겨질 것 입니다. 현재의 후진성의 씨앗이 수세기 전에 뿌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자주에 대한 자각이 후진국에서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945년에 제2차세계대전은 자유세계와 공산진영간의 냉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정세는 오늘날 까지도 이렇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국제 공산당은 후진국의 민족주의로 인한 이점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후진국을 반미적인 배타주의로 이끌어 이들 국가의 앞날에 혼란을 야기하고,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합리적인 민족주의 마저도 위험하고 사악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세계 국가간의 국제적인 협조 체계를 더욱 교란할 수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역사는 한 민족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민족의 책임이며 이와 같은 특성은 어떠한 환경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각으로 강화된 민족의 자주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진보하는, 그리고 “어느 한 민족”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자의식, 즉 배타적이거나 봉쇄적이지 않으며 유아론에 매몰되지 않고 굴종적이지 않으면서 국제 협력이라는 추세에 따르는  합리적인 민족주의  없이 후진국이 존속하고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미래에 자유 세계를 이끌어 나갈 학생 여러분에게 구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가 직면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 후진국의 경우에는 그 국가가 낙후되어 있을 수록 불만이 많고 요구 사항이 많아집니다. 정치적, 경제적인 불안정으로 인한 불만이 커져서 폭발하기 직전에 이르고, 종종 상충되기도 하는 사안을 동시에 해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요구사항은 복잡하고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가 됩니다. 후진적인 민주국가의 세기말적인 비극은 이들 국가가 수많은 요구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요?

오늘날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의 후진국가는 사실상 그 주권이 강대국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정도는 피치 못할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개별 민족의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성장에 따라 사그라 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강대국들도 자국민들을 자국의 이해관계와 융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족주의라는 국가적 규범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을 통해 강대국들은 국가 단위에 기반한 지역 내 공영권을 만들어 확대해 나간 것 입니다.

학생 여러분.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저의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한민족은 4세기에서 5세기에는 만주의 대부분을 영역으로 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어떤 민족이라도 흥망성쇠의 과정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용맹하고 진취적이었던 한민족이 퇴보하여 5천년 역사동안 지켜온 영토를 일본의 식민지로 내주게 된 것일까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14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 까지 한반도를 5백년 동안 통치한 왕조는 이씨 왕조였습니다.

유럽에서는 14세기 말 부터 15세기 사이에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는 봉건사회가 쇠퇴하고 귀족과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도시와 시민계급이 발흥하면서 절대주의 국민 국가가 건설되거나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이때는 자유롭고 인본주의적인 문화를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씨왕조는 사대와 퇴보의 원인이었던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유교를 국가적인 이상으로 삼으면서 봉건적인 사회 제도에 기반한 유교적 관료제를 구축하여 오늘날의 후진성을 낳은 씨앗을 뿌린 것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5백년 동안 유교를 유일한 이상으로 숭상했습니다. 유교는 비과학적인 관념론으로 안일한 삶을 살면서 무의미한 허세, 목청만 높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분노로 긴 시간을 낭비했을 뿐 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도덕적인 나약함 뿐만 아니라 문치주의와 국민을 분열시키는 무자비한 당파싸움이라는 비극의 씨앗을 뿌렸고, 이같은 사악한 근원은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서글픈 유산이 된 것 입니다.(Thus they planted for their posterity not only the root of moral weakness, but also the calamity of the literarit and the ruthless factional strife that divided the people, with the result that these evil roots have been handed down to this date as a sad national legacy.)

학생 여러분.

저는 앞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지난 수 세기 동안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려가며, 그리고 혼란과 혁명의 소용돌이와 전쟁, 무참한 비극에 직면하여 시행착오를 거쳐 문제를 하나 하나 해결하면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적인 제도, 번영과 자유를 이룩한 것 입니다.

열강이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하고 있던 시점에서 공허한 담론과, 고식, 지배층의 당파싸움, 퇴행적인 사대과 쇄국에 빠져있던 한국이 민족주의를 자각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새롭게 발흥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We may see clearly here that it was by no means accidental that Korea, immersed in empty arguments, temporizing, aristocratic factional strife, retrogressive subservience and isolation, finally fell, without even being conscious of nationalism, as the colony of then emerging Japan in the era which the Powers were dividing the world into colonies.)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36년간 받은 뒤 연합군이 일본을 무찌른 1945년에서야 일본의 압제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불행은 해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은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서 더욱 더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1910년 이래 한민족의 염원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부터는 한가지 절실한 염원이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민족의 통일 입니다. 하지만 신께서는 한민족에게 한가지 시련을 더 안겨 주셨습니다. 1950년 북한 괴뢰정권과 중국 공산당의 붉은군대가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침략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이는 동족상잔으로 한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공산당의 침략으로 2백만명에 달하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10만명에 달하는 UN군도 희생되었습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여러분의 선배, 친구, 일가친척이 한국이라는 외국 땅에 자유의 수호자로서 잠들어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미국이 자유세계를 수호하겠다는  엄숙하고 단호한 선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미국민이 한국민과 변치않는 우정과 상호신뢰 속에 살아갈 것이라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학생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민족주의가 후진국의 발전을 위한 정신적인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후진성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그 국가의 책임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진국이 후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국민들이 “나의 조국”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정신적인 기반을 만들어줄 합리적인 민족주의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에서 수입된 일반적인 정치적 관념에서는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성공할 수 없으며 대개는 혼란만을 낳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45년 부터 16년 동안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잘 맞지 않는 서구에서 받아들인 그대로의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정치는 정당간의 투쟁의 장이 되었고, 경제는 파탄이 났으며,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었고, 자유는 방종과 혼란으로 대체되었습니다.(Namely, we put it into practice as it is practiced in the West, which did not really suit Korea. The consequence is that politics became partisan strife, the economy went bankrupt, society turned lawless, freedom was replaced by license and disorder.) 이 때문에 1960년과 1961년에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 입니다. 되돌아보면 이같은 역사는 한국에 민족주의적인 자각과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부족하고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대한민국 전체가 불굴의 의지, 인내심과 희망, 그리고 과거 우리 조상들의 과오를 진정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합리적이고 올바른 민족주의의 기초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굳건히 재건하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밟아왔던 과정을 따르기만 한다면 올바른 민주주의가 언제 어디에서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필수조건, 특히 경제적인 뒷받침을 먼저 마련할 수 없다면 민주주의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할 것 입니다.(The concept that a sane democracy will suceed anywhere and under any circumstances if the process followed in the developed countries is repeated should be replaced by the logic that a democracy will forfeit its universality unless all the prerequisities, particularly the economic underpinning, can be met beforhand.)

저는 황금률을 교조적으로 따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데올로기와 학설은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현실에 적합한 양립적이고 유연한 민주주의를 독립적으로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맞춰 실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의 다양한 민주체제가 수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충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춤으로써 완성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경로를 밟고 있는 국가들이 선진국과 동일한 민주주의를 그저 받아들이거나 흉내내는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한 것 입니다.

한 국가가 오랜 경험과 실험을 거쳐 민주주의를 국가에 맞추고, 이를 적절히 소화해서 받아들여 자국의 고유한 것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잘못된 것 입니까? 모든 곳에서 기적과 횡재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후진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후진국들은 역사적인 배경과 오늘날의 현실간의 차이, 경제적인 궁핍함과 국제 정세에서 기인하는 보이는 압력과 보이지 않는 압력을 극복하면서 신념과 지혜를 가지고 국가를 높은 목표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At any rate, they are in acute need of a strong “leadership” which can surmount the contradiction between historical background and present reality, their nation’s economic destitution and visible and invisible pressure of an international nature, and yet can guide their nations towards a lofty objective with conviction and wisdom.)

저는 20세기 정치 환경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강력한 정부와 지도자의 출현, 그리고 그에 따르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국가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국을 보호 하고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와 정부의 권위는 국가의 국내외적인 활동을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 입니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자국의 “지도력”을 현저히 강화시켰으며, 의회정치로 인해 발생하는 원심효과를 상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민주주의 국가가 후진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력을 강조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입니다.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 국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은 곳 에서는 여론에 따르는 통치가 가능할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스스로의 신념과 이상을 바탕으로 대중 여론을 이끌어가고 국민의 가슴속에 희망과 의욕, 용기를 불어넣어야 합니다. 후진국에서는 국민이 일상의 궁핍함 때문에 민주주의를 “골칫거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이 민주주의 참된 가치에 감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민족정신을 북돋고 진보적인 국가로 나가는 길로 국민을 이끌어서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을 부흥 시켜야 합니다. 후진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후진성의 모순에서 기인하는 국민의 불만을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하여 국력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저는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국민이 이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력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후진 민주주의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올바른 행정 기구의 수립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성패 여부 또한 대부분 지도자와 그의 지도력에 달려있음은 자명한 것 입니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행운을 바라지 않고  근면하게 노력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상황을 견디고, 과거를 딛고서 긍정적인 미래로 나가려 노력하는 진정한 “지도력”이 후진국에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것 입니다.

이제 제 두서없는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국가는 그저 비극적이라 하겠습니다. 세계의 평화와 번영, 그리고 인류의 행복은 단지 강대국들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개발도상국들 스스로의 발전과 노력이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없을 것 입니다.

미래의 열쇠를 쥐고 있는 존경하는 학생 여러분. 수억명의 자유인이 여러분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으며 하루하루의 비극과 빈곤을 견디며 밝은 미래를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 기회를 빌어 대한민국과 한국민의 독립과 통일, 자유를 위해 항상 아낌없이 헤아릴수 없는 신실한 도움을 주신 미국민들께 한국 속담을 인용하여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한국 속담은 이렇습니다. “덕을 베푼 사람은 떠나도 덕은 남는다.”

감사합니다.

“Address of Ambassador Chong Pil Kim, of the Republic of Korea at Farleigh Dickinson University, Rutherford, New Jersey, September 20, 1963”, James A. Van Fleet Papers Box 70/Folder 9 1961-1962, 마샬재단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이제 어려운 단계가 왔다(Now Comes the Hard Part)

이집트 사태를 전망하는 다른 글을 하나 더 소개해 볼까 합니다. 이번 글은 2월 10일, 그러니까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직전  포린 폴리시 인터넷 판에 올라온 콜게이트 대학 부교수 브루스 러더포드(Bruce K. Rutherford) “이제 어려운 단계가 왔다(Now Comes the Hard Part)”라는 글 입니다. 사실 이 글은 무바라크가 퇴진하기 직전에 씌여진 글이라서 그냥 놔 둘까 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올려 봅니다. 현재 진행형인 사태이다 보니 “오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는걸?” 하는 동안 상황이 변해버리니 재미있더군요. 이 글에서는 무바라크 퇴진 이후 미국과 서방세계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라 각 정파의 이해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날림번역이니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이집트 사태의 다음단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이행 과정의 큰 윤곽은 카이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아마도 이르면 2월 10일 목요일 쯤 호스니 부마라크 대통령이 사임하고 반대파를 포함한 과도 정부가 성립되는 것이 포함된다. 아마도 올해 말 까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이집트의 헌법과 법규를 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누가 상황을 이끌어 갈 것인지 불분명하다.

개혁 과정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주로 세 집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물론  가장 중요한 집단은 시위대들이다. 비록 무바라크의 퇴진은 그들의 대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부패의 척결과 시민 사회 및 정치적 권리의 확대, 그리고 경쟁 선거의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 다수가 대의를 위해 전진하면서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감내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3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타흐리르 광장에 시위대로 모여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 대한 실질적인 진척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면 위로 갑자기 부상한 문제는 향후 (권력) 승계의 시나리오 -오마르 슐레이만이 9월 선거 이전까지 과도 정부를 이끌게 된다 -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시위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인 것 같다. 이 계획에 따르면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이 반대하는 기구인 정보국의 수장을 최근까지 역임했던 슐레이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일반 반대파 인사들과 노벨상 수상자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등을 과도 정부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위대가 이들을 존중한다 할 지라도 이들이 리더쉽을 발휘하기를 바란다고 볼만한 징후는 많지 않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4월 6일 운동의 젊은 지도자들(이들은 원래 2008년 섬유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케파야(Kefaya), 가드(Ghad)당, 민주전선,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등이 정권과 협상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고려해야 할 문제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를 일으킨 청년층이 더 많은 이집트인들을 무기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 정부는 시위대가 지치고 일반인들, 특히 중산층들이 지난 수주간의 경제적 붕괴 상태에 분노를 느껴 점차 시위대에 반감을 가지게 되길 원하고 있다. 만약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들이 줄어든다면 시위대의 정치적 지렛대는 기울게 될 것이다. 기세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더 많은 일반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그들의 휴일(과 기도일)을 시위에 쓸 수 있도록 매주 금요일을 “시위의 날”로 하는 것이다. 만약 금요일의 시위 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지게 된다면 시위대는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의 핵심적인 집단은 이집트의 군부로 이들은 개혁 절차가 진행되면 그들의 다양한 이익을 지켜내야 한다. 장군들이 국방 예산을 지키고 국가 안보에 대한 의사 결정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고수하려 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장군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단지 국방 예산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장군들은 군대를 먹여살릴 뿐 만 아니라 민간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농장, 공장, 무역 회사 등을 통제하고 있다. 또한 군부는 이집트 전역(특히 지중해 연안과 나일강 일대)에 막대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중 상당수를 민간 기업에 임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교단 또한 사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장교들은 정권으로 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와 식비 및 주거비 지원, 휴양지, 사교시설, 그리고 다른 이득을 제공 받아 왔다.

현재의 정치적 이행 과정은 군부에 상당한 무게가 쏠려 있다. 군부는 질서를 유지하고 정치 체제의 공백 부분을 관리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도입하는 것을 허용할 것 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군부는 이러한 모든 기능을 효율적으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군부는 그들이 부여받은 안보적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어쨌든 이집트군은 465,0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군부가 정치적인 공백 상태를 관리할 능력이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다.

군부가 민주주의를 지지하거나 혹은 민주주의가 좋은 사상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실제로 장교단을 포함한 정치 엘리트의 다수는 공개된 정치적 경쟁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무바라크가 집권 초기에 명확히 했던 것 처럼) 이집트 인들이 민주주의에 걸맞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문화적 소양도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정치에 완전히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화가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기술과 판단력을 결여한 카리스마적이고 포퓰리즘 적인 지도자들, 특히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이용되어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본다. 엘리트들 사이에 이러한 견해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이 군부가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필요한 안보와 안정을 뒷받침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군부가 민주화 과정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을 수 있으며 보다 명확히 하자면 무슬림 형제단이 민주화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부 이집트 인들과 (그리고 분명히 일부 외국인들은) 군부가 이러한 역할을 해 주는 것을 반길 것이다. (이집트의) 장군들이 25년전 터키의 군부와 달리 정치에 참여하는 모든 세력은 정부의 세속적인 토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건설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이집트의 장군들은 이집트와 지역의 안정을 위협한다는 구실로 특정한 이슬람주의자들을 제외하는 식으로 정치적인 논의의 범주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장군들이 보다 급속한 변화를 요구하는 집단을 제외하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참여하는 이슬람 주의자들을 참여시키는 식으로 이러한 역할을 소극적으로 수행 한다면 그들의 역할은 실제로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장군들이 강경한 방식을 택하고 (현행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이슬람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민주화 이행과정의 정당성은 심각하게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또한 군부가 경제 개혁 과정을 감독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문의 대상이다.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는 최소한 군부가 소요한 기업 다수를 민영화하고 군부가 통제하고 있는 상당한 규모의 토지를 매각하는 것을 포함해 민간 경제 부문에서 군부가 차지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재평가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국방비의 삭감과 (미국의 군사원조의 상당부분을 경제 원조로 돌리는 것과 같은) 미국과 이집트 사이의 군사원조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도 포함된다. 장군들은 아마도 이러한 조치에 저항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들은 시위대를 지지하고 있는 많은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데 절실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집단은 무슬림 형제단이다. 무슬림 형제단의 시위 참여는 지금까지 미미한 수준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가 시작된지 며칠이 지난 1월 28일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단원들에게 시위에 참여하라는 호소를 하지 않았다. 비록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대에 참여하고 있으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으며 타흐리르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에서 가장 잘 조직된 반대세력이며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있더라도 한 축을 담당할 것이 틀림없다.

지난 15년간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는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률을 준수할 것이라고 공언해 왔다. 무슬림 형제단은 현제 이집트의 법률을 받아들이며 평화적이며 의회를 통한 방식으로 법을 개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의 위치는 완전히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무슬림 형제단은 여전히 기독교인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데 반대하고 있으며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데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의 대변인은 민주적인 절차에 참여하여 그들의 목표를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달성하길 원한다고 거듭 밝힌바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있으며 무슬림 형제단이 비밀스러운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두려워 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전체 인구의 거의 1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콥트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을 달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록 콥트 기독교인들은 이집트 전역에 거주하고 있고 다양한 사회경제 계층에 분포되어 있지만 1월 초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서 일어난 차량 폭탄 테러와 같이 지난 해 기독교 사회에 가해진 여러 차례의 강도 높은 공격에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러한 공격과는 연관이 없으며 이것들을 국가적 통합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트 기독교인들은 만약 이집트의 정치적, 안보적 상황이 악화된다면 기독교인에 대한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두려워 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이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알 카에다가 아니라는 점을 이집트 인들에게 확신 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몇 가지 방안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 무슬림 형제단의 소년 단원을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콥트 기독교도 형제들에게 보내 주는 것, 여성들을 무슬림 형제단의 고위 직책에 앉히는 것, 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과 콥트 기독교도들을 모두 포함한 정당을 건설할 계획을 공표하는 것 등이다. 대부분의 무슬림 형제단 단원들은 이러한 방안들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바로 “새로운 발상(outside the box)” 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렇게 극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것 만이 무슬림 형제단이 대다수의 이집트 인들로 부터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유일한 방법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평화로운 이행으로 가는 길은 어렵다는 것이다. 설사 헌법적인 도전을 극복하더라도 미국이 지지하고 있고 슐레이만이 추진하고 있는 현재의 계획은 고위 장교단이 사심이 없어야 하며 선견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한마디로 비현실 적이다. 설사 군부가 일어서더라도 이집트는 이번 봉기로 인해 더 악화된 막대한 경제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게다가 이행 과정은 상대적으로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만약 알 카에다가 이집트에서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면 약간의 차량 폭탄을 잘 활용하는 것 만으로도 - 콥트 교회 밖에서 터뜨린다던가 -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이집트 대중과 국제 사회의 시각을 극단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이행과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핵심은 헌법을 개정하고 경쟁 선거를 치르는데 필요한 안정적인 환경을 확보할 수 있도록 안보와 실업문제를 해결하는데 달려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집트 경제가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곧 바로 직면하게 될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원조를 제공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 이것은 아직 미국과 유럽연합 당국의 공식 성명에는 언급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 국제 사회는 이집트의 제조업 분야의 개편과 광범위한 민간 경제 분야의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는 어쩌면 미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이라는 범위 내에서 이집트의 상품에 대한 우선적인 접근권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의회는 대외 원조를 늘리거나 더 많은 특별 무역 협정을 허용할 생각이 없다.

만약 이집트에서 민주화의 시도가 성공하게 된다면 이것은 이 지역과 그 너머의 세계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실패하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심각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미국의 적대 세력을 강화하고 이 지역의 안정을 해치며 수십년간 민주적인 개혁의 정당성을 약화시킬 것이다.

사실은 오늘 오후에 RSS 피드를 살펴보다가 이스라엘의 반응에 대한 기사가 몇 편 눈에 들어와서 이것도 조금 번역하다가 왠지 의욕이 없어져서 놔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게 현재 똥줄이 타는 이스라엘의 움직임인데 여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글이 몇 편 나왔더군요. 급박한 사태인 만큼 향후의 추이가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러더포드 교수는 2008년에 Egypt after Mubarak: Liberalism, Islam, and Democracy in the Arab World 라는 책을 낸 바 있습니다. 어떤 저널의 서평에 실렸을 때 그냥 보고 지나쳤는데 이 기사를 번역하다 보니 새삼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과연 이 책에서는 어떤 전망을 했는지 살펴봐야 겠습니다.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국개론;;;;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발췌해 봅니다.

무엇보다 가장 논난될 수 있는 일은 1948년의 한국 선거가 너무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투표에 있어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문맹도의 기준을 문자해독에 두는 것은 국어교육에서 할 일이고 정치에서는 사리판단이 문맹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정치적 사리판단이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이 옳은가, 나쁜가의 판단과 같이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일제의 제한된 식민지 교육에서 그러한 정치적 판단능력이 기루어 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번에 바로 보통선거제를 채택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녀평등이라고 하여 여성에게도 무제한 선거권을 주었으나 당시 정치가나 입법자의 이상적 기질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여성 득표공작의 안이성을 고려한 manipulation이었던가. 프랑스에서 보통선거제가 안정된 것은 대혁명을 거친 훨씬 뒤였으며 영국에서는 1832년, 1847년의 선거법개정 이후에야 되었으며 여성참정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실현되었고 瑞西(스위스)의 일부에서는 아직 여성참정권이 거부되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은 자기의지가 박약하여 남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다. 구주에서는 성직자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공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거민이 있는 곳에 비합리적인 통치자가 등장하기 쉬운 것이다. 자유당이 붕괴하고 이승만씨의 단점이 내외에서 폭로되기까지 사실상 그의 mana를 많은 국민이 믿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에서의 투표율이 대체로 80%~98%에 이르렀다고 해서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반드시 계수로 표시해야만 만족하는 부류의 순진성일 따름이다. 투표율이 높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며 선진국에서 투표율이 약 60~70%된다고 해서 그 정도가 이상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99.9%의 투표율과 98%의 지지율을 공표해야 자기의 통치가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만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투표율이 줄어서 50% 이하로 내려가는 것은 우려할 사태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통 90% 정도의 투표율을 보이다가도 가끔 50% 미만의 사례도 나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국민이 갑자기 무관심의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높은 투표율 가운데 이미 무관심의 투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무관심은 단순히 붓대를 눌러 동그라미를 치고서는 어디다 눌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정치적인 관심은 없으나 받은 것이 있으므로 일종의 계약 이행으로서 투표하는 그런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른바 준봉(遵奉)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관권에 스스로 압복(壓伏)되거나 혹은 관의 투표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선거시의 테로 행위는 살상가상격이었다. 이러한 현성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도시의 중산층이나 지식층이 아무리 정부와 여당의 횡포에 대해서 투표로서 항의하고 투표함을 사수하고 해도 그외의 다수인구가 횡포한 권력의 지지세력(?) -엄밀히 말하면 투표수-으로 남아 있는 한 정권교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거가 정권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나 교체가 있어야 마땅한 지경에서 선거가 아무런 역활을 할 수 없다면 그러한 선거는 ‘하나 마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처음부터 5대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채택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정부 수립이래 여러번 치루었던 선거가 한결같이 기존 집권자의 승리로 끝났는데 앞으로도 얼마간이나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될지 알지 못한다.

裵成東, 「제도와 상황의 거리 : 한국의 두 정치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판」『靑脈』11호(1965. 8), 110~111쪽

*필자인 배성동은 서울대 교수, 11,12대 국회의원(민정당),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글에 대한 제 개인적은 감상을 이야기 하라면 ‘투표란건 원래 그런게 아닐까’ 입니다. 

50~60년대의 지식인들이 자유당이나 공화당이 계속 집권하는 꼴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 어쨌든 간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놈의 보통선거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타격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2008년 4월 23일 수요일

국개론과 그리스 찬미주의자들

채승병님과 Sonnet님이 ‘국개론’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분의 글을 읽으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광효과(halo effect)와 국개론의 망상 – 채승병

깨진 유리창 - Sonnet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개론은 상당히 널리 퍼진 것 같습니다. 표준적인 국개론은 ‘한나라당을 찍은 국민들은 다 개XX다’이고 좀 더 과격하게 발전된 국개론은 아예 제 2의 외환위기를 맞아 이명박을 찍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지요. 아마도 제 2의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국개론을 외치는 자들만 탈수 있는 방주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저도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답답하긴 마찬가지이고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는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에도 국개론자들이 일부 있는데 이들은 늘 진보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다수의 힘을 찬미하곤 했지요. 이들이 자신감에 차 있을 때 하던 이야기는 낯간지러우니 생략하도록 하고... 어쨌든 2002년에는 세상을 바꿀 것 처럼 들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지독한 염세론자들이 되어 한때 그토록 찬양하던 다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이걸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국개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의식이 뚜렷한 편이고 자신의 지식이나 판단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수가 가방끈도 긴 편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과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가끔씩은 아찔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런 사람들은 대중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답답해 하다가 결국에는 ‘국개론자’로 발전하게 되더군요.
이런 ‘국개론자’들을 보면 과거 역사 속의 어떤 집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그리스 찬미주의자(philhellene)는 터키의 지배에 맞서 싸우던 그리스의 클레프트(Klepht)를 지지했다. 대부분 나폴레옹 전쟁의 장교 출신이었던 이들은 1821년의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밀집 대형으로 훈련을 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노력 또한 비웃음과 조롱만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멸에서가 아니라,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략)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그리스인들이 대오를 지어 터키 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만약 그들이 유럽식으로 대오를 지은 채 터키 인들의 소총 앞에 맨 가슴을 내어 놓는다면, 순식간에 전멸을 당하고 결국 전쟁에도 패배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가장 유명한 그리스 찬미주의자인 바이런은 ‘그리스 인을 위해서 부끄러움을/그리스를 위해서 눈물을’이라고 노래하며 다른 자유수호자들과 더불어 그리스의 편에서 서서 또 하나의 새로운 테르모필라이 전쟁을 희망했다. 그러나 바이런 역시 합리적인 전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무지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음을 발견하고 다른 모든 유럽의 이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환멸과 절망을 느껴야 했다.(중략)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과 근대 그리스인이 같다는 믿음을 재빨리 내던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살아서 유럽으로 되돌아온 자들은, 그리스 찬미주의의 역사가 윌리엄 세인트 클레어가 쓴 대로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인들을 구역질을 내며 증오했고, 기만 당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저주했다.” 근대 그리스 인들의 용기를 찬미한 셸리의 순진한 시들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맞붙었던 전쟁에서 그랬던 것 처럼,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으로 “도보로 죽음과 맞서는 전장”에서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경로를 돌아서 서유럽의 전쟁에서도 그들만의 특징적인 전쟁 방식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최소한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 전술을 기꺼이 다시 배우려는 태도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것만이 터키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그럴 의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근대 그리스인들 사이의 혈통상의 단절만이 이러한 영웅적 문명의 몰락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존 키건,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A History of Warfare)』, (까치, 1996), 28~30쪽

대충 글자 몇 개만 바꾸면 국개론자와 그들이 혐오하는 일반 국민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쨌든 저는 사회가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국개론’ 따위의 염세적인 생각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정치인 하나 잘 뽑았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어차피 5년 뒤면 말 안해도 물러납니다. 우리가 5년만 살고 세상 등질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고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 정치를 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하지만 정말 변화를 갈망한다면 겨우 몇 번의 선거 결과에 실망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그보다는 꾸준한 정치 참여를 통해 작은 변화라도 계속해서 이뤄 나가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 5월 23일 수요일

남한의 병역 의무에 대한 잡상

잡설입니다.

이승만 담화집을 읽었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군사 문제와 관련된 담화나 연설에서 전통적인 역할모델을 찾는 경향이 보였다는 점 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의 사례와 국민 개병제를 연결 짓는 과감한(!) 발상입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도덕 교과서가 민주주의의 원형을 “화백제도”에서 찾듯 국민개병제의 원형을 고구려에서 찾는 것 이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주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그런데 왜 고구려는 이승만에게 있어 한국적 국민개병제(?)의 역할이 됐을까요? 이점은 꽤 흥미로운 문제인데 아마도 유럽식의 국민개병제, 즉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의 개념이 기본으로 탑재된 유럽식의 국민개병제라는 것이 1950년대의 남한 실정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민을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통치의 대상정도로 봤던 이승만이니 만큼 근대유럽의 사례를 들기 보다는 고대 왕조국가의 사례가 좀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됩니다. 아마도 남한의 국민들이 병역에 따르는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은 이승만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 입니다. 사실 국민방위군 같은 개념없는 사고를 내던 것이 이승만 정권이니 만큼 유럽식의 의무와 권리가 결합된 개병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을 것 같기도 하군요.

이승만 뿐만 아니라 박정희 막부에서도 국민을 동원하는 논리는 민주주의 사회의 그것 보다는 왕조시대의 논리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진지하게 고찰한 것이 아니라 근거도 빈약하고 모호하기는 합니다만 이박사나 박장군이 국민의 권리에 대해서 관심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거의 확실한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왕조시대의 전통을 억지로 현대에 끌어다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이박사나 박장군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기 보다는 전통왕조의 국왕에 가까운 통치자였으니까요.

남한의 병역 의무라는 것이 서구사회의 병역 의무 보다는 왕조시대의 부역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선대의 훌륭한(?) 지도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징병제도를 개선하려면 이런 부역 같은 느낌이 나지 않도록 하는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