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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0일 월요일

국개론;;;;

60년대 잡지를 읽다가 재미있는 구절이 있어서 발췌해 봅니다.

무엇보다 가장 논난될 수 있는 일은 1948년의 한국 선거가 너무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투표에 있어 판단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문맹도의 기준을 문자해독에 두는 것은 국어교육에서 할 일이고 정치에서는 사리판단이 문맹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정치적 사리판단이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이 옳은가, 나쁜가의 판단과 같이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일제의 제한된 식민지 교육에서 그러한 정치적 판단능력이 기루어 질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번에 바로 보통선거제를 채택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남녀평등이라고 하여 여성에게도 무제한 선거권을 주었으나 당시 정치가나 입법자의 이상적 기질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여성 득표공작의 안이성을 고려한 manipulation이었던가. 프랑스에서 보통선거제가 안정된 것은 대혁명을 거친 훨씬 뒤였으며 영국에서는 1832년, 1847년의 선거법개정 이후에야 되었으며 여성참정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실현되었고 瑞西(스위스)의 일부에서는 아직 여성참정권이 거부되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은 자기의지가 박약하여 남의 의사에 따른다는 것이다. 구주에서는 성직자의 영향을 배제해야 한다는 이유를 공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거민이 있는 곳에 비합리적인 통치자가 등장하기 쉬운 것이다. 자유당이 붕괴하고 이승만씨의 단점이 내외에서 폭로되기까지 사실상 그의 mana를 많은 국민이 믿고 있지 않았던가.

한국에서의 투표율이 대체로 80%~98%에 이르렀다고 해서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높다고 평가하는 것은 아전인수격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반드시 계수로 표시해야만 만족하는 부류의 순진성일 따름이다. 투표율이 높은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니며 선진국에서 투표율이 약 60~70%된다고 해서 그 정도가 이상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99.9%의 투표율과 98%의 지지율을 공표해야 자기의 통치가 체면이 서는 것으로 생각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만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투표율이 줄어서 50% 이하로 내려가는 것은 우려할 사태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보통 90% 정도의 투표율을 보이다가도 가끔 50% 미만의 사례도 나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국민이 갑자기 무관심의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높은 투표율 가운데 이미 무관심의 투표가 항상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무관심은 단순히 붓대를 눌러 동그라미를 치고서는 어디다 눌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그런 것도 있고 또 정치적인 관심은 없으나 받은 것이 있으므로 일종의 계약 이행으로서 투표하는 그런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혹은 이른바 준봉(遵奉)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관권에 스스로 압복(壓伏)되거나 혹은 관의 투표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선거시의 테로 행위는 살상가상격이었다. 이러한 현성이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지 않았다. 도시의 중산층이나 지식층이 아무리 정부와 여당의 횡포에 대해서 투표로서 항의하고 투표함을 사수하고 해도 그외의 다수인구가 횡포한 권력의 지지세력(?) -엄밀히 말하면 투표수-으로 남아 있는 한 정권교체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선거가 정권교체만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나 교체가 있어야 마땅한 지경에서 선거가 아무런 역활을 할 수 없다면 그러한 선거는 ‘하나 마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처음부터 5대원칙에 입각한 선거제도를 채택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정부 수립이래 여러번 치루었던 선거가 한결같이 기존 집권자의 승리로 끝났는데 앞으로도 얼마간이나 이러한 현상이 되풀이 될지 알지 못한다.

裵成東, 「제도와 상황의 거리 : 한국의 두 정치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판」『靑脈』11호(1965. 8), 110~111쪽

*필자인 배성동은 서울대 교수, 11,12대 국회의원(민정당),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이 글에 대한 제 개인적은 감상을 이야기 하라면 ‘투표란건 원래 그런게 아닐까’ 입니다. 

50~60년대의 지식인들이 자유당이나 공화당이 계속 집권하는 꼴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 어쨌든 간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놈의 보통선거가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 타격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2008년 4월 23일 수요일

국개론과 그리스 찬미주의자들

채승병님과 Sonnet님이 ‘국개론’에 대한 글을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분의 글을 읽으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광효과(halo effect)와 국개론의 망상 – 채승병

깨진 유리창 - Sonnet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국개론은 상당히 널리 퍼진 것 같습니다. 표준적인 국개론은 ‘한나라당을 찍은 국민들은 다 개XX다’이고 좀 더 과격하게 발전된 국개론은 아예 제 2의 외환위기를 맞아 이명박을 찍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지요. 아마도 제 2의 외환위기 사태가 벌어지면 국개론을 외치는 자들만 탈수 있는 방주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물론 저도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답답하긴 마찬가지이고 한나라당을 찍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경멸하는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에도 국개론자들이 일부 있는데 이들은 늘 진보와 민주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다수의 힘을 찬미하곤 했지요. 이들이 자신감에 차 있을 때 하던 이야기는 낯간지러우니 생략하도록 하고... 어쨌든 2002년에는 세상을 바꿀 것 처럼 들떠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지독한 염세론자들이 되어 한때 그토록 찬양하던 다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이걸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국개론자들은 대부분 정치적 의식이 뚜렷한 편이고 자신의 지식이나 판단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수가 가방끈도 긴 편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과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가끔씩은 아찔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런 사람들은 대중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답답해 하다가 결국에는 ‘국개론자’로 발전하게 되더군요.
이런 ‘국개론자’들을 보면 과거 역사 속의 어떤 집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그리스 찬미주의자(philhellene)는 터키의 지배에 맞서 싸우던 그리스의 클레프트(Klepht)를 지지했다. 대부분 나폴레옹 전쟁의 장교 출신이었던 이들은 1821년의 그리스 독립전쟁이 발발했을 때 밀집 대형으로 훈련을 하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노력 또한 비웃음과 조롱만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멸에서가 아니라,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략)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그리스인들이 대오를 지어 터키 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은 만약 그들이 유럽식으로 대오를 지은 채 터키 인들의 소총 앞에 맨 가슴을 내어 놓는다면, 순식간에 전멸을 당하고 결국 전쟁에도 패배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가장 유명한 그리스 찬미주의자인 바이런은 ‘그리스 인을 위해서 부끄러움을/그리스를 위해서 눈물을’이라고 노래하며 다른 자유수호자들과 더불어 그리스의 편에서 서서 또 하나의 새로운 테르모필라이 전쟁을 희망했다. 그러나 바이런 역시 합리적인 전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무지는 결코 극복될 수 없음을 발견하고 다른 모든 유럽의 이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환멸과 절망을 느껴야 했다.(중략)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던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과 근대 그리스인이 같다는 믿음을 재빨리 내던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살아서 유럽으로 되돌아온 자들은, 그리스 찬미주의의 역사가 윌리엄 세인트 클레어가 쓴 대로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인들을 구역질을 내며 증오했고, 기만 당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저주했다.” 근대 그리스 인들의 용기를 찬미한 셸리의 순진한 시들은 특히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중무장 보병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맞붙었던 전쟁에서 그랬던 것 처럼,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으로 “도보로 죽음과 맞서는 전장”에서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경로를 돌아서 서유럽의 전쟁에서도 그들만의 특징적인 전쟁 방식이 되었다.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최소한 근대 그리스인들이 밀집 대형 전술을 기꺼이 다시 배우려는 태도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것만이 터키로부터 그들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그럴 의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그리스 찬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인들과 근대 그리스인들 사이의 혈통상의 단절만이 이러한 영웅적 문명의 몰락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존 키건, 유병진 옮김, 『세계전쟁사(A History of Warfare)』, (까치, 1996), 28~30쪽

대충 글자 몇 개만 바꾸면 국개론자와 그들이 혐오하는 일반 국민들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쨌든 저는 사회가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국개론’ 따위의 염세적인 생각을 떨쳐버렸으면 합니다.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정치인 하나 잘 뽑았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대통령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어차피 5년 뒤면 말 안해도 물러납니다. 우리가 5년만 살고 세상 등질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고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현실 정치를 보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일 것 입니다. 하지만 정말 변화를 갈망한다면 겨우 몇 번의 선거 결과에 실망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그보다는 꾸준한 정치 참여를 통해 작은 변화라도 계속해서 이뤄 나가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