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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7일 일요일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잡상

Big Train님의 이글루에 들렀더니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올라와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Big Train님의 글에 달린 댓글과 트랙백으로 엮인 글들도 흥미롭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매우 싫어합니다. 이승만을 비판할 이유야 넘쳐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초기 무책임하게 서울을 버리고 피신했다는 점 입니다. 물론 전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회는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김규식과 같은 재야의 거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승만이 피난하면서 버려둔 수많은 문서들은 북한에 노획되어 북한의 선전도구가 되었지요.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 공황상태에서의 도주에 불과했습니다. 긴급시에 국가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이승만이 25일 오후 부터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된 미국 대사관의 전문은 이승만이 25일 밤에 미국 대사를 불러 피난할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지요. 그런데 이 자료가 공개되어 널리 알려진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우익은 내용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프란체스카 비망록을 들먹이며 이승만이 27일까지도 서울을 사수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글,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에 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6월 25일~28일 기록은 작성된 시기조차 확실하지 않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막고하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강한 글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25일 밤~26일 새벽에 이승만을 면담하고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 남아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 비망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내용을 따르는 글들이 ctrl+c+v되어 인터넷 곳곳에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6월 25일~27일 경무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입니다. 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먼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정부기관과 국회의 피난을 책임졌다면 그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한 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 당일 부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더욱 더 비참한 것은 정작 외국인인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최후까지 남아 대통령이 도망치고 나서 공황상태가 된 한국군 수뇌부를 도우려 했다는 것 입니다.

무초 대사는 1950년 6월 27일 오전 6시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전문을 보냈습니다.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정부의 수뇌인 이승만이 생포되면 대한민국이 붕괴될 수 있으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옹호는 이승만이 정부와 의회, 그 밖의 국가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피난시키려고 노력했을 때에나 가능할 것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국대사인 무초는 한국군 수뇌부와 함께 글자그대로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서울에 남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무초의 책임은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웠지만 무초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보다도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이 없던 자를 국부로 추앙하려는 정신나간 움직임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데서 오는 것이지 억지로 만든 국부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닙니다.

2009년 12월 18일 금요일

러시아식 저녁식사에 대한 여운형의 추억

1921년, 코민테른은 워싱턴회의에 맞불을 놓는 차원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합니다. 이 대회는 서유럽과 미국 등 서방열강의 전후처리에 실망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었고 조선에서도 많은 대표자를 파견합니다. 여기에는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홍범도 등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민족운동의 거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됩니다. 여운형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모스크바로 가게 되는데 내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상태라 고생이 꽤 심했던 모양입니다. 여운형은 모스크바를 향해 출발하기 전날의 저녁식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일부러 역부(驛夫)대신 우리를 차깐으로 안내한 러시아동무가 준비해 가지고 온 초에 불을 켜니 얼룽거리는 누런 광선의 히미한 조명이 그려내는 차실(車室) 한복판의 광경은 자못 황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의자의 '쿳숀'은 다 떨어저서 밑바닥의 나무가 보기 싫게 노출되어 있고 천정에는 거미줄까지 보였다. 마루판에는 물론 두꺼운 먼지가 우리의 발자국을 번듯하게 색여주었다.

일행이 먼지를 툭툭털며 한복판에 모여앉어 자리를 잡고나니 곧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보다 훨신 뒤떨어져서 들어온 다른 러시아동무가 검은 나무토막을 하나 가슴에 안는 듯이하고 들어오더니 가지고 온 도끼로 패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스토-브'에 땔나무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은 의외에도 검정'빵' 이었다. 밀가루 뿐만 아니라 집푸래기 가루까지도 다분히 섞인 이 검정'빵'을 원악 오래 묵힌데다가 추위에 꽝꽝 얼어서 나무패듯이 도끼로 찍기전에는 도저히 쪼개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검정빵 밖에 연어알과 무엇인지 이름 모를 소름에 저린 생선이 우리에게 급여된 저녁음식의 전부였다. 물론 차도 붙었으나 때무든 양철찻잔과 집이나 삶은 물 같은 누르틉틉한 차물빛은 그다지 식욕을 끄는 것은 되지 못하였다. 양고기 밖에는 먹지를 않는 몽고 동무들은 물론 조선 동무들도 모도 이 심히 살풍경한 반찬에는 감히 손도 대려고 하지 않었다. 그러나 나는 연어알을 조금하고 검정빵을 찻물에 충분히 축인것을 조금 먹어 보았다. 내가 먹는 바람에 다른 동무들도 차물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각사탕도 오직 한개 씩 밖에는 차레에 오지 않었다.

그럭저럭 저녁밥의 흉내를 내고나니 이 뜻밖에 황량한 저녁식사는 우리들 일동의 활발한 이야기 꺼리가 되었다. 내일도 모레도 여행하는 동안에 때마다의 식사가 늘 이러면 어떨까하는 불안이 누구의 말틈에도 새여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당시의 러시아를 전국적으로 휩쓸고 지나간 저 대기근의 뒤를 이은 극도의 식량결핍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또 그 조악한 식량에 의하여서도 능히 역사가 그들의 어깨우에 얹어주는 모든 짐을 하나로 거절하지 않고 씩씩하게 지어나가는 이 땅의 새로운 민중정신의 감화력이 우리의 이따위 불안같은 것은 오직 웃음거리에 지나지 못한 것임을 잘 알게 하여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呂運亨,「모스크바 印象」, 夢陽呂運亨先生全集發刊委員會, 『夢陽 呂運亨 全集 1』, 한울, 1991, 64~65쪽에서 재인용.

독립운동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는 심각한 상황에 대한 묘사이건만 빵을 도끼로 쪼개는 부분에서는 살짝 웃음이 나오는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독립운동을 하려면 식성부터 좋아야 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식성이 까탈스러우니 저당시 살았다면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2007년 10월 8일 월요일

어떤 정치인의 공산주의관

강원룡 목사에 따르면 김규식 박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알바니아에서 공산혁명을 할 때에 하룻밤에 만 명을 죽인 바가 있는데, 결국 공산주의라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또 공산주의에 한번 빠진 사람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406~407에서 재인용

뭐랄까, 언뜻 보면 대단히 극우적인 인사의 발언 같은데 김규식 박사와 같이 온건하고 중립적인 지식인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런데 한민족이 대단히 잔인하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가 되면 러시아 보다 더 잔인해 질 것이라는 예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실제로 입증되었으니 김박사의 생각이 제법 잘 들어맞은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