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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7일 일요일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잡상

Big Train님의 이글루에 들렀더니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올라와 있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Big Train님의 글에 달린 댓글과 트랙백으로 엮인 글들도 흥미롭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매우 싫어합니다. 이승만을 비판할 이유야 넘쳐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초기 무책임하게 서울을 버리고 피신했다는 점 입니다. 물론 전황이 불리했기 때문에 서울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회는 사전 통보조차 받지 못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김규식과 같은 재야의 거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이승만이 피난하면서 버려둔 수많은 문서들은 북한에 노획되어 북한의 선전도구가 되었지요. 이승만의 피난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 공황상태에서의 도주에 불과했습니다. 긴급시에 국가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 공황상태에 빠져 도망쳤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울한 것은 이승만이 25일 오후 부터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1970년대 후반에 공개된 미국 대사관의 전문은 이승만이 25일 밤에 미국 대사를 불러 피난할 생각을 털어놓았다는 것을 밝혀냈지요. 그런데 이 자료가 공개되어 널리 알려진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우익은 내용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프란체스카 비망록을 들먹이며 이승만이 27일까지도 서울을 사수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글,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에 서도 언급했지만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6월 25일~28일 기록은 작성된 시기조차 확실하지 않고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막고하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강한 글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 미국대사 무초가 25일 밤~26일 새벽에 이승만을 면담하고 국무부에 보낸 전문이 남아있기 때문에 프란체스카 비망록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프란체스카 비망록의 내용을 따르는 글들이 ctrl+c+v되어 인터넷 곳곳에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6월 25일~27일 경무대에서 일어난 일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입니다. 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먼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정부기관과 국회의 피난을 책임졌다면 그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한 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 당일 부터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정말로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더욱 더 비참한 것은 정작 외국인인 주한미국대사 무초가 최후까지 남아 대통령이 도망치고 나서 공황상태가 된 한국군 수뇌부를 도우려 했다는 것 입니다.

무초 대사는 1950년 6월 27일 오전 6시에 다음과 같은 짤막한 전문을 보냈습니다.

966. 서울 북쪽의 북한군은 지난 밤 사이 조금 더 진격해왔습니다. 가장 신뢰할 만한 상황 평가에 따르면 서울 근방의 적군 병력과 전차 숫자가 과대평가되긴 했어도 숫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들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한국군 참모부는 아직 서울을 사수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수의 지원자와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until bitter end) 서울에 남을 것이며 드럼라이트 참사관 및 소수의 대사관 직원을  자동차 편으로 대통령을 따르게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막기 위해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핵심 요원은 사태의 추이에 따라 차량을 이용해 남쪽으로 보내고 그밖의 군사고문단 요원들은 항공기편으로 피신시켜야 합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7),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173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정부의 수뇌인 이승만이 생포되면 대한민국이 붕괴될 수 있으므로 이승만의 피난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옹호는 이승만이 정부와 의회, 그 밖의 국가 기관들을 체계적으로 피난시키려고 노력했을 때에나 가능할 것 입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국대사인 무초는 한국군 수뇌부와 함께 글자그대로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서울에 남았습니다. 한국에 대한 무초의 책임은 이승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벼웠지만 무초는 위험을 무릅쓰고 외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외국인보다도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감이 없던 자를 국부로 추앙하려는 정신나간 움직임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데서 오는 것이지 억지로 만든 국부 따위를 받들어 모신다고 생기는게 아닙니다.

2011년 1월 5일 수요일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

번동아제님의 쌍령전투에 대한 글을 읽어보니 당시 조선군의 사격군기 문제가 언급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습니다. 화약무기가 도입된 이후 사격군기는 한 군대의 훈련수준을 평가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잘 훈련된 군대일수록 사격군기가 훌륭해서 함부로 탄약을 낭비하지 않지요. 아무래도 저는 근현대 군사문제에 관심이 많다 보니 창군초기 한국군의 사격군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창군초기 한국군도 사격군기 문제가 심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순반란진압, 빨치산토벌, 38선 충돌 등 심각한 상황이 잇달아 발생했으니 탄약 소모가 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사격훈련도 부족하니 불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격이었던 모양입니다.

1949년 여름 옹진반도에서는 연대급 부대가 동원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탄약 소모는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이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을 보면 8월의 2차 옹진 반도 전투당시 한국군은 총1,022.276발의 각종 탄약을 사용해서 북한군 69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북한군 한 명을 사살하는데 14,604발의 탄약을 소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1)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육군부 기획작전국장 볼테(Charles Bolte) 소장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한국군은 작전 수행중에 탄약을 황당할 정도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측의 요구대로 보급을 해 준다면 문제만 복잡해 질 뿐입니다. 저는 기본적인 문제, 바로 사격훈련과 사격군기의 결여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헤프게 물자를 소비하는 한국측에게 탄약을 공급하는 것을 그만 둬야 합니다. 또한, 최근 옹진반도 전투에서 적이 입은 인명피해와 우리측이 소비한 탄약에 대한 조사를 보면 적 한명을 사살하는데 14,604발의 탄약을 소비했다는 점도 지적하고자 합니다.

(They burn up ammunition at a fantastic rate in operations, and to supply all their requirements only compounds the problem. I have hit at the basic difficulty - lack of marksmanship training and fire discipline - and if we are to get those problems licked, we must stop giving them ammunition with such a lavish hand. In passing, I should like to point out that in a recent battle on the Ongjin peninsula, a study of enemy casualties and our own ammunition expenditure showed that it took 14,604 rounds of ammunition to produce one casualty.)2)
이런 문제는 미국쪽만 지적한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한국군 참전자들의 증언에 크게 의존한 사사끼 하루다카(左左木春隆)의 저작에도 당시 옹진반도에 투입된 2연대의 전투시 탄약 낭비가 극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3)

이 당시 한국군의 사격군기 문제의 중요성은 전술적인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군사 원조가 제한적인 상태에서 보급문제를 더 악화시켰기 때문입니다.


1) Memorandum to Minister of National Defense(1949. 8. 17), RG 338, KMAG Box8 : Brig. General W.L.Roberts(Personal Correspondence), 1949; Birg. General W.L.Roberts(Meomorandum), 1949
6일 동안의 전투에서 2연대가 소비한 탄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30구경 소총탄 288,071발
30구경 카빈탄 242,989발
30구경 자동소총탄 158,897발
30구경 기관총탄 223,502발
50구경 기관총탄 51,506발
45구경 권총탄 32,140발
2.36인치 로켓탄 634발
60mm 박격포탄 10,269발
81mm 박격포탄 8,696발
105mm 포탄 5,572발
2) 로버츠가 볼테에게(1949. 8. 19), RG 338, KMAG Box8 : Brig. General W.L.Roberts(Personal Correspondence), 1949; Birg. General W.L.Roberts(Meomorandum), 1949
3) 左左木春隆/姜昶求 編譯, 『韓國戰秘史(上) 建軍과 試鍊』(병학사, 1977), 456~457쪽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지금 당장 더 많은 군대를!

 1948년 8월 30일,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은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과 국방부 조직, 국방조직법*을 협의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날 모임에는 이 밖에 임시군사고문단 참모장 라이트(W. H. Sterling Wright) 대령, 보스(Voss) 대령,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와 이범석의 통역(신원미상)이 동석했습니다.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의 문서철에는 8월에 진행된 이범석과의 회의 속기록이 남아있어서 이날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날 논의된 내용 중에서는 국방부와 각군 본부의 조직문제가 핵심사안이었는데 한국측은 규모가 큰 조직을 원했던 반면 미국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전 략 - 헌병병과 관할 문제)

이범석 : 좋습니다. 좋습니다. 해군과 공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국방부 편제에 추가할 겁니까?

로버츠 : 여기서는 육군만을 논의하는 것 입니다. 해군이나 공군은 아닙니다. (국방부 조직도를 보여주며) 라이트 대령이 짠 조직도는 육군만 해당되는 것 입니다.

라이트 : (이범석의 통역에게) 국방부장관께 이것은 국방조직법이며 의회에 상정되어 법안으로 확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십시오. 이것은 상위조직에 대한 문제이며 저것은 하위조직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범석 : 하위조직이라. 알겠소. 대령은 이것이 육군에만 해당된다는 것이군요.

로버츠 : 그렇습니다. 장관님께서 규정을 만드시는 겁니다.

이범석 : 알겠소. 알겠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국방부 참모총장의 아래에 해군과 공군의 참모장을 둬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로버츠 : 국방부 참모총장과 육군총참모장은 여기에 있습니다.

라이트 : (로버츠에게?) 한국측에게 이것(국방조직법 초안)을 주기 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해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상위조직에 대해 한미간에 합동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 입니다. 육군, 해군, 국립경찰, 그리고 공군 총참모장은 이 조직 아래에 두게 될 것 입니다. 오늘 오전에 논의할 것은 육군 문제입니다.

통역관 : 한국에서는 이것을 그냥 참모총장으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총참모장보다 더 높은 직위를 뜻하는 것 입니다.

이범석 : NP라고 표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라이트 : 국립경찰입니다.

이범석 : 한국에서는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을 총괄하는 단 한명의 참모총장이 있을 뿐 입니다. 채병덕(Mr. Chae) 입니다.

라이트 : 미국에서는 (합참의장을) 한번은 해군이, 다음에는 육군이, 다음에는 공군이 맡는 식 으로 합니다.

로버츠 : 이 조직도에 있는 국방부 참모총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보다 더 나은 방안이 있습니다. 합동참모본부입니다. 삼군과 하나의 위원회, 하나의 협의체를 두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국방부 참모총장은 아마도 육군 출신으로 임명될 테니 말입니다. 미국에서 하는 것 처럼 하나의 협의체인 합동참모본부를 두는 것이 더 잘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이범석 : 그 문제는 여기서 논의할 사안이 아닌 것 같소.

로버츠 : 합동참모본부를 법안에 의거해 만들어야 한다면 현재의 초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국방조직법을 만들면 될 것 입니다. 새로운 법안 말입니다.

로버츠(?) : 국립경찰도 국방부 예하에 두는 것 입니까?

이범석 : 아니오. 그건 아니오.

로버츠 : 그렇다면 경찰 부분은 지우고 그 자리에 공군을 넣으면 되겠군요.

이범석 : 3군의 총참모장이 국방부 참모총장(Big C/S)를 보좌할 것이오.

라이트 : (로버츠에게?)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의 직속으로 제반 업무를 총괄하는 직위를 하나 두려는 모양입니다.
(이범석에게) 그 법안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이것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이범석 : 국회에서 만든 법안이오. 헌법 말이오.

로버츠 : 마샬은 육군만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해군이나 공군까지 통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는 이런 종류의 참모총장이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모든 병종을 합동참모본부를 통해 통제합니다. 하나의 협의체 말입니다.

로버츠 : (통역에게?) 이러다간 하루가 36시간이 되겠군. 국방부 장관에게 말하게.

이범석 : 육군에 대한 구상은 매우 좋습니다. 첫 번째는 강력한 참모총장, 두 번째가 육군과 해군, 공군이오.

로버츠 : 그것은 장관님이나 국방부 차관이 담당할 업무입니다.

이범석 : 유감스럽게도 그게 불가능하오.

라이트 : 저희가 반대하는 이유는 국방부 참모총장은 육군 출신이 될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는 육군에만 신경을 쓸 겁니다. 해군에 대해서는 지랄같겠죠.(to hell with the navy)

로버츠 : 미국에서는 매우 좋은 해결책을 강구했습니다. 삼군의 참모총장이 한 위원회를 구성해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하는 것 입니다.

이범석 : 육군 출신은 참모총장이 되어도 육군 위주로 생각할 것이오. 나도 국방부장관인데 육군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소.

로버츠 : 그런데 그는 공군 출신입니다.(누굴 지칭하는지 불명)

이범석 : 국방부 장관은 삼군 모두를 신경써야 하는 직위요. 국방부 참모총장도 삼군 모두를 신경써야 하오. 넓은 아량과 지혜를 갖춘 좋은 인물이어야 하오.

라이트 : 국방부 참모총장은 어디 출신입니까? 육군입니까, 해군 아니면 민간인 출신입니까?

이범석 : 아직은 국방부 참모총장을 어디 출신으로 할 지 말할 수 없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육군 장교들 말고는 좋은 사람을 구할 수 없소.

라이트 : 그게 문제입니다.

이범석 : 그래서 육군 출신으로 임명하게 될 것 같소. 그렇지만 국방부 참모총장 아래의 각군 총참모장은 해군, 육군 그리고 공군 출신이 될 것이오. 국방부 참모총장은 매우 까다로운 문제요.
인도에서 전문을 하나 받았소. 해군 장교인데 매우 유능한 인물이오.***

하우스만 : 아마 영국해군 출신이었지오? 아닙니까?

이범석 : 그렇소 영국 해군 출신이지. 선장이오. 장군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오. 56살인가 54살인가 할 것이오.

라이트 : 그가 해군총참모장이 되는 것 입니까? 허?

로버츠 : 그를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해도 되겠군요.

이범석 : 유감스럽게도 그는 육군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오. 해군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오.
내 생각에는 아마 1년 정도의 협력으로는 육군 업무 만을 다룰 수 밖에 없을 것 같소. 두번째 단계에서는,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다면 1년이나 2년 정도 미국의 협력으로 해군 업무를 조금 추진할 수 있을 것이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세가지 구상이 있소. 4년 내지 5, 6년이 지난 뒤 미국 대통령이나 맥아더 장군과 회견을 하는 것이오. 이 문제는 한국의 고위 정치, 고위급 문제이오(? 통역의 문제로 미국측이 이해를 못함) 만약 대한민국이 전시에 미국과 협력하지 못한다면 나는 물러나야 하고 여기서 죽어야 할 게요. 우리 나라는 민족적 민주주의 국가요. 우리는 미국과 협력할 수 있을 것이오.

로버츠 : 설사 지금 올바르게 하지 못하더라도 일을 진행해 나가면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범석 : 육군, 해군 그리고 공군 참모총장 세명 말이오?

-라이트 대령과 로버츠 준장은 합동참모본부의 업무, 임무, 기타 제반사항에 대해 설명했다.

이범석 : 귀측의 구상이 마음에 들지만 나는 권한이 없소.

하우스만 : (국방부) 참모총장을 민간인으로 해도 되겠지요.

라이트 : 아냐. 이범석 장관에게 물어봤지만 아직까지는 모르겠다잖아.

로버츠 : 나는 삼군을 모두 총괄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한 인재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하우스만 : 우리 미군에서도 찾을 순 없을 겁니다.

이범석 : 만약 참모총장이 무능하다면 교체할 수는 있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로버츠 : (통역에게) 이범석 장관에게 미국에서도 그런 인재를 찾을 순 없을 거라고 말하게.

이범석 : 우리는 그런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로버츠 : 왜 국방부차관이 그 업무를 담당할 수 없습니까? 한국 내에서 유능한 인물을 구할 수는 없을 겁니다. 국방부차관을 국방부 참모총장으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범석 : 큰 문제가 있소. 한 사람이 두개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오. 한국의 모든 정치인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오.

로버츠 : 그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는 그 업무를 다룰 수 있을 겁니다.

이범석 : 장군과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정치인들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한국에는 많은 문제가 있소. 정치인들은 국방부를 비난할 것이고 아마도 엉망이 될 것이오.

로버츠 : 국방부 조직을 우리가 제안한 대로 하고 한 두달 정도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도록 하지요. 천천히 진행하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조직을 개편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범석 : 만약 국방부 참모총장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 정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헌법에서 국방부 참모총장을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오.

라이트 : 우리는 국방에 대한 부분을 언급한 대한민국 헌법의 영문 번역본을 읽어봐야 겠습니다. 역시 유능한 번역가가 담당해야 겠지요...

이범석 : 아마도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만주국군, 소련군 또는 일본군 등과 비슷한 것 같소.

로버츠 : 명칭은 무엇으로 합니까? 우리는 이 참모총장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범석 : 영어로는 Chief of Stafft이오. 한국어로는 다르오.

라이트 : 이 직위를 국군 참모총장으로 불러도 되겠지요. 그리고 한국어로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단어로 부르면 될 겁니다.

<이 단어의 번역을 두고 토의가 이어졌는데 내가[속기록 기록자] 듣기로는 COMO CHONG JON 이었다. CHONG은 모든 것을 총괄한다는 뜻으로 로버츠 준장이 제안한 supreme에 해당된다>

로버츠 :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Supreme C/S로 부르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누굴 임명합니까? 어떤 사람을 임명합니까?

이범석 : 대통령 각하께 여쭤보겠소. 만약 쓸만한 사람이 아니면 대통령 각하께 다른 사람을 제안해 보겠소. 전문가들 몇몇에게 문의해 볼 수도 있겠고. 만약 참모총장이 신통찮다면 000<한국어로 길게 이야기 했는데 로버츠 준장은 이것을 kick him out으로 요약했다> 할 수 있을 것이오.

라이트 : 참모총장은 매우 중요한 직위이기 때문에 조언을 할 참모진이나 그 비슷한 것이 필요할 겁니다.

로버츠 : 한국의 문제는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높은 직위에 몰려있어 각 연대를 지휘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만약, 국방부 참모총장을 두게 된다면 그도 유능한 장교들을 필요로 할 것 입니다. 이 유능한 장교들, 이 유능한 장교들을 참모총장의 참모진으로 데려간다면 일선 연대장 자리에는 쓰레기 같은 자들 말곤 남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범석 :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만약 그가 생각을 잘 한다면 유능한 인재를 모두 쓸어가진 않을 거요.

로버츠 : 아닙니다. 저는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범석 :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능력이 있소. 어떤 사람은 보급에, 어떤 사람은 일선 지휘관에, 어떤 사람은 의무나 그밖의 다른 능력이 있을 것이오. 이런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을 참모부의 각 직위에 임명하는 것이오.

로버츠 :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군이) 학교에 가야 할 어린아이 같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필요로 하기 전에 잠옷, 교복, 정장과 제복을 사줘야 합니다. 시작은 단순합니다. 뒤에 계속 추가해 나가는 것입니다. 한국군은 아직 초창기이고 앞으로 계속 성장해 나갈 것 입니다. 한국군의 성장에 맞춰 추가해 나가는 것 입니다.

이범석 : 맞소. 맞소. 같은 것이오. 미국은 지금 대국입니다. 미국의 육군, 해군, 공군은 전쟁을 치르면서 세계 최고가 되었소. 장군도 아시다 시피 이게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 것은 아니잖소? 아마 300년은 족히 걸렸을 것이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소. 일본은 60년에 걸쳐 육군과 해군을 건설했소. 그리고 그들은 아마 25년이면 다시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오. 대한민국은 지금 당장 신속히 대규모 육군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해군과 공군도. 장군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소.<시계를 보니 0900였다>
미안하오.
한국군은 500명의 대위와 100명의 소령만 있소. 작은 군대요. 반드시 증강되어야 하고 고급 장성도 많이 필요하오.(Must expand; many big generals)

라이트 : 추장만 있고 부족원은 없군요.(All Chiefs and no Indians)

이범석 : 대한민국 전역에서 군 문제에 대해 경험이 있는 인재를 모아들이고 있소. 현재 사정이 매우 어렵소. 우리는 많은 육군을 가져야 하오.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오. (한국어로 길게 이야기 함)

라이트 : (통역관에게) 내 생각에는 국군조직법을 이범석 장관의 뜻에 따라 다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공군은 육군 예하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범석 : 해군은 사소한 문제요. 육군은 큰 문제고.

로버츠 : 당분간 공군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중에 논의할 수 있겠지요.

이범석 : 우리는 미국으로 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이오.

로버츠 : 예. 우리나라가 귀국에 비행기를 준다면 공군부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후략 - 족청단원의 군입대 문제)

“Conference between Lee Bum Suk, Premier of Korea, Gen Robts(1948. 8. 30)” RG338, KMAG, 1948-53, Box 4, Files : Brig. General W. L. Roberts

*이 당시에는 아직 명칭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만.
**1948년에는 국방부장관과 국방부차관, 국방부 참모총장과 참모차장 아래에 육군 총참모장과 해군 총참모장이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크게 다르죠.
*** 신성모 이야기인데 사실과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통역이 실수한 것인지 아니면 이범석이 실수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성모는 2차대전 중 소식이 두절되어 있다가 1948년 8월에 생존해 있다는 것이 한국에 알려졌지요. 신성모의 생존에 대한 동아일보기사(1948. 8. 5)

 농담삼아 이야기 하면 이미 건국초부터 육방부의 재앙(???)을 예측한 사람들이 있군요. ㅋ

 이미 로버츠 준장의 지적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한국군의 증강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로는 유능한 장교의 부족이 꼽히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1947년 부터 시작된 조선경비대 증강당시에도 지적된 문제입니다. 단순히 원조를 하기 싫다는 이유로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닌 것이죠. 실제로 한국전쟁이 터진 뒤에 미국의 원조가 본격화 되었지만 육군의 증강, 특히 포병이나 기갑등의 증강이 매우 매우 더디게 진행된 이유 중 하나도 유능한 장교의 부족이었습니다. 사실 냉전의 최전방에 던져진 대한민국으로서는 군대의 증강이 시급한 문제였지만 여러가지 제반여건들은 발목을 잡는 요인이었습니다.

2010년 6월 27일 일요일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서울탈출

6월 27일은 이승만이 서울에서 탈출한 날 입니다. 수도가 함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함께 죽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승만은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군대를 내팽겨치고 혼자 도망쳤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는 정치적인 약점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승만이 비밀리에 수도 서울을 탈출한 데 대한 변호는 1983년에 중앙일보를 통해 공개된, 그의 아내였던 프란체스카 도너 리가 기록한 비망록에 나타납니다.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에서는 이승만은 수도를 사수하려 했으나 신성모 등의 간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이 글에서는 얼마전 단행본으로 나온 판본을 인용하겠습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 막 잠자리에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어 서울시장 이기붕씨와 조병옥씨가 들어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안장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이야, 아니면 치프 조야, 장이야. 아니면 만송(晩松, 이기붕씨의 아호)이야. 나는 안 떠나." 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신 장관을 캡틴 신(그는 한 때 선장을 했다),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 씨는 경찰국장을 지냈다고 해서 치프(chief) 조라고 불렀다. 나는 재차 "모두 같은 의견입니다. 저는 대통령 뜻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때 경찰간부(이름은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들어와 적의 탱크가 청량리까지 들이닥쳤다고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적의 탱크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고, 그것은 대통령의 남하를 독촉하려는 꾀였었다.

나도 "수원은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라고 넌지시 거들었다. 신 장관은 때를 놓치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새벽 3시 30분.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됐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조혜자 옮김, 『6ㆍ25와 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 2010), 24~26쪽

프란체스카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27일 까지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신성모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간곡한 설득 끝에 서울에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중앙일보에 프란체스카의 비망록이 공개되기 이전에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주한미국대사 무초의 전문에 따르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10시에 제게 전화를 걸어 자신과 면담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대사관에 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저와 동행했습니다. 제가 대통령관저에 도착했을 때 이범석 전국무총리는 이미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큰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실룩거리면서 중간에 끊어져 뜻이 통하지 않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의정부의 상황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따르면 수많은 전차가 서울을 향해 쇄도하고 있으며 한국군의 능력으로는 저항할 수 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무총리서리에게 한국어나 영어로 말을 걸었으며 가끔씩 이범석에게도 한국어로 말을 걸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내각에서 오늘 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길것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안전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정부를 반드시 보전해야 하며 만약 대통령 자신이 공산당에게 잡힐 경우 대한민국의 체제에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뜬금없이 국무총리서리에게 군사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을 여러명" 모아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필요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대통령은 만약 신성모가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인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없이 그 사람을 위해 국방부장관직을 사임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대통령은 한국측은 미국이 큰 원조를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1천만 달러 정도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갑부인 박흥식(화신 그룹의 소유주인)이 무기 구매를 위해 백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국무총리서리는 거듭해서 이대통령이 지시하면 상선단에서 얻은 경험에 따라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네 각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를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모도 이대통령의 결정과 명령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신성모는 결국에는 실례하겠다고 한 뒤 의정부 지구의 전투에 대한 최신 소식을 전화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에게 무기와 병력이 있다는 점과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바주카포와 대전차포, 그리고 대전차지뢰를 사용해 싸워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서울을 지키도록 설득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성모는 57mm 대전차포가 북한군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지 못했다고 말했고 저는 대전차지뢰의 사용을 강조했습니다.(신성모의 주장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한국의 도로와 교량은 중전차(extremely heavy tanks)가 다닐 수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만약 정부가 서울을 포기한다면 전투에 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한국의 상황이 계속 악화된다면 이것을 다시 호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대통령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는 거듭해서 자신은 개인적인 안위에는 관심이 없으며 정부가 사로잡히는 위험을 감수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대통령의 생각을 바꿀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자 자리를 뜨기로 했고 이대통령에게는 대전으로 피신하라고 한 뒤 저는 서울에 남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은 다음날 밝는대로 일찍 철수시킬 것이며 철수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 상공에 공중 엄호가 있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이대통령은 여성과 어린이들은 피신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사절단의 남성들은 잔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회의를 끝내고 나오려 하자 이범석은 어설픈 영어로 그가 생각하기에 북한의 원래 전략은 서울 방면으로 기만 공격을 건 뒤 동해안에 게릴라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이었으나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 지구에 전력을 더 투입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범석은 한국군이 서울 방면으로의 공격에 대항해 완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회의실을 떠나자 이범석은 대통령과 나눌 말이 더 있다고 하면서 남았습니다.

대통령관저를 나서자 신성모는 저에게 다가와 이대통령은 그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옮기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The Ambassador in Korea(Muccio) to the Secretary of State(1950. 6. 2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VII Korea(U.S.GPO, 1976), pp.141~143

바로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인 무초의 주장에 따르면 이승만은 이미 전쟁 당일 서울을 포기하고 피신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다른 측근들의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프란체스카의 회고에서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유했다고 하는 신성모는 오히려 이승만으로 부터 어떠한 통고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이승만이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한 번 이야기 해도 될 것을 왜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읽는 분들이 판단하실 문제지요.

무초는 1971년의 인터뷰에서도 이승만이 이미 25일 저녁에 피난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 세부적인 사항은 이 문서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은 골격은 대동소이합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 두개의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바로 사건 당시의 기록인 반면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 부터 시간이 지난뒤에 씌여진 기록입니다. 게다가 이승만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씌여진 기록이지요. 어떤 것이 더 믿을만 한지는 읽은 분들이 판단하시면 되겠습니다.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미국쪽 기록

슈타인호프님이 이건순 중위의 월남에 대한 글을 하나 써 주셔서 저도 관련된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1950년 4월 28일 이건순 중위의 월남 사건은 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순 중위는 월남한 뒤 북한의 남침 의도와 북한 공군의 현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남침에 대한 경고가 많았지만 바로 남침 직전에 북한군의 장교가 월남해서 남침에 대한 정보를 알린 것은 파급력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에 대한 미국쪽 반응은 살짝 심드렁 했던 것 같습니다. 주한미국대사대리 드럼라이트(Drumright)가 국무부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말입니다.

1950년 5월 11일 오후 6시 서울.

대사관전문 683호. 대사관전문 675호 참조. 5월 11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북한의 군사력1)에 대한 주한 미 대사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한미대사관은 현재 북한의 군사력 수준에 대해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발표한 통계와 다르게 판단하고 있으며 그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의 총 병력은 103,000명으로 여기에는 "인민군", 만주에서 귀환한 조선인 의용군 부대, 국경경비대, 공군 항공사단, 기갑부대와 해군이 포함됩니다. 여기에 대해 지방의 경찰력이 약 25,000명으로 판단됩니다. 북한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은 한개의 여단규모 부대로 총 65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가장 강력한 것은 소련제 T-34입니다. 북한군의 포병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습니다. 76.2mm 보병포와 유탄포 224문, 122mm 유탄포 72문, 82mm 박격포 637문, 120mm 박격포 120mm문, 45mm 대전차포 356문, 경기관 총 및 중기관총 6,032정.

4월 28일 이건순 중위가 귀순하기 직전까지 북한 공군의 전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Yak 전투기 35대, 쌍발 폭격기 3대, 쌍발수송기 2대, 훈련기 35대.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F-3 등급2)으로 이 정보에 따르면 북한공군은 훈련용 전투기를 포함해 Yak 전투기 100대, IL-10 공격기 70대, PO-2 정찰기 8대, 미제 연락기 2대 입니다.

만약 본 대사관의 추정치가 정확하다면 한국측이 주장한 추정치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측이 정보를 과장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우방국, 특히 미국으로 하여금 남북간의 군사력 격차를 납득하도록 만들어 군사원조를 더 받아내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 있었던 면담을 포함해 최근 면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추가적인 군사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의 성명은 한국 언론인들을 외국 언론인들과의 회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고 외국 언론인들에게만 별도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보다 상세한 보고서를 제공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북한 군사력에 대한 일부 추정치가 한국의 일반 대중들의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게는 자세한 보고서가 제공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드럼라이트.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Vol. VII. Korea(Washington, USGPO, 1976), pp.84~85

이건순 중위는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 셈인데 문제는 미국측에서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전쟁이 임박한 시점이라 한국군의 증강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어쩔 방법이 없지만 말입니다.




1) 위에서 인용한 같은 책의 pp.83~84에 따르면 신성모가 발표한 북한 군사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방부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 병력 183,000명, 준군사조직을 합하면 30만명. 인민군 정규사단 6개 및 보안대 3개 여단 118,000명, 여군을 포함한 보조 인력을 포함할 경우 여기에 37,000명이 더 추가됨. 1개 전차 여단 1만명, 해군 15,000명, 공군 2,500명.

기계화 부대는 경전차 18대와 중형전차 155대 등 총 173대의 전차와 장갑차 30대, 오토바이 300대로 편성.

북한군의 포병전력은 76mm포와 122mm포를 합쳐 총 609문, 82mm 박격포와 120mm 박격포를 합쳐 총 1,162문, 대공포 54문, 대전차포 627문, 경기관총 및 중기관총 9,728정.

해군은 총 32척의 함정 보유.

공군은 총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1개 항공사단으로 편성.

2) 위에서 인용한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 등급이 F-3 이란 것은 이건순 중위가 정보제공자로서의 신뢰도가 F, 아직 판단할 수 없으며 이건순 중위가 제공한 정보는 정보로서의 신뢰도가 3,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1995년에 출간한 『미군정기정보자료집 1-3 : CIC(방첩대) 보고서(1945.9~1949.1)』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원 및 정보 등급 분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공원(Source)
A. 완전히 믿을 만함(completely reliable)
B. 통상 믿을 만함(usually reliable)
C. 꽤 믿을 만함(fairly reliable)
D. 통상 믿을 만하지 않음(not usually reliable)
E. 믿을 수 없음(improbable)
F. 판단할 수 없음(cannot be judged)

정보(Information)
1. 다른 원천에서 확인(confirmed by other source)
2. 아마 사실이다(probably true)
3. 사실일 수 있다(possibly true)
4. 사실인지 의심된다(doubtfully true)
5. 사실같지 않다(improbable)
6. 판단할 수 없다(cannot be judged)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미군사고문단의 평가

원래는 어제 올렸던 한국전쟁 이전 국군의 사단편제에 대한 글을 좀 더 보강해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재미있는 자료가 조금 더 굴러 들어와서 이 글은 다음 번에 더 보강해서 쓰려고 합니다. 그 대신 땜빵 포스팅으로 김석원 이야기나 조금 해 볼까 합니다.

예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사고문단장이 평가한 한국군장성들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보통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군사적 능력을 중국군 출신 장교들에 비해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예외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사단장을 지낸 김석원 준장이었습니다.

로버츠 준장은 1950년 3월 18일 신성모에게 보낸 서한에서 김석원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한데다 공직을 남용하고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를 자행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s you will remember, I expressed myself unequivocally on the subject of this ex-officer last July and August when his peculations, dishonesty, corruption, misuse of public office and total disregard of the ethics and moral standards required of an officer were brought to light. In addition to the deficiencies I have just cited, it was my considered opinion at the time, as a professional soldier, that his knowledge of military science and tactics was extremely limited. He had failed to grasp the basic principles of the organization of his sector for defense and exhibited a fundamental ignorance of tactical principles which I would not tolerate even in a very junior officer. I feel that his deficiencies as a tactician would, if he were placed once more in a responsible position, seriously jeopardize the security pf the Republic.

March 25, 1950,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굉장한 혹평입니다. 특히 전술적 능력이 초급장교 보다 못하다고 하는 부분은 왜 저렇게 심각한 비난을 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혹평은 김석원을 옹호하는 측에서 주장하듯 김석원과 군사고문단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주된 원인일까요?

김석원은 1949년의 38선 충돌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개성 방면의 1사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전에 그의 전술적 능력을 평가할 만한 기회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1949년 여름에 미군사고문단이 1사단의 방어구역을 시찰하고 김석원의 부대 운용에 대해 분석한 내용입니다.

이번 조사의 결과 현재 1사단 구역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과 방어상의 위험한 취약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a. 경계 순찰이 전무한 상태이다.

b. 현재 38선상에서 돌파되어 침범당한 지역에 전초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

c. 사단 정면에 주저항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단 주력이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에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

d. 11연대가 부적절하게 투입, 배치되어 있다. 이 부대는 연대지휘소와 대대가 개성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 위치에서는 개성 회랑 동쪽으로 부터의 공격에 후방이 차단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이 연대는 개성-문산 도로의 약간 남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개성-문산 도로를 따라 종심 깊게 배치되는 대신 연대 전체가 북쪽을 향하고 있어 배치가 잘못 되어있다. 만약 임진리의 교량이 적의 신속한 진격에 탈취될 경우 1개 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포병은 고립될 것이다. 제대로 된 군대가 적용하는 올바른 부대 배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 진다. 각 대대와 중대는 소수의 병력만 전방에 배치하고 예비대를 확보한다.; 최소한 1개 연대에는 1개 대대가, 1개 사단에는 1개 연대가 예비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1사단은 사단 예비는 물론 연대 예비대도 전무한 상태이다. 사단장은 예비대 없이는 보다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e. 나머지 2개 연대 -12연대와 13연대- 도 마찬가지로 종심이 깊지 못하고 예비대가 전무한 상태로 전술적으로 불안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This investigation revealed the following deficiencies and dangerous defensive weakness in the present zone of the 1st Division.

a. Total absence of security patrolling

b. No established outpost line of resistance to present penetration and violation of the 38th degree North Parallel.

c. Absence of a main line of resistance on the Division front, thus exposing the Division’s main element to an attack and possible demoralization by North Korean Forces.

d. Improper placement and disposition of the 11th Regiment. This unit, with the Command Post and battalion located at KAESONG is, in its present position, highly vulnerable to being cut off and destroyed by a force attacking east through the KAESONG corridor. This regiment is incorrectly disposed, inasmuch as it is slightly south of KAESONG-MUNSAN road and the entire regiment is facing directly north rather than being astride the above-mentioned road and disposed in depth. If the bridges over the Im-Jin-ni River are taken by a quick thrust of the enemy, over one regiment and artillery will be cut off. Correct dispositions, as applied by all real armies, are as follows : each Battalion and Company Keeps few troops in front and each has a Reserves; at least 1 Battalion of a Regiment must be in reserve; at least 1 Regiment of a Division must be in reserve. As it is, there are no Regimental reserves nor Division reserves. Not having these, the Division Commander is unable to accomplish much decisively.

e. The two remaining Regiments – the 12th and 13th – are similarly placed in tactically-unsound position in that they are not disposed in depth and no reserves have been established.

August 1, 1949, ‘Tactical Disposition of the 1st Division, Korean Army’; RG 338, KMAG, Box 8, Brig General W. L. Roberts(Personaal Correspondence, Memorandum) 1949

일단 위의 보고서에서 지적된 것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김석원이 ‘예비대’라는 것을 전혀 확보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비대를 확보하는 것은 부대 지휘관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인데 김석원은 사단장이 되어 제대로 된 예비대 없이 사단 전 병력을 전방에 배치해 놓은 것 입니다. 초급장교 만도 못하다는 혹평이 단순한 비난이 아닌 것이죠. 전면전도 아닌 상황에 사단의 전 병력이 전방에 배치되어 방어 종심도 얕아 제대로 된 공격을 받으면 한방에 붕괴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예비대도 없으니 만약 이 상태로 전면전이 발발했다면 개성-문산 지구는 순식간에 붕괴됐을 것 입니다.

김석원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승렬과 백선엽은 이런 비상식적인 부대운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개전 당시 1사단은 11연대를 예비대로 확보해 놓았고 기습 공격과 전력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선전합니다. 김석원이 하던 대로 1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면 서부전선이 일거에 붕괴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6년 11월 5일 일요일

김석원 준장 재임용 소문에 대한 미국 군사고문단의 반응

김석원이라는 군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많은데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걸로 봐선 당시에도 썩 좋은 평을 받지는 못 한 것 같다.

다음 문서는 미 대사관 문서군인 RG59에 들어있는 내용으로 미 군사고문단장이 신성모 장관에게 보낸 편지다. 꽤 유명한 문서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저작들에 자주 언급되는 것 같다. 아마도 김석원에 대한 가장 신랄한 평가가 아닐까 싶다.

1950년 3월 18일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각하

본관은 최근 김석원 전 육군 준장이 복직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우 그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라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각하(신성모) 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저는 지난해 7월과 8월 김석원이 공금횡령과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며 부패하고 공직을 남용하는데다 장교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적 기준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음이 적발된 데 관한 저의 견해를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이미 지적한 문제점 외에도 제가 직업군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면 김석원의 군사 과학과 전술에 대한 지식은 매우 형편없습니다. 김석원은 그가 맡은 방어책임구역의 방어 준비를 하는데 기본적인 원칙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며 설사 말단 초급장교라 하더라도 용납 못할 정도로 전술원칙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지합니다. 저는 김석원이 전술가로서의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더 책임 있는 직위를 맡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안보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김석원은 도덕적으로도 해이한 인물이기 때문에 행정이나 재정을 책임지는 직위에는 결코 임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석원의 무능함에 대해서 더 지적하자면 우리 미국측의 관점에서 봤을때 김석원 장군은 고문단을 활용할 줄도 모르고 그럴 의사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인 고문관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한번도 솔직하게 의논한 적이 없고 고문관의 조언을 무시했습니다. 김석원은 한국 육군본부의 명령을 종종 무시했습니다. 제가 그의 직속상관이었을 때도 김석원은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저는 몇 차례나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려 했습니다.

김석원을 채병덕 소장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각하께서 이 문제를 직접 다루셨으면 합니다. 각하께서 김석원 문제를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김석원은 참모총창과 국방부를 무시하고 직접 이 대통령에게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김석원이 재임용 된다면 그의 입지가 더 커져 각하마저도 그에게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김석원은 일본 장교집단이 가진 가장 추악한 특성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갖춘 직업군인적인 미덕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데 김석원이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될 경우 한국군과 미국 군사고문단이 계속해서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심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석원이 고위직에 임명된다면 한국에서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석원이 참모총장에 임명된다면 저는 본국에 저의 소환을 요청할 것이고 또 제 후임을 추천하는 것도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각하께서 김석원을 복직시키실 경우 저의 반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각하를 직접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각하께 저의 존경을 표하는 바입니다.

미육군 준장 W. L. 로버츠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신성모 각하께 
‘Activities of Brig Gen. Kim Suk Won’(1950. 3. 25), Enclosure 1; RG 59, Records of State Department


당시 한국군 장성 중 김석원 이상으로 미국측이 혐오한 사람은 또 누가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