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이종찬 중장이 쿠데타 또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에 협력하려 했던 것은 생각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신창현(申昌鉉)의 기록에 따르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직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3)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조금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전략)
이날 저녁 무렵 서상렬(徐相烈)이 문병차 내방하였다. 서상렬은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 북지(北支) 전선에서 전투에 가담하여 중국군을 토벌하다가 일본 진중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의 경호대장을 지낸 사람이다. 경호대는 내무부에 예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해공에게 가깝게 수종하던 터수였다.
이날 이 사람이 와서 뵙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박사의 폭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 뒤 분을 참을 수 없다면서 “대구에 있는 육군 참모총장과는 지기(志氣)가 상통(相通)하는 처지이니 군을 동원해서 이 폭정을 응징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해공께서 “그거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우리가 공산당과 싸우느라 병력을 자꾸 증강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하지만 전체 국민에 대한 수치 비례로 보아 너무나 방대하여 앞으로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될지 모르겠으나 이 군부를 다루는 일이 아주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오.
아직은 이박사의 과거 독립운동 역사로나 국제적 성망 등 카리스마적 위력으로 지탱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 그분이 국헌을 뒤엎고 주권을 짓밟는다고 하여 군대의 힘을 빌어 확청(廓淸)하였다고 칩시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있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 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 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 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라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준조 절충(樽俎折衝)하고 토론ㆍ협상해 가며 차츰차츰 시정하고 광정(匡正)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라오. 나라와 민족의 일에 감정은 절대 금물이지. 우리가 길의 중요한 요지를 목이라고 하는데, 정치는 긴 목 잡고 한다는 것이라오. 감정도 금물이려니와 조급하게 굴어서도 안 되지요. 여기에 정치력이 아닌 무력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위험 천만한 일이야. 양호유환(養虎遺患) 되고 말아요.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후략)
신익희의 통찰력은 주목할 만 합니다. 물론 이종찬 중장은 신태영 국방부장관이 계엄군을 증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차출하라고 했을 때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거절한 바 있고 권력에는 뜻을 두지 않은 태도로 존경받는 군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마무리가 잘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군부가 쿠데타를 생각할 정도로 강력해진 시점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주된 원인은 신익희가 높이 평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군부통제와 통치능력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민군관계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군부내 파벌을 이용한 이승만의 군부통제가 효율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요.4)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을 구상하다가 대안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이승만은 개인의 정치력으로 강력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통제자가 사라지자 군부를 견제할 존재는 국내정치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지요. 5ㆍ16 쿠데타를 이야기 할 때 부산정치파동을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신익희가 예상했던 것 처럼 5ㆍ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당에 실망한 상당수의 국민들은 군부가 ‘구악’을 일소하고 혁신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그대로 권좌에 눌러앉아 이후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세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장기집권을 하게되지요. 1961년은 군대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그나마 군부와 균형을 맞출만한 집단은 ‘썩어빠진’ 기성 정치집단인 민주당 정도였고 기성 정치권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군부는 견제세력 없이 독주하게 됩니다. 공짜란 존재하지 않았고 군부를 통해 손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던 세력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게 됩니다.
주
1) ‘Oral History Interview with E. Allan Lightner, Jr.’(1973. 10. 26), Truman Library, p.114
2)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Young)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Allison)’(1952. 6. 13),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 1, (USGPO, 1984), p.333
3) 申昌鉉, 『내가 모신 海公 申翼熙 先生』,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9) , 505~506쪽
4) 도진순ㆍ노영기,「군부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67~68쪽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이 누구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었군요.
답글삭제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삭제놀랍네요. 한강 백사장에서의 연설도 그렇고, 신익희는 진짜 정치가라는 생각. -0-b;;;;
답글삭제정말 재미있는 양반임.
삭제양호유환.....멋진 말이로군요....
답글삭제진짜 대단하신 통찰력이네요
대단한 통찰력이지요. 장준하 같은 지식인들도 5ㆍ16이후 한동안 군부 통치의 본질을 꿰뚫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삭제하지만 박통은 리박사를 제거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고, 4.19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쿠데타가 1960년 상반기에 결행되었을 것이라 했는데, 그걸 보면 리박사의 군부 통치술이란 것도 그 무렵에는 바닥이 보였던 거 아닐까요.
답글삭제별 의미없는 IF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이승만이 대통령인 상태로 있었다면 설령 쿠데타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장면 처럼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삭제정말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천재는 시대를 초월하는군요. 해공 선생님 짱! 그나저나 육식주의자 모임은 잘 하셨습니까?
답글삭제아주 잘 끝났습니다.
삭제오오 이것은 양웬리와 센코프의 대화 아닙니콰! 양웬리가 했을법한 대사를 신익희가 먼저했다니, 재미있네요.
답글삭제예. 참 대단한 통찰력이지요. 신익희가 사망했을 때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해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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