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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이승만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신익희의 통찰

부산정치파동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민군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군부 일각에서 이승만의 헌정유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기도한 것 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鐘贊) 중장은 미국에 쿠데타 가능성을 타진한 바 있습니다. 라이트너(E. Allan Lightner, Jr.) 미국 대리대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종찬 중장은 약간의 육군과 해병대 병력을 동원하면 이승만 대통령과 이범석 내무부장관, 원용덕 계엄사령관을 쉽게 체포하여 상황을 정상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권력에 관심이 없으며 새 대통령을 선출하면 일주일 내에 군대를 복귀시킬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종찬 중장은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휘계통에 있는 만큼 미국의 지지만 있다면 쿠데타를 결행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1) 이종찬 중장은 정치 정상화를 미국이 지원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종찬 장군은 미국이 국회정상화를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제2병참사령부 예하의 병력을 동원해 이를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2)

이렇게 이종찬 중장이 쿠데타 또는 미국의 이승만 제거에 협력하려 했던 것은 생각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신창현(申昌鉉)의 기록에 따르면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직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3)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조금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전략)

이날 저녁 무렵 서상렬(徐相烈)이 문병차 내방하였다. 서상렬은 일본 유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 북지(北支) 전선에서 전투에 가담하여 중국군을 토벌하다가 일본 진중을 탈출하여 중경 임시정부의 경호대장을 지낸 사람이다. 경호대는 내무부에 예속되어 있었던 관계로 해공에게 가깝게 수종하던 터수였다.
이날 이 사람이 와서 뵙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박사의 폭거를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그런 뒤 분을 참을 수 없다면서 “대구에 있는 육군 참모총장과는 지기(志氣)가 상통(相通)하는 처지이니 군을 동원해서 이 폭정을 응징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해공께서 “그거 아주 위험한 발상이야. 우리가 공산당과 싸우느라 병력을 자꾸 증강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하지만 전체 국민에 대한 수치 비례로 보아 너무나 방대하여 앞으로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될지 모르겠으나 이 군부를 다루는 일이 아주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오.
아직은 이박사의 과거 독립운동 역사로나 국제적 성망 등 카리스마적 위력으로 지탱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 그분이 국헌을 뒤엎고 주권을 짓밟는다고 하여 군대의 힘을 빌어 확청(廓淸)하였다고 칩시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있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 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 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 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라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준조 절충(樽俎折衝)하고 토론ㆍ협상해 가며 차츰차츰 시정하고 광정(匡正)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라오. 나라와 민족의 일에 감정은 절대 금물이지. 우리가 길의 중요한 요지를 목이라고 하는데, 정치는 긴 목 잡고 한다는 것이라오. 감정도 금물이려니와 조급하게 굴어서도 안 되지요. 여기에 정치력이 아닌 무력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은 위험 천만한 일이야. 양호유환(養虎遺患) 되고 말아요.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후략)

신익희의 통찰력은 주목할 만 합니다. 물론 이종찬 중장은 신태영 국방부장관이 계엄군을 증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차출하라고 했을 때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거절한 바 있고 권력에는 뜻을 두지 않은 태도로 존경받는 군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마무리가 잘 되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요. 군부가 쿠데타를 생각할 정도로 강력해진 시점에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주된 원인은 신익희가 높이 평가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군부통제와 통치능력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민군관계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군부내 파벌을 이용한 이승만의 군부통제가 효율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지요.4)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을 구상하다가 대안을 찾을 수 없어 포기한 사실에서 잘 드러나듯 이승만은 개인의 정치력으로 강력한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이라는 강력한 통제자가 사라지자 군부를 견제할 존재는 국내정치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지요. 5ㆍ16 쿠데타를 이야기 할 때 부산정치파동을 다루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입니다.

신익희가 예상했던 것 처럼 5ㆍ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당에 실망한 상당수의 국민들은 군부가 ‘구악’을 일소하고 혁신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그대로 권좌에 눌러앉아 이후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세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장기집권을 하게되지요. 1961년은 군대가 양적으로 팽창한 상태에서 그나마 군부와 균형을 맞출만한 집단은 ‘썩어빠진’ 기성 정치집단인 민주당 정도였고 기성 정치권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군부는 견제세력 없이 독주하게 됩니다. 공짜란 존재하지 않았고 군부를 통해 손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던 세력은 제대로 한 방 얻어맞게 됩니다.



1) ‘Oral History Interview with E. Allan Lightner, Jr.’(1973. 10. 26), Truman Library, p.114
2)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Young)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Allison)’(1952. 6. 13),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2~1954 Vol. XV Korea, Part 1, (USGPO, 1984), p.333
3) 申昌鉉, 『내가 모신 海公 申翼熙 先生』,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9) , 505~506쪽
4) 도진순ㆍ노영기,「군부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67~68쪽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대통령 리박사 화법....

이박사 화법에 대한 Sonnet님 글에서 트랙백
(전략)

동시에 우리 우방들은 이 반대분자들의 선전을 기왕에도 많이 들었을 것이요 지금에도 또 연속 부언낭설로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비치어 보아서 한국대통령이 독재정권을 갖기 위해서 국회를 병력으로 압박한다, 국회의원을 이유없이 가둔 것을 석방해야 된다, 헌법을 무시하고 국회를 위협한다는 등 말의 공문으로 공화정체를 말살시킨다는 요구가 각처에서 연속내도하였으나 이것이 다 사실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에 대해서 별로 고려할 점이 없었으며 오직 공산당의 음모만을 우리가 심상히 여길 수 없는 것 이므로 아직까지 침묵하고 재판으로 판결되기 만을 기다려 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음모사건의 조사가 거의 다 마치게 되었으나 오직 정범인 두 사람을 아직 잡지 못하고 있는 까닭으로 재판이 며칠 지체되어 오는 것이니 이 사람들을 쾌히 잡을 수 없는 경우에는 지금 조사된 공범만을 가지고 재판을 시작할 것이니 얼마 안에 이 일의 사실유무가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후략)

정치음모사건에 관하여, 1952년 6월 15일 담화문,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1권, 공보처, 1953년

(전략)

그런데 어찌해서 사욕을 도모하는 정치객들이 국가안위와 민족의 화복을 생각지 못하고 어떤 분자는 정당명색을 띄고 공산에 내응이 되어 타국의 재정을 얻어다가 정치상 음모로 자기들이 정권을 잡게 되면 이북 괴뢰군과 합동해서 통일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진행하다가 발각이 되어 재판을 당하여 모든 죄상이 들어 났으나 이 음모를 행하든 정범이 외국으로 다라나서 잡지 못하게 됨에 아직도 결말을 못 내고 있는 중이며 근일에 와서는 또 어떤 사람은 정당의 지도자란 명의를 가지고 외국 신문상에 선전하기를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리대통령의 배일 정책을 고쳐서 일본과 협의로 친선을 이루겠다고 하는 이런 망설을 발하고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참 놀라운 일이다.

(후략)

친일 친공한다는 것은 망언이다, 1956년 4월 12일 담화문,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3권, 공보처 1959년

위의 담화는 1952년 소위 국제간첩단 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을 잡아 넣고 나서 한 것이고 아래의 담화는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것입니다. 음모는 밝혀 졌지만 정작 그 음모의 실체는 없다는 매우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거야 말로 이박사 화법의 핵심이 아닐까 싶군요. 아무나 따라하다간 왕따 등의 부작용이 있으니 함부로 따라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