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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4일 화요일

한국군의 소총에 대한 잡담

슈타인호프님이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 국군과 경찰의 총기 문제에 대해서 재미있는 글을 한 편 써 주셨는데 사족을 조금 달아보려 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 시피 1948년 초 NSC8이 작성될 당시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원조를 5만명 수준으로 제한했습니다. 즉 소화기는 5만명 분을 원조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1948년 말부터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병력을 증강하면서 애초 미국이 상정한 병력 상한선을 돌파해 버리자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병력규모를 놓고 협상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1949년 2월 미육군부 장관 로얄(Kenneth Claiborne Royall)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 중장을 대동하고 이승만과 회견합니다. 이 회견이 있은 뒤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규모를 육군 6만5천명으로 상향조정합니다. 이 내용은 1949년 3월 16일의 NSC8/1에 반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NSC8/1에 반영된 군사원조가 당장 이행될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추가된 1만5천명분의 소화기는 1950년도 회계연도 군사원조가 결정된 이후에야 이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서 한국군은 5만명 분의 미제 소화기만을 장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육군을 7만5천명 수준으로 증강을 해 버렸기 때문에 일선 부대의 소화기 부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참고로 1949년 6월경 국군 제7연대와 제10연대의 장비현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에 잘 나타나듯 두 연대는 미제 소화기의 부족으로 편제를 초과하는 일본제 99식 소총을 갖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기가 편제에서 크게 미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보병연대는 미제 소총이 300여정 부족하며 제 10연대는 미국제 소총이 인가량에서 1200정 가량 미달하고 있습니다. 두 연대 모두 부족분을 일본제 소총으로 보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연대의 경우 소총이 없는 병력이 200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공용화기도 편제에서 미달하고 있으며 특히 기관총과 바주카포의 부족이 두드러지지요. 이 두 연대는 비교적 초기에 창설된 연대이지만 신규 창설 부대를 위해 장비를 차출해야 했기 때문에 1949년 6월 시점에서는 공용화기는 물론 기본적인 소총 마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국군병력은 1949년 8월 시점에는 10만명에 육박해 버리지요.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6월 이후 이승만과 미국 대사관, 군사고문단간의 협상은 나머지 5만명분의 미제 소총과 덤으로 중장비를 원조받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미국 정부는 NSC8/1과 수정안 8/2에 의거해 1만5천명분의 장비만 더 줄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렇지만 NATO의 창설과 같은해 통과된 상호방위원조법안(Mutual Defense Assistance Act) 때문에 미국의 지원능력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상호방위원조법안에 명시된 원조 우선순위 13위(15개 국 중에서)였기 때문에 충분한 원조 예산이 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 배당된 원조액을 맞추기 위해서 1만5천정의 M-1 소총 대신 퇴출된 장비인 M-1903 스프링필드 소총을 대신 원조한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1950년 5월 26일 미육군 군수국은 상태가 양호한 3만정의 M-1903 재고를 확보했으며 NSC8/2에 의거해 이 중 2만정을 수리해서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수리비용을 포함해 책정된 비용은 1정당 20달러로 총 30만 달러였습니다. 한국으로 보낼 2만정의 M-1903 소총이 정비창으로 보내진 것은 1950년 6월 19일 이었는데 2만정 모두를 사용 가능 상태로 수리하는데 90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에 수령님이 땅크를 몰고 쳐들어 왔기 때문에 한국군이 스프링필드 소총을 만져볼 기회는 없어졌습니다.

2008년 5월 17일 토요일

상상속의 베트남인

지난 3월에 sonnet 대인께서 베트남전이 전하는 이라크의 교훈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써 주셨습니다. 좀 뒷북이긴 한데 저는 특히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불행하고 그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은 진짜 이라크가 아니었다. … 잘못된 이라크 속에 뛰어든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미국인들은 진짜 이라크인들은 우리 꿈 속의 이라크인들처럼 행동해야 하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우겨댔다. 그 결과는 좌절과 낙담, 그리고 이라크인들의 '광기'에 대한 분노였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태도는 지난 60년간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대응력 : 바오 다이(Bao Dai)의 지지세력들 중 상당수는 어떠한 형태의 제국주의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정부는 공산주의에 저항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 및 경제원조를 환영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 국민의 대부분은 현재 외부의 위협(중국)에 대항하는 것 보다는 프랑스의 간섭을 제거하는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 국민 대부분이 공산주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만족할 만한 정치적 해결이 이루어 진다면 베트남인 대부분은 중국을 혐오하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압박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1950년 3월 8일, 미국무부 Office of Intelligence Research Report No.5178-2

결과는 다들 잘 아시죠?

2007년 2월 8일 목요일

전형적인 약소국 외교

895A.00R/1-2050

동북아시아국의 존 Z 윌리엄스의 면담록.

대외비, 1950년 1월 20일 [워싱턴]

참석자 : 주미한국대사 장면(John M. Chang), 극동담당차관보 W. 월튼 버터워스(W. Walton Butterworth), 존 Z 윌리엄스

국무부 장관이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알렸기 때문에 장 대사는 대신 오후 5시 30분에 버터워스 차관보와 만났다.

장면 대사는 먼저 어제 경제협력처의 대한 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곧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을 낼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행정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현재 고려중인 방안이 의회로부터 하나 혹은 다른 형태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지역에 대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예산으로 책정된 7500만 달러 중 한국 원조에 전용할 수 있는 예산은 어제도 밝혔듯 하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 한 1달러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장면 대사는 국무부 장관이 최근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극동지역의 이익선(line of U.S. interest in the Far East)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자신에게 질문해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이 미국의 이익선 바깥으로 분류된데다 어제 하원이 한국에 대한 원조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국 정부는 한국을 존중해서 UN의 다른 회원국들과의 협조하에 한국의 정통성(cause)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위치는 어떤 선을 설정하던 간에 그 것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어제 하원의 행동에 대해 한 발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업무문제 때문에 최근 장면대사가 한국의 재정문제에 대해 보낸 서신을 검토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정부에 최근 버터워스 차관보가 한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표명한내용을 한국 정부에 보냈으며 한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에게 의회는 결국에는 1950년 회계연도 한국에 대한 ECA 원조 금액 중 나머지를 승인할 것이지만 1951년 회계연도의 원조 프로그램은 매우 상세하게 검토될 것이며 이 때문에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면 대사는 기자들이 문 밖에서 자신의 발언을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국무부가 하원의 행동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발언은 국무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예기치 못한 부담을 줄 수 있으며 하는 일 마다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응은, 특히 언론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미국측이 한국을 걱정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장면 대사는 자리를 뜨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무부와 백악관이 한국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각료들에게 확신시키고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기 위해 국무부장관을 면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부장관의 일정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다음주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국무부장관 면담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확답했다. 장면박사는 국무부장관과의 면담은 5분 이상 끌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면대사는 버터워스 차관보가 떠난뒤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지고 버터워스 차관보와 대화한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도중 국무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going to do something)”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면대사는 기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질문하지 않도록 그 사본은 주미한국대사관과 프레스클럽에 있다고 말을 돌렸다.

FRUS 1950 Vol. VII Korea, pp11-14, USGPO 1976

뭐, 지금도 어떤 경우 구걸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건 별반 차이는 없을 듯 싶습니다만.... 요즘은 미국이나 중국같은 강대국 뿐 아니라 북한같은 동네에도 구걸을 한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