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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1일 수요일

신천학살에 대한 약간의 이야기

신천학살은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수 많은 학살 중 한 단위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는 ‘최대규모’인 학살입니다.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북한의 공식 주장에 따를 경우 신천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35,383명으로 북한 전역에서 가장 많은 것 입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신천 외에도 황해도의 안악, 은율은 각각 1만명을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전체적으로 황해도지역의 민간인 희생은 북한이 주장하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38선 이북지역의 민간인 희생자의 65% 이상에 달합니다. 현재로서는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에 대한 북한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가 극히 어렵지만 어쨌든 불과 3개월 사이에 황해도 지역, 특히 신천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입니다.

하여튼 신천학살은 그 규모 덕분에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정치적 이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 외무상이던 박헌영은 1951년 4월 15일에 유엔에 보낸 서한에서 유엔군의 점령기간 중 38선 이북지역에서 미군과 ‘리승만 군대’에 의한 대량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당시 박헌영의 주장에 따르면 신천에서 25,000명, 황해도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국제적 문제가 되자 진보적 국제단체들은 미국의 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을 북한으로 파견합니다. 첫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파견한 조사단 이었고 두 번째 조사단은 국제민주법률가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의 조사단이었습니다. 이 두 단체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기초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했고 당연히 미국과 남한정부는 그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국제조사단인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조사에서는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비롯해 ‘영국군’과 ‘한국군’이 거론되고 있는데 두 번째 조사단인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조사단의 발표에서는 ‘미군’의 학살만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초기의 발표에서 뒤의 발표로 가면서 학살의 책임이 ‘미군’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남한에서는 월남인들을 중심으로 ‘북괴의 선전’에 대항하기 위한 의도로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반공항쟁’의 관점에서 서술한 저작들이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저작이 1955년에 출간된 박계주의 『한국전쟁 이면 비사 –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과 1957년에 출간된 조동환의 『항공(抗共)의 불꽃』이 있습니다. 특히 후자는 500쪽을 넘는 분량에 봉기 참여자들의 증언을 대량으로 수록해 ‘북괴의 모략’을 분쇄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정부에서도 북한의 선전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조동환의 책에는 앞머리에 당시 부통령이던 장면(張勉)의 義氣衝天 이라는 휘호가 실렸으며 이 밖에도 국방부장관 김용우(金用雨), 검찰총장 정순석(鄭順錫)이 발간사를 적었습니다. 이런 월남민들의 저작들은 학살의 책임을 북한에 전가하고 있지만 우익에 의해서도 약간의 보복학살이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70년대 이후의 반공서적들 보다 다소 객관적인 면이 엿보이는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동환에 따르면 좌익에 의한 학살은 천여명 정도 수준으로 신천군 정치보위부에서 90명, 신천 군당방공호에서 100여명, 또 내무서 방공호 근처에서 230여명, 내무서 내에서 20명, 시내에서 3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이후의 보복학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규모를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부터 남한의 대학가에는 북한의 주장을 반영하는 사회과학 서적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일단 북한의 주장은 국제민주여성연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라는 국제단체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 방식의 비과학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다면 상당히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쨌든 신천학살은 꽤 민감한 떡밥이어서 아직까지도 남측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미군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1년에 출간된 황석영의 ‘손님’이나 2002년에 방영된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가 ‘신천학살’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미군의 학살 개입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여전히 미군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확신하고 있지요.

북한은 미국이 학살을 저질렀으며 학살을 지휘한 자는 미군 중위 해리슨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군의 학살을 입증하려면 먼저 이 ‘해리슨’의 실체에 대해 밝혀야 겠지요. 실은 이 ‘해리슨’은 북한의 주장 뿐 아니라 남한의 반공성향 서적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한연구소에서 1990년에 펴낸 북한민주통일운동사 황해도 편에는 신천에 진주한 미군 지휘관이 ‘해리슨’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북한의 주장을 입증해 주는 증거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해리슨이나 남한의 서적에 등장하는 해리슨은 모두 문서로 확인이 안된, 증언에 기초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MBC의 취재가 밝혀냈듯 재령-신천일대에 진주한 미육군 24보병사단 19보병연대 3대대에는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중위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1950년 9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의 미 육군 24보병사단 장교명부에 실려있는 19연대 소속의 H로 시작하는 장교들의 이름을 발췌해봅니다.

19보병연대의 H로 시작하는 이름의 장교

휴즈(Irving C. Hughes) 대위
할(Charles E. Hall) 대위
홀더(J. M. Holder) 대위
히슬롭(Kenneth C. Hyslop) 대위
핸들리(Norman C. Handley Jr) 중위
할스태드(Ray H. Halestead) 중위
하우겐(Richard D. Haugen) 중위
허버트(Robert L. Herbert) 중위
힐(James F. Hill) 중위
호넷(John H. Hodnett) 중위
호로니(John A. Horony) 소위
허드슨(George W. Hudson) 소위
헤일(Lindsey W. Hale) 소위
햄릭(Clifford D. Hamric) 소위

물론 미군의 학살을 굳건히 믿는 쪽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민족21이라는 잡지는 2002년 5월 호에서 학살을 저지른 미군 ‘해리슨’이 방첩대(CIC)나 헌병대 소속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심증일 뿐이지요.
그렇다면 1950년 10월 미 24보병사단 방첩대와 헌병대에는 ‘해리슨’이란 이름의 장교가 있었느냐? 그럴리가 없죠…

미육군 24보병사단 24방첩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마운트조이(Pearl B. Mountjoy) 소령
쿡(Harvey J. Cook) 대위
매커비(John F. McCabe) 대위
킴(Calvin Kim) 중위
매키(Francis L. Mackey) 상급준위
요네무라(Minoru Yonemura) 상급준위
존슨(Joshep H. Johnson) 준위
이시하라(James H. Ishihara) 준위
스미스(Elmer L. Smith) 준위

미육군 24보병사단 24헌병중대 장교명부(준위 이상)

햄릿(Lamar Hamlett) 대위
매닝(James D. Manning) 대위
애버릴(Edward R. Averill) 중위
보이드(Raymond S. Boyd) 중위
리건(Wandle Legan) 중위
풋냄(Harry A. Putnam) 중위
솔라-오티즈(Antonia M. Sola-ortiz) 중위

생각해 보면 오직 증언에 기초해 ‘해리슨’이란 인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신천학살에 대한 최초의 국제조사에서는 ‘해리슨’이란 인물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이후의 조사에서부터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조작의 냄새가 풀풀 풍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입니다. MBC의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북한측이 ‘해리슨’의 학살을 목격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김종문과 민선홍은 1950년 당시 각각 11세와 6세였는데 이들이 영어를 다 알아들을 정도로 영어실력이 좋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뭐, 공화국이 당시부터 조기영어교육에 성공을 거두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만?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없다고 해서 미군이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고 하는 분도 계실 것 입니다. 그렇다면 재령-신천에 있었던 19연대나 방첩대, 헌병대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 입니다.
먼저 재령-신천에서 작전한 19보병연대 3대대의 경우 대대장인 에이어스(Harold B. Ayres) 중령이 10월 7일 야전병원에 후송되어 로건(Edwad O. Logan) 소령이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었다. 3대대는 북진을 개시할 당시 재령의 도로교차점을 장악한 뒤 사리원 방향으로 진출, 북상하는 영국군과 접촉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10월 16일에 이 대대가 북진을 시작할 무렵 북한군의 저항은 와해단계에서 오히려 북한의 빈약한 도로망에 의한 교통정체가 더 큰 장애물일 정도였다고 연대 작전일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날인 17일 오후 19연대는 재령에 돌입했고 다음날 까지 재령일대를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19연대의 일지에는 신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언제 신천이 점령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재령은 사리원에서 신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중앙에 위치한 교차점이었고 또 월남한 신천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아마도 18일 오후 늦게야 미군은 신천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령-사리원 일대를 장악한 미 19보병연대는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진남포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3대대에는 후방 경비의 임무가 내려졌고 이 중 L중대와 여기에 배속된 6전차대대의 전차 몇 대가 재령-신천 일대의 경비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10월 20일에 재령 방향으로 북상한 제 5보병연대전투단에 방어구역을 인계했기 때문에 재령일대에는 불과 이틀 정도만 머물렀습니다. 설사 해리슨이 실존인물이라도 학살을 저지르기에는 터무니 없이 짧은 기간이지요. 물론 후속부대인 제 5보병연대도 바로 사단 주력을 따라 북상해서 별다른 건덕지가 없습니다.;;;;;
방첩대의 경우는 좀 더 건덕지가 있긴 합니다. 북진과정에서 24방첩대의 임무는 미군 포로의 수색, 특히 대전에서 포로가 된 딘 소장의 행적을 찾는 것과 좌익 간부의 색출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첩대의 일지를 보면 좌익 간부 색출은 상당수의 간부들이 줄행랑을 친 덕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방첩대가 좌익 색출과정에서 우익 치안대의 협조를 받았다는 점 정도입니다. 헌병대의 경우는 더 심심해서 교통정리와 피난민 통제 말고는 없습니다.

간단히 결론을 내리자면 소규모 민간인 살해를 제외하면 미군이 북한의 주장 처럼 수만명을 학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황석영의 손님이 출간 된 뒤 황석영이 신천학살을 내부의 문제로 돌리고 미군의 학살을 은폐했다고 비난한 유태영 목사도 정작 자신은 미군이 학살을 저지른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밝혔지요.

황석영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 처럼 신천 학살이 전적으로 미국의 책임이라는 것은 휴전 이후 사회 내부의 통합을 위해서 택한 고육지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황석영의 설명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공식 역사인 조선전사에서는 신천학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천에서의 대중적 학살 만행은 신천 땅을 강점한 미제침략군의 우두머리인 해리슨 놈의 직접적인 지휘 밑에 계획적으로 감행되었다. 이 살인마는 1950년 10월 17일 미제침략군이 신천을 강점한 첫날에 ‘나의 명령은 곧 법이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무조건 총살한다.’고 떠벌이면서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 이리하여 신천 땅에서는 일찍이 역사가 알지 못하는 야수적인 대중적학살만행이 감행되었다.

『조선전사 26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30~132쪽

이 서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전복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군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는 구절입니다. 사실왜곡을 하는 와중에서도 진실을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넣어놓았다는 것 이지요. 즉 북한의 논리는 ‘전쟁의 원천 제공자가 미제니까 미제가 다 한 것이 아니냐’인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실을 회피하는 것이 그 사회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고립을 유지하는 동안은 이런식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올 것 입니다. 그게 언제가 될진 아무도 모르지만.

추가(6월 12일 18시 36분)

그러고 보니 해리슨이라는 인물이 구체화 되는 과정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덧붙일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아직 신천학살에 대한 북한측 문헌을 모두 찾아 본 것은 아니지만 『조선전사 26권』(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신천학살박물관에서 펴낸 신천의 원한을 잊지 말자』(금성청년출판사, 1987), 고상진의 『조선전쟁시기에 감행한 미제의 만행』(사회과학출판사, 1989) 등 1980년대의 문헌에는 학살을 감행한 ‘살인마’의 이름이 ‘해리슨’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 부터인지 ‘해리슨’은 이름이 되었고 그의 성은 '메이든'(Madden)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해리슨’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없어도 ‘메이든’이란 성을 가진 중위는 있었느냐? 당연히 있을리가 없지요.

역시 19연대 소속의 장교 중 성의 앞 글자가 M으로 시작하는 장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Nedd D. Moore 대령
Thomas M. McGrail 중령
Robert M. Miller 소령
Melecio J. Montesclaros 소령
Sidney M. Mark 대위
Nathan Masin 대위
Robert S. Mason 대위
Samuel T. Minnich 대위
Oliver L. Mcdougell 중위
James M. Mattson 소위
Cosby Mcbeath Jr. 소위
Raymond R. McEachin 소위
William R. Megibren 소위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2007년 2월 8일 목요일

전형적인 약소국 외교

895A.00R/1-2050

동북아시아국의 존 Z 윌리엄스의 면담록.

대외비, 1950년 1월 20일 [워싱턴]

참석자 : 주미한국대사 장면(John M. Chang), 극동담당차관보 W. 월튼 버터워스(W. Walton Butterworth), 존 Z 윌리엄스

국무부 장관이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알렸기 때문에 장 대사는 대신 오후 5시 30분에 버터워스 차관보와 만났다.

장면 대사는 먼저 어제 경제협력처의 대한 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곧 이 문제에 대해서 성명을 낼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행정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현재 고려중인 방안이 의회로부터 하나 혹은 다른 형태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대통령의 재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중국 지역에 대한 상호방위원조계획(MDAP) 예산으로 책정된 7500만 달러 중 한국 원조에 전용할 수 있는 예산은 어제도 밝혔듯 하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않는 한 1달러도 없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장면 대사는 국무부 장관이 최근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극동지역의 이익선(line of U.S. interest in the Far East)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자신에게 질문해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이 미국의 이익선 바깥으로 분류된데다 어제 하원이 한국에 대한 원조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는 미국 정부는 한국을 존중해서 UN의 다른 회원국들과의 협조하에 한국의 정통성(cause)을 지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의 위치는 어떤 선을 설정하던 간에 그 것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어제 하원의 행동에 대해 한 발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업무문제 때문에 최근 장면대사가 한국의 재정문제에 대해 보낸 서신을 검토하지 못 했다고 말했다. 장면 대사는 한국정부에 최근 버터워스 차관보가 한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해 표명한내용을 한국 정부에 보냈으며 한국 정부는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알려왔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장면 대사에게 의회는 결국에는 1950년 회계연도 한국에 대한 ECA 원조 금액 중 나머지를 승인할 것이지만 1951년 회계연도의 원조 프로그램은 매우 상세하게 검토될 것이며 이 때문에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면 대사는 기자들이 문 밖에서 자신의 발언을 취재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니 국무부가 하원의 행동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그런 발언은 국무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예기치 못한 부담을 줄 수 있으며 하는 일 마다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대응은, 특히 언론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미국측이 한국을 걱정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장면 대사는 자리를 뜨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무부와 백악관이 한국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각료들에게 확신시키고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답을 받기 위해 국무부장관을 면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버터워스 차관보는 국무부장관의 일정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다음주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국무부장관 면담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확답했다. 장면박사는 국무부장관과의 면담은 5분 이상 끌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면대사는 버터워스 차관보가 떠난뒤 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지고 버터워스 차관보와 대화한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도중 국무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going to do something)”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면대사는 기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질문하지 않도록 그 사본은 주미한국대사관과 프레스클럽에 있다고 말을 돌렸다.

FRUS 1950 Vol. VII Korea, pp11-14, USGPO 1976

뭐, 지금도 어떤 경우 구걸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는 건 별반 차이는 없을 듯 싶습니다만.... 요즘은 미국이나 중국같은 강대국 뿐 아니라 북한같은 동네에도 구걸을 한다지요.

2006년 12월 7일 목요일

[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

美利堅史는 천조의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지라 한국의 이름난(?) 장수들을 같이 다루기는 뭐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美利堅史의 외전으로 海東名將傳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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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견룡대정 차지철)

차지철은 서울 사람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2년에 출생했다. 전하기를 차지철의 아비는 매우 호색한이어 여색을 심히 밝혔다 하는데 훗날 사람들이 “역시 개가 범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라며 감탄하였다.

아이젠하워 원년, 차지철은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차지철은 군관이 되고자 화통도감에 들어가 마침내 군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5년, 차지철이 미리견의 화통도감에서 화포 쓰는 법을 배워 돌아왔다. 아이젠하워 6년, 차지철은 산원(散員)이 되어 좌우위(左右衛)로 옮겼다.

존 F. 케네디 원년, 차지철이 사보이 객잔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사람됨을 좋게 여겨 마음 속에 있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요사이 붉은 도적의 준동이 심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조정에는 사특한 마음을 품은 간신배가 넘치니 잠을 이룰 수 없소이다”

차지철은 박정희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크게 감격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소장은 장군께 견마의 노를 다하겠사옵니다.”

존 F. 케네디 원년 5월 16일, 평소 박정희의 인품을 사모하던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일으켜 문하시중(門下侍中) 장면을 몰아냈다.

이 때 차지철의 공이 매우 컸는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장수들이 박정희를 옹립하여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자 상장군(上將軍) 장도영(張都映)은 이를 알고 중랑장 서종철을 보내 좌우위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차지철은 중랑장 박치옥의 휘하에 있었다. 서종철이 군사를 이끌고 박치옥의 영으로 들이닥치자 박치옥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차지철이 도끼로 병기고를 부수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섰다.

박정희를 따르는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난입하자 문하시중 장면은 크게 낭패하여 사찰로 숨어들어 비구니들에게 목숨을 의탁하였다.

박정희와 여러 장수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를 두고 상장군 장도영을 수장으로 옹립했다.

케네디 2년, 차지철은 학문을 닦기 위해 군관을 그만 두었다.

케네디 3년, 여러 장수들이 박정희를 추대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처음에 박정희는 왕위에 오르기를 한사코 사양했으나 여러 장수들의 권유와 백성들의 간청에 못이겨 왕위에 올랐다.

천자가 박정희에게 “토북괴 반공대장군 한국국왕(討北傀 反共大將軍 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박정희는 국왕이 되자 차지철을 아껴 그에게 관직을 주었다. 이때 처음 전국구(全國區)라는 제도가 생겨났는데 시정의 잡배들은 전국구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한 까닭에 생긴 것이라 하였다.

차지철은 관직에 있으면서 서원에서 학업을 닦아 박사가 되었다. 차지철이 학업을 닦을 때 여러 사람들은 차지철이 서원에 나가지 않으니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뒤에 차지철이 박사가 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서원에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박사가 되었으니 공의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측량할 수 없구려!”

제럴드 포드 원년 8월 15일, 중전 육(陸)씨가 북괴의 자객 문세광의 육혈포에 맞아 승하하였다. 이로 인해 박정희의 상심이 매우 컸다. 견룡대정 박종규(朴種圭)에게 자객을 들인 죄를 물어 파직했다.

박종규가 파직되자 차지철이 새로이 견룡대정이 되었다.

차지철은 견룡군을 이끌게 되자 먼저 국왕의 위엄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차지철이 매주 견룡군을 이끌고 시위를 하며 위엄을 과시하니 이를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때 차지철의 위세가 당당하니 문하시중 마저도 차지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이때 사특아랍백(沙特阿拉白), 의랍극(依拉克) 등 서토의 여러 추장들이 흑유의 가격을 올려 백성들의 삶이 심히 곤궁했다.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 간혹 삶이 어렵다 하여 국왕을 능멸하고 사특한 무리들의 요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심히 많아 뜻 있는 신료들이 이를 심히 불안하게 여겼다.

이때 많은 신료들은 민심을 두려워 했으나 유독 차지철 만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간포채(柬埔寨)에서는 3백만을 죽였다한다.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면 병거로 밀어 버리면 되지 아니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모두가 차지철의 기백에 감탄하였다.

지미 카터 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차지철도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김재규는 국왕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킬 때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오른 무인으로 평소 차지철이 자신을 하대함에 분개하였다.

“내가 장군일 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일개 산원이었다. 저자의 오만함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하니 김재규가 마침내 역심을 품고 자객들을 모아들였다.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들이닥쳐 박정희에게 육혈포를 난사하자 차지철은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병가의 상책은 삼십육계라 하였으니 지금이 그때로다.”

그러나 자객들이 객잔을 에워싸고 총포를 난사하며 밀려드니 드디어 차지철이 견룡군의 여러 군관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차지철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견룡대정까지 올랐으며 민주 국가에서 백성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하였다. 차지철은 종종 “간포채에서 3백만을 죽였다 하니 우리도 그쯤 죽이면 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했으니 이로 미루어 그의 용맹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을 시해할 때 형세가 외로움을 깨닫고 삼십육계를 하려 했으니 병법에 능한 것이 이 정도였다. 아깝게도 자객들의 흉탄을 피하지 못해 비명횡사했으니 어찌 아니 슬프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