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전두환이 대통령 되기전의 행동중에 제일 황당한게 월남전에서 병사들먹을 생수로 샤워를 했었다는 사실... 그런행동때문에 상관들은 전두환을 전부다 싫어하고 주변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는군요. 하지만 전두환의 제위등극 이후에 전부다 사회적매장당했다는게 더욱 안습....
답글삭제오마이 뉴스에서 읽은걸로 기억하는데 신빙성이 떨어질수도....
홍건의 수괴로부터 조공을 받으시는 장군님!! 이로군요
답글삭제'몰라도 될 것까지 깨치니'
답글삭제안습이로군요...
본디 머리숱이 적어... 본디 머리숱이 적어...^^;;
답글삭제아텐보로/샤워설은 아니라고 하던대요.
답글삭제일찌기 디코에선가 그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니었다합니다.
오히려 파월 29연대장 시절에
명성을 더 얻었다 하더군요.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답글삭제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이미 세존을 능가했군요. 역시 일해거사입니다.
소문에 고향에서는 그 덕을 흠모하여 관에서 나서서
아호을 따 궁원을 만든다지요?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후 2000년 만에 29만원의 기적을 일궈내신 해동의 득도자!
답글삭제식수샤워는 오나니 뉴스 특유의 개뻥일 가능성이 높죠. 일해거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답글삭제거사께서 이마에 다이아 세개를 달고 다니시던 시절, 친한 후배가 결혼하게되자 거사께서는 친히 당신의 집의 냉장고를 구루마에 싣고선 신혼선물로 져 날랐다죠. 이순자여사께서 버선발로 뛰어나와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합니다. 이렇게 아랫사람은 학실히 챙겨주었기에 1979년 12월 12일의 거사가 가능했던 것이죠.
처음에는 해동명장전에 넣어야 하는 것인가? 한국세가에 넣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나름 해동고승전도 그럴 듯 하옵니다.
답글삭제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하나 빠졌습니다. 일해거사의 덕을 숭모하여 그 고향에 일해거사의 이름을 딴 공원이 생겼으니 그 법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추가해 주기 바라옵니다.
청년들의 심신수행을 위해 삼청교육대를 세우시고 또한 녹화사업을 펼치신 공덕과, 광주에 준동하던 홍비들을 일망타진하신 공덕도... ^^
답글삭제오늘도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답글삭제아텐보로님 // 오마이뉴스라. 약간 의심이 가는군요.
답글삭제세진 // 장군이 아니라 거사
스카이호크님 // 무섭지요.
미친고양이님 // 득도하기에 천부적인 외모를 타고 나셨지요.
바보이반님 //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법력입지요.
umberto // 혹시 처음 오셨는지?
하얀까마귀님 // 업적이 너무 많다 보니 정리가 짧게 안되더군요.
행인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