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利堅史는 천조의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지라 한국의 이름난(?) 장수들을 같이 다루기는 뭐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美利堅史의 외전으로 海東名將傳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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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東名將傳 卷一 牽龍隊正 車智澈(견룡대정 차지철)
차지철은 서울 사람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2년에 출생했다. 전하기를 차지철의 아비는 매우 호색한이어 여색을 심히 밝혔다 하는데 훗날 사람들이 “역시 개가 범을 낳지는 않는 법이다.”라며 감탄하였다.
아이젠하워 원년, 차지철은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차지철은 군관이 되고자 화통도감에 들어가 마침내 군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5년, 차지철이 미리견의 화통도감에서 화포 쓰는 법을 배워 돌아왔다. 아이젠하워 6년, 차지철은 산원(散員)이 되어 좌우위(左右衛)로 옮겼다.
존 F. 케네디 원년, 차지철이 사보이 객잔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사람됨을 좋게 여겨 마음 속에 있는 걱정을 털어 놓았다.
“요사이 붉은 도적의 준동이 심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조정에는 사특한 마음을 품은 간신배가 넘치니 잠을 이룰 수 없소이다”
차지철은 박정희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크게 감격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었다.
“소장은 장군께 견마의 노를 다하겠사옵니다.”
존 F. 케네디 원년 5월 16일, 평소 박정희의 인품을 사모하던 여러 장수들이 군사를 일으켜 문하시중(門下侍中) 장면을 몰아냈다.
이 때 차지철의 공이 매우 컸는데 그 전말은 이러하다.
장수들이 박정희를 옹립하여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자 상장군(上將軍) 장도영(張都映)은 이를 알고 중랑장 서종철을 보내 좌우위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차지철은 중랑장 박치옥의 휘하에 있었다. 서종철이 군사를 이끌고 박치옥의 영으로 들이닥치자 박치옥은 크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차지철이 도끼로 병기고를 부수고 군사들을 이끌고 나섰다.
박정희를 따르는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난입하자 문하시중 장면은 크게 낭패하여 사찰로 숨어들어 비구니들에게 목숨을 의탁하였다.
박정희와 여러 장수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國家再建最高會議)를 두고 상장군 장도영을 수장으로 옹립했다.
케네디 2년, 차지철은 학문을 닦기 위해 군관을 그만 두었다.
케네디 3년, 여러 장수들이 박정희를 추대하여 국왕으로 삼았다. 처음에 박정희는 왕위에 오르기를 한사코 사양했으나 여러 장수들의 권유와 백성들의 간청에 못이겨 왕위에 올랐다.
천자가 박정희에게 “토북괴 반공대장군 한국국왕(討北傀 反共大將軍 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박정희는 국왕이 되자 차지철을 아껴 그에게 관직을 주었다. 이때 처음 전국구(全國區)라는 제도가 생겨났는데 시정의 잡배들은 전국구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한 까닭에 생긴 것이라 하였다.
차지철은 관직에 있으면서 서원에서 학업을 닦아 박사가 되었다. 차지철이 학업을 닦을 때 여러 사람들은 차지철이 서원에 나가지 않으니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뒤에 차지철이 박사가 되니 모두가 탄복하였다.
“서원에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박사가 되었으니 공의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측량할 수 없구려!”
제럴드 포드 원년 8월 15일, 중전 육(陸)씨가 북괴의 자객 문세광의 육혈포에 맞아 승하하였다. 이로 인해 박정희의 상심이 매우 컸다. 견룡대정 박종규(朴種圭)에게 자객을 들인 죄를 물어 파직했다.
박종규가 파직되자 차지철이 새로이 견룡대정이 되었다.
차지철은 견룡군을 이끌게 되자 먼저 국왕의 위엄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차지철이 매주 견룡군을 이끌고 시위를 하며 위엄을 과시하니 이를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이때 차지철의 위세가 당당하니 문하시중 마저도 차지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이때 사특아랍백(沙特阿拉白), 의랍극(依拉克) 등 서토의 여러 추장들이 흑유의 가격을 올려 백성들의 삶이 심히 곤궁했다.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 간혹 삶이 어렵다 하여 국왕을 능멸하고 사특한 무리들의 요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이 심히 많아 뜻 있는 신료들이 이를 심히 불안하게 여겼다.
이때 많은 신료들은 민심을 두려워 했으나 유독 차지철 만은 그러지 아니하였다.
“간포채(柬埔寨)에서는 3백만을 죽였다한다.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면 병거로 밀어 버리면 되지 아니하겠는가.”
이 말을 들은 모두가 차지철의 기백에 감탄하였다.
지미 카터 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차지철도 같이 죽임을 당하였다. 김재규는 국왕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킬 때 이미 장군의 반열에 오른 무인으로 평소 차지철이 자신을 하대함에 분개하였다.
“내가 장군일 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일개 산원이었다. 저자의 오만함이 이러하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국왕이 차지철을 총애하니 김재규가 마침내 역심을 품고 자객들을 모아들였다.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들이닥쳐 박정희에게 육혈포를 난사하자 차지철은 자리를 피하려 하였다.
“병가의 상책은 삼십육계라 하였으니 지금이 그때로다.”
그러나 자객들이 객잔을 에워싸고 총포를 난사하며 밀려드니 드디어 차지철이 견룡군의 여러 군관들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
차지철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견룡대정까지 올랐으며 민주 국가에서 백성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용맹하였다. 차지철은 종종 “간포채에서 3백만을 죽였다 하니 우리도 그쯤 죽이면 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했으니 이로 미루어 그의 용맹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재규가 자객들을 이끌고 국왕을 시해할 때 형세가 외로움을 깨닫고 삼십육계를 하려 했으니 병법에 능한 것이 이 정도였다. 아깝게도 자객들의 흉탄을 피하지 못해 비명횡사했으니 어찌 아니 슬프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