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레이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레이건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

러시아의 크림 반도 침공으로 국제정세가 뒤숭숭합니다. 뭐, 제가 이쪽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지만 워낙 중요한 사태다 보니 시간이 나는대로 외신 보도들을 챙겨보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량이 방대하고 현안에 대해 아는게 적다 보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현재 미국의 태도에 다소 불안감을 느끼는 편인데 제 시각과는 방향이 다른 글을 한편 읽게 되어서 번역을 해 봅니다. 포린 폴리시에 제임스 트라웁James Traub이 기고한 Obama’s Not Carter, He’s Eisenhower라는 글인데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이기는 게 뭐 대수냐!”는 담대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뭐, 시각에 따라서는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국의 입장에서 느긋하게 대응하자는 이야기라서 우리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편하게 읽히긴 합니다만 이런 시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오바마는 카터가 아니다, 그는 아이젠하워다.

그리고 오바마는 서방이 전쟁에 승리할 것을 알기 때문에 푸틴이 전투는 승리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제임스 트라웁

헝가리 정부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직후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의 전차들이 부다페스트로 진격했다. 헝가리의 봉기 군중이 마지막으로 보낸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었다. “그들이 지금 막 미군이 한두시간 내에 부다페스트로 올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왔다. … 우리의 상황은 나쁘지 않고 싸우고 있는 중이다.” 미군은 부다페스트로 가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을 동유럽에서 몰아내겠다고 호언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헝가리의 봉기는 분쇄되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도부는 아이젠하워가 소련에게 굴종한다고 비난했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애들레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은 아이젠하워가 “자유국가들의 동맹이 존립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몰고 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러시아가 또 다시  인접국가를 침공하자 미국 대통령도 또 다시 우유부단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아이젠하워와 같은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오바마는 쉽게 재선된 아이젠하워가 받았던 비난 보다 더 심한 강도의 비난을 받고 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침공한데 대해 오바마가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 그가 나약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며, 전 세계의 악당들은 오바마의 불안정한 리더쉽을 보면서  미국의 보복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평이 더욱 더 퍼지고 있다. 공화당의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Lindsey Graham은 얼마전 트위터에 2012년 미국 외교관 크리스 스티븐스Chris Stevens가 리비아에서 살해됐을때 리비아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격적인 행동”이 초래됐다고 썼다. 그레이엄은 당파적인 입장에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오바마를 비판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수많은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나의 동료 데이빗 로트코프David Rothkopf는 오바마와 지미 카터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허약한 대통령의 기준으로 “카터를 꼽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여기에 인간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악당들이 말을 알아듣게 하려면 위협을 가하는 수 밖에 없다. 악당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행동을 멈출 것이다. 내 동생을 때리면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국제관계의 영역에서 럼즈펠드의 그 유명한 “나약함이 도발을 불러온다.(Weakness is provocative.)”는 격언의 바탕이 되었다. 럼즈펠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 중동의 다른 모든 악당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며 이런 악당들이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을 재고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럼즈펠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라크 침공의 경험을 통해 호전적인 태도가 나약함 보다도 더 도발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의 생활이나 국제 관계를 막론하고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충동은 참기가 힘들다. 악당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은 멋지게 보이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악당은 거들먹 거리며 걸어다니고 약한 사람들은 움추려든다. 우리는 잔인한 짓만 빼고 악당들 처럼 자유롭기를 갈망한다. 월터 미티Walter Mitty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신이 미국처럼 놀이터에서 가장 잘나가는 골목대장이라면 악당들의 이런 행동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빅 브라더에 짜릿함을 느낀다. 미국인들이 “고르바초프! 베를린 장벽을 없애버려요!”라고 절규하도록 만든 로날드 레이건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게 만든 그의 후임자 조지 부시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세계는 부시에게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아이젠하워는 악당들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수 도 있을 정도의 위협을 가해야 할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적국이 우리가 신경쓰는 것 이상으로 희생양에게 신경을 쓰고 있을 경우가 그러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헝가리를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푸틴이 친서방적인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크림 반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믿는것과 같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크림 반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역이었으며 로시아 흑해함대의 기지였으며, 오랫동안 부동항을 갈망해온 러시아를 만족시키는 지역이다. 푸틴 같은 깡패(thug)는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위협을 받는다면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야만적인 폭력말이다. 오바마가 보다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면 푸틴이 손을 뗄 것이라는 생각은 공상에 불과하다. 이건 마치 “누구 때문에 중국에서 패배한 것이냐?”와 같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나약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줬다는 비난과 같은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식이다. “누구 때문에 벵가지에서 패배한 것이냐?” 아니면 시리아 라던가.

아이젠하워는 결국에는 소련이 서방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오바마 또한 푸틴에 대해서 아이젠하워가 소련에 대해 가졌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푸틴이 탁월한 전략가라고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위원인 윌 인보든Will Inboden은 오바마의 행동은 어린아이들이 보드게임을 하는 수준인데 푸틴은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틴은 러시아를 핵무기를 가지지 못한 사우디 아라비아로 만들었을 뿐이다. 러시아는 땅에서 캐내는 것 말고는 수출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산유국에 불과하다. 푸틴이 잭나이프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수준이라면, 나머지 세계는 레이저를 사용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수준이다.

오바마의 대외정책 수행을 카터와 같다고 이야기 하지만 아이젠하워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오바마처럼 전임자로 부터 물려받은 방대한 국방 예산이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준다고 생각했다.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적은 수단으로 더 많은, 혹은 사용하는 수단 만큼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노력했다.(스티븐 세스타노비치Stephen Sestanovich는 맥시멀리스트Maximalist에서 아이젠하워와 오바마를 “긴축” 대통령으로 묘사했다.)  내가 지난주에 기고한 글에서 쓴 것 처럼, 오바마가 대외 정책에서 추구하고 있는 가장 큰 목표는 국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포함한 지난 정권에서 이어진 분쟁들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것이다.

오바마가 대외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계속되는 문제는 오바마의 정책에 결단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갈수록 외골수로, 상상력이 결여된 축소지향적인 방향을 추구하는데 있다. 오바마는 임기를 시작할 때 핵무기 비확산과 기후 변화와 같은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국제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원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때 부터 시작된 통제할 수 없는 분쟁을 중단할 수 없으며, 미국 국민들은 그의 개혁안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을 알게됐다. 결국 오바마의 열정은 사그러들었고 그의 (사고:역자) 지평은 줄어들었다. 그대신 오바마는 미국이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것을 선택했다. 무엇보다도 시리아가 그런 경우였다. 오바마는 시리아에서 자행되는 최악의 만행에 대해 단호해 보이는 제스쳐를 취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행동은 나쁜 일이다. 한때 오바마가 제창했던 희망과 그가 안주하기로 선택한 편안한 장소와의 거리는 아이젠하워의 말뿐인 반공주의와 그의 실용적인 타협안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 백악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진보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의 브라이언 카툴리스Brian Katulis는 최근 오바마가 더이상 미국 국민들에게 국제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마도 오바마는 국제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듯 싶다.

나는 오바마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오바마가 하는 일이 훌륭하다는 것을 모른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바마의 실패는 그의 불안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오바마가 초기 부터 러시아에 대해 보다 대결적인 정책을 취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오바마가 그렇게 했다면 그는 군비통제나 아프가니스탄, 이란 문제에서 그랬던 것 처럼 동맹국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푸틴이 꿈꾸는 것 처럼 미국과 러시아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결하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이 초래되었다면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통합되는 것 같은 용납할 수 없는 위협에 직면하여  러시아에서 민족주의적인 여론이 거세지도록 선동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오바마가 2년 전에 시리아의 반군을 훈련시키고, 군자금을 지원하며, 장비를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오바마가 시리아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 것이 그의 임기 내내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나는 오바마가 푸틴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리아인들을 압제로 부터 구출하기 위해 개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바마는 몇가지 제제조치와 올 6월에 소치에서 개최될 예정인 G-8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취소하는 등의 조치를 결합하여 러시아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계속해서 푸틴 개인에 대한 숭배에 붙들려 있는 이상 오바마가 취하게 될 조치들은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고립된다면 푸틴의 입지만 강화될 것이다. 동구와 서구가 대립하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듯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가 동맹국이나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결은 한쪽에 일방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냉전 당시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하더라도 서구는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미래는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여 대결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저는 이런 시각을 썩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미국이 유리할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기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될 국가가 우크라이나 하나로 끝난다는 보장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벌어진 전쟁에서 무너진 작은 국가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올 여름쯤에 나올 국제관계나 군사전략 관련 저널들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룰테니 그때쯤 잘 정리된 재미있어 보이는 글들을 더 번역해 볼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Journal of Strategic Studies나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에서 특집을 내줬으면 좋겠네요.

2012년 1월 10일 화요일

Why Panetta's Pentagon Cuts Are Easier Than You Think

지난 1월 4일, 포린 어페어즈 인터넷 판에 재미있는 글이 한편 실렸습니다. 「어째서 파네타의 국방부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가?(Why Panetta's Pentagon Cuts Are Easier Than You Think)」라는 글인데 미국의 국방예산 삭감이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기 보다는 비효율을 정리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작년 9월에 블로그에 소개했던 「다가오는 미국의 긴축(America's Coming Retrenchment )」과 같이 미국의 국방예산 감축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견해가 많다는 점에서 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어보고 바로 블로그에 올려볼까 했는데 주말에 친구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경상도에 다녀온데다 MJ님이 출연하시는 원더풀라디오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좀 늦어졌습니다. 좀 날림번역인데 봐주십시오^^;;;;;


어째서 파네타의 국방부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가?
로렌스 콥(Lawrence J. Korb)

이번주에 레온 파네타Leon Panetta국 방부장관이 국방예산을 수천억 달러 감축하는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민간부문과 군부의 지도자들은 이와같은 예산 감축이 재앙과도 같은 충격을 줄 것이라고 비난하는 등 예언같은 경고를 하고 있다. 이들은 적절한 재원이 없다면 미국이 세계 각처에 가지고 있는 이익을 보호할 수 없을 것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방부는 재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국방부의 입장을 가장 강력히 지원하는 사람들 조차도 국방부의 문제는 관리에 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군장교협회Military Officers Association의 회장인 노버트 라이언Norbert Ryan은 최근 워싱턴타임즈에 기고한 논평에서 이 문제를 잘 정리했다.: “거의 매주 많은 비용이 투입된 계획들이 총체적인 관리 부실과 예산 초과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는데 이 중에서 현재 우리 군대가 싸우고 있는 전쟁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라이언은 이렇게 적었다. “관리부실이 매우 심각해서 국방부의 회계장부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보일 지경이며 국방부의 고위층은 2017년 이전에는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 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해군 장교로 장기간 복무한 전쟁영웅 출신의 존 매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공화당, 애리조나)은 이보다 더하다. 2011년 12월 15일 상원 의석에서 매케인 의원은 사실상 현재 개발 중인 거의 모든 무기체계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매케인 의원은 F-35 계획이 수습 불능의 상태이며, 해병대의 신형상륙장갑차Expeditionary Fighting Vehicle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탄식했고, 육군의 미래 전투 체계는 “요란하고, 부끄러운 실패작” 이상이라고 비판했으며, F-22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잡아먹은 채로 격납고에서 좀만 슬어가는 여왕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항상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행정부가 강력한 부장관을 두어 운영을 총괄해서 담당하게 했을 때는 관리 문제가 미미했다.(국방부장관은 국방부의 운영을 신경쓰기에는 너무나 바쁘다.) 예를 들자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너럴 모터스에서 찰스 윌슨Charles Wilson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휴렛 패커드에서 데이빗 패커드David Packard를, 지미 카터 대통령은 코카콜라에서 찰스 던칸Charles Duncan을,  그리고 조지H.W. 부시 대통령은 제너럴 모터스의 도날드 앳우드Donald Atwood를 데려다 썼다.

이들 행정부에서 국방 예산은 크게 감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보는 부장관의 관리상의 결정에 힘입어 개선되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공군은 소련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해 값비싼 폭격기를 사용하는 대신 훨씬 저렴한 지상 발사 미사일을 사용하게 되었다. 닉슨 행정부에서 국방부는 일부 기능을 예비군으로 이관하면서 현역 병력의 규모를 감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국방부는 전투기를 조달할 때 고성능기와 저성능기를 함께 사용하도록 하여 값싼 F-16과 F/A-18로 값비싼 소수의 F-14와 F-15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크게 감축할 수 있었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방부는 공군의 B-1 폭격기를 취소하여 그보다 저렴한 B-2 스텔스 폭격기를 도입하도록 했다.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는 (F-22에 대한 해군의 대응인) A-12가 개발사에서 예산 한도를 지키지 못하게 되자 이를 취소시켜버렸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국방부 부장관들은 대부분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관리 기술이나 명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의 부장관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의 부장관 빌 린Bill Lynn, 그리고 파네타의 부장관 애쉬튼 카터Ashton Carter는 큰 조직을 운영해 본 일이 없으며 심지어 군복무 경험조차 없다. 요지는 국방부가 핵심적인 국방 예산을 실질적으로 1998년 회계연도에서 2011년 회계연도까지 13년 연속으로 증액하는 유례없는 일을 했다는데 있다. 레이건 시대의 방대한 군사력 건설조차 1981년에서 1985년까지 불과 4년간 계속되었을 뿐이며 이 다음에는 13년간 실질적인 감축이 이루어졌다. 현 재 파네타 장관이 다음 10년 동안 연간 1천억 달러의 핵심 국방 예산을 감축한다고 발표하더라도 2013년도의 예산은 4,720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이것은 2007회계연도의 예산과 같은 규모이다. 이 액수는 미국이 냉전 기간 중 사용한 연간 평균 예산을 상회하는 것이며 미국 다음의 하위 17개국의 국방예산을 모두 합한 것 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방부의 고위층은 지출 기준치를 감추었다. 지난 10년간 국방부의 수뇌부는 추가 전쟁 비용으로 부터 진행중인 전투와는 전혀 관계없는 F-22 랩터와 미사일 방어 체계와 같은 핵심 품목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해왔다. 국방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 무기 체계의 비용 상승을 감춰왔으며 국방예산에서 투자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지 않은 것 처름 보이도록 해왔다. 강력한 부장관이 있었다면 F-22와 같은 고성능 무기체계를 이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F-35와 교환하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국방부의 수뇌부는 방위산업체들이 비용을 초과한 것에 대해 댓가를 치르도록 하는데 거듭해서 실패해왔다. 국방부는 그렇게 할 수단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의회는 행정부가 국가 안보의 기준에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무기 개발계획이 예상 비용을 15~50% 초과하게 될 경우 무효화 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7년 이래 거의 절반 이상의 무기 체계 개발계획이 이 법안을 위반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양산에 돌입하도록 허가받았다.

그 다음에는, 2000년만 하더라도  개발 중이거나 생산에 들어간 계획에 소요된 비용이 4,300억 달러로 증가했다. F-35의 개발을 예로 들어보자. 원래는 2,866대에 2,33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금은 겨우 2,400대에 최소한 3,850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대당 가격은 이 기종이 대체할 예정인 F-16의 다섯배에 이르고 있다. 강력한 부장관이 있었다면 계획을 취소해 버리거나 회사가 초과비용을 책임지도록 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미국의 무기 체계가 노후화 되어 가고 있으며 교체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국방부가 이렇게 전례 없는 비용 지출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스팀슨 센터Stimson Center의 러셀 럼바우는 각 군의 조달 비용이 21세기의 첫 1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2001 회계연도에 630억 달러에서 2010회계연도에는 1,360억 달러로 늘어났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낡은 장비를 교체한 것이 아니라 500억 달러를 신형 무기체계 획득에 사용했으며 여기에는 유례없이 신속하고 유연한 전장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된 유인차량과 무인차량으로 편성된 여단으로 편성되는 3,400억 달러짜리 미래전투체계Future Combat Systems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체계에 200억 달러를 지출하고 난 뒤 정부는 이것을 취소해 버렸다

국방부의 관리 부실은 작전 및 유지 분야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이것은 2012년 회계연도에 2,000억 달러 이상에 달할 것이다. 방산업체의 경영진들은 비록 새로운 세대의 전투기들이 전선에 배치된 기존의 것들에 비해 비싸기는 하지만 작전 비용은 감소할 것이라고 거듭해서 주장해 왔다. 그렇지 않다. F-35의 작전비용은 최소한 F-16 C/D형 보다 15퍼센트 이상 높아질 것으로 기획되어 있다. 그리고 해병대의 V-22 오스프리의 작전 및 유지비용은 지난 3년간 460억 달러, 62%나 증가했다. 매케인 의원에 따르면 F-22는 대체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구형기종(F-15와 F-16)과 비교했을 때 운용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실제로 국방부는 갈수록 비효율적이 되어가고 있다. 2010년에 게이츠 국방장관은 국방 예산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각 군에 낭비적인 요소를 파악하도록 했다. 몇 주만에 2,000억 달러 규모의 과잉 지출이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장군과 제독의 숫자는 군대가 오늘날 보다 두배나 더 컸던 1971년 당시 보다 훨씬 많으며 사령부들, 예를 들어 통합전력사령부Joint Forces Command와 같은 곳들은 다른 사령부와 업무가 중복되고 있다. 그러나 게이츠 장관은 획득한 비용으로 초과된 부분을 메우는 대신 국방부가 획득한 비용의 대부분을 신규 무기 계획에 쏟아넣도록 방치했다.

국방부가 현재와 같이 운영된다면 어려운 결정들을 계속해서 회피하려 할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 또한 의회도 각 지역구에 지속적으로 경제적 활력을 넣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방부는 군부-산업체-의회 복합체를 다루는데 충분한 경험을 가진 강력하고 단호한 성격의 부장관이 필요한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첫 번째 임기를 마쳐갈 무렵 국방예산은 오늘날의 액수로 환산했을 때 3,800억 달러에 달했다. 닉슨 대통령은 같은 시기에 3,980억달러였다. 그리고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같은 시기에 4,350억 달러였다. 조지 W. 부시 에 와서는 4,780억 달러가 되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말에는 기준예산이 최소한 4,750억 달러 이상으로 아마도 5,250억 달러에 근접해 있을 것이다. 만약 오바마의 군부 및 민간 관료들이 소련과 같은 실질적인 위협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만큼의 비용으로도 국가를 지켜낼 수 없다면 오바마는 다른 사람들을 알아봐야 할 것이며 특히 새로운 국방부 부장관이 필요할 것이다. 패커드가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68년 위스콘신의 공화당 하원의원 멜빈 레어드Melvin Laird가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유능한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레어드가 자신의 참모들에게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이들은 패커드를 추천했다. 레어드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패커드가 국방부 부장관 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했다. 파네타나 그의 뒤를 잇게 될 사람들이라면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산의 규모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을 책임지는 조직과 제도의 문제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입니다. 본문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의 방만한 예산 운영과 그 뒤를 이은 조지 부시 시기의 조정을 언급한 점이 필자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제가 2007년에 간단하게 소개했던 것 처럼 레이건 행정부 시기는 오늘날 국방예산이 무절제하고 비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신무기만 잔뜩 들여놓는다고 국방력이 개선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국방 정책은 명확한 목표가 먼저 설정되어야 하며 신무기 도입은 그에 따르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 처럼 ‘소련과 같은 적’이 없는 상황에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무기를 잔뜩 들여놓고 이 때문에 당장 필요한 분야에 사용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이 글은 오바마 행정부의 국방예산 감축을 바라보는 시각 중 긍정적인 편에 속합니다. 비효율을 제거하게 된다면 적은 예산으로 미국의 국방력이 개선될 여지가 있을테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끌리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라이스에게 어울리는 일

Rice ruft zu Widerstand gegen "russische Aggression" auf

그간 대동강 촌놈들 같이 격에도 맞지 않는 것들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굴욕이셨습니까. 비록 레이건 각하 시절 만큼 흉폭하진 못하지만 곰돌이의 재롱 정도는 되어야 귀하의 그릇에 걸맞을 겁니다. 하필 현재 대통령의 치세 말에 이런 일이 터져서 곰돌이들을 상대할 시간이 몇 달 남지 않은게 아쉽다면 아쉽겠습니다.

2007년 11월 25일 일요일

지름신 앞에 장사없다 - 레이건 행정부 시기 국방예산 증액에 따른 문제점

에. 오늘도 날림 번역으로 때우게 됐습니다.;;;;

요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우국충정에 넘치는 많은 분들께서는 신무기만 잔뜩 들여오면 군사력이 알아서 강해지고 나라가 강해진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승하하신 미리견 황제 레이건 폐하께서도 가지고 계시던 것인데 잘 아시다시피 미군은 레이건 폐하의 이런 관심에 힘입어 1980년대에 신무기를 잔뜩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좋기만 했을까요?

합참은 국방예산의 증액에 대해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와인버거는 군대가 요구하는 만큼의 예산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콜린 파월은 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이것은 마치 2월의 크리스마스와 같았고 네트를 치우고 테니스를 치는 것 같았다. 합참은 즉시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요구한 내역은 국방예산을 대략 9% 정도 증가시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합참은 국회나 행정부의 반대를 받지 않고 예산을 늘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군은 베트남전 직후의 반군정서 때문에 교체하거나 개량할 수 없어서 노후화된 장비를 대규모로 교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군은 마구잡이로 '질러대기' 시작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첫 2년 동안 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군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예를 들어 존스 장군은 이런 대규모 증강이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장기적이고 꾸준한 예산 증액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존스 장군은 와인버거에 의해 예산이 통제 불능으로 폭증하는 것에 반대해 '실질적인' 국방예산 증가를 주장했다.
신형 장비, 그리고 특히 값비싼 장비를 대규모로 사들인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군사력 증강은 사실 명확한 개념이 없는 상태로 진행되었으며 미국의 전체적인 군사력 구조나 전쟁 준비상태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려도 없었다.

결국 존스 장군의 우려는 얼마가지 않아 현실로 구체화 되었다. 1983년 회계연도에 국방예산은 물가상승률 보다 25%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불과 5년만에 국방부의 예산은 두배로 폭증했다. 그러나 예산의 대부분이 신무기를 구매하는데 소비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갈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84년에는 "레이건 행정부가 6320억 달러를 군사력 증강에 쏟아부었지만 전투에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육군 부대는 1980년의 25%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런 문제는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전구 부사령관인 로슨(Richard L. Lawson) 장군은 1985년 의회에서 “대대급 야전기동과 비행훈련시간, 군함의 기동훈련은 불충분한 수준으로 감소했습니다. (중략) 일부 탄약, 특히 공대공미사일과 해군의 탄약, 특수 탄약의 재고량은 규정량 이하로 감소했으며 이 때문에 전쟁 수행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1985년에 이르자 국방부가 안게된 예산 문제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게 되었다. 존스 장군과 합참의 여러 관계자들이 경고했던 것들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합참과 군부의 요구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넌(Sam Nunn) 상원의원은 와인버거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우리는 국방부가 예산 문제를 현실적으로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회가 기존에 승인한 신무기 도입계획에 소요될 1500억에서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충원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며 신무기를 도입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의회와 대립하는 와인버거의 행태는 국방력 강화에 대해 국회와 대중들이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는 그럭 저럭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국회의원들은 타협을 거부하는 와인버거에 대해 역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건이나 와인버거가 아니라 의회가 나서서 국방부의 예산을 억제하기 시작했다.

1984년에 접어들면서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의 재정은 군사력 유지와 이미발주되었지만 아직 지불은 되지 않는 신무기 도입을 동시에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공화당 소속의 상원의원들 마저도 우려를 나타낼 지경이었다. 공화당측은 '레이건 행정부의 첫 1년에 국방부가 얻어낸 연간 9%의 국방예산 증가율보다 훨씬 낮은 3~4% 수준의 예산 증액을 이끌어 내는 것도' 엄청난 행운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와인버거는 국방예산을 늘리는데 있어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가 7년간 장관직을 수행하고 퇴임했을 때 그는 '1982년 회계연도에 1807억 달러였던 국방예산을 1987년 회계연도에는 2740억 달러로'늘렸다. 와인버거는 아슬아슬한 시기에 퇴임을 한 덕분에 그가 마구잡이로 "질러댄"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예산 문제를 손보는 것은 1987년에 새로 국방부장관이 된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의 임무가 되었다. 칼루치는 의회가 국방예산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낸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와인버거와 같은 대립적인 태도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와인버거와 달리 신무기의 생산과 도입 시기를 늦추면서 예산을 절감하려 했고 국방예산 증가율을 낮추려 했다. 실제로, 칼루치가 1988년 2월 상원에 출두했을 때 그는 국방예산 증가율을 2%로 낮췄다고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와인버거가 3320억 달러의 예산을 요구한데 반해 칼루치는 2990억 달러를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상원은 3000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증강 노력이 끝나갈 무렵, 국방부는 대통령이 약간 도움이 된 정도라고 생각했다. 합참은 MX 미사일, B-1 폭격기, 트라이던트 미사일, 그리고 새 항공모함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다. 1985년 10월 1일, 베시(John W. Vessey Jr.) 장군을 대신해서 합참의장에 취임한 크로우(William Crowe Jr.) 제독은 레이건 행정부 초기에 무분별하게 집행된 예산으로 인한 문제를 고스란히 떠안았으며 비록 행정부 초기 예산의 일부가 적절하게 사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군은 예산 사용에 있어 현명해야 했다고 비판했다.

"레이건 행정부 초기 후하게 책정된 국방예산은 국방부 내에서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때는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던’ 시기였다. 국방부가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예산이 떨어졌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과연 우리가 5년 뒤에는 이 정도의 예산을 받을 수 없을지언정 예산이 있을 때 일단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써야 하는가? 그리고는 결정이 이뤄졌다. - 그래. 지르자! 예산이 들어오는 동안은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써 버리자! 그래서 국방부는 예산을 써 버렸고 예산이 모두 현명하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국방부는 5년이 지난 뒤 더 이상은 많은 예산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돈이 있을 때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그 당시의 판단에 대해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체계적인 군생활을 거친 군인들은 예산이 증액되던 초기에 이미 레이건 행정부가 군대를 심각한 문제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한 해병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병항공대 사령관 핏맨(Charles H. Pitman) 중장은 '만약 누군가 내일’ 해병대가 앞으로 3~5년간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묻는다면 '일단 나를 혼자 내버려 두면 내부개혁을 한 뒤 좀더 나은 계획을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겠다면,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싸울 것이다. 만약 해병대가 현재의 3-5년 예산안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경우 사업 입찰에 참여한 회사들은 그들의 직원들을 내 눈 앞에서 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내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예산의 문제는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레이건이 퇴임했을 때 더 악화되었다. 국방부의 한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1970년대와 같은 구제불능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것 이죠. 육군은 레이건이 집권했을 때 보다 더 축소되었고 해군은 군함들을 퇴역시켜야 했으며 공군은 비행단 규모를 감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빴던 것은 군대의 전투수행태세가 악화된 것 이었다. 사실상 이제는 국방예산이 현재 보유한 장비들을 운용하는 데도 벅찰 지경이 되었다. 국방예산에 관한한 레이건이 남긴 유산은 복합적인 성격을 가졌다.

Dale R. Herspring, The Pentagon and the Presidency : Civil-Military Relations fron FDR to George W. Bush,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5), pp.275~278

2007년 5월 19일 토요일

각하의 찬란한 존안 - (2)

어제 명동에 나갔다가 입수했습니다.


각하의 전 재산 290,000원의 600분의 1을 넘는 5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입수한 각하의 찬란한 존안입니다. 그러나 무려 레이건 선황폐하까지 덤으로 영접하는 영광을 안았으니 어찌 500원이 아깝다 하겠습니까.

이 어린양 앞으로도 각하를 받들어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을 것을 맹세합니다. 크하하핳

각하의 찬란한 존안
전략우표 비축계획 - sonnet

2007년 3월 25일 일요일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海東高僧傳 卷一 日海居士 全斗換

해동고승전 권1 일해거사 전두환

일해거사 전두환은 본시 한국의 국왕이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출가하여 2년 만에 득도하였다.

전두환은 합천 사람으로 후버3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가지를 가르치면 몰라도 될 것 까지 깨치니 모두가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아이젠하워 3년에 군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미 흉중에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그 뜻을 펼칠 도리가 없었다.

케네디 원년 5월 16일 장군 박정희가 반정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던 문하시중 장면을 잡아들이고 사직을 반석에 세웠다. 전두환이 이 소식을 듣고 무과에 합격한 장사들을 모아 박정희를 찾았다.

“소장 비록 무반의 말석에 불과하나 장군께서 이렇게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보고 있겠사옵니까?”

박정희가 감격하여 전두환을 비장으로 삼았다. 케네디 황제가 박정희를 한국 국왕에 봉한 뒤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마침내 닉슨 5년에는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카터3년 10월 26일, 상장군 김재규가 자객을 이끌고 국왕 박정희를 시해하였다. 이때 견룡대정 차지철은 삼십육계를 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황제가 문하시중 최규하를 한국 국왕에 봉했으나 최규하는 글만 아는 선비인지라 용맹과 위엄이 없어 백성들이 심히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이때 북쪽의 홍건적들이 준동할 기미를 보이니 민심이 더욱 더 흉흉하였다. 국왕 최규하가 도원수 정승화에게 군율로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라 하였으나 정승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두환이 나라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여기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국왕 최규하를 알현하였다. 최규하는 평소 스스로 국왕 될 재목이 아님을 알고 양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두환을 만나 그의 뜻을 들으니 크게 기뻐하며 양위 할 뜻을 비추었다. 전두환이 황공해 하며 거듭 사양하였으나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니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전두환은 본시 덕이 많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국왕이 된 뒤 옛 일을 잊지 않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관직과 재물을 후하게 내리니 많은 이들이 과연 전두환은 신의를 지킨다며 감탄하였다.
전두환이 국왕에 오르자 북괴의 김일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김일성은 혹여 전두환이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 조공으로 쌀과 시멘트를 바쳤다. 한국의 여러 국왕 중 북괴로부터 조공을 받은 것은 전두환이 처음이었다. 이로서 전두환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니 레이건 황제도 크게 기뻐하며 전두환에게 “平北傀保國大將軍韓國國王”의 작위를 내렸다.

레이건 8년,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전두환은 본시 불심이 깊어 항상 출가할 뜻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내 왕위에서 물러 난 뒤 출가할 마음을 굳혔다. 전두환이 출가할 것을 결심하니 그의 처 이씨가 따르기를 간청하였다. 전두환이 대비 이씨와 함께 출가하여 백담사로 가니 많은 이들이 놀랐다. 전두환이 출가하니 본시 머리 숱이 거의 없어 따로 삭발할 필요가 없었다.

조지 부시 2년 12월, 마침내 전두환이 도를 얻었다. 사람들은 석가모니도 득도하는데 7년이 걸렸는데 전두환은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전두환은 여러 신이(神異)한 일을 행하였다.

노태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김영삼은 야소교도로 불도를 탄압하였다. 마침내 상황 전두환과 노태우도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잡아들였다. 이때 전두환은 감옥에서 일절 음식을 먹지 않고 참선하였는데 그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옥리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 하였다.

클린턴 5년, 한국에 큰 환란이 닥치니 많은 이들이 이것은 김영삼이 불도를 탄압한 때문이라 하였다. 클린턴 황제가 김대중을 국왕에 봉했다.

김대중은 국왕이 되어 다시 전두환과 노태우를 상왕으로 복위시켰다.

이때 전두환은 김영삼이 모든 재물을 빼앗아 전 재산이라고는 29만원 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덕망이 높아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도 많은 이들이 흠모하여 찿아왔다. 하루는 대비 이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였다.

“찿아오는 객은 많은데 지금 있는 돈이라고는 29만원 뿐이라 세뱃돈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 하면 좋겠사옵니까?”

전두환이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객이 오는대로 세뱃돈을 듬뿍 주어 보내도록 하오.”

대비 이씨가 반신 반의하며 손님이 오는 대로 출금하여 세뱃돈을 주었는데 통장에는 여전히 29만원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니 더욱 더 전두환의 이름이 높아졌다.

2007년 3월 8일 목요일

[美利堅史] - 테네시공 엘 고어 世家

테네시공 엘 고어는 황도(皇都) 화성돈 사람으로 트루먼 4년에 태어났다.

고어의 부친 앨버트 시니어는 덕망이 높아 루즈벨트 황제가 테네시 후에 봉하였다.

아이젠하워 원년, 테네시주 백성들이 앨버트 시니어를 거듭 칭송하니 황제가 이를 듣고 앨버트 시니어의 작위를 높여 테네시 공으로 봉하였다.

고어는 장성하여 하버드 서원에서 수학하였다. 고어는 이때 토미 리 존스라는 선비를 만났는데 존스는 뒤에 서부로 가서 광대가 되었다고 전한다.

닉슨 원년, 고어는 군졸이 되었다. 처음 고어가 군졸이 되겠다 하니 많은 이들이 이를 만류하였다.

“어찌 제후 집안의 자제로서 일개 군졸이 되려 하는가?”

고어는 만류하는 벗들에게 이렇게 답하였다.

“군역이야 말로 신하의 도리 중 으뜸이거늘 어찌 천하다 하는가?”

닉슨 2년, 고어가 애치슨(Aitcheson)씨를 정실로 맞았다.

지미카터 원년, 황제가 고어를 테네시 후에 봉하였다.

레이건 5년, 황제가 고어의 작위를 높여 테네시 공으로 봉하였다.

조지 부시 4년, 여러 제후들이 아칸소 공 클린턴의 인품이 훌륭하다 하여 황제에게 클린턴에게 양위할 것을 상주하였다. 마침내 황제가 클린턴에게 양위하였다.

클린턴 원년, 황제가 고어를 승상으로 삼았다.

고어는 승상이 되자 상주하여 관리와 군졸의 수를 줄이자고 하였다. 이에 황제가 이를 옳게 여겨 관리와 군졸들을 줄이니 많은 관리와 군졸들이 고어를 원망하였다.

클린턴 원년, 묵서가 국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묵서가는 땅은 넓으나 그 백성들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때문에 묵서가는 항상 더 많은 하사품을 원하였다.

고어가 묵서가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황제에게 묵서가가 조공하는 것을 제한하지 말 것을 간하였다. 이때 로스 페로라는 부호가 상주하여 묵서가가 조공하는 것을 계속 옛 법도에 따르자 하였다.

“천조의 물산은 풍부하여 부족함이 없으니 묵서가 같은 오랑캐의 조공을 더 받을 이유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황제가 고어의 말을 옳게 여겨 묵서가가 마음껏 조공하게 하였다.

고어는 본시 아비를 닮아 덕이 있고 지혜로웠으나 승상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으니 마침내 본래의 덕을 잃고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클린턴 8년, 황제가 승상 고어에게 양위 하고자 여러 제후들에게 뜻을 물었다. 그러나 많은 제후들이 고어가 교만하고 덕이 없다 하여 고어에게 양위하지 말 것을 간하였다. 여러 제후들이 선황제 부시 시니어의 장자 부시 주니어를 추대하니 마침내 황제도 부시 주니어에게 양위 하였다.

고어는 평소 자신이 부시 주니어보다 덕망있고 학식도 높다고 자부하였으나 황제가 부시에게 양위하자 크게 상심하여 마침내 실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고어는 실성한 채 천하를 방랑하며 천하의 얼음이 모두 녹아 재액이 닥친다며 외치고 다녔다. 평소 고어의 학식을 사모하던 많은 선비들 중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2006년 4월 30일 일요일

[美利堅史] - 도널드 럼즈펠드 世家 (재탕)

럼즈펠드(Donald H. Rumsfeld)는 일리노이주 사람으로 그의 조부는 덕국사람이라 전한다.

장성하여 프린스턴 서원에서 학업을 닦았는데 그 학문이 깊고 문장이 날카로워 모두가 큰 인물이라 칭찬하였다.

럼즈펠드는 학업을 마치고 수군의 군관이 되었는데 그때가 아이젠하워 2년이다.

아이젠하워 5년, 럼즈펠드는 군역을 마치고 조정에 출사하였다. 럼즈펠드의 인물됨이 강직하고 뜻이 고상하니 많은 사람이 흠모하였다.

케네디 2년, 일리노이 백성들이 럼즈펠드의 덕을 흠모하니 천자가 럼즈펠드를 일리노이 후(侯)에 봉했다.

럼즈펠드는 덕망이 높아 백성들이 우러르니 존슨 황제도 작위를 거듭 내려 그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

닉슨 원년, 천자가 럼즈펠드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의랑(議郞)으로 삼았다.

닉슨 5년, 천자가 럼즈펠드를 구라파 칙사(U.S Ambassador to the NATO)로 삼았다. 럼즈펠드가 칙사가 되어 덕국에 가니 그가 가는 길 마다 많은 덕국인들이 나와 엎드려 인사하였다.

"우리같은 번방에서 천자의 사신이 났으니 이 어찌 아니 기쁘리오?"

이때 닉슨 황제가 부덕하여 승상 포드가 천자가 되었다.

포드황제는 평소 럼즈펠드의 학식과 인품을 흠모하여 즉위하자 럼즈펠드를 상서령(Whitehouse Chief of Staff)으로 삼았다.

럼즈펠드가 상서령이 되던 때 조정에는 간악한 무리가 넘쳤고 무리중에 그릇된 도를 따른 자가 많았다.

키신저는 닉슨 황제 때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키신저가 천자의 성총을 흐려 여러 제후들을 제어하지 못하니 천자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노서아 왕이 심히 교만하여 참람되이 천자의 의복과 수레를 사용하였고 그 언행이 심히 방자하였다.
뜻 있는 신하들이 이를 분하게 여겼으나 오히려 키신저는 노서아왕을 두둔하였다.

"이제 천하가 화평하여 한 가족과 같은데 어찌 노서아를 핍박하려 하는가?"

럼즈펠드는 상서령이 되어 천자의 권위를 세우는데 힘을 다하였다. 키신저는 교만하여 마음대로 백악궁을 드나들며 천자를 알현했다.
럼즈펠드는 키신저가 천자 앞에서 망령된 말을 담을때 마다 꾸짖어 물리치니 키신저가 이를 심히 분하게 여겼다.

포드 2년. 황제가 럼즈펠드를 태위에 임명하였다.

이때 천병은 10년간 남만과 싸워 토벌하지 못하니 그 위세가 꺾여 여러 제후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럼즈펠드는 태위가 되어 군사를 조련하고 각종 병장기를 날카롭게 하니 다시 천병의 위엄이 서게 되었다.

레이건 황제도 럼즈펠드를 중용하여 많은 관직을 내렸다.

레이건 4년, 럼즈펠드는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럼즈펠드가 관직에서 물러나니 많은 선비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들어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때, 레이건 황제는 군사를 조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다시 천병의 위엄이 천하에 떨쳐지고 제후왕들도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 하여 함부로 망동하지 않았다.
드디어 노서아왕 고르바초프도 복속할 뜻을 전하니 천하가 태평하였다.

레이건 8년, 천자가 승상 부시에게 양위했다.

부시 황제도 상황의 뜻을 받아 천자국의 위엄을 세우는 데 힘썼다. 이때 함부로 망동하여 군사를 일으킨 의랍극(依拉克)왕 후세인을 토벌하여 천병의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

그러나 클린턴이 제위에 오르니 다시금 천하가 어지러워 졌다.

클린턴은 품행이 방자하고 음란함이 극에 달하여 궁에서 궁녀를 희롱하고 음탕한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에 작은 오랑캐들이 다시금 준동하니 천하가 어지러웠고 의랍극왕 후세인도 다시금 교만한 마음을 품었다.

럼즈펠드가 수차례 상소를 올려 후세인을 토벌할 것을 간하였으나 천자는 이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또한 이때 홍건적 수괴 김정일이 군사의 위용을 자랑하며 방자함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클린턴 황제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 하니 다시금 제후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부시 주니어가 제위에 오른 뒤 럼즈펠드를 다시금 태위에 명하였다.

럼즈펠드는 먼저 천자에 간하여 후세인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키니 천병뿐 아니라 충순한 영길리 국왕도 군사를 보내었다.

후세인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대적했으나 마침내 천병에 사로잡혀 결박당하는 몸이 되었다.

이리하여 홍건적 수괴 김정일도 럼즈펠드를 두려워 하여 함부로 준동을 하지 못하게 되니 다시금 천하가 태평해 졌다.

2006년 4월 29일 토요일

[美理堅史] - 平和王 문선명 世家

문선명은 본시 한국 사람으로 우드로 윌슨 8년 태어났다.

문선명은 어려서부터 천주를 섬겨 그 믿음이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트루먼 원년 8월, 노서아(露西亞)왕 스탈린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왜국을 토벌했다. 이에 천자가 스탈린의 노고를 위로하며 한국의 절반을 봉읍으로 하사했다.

노서아는 사교가 성행한 나라로 그 왕 스탈린도 본시 홍건적의 무리에 속해있었다. 노서아 군사와 함께 홍건적이 들어왔는데 홍건적의 수령 김일성은 노서아 왕의 위세를 빌어 천주를 섬기는 백성들을 핍박했다.

이때 문선명도 도적들에 잡혀 노역을 하게 됐는데 도적들이 핍박할 때 마다 천주의 은혜를 입어 터럭하나 다치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도적들이 문선명을 핍박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해를 입히지 못하니 크게 두려워 하며 말하였다.

"이자는 범상한 인물이 아니로다!"

트루먼 6년, 한국의 홍건적이 난을 일으켰다. 이때 문선명은 천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트루먼 7년, 문선명이 천주를 영접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선명은 반공(反共)의 큰이치를 깨달아 도를 닦는 근본으로 삼았다.

아이젠하워 2년, 문선명이 서울에서 통일교회를 만들고 전도하매 소인배들의 핍박을 받았다. 한국에서 천주를 섬긴다 자처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하나같이 어리석어 그 도의 심오함을 열에 하나도 깨치지 못하였다.

문선명은 어리석은 자들을 깨쳐 반공의 이치를 깨닫게 하려 힘썼으나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크게 한탄하였다.

"하늘아래 내 뜻이 받아질 곳이 어디인가!"

마침내 한국같은 번방에서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천자국에 나아가기를 소망하였다.

존슨 3년, 문선명이 식솔을 이끌고 미리견에 도착했다.

이때 미리견은 백성들의 믿음이 박하여 천주를 섬기는 아름다운 기풍이 사라져가고 음란한 풍속이 성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어리석은 백성가운데 사교에 빠져 마르크스, 레닌 등 잡스런 귀신을 섬기는 자도 나타났다.

문선명이 이를 보고 크게 한탄하며 땅에 떨어진 믿음을 일으켜 세우기로 결심했다.

문선명이 힘을 다하여 반공의 이치를 강론하고 미풍양속을 일으킬 것을 권하니 갈수록 그를 따르는 무리가 늘어났다.

닉슨 황제가 문선명의 선행을 듣고 백악궁으로 불러 반공의 이치와 인의예지에 대해 물었는데 선명이 대답함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문선명의 고상함에 탄복하였다.

"아. 짐이 어리석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었는데 이제 선생을 만나 반공의 이치를 깨치니 답답한 가슴이 후련하오!"

이에 문선명이 여러 제후와 대소신료들에게 도를 강론하게 되었다. 많은 제후들이 문선명에게 감복하여 마음으로 우러르게 되었다. 천자가 문선명을 "평화왕(King of the Peace)"에 봉하니 마침내 문선명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닉슨 이후 여러 천자들이 문선명의 지혜를 마음속으로 흠모하니 레이건, 상황(上皇) 부시 시니어 등이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