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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1일 화요일

[번역글] 미국방부를 갉아먹은 비행기(The Jet That Ate the Pentagon)

F-35 계획은 이미 오래전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소비하며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제 F-35 계획을 취소하자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지난 4월 26일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 실린 휠러Winslow Wheeler의글, 미국방부를 갉아먹은 비행기(The Jet That Ate the Pentagon) 또한 이 계획의 중단을 촉구하는 목소리 중 하나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1월에 번역했던 “어째서 파네타의 국방부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가?”와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윈슬로 휠러

미국은 차세대, 즉 5세대의 공대공, 공대지 전투항공기에 대한 옹호의 목소리에 떠밀려 F-35 통합타격전투기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F-35는 레이더에 거의 포착되지 않으며 어떠한 미래의 전장도 장악할 수 있다고 선전되면서 미공군과 해군, 해병대와 9개국에 달하는 해외 동맹국이 보유한 대부분의 전투용항공기를 대체하여 향후 55년간 일선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소요된 이 계획이 재난에 빠졌다는 것은 지금 모두가 알고 있다.

4월에 미국방부는 F-35의 도입비용에 2억8900만 달러를 더 추가했는데 이것은 계속된 비용 증가 중 가장 최근의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은 미국방부의 국방조달계획 중 38%라는 어처구니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게다가 그 비용은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F-35 계획의 문제점은 각 정당의 지도급 인사들이 미국방부에 지출 삭감을 요청하기 위해서 요청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데, 하원의 프랭크Barney Frank(민주당, 메사추세츠) 의원, 상원의 코번Tom Coburn(공화당, 오클라호마) 의원, 오바마 대통령의 재정 책임과 개혁에 관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Fiscal Responsibility and Reform, 그리고 상원의 도미니치Pete Domenici(공화당, 뉴멕시코) 의원과 의회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 및 대통령실 행정관리예산국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의 국장을 지낸 리블린Alice Rivlin 등의 예산전문가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미국방부의 모든 계획에서 가장 기본적인 3대 요소인 비용, 일정, 그리고 성능의 측면에서 F-35 계획은 근본적인 문제를 보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심각해지고 있다. 가장 먼저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엄격한 국방비용지출을 이야기 하는 상황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인 비용문제를 살펴보면 F-35는 말그대로 용납될 수가 없다. 원래 이 비행기는 비용절감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지난 10년간 심각한 비용 상승으로 계획이 몸살을 앓아왔다. 지난해 미국방부의 수뇌부는 의회에서 획득비용이 또다시 16%나느 상승해서 2,457대를 획득하는데 3283억달러에서 3794억 달러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걱정을 마시라, 국방부에서는 비용증가를 억제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올해 2월 조달비용은 또다시 4%가 증가해 3957억 달러가 되었고 4월에도 또다시 뛰어올랐다. 비용증가가 여기서 멈출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연방회계국의 보고에 따르면 시험계획은 이제 겨우 20% 완료되었을 뿐이며 더 심각한 시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정리해보면 이 계획의 비용은 2001년 처음 예상했던 2265억달러에서 75%나 증가했는데 원래의 계획은 2,866대를 도입하는 것 이었다.

초기 시험이 완료되면 2019년 이전까지 수백대의 F-35가 생산될 것이다. 그 이후에 발견될 피치 못할 결함을 수정하기 위한 추가 비용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시험에 사용된 비용 5억3400만 달러보다 많을 것은 확실하다. 총 대당계획비용은 현재 F-35 한대에 1억6100만달러에 달하는데 이것도 단지 일시적인 잠정에 불과하다. 새로운 예산 제한이 국방부에 타격을 끼치게 될 2013년 초까지 예상되는 또다른 비용상승을 감안하면 F-35는 더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도입 대수가 줄어들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대당 비용도 더 늘어날 것이다.

비용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도록 하자. F-35의 비용은 위에서 언급한 3957억 달러보다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이것은 순수하게 현재 기준에서 도입비용만을 예측한 것이지 F-35의 전체 운용에 소요될 비용은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현재 예상치로는 운영과 지원에 1조1천억 달러가 소요될 것이며 도입비용을 합하면 총 1조5천억 달러에 달할 것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연간 GDP보다도 더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조차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다. F-35는 F-16을 운영하는 것 보다 단지 42% 정도만 더 비쌀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지만 F-35는 훨씬 복잡한 기종이다. F-35를 제외한 다른 “제5세대” 항공기로서 역시 같은 회사가 제작한 F-22는 몇몇 측면에서는 F-35 보다 덜 복잡하지만 2010년 기준으로 시간당 운영비용이 F-16의 세배에 달했다. 아주 보수적으로 추산하더라도 F-35의 운영 및 지원비용은 F-16의 두배는 될 것이다.

F-35의 가격은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이 되었지만 오직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바로 위로! F-35는 비싸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일정까지 초과했다. 최초의 계획에서는 F-35의 초도물량이 2010년까지는 전력화 되도록 되어있었다. 그 다음에는 첫 배치를 2012년으로 늦췄다. 가장 최근 군에서는 배치 시기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청문회에서 비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새로운 목표는 2019년이다. 거의 10년이나 늦춰진 것이다.

F-35의 성능이 압도적이라면 비용 초과와 시간지연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 설사 F-35가 초기에 제시된 성능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엄청나게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그 성능 조차 내지 못 할 것이다. F-35가 그저그런 성능을 낼것이라는 점은 왜 이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한동안 획득할 수 없을 것인지를 말해준다.

필자는 F-16, A-10과 같은 매우 성공적인 항공기의 개발을 담당했던 이들을 포함한 항공기 전문가들과 국방부에서 수십년간 조달분야의 경험을 쌓고 F-35 계획의 초기 단계를 직접 지켜보았던 조달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눈 결과 F-35의 문제는 근본적인 단계(very DNA)부터 예정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F-35의 기원은 1980년대 말, 약삭빠른 혁신으로 과도한 명성을 얻었던 국방부 산하기관인 방위고등연구기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에 서 비롯되었다. 이 계획은 STOVL , 즉 초단거리이륙 및 수직착륙 능력을 갖추고 초음속으로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에 대한 제안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기종에 대한 요구사항으로는 짧고 뭉툭하며 단발 엔진을 가진 기체와 날렵하며 긴, 그리고 일반적으로 쌍발엔진이 가진 강력한 추력을 가진 기체가 동시에 제기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기 미국방부는 이미 절충적인 설계 개념에다가 이 기종이 제공전투기는 물론 폭격도 할 수 있는 다목적 항공기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추가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만들었다. 이 요구사항은 융통성과 경량화, 그리고 더 많은 탑재량 사이의 절충점을 더 맞추기 어렵게 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관료들은 ‘스텔스’ 기능을 추가해서 공기역학적인 요구사항과 유지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레이더 반사를 낮추는 표면 코팅이 더해졌다. 또한 탑재하는 미사일과 폭탄의 레이더 탐지를 피하기 위해서 기본 중량과 항력을 늘리는 두개의 무장창을 추가했다. 최종적으로 국방부는 각군이 공동으로 운용하도록 하여 공군, 해병대, 그리고 해군의 크게 다른, 게다가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절충을 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역시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이 계획을 옹호하는 집단은 매우 “병행적인” 도입 전략을 고안했다. 이것은 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수백대의 F-35를 생산하고, 재정 및 정치적인 뒷받침을 받도록 하는 것 이었다.

이 기괴하기 짝이없는 가망없는 계획은 이미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시험비행의 80%가 아직 남아있다. 날아다니는 피아노와 같은, F-35는 공대공 모드에서는 F-16의 민첩성을 따라가지 못하며 지상공격 모드에서는 F-15E의 작전범위와 장착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심지어 교전중인 지상부대에 대한 저고도 근접항공지원 임무에서는 A-10과도 비교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더 끔찍한 것은 F-35는 복잡해서 정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즉시 사용하기에 제약이 많다보니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혹은 임무만큼 중요한 조종사의 훈련을 위해 빈번하게 출동할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F-35와 가장 비슷한 항공기인 F-22의 경우 완전히 운용가능한 상태에서 한달에 겨우 평균 15시간을 비행할 수 있을 뿐이다.(F-22는 2011년에 거의 5개월간 비행을 못했기 때문에 비행시간은 훨씬 줄었다.)

이러한 평범한 성능은 F-35가 가진 “5세대”의 특징으로 가장 두드러진 “스텔스” 기능으로도 상쇄할 수가 없다. 흔히 “스텔스”는 레이더에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이것은 특정 각도에서 몇몇 레이더의 탐지 거리를 제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달리말하면 일부 구식 기종을 포함한 몇몇 레이더는 “스텔스”특성을 가진 항공기를 꽤 먼거리에서 탐지해낼 수 있으며 심지어 민감한 레이더는 F-35를 특정 각도에서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점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례는 1999년 코소보 전쟁에서 일어났는데 이 당시 1960년대의 구식 소련 레이더와 미사일이 “스텔스기”인 F-117을 한 대 격추했으며 또 다른 한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결론은 이렇다. F- 35는 옹호하는 집단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엄청나지 않다. F-35의 성능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며 몇몇 측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점은 설계와 합쳐저서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고칠수도 없는 수준이 되었다.

파네타 국방부장관과 미국의 각 군, 그리고 의화가 사실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왔다. F-35의 성능은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그저 그런 수준이며 이 계획은 하드웨어의 변경이나 예산 통제 같은 것을 결합한다고 하더라도 바로잡을 수가 없다. F-35에 대해 취해야 할 단 한가지 조치는 바로 이것이다. 때려치우는 것이다(Junk it). 미국의 공군과 해군, 해병대 항공대는 훨씬 나은 비행기를 가질 자격이 있으며 납세자들은 훨씬 더 싼 비행기를 가질 자격이 있다. 쓰레기통이 앞에 있다.

F-35 계획은 어떻게 될까요? 매몰비용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계속 가게 될지, 아니면 미군 역사상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 조달사례로서 역사에 남을지 궁금하군요.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한국전쟁 이전 미육군의 기갑전력 증강계획

2차대전이 끝난 뒤 미군은 대규모의 동원해제에 들어갑니다. 국무부와 군부는 동원해제가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으며 특히 국무부장관 번즈James F. Byrnes는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 수립된 동원해제계획은 예정에 맞춰 시행되었습니다. 1946년 초가 되면 동원해제가 당초 예측했던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수립한 계획에서는 동원해제를 실시하더라도 월간 50,000명의 신병을 보충해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월간 37,000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원해제는 계획대로 시행되어 병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각 군은 전후처리와 소련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대비해 동원해제를 최대한 늦춰보려 했으나 미국 국내의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신속한 귀국을 희망하는 병사들의 격렬한 요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소련이 새로운 위협이란 것은 정치 지도층과 군부에서나 인식할 수 있었을 뿐 일선에서 연합군으로 싸운 병사들이 깨닫기는 어려운 것 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1월 8일 성명을 발표해 동원해제가 신속히 이루어 질 것을 천명하게 됩니다.1) 미 육군의 동원해제는 모든 징집병을 전역시킨 1947년 6월 30일 완료됩니다.2) 1945년에서 1947년 까지 미국 각 군의 병력이 감소한 추이는 아래와 같습니다.3)

표1. 미군의 병력변화(1945~1947)
1945. 6. 30
1946. 6. 30
1947. 6. 30
육 군
5,984,114
1,434,175
683,837
육군항공대
2,282,259
455,515
305,827
해 군
3,377,840
951,930
477,384
해병대
476,709
155,592
92,222
총 계
12,120,922
2,997,212
1,559,270


육군의 대대적 감축은 기갑부대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의 기갑은 제도상 정식 병과도 아니어서 그 위치가 매우 애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쟁부는 2차대전 중 경험을 쌓은 기갑장교들이 원래 병과로 복귀해 그 경험을 잃어버리는 것을 우려하여 1947년 부로 기병병과로 전환하였고 기병병과는 1949년 기갑기병Armored Cavalry로 개칭됩니다. 결국 1950년 육군조직법Army Organization Act에 따라 기갑병과가 정식 병과로 격상되긴 합니다만 이러한 사례는 전후 미육군에서 기갑병과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동원해제에 따라 대부분의 기갑사단이 해체되어 1948년 중순에는 제2기갑사단만이 현역 사단으로 남게되었고 기존의 전차대대 중 상당수가 1946년 7월 1일자로 경비연대Constabulary Regiments에 배속된 경비기병중대Constabulary Squadrons으 로 개편되어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M-26, M-24와 같은 신형장비의 도입으로 기갑병과는 유지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1944년에 M-4를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데 3천만 달러가 소요되었는데 1950년에 M-26을 장비한 기갑사단을 편성하는 데는 2억 달러가 소요되는 실정이었습니다.4)

그렇지만 소련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다시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기갑전력이 다시 강화되게 됩니다. 유일한 현역기갑사단인 제2기갑사단의 강화와 함께 제3기갑기병연대가 신규로 편성되었습니다. 또한 유럽에 주둔하고 있던 3개의 경비여단을 기갑기병연대로 개편했습니다.5) 전차대대의 숫자는 다시 회복세로 돌아서 1946년에 12개 대대까지 줄어들었던 것이 1950년에는 64개 대대까지 확대되었습니다.6)

하지만 예산 증액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대적인 병력 증강이나 신규장비 도입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1948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641,000명으로 증강하기 위해 96억4700만 달러의 국방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의회는 이를 기각하고 87억5100만 달러만을 승인했습니다. 결국 1948년 회계연도의 병력 증강은 당초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948년 2월 18일 합동참모본부의 합동참모국장 그런터Alfred M. Gruenther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군병력 부족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에서 그런터 장군은 육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한 상태이며 추세가 유지되면 1948년 말 까지 165,000명의 병력이 부족해 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7) 트루먼 대통령은 1949년 회계연도에 총병력을 1,734,000명으로 증강할 것을 결정하고 30억 달러의 추가예산을 신청하기로 결심합니다. 이 계획안은 육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8) 국방부장관 포레스탈은 1948년 3월 25일에 이 추가예산안을 상하원에 제출했는데 이에 따르면 각 군의 증강 내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9)

표2. 미국방부가 1948년 3월 25일 상하원에 제출한 병력 증강계획
1948. 3. 1 병력
증강 이후 병력
증강 규모
육 군
542,000
782,000
240,000
해 군
397,000
460,000
63,000
해병대
81,000
92,000
11,000
공 군
364,500
400,000
35,500
총 계
1,384,500
1,734,000
349,500


그런데 잘 아시다 시피 육해공군은 예산 증액의 기회가 오자 당초 합동참모본부가 구상한 것 이상의 병력과 장비 증가를 요구합니다. 특히 공군이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70개 비행단 계획과 해군의 주요 전투함 384척 계획은 끝내 나중에는 제독의 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지요. 육군도 당초 국방부가 제시한 782,000명 보다 더 많은 837,000명의 병력과 12개 현역사단, 13개의 완편 주방위군사단, 25개의 예비사단을 요구합니다. 각 군의 요구를 모두 반영한 예산은 당초 계획안 보다 90억 달러 늘어난 것으로 이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30억 달러를 세배 초과한 것 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 이었고 결국 합참이 포레스탈 장관에게 35억달러로 약간 늘어난 예산안을 제시하여 간신히 균형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4월 21일 이 방안을 승인합니다. 그러나 재무부가 국방예산의 급격한 증가를 경고하면서 추가예산 신청은 31억5900만 달러로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트루먼 행정부가 1949년도 국방예산으로 신청한 금액은 129억6200만 달러가 됩니다. 그러나 상하원은 이보다 더 많은 국방예산을 배정해 최종적으로 승인된 1949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은 139억4100달러가 됩니다. 이 중 육군에 배정된 액수는 42억 1700만 달러였습니다.10)

새 예산안은 800대의 전차를 신규로 도입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11) 새 예산안에 따라 1949년 6월에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이 작성됩니다. 전차 생산 5개년 계획은 76mm포 탑재전차 T-41(M-41)과 90mm포 탑재전차 T-42, 그리고 120mm포 탑재전차 T-43(M-103) 등 세 종류의 신형전차를 생산하여 소련의 전차개발에 대응하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작성된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2)(도표에는 6개년도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서 5개년 계획으로 적고 있으므로 그에 따릅니다.)

표3-1.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생산대수(1949년 6월 작성)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31
340
100
471
1953
240
240
480
1954
240
240
480
1955
240
240
480
총 계
340
1060
820
2,220


표3-2. 전차생산 5개년 계획의 소요비용(1949년 6월 작성,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7.0
85.1
35.0
127.0
1953
48.0
84.0
132.0
1954
48.0
72.0
120.0
1955
48.0
72.0
120.0
총 계
92.3
236.6
275.1
604.0


1949 년도의 계획은 예산상의 제약으로 단지 전차 생산 기술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아무리 평시라지만 2차대전 직후의 미국이 1년에 전차를 고작 백대 단위로 만든다니!!!) 실제로 미 육군에서는 이 정도의 생산계획으로는 전시동원에 필요한 소요는 물론 현재 유지하고 있는 전력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13) 이 시기 미육군 기갑사단의 전차 대수는 373대였습니다.14) 1년에 중형전차를 240대 생산하는 것으로는 기갑사단 하나도 장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 입니다.

또한 미국의 대소작전 계획이 방어적인 성격에서 적극적인 반격에 초점을 맞추면서 육군, 특히 기갑전력의 중요성도 강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9년 12월 8일 승인된 작전계획 오프태클Offtackle은 반격작전에 미군 41개 사단을 투입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를 해방한 이후의 전과확대 단계에서는 기계화부대와 공수부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15) 새로운 전쟁계획과 NATO의 결성은 미육군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상정한 이상 기갑전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국방예산을 작성하면서 정책과 전쟁계획을 반영하여 1949년 회계연도 보다 병력 규모를 더 증강했습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1950년 회계연도 내로 육군의 경우 현역 12개사단, 주방위군 34개 사단, 예비군 25개 사단을, 해군은 현역함 993척과 예비함 1,657척, 해병대 2개 사단과 해병항공단 2개, 공군은 70개 항공단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예산을 작성했습니다. 이 예산안에 따른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계획에 따른 예산은 3백억 달러에 달했습니다.16)

표4.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1950년 회계연도 예산에 따른 병력규모
현 역
예비군 및 주방위군
육 군
947,000
1,137,000
해 군
519,196
1,555,000
해병대
104,075
165,838
공 군
502,000
140,500
총 계
2,072,271
2,998,338


3백억 달러는 1949년 회계연도에 의회가 승인한 국방예산의 두배를 훨씬 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었습니다. 결국 포레스탈 장관의 지시에 따라 144억 달러로 제한되었고 최종적으로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한 액수는 3군에 133억9900만 달러, 총 142억4000만 달러였습니다. 이 예산안은 1949년 1월 10일 의회에 제출됩니다. 의회는 3군에 배정된 예산은 139억1200만 달러로 증액했으나 육군과 해군의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공군만 8억 달러 가까이 증액해 버립니다. 육군 예산은 트루먼 대통령이 제출한 안에서 44억9800만 달러였으나 의회에 의해 승인된 액수는 44억2000만 달러였습니다.17)

1950 년에 이르면 미국 기갑부대는 부대의 숫자는 증가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신형 전차 도입의 지연과 기존 전차의 유지정비의 미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직전 미육군이 보유한 전차를 보면 M-24의 경우 가동가능한 차량이 900대인 반면 가동불능 상태인 차량이 2,557대에 달했고 M4A3E8은 가동 가능한 차량이 1,826대, 가동불능의 차량이 1,376대에 달했습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신형전차 M-46은 319대에 불과했고 여기에 M-26 800여대와 1950년 회계연도 예산으로 M-46으로 개량될 M-26이 1,215대 있었습니다.18) 1948년 이후 국방예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2차대전 직후의 급격한 감축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것 입니다.

한편 미육군은 새로운 안보정책기조와 전쟁계획에 맞춰 전차생산계획을 재검토 합니다. 미육군 기갑위원회Army Armored Panel은 1950년 5월 31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육군동원계획 I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연간 2,072대의 전차를 생산해야 하며 편제되어 있는 부대의 수요만을 고려하더라도 연간 1,680대를 생산해야 한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이에 따른 전차 생산계획은 다음과 같았습니다.19)

표5-1.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1950. 5. 31)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109
109
1951
200
200
1952
240
100
125
465
1953
240
960
240
1,440
1954
240
1,200
240
1,680
1955
240
1,200
240
1,680
1956
240
1,200
240
1,680
1957
240
1,200
240
1,680
1958
240
1,200
240
1,680
1959
240
1,200
240
1,680
총 계
2,229
8,260
1,805
12,294


표5-2. 육군 기갑위원회가 작성한 전차생산계획 소요예산(1950. 5. 31 단위 백만달러)
회계연도
T-41
T-42
T-43
총 계
1950
40.3
40.3
1951
45.0
7.5
12.1
64.6
1952
48.0
27.5
43.8
119.3
1953
42.0
187.2
84.0
313.2
1954
36.0
194.4
72.0
302.4
1955
36.0
194.4
72.0
302.4
1956
36.0
194.4
60.0
290.4
1957
36.0
194.4
60.0
290.4
1958
36.0
194.4
60.0
290.4
1959
36.0
194.4
60.0
290.4
총 계
391.3
1388.6
523.9
2303.8


이 보고서는 육군이 추진한 12개 현역 사단 기반의 육군에 포함될 기갑전력을 최소한 기갑사단 2개, (경)기갑기병연대 1개, 기갑기병집단 1개, 수륙양용전차대대 1개로 유지하고 보병과 공수사단에도 기갑전력을 편제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습니다.20)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신형 전차의 확보가 시급해 지자 1952년 부터 양산에 들어갈 T-42는 취소되고 M-46에 T-42의 포탑을 결합한 M-47이 급거 양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M-47은 1951년 6월 부터 1953년 11월 까지 총 8,576대가 생산됩니다.21)  이것은 1950년 미육군 기갑위원회가 제시한 전차생산 10개년 계획의 T-42 생산계획을 압도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냉전기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은 미육군 기갑전력의 양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기 됩니다.



1) James F. Schnabel,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5~1947, (USGPO, 1996), pp.101~102
2) James F. Schnabel, Ibid., p.104
3) James F. Schnabel, Ibid., p.109
4) James A. Sawicki, Tank Battalions of the U.S.Army, (Wyvern Publications, 1983), p.34
5) Philip L. Bolte, “Post-World War II and Korea : Paying for Unpreparedness”,  George F. Hofmann and Donn A. Starry(ed), Camp Colt to Desert Storm : The History of U.S. Armored Forces, (1999,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p.218
6) James A. Sawicki, Ibid., p.34
7) Kenneth W. Condit,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1947~1949, (USGPO, 1996), pp.99~100
8) Kenneth W. Condit, Ibid., pp.101~102
9) Kenneth W. Condit, Ibid., p.102
10) Kenneth W. Condit, Ibid., pp.107~111
11) Philip L. Bolte, Ibid., p.220
12)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RG319,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 of Staff for Intelligence, Top Secret Correspondence, 1914~62, Entry 4, 1950, Box 13, p.2
13)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2
14) James A. Sawicki, Ibid., p.34
15) Steven T. Ross, American War Plans 1945~1950, (Frank Cass, 1996), pp.118~119; Kenneth W. Condit, Ibid., pp.159~163
16) Kenneth W. Condit, Ibid., pp.123~124
17) Kenneth W. Condit, Ibid., pp.136~137
18) Philip L. Bolte, Ibid., p.224
19)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4
20) “Preliminary Report of the Armored Panel”(1950. 5. 31), p.7
21) R. P. Hunnicutt, Patton : A History of the American Main Battle Tank. Vol.1, (Presidio, 1984), pp.5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