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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7일 일요일

[신간소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게하르트 그로스 저, 진중근 역(길찾기 2016)


독일 장교단과 그들의 군사사상은 수많은 군사사 연구자들을 사로잡는 주제입니다. 2차대전 이래로 수많은 연구자들이 전쟁 초기 독일이 승승장구한 원인은 무엇이며, 독일이 우수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패배한 원인은 무엇인가를 탐구해 왔습니다. 냉전시기에는 전쟁 초기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고 독일군의 장점에 주목하는 연구가 많았다면 1990년대 이후로는 독일군과 그 군사사상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미군의 주도하에 작전사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미국 학계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언어적 장벽 때문에 독일어권의 연구는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실패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최근 길찾기 출판사에 발행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는 이러한 90년대 이후의 경향을 반영한 독일 학계의 최신 연구성과입니다. 저자인 게하르트 그로스는 2000년대 초중반 국제 군사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에 참여해 이름을 알린 연구자로 독일의 전통 군사사상에 대한 독일 학계의 권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눈에 띄는 장점을 이야기 하는게 좋겠습니다. 영어권의 독일 작전사 연구는 대개 군사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일군사상의 기원과 한계에 천착한 미국의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 전간기 독일군 교리의 발전을 연구한 제임스 코럼(James Corum) 등이 당장 떠오르는 군요. 그런데 그로스는 군사적 측면에 더해 사회적, 정치적 측면도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군사사상의 형성을 군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인 독일 장교단의 세계관,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인 장교단의 전략적 식견 부족을 설명하는데 유용합니다. 1차 대전에서는 실패할 경우 마땅한 대안이 없는 양면전쟁을 단지 작전적인 차원에서 실행하고, 2차 대전에서도 작전적 수준의 우위만을 믿고 소련과의 전쟁에 돌입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겠군요. 이 점은 저자가 독일인이라는 데서 기인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 정치에서 독일이 우위에 서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열망, 러시아와 동유럽에 대한 인종적 멸시 등이 전쟁계획에 영향을 끼치고 결국 독일 민족국가의 파멸로 치닫게 했다는 설명은 여러 모로 설득력이 높고 교훈적입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독일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군사사상의 형성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의 시티노도 한 바 있는데, 시티노가 그 시기를 17세기 프로이센의 형성과정으로 까지 올려잡는데 비해 그로스는 독일 제국의 형성과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군사기술의 발전에서 기원을 찾는 점이 차이점 입니다. 저자는 독일 제2제국이 유럽의 정 중앙에 위치해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고 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잇따른 군사적 혁신으로 군대의 규모가 증가했기 때문에 독일 군사사상가들은 독일의 지리적 위치를 활용한 공세 중심의 군사사상을 가지게 됐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비판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근본적으로 독일 군부가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1차대전으로 귀결되는 양면전쟁이었다는 겁니다.


이 저작은 군사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집약한 서적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 처럼 게하르트 그로스는 ‘슐리펜 계획 논쟁’에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19세기 후반~1차대전 시기를 논한 5장과 6장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는 10여년에 걸친 슐리펜 계획 논쟁의 결과를 반영하여 슐리펜 계획과 소(小)몰트케의 전쟁계획을 구분하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군사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어권을 중심으로 한 외국학계에서 진행된 논쟁이 국내에 지속적으로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학설에 익숙한 분들이시라면 조금 어색함을 느끼실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슐리펜 계획 논쟁’에 대해 어느정도 설명하고 있긴 합니다만 조금 아쉽습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군과 2차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미권과 이스라엘 학계에서 독일 국방군의 전쟁 수행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자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꽤 흥미롭습니다. 이 시기의 독일군에 대한 비판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독일 군부의 전략적 식견 부족, 오직 작전이라는 군사적 수준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간 점은 영미권 군사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바 있습니다. 또한 히틀러와 독일 군부의 관계에 대한 평가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제국 시기 민군관계에 대한 서술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독일 군부가 히틀러에 대해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다가 전황의 악화에 따라 장교단의 충성에 균열이 가는 모습을 매우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 직후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 지도의 실패를 히틀러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렸던 독일 군부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히틀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특히 전략적으로 일정한  통찰력을 보유했지만 본질적으로 아마추어적인 전략가에 불과했다는 저자의 결론은 공정한 평가라고 생각이 듭니다. 독일 군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데, 최소한 1차대전 말기의 독일 군부는 새로운 작전-전술 단위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등 제한적 혁신이 있었지만 2차대전 말기에는 군사적 해결책 보다는 국가사회주의에 기반한 사상 무장에 의존하는 등 퇴행적인 면을 보였다는 것 입니다. 저자는 이점이 고질적인 전략적 시야의 부족과 결합해 독일의 철저한 패배로 이어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냉전 시기 독일군부의 작전적 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분야라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봅니다. 독일이 패권을 다투는 강대국으로서 국가전략을  수행하던 시기에 형성된 군사사상이 독일의 몰락 이후에는 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만 냉전 시기를 다룬 부분은 상대적으로 내용이 소략해 에필로그 같은 느낌을 주는게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평을 하자면, 국제정치와 군사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에게는 필독서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국내에 드물게 소개된, 독일인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 독일 군사사라는 점에서 더욱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 군사서적을 활발히 간행하고 있는 길찾기 출판사가 처음으로 발행한 학술서적인 만큼 큰 호응을 얻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2011년 9월 2일 금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Z. 테렌스 주버의 단행본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2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2

제 게으름 때문에 연재가 늘어지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에 대한 공지입니다.

처음 연재를 공지했을 때는 단행본 Der Schlieffenplan : Analysen und Dokumente에 소개된 논문 중에서 테렌스 주버의 “Der Mythos vom Schleffenplan”도 포함하기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것은 주버가 2004년 포츠담의 독일 군사사연구소Militärgeschichtliches Forschungsamt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서 발표한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래도 중복되는 내용이니 이것은 연재에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논문들은 해당 논쟁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의 “Der Moltkeplan : Modifikation des Schlieffenplans bei gleichen Zielen?”은 주버와 몸바우어의 논쟁에 포함시켜 바로 다음 연재물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로스Gerhard P. Groß의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 역시 주버와 그로스의 논쟁에 포함시킬 예정입니다.  그리고 첫번째 연재 공지에서는 포함하지 않은 논문이 한 편 있습니다. 스토츠Dieter Storz의 “‘Dieser Stellungs und Festungskrieg ist scheußlich!’ : Zu den Kämpfen in Lothringen und in den Vogesen im Sommer 1914”는 아직 주버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상태라 연재에 포함시키는 것을 보류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주버의 주요 주장 중 하나인 “슐리펜은 방어전을 구상했고 주 전장은 로렌(로트링엔)등 국경지대가 될 것이었다”와 관련된 글이니 만큼 별도로 다루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다음 글 부터는 테렌스 주버와 아니카 몸바우어의 논쟁을 다루겠습니다.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Z. 테렌스 주버의 단행본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2

이번에 소개할 책은 테렌스 주버의 2004년 작, German War Planning, 1891~1914 : Sources and Interpretations입니다.

이 책은 테렌스 주버가 슐리펜 계획과 관련된 사료들을 영어로 번역해 정리한 자료집입니다. 사료집인 만큼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연재물의 성격상 짤막하게라도 이야기는 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이 쉽게 접하실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지요.

German War Planning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을 보완하는 자료집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실린 사료들은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의 구성과 대략 비슷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German War Planning은 대략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장으로 주버의 주 사료중 하나인 디크만의 연구를 포함한 세 건의 자료가 실려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글은 역시 디크만의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2~4장 까지로 슐리펜의 전쟁계획과 관계된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장은 슐리펜의 참모부연습으로 1894년, 1901년, 1902년, 1903년의 동부참모부연습과 1904년의 서부참모부연습 등 다섯건의 자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장은 1905년 슐리펜이 실시한 워게임에 대한 논평인데 테렌스 홈즈가 “The Real Thing: A Reply to Terence Zuber’s ‘Terence Holmes Reinvents the Schlieffen Plan’”에서 지적한 것 처럼 일부 내용의 번역에 있어 논란이 있습니다. 4장은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인데 이것은 널리 알려진 자료이지요.

세 번째는 5장과 6장으로 몰트케 시기의 전쟁계획과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실제 작전 수행을 다루고 있습니다. 5장은 1908년의 서부참모부연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에는 매우 중요한 사료 두건이 있는데 바로 현존하는 1차대전 초기 독일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5군과 6군의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입 니다. 슐리펜계획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주력이었던 1군과 2군의 문서가 필요하지만 이것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만큼 5군과 6군의 문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주버는 논평을 통해 이것들이 슐리펜계획이 허구였다는 증거로 사용고 있긴 합니다만.

네 번째는 주버가 “슐리펜계획이라는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는 과정”으로 설정한 자료들입니다. 여기에는 7장과 8장이 포함됩니다. 7장은 1919년에 작성된 “1871년 부터 1914년 까지의 양면전쟁에 대한 작전개념의 발전Die Entwicklung des operativen Gedankens im Zweifrontkrieg von 1871 bis 1914”이라는 비밀연구에 대한 빌헬름 그뢰너Wihelm Groener의 논평입니다. 이 연재물의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빌헬름 그뢰너는 테렌스 주버가 ‘슐리펜계획’을 조작한 인물 중 하나로 꼽는 인물입니다. 당연히 이 자료에서 빌헬름 그뢰너는 슐리펜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주버는 이 자료가 슐리펜의 전쟁 계획에 대한 그뢰너의 이해 부족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8장은 1919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시기 독일의 전쟁계획에 대해 벌어진 논쟁에 관한 여섯편의 글을 싣고 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을 떠나서 한스 델브뤽이 독일의 전쟁수행에 대해 비판한 1919년의 글 “1914년 독일의 선전포고와 벨기에로의 진격Die deutsche Kriegserklärung 1914 und der Einmarsch in Belgien”은 독일 군사사상의 한축을 차지하는 델브뤽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글 입니다. 델브뤽의 저작인 Geschichte der Kriegskunst im Rahmen der politischen Geschichte『병법사-정치사의 범주 내에서』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긴 하지만 근대전쟁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뛰어난 군사사상가의 근대전쟁에 대한 견해를 보여주는 이 글은 따로 일독할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주버의 논쟁방식은 꽤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German War Planning, 1891~1914 : Sources and Interpretations은 대부분 전통적인 논지를 뒷받침하는 1차사료들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도록 영리하게 재배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앞으로 다루게 될 게르하르트 그로스Gerhard P. Groß의 “There Was a Schlieffen Plan: Neue Quellen”에서 새로운 사료들을 제시함에 따라 반박을 받게 됩니다만.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느릿느릿 연재되고 있는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이번에 다룰 주제는 테렌스 주버가 2002년에 발표한 단행본,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 : German War Planning, 1871~1914(Oxford University Press, 2002)입니다. 이 단행본은 논쟁의 초기 단계에서 테렌스 주버와 테렌스 홈즈의 난타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연재물을 기준으로 하면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사이에 들어가는 저작이지요. 사실 주버와 홈즈의 논쟁 중간에 나온 단행본이기 때문에 이 논쟁의 사이에 넣는게 어떨까 생각했지만 이후 논쟁이 더 큰 규모로 전개되는 시발점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별도로 구분했습니다.

앞으로 테렌스 주버의 단행본들을 다루는 글은 Z-#으로 구분하도록 하겠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Z-1

이 단행본은 주버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한 기존의 논의들을 확대보강한 것이니 만큼 보강된 논의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핵심적인 논지는 주버가 1999년 War in History에 처음으로 발표했던 논문,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에 실려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이 단행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1장 Inventing the Schlieffen Plan으로 1차대전 패배라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총참모부가 중심이 된 독일군부가 “슐리펜 계획”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 했으며 이것이 아무런 비판없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2장 Moltke’s Ostaufmarsch, 1871~1886으로 슐리펜의 전임자인 대몰트케 시기의 전쟁계획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3장 Fortresses, spies, and crisis, 1886~1890으로 19세기말 급변한 군사적 정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홈즈와의 논쟁에서 지적된 19세기말의 정치군사적 정황에 대한 부분을 대폭 보강한 것 입니다. 4장 Schlieffen’s War Plan, 1891~1905는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장 Moltke’s War Plan, 1906~1914는 소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1차대전의 패배 이후 독일 군부가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이라는 허구의 계획을 조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1차대전 종전 이후 부터 1950년대 게르하르트 리터Gerhard Ritter의 기념비적인 연구까지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1장에서는 초기 논쟁에서 총참모부 비판의 중심에 있었던 군사사가 한스 델브뤽Han Delbrück에 대한 내용을 대폭 보강해 델브뤽이 클라우제비츠를 재해석하면서 소모전 전략을 옹호하는 과정과 이를 거쳐 1차대전 패배 이후 독일의 1차대전 이전 전쟁계획을 비판하게 되는 과정을 보다 밀도 있게 기술했습니다. 델브뤽은 이 과정에서 슐리펜 이전의 대 몰트케 시기의 동부전선에 주력하는 전쟁계획을 옹호했고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에서 설명한 것 처럼 독일군 총참모부 계열의 장교들이 이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슐리펜의 전쟁계획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주버는 1장에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정설을 확립한 게르하르트 리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리터가 중세사 전공자인데다 군사사도 아닌 종교개혁을 전공한 학자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새롭게 보강된 부분 중에서는 2장이 가장 재미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버는 슐리펜 계획의 배경이라는 관점에서 대 몰트케 시기를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 몰트케의 군사적 역량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과격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 몰트케가 대 게르만주의의 신봉자로서 공격적인 전략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게르하르트 리터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슐리펜 계획을 공격적인 독일 군국주의의 발현으로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이러한 주장을 나중에 다시 별도의 단행본, The Moltke Myth: Prussian War Planning으로 정리했습니다.
주버는 2장에서 델브뤽 등이 주장한 대 몰트케의 전쟁계획, 즉 동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해 공세로 나서는 계획은 대 몰트케가 퇴임시 까지 고수한 계획이 아니라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1882년 1월 부참모장Generalquartiermeister에 임명된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의 존재입니다. 주버는 발더제의 군사적인 역량을 대 몰트케 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발더제의 임명되면서 대 몰트케가 입안했던 기존의 전쟁 계획이 대폭 수정되었다고 봅니다. 즉 대 몰트케 보다 발더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 입니다. 2장에 따르면 대 몰트케의 전쟁계획은 당시의 국제정세에 따라 변경되었으며 양면전쟁을 상정한 경우에도 1877년에는 서부전선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우는 등 고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주버에 따르면 1879년에 이르면 서부전선 대신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펼치는 계획으로 옮겨가지만 이 계획도 발더제의 등장과 함께 폐기되었습니다. 주버는 새롭게 부참모장이 된 발더제는 대 몰트케가 기존에 입안한 계획들을 대폭 수정해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는 계획으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더제나 슐리펜은 대 몰트케와 차별되는 훨씬 전문화된 장교단으로 구분함으로써 대 몰트케에 대한 군사적 재평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3장은 요새의 강화와 포병 화력 문제가 1880년대 이후 독일의 전쟁 계획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새와 전쟁계획의 문제는 이 논쟁의 초기 단계에서 테렌스 홈즈가 “The Reluctant March on Paris: A Reply to Terence Zuber’s ‘The Schlieffen Plan Reconsidered”를 통해 제기한 문제인데 주버는 3장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3장은 홈즈와의 논쟁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1880년대 이후 포병화력의 발전에 따라 독일의 국경지대 요새 시설들이 사실상 구식화 되어 방어적인 가치가 떨어진 점을 지적합니다. 주버는 이것이 독일군 내에서 서부전선에서 방어를 취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했다고 강조합니다. 몰트케가 퇴임직전 마지막으로 작성한 1888년의 부대전개계획은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동부전선에서는 내선의 이점을 활용한 방어를 취하는 것 이었다고 정리합니다. 3장에서는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중하는 계획이 이미 슐리펜의 총참모장 취임 이전에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합니다.

4장은 슐리펜이 총참모장이 된 시기의 전쟁계획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미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5장은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이 된 이후의 전쟁계획과 1차대전 초기의 작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시 5장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내용도 연재에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5장은 1차대전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만큼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계획, 특히 프랑스의 전쟁계획이 수정되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5장에서는 1차대전 직전 독일의 전쟁 계획을 지금까지 남아있는 제5군과 제6군의 부대전개명령Aufmarschanweisung에 근거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1차대전 직전 독일의 전쟁계획은 주력을 우익의 1군과 2군에 집중하는 것은 맞지만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격퇴한 뒤 반격에 나서는 것 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한 것은 슐리펜 계획의 실행이 아니라 독일군 총참모부가 벨기에가 연합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연합군이 벨기에를 방어나 공격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 이었다고 주장합니다.

6장에서는 독일 군부가 ‘슐리펜 계획’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버의 이 저작은 슐리펜 계획에 대한 군사사학계의 논쟁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대 몰트케에 대한 비판에서 잘 나타나듯 근대 유럽 군사사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야심찬 저작입니다. 주버는 이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전선을 조금씩 넓혀 나가고 이것은 논쟁을 더욱 확대시키게 됩니다.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아. 연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지금보니 거의 두달 가까이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지난 번 글에서는 로버트 폴리의 “The Real Schlieffen Plan”에 나타난 주버의 설에 대한 비판을 살펴봤습니다. 제가 지난번 글에서 밝혔던 것 처럼 “The Real Schlieffen Plan”은 주버가 사용한 핵심 사료에 대한 비판 등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 많은 흥미로운 글 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테렌스 주버는 2007년  War in History, 14-1호에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라는 논문을 기고해 재 반론을 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


  테렌스 주버는 로버트 폴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분석은 소홀히 한 채 테렌스 홈즈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비판한 뒤 본격적인 반론에 들어갑니다.

 주버가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것은 그의 핵심 사료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것 처럼 로버트 폴리는 참모부연습은 실제 작전을 반영하는 문서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버는 1차대전 초기 전역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의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예로 든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동부 참모부연습 → 탄넨베르크 전투
1904, 1905, 1906, 1908년 서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15일 제5군에 대한 명령
1897, 1899,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24일 동부전선에 대한 증원명령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가을 우치(Lodz) 방면 공세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작전은 모두 슐리펜의 기본적인 작전 계획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공세를 맏받아치는 역습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폴리는 1903년에 출간한 Alfred von Schlieffen’s Military Writings라는 저작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전쟁계획과 전략개념을 시험해 보는 수단”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가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이 슐리펜계획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고 주장한 부분도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독일육군 총참모부가 1938년 슐리펜의 동부 참모부연습 다섯개를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을때도 역시 서문에서 참모부연습이 슐리펜의 전략개념을 시험하고 작전구상을 가다듬는 것이었다고 밝힌 점도 지적합니다. 그러니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서 주장한 내용은 기존의 주장을 갑자기 180도 바꾼 것 이라는 겁니다. 또한 만약 참모부연습이 단순한 훈련 목적에 불과하다면 베를린 근처의 지역에서 실시하지 않고 최전선지역인 동프로이센과 로렌에서 실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1905년의 서부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도 상이합니다. 폴리는 이 연습에서 ‘슐리펜계획’의 기본요소가 등장한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입니다. 주버는 루덴도르프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1904, 1906, 1908년 참모부연습과 동일하게 로렌을 향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대한 역습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폴리는 이 무렵 슐리펜이 프랑스와의 일대일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는 오히려 당시의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계된 공세를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단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에만 베르덩-벨포를 잇는 요새선을 우회하여 공격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폴리와 슐리펜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리터 모두 슐리펜 시기의 군사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시에 확립한 교리는 철도망이라는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부대를 신속히 기동하고 이를 통해 적의 공세를 재빨리 맞받아치는 것 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다양한 돌발변수에 맞춰 시험해 보는 것이 바로 참모부연습의 기능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참모부연습의 기밀 등급이 낮았고 일선부대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이유로 실제 작전과 거리가 먼 ‘교육용’이라는 폴리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단순한 교육용 자료에 기밀 등급이 붙여져 일선의 각 부대에서 수년간 보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냐는 겁니다.

  참모부연습의 사료적 가치 다음으로 지적하는 것은 연구의 방법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 서 사료인용의 문제를 지적한 것을 강하게 의식한 듯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자신의 주 사료인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두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고 연구를 시작한 인물이라는 점 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이 이용한 사료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재했다고 믿었지만 그가 인용한 사료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이 두가지 점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즉 빌헬름 디크만이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한 계획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슐리펜계획의 실재여부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 논점을 슐리펜계획에 필요한 병력으로 돌립니다. 지금까지 여러번 강조했지만,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에 투입될 독일군 병력은 96개 사단인데 실제 독일군 병력은 최대 72개 사단이 한계였습니다. 주버는 이 점을 들어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독일의 심각한 병력 부족문제였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폴리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이 새로이 6개 군단을 편성한 점을 들어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병력의 부족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독일이 1914년 8월 급히 편성에 들어간 22~27예비군단은 자원한 학생등의 인력으로 편성된 것이지 사전에 계획된, 훈련된 예비병력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성한 6개 군단은 10월 중순까지도 전선에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슐리펜계획’에 따라 동원할 수 없는 부대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1차대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뒷받침하는 계획은 무엇인가? 주버는 베젤러(Hans-Hartweg von Beseler)가 1900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는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을 뿐 슐리펜이 유사한 계획을 구상했다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와 슐리펜계획의 연관성을 강조한 부분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폴리의 주장 역시 사료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폴리가 제시한 자료는 독일군 총참모부가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한 내용 정도이기 때문이란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에서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계획이 발전했다는 내용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게 주버의 논지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급속히 강화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베르덩, 에피날, 툴, 벨포르 등 핵심적인 요새들에 근대적인 방어시설이 보충되었을 뿐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상당수는 독일군의 군단급 장비인 210mm포로 쉽게 무력화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까지 우익을 확장한 원인은 프랑스군의 좌익이 메지에흐까지 확장된 것에 대한 대응조치일 뿐 ‘슐리펜계획’이나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잡담하나. 주버는 이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한 사료는 워낙에 부족해서 마치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점은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한방에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사료가 없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지난번 글에 서는 로버트 폴리의 주장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다루었습니다. 로버트 폴리의 첫 번째 글과 여기에 대한 테렌스 주버의 반론은 전초전적인 성격으로 분량도 매우 소략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반론을 접한 뒤 본격적인 반박에 들어갑니다. 이번에 다룰 글은 로버트 폴리가 2006년 War in History 13권 1호에 기고한 “The Real Schlieffen Plan”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글입니다. 로버트 폴리는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 등 근본적인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전통적인 학설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로버트 폴리의 이 글은 슐리펜 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이고 1차대전 직전 독일육군 총참모부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로버트 폴리의 재반론


1. 테렌스 주버의 사료 해석에 대한 비판

로버트 폴리는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테렌스 주버의 사료 이용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테렌스 주버가 사용한 주사료였던 빌헬름 디크만(Wilhelm Dieckmann)의 연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가 보기에 디크만의 연구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지만 치명적인 결함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슐리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인 1904~1905년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 문서가 1945년 소련군에 노획된 이후 1989년 독일에 반환될 때 까지의 시기에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누락되어 있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빌헬름 디크만이 연구를 하던 무렵 가용 가능했던 사료가 제한적이었다는 점 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지난번 글에서 슐리펜계획이 실제 전쟁계획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한 독일군 참모부출신들이 빌헬름 디크만의 일급기밀자료 접근을 의도적으로 방해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폴리는 1918~1945년 사이 독일육군의 문서고가 1차대전 시기 독일군의 모든 문서를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1918~1919년의 혼란기에 많은 사료가 파기된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1914년 이전의 문서들 중 상당수가 정보 누출을 우려해 독일군 스스로의 손에 의해 파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어서 가용한 사료가 부족했기 대문에 독일육군은 전간기 사이에 사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서 슐리펜 집안이 소장하고 있던 비망록이 입수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테렌스 주버는 슐리펜계획이 실제 작전계획이 아니라는 증거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이 슐리펜 가문이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문서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폴리의 설명을 따르게 되면 이 점이야 말로 전통적인 학설을 뒷받침 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는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를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크만의 연구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가 1890년대 중반까지의 계획, 그리고 두 번째가 1890년대 중반에서 1903년 까지의 계획,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1904년에서 1905년까지의 계획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누락되어 있지만 목차에는 제목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로버트 폴리에 따르면 세 번째 부분의 제목은 바로 “포위 계획(Der Umfassungsplan)”이었습니다. 본문은 누락되어 있지만 제목만 보더라도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이 1904년 이후 대규모 우회 포위기동을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목차의 구성이야 말로 디크만의 연구는 슐리펜이 수많은 계획 변경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군 좌익을 돌파하는 대규모 포위기동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나갔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이지요. 주버는 디크만이 전통적인 학설을 따른 이유가 모든 음모를 꾸민 참모부 출신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결과라는 해석을 하고 있지만 폴리는 이런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비판합니다.

두 번째로는 테렌스 주버가 디크만의 연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한 사료인 참모부연습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버의 기본적인 주장은 슐리펜이 1904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과 1905년에 실시한 마지막 워게임(Kriegsspiel), 그리고 소(小)몰트케가 1906년과 1908년에 실시한 참모부연습에서 슐리펜계획과 유사한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실제 전쟁계획이 아니며 슐리펜계획은 허구라는 것 입니다. 폴리는 이 주장이 일부 타당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폴리는 먼저 논쟁을 시작한 테렌스 홈즈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슐리펜의 1905년 비망록은 매우 융통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서 주버와 같은 방식으로 독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폴리는 주버가 독일군의 참모부연습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합니다. 주버는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리는 참모부연습의 주목적은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보다는 참모부 장교들의 교육훈련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폴리는 슐리펜계획에 대한 초기 연구중 하나인 헤르만 폰 쿨(Hermann von Kuhl)의 “1차대전기 독일 총참모부의 전쟁준비와 전쟁수행(Der deutsche Generalstab in Vorbereitung und Durchführung des Weltkrieges)”을 인용하여 슐리펜이 참모부연습을 특정한 작전의 연습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자유롭게 시험하려 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참모부연습이 실제 전쟁계획을 시험하는 것 이었다면 기밀등급이 최고등급인 절대기밀(Streng Geheim)로 분류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일반 기밀(Geheim)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게다가 기밀등급이 낮을 뿐 아니라 참모부연습 결과를 25개 군단사령부 및 각급 기관에 배포한 점도 지적합니다. 실제 전쟁계획이라면 적국에 유출될 위험을 무릅쓰면서 평시에 잔뜩 뿌려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독일 육군은 기밀누출을 우려해 유효기간이 지난 기밀문서의 파기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참모부연습은 파기 대상에도 속하지 않는 문서였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부대전개계획(Aufmarschpläne)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폴리는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작성하기 이전에 수립한 1905/06년도 부대전개계획만 살펴보더라도 슐리펜계획의 기본적인 요소가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1905/06년 부대전개계획 I에서는 26개 군단과 20개 예비사단을 총 8개의 야전군으로 편성하고 주력을 메츠 북쪽에 집결시켜 저지대국가들을 통해 진격시키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대전개계획 II는 동부전선에 병력을 일부 보강하고 있지만 여전히 서부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에서는 23개 군단과 16개 예비사단을 7개 야전군으로 편성해 부대전개계획 I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프랑스 북부로 진입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슐리펜은 1905/06년 부대전개계획에서 벨기에의 철도망을 장악하는것을 중요시해 5개의 기병사단이 신속히 마스강의 철교를 점령하도록 하였습니다.

폴리는 주버의 가장 큰 문제가 주사료인 디크만의 연구를 잘못 해석한데 있다고 봅니다. 이 때문에 참모부연습과 부대전개계획 같은 다른 사료들도 오독하는 연쇄작용이 일어났다는 것 입니다.


2.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문제

폴리는 사료해석의 문제 다음으로 주버의 당시 상황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 계획은 국제정세와 군사적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독일의 전쟁 계획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첫 번째로는 러일전쟁의 결과와 이것이 끼친 영향입니다. 테렌스 주버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피해로 부터 재빠르게 회복되었기 때문에 슐리펜은 결국 양면전쟁의 위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폴리는 이에 대해 앞선 논쟁에서 테렌스 홈즈가 인용한 바 있는 1905년 6월 10일에 슐리펜이 독일 수상 베른하르트 폰 뷜로우(Bernhard von Bülow)에게 보낸 편지를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슐리펜은 뷜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예상 이상으로 약하며 전쟁 결과 더 약해졌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군개혁이 성과를 거둘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슐리펜은 러시아군이 너무 취약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러시아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슐리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친것은 러시아군에 파견된 관전무관들의 보고서였습니다. 폴리는 오토 폰 라우엔슈타인(Otto von Lauenstein)이 1905년 12월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를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서 러시아인들이 나태하고 어렵고 힘든 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종적 편견에 가득찬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러시아 장교단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형편없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혹평했습니다. 라우엔슈타인은 러시아군이 이런 문제들을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다음으로 외교적 상황의 변화를 강조합니다. 1905년의 독일은 러시아를 다시 독일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슐리펜이 프랑스에 전력을 집중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리는 1906년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 정부내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를 상대로 예방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슐리펜도 예방전쟁을 강력히 지지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에 대한 예방전쟁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프랑스와의 포병전력 격차를 우려한 전쟁부 장관 아이넴(Karl von Einem)이 황제와 수상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슐리펜이 프랑스군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폴리에 따르면 슐리펜은 러일전쟁의 결과 프랑스가 러시아군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독일과 단독으로 승부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 요새 강화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수세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는 것 입니다. 프랑스가 요새를 강화하는데 맞춰 독일군도 대구경 야포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1905년 시점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프랑스군의 좌익을 노리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벨기에를 침공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이렇게 러일전쟁 이후의 정세를 고려한다면 슐리펜 계획이 작성된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폴리의 주장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소(小) 몰트케의 전쟁 계획

세번째로는 소 몰트케가 총참모장에 취임한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되는 것이 1905년 이후의 정세 변동입니다.

소 몰트케 취임 초기 독일군의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러일전쟁과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몰트케 초기의 부대전개계획은 슐리펜 말기의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폴리의 설명에 따르면 1906/07년 부대전개계획은 주력을 서부전선에 집결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한 뒤 프랑스군의 좌익으로 돌파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소몰트케는 1906/07년 계획에서 우익의 주력에 23개 현역군단과 11½개 예비군단을 배정하고 이를 7개 야전군으로 편성했습니다. 이 계획에서 각 야전군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1군(5개  예비군단)은 안트베르펜으로 진격하여 우익을 엄호, 제2군(4개 군단)은 브뤼셀 방향으로 진격, 제3군(4개 군단+1개 예비군단)은 제4군(4개 군단+3개 예비사단)과 함께 리에쥬와 나무르의 벨기에군 요새를 공격, 제5군은 지베(Givet)-스당을 잇는 선으로 진격하여 우익의 주력과 제6군과 접촉을 유지, 제6군(5개 군단)은 이 대규모 우회기동의 중심축으로 카리냥(Carignan)-롱귀용(Longuyon)을 잇는 선으로 진격, 제8군(1개 군단+4개 예비군단)은 6군을 후속하여 진격하면서 베르덩 방면에서 예상되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견제, 좌익의 제7군(3개 군단+2개 예비군단)은 프랑스군을 정면에서 견제.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정세변동과 함께 수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먼저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영향에서 빨리 회복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910년 경에는 독일군 정보당국도 러시아군의 회복을 확실하게 인식하였고 몰트케는 같은해 8월 수상이었던 베트만 홀벡(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에게 쓴 편지에서 러시아군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독일 정보당국은 러시아군이 신형 야포의 도입을 서두르면서 장교단을 교체하고 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또한 러시아군은 동원체제를 개편하여 부대동원을 보다 신속히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는 러시아가 추진하고 있는 철도계획이 완성된다면 동원개시 13일차에 유럽전선에 투입할 병력의 2/3을, 18일차에 전 병력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폴리는 이러한 상황이 소 몰트케의 전쟁계획에서 서부전선의 중요성을 더욱 더 높아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군은 단기간에 격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독일은 양면전쟁을 치루기 어렵기에 프랑스와의 승부를 더 빨리 내야 했다는 것 입니다. 소 몰트케는 프랑스는 가용한 인적자원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한차례의 결전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면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다시 돌리는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계속해서 국경지대의 요새를 강화하고 있었고 독일군의 야포 개발과 배치는 이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취약점은 여전히 좌익에 있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1912년이 되어서야 겨우 제한적인 보강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 몰트케가 이 지역에 더욱 더 관심을 기울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반면 프랑스군은 보다 강화되었고 러시아가 다시 공격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독일측은 프랑스가 수세만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부 독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좌익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동맹국이었으나 점차 외교적인 태도가 변화하고 있었고 소 몰트케는 이탈리아군으로 프랑스군 일부를 견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폴리는 결국 이러한 변화가 소 몰트케의 계획을 더욱 더 신속한 공격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소 몰트케의 1908년 계획에서 좌익의 병력은 8개 군단으로 증강되는 한편 우익의 약화와 함께 장기전에 대비해 네덜란드를 독일의 대외 창구로 삼기 위해서 네덜란드 침공은 계획에서 누락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철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된 만큼 벨기에의 철로, 특히 철교들을 안전하게 탈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 졌습니다. 주력인 제1군과 제2군을 합친 60만의 대군이 불과 12마일에 불과한 정면으로 진격해야 했으니 이 제한된 정면에 있는 철도망이 파괴된다면 그 뒷감당은 꽤 골치아픈 일이었을 것 입니다. 벨기에의 철도망을 신속하게 탈취하기 위해서 1908년 계획에서는 동원 11일차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시했는데 1913년 벨기에가 새 육군법을 제정해 육군 규모를 크게 늘리자 동원 5일차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소 몰트케 시기의 전쟁 계획에 대한 폴리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 몰트케는 취임 초기만 하더라도 러시아군을 낮게 평가해 서부전선, 특히 우익에 주력을 집중하는 슐리펜의 계획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점차 러일전쟁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계획을 변경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양면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소 몰트케는 독일이 장기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전장을 신속히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를 더 신속히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것은 병력동원과 공격일정을 더 앞당기는 것으로 반영되었습니다.

폴리는 주버가 지나치게 작전 단위의 분석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슐리펜 계획이라는 대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주버의 사료 인용은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