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에 앞서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0-1
1. 테렌스 주버vs테렌스 홈즈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3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4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5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1-7
2. 테렌스 주버VS로버트 폴리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1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2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3
S. 번외편 및 기타 사항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1
아. 연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입니다. 지금보니 거의 두달 가까이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지난 번 글에서는 로버트 폴리의 “The Real Schlieffen Plan”에 나타난 주버의 설에 대한 비판을 살펴봤습니다. 제가 지난번 글에서 밝혔던 것 처럼 “The Real Schlieffen Plan”은 주버가 사용한 핵심 사료에 대한 비판 등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 많은 흥미로운 글 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테렌스 주버는 2007년 War in History, 14-1호에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라는 논문을 기고해 재 반론을 합니다.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2-4
테렌스 주버의 재반론
“The 'Schlieffen Plan' and German War Guilt”
테렌스 주버는 로버트 폴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분석은 소홀히 한 채 테렌스 홈즈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비판한 뒤 본격적인 반론에 들어갑니다.
주버가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것은 그의 핵심 사료인 참모부연습(Generalstabsreisen)에 대한 부분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설명한 것 처럼 로버트 폴리는 참모부연습은 실제 작전을 반영하는 문서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버는 1차대전 초기 전역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의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주버가 예로 든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동부 참모부연습 → 탄넨베르크 전투
1904, 1905, 1906, 1908년 서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15일 제5군에 대한 명령
1897, 1899,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8월 24일 동부전선에 대한 증원명령
1901, 1903년 동부 참모부연습 → 1914년 가을 우치(Lodz) 방면 공세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작전은 모두 슐리펜의 기본적인 작전 계획이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공세를 맏받아치는 역습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폴리는 1903년에 출간한 Alfred von Schlieffen’s Military Writings라는 저작에서 슐리펜이 실시한 참모부연습은 “슐리펜의 전쟁계획과 전략개념을 시험해 보는 수단”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폴리가 홈즈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1904~1905년의 참모부연습이 슐리펜계획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고 주장한 부분도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독일육군 총참모부가 1938년 슐리펜의 동부 참모부연습 다섯개를 정리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했을때도 역시 서문에서 참모부연습이 슐리펜의 전략개념을 시험하고 작전구상을 가다듬는 것이었다고 밝힌 점도 지적합니다. 그러니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서 주장한 내용은 기존의 주장을 갑자기 180도 바꾼 것 이라는 겁니다. 또한 만약 참모부연습이 단순한 훈련 목적에 불과하다면 베를린 근처의 지역에서 실시하지 않고 최전선지역인 동프로이센과 로렌에서 실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도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 언급한 1905년의 서부 참모부연습에 대한 해석도 상이합니다. 폴리는 이 연습에서 ‘슐리펜계획’의 기본요소가 등장한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입니다. 주버는 루덴도르프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1904, 1906, 1908년 참모부연습과 동일하게 로렌을 향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대한 역습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폴리는 이 무렵 슐리펜이 프랑스와의 일대일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주버는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서는 오히려 당시의 슐리펜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계된 공세를 더 우려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루덴도르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단지 프랑스군이 공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에만 베르덩-벨포를 잇는 요새선을 우회하여 공격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주버는 폴리와 슐리펜계획의 정설을 확립한 리터 모두 슐리펜 시기의 군사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슐리펜이 총참모장 재직시에 확립한 교리는 철도망이라는 내선의 이점을 활용해 부대를 신속히 기동하고 이를 통해 적의 공세를 재빨리 맞받아치는 것 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를 다양한 돌발변수에 맞춰 시험해 보는 것이 바로 참모부연습의 기능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참모부연습의 기밀 등급이 낮았고 일선부대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이유로 실제 작전과 거리가 먼 ‘교육용’이라는 폴리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단순한 교육용 자료에 기밀 등급이 붙여져 일선의 각 부대에서 수년간 보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냐는 겁니다.
참모부연습의 사료적 가치 다음으로 지적하는 것은 연구의 방법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The Real Schlieffen Plan”에 서 사료인용의 문제를 지적한 것을 강하게 의식한 듯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주버는 자신의 주 사료인 빌헬름 디크만의 연구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두가지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고 연구를 시작한 인물이라는 점 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빌헬름 디크만이 이용한 사료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빌헬름 디크만은 슐리펜계획이 실재했다고 믿었지만 그가 인용한 사료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폴리가 이 두가지 점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즉 빌헬름 디크만이 슐리펜계획이 실제로 존재한 계획이라고 믿었다는 것이 슐리펜계획의 실재여부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 입니다.
주버는 다음 논점을 슐리펜계획에 필요한 병력으로 돌립니다. 지금까지 여러번 강조했지만, 1905년 비망록에 따르면 서부전선에 투입될 독일군 병력은 96개 사단인데 실제 독일군 병력은 최대 72개 사단이 한계였습니다. 주버는 이 점을 들어 슐리펜이 1905년 비망록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독일의 심각한 병력 부족문제였다는 기존의 주장을 반복합니다.
폴리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이 새로이 6개 군단을 편성한 점을 들어 슐리펜계획에 명시된 병력의 부족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주버는 이에 대해 독일이 1914년 8월 급히 편성에 들어간 22~27예비군단은 자원한 학생등의 인력으로 편성된 것이지 사전에 계획된, 훈련된 예비병력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편성한 6개 군단은 10월 중순까지도 전선에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슐리펜계획’에 따라 동원할 수 없는 부대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1차대전 초 독일군의 대규모 우회기동을 뒷받침하는 계획은 무엇인가? 주버는 베젤러(Hans-Hartweg von Beseler)가 1900년에 작성한 비망록에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는 우회기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을 뿐 슐리펜이 유사한 계획을 구상했다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음으로는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와 슐리펜계획의 연관성을 강조한 부분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주버는 이러한 폴리의 주장 역시 사료적인 뒷받침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폴리가 제시한 자료는 독일군 총참모부가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한 내용 정도이기 때문이란 것 입니다.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선의 방어력을 강력하게 평가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여기에서 벨기에를 통한 우회기동으로 계획이 발전했다는 내용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게 주버의 논지입니다. 주버는 프랑스가 국경지대의 요새를 급속히 강화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베르덩, 에피날, 툴, 벨포르 등 핵심적인 요새들에 근대적인 방어시설이 보충되었을 뿐 프랑스의 국경지대 요새 상당수는 독일군의 군단급 장비인 210mm포로 쉽게 무력화 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주버는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까지 우익을 확장한 원인은 프랑스군의 좌익이 메지에흐까지 확장된 것에 대한 대응조치일 뿐 ‘슐리펜계획’이나 프랑스군의 국경지대 요새 강화에 따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잡담하나. 주버는 이 글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슐리펜계획에 대한 사료는 워낙에 부족해서 마치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 입니다. 사실 이점은 슐리펜계획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지 10년이 넘도록 계속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한방에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사료가 없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이번에도 좋은 글을 써주셨군요. 다만 논쟁이 어렵다 보니 댓글이 없나 봅니다. 논쟁을 따라가다 보니 Zuber의 의견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공세 제일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군사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슐리펜이 '국경지대에서의 반격'이라는 방어적 개념에만 초점을 두어 작전계획을 구상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독일육군에 비해 역량이 떨어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을 지휘했던 회첸도르프 조차도 공세 제일주의의 신봉자였는데 말입니다.
답글삭제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요약을 잘 못해서 읽으시는 분들이 답답하실 것 같은데 좋은 말씀을 해 주시니 민망하네요.
답글삭제이번 여름에 주버가 출간하겠다고 예고한 1차대전 이전의 독일 전쟁계획 수립에 대한 단행본도 꽤 기대하고 있는 중 입니다.
혹시 The Real German War Plan, 1904-14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http://www.amazon.com/Real-German-War-Plan-1904-14/dp/0752456644/ref=sr_1_1?ie=UTF8&qid=1310719169&sr=8-1
답글삭제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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