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8, 2007

중국에 갔다 오겠습니다

이 어린양이 중국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사적으로는 그다지 가고 싶은 곳이 아니지만 공적으로 갈 일이 생기더군요.

가는 김에 뭐 재미있는게 없나 잘 찾아 보고 오겠습니다.

Saturday, July 7, 2007

검은집

얼마전에 CGV 무료초대권을 몇 장 얻었는데 정작 CGV에는 트랜스포머와 기타 몇 개의 영화가 스크린을 독식하고 있더군요. 트랜스포머도 무료초대권으로 이미 봤기 때문에 몇 개 안 되는 영화 중 아직 안 본 영화를 찾다 보니 결국 "검은집"을 보게 됐습니다.

이 영화는 재미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 주인공과 살인범을 너무 재미없게 묘사했습니다. 배우들은 열심히 연기했지만 주인공은 너무 착하기만 해서 짜증이 나고 살인범은 조용히 있다가 영화 후반부터 갑자기 미쳐 돌아가 황당합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착하기만 한 주인공은 최악입니다.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남 걱정이나 하고 자빠졌으니 이런 인간에게 어떻게 감정 이입이 되겠습니까! 주연 배우인 황정민의 연기는 좋았지만 그가 연기하는 인물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살인범을 연기한 유하의 연기도 역시 나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황정민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꽝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잔인한 신체훼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지겹습니다. 이야기 전개상 납득할 만한 피칠갑장면은 그럭 저럭 봐 줄 수 있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멀쩡한 사람 눈을 꿰메고 보험금을 받기 위해 두 팔목을 절단하는 장면은 끔찍하다기 보다는 짜증을 돋궜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펼쳐지는 지하실에서의 대결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아무 이유 없이 살인범을 상대로 도망만 다닙니다! 다리를 저는 30대 여자를 상대로 도망만 다니는 남자 주인공이라니! 게다가 살인범은 격투 와중에 한쪽 눈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역시 주인공은 애인을 데리고 도망만 칩니다. 물론 도망조차 제대로 못 가니 구경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부아가 치밀 지경이었습니다. 만약 미저리에 나온 우락 부락한 여자였다면 공감을 해 줄 수 도 있지만 얼굴도 곱상하게 생긴데다 호리호리하고 한 쪽 다리를 절며 또 한 쪽 눈도 없는 여자를 상대로 도망만 다니니 어느 누가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비현실적인 등장인물들의 행태는 제외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은 더 있습니다. 이야기를 주인공과 살인자 두 명을 중심으로 압축했다면 좀 더 좋았을 듯 싶은데 특히 주인공의 애인은 납치되는 것 말고는 별로 쓸 데가 없는 등장인물이었습니다. 애인이 소개시켜준 정신과 의사도 뜬금없이 나왔다가 뜬금없이 시체가 되더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또한 별로 필요한 장면 같지는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관객의 등골을 서늘하게 해 주겠다고 넣은 것 같은데 그런 종류의 결말은 다른 영화에서 너무 지겹게 봐 왔습니다.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너무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소재는 무난했지만 그것을 잘 다룬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짜로 본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Wednesday, July 4, 2007

[번역글][재탕]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이 글은 예전에 페리스코프 포럼에 올렸던 불법 날림번역물입니다. 하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김에 다시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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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6-4(1993년 12월)에 실린 러시아 군사 전문가 "스티븐 잘로가"가 쓴 Technological Surprise and the Initial Period of War : The Case of the T-34 Tank in 1941을 우리말로 옮긴 것 입니다. 12년이나 된 오래된 글 이긴 한데 짧고 재미도 있습니다. 각주도 생략한 불법 번역이라서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기술적 충격과 전쟁 초기의 상황 : 1941년 T-34 전차의 사례 
현대 무기는 전쟁 초반의 기습적인 투입으로 전투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존재를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으로 최신일수록 그 존재를 은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의 사례를 들자면 1991년 페르시아만 전쟁에서 미 공군의F-117 스텔스 전투기의 사용이 있다. 그렇지만 첨단무기를 기습적으로 투입한다고 해서 항상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과거의 사례를 들자면 T-34전차의 사례가 있다. T-34는 흔히 전차 기술에 있어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지만 1941년 바바로사 작전 기간동안에는 별다른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기술적 요소는 실전에서 중요한 다른 두가지 요소의 뒷 받침이 없이 성과를 발휘할 수 없다. 그것은 운용할 전술과 승무원의 훈련도이다. 
T-34의 개발은 1937년에 BT기병전차를 대체하기 위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붉은군대 기갑국은 A-20의 혁신적인 디자인에 대해 높이 평가했지만 이것은 BT기병전차에 비해 방어력이 아주 약간 향상된 것에 불과했다. A-20의 주 무장과 엔진은 BT-7M과 동일한 것 이었다. A-20의 설계팀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부대로 부터 올라온 BT전차의 보고서를 검토한 뒤 붉은 군대 기갑국이 요구하는 사양 이상으로 장갑과 무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설계국에서 대안으로 내놓은 A-32는 기갑국에서 승인하지 않았지만 스딸린의 승인을 받아서 개발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A-20과 A-32의 시제품은 1939년 여름에 모스끄바 근교의 꾸빈까 시험장에서 시험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A-32가 A-20을 누르고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19일에 A-32는 T-34라는 명칭을 부여 받고 붉은군대의 신형 기병 전차로 채택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오늘날 T-34의 혁신적인 장점으로 평가 되는 76mm 주포와 강력한 장갑은 당시 붉은 군대 기갑국에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붉은 군대는 세 종류의 신형 전차를 개발하고 있었다. T-50은 T-26보병전차를 대체할 것 이었고 T-34는BT계열의 기병전차를, KV 중전차는 T-28 중형전차와 T-35중전차를 대체할 예정이었다. 이중 T-50은 기술적 결함과 기타 지연 요인으로 1941년 8월에야 비로서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1년 여름에 독일군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KV와T-34 두 종류의 전차가 되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는 독일군이 1941년에 전투에서 마주치기 전 까지는 T-34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사료에 따르면 비록 일선 부대는 몰랐다 하더라도 독일 국방군의 정보기관은 T-34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독일과 소련간에 있었던 군사 기술 교류는 현재까지 그 실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독일은 소련측에 기술 교류의 일환으로 3호 전차를 수 대 제공했는데 여기에 대해 소련은 무엇을 답례로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의 기자인 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부대에 배치된 T-34의 사진을 촬영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본 필자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 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T-34를 설계한 기술자들이 독일에서 제공받은 전차를 우습게 봤다는 것인데 3호전차를 예쁜 장난감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T-34의 출현에 대한 정보는 독일측에서 특별히 경계할 만한 사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940년 5월~6월간의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Char-1bis 와 S-35를 상대했다. 독일측은 프랑스 전역에서 우수한 기량으로 기술적 열세를 만회했으며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수준으로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소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기 만족에 빠져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록 50mm Pak 38의 채용등 대전차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일 국방군은 프랑스 전역당시 보병들이 프랑스군의 Char-1bis전차와 마주친 뒤 전차 공황에 빠졌던 경험을 무시했다. 독일 국방군은 전차의 주무장을 강화하거나 보병 중대의 대전차 화력을 증대 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강력한 전차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소전 개전당시 독일 육군이 보유한 전차들은 프랑스 전역에 투입된 것들에 비해 기술적 진보가 별로 없었다. 
사실 독일측이 소련의 전차 기술에 대해 보인 태도는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독일은 소련이 초기의 전차 개발 과정에서 서방측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T-26은 영국의 경전차 기술을 바탕으로 개발됐으며 BT-7은 미국의 크리스티 전차의 개량형에 불과했다. 독일은 스페인 내전당시 소련 전차와 교전한 사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소련전차들이 영국과 미국의 기술에 의존한 복제품 수준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이것들은 명백히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사용한 1호 전차 보다 우수했다. 1939년 폴란드 전역에서 소련 기계화 부대와 접촉한 경험은 소련의 수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만 더 키웠으며 핀란드 전역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가 보인 전과는 그런 시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1941년 소련군의 전차 배치

전쟁 직전 붉은군대는 1861대의 KV와 T-34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막 공장에서 출고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때문에 508대의 KV와 967대의 T-34만이 전쟁 개시당시 서부 지역의 군관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청난 전력이었다. 당시 독일 육군은 불과 1449대의 3호 전차와 517대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나마 T-34와 비교할 수 있을 만한 것 이었다. 
최근(1993년)까지 실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는 세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비교적 근래의 연구에서도 T-34는 독일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반격을 위해서 후방의 예비 부대 위주로 배치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러시아 사료의 공개로 전쟁 발발 당시 소련군이 어떻게 전차를 배치하고 있었는지, 특히 T-34와 KV의 배치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태까지는 신형전차들이 29개의 기계화군단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신형전차들은 전방에 배치된 군단에 중점적으로 배치 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신형전차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군단은 5개 군단에 불과했다. 끼예프 특별 군관구 예하 제 4 기계화 군단과 서부 특별 군관구 예하 제 6 기계화 군단이 신형 전차의 거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 3, 8, 15 기계화 군단이 각각 100대 이상의 신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대량의 신형 전차를 보유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잘 장비된 부대는 제 4 기계화 군단 예하 32 전차 사단으로 리보프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 32 전차 사단은 1941년 4월에 30 경전차 여단을 개편하여 편성되었으며 사단장은 42세의 예핌 뿌쉬낀 대령, 사단 정치위원은 체삐가였다. 뿌쉬낀 대령은 적백 내전에도 참전한 고참군인으로 1932년부터 기갑병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0 경전차 여단은 사단급 부대에 못 미치는 규모여서 32 전차사단으로 개편될 당시 고급 지휘관(영관급)은 편제의 50%, 초급지휘관(위관급)은 편제의 43%를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병의 대다수가 1941년 봄에 징집되어 4월과 5월에 걸쳐 사단에 배속된 신병들 이었다. 사단의 최초의 임무는 이들 신병에게 전차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가르치는 것 이었고 이런 기초적인 훈련조차 전쟁이 발발할 때 까지 마치지 못 한 상황이었다. 사단이 최초로 T-34를 지급 받은 것은 4월 25일이었고 마지막 차량이 5월 25일에 수령 되었다. 사단은 총 173대의 T-34와 49대의 KV를 보유해서 전쟁 발발 당시 사단급 부대로는 가장 잘 장비된 부대였다. 편제상 1941년의 소련 전차 사단은 210대의 T-34 와 63대의 KV를 장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단은 다른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차용 무전기는 편제수량의 30%에 불과했으며 사단 공병과 교량 부설 장비는 28%, 사단의 차량은 22%, 전차 수리용 장비는 13%, 전차의 예비 부품은 2%에 불과했다. 사단의 전차병들 중 많은 숫자가 5시간 미만의 조종 시간을 가지고 있었으며 포수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 까지 실탄 사격을 해 보지도 못 했다. 전차병들은 신형 전차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 했으며 사단의 정비병들도 어떻게 신형 전차를 정비해야 할지 제대로 알지 못 했다. 
32 전차사단만 이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부대들도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은 1940년에 불과 115대의 T-34를 생산해서 부대로 보냈으며 1941년 1월 까지 T-34를 일정 수량 이상 보유한 부대는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붉은 군대에서 가장 잘 준비가 된 부대도 겨우 6개월 정도의 훈련 기간을 가졌다는 것 이다. 1941년 5월 1일까지 생산된 T-34는 655대에 불과했으며 아무리 높게 추정치를 잡더라도 부대에 배치되어 훈련과정에 들어간 것은 500대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즉 전쟁 발발 당시 T-34 승무원의 절반 가량은 기껏해야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점은 KV 전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T-34와 KV 전차포에서 사용할 대전차 철갑탄의 생산이 크게 지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전차용 탄약은 규정량의 12%정도만 겨우 채우고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중 대다수가 고폭탄이어서 대전차 능력이 거의 없었다. 예비 부품은 크게 부족했다. 신형 전차들은 특히 클러치와 기어박스등 동력 계통에서 심각한 기계적 결함이 있었는데 이것은 경험이 부족한 전차병들과 맞물려 도로 행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KV전차를 위해 새로 생산된 신형 보로쉴로베츠 전차 회수차는 배치량이 크게 부족했다. 만약 전차가 도로 행군 중 고장이 나 버리면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소련군대의 내부적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1941년의 대 재앙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었다. 부대단위 훈련은커녕 전차병의 기초 훈련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니 소련 군대의 기갑전술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소련 기계화 군단의 실전 사례

북부전선에서 꾸르낀 장군이 지휘하는 제 3 기계화군단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두 109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단 예하 제 5 전차 사단은 6월 22일에 니멘강의 일리투스 다리를 건너려는 독일 제 7 기갑사단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T-34는 확실히 체코에서 개발한 38(t)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독일 공군의 지원으로 제 5 전차 사단은 격퇴되었다. 사단의 T-34 일부는 니멘강 동안에 참호를 파고 들어앉아 토치카로 이용되었다. 1941년 6월에 상실된 38(t)는 총 33대였으니 독일측은 매우 적은 손실을 입은 셈 이었다. 다음날 라쎄냐이에서 개시하기로한 소련측의 반격은 독일군의 신속한 진격으로 시도되지도 못 했다. 6월 24일에 제 2 전차사단 의 잔존 병력은 제 6 기갑사단의 100 차량화 소총연대를 공격해서 독일측의 진격에 약간의 차질을 입혔다. 그러나 연료와 탄약이 부족해서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다. 그뒤 이틀간 전차전이 계속됐지만 제 3 기계화군단 소속의 T-34는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한편, 벨로루시아에 배치된 소련군 기계화 부대중 가장 강력한 부대인 하츠낄례비치 장군의 제 6 기계화 군단은 총 238대의 T-34와 114대의 KV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군단은 6월 24일까지 전선에 투입되지 못 했다. 24일에 투입된 제 6 군단은 그로드노 서부에서 기갑집단을 후속하던 제 20 군단의 보병 사단들과 격돌했다. 독일측은 순식간에 탄약을 소모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6월 25일에 급강하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서 소련군의 반격을 격퇴했으며 하츠낄례비치 자신도 전사했다. 헤르만 호트의 제 3 기갑집단은 6월 26일에 벨로루시아의 수도인 민스끄에 도착했으며 그동안 소련 제 6 기계화 군단의 저항은 미미했다. 제 6 기계화군단은 제 10군 예하의 부대들과 함께 그로드노 남서쪽에 포위되어 섬멸되었고 군단소속의 전차 중 소수만이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서부 전선군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이었으며 전선에 배치된 T-34의 4분의 1을 보유하고 있던 제 6 기계화 군단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 한채 전멸 당했다. 
T-34가 가장 집중적으로 배치된 부대는 우끄라이나에 배치된 3개 기계화 군단이었다. 리보프에 배치된 블라소프 장군의 4 기계화 군단, 두브노에 배치된 랴비체프 장군의 8 기계화 군단, 지토미르 근교에 배치된 까르뻬조 장군의 15 기계화 군단이 바로 그 것이었다. 이중에서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제 4 기계화 군단이 가장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군단은 총 414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군단 예하 제 8 전차 사단은 가장 잘 훈련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전진하는 독일군은 블라소프의 군단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고 전진을 계속했다. 까르페조의 제 15 기계화군단은 135대의 T-34와 KV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전차가 기동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 투입되었고 군단이 보유한 많은 전차를 도하점과 습지대에서 사고로 상실했다. 
독일군은 6월 22일에 우끄라이나 전선에서 최초로 T-34와 격돌했다. 독일 제 11 기갑사단 예하 제 11 기갑연대는 이날 리보프 전차 훈련 연대 소속의 T-34 30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 교전에서 세대의 4호 전차와 두대의 3호 전차가 격파 당했다. 이보다 좀 더 큰 규모의 교전은 라제쿠프 근교에서 6월 23일에 벌어졌다. 3호 전차를 장비한 11 기갑사단의 2개 기갑 대대는 제 10 전차 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독일측은 46대의 BT-7 전차를 격파했지만 소련 32 전차사단 소속의 T-34들의 공격을 받아 많은 전차를 잃었다. 6월 26일에 소련군은 끼예프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서 기갑부대를 대규모로 집결시켜 반격을 시도했다. 1941년에 벌어진 최대규모의 기갑전에서 랴비셰프의 제 8 기계화 군단과 까르페조의 15 기계화 군단의 잔존 전력, 블라소프의 제 4기계화 군단의 일부 전력, 그리고 꼰드루셰프의 22 기계화군단은 브로디와 두브노일대에서 독일 11 기갑사단과 16 기갑사단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편 전력이 약한 로꼬소프스끼의 제 9 기계화 군단과 페끌렌꼬의 19 기계화군단, 치스챠꼬프의 24 기계화 군단은 대부분 주무장으로 “새총”을 달고 있는 구식 T-26과 BT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측방을 엄호하는 독일 보병사단들을 상대했다. 이 전투에 참가한 독일군 부대의 사단사는 이날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력한 소련군의 전차는 독일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T-34와KV는 특히 37mm 대전차포로 무장한 독일 보병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독일군의 37mm 포는 표준 교전 거리에서 소련군의 신형 전차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 했으며 신통치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차 부대의 공격에 대해 독일군은 사단 포병의 대구경 유탄포와 88mm 고사포로 대응했다. 독일 기갑부대역시 보병부대와 유사한 곤란을 겪었다. 이때문에 독일 전차병들은 최대한 근접하여 공격했다. 3호전차의 주포는 T-34를 측면에서 300~400m정도 거리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군은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실패했다. 독일측은 16 기갑사단만 단독으로 293대의 소련 전차를 격파했다. 전투가 끝난뒤 소련군 기계화 군단은 전투 시작당시의 20% 정도의 전력만 남아 있었다. 우끄라이나의 붉은 군대 기갑국 감독관인 모르구노프 소장은 이 브로디 전투가 끝난지 얼마 뒤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전차 회수차량과 예비부품의 부족에 T-34와 KV의 기계적 결함, 승무원의 훈련 부족이 결합합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적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정찰은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각 부대는 행군중에도, 전투중에도 끊임 없이 적 공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선을 향해 800~900km 씩 이동하면서 우리 공군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포병과의 합동 작전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 했습니다. 게다가 작전 지역이 숲과 습지로 전차의 기동에 불리했습니다. 적의 공격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T-34와 KV전차는 대전차 철갑탄이 부족했습니다. 이때문에 기계화군단의 손실이 매우 높았으며 막대한 장비 손실을 입게 됐습니다.” 
1941년 당시의 기술 수준은 오늘날과 비교해서 낮은 수준이었다. 소련의 신형 전차들의 부품 수명은 매우 낮았다. 소련의 전차 엔진은 평균 100시간 정도 사용하면 교체해야 했다. T-34전차는 800km정도 도로주행을 하면 기계적 한계에 도달했다. 1941년 당시 대부분의 기계화군단은 이 이상의 거리를 주행해야 했다. 이런 기계적 결함은 정비 인력의 부족으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신형 전차를 제대로 다루는 인원은 대대장 정도에 불과했다. 소련측 기록에 따르면 1941년 6월의 전투에서는 경험 많은 장교가 많이 전사했다. 소련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가 고장나면 그냥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전차를 회수하기 위해 전투 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많은 수가 전사했다.
다시 제 32 전차 사단의 사례를 보면 그들이 전투 중에 겪은 문제는 새로 편성된 부대들이 흔히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사단은 두브노-브로디 전투 이전에는 이렇다 할 전투를 거의 겪지 않았지만 매우 빨리 진격하는 독일군 기갑 사단을 요격하기 위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전쟁 첫번째 달에 32 전차 사단은 49대의 KV전차중 32대를 잃었고 173대의 T-34 전차중 146대를 잃었으며 전차병중 103명이 전사하고 259명이 부상당했다. 전차 손실중 거의 절반이 기계적 결함이나 부품 부족, 전차 회수 차량의 부족으로 인한 것 이었으며 손실된 전차중 10% 미만이 회수되어 수리를 위해 보내졌다. 전체 손실중 불과 30% 만이 전투로 인한 손실이었으며 10%는 수렁에 처박혀서 상실되었다. 사단은 총 113대의 독일 전차와 96문의 대전차포를 격파했다고 보고했지만 독일군의 전투 보고와 대조해 볼때 이건 터무니 없는 과장이다. 이 사단의 전력과 이 사단이 거둔 성과를 비교해 보면 당황스럽다. 이사단은 매우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거둔 성과는 형편 없었다. 소련 기갑부대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바바로사 작전 기간중 T-34를 날이 무딘 칼로 만들어 버렸다. 

미숙한 기술

1941년에 T-34가 보인 많은 문제점은 확실히 이 시기 소련군의 전차 사단과 기계화 군단 전체어 만연해 있던 문제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T-34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문제가 많았다. 독일측이 Char B-1과 T-34, KV에 대해 우세했던 이유는 독일 전차의 포탑 배치였다. 3호나 4호 전차 같은 독일 전차는 3인용 포탑이었다. 각 전차는 전차장과 포수, 장전수가 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Char B-1은 1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1인 3역을 해야 했다. 소련군의 전차는 둘다 2인용 포탑이어서 전차장이 포수를 겸해야 했다. T-34의 2인용 포탑은 실전에서, 특히 전차끼리의 격돌에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켰다. 프랑스나 소련은 소형 포탑이 무게를 줄이면서도 방어력을 높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포탑이 크다면 방어해야할 면적이 많이지기는 한다. 이런 소형 포탑은 순전히 기술자들의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것이었으며 일선 부대의 현실을 무시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2차 대전 이전에는 사실상 대규모 전차전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소련 전차의 전차장들은 포탑내의 전투 배치와 형편없는 시야, 포수의 역할을 겸해야 하는 것때문에 상황 판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전에서 전차장들은 사격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으며 이때문에 전차장이 해야할 목표 탐색, 다른 전차와의 합동등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것이 소대, 나가서 중대급 작전이 된다면 해당 지휘관 전차의 전차장에게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 졌다. T-34의 광학 장비는 독일군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 졌다. T-34의 전차장은 독일 전차에 있는 우수한 큐폴라가 없어서 차내에서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독일 전차와 달리 포탑 해치가 너무 커서 관측을 위해 차체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도 위험했다. T-34의 해치는 앞으로 열게 되어 있어서 전차장은 몸 전체를 차 밖으로 내밀고 포탑에 걸쳐 앉아야 했다. 
그리고 1941년 여름에는 소수의 소련 전차만이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모든 중형 전차가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1941년 여름에 소련군은 중대장 전차 까지만 무전기를 지급했는데 그 이유는 소련은 신뢰성 높은 무전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군 전차 중대장은 전투가 벌어질 경우 사실상 그의 중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규정상으론느 깃발을 이용해서 신호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건 거의 공상적인 생각이었다. T-34는 시야가 불량한데다가 전차장들은 포를 사격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중대장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포탑이 2인용이었기 때문에 무전기는 차체에 탑재해야 했으며 전차장이 무전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실전에서 소련 전차와 교전해 본 뒤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독일 전차병들이 보기에 소련 전차 부대는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전투를 하거나 엄마닭과 병아리 처럼 옹기 종기 몰려 다녔다. 소련 전차 소대는 소대장의 지휘하에 단일 목표를 집중 공격할 수가 없었다. 그결과 소련 전차 소대는 화력의 집중을 달성할 수 없었다.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전투시 반응이 매우 느리다는 것을 종종 지적했다. 1941년 여름의 전차전에서 독일 전차병들은 T-34가 한발 발사할때 세발 이상을 쏠 수 있었다. 소련이 이때의 문제점을 수정하는데는 거의 2년이 넘게 걸렸다. 
바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T-34가 보인 실망스러운 전과는 2차 대전당시 다른 신무기들과 비교해 특별히 구별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훈련과 우수한 지휘관, 뛰어난 전술이 없다면 신기술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다.

Leaping Horsman Books에서 나올 새책

오늘 Leaping Horsman Books에서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다음달 중에 An Artilleryman in Stalingrad가 출간된다는 군요.

이 책은 제 71보병사단 소속의 포병장교의 회고록인데 264쪽의 책에 사진이 160장 이상이나 되는군요.사진과 부록도 충실한 것 같으니 나오는 대로 질러야 겠습니다.

Tuesday, July 3, 2007

코낼리 상원외교위원장 인터뷰 사건

애치슨 국무장관의 극동방위선 관련 발언으로 한국이 어수선하던 1950년 5월 5일,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장 코낼리 의원은 U.S. News & World Report와의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코낼리 의원은 한국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합니다.

Q - 의원께서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A - 저는 우리가 원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한국은 포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한국을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돕기 위해 예산을 편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부 지역은 아시아 본토, 즉 소련과 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은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 소련이 한국을 정복하려는 의도만 있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Q - 그렇지만 한국은 미국의 방위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요?

A - 물론입니다. 한반도의 모든 지역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한국이 가장 중요한 지역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일본과 오키나와, 필리핀을 잇는 방어선이 가장 중요합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국무부는 당황합니다. 애치슨 라인 덕분에 이 박사로부터 별로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있던 국무부는 코낼리 상원의원의 인터뷰가 한국 내에서 일으킬 반향을 걱정하게 됩니다.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대략 다음과 같은 대책을 강구합니다.

극동차관보(러스크)가 국무부차관(웹)께

대외비 워싱턴 1950년 5월 2일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코낼리(Connally) 상원의원의 발언

이 문서에는 코낼리 상원의원이 1950년 5월 5일자 U.S. News and World Report에 실린 “국제 정책과 초당파적단결”이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 대답한 두 개의 문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차관께서는 주말로 예정된 코낼리 상원의원과의 면담에서 코낼리 의원의 발언이 미칠 파급효과, 특히 한국정부와 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제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국무부는 다음과 같은 대응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1) 코낼리 의원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국무부의 기본 입장과는 무관한 패배주의적 경향을 드러낸 것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반박해야 합니다. 미국이 남한을 “포기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국무부의 기본 입장은 1950년 3월 7일에 국무부장관이 코낼리 의원도 참석한 상원외교위원회에서 한 발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습니다. : 대한민국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 입니다. 최근 있은 논의에서 많은 의원들이 미국이 한국을 원조하기 위해 지원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제기했습니다. 저는 미국의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대신 성공하겠다는 결의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봅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대내외적 문제와 한국의 자치 경험의 부족과 기술적, 행정적 노하우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안정성과 공공질서는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체제 전복 시도도 일시적이나마 효과적으로 차단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우리의 원조에 힘입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될 만큼 충분한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물론 100% 확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원조가 없다면 이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2)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코낼리 의원의 답변은 대한민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어선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문제입니다.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있는 “방위권(Defense Perimeter)"에 대한 국무장관의 프레스 클럽 연설 이후 국무부는 한국정부의 외교관과 미국의 극동방위권에 한국까지 포함시켜야 된다는 (미국 내의) 집단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현 행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대한민국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 포함시키는) 공약을 제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언론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위선에 대해 보도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미국에 대한) 신뢰와 지속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것입니다.
코낼리 의원의 발언과 관련해서, 만약 언론기자들이 국무장관께 코낼리 의원의 인터뷰에서한국에 대한 발언에 대해 질문한다면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대답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과 관련해서 코낼리 의원 및 코낼리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상원외교위원회와 많은 의견을 나눴으며 또한 하원외교위원회(House Foreign Affairs Commitee)와도 의견을 나눴습니다. 저는 의회와 국무부간에는 어떤 의견이나 견해 차이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미국은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로서 생존하는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미국정부는 직간접적으로 국제연합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저는 코낼리 상원의원이 말한 것은 한국과 사실상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압제로부터 독립되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미국에게 있어 극도로 중요한 것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회가 군사원조나 다른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0, USGPO 1976, pp.64~65

당연히 한국의 언론들은 이 심각한 발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리대사(드럼라이트)가 국무부 장관께

코넬리 의원의 한국 문제에 대한 발언으로 언론들의 반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은 5월 5일에 코낼리 의원의 발언에 대한 소식을 추가적인 설명 없이 전송 받았습니다.
5월 6일자 석간 신문 두 곳(서울, 경향)은 AP통신이 보도한 무초대사의 발언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경향신문의 “코낼리의 어리석은 발상을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사설은 한국은 미국의 소련에 대한 투쟁의 동반자이며 특히 한국이 공산주의와의 투쟁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단호한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경향신문 사설은) 코낼리 의원이 상원 외교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미국 국민과 민주당의 영향이 강한 국무부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았으며 소련에 대한 강경한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코낼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설은 미국의 대한 원조 공약을 언급하면서 만약 한국이 공산화 된다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방어선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 략)

Ibid, pp.66~67

또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박사는 심기가 아주 불편하셨습니다.

드럼라이트 대리대사와 이승만 대통령의 회견록

2급비밀, 1950년 5월 9일, 서울

주제 : 코낼리 상원의원의 한국 관련 발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


오늘 아침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코낼리 상원의원이 최근 인터뷰에서 한 한국관련 발언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매우 분노에 찬 목소리와 냉소적인 태도로 한국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이 한국과 3,000만의 한국인이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가치가 별로, 아니면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고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의원의 발언은 공산당에게 대한민국을 쳐들어와도 좋다고 초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상원외교위원장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과연 이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수 있겠냐고 비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코낼리 의원의 발언은 매우 해로운 것이며 코낼리 의원이 국무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상 그의 발언은 미국 정부의 공식 정책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후 략)

Ibid. p.77

그리고 대략 한 달 뒤에 수령님께서는 스탈린 동지가 하사하신 땅크를 몰고 진짜로 쳐 내려왔지요. 전쟁이 터지기는 했지만 이 전쟁은 이 박사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미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은 없도록 해 줬습니다. 이박사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Monday, July 2, 2007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입니다.

○○○○년 11월 14일, ○○ 장군이 ○○에서 쓴 편지에는 ○○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연대는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연대는 ○○○○년형 ○○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에 ○○을 ○○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 중대 중 일부는 ○○ 카빈, ○○ 소총이나 ○○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 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를 사용하는 소총을 장비하고 ○○로 만든 ○○를 지급받았는데 이 ○○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의 ○○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리고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둔채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도데체 어느나라 군대일까요? 1945년의 독일군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1870년의 프랑스군이라는군요.

원래 인용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870년 11월 14일, 뒤리외(Louis Durrieu) 장군이 방돔에서 쓴 편지에는 18군단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 군단의 45연대는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고 있었다. 70연대는 1822년형 수발총을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 총 중 대부분은 총열에 강선을 파는 개량을 했지만 일부는 강선이 없었다. ... 내 군단에 소속된 프랑-티뢰르(franc-tireur) 중대 중 일부는 레밍턴 카빈, 샤프 소총이나 스파이서 소총을 장비했고 혹은 12구경 리볼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뒤리외의 군단은 병사들이 장비한 소화기가 제각각 이어서 보급을 하기가 어려웠고 대부분의 병사가 10발에서 15발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총기 소제도구는 거의 없었다. 노르망디에서 예비군을 동원하던 한 장교는 절망감에 이렇게 빈정거렸다.

"정부에서 이런 속도로 장비를 보내주면 전쟁이 끝날때 까지도 싸울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다."

이 장교의 부대는 종이탄포를 사용하는 소총(Percussion Rifle)을 장비하고 마분지로 만든 군모를 지급받았는데 이 모자는 가을비가 내리자 곤죽처럼 돼 버렸다. 의료지원도 엉망이어서 뒤리외의 45연대는 병사 2,460명에 군의관은 단 한명이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프랑스군 보병대대들은 전투에 나가면 전투 개시 몇 분 만에 탄약을 모두 써 버린뒤 아군 부상자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도망가는 수 밖에 없었다.

Geoffrey Wawro, The Franco-Prussian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268~269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주력군이 섬멸되자 프랑스는 황급히 예비군을 긁어 모으고 해군 병사들도 보병으로 전환했는데 전쟁 초기의 막대한 장비 손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이 때문에 기본 장비인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을 못 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야포 부족으로 해군에서 차출한 120mm 해안포는 상당히 효과가 좋아서 프로이센군 조차 전쟁 초반보다는 프랑스군 포병이 나아졌다고 평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와중에도 쓸만한 물건이 하나씩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120mm포의 이야기를 읽을땐 마치 독일 국민돌격대의 판저파우스트가 연상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