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5, 2006

롱보우인가 화승총인가 : 16세기 어떤 영국인들의 이야기

어떤 특정한 기술이 개발됐을 때 반발하거나 거부감을 가지는 집단은 신기술 보다는 기존의 기술로 더 재미를 보거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이다.

그러면 이제 별 알맹이 없는 본론으로…

이런 것은 전쟁질의 역사를 보더라도 잘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16세기 영국의 군인들이 제기한 화약무기와 롱보우(Long Bow)의 효용성에 대한 논의였다.

중세 유럽의 화약무기는 성능과 신뢰도 모두가 신통치 않은 물건이었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싹수를 보이고 있었다. 플랑드르인들은 1382년의 베버하우드벨트(Beverhoudsveld) 전투에서 300문의 각종 화약무기를 집중 운용해 60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3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다.
프랑스인들도 돌대가리는 아닌지라 화약무기를 도입하는데 많은 자금과 시간을 투자했고 백년전쟁 후기에는 유럽 최고수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 됐다.

반면 영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프랑스에 비해 화약무기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미 15세기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화약무기를 대규모로 사용한 프랑스 군대에 죽을 쑨 경험이 있었다.

1428년의 오를레앙(Orléans) 포위공격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대포에 지휘관인 샐리스버리(Thomas Montagu Salisbury)가 전사한 일이 있었고 프랑스 군은 1449년에서 1450년 사이에 60여 차례의 공성전을 시도해 모두 승리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1453년 7월 17일의 Castillon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약 300문의 대포(주로 컬버린)를 투입했고 이와 함께 약 700명의 핸드캐논 사수를 투입해 영국군을 크게 격파했다.

특히 화약무기 중에서도 화승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핸드캐논의 보급은 유럽본토에서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는데 1411년 부르군디 공작은 자신의 군대가 핸드캐논 4000정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물론 핸드캐논은 당시의 총신 제작 기술이 불량해 종종 쏘는 사람을 잡는 경우도 있었지만 확실한 파괴력과 간편한(?) 조작방법으로 빠르게 보급됐다.
1430년 뉘른베르크 시의 기록에 따르면 시 민병대가 보유한 발사 무기 중 핸드캐논 (Handbüchse)은 501정으로 석궁(607자루)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유럽 본토에서 이렇게 화약무기 도입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영국은 뭔가 한 걸음 뒤쳐진 상황이었는데 몇가지 이유 중 하나는 롱보우에 있었다.
이미 영국인들은 백년전쟁 기간 내내 롱보우의 파괴력과 연사력을 활용해 여러 차례 재미를 보고 있었고 비록 백년전쟁 말기에 화기에 호되게 당하긴 했어도 야전(野戰)에서는 롱보우의 위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년전쟁이 끝나고 한참 지난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인들은 화약무기와 롱보우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다.

용병으로 이름을 날린 존 스미티(John Smythe)라는 귀족은 1590년에 발행한 짧은 소책자에서 롱보우가 군사적으로 화약무기보다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롱보우는 숙달된 사수가 사용할 경우 화승총에 비해 여섯배 이상 빠른 발사속도를 자랑하고 화약무기가 과열과 총신파열로 파괴될 위험이 있는데 비해 롱보우는 그럴 위험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반면 역시 용병대장이었던 험프리 바윅(Humfrey Barwick)은 스미티의 주장에 반대했다.
바윅은 발사속도의 경우 기병을 상대할 때는 별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기병이 전력으로 돌격해 올 경우 롱보우와 화승총 모두 한번의 일제사격 뒤에는 돌격하는 기병과 육박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이었다.
또 궁수가 활을 잘 쏘려면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화약무기는 방아쇠 당길 힘만 있으면 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았다.
바윅은 마지막으로 화약무기의 파괴력은 롱보우에 비해 위력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당시 유럽은 기병과 보병 모두 두꺼운 흉갑을 장비했기 때문에 롱보우로는 관통하기 어렵다는 것 이었다.
이미 백년전쟁 후반기부터 금속기술의 발달로 롱보우로는 갑주를 입은 적을 무력화 시킬 수 없었다.

어쨌든 영국 군대는 백년전쟁 이후 화약무기 장비에서 유럽의 대륙국가들에 뒤쳐졌는데 다행히도 대규모 전쟁을 치루진 않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16세기 말 까지도 영국 뱃사람(대개는 해적)들은 롱보우나 석궁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서부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을 하러 갔다가 화승총을 쏴대는 현지인들에게 피박을 봤다는 기록이 많다.
총을 쏘는 흑인이 활을 쏘는 백인을 때려잡는 모습이라니. 여러분은 이 모습이 상상이 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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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베낀 책 들

Kenneth Chase, Firearms : a Global History to 1700
A. Curry, M. Hughes,Arm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B. S. Hall, Weapon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Saturday, June 24, 2006

추억속으로 사라져 가는 간이역들...

며칠 전 건설교통부의 보도자료들을 훑어 보다가 아주 슬픈 뉴스를 하나 접하게 됐다.

<철도이용객 감소로 역기능 상실된 11개역 폐지>

내용인 즉슨 이용객이 너무 적어 2004년 부터 역 기능을 상실한 간이역들을 폐쇄한다는 것이다. 특히 호남선(원정·신도·다산·신흥리·옥정) 장항선(주산·기동·삼산) 등 호남 지역의 역들이 많은데 이 지역의 급속한 인구 감소가 주 원인이다.

물론 철도공사도 먹고 살아야 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추억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은 아쉽다.

특히 장항선은 노선도 짧고 재미삼아 훑어 보기에 좋은 노선이라 더 아쉽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하지만 아쉬운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대한민국 여행의 낭만이 하나 줄어들었다.

Wednesday, June 21, 2006

[불펌]북조선의 미사일 발사에 대하여

아는 인간의 블로그에서 불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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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동에 탑재된것은 미국이나 한국의 우려와는 달리 폭죽인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외무성은 20일 대변인을 통해 "우리는 6.15 공동선언기념과 그간 한국의 식량지원등을 경축하기 위하여 대형 폭죽을 준비중일 뿐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남조선 인민들도 불꽃놀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대기권 밖에서 대형폭죽을 터트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장군님이 교시하시었다"면서 대포동 로켓을 사용하는 이유를 해명했다.

아울러 대변인은 "미국은 우리민족의 통일 염원을 담은 대형폭죽을 MD로 요격하려 하고 있다"면서

"대포동을 요격할 경우 우리 민족의 통일염원에 대한 미국의 도전으로 간주하겠다며 결코 좌시하지 않을것"이라 강력하게 언급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폭죽이 15일에 발사되지 못하고 이렇게 지연되는 이유를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액체 연료주입식로켓에 대한 북한 기술력의 미비로 판단하고 있다.

"같은 민족이 배반할이 없을 줄 알았다" -각계의 반응


북한의 '폭죽 발표'이후 각계의 반응은 다양하다

통일부관계자나 일부 국회의원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라는 반응이다.

특히 '통일을 위한 같은 민족 합치기 연합'회원이자 초선 국회의원이기도한 K의원은 "역시 통일기운이 무르익은 이때 어떻게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실험 할 수 있겠느냐 같은 민족의 상식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다른 이유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아서 기쁘다" 면서 같은 민족으로 통일 염원을 갖고 있음을 재확인 했다"면서 기뻐했다.

한편 기뻐할 일 만은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다

'민족평화통일 위한 범 시민 연대'의 관계자는 이번 사건으로 "민족간의 화해하여 통일 분위기만들려는 북한의 순수한 의도롤 침략성으로 만들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수구 보수세력의 음모가 들어났다"면서 "결코 좌시 하지 않을것" 이라면서 "한편 우리도 가만히있을 수 없으니 북한의 로켓을 수입하여 답례 폭죽을 발사하기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펼칠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북한의 로켓을 수입하기 어려울경우 "중국의 선저우도 고려중"이라면서 미국과 유럽을 철저히 배척 할 뜻을 보였다.

한편 청와대에 출입하는 진보적 로켓 전문가들은 "북한이 자신들의 로켓발사 지연이라가는 기술적 문제까지 노출하면서까지 폭죽을 발사하면 향후 로켓 판매에 문제가 있을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북한의 로켓 수출저하에 대비해 좀더 많은 쌀과 비료를 준비해야 할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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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통일 염원을 담은 폭죽발사를 방해하지 마라.

Tuesday, June 20, 2006

주말에 헤어초크 특별전을 보고나서...

내가 헤어초크(Wener Herzog)의 영화를 좋아하는 건 영화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쓴 영화에 대한 글들을 몇 번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가 영화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이 세상 고통을 저 혼자 다 떠안은 냥 인상 박박쓰는 주인공, 조금 통통하고 잘 벗는 여주인공, 신나게 때려부수기, 짜증 안 날 정도로만 욕하기 정도다.
아마도 나처럼 영화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인간이 헤어초크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 진지한 영화팬들은 분노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별 영양가 없는 본론.

이번 주 역시 입에 풀칠 하기 위해 무성의 하게 출퇴근을 반복하던 중 일주일이 지나갔다. 토요일에는 새벽 5시 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네 하고 꼴값 떨다가 철지난 옛날 게임을 때리고 잤다.

눈을 떠 보니 오후 1시 26분.

대충 빨래를 하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해야할 일이 있지만 주말에 어디 일이 되나…) 웹사이트를 뒤지던 중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헤어초크 특별전을 한다길래 얼씨구나 하고 당장 나갔다.

주말에 본 것은 1987년 작 Cobra Verde와 1972년 작 Aguirre, der Zorn Gottes, 그리고 다큐멘터리인 1999년 작 Mein Liebster Feind 였다.

세 물건의 공통점은?

다들 잘 아시겠지만 클라우스 킨스키다.

클라우스 킨스키는 꽤나 흉악한 인상을 자랑하며 그의 딸내미가 나스탸샤 킨스키라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영화배우의 조건을 상당히 충족 시키고 있다. 핫.

Cobra Verde와 Aquirre는 둘 다 킨스키가 맡은 역할이 지독하게 찝찝한 최후를 맞는 영화다.
특히 Aquirre의 마지막 장면은 나의 기준에서 볼 때 100점 만점에 99점의 거의 완벽한 엔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멋진 장면이다.
아마존 강을 떠 내려가는 시체와 원숭이로 뒤덮인 얼기 설기 엮인 엉성한 뗏목 위에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한 남자의 모습이라니! 우오…. 생각만 해도 죽음이다.

Cobra Verde의 마지막 장면도 멋지긴 하다. 물론 Aquirre에는 비교하기 어려우나.

바다로 나가기 위해 보트를 끌다가 지쳐 파도에 쓰러지는 킨스키의 모습은 정말 멋지다는 표현 말고는 쓸 만한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우울한 장면들이 멋져 보이는 건 킨스키의 찝찝한 인상에 90% 이상 의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우울하게 똥 폼 잡는 영화는 굉장히 많지만 사람의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멋지다는 생각을 주는 영화는 매우 드문데 위의 두 영화는 그런 드문 예에 속한다.
물론 주연 배우가 제법 그럴싸하게 무게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고 보니 헤어초크의 다큐멘터리를 전부 모은 DVD 세트가 나온 모양이다. 다음 월급이 나오면 지를지 말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겠다.

마지막으로. 위키피디아 만세!

Friday, June 16, 2006

스스로를 진보라 자칭하는 자들의 사고 수준...

내가 특별히 싫어 하는 것 중 하나가 '딱지 붙이기'다.

그럼 딱지 붙이기란 어떤 것인가?

오마이뉴스에 실린 이 기사를 보시라.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두뇌에 탑재하고 있다.

이 기사 중 몇몇 부분을 발췌해 보자.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하며 식민사관 총서인 <조선사> 간행에 관여했고..."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사>는 그냥 사료집이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결코 <조선사>를 결코 읽어 보지 못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읽지도 않고 그 내용을 알고 있으니 신기하고 게다가 '식민사학'으로 분류까지 해 놓으니 읽는 사람이 민망하다.

어떤 대상을 비판하려거든 그 대상에 대해 좀 알고 해야 되는것 아닌가?

"이병도(실증사학파의 대부)가 지식인이자 역사가로서의 지조를 내팽개치고 외세의 간교한 권력과 타협하며 알량한 일신의 안위와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역사가인 백남운(사회경제사학파의 대부)은 옥고를 치렀고, 신채호(민족사학파의 대부)는 망명을 택했기에 더욱 그렇다."

도데체 '민족사학'이 뭐냐? 그게 실체는 있는거냐? 사학이면 사학이지 민족사학은 도데체 뭐람.
마치 아리아 물리학, 아리아 철학을 외치던 나치들을 연상시킨다. 그럼 신채호가 대부로 있는 민족사학파라는건 도데체 뭐냐? 어떤 사람이 민족사학파냐?

사학계가 무슨 조폭이냐?

"실증사학'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으로 위장한 이병도가 사실은 친일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과 같은 가문(우봉 이씨)이었으며, '가문의 수치'를 은폐하기 위해 원광대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적 유물을 가져다가 일방적으로 태워버렸다는 엽기적(?) 사실과도 조우하게 된 것이다."

실증사학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이라? 조선일보식 글쓰기를 오마이뉴스에서 보는게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정말 경멸스럽다.

"이병도가 해방 이후 서울대 사학과(한국사 분야)를 접수한 뒤 주류 역사학계는 이병도 후학들에 의해 장악됐다. 그렇게 '이병도 사관(史觀)'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신채호 같은 인물은 철저히 잊혀진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민족사학이란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쓴 사람은 실제로 저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아는가 궁금하다.

일단 이병도에 식민사학 딱지를 붙이고 들어가는 것 부터 우습지만 한국 사학계가 이병도 사관이 득세하고 있다는건 어떻게 얻은 결론인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최소한 1960년대 부터 현재까지 나온 고-중세사 분야의 박사학위 논문 및 단행본을 모두 검토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면 인정해 주겠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커녕 제대로 된 논문도 몇 편 제대로 안 읽어 봤다고 99% 확신한다.

오마이뉴스가 갈수록 맛이 가는걸 느끼는건 이렇게 증오로 눈먼 멍청이가 쓰는 글을 기사랍시고 올릴때다.

제발 이런 멍청한 글은 올리지 마라. 이러니까 소위 '진보'라는 세력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거다.

Sunday, June 11, 2006

14-15세기 잉글랜드와 기타 몇몇 동네 군대에서 보병의 규모(재탕!)

또 재탕이다.. 헐..

이것 저것 쓰긴 했는데 글의 요지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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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서유럽의 군대하면 기사를 떠올리는게 일반적이지만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의외로 보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부사관의 어원이 되기도 한 Sergens가 대표적인데 12세기 후반 라틴왕국의 기록을 보면 라틴왕국의 각 도시들은 국왕의 소집명령이 떨어지면 총 5,025명의 Sergens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간을 한참 건너서...

14세기의 잉글랜드 군대도 보병의 비중이 꽤 높았던 군대로 보인다.

1314년 배녹번(Bannockburn)전투 당시 잉글랜드군의 병력 구성을 보면 Men at Arms는 2,500명에 보병이 약 15,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년전쟁 당시의 잉글랜드군은 기사를 포함한 기병의 비율이 프랑스군 보다 낮은 편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전쟁이후 잉글랜드가 무장을 잘 갖춘 보병을 많이 확보하려 노력한 것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병종 구성을 보면 그게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1339년 2월의 소집 명부에 기록된 잉글랜드 군대의 병력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Men at Arms / 기마보병(Armati) / 궁수(Archer)]

Yorkshire 200 / 500 / 500
Glouchestershire 63 / 250 / 250
Worcestershire 30 / 120 / 120
Staffordshire 55 / 220 / 220
Shropshire 55 / 220 / 220
Herefordshire 30 / 120 / 120
Oxfordshire 20 / 80 / 80
Berkshire 15 / 60 / 60
Wiltshire 35 / 140 / 140
Devonshire 30 / 120 / 120
Cornwall 25 / 100 / 100
Hampshire 30 / 120 / 120
Somersetshire 35 /160 / 160
Dorsetshire 35 /160 / 160
Sussex 50 / 200 / 200
Surrey 20 / 80 / 80
Kent 35 / 140 / 140
Essex 35 / 160 / 160
Hertfordshire 18 / 70 / 70
Middlesex 10 / 40 / 40
Cambridgeshire 18 / 70 / 70
Huntingdonshire 18 / 70 / 70
Buckinghamshire 20 / 80 / 80
Bedfordshire 20 / 90 / 90
Lancashire 50 / 300 / 300
Norfolk 40 / 160 / 160
Suffolk 25 / 100 / 100
Northumberland 70 / 250 / 250
Westmoreland 25 / 150 / 150
Cumberland 50 / 200 / 200
Lincornshire 80 / 350 / 350
Nottinghamshire 35 / 150 / 150
Derbyshire 35 / 150 / 150
Leicestershire 25 / 120 / 120
Warwickshire 30 / 120 / 120
Northamptonshire 35 / 160 / 160
Rutland 10 / 40 / 40
총 계 : 1,407 / 5,600 / 5,600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소집 명부였던 것 같다.

백년전쟁 초기의 전투를 보면 아직 Men at Arms의 숫자가 잉글랜드 내에서 벌인 전투 보다는 많은 편이다. 아마도 기사가 많은 프랑스와 전쟁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백년 전쟁 초기의 깔레 포위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Men at Arms만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1359년에 에드워드 3세가 군대를 소집했을 때의 기록에도 Men at Arms의 숫자는 꽤 많은데 기사 700명을 포함해서 3,000명에 달한다.

그런데 왜 14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갑자기 Men at Arms의 비율이 급격히 떨어졌는가? 많은 영국 중세사가들은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잉글랜드 국왕들이 비용을 많이 잡아 먹는 Men at Arms를 많이 유지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1322년 당시의 기록을 보면 보병에게 지급되는 수당은 다음과 같았다.

중무장 보병 : 일 4 펜스
경무장 보병 : 일 2 펜스

그리고 14세기 후반 말을 가진 궁수들의 일당은 일 6펜스 였다.

그렇다면 Men at Arms는 얼마나 들어갔을까? 1324년 당시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William de Norwell의 기사들에게 지급된 비용

Men at Arms : 일당 2 실링

1 실링이 12 펜스니까 일반 Men at Arms는 중무장 보병에 비해 일당이 여섯배, 말을 가진 궁수에 비해 네 배는는 더 됐다는 이야기다. 백년 전쟁 당시의 여러 전투들을 본다면 비용대 효과면서 궁수가 상당히 쓸만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4세기 후반부터 Men at Arms 대 궁수의 비율은 1 대 3 정도가 되기 시작했다. Andrew Ayton은 1380~90년대에 잉글랜드 군대에서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시기 프랑스 군대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15세기로 들어가면서 궁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커졌다. Anne Curry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15세기 전반기 프랑스로 파병된 잉글랜드 군대의 병종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428년 : Men at Arms 444명, 궁수 2250명
1437년 : Men at Arms 299명, 궁수 1777명
1441년 : Men at Arms 801명, 궁수 2997명
1443년 : Men at Arms 600명, 궁수 3949명
1449년 : Men at Arms 55명, 궁수 508명
1450년 : Men at Arms 255명, 궁수 2380명

보통 1 대 5에서 심한 경우는 1 대 9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15세기에 들어가면 보병 비율의 증가는 잉글랜드 만의 것이 아니라 서유럽 전체에서 보편화 되었다. 초보적인 화기의 등장과 보병 전술의 발달로 서유럽 각국에서 보병이 차지하는 비중이 기병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카스티야 왕국이 15세기 말 재정복 전쟁을 벌일 당시 병력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1485년 기병 11,000명 보병 25,000명 계 36,000명
1489년 기병 13,000명 보병 40,000명 계 53,000명

16세기로 넘어가면 사실상 기병이 보조적인 위치로 확실하게 굴러 떨어지고 보병이 전장의 주역이 된다. 물론 그 싹은 몇 백년 전 부터 이미 나타난 셈 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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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래의 책들을 대충 베껴서 정리한 것이다.

Anne Curry and Michael Hugh(ed), Arms, Armies and Fortifications in the Hundred Years War.
John France, Western Warfare in the Age of the Crusades 1000~1300
J. R. Hale, War and Society in Renaissance Europe 1450~1620
Maurice Keen(ed), Medieval Warfear : A History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Middle Ages
Michael Prestwich, Armies and Warfare in the Middle Ages : The English Experience

Thursday, June 8, 2006

이건 뭔가 이상하다.

北, 김영남 모자 상봉 마련

도데체 이게 무슨일이지?

"우리 측은 동포애와 인도주의로부터 6.15공동선언 발표 6돌을 계기로 금강산에서 진행되는 흩어진 가족.친척 특별상봉 때 김영남과 귀측에 있는 어머니의 상봉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 부분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북한애들이 미친건가 아니면 내가 수구 꼴통인겐가?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다.

Sunday, June 4, 2006

탬플릿을 약간 수정

나는 기계에 깡통이다 보니 컴퓨터도 겨우 컴맹을 면한 수준에 불과하다.

전에 쓰던 블로그들은 비교적 사용하기가 쉬운 편 이었는데 블로거는 약간 사용하는게 복잡해 아직까지 기본 탬플릿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랄라라님의 블로그에 올라온 minima 개조 탬플릿 을 보게 됐다.

이걸로 탬플릿을 바꿔 보니 이전 보다는 댓글 달기같은 것들이 훨씬 편해졌다.

블로거는 이래서 재미가 쏠쏠한 것 같다.

나도 시간나면 탬플릿 개조하는 걸 궁리해 봐야 겠다.

짝패 - 창의적이진 않아도 재미있었다.

영화를 본지 일주일이 지나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한국적 액션이라는건 개싸움, 또는 막싸움으로 요약 될 수 있을 것이다.
와이어 달고 날아다니는건 홍콩쪽 전매특허라 그런지 우리나라에서 줄달고 쇼를 부린 액션물들은 하나같이 저질로 기억된다.(대표적인 것이라면 무X검, 비X무 등이 있겠다.)
총질은 딱히 어느 동네의 전매특허라 하긴 뭐 하지만 아무래도 국산 영화들은 뭔가 어색해 보인다.(대표적인 것 이라면 쉬리…)
그러나. 개싸움은 확실히 대한민국에 원천기술(…)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100% 확신은 못 함)

짝패는 보기 전부터 여러 매체에서 호평이 있었는지라 큰 기대를 하고 봤다.

그러나 멋진 장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의 2대 다수 격투장면이나 영화 마지막의 요정에서 벌이는 결투는 예상 보다 시시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2대 다수 격투에서 주인공들이 상대방을 싹 쓸어 버릴 것이라고 기대한 내가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길거리 격투의 상대가 고등학생들로 나오는데 이 점은 꽤 재미있었다.
불량 고삐리들과의 격투라.
그러나 이 장면에서도 불량 여고생들은 둘러싸고 폼만 잡을 뿐 별다른 액션이 없었다. 대 실망.

영화 후반부에서도 하얀옷 입은 4인조의 액션이 기대이하였다. 특히 얼굴이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는 다리만 몇번 찢다가 쓰러져 버리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그러나 공들인 만큼 볼만한 영화였던 것은 사실이고 꽤 재미있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특별히 볼 만한 영화도 없던 차에 창의적이진 않아도 뚝심이 묻어 나오는 영화가 나와 반갑기 그지 없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도 생각보다 연기를 잘 했던 것 같다. 물론 가끔 관객들을 대상으로 이야기 할 때도 말을 재미있게 해서 상당히 유쾌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정도로 웃길 줄이야.